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30

Re..[1013]`꿈꾸는 청년' 권술용 선생 - 들소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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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청년' 권술용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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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02.06.05  11:5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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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청년' 권술용 선생 - Master(deulsori@chollian.net) ┼ │

 “낮고 낮은 자리 찾아 `생명 사랑' 실천” │ │
  “사람들이 날 보고 평생을 현실 감각 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해. 친한 이들은 돈 될 짓도 좀 하라고들 하지. 허긴 계속 빚을 진 세월 속에서 살았으니까 그럴만도 해.” │  

대동종합사회복지관 권술용 관장(62)은 그동안의 삶을 얘기하면서 이렇게 혼자 말하듯 속내를 드러냈다. │  51년 전 대전 가양동에 싹을 틔운 `평화의 마을'(일명 평마, 당시 이름은 대전애육원)에서 총무로 10년간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지냈고, 지금은 관장직을 5년째 수행하고 있다. 평마 회보의 글틀지기를 하면서… 그러나 외형의 모습만 총무고 관장이지 그 자신의 삶은 오직 대전지역의 고달프고 외로운 이들과 늘 함께 하고 있다. │  

`권총 밉다.' │

 “지금은 전문대를 나와 서울에서 어엿한 사회인이 된 한 아이의 초등학교 6학년 때 일기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 구절이야. 얼마나 미운 마음이 들었길래 뒷통수에 대고 빵! 빵! 빵! 쏘고 싶었을까-. 그러나 `권총'이란 이 별명을 내게 주신 깨우침으로 난 사랑하고 있어.” │  평마의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얘기할 때 주로 부르는 이름이 권총이란다. `권술용 총무'의 약칭으로 볼 수 있을법도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렇게 아이들에게 엄했던 모습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그 마음의 저변은 미움이 아닌 사랑에서 우러나왔던 것이기에 그 이름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  어떤 이유에서건 부모들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이들,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들, 부모의 모습을 늘 그리워해야 하는 아이들 속에서 살았던 권총은 한없이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연민으로 해결될 수 없음에 더 강한 모습으로 대하지 않았을까. │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는 정말 싫었는데 여기 오니까 후회돼요. 만약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심부름도 잘 할께요. 빨리 데려가세요', `어머니는 어디 계신지 모르지만 편지를 씁니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얼른 오십시오. 보고 싶어요', `아버지가 없더라도 어머니가 있으면 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부디 저와 함께 있어 주세요',

`보고 싶어도/못보고//만나고 싶어도/못 만나고//언제 만나나/우리 누나//저녁 놀 쳐다보며/누나 생각하니//더 보고 싶은/우리 누나//그리움은/어쩔 수 없구나//언젠가 만나겠지/우리 누나.' │  

초등학교 아이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권 총무는 그 아이들에게 부모만큼 해주지 못하고 채워주지 못해서, 그 자리만큼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음을 알고 있어서 그의 얼굴은 그렇게 진지한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만큼 그들을 더 잘 키워 사회에서 제 구성원의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평마 반세기를 접고 세기를 향한 `평마의 새로운 꿈'은 무엇인가를 관계자들과 함께 생각했다. 평마가 15년 전 재출범 할 때 결코 `그저 그렇고 그런 사회복지사업', `남들이 다 할 수 있는 사회복지'하자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음을 재인식했다. 시대정신을 이끌어 간 스승인 함석헌 옹을 모시고 천안 씨알농장과 강원도 안반덕 개척공장 공동체와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박해와 고난 속에서 함께 청춘을 불태웠던 이들이 평마를 운영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사회복지시설은 제도권 속에서의 평면적인 사업이다. 그저 사회복지 수행기관들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사회복지법인과 시설에 입체적인 상상력이 도입될 때 그 체적과 용량 효과는 수십 배가 될 것이며 그러할 때에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모델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진행하고 있다. │  

그는 그런 평마를 생각에만 그치게 하지 않고, 10여 년 전부터 아이들과 함께 1주일간 조국기행을 다니고 있다. 속리산, 월악산, 마라도 등 맨발로 답사를 하고, 재정은 참가한 봉사자와 후원자, 그리고 현지에서 각각 1/3씩 조달했다. 60∼80명 정도가 다니는 이 여행을 통해 청소년들은 그동안의 어려움을 풀어내고, 자신의 모습을 다시 가다듬는 계기로 삼기에 충분했다. 여행을 통해서 많은 가능성을 보고 있는 권 선생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해 나갈 모양이다. │  또 소록도 봉사를 10년 전부터 매년 3회씩 하고 있다. 올해도 75명의 청소년들이 방문해서, 모두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 그리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많고, 그들에게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따뜻함 등을 배워가고 있다고 했다. │  

그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은 근교 깊은 숲이 있는 곳에 `평마 쉼터'란 복합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예수원이나 동광원 등 세계의 공동체들이나 수도원,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 각종 대안학교들에서 평마의 쉼터 모델을 찾고 있다. 평마에서 자란 이들, 헌신했던 직원 봉사자 후원자 등 평마가족의 안식처, 재난 당한 이들의 일시 보호처, 영성이 깨우쳐지고 숨쉬어지는 곳, 명상이 있고 단식이 있는 곳, 일생을 헌신한 이들, 갈 곳 없는 이들, 고난받는 이 등이 `쉼을 얻고 재충전하여 힘있게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그런 곳'-. │  

평마는 도움을 받기만 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고,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골몰하고 찾아서 실천하고 있다. 몇 해 전 대전 YWCA의 부탁으로 평마에서 2년 여 동안 연 10여 명의 매맞는 엄마들이 피신해서 살게 한 적이 있었는데, 아동시설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며 엄마들은 스스로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웃에 시루떡을 돌려서 나누어 먹고, 자신들의 울고 웃는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회보를 돌려서 함께 살아가기를 하고, 타지에서 온 입시생들을 위해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  

그러나 그는 아직도 할 일이 곳곳에 많이 있다고 했다. 어쩌면 본인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그는 그럴 수가 없나 보다. │ “10년 동안 평마의 총무일을 하면서 많은 한계를 느꼈지. 네팔의 고아원에서 요청이 있었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고, 나는 복지관에 또아리를 틀었지. 뭔가 탈출이 필요했는데 나는 용기가 없었던 것 같애. 뭔가 노가다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말야. 노가다부터의 출발이 어쩌면 구원일지도 모르는데….” │  그의 사고와 삶의 탄력은 나이와 상관이 없었다. 어느 것과도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소곳이 자기가 서 있는 자리 외에는 자기의 자리가 없어 보였다. 그 자리를 쪼깨고 쪼개서 다른 사람과 함께 서서 살고 있었다. │  복지관 관장으로 일하면서도 그는 낮은 자의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기꺼이 하고 있었다. 대전 시내인데도 복지관의 위치는 대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높은 지대에 있다. 걸어 올라가자면 숙달되지 않은 사람은 굉장히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다가 주변 환경은 대전 시내라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낙후돼 있다. │  “나이가 마흔이 된 처녀가 있는데, 부모가 몸이 불편해. 그런데 동생들을 아주 잘 키워내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 “저기 저 집은 화장실이 없어서 한겨울에도 우리 복지관까지 와서 일을 보고 가”, “산비탈 단칸방에는 할머니와 정신지체 부부, 여섯 살, 네 살, 두 살배기 삼형제가 살아. 할머니는 연로하셨고, 부부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장애가 심했으며, 어린아이들조차 정신장애에 청각장애까지 안고 있어.”

 │  권 선생은 그들의 삶을 그냥 보고 있지 못했다. 팔을 걷어부치고 서둘러 집 수리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보기만 하던 이들이 하나 둘 돕기 시작했다. 작은 후원금을 나누려는 사람들, 부족한 손재주지만 돕고 싶다며 공사장마다 찾아온 사람들, 철도청 기관사들, 119 구급대원들, 실직 건설 노동자 등 빈민들 스스로가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  

그런 힘으로 쓰러져가던 판잣집들에 희망의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권 선생의 사랑의 집짓기는 단순히 수리 자체에만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는 단순히 집이라는 하드웨어가 필요한가 하면, 가족의 사랑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반드시 필요한데, 집 수리를 통해 그 소프트웨어가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것을 본다고 했다. │  

그렇게 시작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은 해를 거듭하면서 영세가옥 1000여 채를 수리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서민들의 가정을 수리해주는 데까지 발전했다. │  

그가 가는 곳곳에는 그를 몰라보는 사람이 없었다. 대전역 주변에 노숙자들의 쉼터를 마련해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고 있었는데 모두들 반가운 인사다. 현재 15명 중 13명이 일하고 있다며, 다시 일어서고 있음에 흐뭇해하고 고마워 한다. 그곳을 지나 허름한 집에 교회 간판이 있었는데, 한 사람이 얼른 뛰어나오더니 식사 하시고 가시라고 권한다. 그 전도사는 손수 노숙자들이나 밥이 필요한 이들에게 점심식사를 만들어 대접하고 있다는데, 아마도 이 날은 권 선생과 함께하고 싶었나 보다. `별 일 없냐'는 안부를 묻고는 그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  

그는 `작은 예수'의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몸으로 살고 있었다. 생명을 가진 사람이면 모두가 자기 몸인 양 관심을 갖고 함께 하려 하고 있었다. │  `중학교 때 교회 다녔고, 스무살이 되기 전에는 함석헌 선생의 씨알 농장에서 지내기도 했다. 스무살 무렵에는 우연히 난 산불로 인해 동료들을 대표해 감옥에서 45일간 살았던 적도 있지만 혐의가 없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함 선생은 그때 천안에서 강원도까지 면회를 왔다.' │  

이런 내용은 그의 일기장 한 곳에 이력서와 함께 적혀 있었다. 그리고 어느 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데카르트는 말했으나 나는 말하리라. `나는 참는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지만 이건 데카르트 같이 하나의 신념 속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다. `참지 않고는 별 수 없기 때문에' 근거를 둔다.” ┼  

인내하지 않고는 어쩔 수 없는 사람. 그 선택한 인내의 끈을 놓치지 않고 사는 사람. 그러면서도 꿈을 꾸고 키우고 있는 청년. 그런 사람이었다.양승록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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