2016-08-30

한국 진보기독교의 역사와 현주소 - 오마이뉴스

한국 진보기독교의 역사와 현주소 - 오마이뉴스
한국 진보기독교의 역사와 현주소

오늘날 한국교회는 웬만한 지성과 상식이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봐도 뭔가 잘못되어있다. "장로 출신 이명박 대통령도 교회를 이용할 뿐이지,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정치나 정책을 펴는 사람이 아니"라는 지적도 정확한 지적이고 한국 교회가 신도수를 믿고 권력 속에 쏙 들어와 있다는 비판도 올바른 비판이다. 지금 내가 잘못된 곳에 서있다는 생각이 들면 인간은 자기가 걸어온 길을 차분히 되돌아 봐야한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다가 이런 곳에 와있는지 자문하고 문제의식을 느낄 때까지는 아직 늦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혈색이 이상한 환자가 진찰받기를 거부하고 자기합리화와 변명을 일삼으면 치료될 가망이 없다. 나는 한국기독교인들이 그나마 이 병으로부터 치료될 가망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한국 기독교사를 살펴볼 것이다. 과거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현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가 조금은 보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한때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대명사였던 한국 진보적 기독교인들 중 지금은 정반대 편에서 권력에 안주하며 극우수구세력의 대변자로 자리바꿈한 자들도 있다. 한국기독교는 외양적 규모와 정치․사회적 영향 면에 있어서(그 영향이 악영향인 경우가 많지만) 타종교나 어느 집단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민주사회에서 대통령도 신앙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에 감히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사회는 조화와 균형 그리고 서로간의 견제가 전제 되지 않고는 제대로 유지되기가 어렵다. 그래서 오늘 한국에 막강한 슈퍼파워로 등장한 이 땅의 교회가 과연 다원적이어야 할 한국사회에 제대로 다른 종교 혹은 집단들과 조화와 균형을 유지해가며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지 진단해 볼 당위성이 있다. 그리고 그 올바른 진단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기독교인들이 지나온 발자취를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 
역사를 움직이는 세력은 문자 그대로 걸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보(進步)'세력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는 보수적 존재다. 자기가 없는 상황에서, 즉 자기를 보전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금수강산, 삼라만상, 온 우주의 존재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도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그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럼 그렇게 한 생명의 가치를 온 우주보다 소중하다고 선언한 예수의 삶과 죽음은 '안전제일주의자' '몸보신자' 이었나? 아니다! 그는 인간의 자기 보존적, 보수적 본능을 극복하고 인류를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가 위해 우주보다 소중하다는 자기생명까지 바친 '진보주의자'이었다. 그리고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선포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 부자청년에게 "가서 네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 가난 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그리고 너는 나를 따라와라. 그러면 네가 영생을 얻을 것이다"고 말한다.
"재산을 다 팔아 가난 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이 말은 즉 이 양육강식의 세계에서 "능력껏 파이를 키우라"혹은 "자유경쟁을 통해 잘 먹고 잘 살아라" 가 아닌 "부의 재분배"를 역설한 것이다. 이렇게 성장보다는 분배와 평등의 가치관을 주장한 예수는 그래서 우파 보다는 좌파에 가깝다. 그래서 이글에서도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한국 기독교계 진보의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그럼으로써 오늘 한국 기독교회의 반성할 점을 성찰하고 앞으로 추구해야 할 과제를 모색해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1.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민족독립과 민주화를 위한 노력과 기여
개신교는 1880년대, 포함외교를 앞세운 외국선교사 주도로 전파된 다른 나라들의 경우와는 달리 구한말사회의 주류보다는 평등주의와 신문명에 목말라하는 하급 층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즉 한국 개신교회는 첫 출발부터 기득권자보다는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를 상대적으로 박탈당한 억눌려있던 층에 더 매력적 새 종교로 다가왔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가 가톨릭이나 조선조의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유가세력과는 달리 첫 걸음부터 진보적 성향이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을 위한 사회복지가 전무한다시피 한 구한말 사회에서 개신교는 직접 선교보다는 교육, 의료, 구호사업 등을 통해 민중에게 깊이 파고들면서 뿌리가 든든한 기반을 쌓아나갔다. 현상유지 보다는 남존여비의 경직된 사회구조 속에 갇혀있던 여성들에게도 한글성경보급을 통해 글을 깨우쳐 주는 등 역동적 사회변화를 이끌어 나가며 개혁을 추구해나갔다. 
이렇게 역동적이던 초창기 교회는 그래서 그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한국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기독교가 구한말 사회개혁에 미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기독교적 인간관의 성립이다. 이것은 곧 근대 시민사회 성립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 할 인간평등의 문제다. 기독교가 수용되어 바로 이런 인간관을 한국인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게 되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기독교 인간관은 인간 존엄성과 천부적 인권을 담보해주었고 모든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교회에서는 그동안 인간 취급을 못 받고 무시당하던 백정과 종도 양반들과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이것은 평등권이 구체적으로 현실화되는 계기가 된다.
1911년 그동안 온갖 사회적 멸시의 대상이었던 백정 출신 박성춘이 승동교회에서 양반출신 후보를 누르고 장로로 선출된 예는 당시로서는 천지가 개벽할 사건이었다. 후에 박성춘이 백정 차별정책 탄원 운동을 하게 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사건은 마치 미국 노예제폐지운동이나 여성참정권운동처럼 사회변화의 선봉에 개신교가 앞장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오늘날 극우파가 강조하는 약육강식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자유 시장의 가치보다는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좌파의 평등에 중점을 두는 정신이 기독교가 추구하는 사회관, 인간관과 더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1) 일제강점기 민족독립운동에 앞장선 기독교
최소한 러일전쟁(1905) 후부터 3.1운동(1919) 전까지 일본제국주의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 한국인들이 그나마 쇠파리 같은 일본의 성가신 간섭을 덜 받는 곳이 한국에 있었다면 그것은 교회였다. 아시아에서는 청나라와 러시아를 제치고 천하무적의 위세를 누리는 일본이었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태평양 건너 미국과는 충돌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일본의 속내였다. 그래서 '미국수입품' 기독교에게는 손대기를 꺼려했고 자연스레 한국기독교인들도 교회 내에서는 그나마 일본인들의 지시를 받지 않고 자기만의 '자주권'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축적된 한국인들의 지도력은 독립협회의 운동 등을 통해 발현된다. 독립협회에 관계된 인물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윤치호, 서재필, 남궁억, 이상재, 주시경, 이승만, 배재학당 학생회 등 기독교인들이거나 뒷날 기독교인이 되는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독교인들의 항일운동은 민족계몽운동 뿐 아니라 또한 무력행사에서도 나타난다. 1907년 박영효 환영식에서 이등박문을 살해하려다 실패하자 자결한 정재홍은 기독교인이었다. 친일파 스티븐스(D. W. Stevens)를 1908년 미국에서 암살했던 장인환도 기독교인, 매국노 이완용을 암살하려던 이재명도 기독교인 이었다. 1909년 가톨릭신자 안중근이 이등박문 살해거사를 성공시키는데 뜻을 같이했던 우덕순(1876-1950)도 기독교도였다. 이외에도 기독교인들인 강우규, 편강열, 김상옥 등도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다. 이렇듯 문무를 가리지 않고 기독교인들은 일제에 항거한다.
1910년 당시 한국에는 교회만이 강력한 전국적 결속력과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일본은 문무를 동원해서 저항하는 기독교인들을 억누르려고 갖은 악랄한 수법을 부렸다. 그 수법중의 한 예가 '105인사건'으로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일제는 기독교인 탄압을 본격화한다. 일본총독살해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조작해 기독교지도자들을 체포, 잔인한 고문 끝에 전덕기, 김근영, 정희순, 한필호 등이 사망하고 최광옥은 병사했다.
일제의 경제적 예속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국산품애용, 농촌, 교육, 사회운동 등은 조만식(1883-1950), 안창호(1878-1938)를 비롯한 기독교 인사들이 이끌었고 추진과정에서도 기독교 기관들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1915년 한인사회당을 창건하고 뒤이어 고려공산당으로 발전시킨 이동휘(1873-1935)도 한 때 기독교 전도사로서 맹활약 했었고, 심지어 김일성(1912-1994)의 가계도 기독교 배경을 갖고 있었다. 특별히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1882-1931)를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일제강점기 한국 공산주의운동조차 기독교와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절반에 가까운 16인이 기독교인들이었고 이들이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일제는 기독교인들을 분명한 3.1운동의 '주동자'로 간주했다. 일제하에서의 한국기독교인의 사회참여는 3.1운동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할 수 있다. 일본경찰의 통계에 따르더라도 3.1운동참가로 검거된 한국인들의 종교구성을 보면 3,373명이 기독교인 2,283명이 천도교인 346명은 유교인 229명은 불교인 이었다. 일본경찰에 의해 구금된 한국인들 중에서 21.89%가 기독교인으로(장로교 15.91%, 감리교 4.83%) 다른 종교인들과 비교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던 것도 기독교인들의 열렬한 사회참여를 반영한다. 그래서 일제는 3.1 운동이 근본적으로 기독교인에 의해 주도 확산되었다고 간주했던 것이다.

2) 해방공간의 역동적 기독교
해방공간에서 조만식, 함석헌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은 북한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인사들이었다, 평양은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할 만큼 기독교는 북한에서 크게 부흥하였다. 더욱이 기독교가 일제하에서 민족독립과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해방이후 북한에서의 기독교 위상은 막강했다. 신자기반이 북한지역에 집중되어 있던 기독교는 해방과 함께 가장 신속하게 정치적인 대응을 보였다. 해방직후 결성된 초기 자생조직 가운데 함경도를 제외한 평남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조만식), 황해도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김응순), 평북자치위원회(위원장 이유필, 문교부장 함석헌)는 모두 유력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 기독교인들은 1945년 8월 17일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남건준으로 집결했고, 소련군 진주 후 북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와 합작하여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들 기독교세력은 북한공산당과 갈등을 겪게 되면서 그해 1945년 11월에는 독자적으로 '조선민주당'을 설립하여 공산당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만약 소련군이 무력으로 조선민주당을 억압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주당은 북한의 정치주도세력으로 등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만식, 함석헌 등 기독교 인사들은 소련군을 뒤에 업은 김일성 세력에 의해 숙청되고 강양욱, 최용건(1900-1976) 등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한다. 그럼으로써 공산주의에 협력을 거부한 기독교인들은 숙청, 축출당하거나 월남의 길을 택한다.
남한 역시 해방직후 좌우중도를 막론하고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김구, 김규식, 이승만, 여운형, 송진우 등은 모두가 기독교의 세례를 압도적으로 받은 인사들이었다. 특히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고 김구는 남북연석회담에 참석하여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막아보려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실패하고 만다.

3) 자유 없이 자유당정권아래서 : 조봉암과 함석헌
조봉암(1898-1959)과 함석헌(1901-1989)은 6.25전쟁 후 냉전 하에서 평화통일을 옹호한 1950년대 후반의 대표적 지성인들이었다. 조봉암은 진보정치인이었고 함석헌은 종교사상가였다. 둘은 매카시즘이 날뛰는 비슷한 시기에, 그 당시로서는 금기였던 남북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
1956년 조봉암은 "대중 본위의 경제체제 확립과 평화통일론"을 취지로 한국최초의 정책정당인 진보당을 창당한다. 조봉암은 유년시절 모태신앙 수준의 기독교 영향에서 자라났고 1915년에는 YMCA에서 1년간 수학하기도 했다. 조봉암이 사회주의에 물들고는 교회를 잊어버렸다고 이야기하나 1932-38년까지 신의주에서 6년 옥고생활을 하면서 신구약 성경을 독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조봉암은 이승만의 '진보당사건' 조작으로 1959년 7월 31일 억울하게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하지만 그가 뿌린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씨앗은 1950년대 기독교계 진보정치인의 유일 한 유산이었다.
1956년 1월 함석헌은 『사상계』에「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를 쓰는데 그 일부는 이렇다. "교회당 탑이 삼대같이 자꾸만 일어서는 것은 반드시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궁핍에 우는 농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들의 가슴 속에 양심의 수준을 높여주어야 정말 종교인데 이 교회는 그와는 반대이다. 교회당 탑이 하나 일어설 때 민중의 양심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한 치 깊어간다. 그렇기에 '예수 믿으시오' 하면 '예수도 돈 있어야 믿겠습니다.' 한다. 이것은 악한 자의 말일까? 하나님의 음성 아닐까?...예수가 오늘 오신다면 그 성당, 예배당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하지 않을까?" 이렇게 함석헌은 장로 대통령 이승만의 2중대로 전락한 한국기독교인들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그는 1958년 또『사상계』8월호에「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란 글을 발표한다. 이글에서도 함석헌은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데, "내세우는 것은 북진통일의 구호뿐이요, 나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니. 통일하는 것은 칼밖에 모르니…칼을 가지고는 나라는 못 잡을 것이다" 며 자유당의 북진통일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는 20일간 수감되어 매를 맞는 등 갖은 곤욕을 치른다. 이 사건은 1950년대 기독교사상가가 기독교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승만 정권에 대해 한 거의 유일한 비판일 것이다.

4) 1970-80년대
70-80년대 기독교진보인사들의 사회참여는 실로 눈여겨 볼만하다. 당시 한국의 진보기독교인들인 소위 '인권파'는 보수기독교인들인 '성령파'에 비해 그 숫자는 월등히 작았지만 이들은 한국 인권․민주․평화통일운동의 중추적 핵심세력이었다. 기독자교수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진보기독교 지성인들이 이러한 운동에 한축을 이루었다면 또 다른 축은 한국교회협의회(KNCC)의 진보목사들이 이루었다.

(1) 1976년 3월 1일 '명동사건'
'명동사건'이라 불리는 76년의 '3.1민주구국선언'은 박정권하에서 긴급조치9호로 얼어붙은 민주세력의 침묵을 일시에 깨뜨리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주도한 인사들은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서남동, 이문영, 이우정, 함석헌, 김대중, 윤보선, 윤반웅, 정일형으로 전부다 기독교인 들이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진보적 신․구교인들은 유신체제에 대해 정면도전의 불꽃을 다시 지피기 시작하였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이 사건을 이렇게 보도했다 :

"서울의 반체제인사들 박대통령의 사임요구 - 남한 재야지도자들은 선언문을 발표해 박정권이 긴급조치를 철폐할 것과 동시에 1972년 유신헌법으로 인해 제약받는 모든 정치적 자유를 회복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선언문은 12명의 주요 정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서명․배포되었다. 이선언문에서 반체제인사들은 박정희대통령을 독재자로 표현했고 대통령직에서 책임을 지고 사임할 것을 요구했다. 이선언문에 서명한 주요 인사들은 전대통령 윤보선, 1971년 대통령선거후보자 김대중, 인권운동지도자 함석헌등이다."

이렇게 3.1사건을 기점으로 신구교인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3월 11일부터는 서울의 여러 대학교에서 '민주구국선언' 유인물이 배포되고 데모가 일어났다, 3월 12일에는 3.1사건 구속자 가족들이 '구속자가족협의회'를 조직, 재판방청과 시위, 기도회를 통하여 지원운동을 국내외로 확산시켰다. 4월에는 지방 대학교에서 4.19 기념식이 거행되고 선언문이 배포되는 등 전국적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76년 말부터는 각 대학으로 시위가 확산되면서 그동안 얼어붙었던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열기가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가히 3.1구국선언은 1970년대 중반 꺼져가던 민주화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국내외적으로 단단히 하였다. 진보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된 이 선언으로 활기를 잃고 침체되어있던 민주화운동은 다시 활력과 기운을 띄게 되었던 것이다.

(2)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와 한국교회협의회(KNCC: Korea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던 현재 노년의 한 교수는 내게, "그때는 기독자교수협의회 회원이 아니면 기도 못 폈어!"라고 당시 분위기를 기탄없이 전했다. 위의 3.1구국선언도 기독자교수회가 산모노릇을 했고 일반시민들의 인권운동은 진보적 기독교협의체인 KNCC가 앞장섰다.
1960-70년대, 기독자교수회는 한국사회의 부조리와 현실을 해석하고 기독자교수의 역할을 역사적 측면과 사회 참여적인 면에서 보여줬다. 1960년대부터 농촌의 피폐화로 무작정 상경에 따른 사회문제, 도시빈민과 판자촌 철거민 문제 등에 기독자교수회는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비판하며 사회참여의 선봉에 선다. 기독자교수회는 산업선교, 도시빈민선교를 성서적으로 해석하고, 이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부여와 이념화 작업을 하며 진보기독교운동의 확산에 기여한다.
한국 기독교계 진보세력은, 한국전체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1960-80년대를 거치며, 여러 중요한 시국사건들의 중심에 서있었다. 아울러 이무렵 민주화운동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기독자교수회 초대회장인 서남동(1918-1984)과 회원 안병무(1922-1996)가 제창한 민중신학이었고 급기야 민중신학은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으로 서구에 소개되기도 한다. 특별히 1990년 독일신학자 호프만-리히터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민중신학으로서의 안병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한다.
KNCC는 1970-80년대 인권․민주화․노동․통일운동 등 다양한 삶의 실천을 통한 신앙 고백적 행동을 펼쳤다. 실로 KNCC는 당시 인권과 민주화운동을 이끄는 증기기관차와 같았다. 고노무현 대통령도 "인권과 정의에 눈뜨게 하고 민주주의 운동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 게 KNCC였다"는 감회를 밝히기도 할 정도였다. 아마도 레드콤플렉스와 매카시즘이 터질듯 팽배한 분단된 남한사회에서 마치 "뜨거운 얼음" 이라는 모순된 표현처럼, "유신론자인 기독교인은 유물론자인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단순한 명제가 KNCC를 위한 보호막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 한국 기독교계 진보인사들은 남북 6.15 공동선언의 초안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의 평화통일에 대한 한국기독교선언(88선언)"과 문익환 목사 방북 을 이루어 내는 등, 단기적으로는 공안정국을 불러오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남북 간 냉전을 철폐하고 화해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평화통일 운동을 주도해나갔다. 이렇듯 한국 기독교계 진보인사들은 일제강점기부터 1987년 6월 항쟁까지 인권․민주화․평화통일운동 등으로 한반도의 평화, 인권신장, 민주화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2. 시대변화에 따른 진보적 기독교 운동의 현실적 난관과 문제점
이제까지는 기독교계 진보인사들이 한국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위하여 어떤 성과들을 이루었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해가 밝을수록 그림자가 짙듯이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 이장에서는 1980년대까지 진보세력으로 대표되던 이 땅의 몇몇 기독교 인사들이 오늘날 어떻게 변모, 변신되어 갔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았듯이 그 진보적 기독교계 인사들의 변모와 변신도 일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모든 나무는 뿌리가 있듯이 오늘 문제의 뿌리는 어제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말은 싫던 좋던 인간은 역사적 존재라는 말이다. 그래서 오늘 한국기독교인들의 한계와 문제점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 특히 3.1운동 이후부터 오늘까지 주류 한국기독교인들이 걸어온 모습을 비판적으로 성찰함으로서 향후 한국교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를 모색해 보기로 한다.
위에서 보았듯이 19세기 후반 개신교가 처음 한반도에 소개되었을 때 개신교 신앙은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개신교에 대한 핍박이 가혹해짐에 따라 한국교회에 문제점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3.1운동의 대외적 실패와 관련이 있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3.1 운동 뒤에 일제는 소위 '문화정치'로 서서히 식민지 한국인들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이에 상응하여 보수진영 기독교 인사들은 일제통치를 벗어나는 길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일제식민통치전략에 적극 타협과 협조하는 길을 택한다.
이때부터 한국교회는 양극화로 분열되는 데 한쪽은 기독교계 진보인사들로 더욱 적극적으로 민족독립을 강조하고 다른 쪽은 보수파로 이들은 오직 '종교적'인 일에만 집중하며 정치적으로는 불간섭주의인 탈정치화 노선을 택한다. 그들은 가급적 기독교인들과 한국인들이 일제에 대항하기 보다는 순응하고 협조하도록 이끈다. 결국 기독교계 진보인사들은 이러한 우익 기독교인들을 서구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꼭두각시라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우익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팽창주의 정책을 옹호하는데, 그들은 그래야만 한국교회가 일제의 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정당화했다. 그때부터 기독교계 진보인사들 중엔 독립운동을 위해 차라리 해외로 망명을 가거나 지하로 잠적해 교육운동에 힘쓰는 세력이 생기기도 한다. 일제는 한편으로는 우익 기독교계를 지지하는듯하면서 기독교계 진보인사들의 활동도 고의적으로 철저하게 탄압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정교하게 고단수를 쓰는 일제의 좌우분열정책은 결론적으로 대성공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계 인사들의 좌우익분열은 불가피하게 심화되어 간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평등의 가치와 사회정의에 무게를 두는 '좌파적' 기독교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가치관과 '물량주의'를 앞세우는 '우파적' 기독교에 의해 향후 한국사회에서 '빨갱이'로 배척당하고 아류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첫 단추가 이때에 꿰어진다는 것이다.

1) 가자, 사회주의로! : 이동휘, 여운형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불의한 권력에 정의감으로 대항해야 마땅할 기독교가 일제와 타협하고 굴종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됨에 따라 한국교회에 문제의식을 느끼던 진보기독교 인사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혁명이나 무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1920년 이후 한국 주류교회는 기독교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포용하기는커녕 더욱 배척한다. 조선민중이 처한 비참한 역사적 현실엔 눈을 감고 천상의 하늘나라만 바라봄으로써 일제의 충실한 주구 노릇을 한다. 이에 마침내 전도사 출신의 이동휘와 평양신학교 출신 여운형 등은 교회를 떠나 무력이나 사회주의를 통해 독립운동을 이끈다.

(1) 이동휘(1873-1935)와 고려공산당
1905년 을사늑약 당시만 해도 이동휘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기독교야말로 나라를 살리는 종교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는 "기독교가 아니면, 상애지심(相愛之心)이 없고, 기독교가 아니면 애국지심(愛國之心)이 없으며, 기독교가 아니면 독립지심(獨立之心)이 없다. 자수자강(自修自强)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독립단합(獨立團合)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다" 고 선포할 정도였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강렬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3년 뒤인 1908년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의 그리어슨(Robert Grierson)목사 밑에 그는 전도사가 되었고 왕성한 선교활동을 벌인다. 특별히 이동휘는 1908년 8월부터 1909년 5월까지 함경도 전 지역을 돌며 "무너져 가는 조국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으라! 예배당을 세워라. 삼천리강산에 교회와 학교를 하나씩 세워 3천개의 교회와 학교가 세워지는 날이 독립이 되는 날이다"라고 역설하는 등 열성적 전도활동을 벌인다.
1911년 '105인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후 그는 북간도로 망명한다. 그리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접한 이동휘는 볼셰비키와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을 주장한다. 무력투쟁이 아니고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최초 한인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무장투쟁을 벌인다. 그는 또한 레닌정권의 힘을 빌려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첫 포석으로 1920년 봄 상해에서 공산주의자 그룹(1921년에 고려공산당으로 개칭)을 결성하기도 한다.
1935년 이국땅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병사하기까지 그는 대한독립의 꿈을 위해 삶을 불태웠다. 그러나 레드콤플렉스가 팽배한 남한사회에서 그의 업적은 과소평가되거나 왜곡 폄하되어 왔다. 분단과 냉전으로 인해 이동휘와 같은 좌익혁명가는 우익이 창궐한 남한사회에서 언급조차 하기 힘든 인물로 평가절하 되어왔던 것이다. 이것이 곧 기독교의 사회정의와 평등정신을 상실한 한국교회가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점이며 편협하고 배타적인 한국기독교인들이 극복해야 할 문제와 한계점이다.

(2) 여운형(1886~1947)과 근로인민당
미국과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족숙(族叔) 여병현(1867-?)의 영향으로 여운형은 1900년 감리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이무렵 서양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에 다니는 인사들을 만나 교제하면서 자신도 기독교인이 되기에 이른다. 여운형은 1906년 양평군에 교회를 세웠는데, 교회 설립 후 문중들을 전도하여 잇달아 기독교인이 되게 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이후 예배당과 학교가 세워지며, 그는 힘써 전도활동을 한다. 여운형은 평양신학교에서도 공부하였고 1907년부터 1913년까지 서울 승동교회에서 전도사로도 일했다. 그가 전도사로 일하던 중인 1911년 백정 출신 박성춘이 이교회에서 장로로 선출된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교회에서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에 접하면서 개혁사상을 갖게 된 여운형은 집안의 노비들을 스스로 해방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젊은 시절부터 그는 기독교 신앙에 열심이면서 동시에 강한 평등의식과 사회정의 사상을 갖고 있었다.
3.1운동 후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그는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고 그 다음해인 1920년에는 이동휘가 만든 한인공산당에 가입한다. 해방 후인 1946년에는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고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1947년 암살됨으로써 한국은 한동안 개혁적인 중도좌파가 설자리를 잃는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한국현대사에서 이동휘와 여운형의 패배와 기독교의 좌파적 요소에 대한 배격으로 결국 한국기독교는 우편향의 반신불수 절름발이로 전락한다. 그 후 한국에는 3종류의 기독교집단만 남는데 첫째 보수기독교(Fundamental Christians), 둘째 더욱 보수기독교(More Fundamental Christians), 셋째 가장 보수기독교(Most Fundamental Christians)다. 새는 좌우날개로 날 수가 있는데 지극히 우편향인 한국교회는 오늘날 좌파기독교 인사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수구우파 기득권 세력, 즉 예수의 정신에서 가장 먼, 약자들이 아닌 강자들을 위한 대변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2) 자본가의 대변자로 : 한민당, 친일파 그리고 친미파
기독교계 진보인사들인 이동휘나 여운형의 몰락과는 반대로 자본주의 기독교계 수구세력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해방공간에 이르러 그 전성시대를 누린다. 이 기독교수구세력들 입장에서는 기독교국가임을 자랑하는 미국이 군정을 펴고 동시에 '철저한'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이승만이 집권함으로써 일제하의 수치스런 과거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보다는 철저히 과거를 부정하고 묻어버리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한반도 분단 상황은 과거 친일파들을 청산하기 보다는 오히려 반공의 기치아래 남한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하도록 만든다. 그런 해방공간의 수구기독교인들은 외세 앞에 민족주의보다는 친미, 친일을 앞세우는 사대주의 원조세력으로 등장한다.
해방 후 북한에 들어선 공산정권은 지주, 자본가, 친일파들의 땅과 재산을 빼앗아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한의사 아들 함석헌도 부친이 물려준 땅을 갖고 있었던 연유로 재산을 몰수당하였을 정도였다. 반면 해방 후 남한은 북한보다 훨씬 보수적인 사회였다. 남한 수구세력도 민주주의에는 별 관심 없이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당시 남한은 여전히 준봉건사회에 가까웠고, 조선시대 이래 한반도의 영향력 있는 지주들은 거의 남한에 집결되어 있었다. 서울은 조선시대를 통해 보수화된 유교의 중심지 이었을 뿐 아니라, 당파싸움과 군력추구의 각축장이었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제와 가깝게 지내던 지주들 중엔 해방 후에도 필요에 따라 친일파나 친미파 행세를 하며 미국, 일본과 부닥치지 않고 가까이 지내려고 하는 세력이 팽배했다. 남한 지주들이 일제식민지정권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지만, 어떤 면에서 일제강점기를 통해 그들은 일제에 기생해 동포들을 짜먹거나 자기들의 영향력을 넓힐 수 있었다. 아니면 최소한 친일행각을 통해서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와 개인적 이득을 차릴 수 있었다.
1945년 하지장군을 비롯한 미군정도 남한에 들어오기 전, 한국역사, 언어, 문화 등 한국문제에 대해 전혀 사전지식이 없었다. 미군정 요원 중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는 것이 또한 놀라운 사실이다. 그러니 당연히 한국인 중에서 영어 몇 마디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친일파이건 매국노이건 미군정에겐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영어는 전지전능한 "한국의 국교"로 부상했고 한국인들은 도덕성이나 애국심보다는"영어만 잘하면(힘 있는 미국인에게 붙어서)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기능주의적 몰가치관의 처세술을 신속하게 익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몰가치의 선봉에 선 것이 기독교인이 많은 수구우익집단 한민당 이었고 또 이 한민당에는 친일에 앞장선 사람들도 많았다. 장로 이승만, 그의 지지기반세력인 한민당, 한국교회, 친일파, 친미파 이들은 모두 똘똘 뭉쳐 남한에 '반공'이라는 '제2의 국교'를 설립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가난한자, 무산계급의 친구가 되어야 할 한국의 주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자본가, 부자, 수구우익, 사대주의 집단의 대변자"로 전락하여 버렸다.
자유당정권은 대통령이 장로, 국회의장도 권사였다. 게다가 장관과 국회의원의 기독교인 비율이 제일 높았다. 당시 국회의원, 고위관료 중 기독교인의 비율이 각각 21%, 38%였다는 수치를 보면 이승만정권의 부정부패에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로 자유당정권은 부정부패를 강물처럼 넘치게 했고 정치깡패를 동원한 폭력정치는 극치를 이루어 결국 4.19를 불러들였다.
당시 주류교회는 자유당정부의 부정부패를 견제하고 비판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의한 정권을 옹호하고 선거 때는 지원유세까지 함으로써 부끄럽게 한국사의 무대를 장식했다.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들은 가난한자, 소외된 자, 눌린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빼앗긴 권리와 존엄성을 위해 말하고 일어서야한다. 부자와 기득권자, 권력자의 편에 서서 가진 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역설하는 종교인, 기독교인은 거짓예언자이고 사기꾼이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도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병자 등 사회적 약자들 편에만 섰다. 그는 소수 특권층의 횡포와 독점에 맞서 다수 민초를 위해 싸웠다. 예수는 거룩한 집이라는 성전에 들어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채찍으로 내어 쫓고 돈 바꾸는 자(독점세력)들의 책상과 비둘기를 폭리로 판매 하는자(기득권자)들의 의자를 완력으로 둘러엎었다. 그리고 예수는 "너희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이 말은 기독교의 이름을 파는 기득권자와 독점세력들은 강도와 똑 같다는 말이다. 권력의 불의와 부패를 거침없이 공격하던 성전숙청 사건 직후 기득권자들이 예수를 "없애 버릴 방도"를 찾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어느 시대나 개혁세력에 대한 부패한 기득권세력의 반응은 놀랄 만치 똑같다. 나누는 삶(사회복지)과 사회정의를 목숨을 바쳐 외쳤던 예수는 그래서 수구우파 라기 보다는 진보좌파에 가까웠다. 

3) 부패한 기독교 그리고 부자를 위한 정권
불의한 기독교정권과 부패한 기독교 인사들과의 연합작전이 자유당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오늘 한국의 비극이다. 수구우파 기득권세력을 대변하는 기독교 인사들은 2007년 대선에서 사회복지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탈세와 비리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장로 후보를 열열이 지원한다. 이 중에 눈여겨 볼만 한 인물은 김진홍(1941- )이다. 당시 김진홍은 뉴라이트 상임이사 신분으로 선거법이 금지한 이명박 대선캠프의 외곽 사조직 역할을 함으로써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공신역할을 한다. 게다가 당시 "이명박 후보가 김진홍 목사에게 거액을 지원했다" 또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이명박 후보의 위장선거사무소였다"는 등 김씨와 이씨에 관련된 여러 설이 나돌았다. 이러한 비리 설에 대해 심지어 2007년 8월 18일 뉴라이트 측에서조차 이명박으로부터 김진홍이 거액을 받았다고 비판하는 "뉴라이트 승리를 위한 100인 혈서 결의문" 까지도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놓고 내 관심은 김씨가 이씨에게 얼마를 받았는가에 있지 않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김진홍의 변신을 통해서 과거 한국 기독교계 좌파성향이 강했던 한 진보인사가 어떻게 수구우파 기득권세력의 대변자로 전락해 갔는가를 돌아보는 것이다. 물론 1970년대 이후 김진홍만 변신한 것은 아니다. 이름을 대면 알만 한 1970-80년대 진보적 재야인사 혹은 민주화투사 중에서 오늘은 정 반대편에 서있는 인사와 '투사'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김진홍과 박홍의 대표적 변신행적을 통해서 한국교회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갖고자한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 이것은 곧 또 오늘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과제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그 변신자들도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기독자상의 정립을 위해 한 알의 썩어진(부패한) 씨앗이 될 수 있는 것이다.

4) 수구가 된 진보

(1) 김진홍(1941- ), 빈민의 친구가 재벌의 후원자로
김진홍은 1971년 서울 청계천에 활빈교회를 설립하고 빈민선교와 사회사업을 펼쳤다. 당시 김진홍의 생활은 눈물겹다. 열악한 곳에서 구제활동을 할 때, 정작 자기집안은 돌보지 않고 아이들은 굶기기가 일쑤였다. 밀가루 한 봉지만 생겨도 옆집에 가져다주니 아이들은 폐병에 걸리고 또 집은 비가 샌다. 이를 보다 못한 처는 마침내 아이들을 데리고 가출한다. 그는 1974년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른 뒤, 청계천 거주민들과 함께 경기도 남양만으로 집단 이주, 두레공동체를 설립했다. 1980년대 짐진홍은 공동체운동, 대안교육운동, 북한 돕기 운동 등을 펼친다. 위의 이러한 김진홍의 행적은 우(라이트) 보다는 좌에 가까웠고 예수의 정신을 삶으로 보여준 실례라 할 만한다.
그러나 오늘 김진홍은 180도 변했다. 그의 연민의 대상은 빈민에서 재벌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업그레이드' 했다,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자문위원을 거친 그는 2008년 4월 이명박 정부의 방송통신정책 대토론회 환영사에서 "대통령과 국회가 바뀌었지만 정권교체 사명이 완수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면서 "방송․통신․문화․언론 모든 분야에 좌파의 일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아직도 국민여론을 그릇되게 이끄는 면이 많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고 역설한다.
그는 또 뉴라이트가 공영방송을 비롯해 방송논조와 국민여론을 우파성향으로 바꾸고, 방송문화계의 좌파세력 퇴출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천명한다. 더욱이 그는 "노근리 사건을 KBS가 1시간 특집으로 다뤘는데 미군이 마치 남한의 양민을 학살하러 온 것처럼 그런 내용으로 비춰졌다"며 이를 보고 "서울에서 나오는 방송인가, 평양에서 나오는 방송인가,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좌성향으로 기울어졌다"고 비난한다.
클린턴 당시 대통령도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빈 노근리 희생자들의 아픔과 절규는 김진홍에게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제 미군이 예수보다 소중하고 목사가 당연히 갖추어야 할 기본덕목인 사랑보다 반공이 중요한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김진홍은 더 이상 가난한자들의 친구가 아니다. 그는 좌에서 극우로, 진보에서 수구로, 부자와 기득권자들을 위한 대변자로 변신해버렸던 것이다.

(2) 박홍(1941- ), 불의에 항거자에서 거짓예언자로
박홍은 별명을 한국의 매카시(Joseph R. McCarthy: 1908-1957)로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매카시는 냉전시대 허위증언으로 미국에서 찰리 채플린(1889-1977)을 포함한 진보인사들을 위험한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벌과 추방을 일삼았다. 박홍은 수단방법을 안 가리는 정치꾼이 아닌 '성직자'라는 가톨릭신부 임에도 불구하고 매카시 수준의 거짓증언과 근거 없는 모함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고 인권탄압을 유도했다. 1991년 박홍이 무책임하게 근거 없이 내뱉은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거짓말은 가뜩이나 종교인의 보수성에 고개를 절래 흔드는 이 땅의 젊은 세대들에게 아예 종교로부터 절교를 초래하게 만드는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해 준 면에서 박홍의 죄는 이루 표현 할 수 없이 크다.
박홍의 1970년대 행적은 분명치 않으나 그가 김지하와 막역한 사이였다는 소문은 있다. 요즘은 김지하가 상당히 추한말년을 보내고 있지만 당시 김지하는 '5적'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등 깊은 고뇌와 자기 성찰적 모습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반면 박홍은 당시에도 '악동' '괴물'이라는 그의 별명이 암시해 주듯 종교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성숙함이나 교양하고는 좀 거리가 먼 길을 걸어왔다. 1980년대 그는 정의구현사제단의 일원으로 불의에 항거했다고 한다. 1980년 학생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수사본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으면서도 5일간 단식으로 맞섰다는 무용담이 그것이다.
박홍이 단순히 다혈질적 깡패기질이 농후한 소영웅주의자 이었는지 진보적 가톨릭신부였는지 여부에 관한 논의는 일단 미뤄두자. 여하간 적어도 1970-80년대 그는 매카시주의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한국의 매카시로 첫 데뷔를 한 것은 1991년. 당시 강경대 사망사건 등으로 시작된 분신정국 때 그는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제비뽑기를 통해 죽을 사람을 정한다" 는 둥 그는 거침없이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꾸미고 목소리를 높였다. 근거도 구체성도 없는 거짓증언으로 박홍은 레드 콤플렉스가 팽배한 남한 사회를 한바탕 회오리바람과도 같이 떠들썩하게 뒤 흔들었다.
1989년부터 1997년까지 그는 대학총장이 되는데 유교적 교육열과 '신분질서'가 팽배한 한국사회에서 신부인 대학총장의 말 한마디는 거의 '모세십계명' 대우를 받는다. 1994년 7월 청와대 오찬에서 서강대 총장이었던 그는 "대학 내에 주사파가 생각보다 깊이 침투해 있으며,…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고 말한다. 또 그로부터 한 달 후인 8월 그는 한 토론회에서 "1987년 이후 전국 대학에서 배출된 주사파 세력이 15,000에서 30,000명에 이르고 이들이 졸업 후 정치, 언론 등 각계로 진출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킨다.
이런 '박홍계명'에 대해 조선일보는 아무런 검증도 없이 그 다음날부터 우리사회 여기저기에 주사파가 깔렸다는 박홍의 거짓말을 그대로 대서특필함으로써 남한사회 매카시즘의 광풍에 기름을 퍼부었다. "박 총장 발언의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주사파" 라고 조선일보는 여론을 몰아붙였다. 그 보수적인 검찰이 박홍 "발언의 신빙성이 없다"고 발표했음에도 조선일보는 투우사를 향해 질주하는 광우모양으로 아랑곳하지 않고 박홍을 옹호했다. 박홍과 조선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나 할까. 결국 박홍의 발언은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1997년 5월 법원은 "한국통신 노동조합에 근거 없는 주사파 발언을 한 박 총장은 7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함으로 박홍의 사기극은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이 박홍 주연, 조선 조연의 주사파 발언소동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레드콤플렉스여파에 취약하게 노출되어있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서글픈 해프닝이라고 할 수 있다.

(3) '실낙원'이 된 명동성당
1970년대 명동성당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메카"라고 불렸다. 각종 집회와 민주화를 촉진하는 성명서는 명동성당에서 발표되었고 김수환 추기경이 있는 명동성당에는 독재자들도 감히 시위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전경이나 형사들을 투입시키지 못했다. 특별히 1976년, 지금은 그 말도 사라진 '재야' 인사 함석헌이 야당지도자 김대중 등과 명동성당에서'3․1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한 사건은 '명동사건'으로 불리며 국내는 물론 세계에도 널리 알려지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서슬이 시퍼렇던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시절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우뚝 솟았던 명동성당은 그래서 종교적 차원을 넘어 민주화를 열망하는 씨알들에게 자부심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런 명동성당에 단군 이래 최초로 경찰을 투입한 것은 문민정부 시절인 1995년 현충일 아침이었다. 당시 장로 대통령 YS는 전경들에게 명동성당에 대한 기습공격 명령을 내림으로써 한국통신 노조간부들을 잡아갔으니 그것도 한국 현대사의 아이러니다. 평소교회를 안방 드나들듯이 하던 YS는 전혀 교회나 성당의 '권위'를 오히려 못 느꼈던 것 같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 이 사건을 계기로 명동성당의 보수성이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1997년 6월 14일 한총련 지도부 단식농성 때 명동성당측은 농성자들에게 싸늘한 반응을 보여준다. 당시 성당 측은 배고프고 목마른 학생들을 따스하게 받아주기보다는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한 40대 여신도는 농성중인 학생들에게 계란을 던지기도 했다. 이런 냉정한 반응은 물론 1996년 연세대학교에서 한총련이 주최한 8.15 통일대축전 범민족대회에서 벌어진 대규모 폭력시위로 인하여, 정부의 대대적 제재와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문화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시각이 많이 작용 했을 것이다. 당시 전반적으로 여론도 한총련의 폭력시위를 거세게 비난하기도 했으니, 명동성당측은 그렇게 강경하고 냉혹한 태도를 보여주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나 한총련입장에서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부모에게 냉대 받은 자식처럼 뜻밖이었을 것이다,
1998년 7월에는 직장을 잃은 은행퇴출 노조원들이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명동성당에서 천막농성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성당 측은 이 들에게 격려나 위로를 보내기 보다는 오히려 일부 농성 천막을 직접 철거했다. 당시 정진석 서울대교구장은 "어느 시대에나 성역은 필요하고 국민적 합의에 따라 명동성당이 그 역할을 해왔으나 구약에서도 국민적 지탄을 받는 사람은 보호받지 못한 만큼 성역에 들어온 사람이라고 무조건 보호해서는 안 되며 그래야 명동성당을 성역으로 지켜나갈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때부터 역설적으로 명동성당은 더 이상 '성역'이 되기를 포기했고 소외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의 위치를 스스로 버린 '실낙원'으로 전락하였다.
1999년 4월 서울지하철노조 파업농성 때에는 검찰에서 급기야 직접 명동성당에 찾아와 "공권력 투입이 불가피하다"는 경고를 하기도 했다. 그 후에도 혹시나 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은 명동성당을 계속 찾아왔지만 더 이상 성당은 가난한 사람을 돌보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메카'가 아니었다. 2000년 12월 한국통신노조 농성 때 명동성당은 초강경으로 대응했다. "각종 단체의 집회 신고시 장소가 명동성당으로 명기된 경우에는 항상 명동성당의 동의서 첨부가 있어야 허가할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공권력 요청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단호히 밝힌 것이다. 이것은 향후 집회를 불허한다는 방침이자 경찰투입을 스스로 요구한 셈이고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에 대해 무관심하겠다는 공식선언인 셈이다.
그럼 1970년대 한국의 진보기독교를 상징하고 사회정의를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이자 친구였던 명동성당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그 뿌리를 김수환 추기경의 변모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김 추기경은 가난하고 고난 받는 사람들의 친구이자 후원자 역할을 했고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그는 균형을 잃은 수구적 발언으로 한국사회에 논란과 파장을 일으켰고 진보인사들에게는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그는 공개발언으로 김대중 정부가 호남편중 인사를 한다며 비판했다. 그러나 사실 당시 영남출신 고위공직자는 28%로 호남출신 22%보다 많았다. 그런 김 추기경이 영남정권인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시절 45%대를 넘나드는 영남편중 인사에 대해선 일체 침묵했다.
그는 2004년 인권침해의 대명사인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시기상조란 의사를 밝혔고, 2005년 사학법 정국에서도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는 한나라당을 두둔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정국 때는 오히려 촛불시위 자제를 촉구했다. 이에 대해 함세웅 신부는 "김 추기경이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등 가톨릭 내에서조차 그는 이제 진보라기 보다는 수구인사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종교의 세속화라는 차원에서 보면 명동성당이 민주화운동의 메카라는 영광스런 역사적 자리를 스스로 박차버리고 그저 고딕양식의 건물을 대표하는 서울의 관광명소로 전락한 것은 바람직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인들이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고 고난 받고 소외되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할 때 그 종교는 아편과 같은 마약의 위치로 전락하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보아왔다. 한국 민주주의의 메카로 부활 할 것인가 아니면 시대의 해악인 아편이 될 것인가? 향후 선택은 명동성당 스스로에게 달렸다.

3. 새로운 시대의 기독교 진보운동의 방향
일제강점기부터 최근까지 한국기독교계 진보인사들은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희생하며 이 땅에 독립․민주화․평화통일운동을 위해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진보기독교 인사들 중 상당수는 그 후 타의 혹은 자의로 현실과 타협함으로써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상적 종교인의 모습을 상실해 간 것이다. 진보기독교인들이 소외되고 핍박받는 사람들과 함께 했을 때 그들은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역동성과 추진력을 보여주며 한국의 양심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 진보기독교 인사들도 현실에 안주하며 힘과 권력의 단맛에 중독되면 보수․수구화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이제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오히려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막는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된다. 
1960-70년대 민주화운동의 대표적 지도자가 기독교사상가 씨알 함석헌이었다면 1980년대는 "통일의 아버지" 문익환이었다. 그럼 오늘 2000년대 한국을 이끄는 양심적인 기독교 지도자는 누구일까? '각개전투'에 시달리는 한국인들에게 탈세한 억만장자로서 '성공신화'를 남기며 권력의 최정상에 오른 장로 대통령일까? 오늘 한국기독교인들은 극심한 배타성과 편향성을 바탕으로 사회정의에 대해선 무관심한 축소 지향적 집단으로 전락한 것이 아닐까?
지난 해 촛불시위에서, 일부 양심적 기독교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독교지도자들은 더 이상 시위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다만 청와대에서 목사이자 행정관이 외치던 "사탄의 무리" 소리만 들렸다. 기독교인들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제 더 이상 한국의 양심세력이 아니다. 그들은 더 이상 저자거리에서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이사회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킬 힘도 영향력도 상실했다. 상식과 지성이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인들의 몰상식하고 비이성적인 시끄러운 아우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1970-80년대 권위주의 정권하 혹은 그전 일제강점기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반공주의자라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반공주의자는 좌파유물론자 보다는 우파유신론자에 가깝다는 단순한 도식은 권위적인 통치자들도 부인하기 어려운 논리였다. 1970-80년대는 군부독재에 대항해 '자유'만 외치면 좌파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의 광풍이 휩쓸고 간 뒤 신자유주의가 도래한 오늘, 작은 정부, 자유경쟁, 경제적 자유를 외치는 자들은 우파 보수주의자들이다. 정부의 간섭이 없어야 강자인 그들은 마치 사자가 토끼를 잡듯이 마음대로 약자를 잡아먹고 자유롭게 타고 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진보주의자는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오직 정치적 자유를 옹호하는 자들로 한정지어진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던 로마제국 식민지에 살면서 나누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 이가 예수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는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겠다는 기독교인들도 그래서 성장의 가치를 떠받드는 우파가 아닌 나눔의 소중함을 이야기 하고 소득의 재분배(사회복지)에 역점을 두는 좌파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나눔의 전범을 보여준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겠다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냉전적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북한에 대해서도 포용정책 보다는 무력사용이나 심지어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는 반공극우세력의 최후보루가 오늘 한국기독교인들의 서글픈 현주소다. 그리고 이렇게 이분법적 사고로 극우화된 한국기독교인들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내용도 평화주의나 이타주의가 아니다. 자신과 자식들의 병역기피를 일삼는 이 땅의 (기독교)지도자들이 북한에 대해 내세우는 강경대처나 전쟁불사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타인의 생명을 구한 예수의 삶과는 정반대 쪽에 있다. 이들은 타인(서민)의 생명을 희생으로 삼아 자기와 자기자식들의 안녕과 번영을 꿈꾼다. 국가안보를 떠들며 북에 대해 강경노선을 주장하면서 자신과 자식들은 갖은 편법을 써서 군대가 면제되고 대통령이 되거나 대선후보에 나오고 국무총리가 되고 국회위원에 당선된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곧 한국기독교인들도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도움과 관심을 주며 함께 먹고 필요한 것을 나누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기독교의 복음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기독교의 본질은 붐비는 지하철에서 피곤에 지친 직장인들에게 혐오감과 불편함을 주며 노방전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믿는다는 것은 곧 잘못된 역사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반전과 반역을 꿈꾸라는 것이다.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 즉, 사회정의, 인권, 민주, 평화를 추구하다가 받는 고난, 심지어 죽음을 통해서도 부활을 노래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진수다.
용산참사 희생자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나 연민이 없는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예수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벌판에 놓아두고 오히려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크고 많은 것을 추구하는 실용정부와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는 쓸모없게 여겨지는 것을 돌보는 일, 즉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고 진리로 정의를 베푸는 것"이 곧 예수 제자라는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예수 가르침의 정반대 편에 있는 오늘 한국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성공적 전도전략이나 경제대국을 이룩하기 위한 기도회가 아니다. 자신에 대한 냉엄하고 뼈아픈 성찰과 반성이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가 상실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정신을 회복할 때 역사는 한층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進步).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기독교인들은 다시 한국의 양심으로 부활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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