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30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 오마이뉴스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 오마이뉴스

함석헌은 지금부터 110년 전인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고, 22년 전인 1989년 2월 4일 서울에서 그 고난에 찬 삶의 여정을 마쳤다. 그래서 오는 3월 13일은 그가 이 땅에 태어난 지 꼭 110주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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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업회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초반 연세대학교 장기원기념관에서 학생들이 개최한 강연회였다. 전두환이 총칼로 광주에서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정권을 쥐고 있던 터라 사회분위기도 험악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군에서 휴가를 나왔는데 사복을 입고 강의장으로 향했다. 벌써 강의실 앞엔 많은 학생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사복전투경찰인 백골단이나 '짭새'들이 캠퍼스에 많이 잠복했던 터라 주최 측 학생들은 강의실 입구에서 종이에 적힌 명단과 강의 수강자 이름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무작정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내 머리가 짧아서 학생들이 나를 '짭새'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내 앞 학생신원을 확인하는데 어깨 너머로 보니 종이에 이름을 확인하고 X표를 긋고 있었다. 흘끗 보니 '철학과 황OO'이라는 이름에 아직 X표가 없었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철학과 황OO"라고 뻔뻔스럽게 소리쳤다. 학생들은 아무 의심 없이 나를 강의실에 입장 시켜 주었다. 진짜 철학과 황OO 학생에게는 지금도 미안함을 느낀다.

함석헌에 미친 젊은이, '함석헌환자'가 되다

강의실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학생들 열기로 가득 찼다. 2시간이 금방 지나갔고 나는 그날 내 생애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흰수염, 흰두루마기 차림을 해 신선같이 보이는 함석헌 옹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강렬한 전기처럼 내 몸과 마음을 통째로 감전시키는 충격을 주었다.

그날 그 순간은 내 생애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평생 '미칠 대상'을 찾았다. 그는 곧 나의 '베아트리체'가 되었고, 나를 '지상에서 영원으로' 매순간 이끄는 영감과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함석헌에 미친 젊은이 '함석헌환자'가 된 것이다.

한국인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지만 함석헌은 한국인 최초노벨평화상 후보자였다. 1979년과 1985년, 그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퀘이커들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다. 허나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 중엔 그의 이름 석자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바닷가 조약돌만큼이나 많다. 아마 그의 이름을 알고 모르고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오늘 한반도에 남긴 영향이 무엇인가가 아닐까.

함석헌은 무엇을 남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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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업회
함석헌이 살았던 20세기에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던 네 가지 이념이나 사상은 ▲ 유교 ▲ 일본제국주의 ▲ 공산주의 ▲ 기독교다. 이 네 가지는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의 의식구조와 매일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함석헌은 이런 문제에 대해 동시대인들과 함께 온몸으로 부딪쳐 한 가닥 희망의 빛을 찾아냈다. 그 희망의 빛을 우리는 '자유'나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하고 '포용성'이나 '다양성 존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는 거의 상투어가 되다시피 한 이 추상명사들이 오늘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의 혼신을 다한 고통과 열망이 있었는지를 우리는 종종 잊는다. 혹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통과 열망을 기억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 주인공들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분들이 온갖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지켜온 가치들을 손상과 상실의 위험에서 지켜내기 위해서다. 함석헌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돌아보는 일도 그의 삶을 영광으로 채색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우리가 근거하고 지향해야 할 바를 그가 남긴 삶의 흔적을 통해 감별해 내기 위해서다. 나는 함석헌이 크게 세 가지 그 삶의 흔적을 한반도에 남겼다고 평가한다.

일제강점기, 민족정체성 발견

첫째, 20세기 전반부 한반도를 지배한 암울하고 어두운 일제강점기 시절, 그는 실의와 절망에 빠진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희망과 비전이라는 진액을 공급해 주었다. 특히 1930년대 아시아의 슈퍼파워로 일제가 식민지 조선인의 숨통을 조르며 역사를 왜곡하고 정신을 말살하고자 했을 때, 그는 조선인의 자아 찾기, 즉 정체성 발견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하, 조선역사)를 강의하고 저술한다. 당시 함석헌의 친구이자 <성서조선> 주간 김교신은 그 감동을 이렇게 전한다.

"만 3시간의 연속 강연이었으나 강사와 청중이 모두 일순간을 보낸 것처럼 시간의 흐름을 애석하였다. 조선역사 반만년에 역사도 길었거니와 사가도 많았다. 마는 조선 역사 반만년에 사관을 준 이가 없었다. 이날에 '전인미답(全人未踏)'의 영역에 일보를 내디디어 반만년사의 사관을 제시하였건만 2천만 중에 이것을 들은 자 20명 미만이고, 이것을 읽을자 200인에 미급하니 무슨 췌언(贅言,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을 첨서 할 필요가 있으랴. 오직 일이 기이함을 심비(心碑)에 명기할 뿐이었다…만일 기독교 전래 50년 만에 기독교적 견지에서 본 조선역사를 쓴 사람이 출현치 않았다면 그는 얼마나 적적한 일이었을까…본 호(성서조선) 함선생의 조선역사가 8면에 달하므로 지시대로 2회에 분재할까 하였으나 끊으면 피가 나올 듯하여 3분의 1의 지면을 그대로 드리었고…."

당시 드문 지식인 김교신의 충격도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면 일반인들이 받은 충격도 상상 할 수 있다. 후에 함석헌과 김교신 등은 필화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르는데 그들을 취재하던 일본형사의 안목도 상당하다. "그냥 무력항쟁을 하는 놈들보다 500년 후를 내다보고 조선정신과 얼을 교육하는 너희 놈들은 훨씬 악질이다!"

바로 그것이었다. 함석헌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일본 점령자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희망'이라는 무기를 심어주었던 것이다. 아무리 어려움에 처한 개인이나 민족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한 고난을 극복 할 힘을 얻을 수 있고 내일을 개척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조선역사>는 1965년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편되었고 2009년 아시아명저 100선에 선정된다. 함석헌 사후 22년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그가 이렇게 혼혈을 기울여 쓴 책에 대한 인세는 매년 2천만 원이 넘는다.

권위주의 정권기, 민주화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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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왼쪽부터 계훈제, 장준하, 김재준, 함석헌, 이병린.
ⓒ 함석헌기념사업회
함석헌은 황국신민의 잔재라고 여겨지는 '국민'이나 친북좌경으로 몰릴 수 있는 '인민'이라는 단어보다 오염되지 않았다는 '씨알'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썼다. 그는 이승만 정권 아래서는 장준하가 만든 <사상계> 잡지에 글을 써서 불의한 정권을 비판하고 대항하여 옥고를 치르고 매를 맞았다.

1970년 박정희 군사독재 하에서 <사상계>가 폐간되자 그는 70세에 <씨알의 소리>라는 월간지를 창간하여 관주도 하의 거대 사이비 언론에 맞서 '언론의 게릴라전'을 펴나간다. '한계레신문사' 초대 대표 고 송건호는 박정희 독재정권 기간 중 함석헌의 두려움 없는 활동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기도 했다.

"당시 아무도 독재적인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감히 말하거나 글 쓰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언론인, 대학교수, 지식층도 감히 박정권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함석헌 선생만이 박정권의 불법성과 부도덕성을 두려움 없이 당당히 비판했다. 지금도 나는 함 선생이 어떻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두려움이 없었을까?"

민주주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언론의 자유라고 할 때, 함석헌은 분명히 그의 직설적이고 통쾌한 말과 글을 통해서 한국에 언론의 자유를 확립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재권력을 거침없이 비판했고, 양심수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으며,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는 바로 민주주의라고 주창했다.

그런 함석헌이 1970~80년대를 통해서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각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한국의 수많은 씨알에게 민주주의가 현실이 아닌 하나의 미약한 꿈에 불과했을 때, 함석헌은 자유 하는 씨알의 상징이었고, 민주정신의 화신이었다. 그랬었다. 그래서 박정희정권 하에서 나온 거의 모든 시국성명서 앞부분엔 항상 함석헌의 이름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1967년 장준하가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함석헌은 주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국회의원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대대적 캠페인을 벌였다. 동대문운동장 선거유세 연설 중 함석헌은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외쳤다.

"여러분, 장준하를 살려주십시오. 장준하 '사상계' 사장을 국회로 보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준하 이 사람 감옥에서 죽습니다…." 

이렇게 열렬하고 헌신적인 그의 분투 덕분에 장준하는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옥중 당선하는 국회의원이 되었던 것이다.

종교적, 이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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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압회
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7월 4일 함석헌은 '대선언'이란 시를 발표한다. 이 시에서 그는 장로 대통령 이승만을 향하여 이렇게 직격탄을 날린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오. 그것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함석헌은 기독교인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의 기독교 편애주의 정책에 대항해(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다른 종교도 내 종교와 똑같이 소중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종교적 보편성을 강조한 자신의 신념을 표출한 것이다.

그의 책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편하며 쓴 아래 글에도 기독교에 대하여 좀 더 보편적 입장을 취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담겨 있다.

"1961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셋째 판을 내려 할 때에 나는 크게 수정을 하기로 하였다…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교파주의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성서적 입장'이라는 대신 '뜻으로 본'이라고 붙일 때에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을 섭섭하게 할 것과 심하면 거침돌이 될 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똑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함석헌, 그는 약자의 대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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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 함석헌 선생의 모습.
ⓒ 함석헌기념사업회
이렇게 함석헌은 소외된 자, 약자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보았다. 그는 기득권자나 가진 자의 통치논리가 아닌, 서민과 소수자, 패자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시선을 갖고 고난에 찬 삶을 살았다. 그것은 함석헌의 추종자들 또한 최소한 기득권자나 '부자의 대변자'가 아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줄 모르는 서민, 힘없는 사람들의 대변자, 즉 '씨알의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는 소중하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우는 유럽인들도 우리보다 더 많이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정치적 자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의 문제는 다르다. 강자독식과 정글의 법칙이 횡행하고 사자가 토끼를 마음대로 죽이고 유린하는 상황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 자유민주주주의인가? 오늘 한국의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함석헌이 살았던 길은 결코 아니다.

강자가 약자를 유린하고 수탈할 때 '중립'이라는 미명하에 강자의 횡포를 바라만 보는 것은 결코 함석헌이 주장한 '같이살기운동'의 길이 아니다. 한국의 천민자본주의 현실에서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강자와 재벌들에게 유리하게 되어있는 이 경제의 틀에서 경제적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단연코 함석헌을 따른다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길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강자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앞장서는 가짜 씨알 쭉정이의 자기변명, 자기 합리화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정치·사회적 민주주의는 그의 종교적 신앙심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를 향한 자유의 길과 궁극적 절대자를 향한 사랑의 길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종교적 양심을 상실한 사회를 이상향적 사회로 생각할 수 없듯이 사회의식이 결여된 종교도 그래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의 탄생 110주년을 맞아 '씨알의 소리', '약자의 대변자' 함석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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