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함석헌·김동길에 '미친놈'이었습니다 - 오마이뉴스
'인생은 선생을 만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말도 결국 제자들은 스승이 평생 이룩한 업적과 그 열매를 먹고 산다는 말일 것이다.
나에겐 스승이 두 분 있다. 한 분은 함석헌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김동길 선생님이다. 인간은 사상적 존재이지만 세상살이를 하다 보면 조직을 벗어나서 살기는 어려운 것 같다. 함석헌 선생님을 통해서 나는 '조직을 넘어서' 일하는 법을 배웠고, 김동길 선생님을 통해서 나는 '조직과 더불어' 일하는 법을 배웠다.
나의 십대는 그저 '조용한 아이'였다. 과외나 학원도 안 다니고 학교수업만 열심히 들었지만 공부는 그저 그랬다. 1979년 나는 신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한국철도대에 입학했다. 철도대는 국립으로 당시 거의 무료였다. 그래서 나는 학비가 거의 없고 취업이 보장된 철도대에 입학하게 된 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철도대 생활을 열심히 했고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내 생활의 반경은 집, 학교, 교회로 지나칠 정도로 단순했고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 하의 사회문제에도 전혀 무관심했다.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해준 선생님
철도대를 한참 다니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었다. 박정희가 죽은 직후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우연히 김동길 선생님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나는 당시 어수선한 시국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둔감한 청년에 불과했다.
이런 철없던 청년에게 선생님의 해학과 기지를 섞어서 하는 강의는 큰 감동을 주었다. 선생님은 당시 박정희가 "자기 머리보다 훨씬 큰 감투를 쓰고 있으니 그 감투에 눈과 귀가 가려 듣지도 보지도 못하다가 결국 '탕탕탕!' 소리와 함께 목숨을 잃은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셨다. 무서운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하는 선생님의 강의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벅차오르는 감격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함석헌'이란 친숙하지 않은 이름 석 자를 처음 접한 것도 이날 김동길 선생님의 강연을 통해서였다.
그로부터 멀지 않아,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공개강연을 직접들을 기회를 얻었다. 그때 나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고, 그의 조용한 열변에 나는 마치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주체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관련 기사 :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때부터 함석헌, 김동길 선생님 두 분은 내게 이상적인 종교인, 사회인, 그리고 역사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80년대 초반의 어수선한 시국을 놓고 두 분은 종교인의 사회참여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것인지 삶으로 보여 주셨다. 두 분의 말과 글을 접하며 비로소 늦게나마 나의 자아의식이 눈뜨기 시작했다.
그 후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친구를 만나도, 길을 걸어도 매 순간 어디서나 그분들을 생각했다. 이것이 나의 취미였고 나의 에너지였고 나의 궁극적 관심이었고 나의 전부였다. 그분들의 글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강연을 미친 듯이 쫓아다녔고 내방을 아예 그분들의 사진으로 도배했다. 당시의 나를 '미친놈'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주경야독(晝耕夜讀)
1984년 봄 내가 제대하던 해, 김동길 선생님은 10년간 해직교수 생활을 마치고 연세대학에 복권되셨다. 같은 시기 나는 철도청에 제대 후 복직했다. 경의선, 경원선, 경부선, 경춘선, 장항선 열차로 전국을 누비며 틈틈이 군대생활 중 입학한 방송대 영어과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퇴근 후 매주, 월, 수, 금요일엔 연세대학교로 가서 김동길 선생님의 '서양문화사', '미국사', '전체주의 제국주의' 강의를 도강했다. 매주 화, 목, 일요일엔 명동과 봉원동에서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장자', '퀘이커리즘', '성경'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두 분의 말씀은 아주 재미있었고, 나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을 주었다. 두 분을 생각할 때마다 밀물져 오는 감동과 설렘이 있었지만 그 설렘을 꾹 눌러 가슴에 눌러 담고, 나는 먹고살기 위해 8년 동안 철도청에서 일했다. 몸은 그렇게 기차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지만, 마음은 늘 그분들한테로 다가가 있었다.
그러던 중 1989년 2월 4일 오전 5시 40분,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전화 저쪽의 박 선생은 "함 선생님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즉시 택시를 타고 서울대학병원으로 향했다. 택시 안의 라디오 뉴스에선 벌써 "함석헌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었다. 비록 이른 새벽이었지만, 서울대병원 영안실엔 벌써 몇 사람의 조문객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의 관을 보고, 그의 시신을 보고 나는 마치 나 자신이 그 관속에 누워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시신 앞에 예를 올린 후,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그의 삶, 그의 죽음, 그리고 나의 인생…. 3시간 후, 나는 8년간 공무원으로 일하던 철도청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 후 나는 곧 퇴직금을 털어 무작정 영국유학길에 올랐다).
1990년 나는 김동길 선생님의 추천서와 더불어 영국 에섹스 대학교 역사학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학비와 생활비가 없었다. 그때 우연히 만난 두 영국 여성이 내게 평생 은인이 되기 시작했다. 한 분은 의사인 잉글 라이트였고, 또 한 분은 캠브리지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던 안띠아 리(Anthea Lee)라는 중년 여성이었다. (☞ 관련 기사 : 베갯속 죽은 쥐...영국여의사는 왜 한국에 왔나)
나는 안띠아를 1990년 8월 한 콘퍼런스에서 만났다. 안띠아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고 불어는 물론 독어도 유창했다. 영국 북구 셰필드라는 곳에서 열린 이 콘퍼런스에 참석한 사람 중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전생의 '어머니'를 만나다
콘퍼런스 중 아침 세션이 끝나고 한 여인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와서 인사했는데 그 여인이 바로 안띠아였다. 그녀의 첫인상이 상당히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는 금방 마치 오래 사귄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안띠아는 대학에서 조기은퇴를 하고 '영적치료사(spiritual healer)'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영적치료사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안띠아가 훗날 나에게 이야기한 것은 이렇다.
나를 처음 본 순간 안띠아는 내가 전생에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봤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전생에 자기의 실수로 내가 희생이 되어서 이생에서 자기는 나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고 했다. 안띠아는 사람들의 전생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까 봐 먼 훗날 우리가 아주 막역한 사이가 될 때까지 그 이야기를 내게 전혀 하지 않았다.
하여간 안띠아의 적극적이고 애정 어린 도움으로 나는 영국의 한 교육재단으로부터 4천여 만 원의 장학금을 받고 에섹스 대학교 역사 학부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잉글이 상당히 지성적인 여성이었다면 안띠아는 상당히 감성적인 여성이었다. 안띠아는 나와 띠동갑이었고 같은 왼손잡이였으며, 그 외에도 동서 문화와 나이를 뛰어넘어 여러모로 통하는 점이 많았다.
학기 중에도 주말에 우리는 종종 런던에서 만났다. 안띠아는 틈만 나면 나를 런던에 있는 여러 미술관 등지에 데리고 다니며 유명한 예술품과 그 배경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내가 예술에 대해 좀 더 좋은 감각이 있었다면 그녀에게 들은 귀동냥만으로도 아마 지금쯤 유명한 예술비평가가 되었을 것이다. 젊어서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다녀와서 그런지 나는 안띠아가 종종 영국 여성보다는 세련된 불란서 여성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학원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신 김동길 선생님
그러던 중 에섹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동대학 대학원 역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학비와 생활비가 없었다. 그때 한국에 계신 김동길 선생님께서 내 석사과정의 전 학비와 생활비를 지급해 주셨다. 아마 선생님은 만학도인 나를 친아들처럼 대견하게 생각하신 것 같다(훗날 한국에 가족들과 귀국하고 나서도 나는 직장생활을 하며 월급을 못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때마다 김동길 선생님은 아내 손에 나 몰래 몇백만 원씩의 봉투를 지워주셨다).
1994년 나는 에섹스 대학교에서 무사히 석사를 마치고 셰필드 대학교 박사과정에 합격했지만 이번에도 또 학비와 생활비가 없었다. 등록일을 앞두고 2500여 군데가 되는 영국 장학 단체 중 250 군데에 장학금 지원서를 보냈다. 그 중 10여 곳에서 크고 작은 장학금을 받았다. 그리고 셰필드 대학교에서도 얼마간의 장학금을 받았다. 그래도 역시 학비와 생활비가 부족했다. 학업을 포기하느냐 마느냐의 귀로에 있었다. 이때 잉글이 나의 박사과정 학비와 생활비를 선뜻 지원해 준 것이다.
돌이켜 보니 1990년 무작정 영국 유학을 와서 1998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여러 분이나 단체로부터 도움받은 액수가 1억 원이 훨씬 넘었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 사랑의 빚을 언젠가는 후진들에게 꼭 갚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스승은 역사, 역사는 이어지는 것
함석헌 선생님은 1989년 2월 4일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반 후인 1992년, 역사학도로서 나는 영국 에섹스 대학교에서 학사논문으로 <함석헌과 한국의 민주주의>를 썼다. 5년 반 후인 1994년, 동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논문으로 나는 <함석헌의 노장사상과 퀘이커리즘 이해>를 제출했다. 9년 반 후인 1998년, 나는 영국 셰필드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으로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연구>를 집필했다. 이러한 논문들은 함석헌의 거대한 삶과 생각을 서구의 대학에서 학문적으로 정리해 보려는 나의 작은 몸부림이었다.
내가 만약 함석헌, 김동길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철도공무원으로 내 인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우리와는 너무 다른 서구사회를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함석헌, 김동길, 잉글, 안띠아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함석헌평전>을 집필하는 영광을 누려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것은 내 삶에 가장 큰 손실이었을 것이다. 태평양 한가운데에 빗방울 한 방울이 더해지듯이, 지금껏 내가 썼고 앞으로 쓸 책들이 함석헌의 거대한 사상적 유산을 더하는데 하나의 작은 빗방울이라도 될 수 있다면 나는 그에 더 큰 바람이 없다.
살아갈수록 나는 함석헌 선생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의식하게 된다. 특별히 선생님의 영향으로 나는 철도공무원에서 역사가, 근본주의자에서 관용주의자, 복음주의자에서 인본주의자, 교조주의자에서 낭만주의자가 되었다. 내게 역사와 철학의 '맛'을 알게 해 준 분도 선생님이고, 무엇이 인생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인지를 깨우쳐준 분도 선생님이다.
성공의 길보다는, 비록 실패할지라도, 옳은 길이 무엇인지 몸으로 친히 보여주신 분이 함석헌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내게 진리, 도(道), 하느님을 보여준 마음의 창문과 같은 존재다. 그가 살아서 그의 가르침과 영감(inspiration)이 내 인생에 어떤 열매를 거두게 했나 보셨으면 하는 염원도 감히 해본다. 그가 남겨준 따스한 사랑과 들사람얼(野人精神)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항상 나와 함께하리라 확신하며, 이번 스승의 날을 맞아 함석헌 선생님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 함석헌, 김동길 선생님. 1988년 10월 함 선생님 댁에서 내가 찍은 사진. | |
ⓒ 김성수 |
'인생은 선생을 만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말도 결국 제자들은 스승이 평생 이룩한 업적과 그 열매를 먹고 산다는 말일 것이다.
나에겐 스승이 두 분 있다. 한 분은 함석헌 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김동길 선생님이다. 인간은 사상적 존재이지만 세상살이를 하다 보면 조직을 벗어나서 살기는 어려운 것 같다. 함석헌 선생님을 통해서 나는 '조직을 넘어서' 일하는 법을 배웠고, 김동길 선생님을 통해서 나는 '조직과 더불어' 일하는 법을 배웠다.
나의 십대는 그저 '조용한 아이'였다. 과외나 학원도 안 다니고 학교수업만 열심히 들었지만 공부는 그저 그랬다. 1979년 나는 신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한국철도대에 입학했다. 철도대는 국립으로 당시 거의 무료였다. 그래서 나는 학비가 거의 없고 취업이 보장된 철도대에 입학하게 된 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철도대 생활을 열심히 했고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내 생활의 반경은 집, 학교, 교회로 지나칠 정도로 단순했고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 하의 사회문제에도 전혀 무관심했다.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해준 선생님
철도대를 한참 다니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었다. 박정희가 죽은 직후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우연히 김동길 선생님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나는 당시 어수선한 시국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둔감한 청년에 불과했다.
이런 철없던 청년에게 선생님의 해학과 기지를 섞어서 하는 강의는 큰 감동을 주었다. 선생님은 당시 박정희가 "자기 머리보다 훨씬 큰 감투를 쓰고 있으니 그 감투에 눈과 귀가 가려 듣지도 보지도 못하다가 결국 '탕탕탕!' 소리와 함께 목숨을 잃은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셨다. 무서운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하는 선생님의 강의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벅차오르는 감격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함석헌'이란 친숙하지 않은 이름 석 자를 처음 접한 것도 이날 김동길 선생님의 강연을 통해서였다.
그로부터 멀지 않아,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공개강연을 직접들을 기회를 얻었다. 그때 나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고, 그의 조용한 열변에 나는 마치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주체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관련 기사 :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때부터 함석헌, 김동길 선생님 두 분은 내게 이상적인 종교인, 사회인, 그리고 역사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80년대 초반의 어수선한 시국을 놓고 두 분은 종교인의 사회참여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 것인지 삶으로 보여 주셨다. 두 분의 말과 글을 접하며 비로소 늦게나마 나의 자아의식이 눈뜨기 시작했다.
그 후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친구를 만나도, 길을 걸어도 매 순간 어디서나 그분들을 생각했다. 이것이 나의 취미였고 나의 에너지였고 나의 궁극적 관심이었고 나의 전부였다. 그분들의 글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강연을 미친 듯이 쫓아다녔고 내방을 아예 그분들의 사진으로 도배했다. 당시의 나를 '미친놈'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주경야독(晝耕夜讀)
▲ 김동길 선생님 1990년 4월 영국유학 가기 전날 김동길 선생님 댁에서 식사 후 선생님은 좋은 가죽지갑에 100불을 넣어 주셨다. | |
ⓒ 김성수 |
1984년 봄 내가 제대하던 해, 김동길 선생님은 10년간 해직교수 생활을 마치고 연세대학에 복권되셨다. 같은 시기 나는 철도청에 제대 후 복직했다. 경의선, 경원선, 경부선, 경춘선, 장항선 열차로 전국을 누비며 틈틈이 군대생활 중 입학한 방송대 영어과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퇴근 후 매주, 월, 수, 금요일엔 연세대학교로 가서 김동길 선생님의 '서양문화사', '미국사', '전체주의 제국주의' 강의를 도강했다. 매주 화, 목, 일요일엔 명동과 봉원동에서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장자', '퀘이커리즘', '성경'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두 분의 말씀은 아주 재미있었고, 나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을 주었다. 두 분을 생각할 때마다 밀물져 오는 감동과 설렘이 있었지만 그 설렘을 꾹 눌러 가슴에 눌러 담고, 나는 먹고살기 위해 8년 동안 철도청에서 일했다. 몸은 그렇게 기차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지만, 마음은 늘 그분들한테로 다가가 있었다.
그러던 중 1989년 2월 4일 오전 5시 40분,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전화 저쪽의 박 선생은 "함 선생님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즉시 택시를 타고 서울대학병원으로 향했다. 택시 안의 라디오 뉴스에선 벌써 "함석헌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었다. 비록 이른 새벽이었지만, 서울대병원 영안실엔 벌써 몇 사람의 조문객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의 관을 보고, 그의 시신을 보고 나는 마치 나 자신이 그 관속에 누워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시신 앞에 예를 올린 후,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그의 삶, 그의 죽음, 그리고 나의 인생…. 3시간 후, 나는 8년간 공무원으로 일하던 철도청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 후 나는 곧 퇴직금을 털어 무작정 영국유학길에 올랐다).
1990년 나는 김동길 선생님의 추천서와 더불어 영국 에섹스 대학교 역사학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학비와 생활비가 없었다. 그때 우연히 만난 두 영국 여성이 내게 평생 은인이 되기 시작했다. 한 분은 의사인 잉글 라이트였고, 또 한 분은 캠브리지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던 안띠아 리(Anthea Lee)라는 중년 여성이었다. (☞ 관련 기사 : 베갯속 죽은 쥐...영국여의사는 왜 한국에 왔나)
나는 안띠아를 1990년 8월 한 콘퍼런스에서 만났다. 안띠아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고 불어는 물론 독어도 유창했다. 영국 북구 셰필드라는 곳에서 열린 이 콘퍼런스에 참석한 사람 중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전생의 '어머니'를 만나다
▲ 안띠아. 1992년 런던에서... | |
ⓒ 김성수 |
콘퍼런스 중 아침 세션이 끝나고 한 여인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와서 인사했는데 그 여인이 바로 안띠아였다. 그녀의 첫인상이 상당히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는 금방 마치 오래 사귄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안띠아는 대학에서 조기은퇴를 하고 '영적치료사(spiritual healer)'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영적치료사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안띠아가 훗날 나에게 이야기한 것은 이렇다.
나를 처음 본 순간 안띠아는 내가 전생에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봤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전생에 자기의 실수로 내가 희생이 되어서 이생에서 자기는 나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고 했다. 안띠아는 사람들의 전생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까 봐 먼 훗날 우리가 아주 막역한 사이가 될 때까지 그 이야기를 내게 전혀 하지 않았다.
하여간 안띠아의 적극적이고 애정 어린 도움으로 나는 영국의 한 교육재단으로부터 4천여 만 원의 장학금을 받고 에섹스 대학교 역사 학부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잉글이 상당히 지성적인 여성이었다면 안띠아는 상당히 감성적인 여성이었다. 안띠아는 나와 띠동갑이었고 같은 왼손잡이였으며, 그 외에도 동서 문화와 나이를 뛰어넘어 여러모로 통하는 점이 많았다.
학기 중에도 주말에 우리는 종종 런던에서 만났다. 안띠아는 틈만 나면 나를 런던에 있는 여러 미술관 등지에 데리고 다니며 유명한 예술품과 그 배경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내가 예술에 대해 좀 더 좋은 감각이 있었다면 그녀에게 들은 귀동냥만으로도 아마 지금쯤 유명한 예술비평가가 되었을 것이다. 젊어서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다녀와서 그런지 나는 안띠아가 종종 영국 여성보다는 세련된 불란서 여성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학원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신 김동길 선생님
▲ 김동길 선생님, 안띠아, 나. 1991년 2월 영국 런던에서... | |
ⓒ 김성수 |
그러던 중 에섹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동대학 대학원 역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학비와 생활비가 없었다. 그때 한국에 계신 김동길 선생님께서 내 석사과정의 전 학비와 생활비를 지급해 주셨다. 아마 선생님은 만학도인 나를 친아들처럼 대견하게 생각하신 것 같다(훗날 한국에 가족들과 귀국하고 나서도 나는 직장생활을 하며 월급을 못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때마다 김동길 선생님은 아내 손에 나 몰래 몇백만 원씩의 봉투를 지워주셨다).
1994년 나는 에섹스 대학교에서 무사히 석사를 마치고 셰필드 대학교 박사과정에 합격했지만 이번에도 또 학비와 생활비가 없었다. 등록일을 앞두고 2500여 군데가 되는 영국 장학 단체 중 250 군데에 장학금 지원서를 보냈다. 그 중 10여 곳에서 크고 작은 장학금을 받았다. 그리고 셰필드 대학교에서도 얼마간의 장학금을 받았다. 그래도 역시 학비와 생활비가 부족했다. 학업을 포기하느냐 마느냐의 귀로에 있었다. 이때 잉글이 나의 박사과정 학비와 생활비를 선뜻 지원해 준 것이다.
돌이켜 보니 1990년 무작정 영국 유학을 와서 1998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여러 분이나 단체로부터 도움받은 액수가 1억 원이 훨씬 넘었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 사랑의 빚을 언젠가는 후진들에게 꼭 갚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스승은 역사, 역사는 이어지는 것
▲ 함석헌 김동길 선생님, 1988년 10월 함 선생님 댁에서 내가 찍은 사진. | |
ⓒ 김성수 |
함석헌 선생님은 1989년 2월 4일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반 후인 1992년, 역사학도로서 나는 영국 에섹스 대학교에서 학사논문으로 <함석헌과 한국의 민주주의>를 썼다. 5년 반 후인 1994년, 동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논문으로 나는 <함석헌의 노장사상과 퀘이커리즘 이해>를 제출했다. 9년 반 후인 1998년, 나는 영국 셰필드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으로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연구>를 집필했다. 이러한 논문들은 함석헌의 거대한 삶과 생각을 서구의 대학에서 학문적으로 정리해 보려는 나의 작은 몸부림이었다.
내가 만약 함석헌, 김동길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철도공무원으로 내 인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우리와는 너무 다른 서구사회를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함석헌, 김동길, 잉글, 안띠아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함석헌평전>을 집필하는 영광을 누려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것은 내 삶에 가장 큰 손실이었을 것이다. 태평양 한가운데에 빗방울 한 방울이 더해지듯이, 지금껏 내가 썼고 앞으로 쓸 책들이 함석헌의 거대한 사상적 유산을 더하는데 하나의 작은 빗방울이라도 될 수 있다면 나는 그에 더 큰 바람이 없다.
살아갈수록 나는 함석헌 선생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의식하게 된다. 특별히 선생님의 영향으로 나는 철도공무원에서 역사가, 근본주의자에서 관용주의자, 복음주의자에서 인본주의자, 교조주의자에서 낭만주의자가 되었다. 내게 역사와 철학의 '맛'을 알게 해 준 분도 선생님이고, 무엇이 인생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인지를 깨우쳐준 분도 선생님이다.
성공의 길보다는, 비록 실패할지라도, 옳은 길이 무엇인지 몸으로 친히 보여주신 분이 함석헌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내게 진리, 도(道), 하느님을 보여준 마음의 창문과 같은 존재다. 그가 살아서 그의 가르침과 영감(inspiration)이 내 인생에 어떤 열매를 거두게 했나 보셨으면 하는 염원도 감히 해본다. 그가 남겨준 따스한 사랑과 들사람얼(野人精神)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항상 나와 함께하리라 확신하며, 이번 스승의 날을 맞아 함석헌 선생님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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