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28

자료실 - 은호기/함석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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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호기/함석헌은 누구인가
http://www.hanism.org/han/7012013.01.24 14:40:53 63453143
함석헌, 누구인가?

-그의 삶과 씨사상

은호기 <미국·시사평론>

함석헌의 삶과 한국현대사 100년

함석헌은 1901년에 태어나 1989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 90여년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고난의 역사이었던 한국현대사 100년에 그대로 포개진다. 조선조의 멸망, 일본의 식민지, 해방, 외국점령군의 통치, 분단, 동족상잔, 분단체제의 국제화, 분단독재. 이 모순과 고난의 역사를 함석헌은 온몸으로 안고, 부딪치며 살아왔다. 힘들고 거친 세월이었다. 이 역사의 고비마다에서 그는 자신을 무섭도록 단련하고 확인해왔다. 넓게 공부하고, 깊게 생각하면서도, 흰 수염 휘날리는 겉모습과는 달리 꾸밈없는 들사람의 모습으로 계산 없이 대들며, 부딪치며 살았다. 그 고비, 고비마다에서 그의 삶은 여러 모습으로 세상에 각인되었으니, 교육자, 종교인, 사상가, 언론인, 시인 등의 호칭을 얻게 되었으며, 감옥을 마다하지 않은 그의 올곧음은 민족운동가, 민주화운동가의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였다. 이는 그 자신이 뜻한 바나 원한 바가 아니었다. 순전히 사회가 만들어 불러준, 호칭들이다.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이토록 가열차게 산, 실천적 지성인이 몇이나 될까? 많이 배우고, 경지를 이룬 분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거개가 시대의 권력에 구부러지거나 꺾여 살았다. 자기이기를 포기한 삶. 우리의 슬픈 역사다. 함석헌의 삶이 돋보이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면 무엇이, 무슨 생각이 그를 그토록 치열하게 살게 하였을까? 차분히 그의 삶을 살펴보면, 한 낱말이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씨. 그렇다, 씨이다. 씨의 존재를 확인하고, 씨을 억압하는 무리나 장치를 뚫고 나아가 온전히 되어지려는 뜻의 역동이었다. 그렇기에 시대의 모순과 고난은 오히려 씨에게는 도전과 축복이었으며, 하나님과 소통하고 한 몸이 되려는 사랑과 희망이었다.

함석헌의 씨

씨이란 무엇인가? 민(民)을 말한다. 민초(民草), 풀뿌리 삶을 말한다. Grass root다. 인민을 뜻한다. People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인민대중의 민중을 뜻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씨의 값에 적확(的確)하진 않다. 함석헌의 씨은 이미 보통명사의 의미를 넘어 함석헌 사상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으며, 함석헌 사상의 대표어이기 때문이다.

씨알이란 말은 전혀 새로울 게 없다. 민초들이 흔하게 쓰는 말이다. 씨알이란 종자를 일컫는다. 내일의 농사를 위해서 끝까지 남겨두어야 하는 밑천이다. 구태여 떼어 설명하자면, 씨는 식물의 종자요, 알은 동물의 모체이다. 그러니까 씨알은 만물
의 근원이며, 시작이랄 수도 있다.

이 씨알이란 말을 사회학적으로 처음 쓴 분이 함석헌의 스승 유영모이었다 한다. 동양 고전에 나오는 민(民)을 씨알로 번역,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씨은 유영모의 씨알과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민(民)의 번역어를 뛰어넘는다. 달리 말하면, 함석헌은 평생을 씨이라는 말과 씨름하면서 살았다. 그 의미를 따지고 내용을 정리하는 데 온 힘을 기우렸다. 따라서 씨이라는 말에는 함석헌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씨은 함석헌 사상의 출발이며, 과정이며, 목표이다. 함석헌의 전부이다. 그러기에 《씨의 소리》사 편집진과 함석헌 연구가들은 ‘씨알’ 아닌 ‘씨’로 쓸 것을 주문하며, 의 ‘ㅇ'은 초월적인 하늘을, 'ㆍ'은 내재적인 하늘 즉 자아를, 'ㄹ'은 활동하는 생명의 의미임을 강조한다.

씨과 종교

함석헌은 기독교인이다. 자신의 말마따나 “하나님의 발길에 차여서”일까, 별난 기독교인이다.

그는 동경 유학시절,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등과 함께 우치무라 간지(內村鑑三)가 지도하는 무교회(無敎會)주의 성서연구모임에 참여, 공부하였다. 후에 무교회주의를 내건 <조선성서연구회>를 만들었으며, 김교신 주도로 《성서조선》을 창간하였다. 무교회주의란 말 그대로 성직이나 조직을 거부하는 신앙이다. 종교란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그 뜻을 찾아가는 씨의 몸부림이며, 버릇’이다. 따라서 씨은 종교의 주체이며,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 사이엔 아무 것도 끼어들 틈이 없으며, 끼어든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과의 거리를 멀게 할뿐더러 신앙을 오도할 염려 때문일 터이다.

함석헌은 1961년, 오철, 이행우 등과 함께 한국퀘이커 모임을 만듦으로써 퀘이커인이 된다. 퀘이커교는 성직도 설교도 없다. 명상과 토론 중심의 모임이다. 그럼에도 영국, 미국 퀘이커는 세계평화에 많은 노력을 기우려왔으며, 그 공헌을 인정받아 194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퀘이커는 남북의 화해문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함석헌이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차례나 올랐던 것도 미국퀘이커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종교는 곧 ‘생명의 버릇’이라는 그의 정의는 모든 종교에 적용된다. 그러기에 함석헌은 불교도 노장사상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노불(老佛)사상을 억지로 기독교성서적으로 해석하려들지도 않을뿐더러 기독교성서를 노불사상으로 해석하려 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교섭과 조화, 즉 인류평화의 근간으로 삼고자 한다. 생명의 근본원리를 ‘고(苦)’라 한 점이나 억지로 꾸며 해서는 안 된다는 ‘무위’(無爲)사상의 강조는 그의 이해의 폭과 깊이를 말해준다 하겠다.

함석헌은 동경 유학시절부터 과학의 가치를 받아들였다. 발전된 과학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면 ‘낡은 종교’로 떨어지게 된다며 과학을 수용하고 소화하는 것이야 말로 신앙의 성장이라 주장하였다. 그에게는 과학과 종교가 적대적이고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다. ‘사물’의 세계인 과학과 ‘의미’의 세계인 종교가 구분되긴 하지만 다같이 씨의 되려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진화론을 인정하고 있으며, 창조론과 대립시키지 않는다. 진화론을 인정하되 그 과정과 뜻은 하나님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현상을 무한히 끝없는 변천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과정철학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끝으로, 함석헌의 종교이해는 인류공통체에 가 닿고 있다. 씨은 모두 같으며, 그 씨들의 몸부림이 곧 종교일진데 가는 길이 인류공동체인 것은 당연하다. 어느 한 종교나 국가가 만들어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씨의 어우러짐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도 평화적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함석헌을 세계주의자, 평화주의자로 보는 까닭이다.


뜻으로 본 역사

함석헌은 식민지 때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조선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정리, 《성서조선》(발행인 김교신)에 연재하였다. 해방 후,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낸 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50, 서울)이다.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새롭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상’을 들이밀었다. 이 새롭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조는 문학, 예술, 학문 등의 모든 분야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이 과학적인 분석에 의해 조선의 모든 것은 헛것이 되었고, 미신으로 배척되었다.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과학적인 실증사학(實證史學)에 의해 이제까지의 조선역사는 서당훈장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전락되었다. ‘실증 없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라는 과학적인 접근법에 의해 5천년의 조선역사는 2천년 역사로 쪼그라들었고, 스스로 국가를 경영할 수없는 형편없는 민족으로 규정되었다. 생존경쟁에서 강한자만이 살아남듯이 국제사회에서도 강한 민족(국가)이 약한 민족(국가)을 지배, 보호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사회진화론을 내밀었다. 그럴까? 우리도 우리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위대한 역사적 인물들을 내세워 우리 역사의 위대함을 증명하려 했고 (영웅사관), 광활한 땅에서 웅혼(雄渾)한 역사를 펼쳤던 상고사를 강조하기도 했다.

함석헌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조선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하였으며, 고난의 역사에는 분명 ‘뜻’이 있을 것이라며 그 뜻을 “믿는 자의 의지와 나라에 대한 사랑과 과학적이려는 양심”을 가지고 해석해 본 역사가 바로 이 역사서다. “사실(史實)의 역사, 기술의 역사, 연구의 역사”는 역사가에게 맡긴다면서 “역사가 이렇게 흐르게 하는 밑의 정신, 뜻”을 밝히려 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역사서는





전혀 색달라서 분노와 힘을 솟구치게 하지만, 비판이 따르기도 한다.

함석헌은 이 역사서를 쓸 당시에는 그 ‘뜻’을 하나님의 말씀에 국한하였다. 그래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 씨사상이 발전하면서 기독교의 울타리를 뛰어넘는다. “종교는 생명의 버릇”이며, “정신의 숨쉼이 곧 종교”라는 깨달음에서 “모든 종교는 하나”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그 ‘뜻’이 기독교 하나님의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종교의 것일 수도 있다는, 넓어진 시각에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바뀌었고, 내용도 이에 따라 손질되었다.

함석헌의 우리말 사랑과 언론

함석헌은 1958년 여름, 《사상계》 8월호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기고한다.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이승만 독재정권에 들이댄 칼날이었다. 이 글 한 편으로 그는 당장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실로 오랜만에 침묵을 깬 것이다. 북조선의 해방공간에서 새나라 교육의 꿈을 안고 평안북도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의 일을 맡았으나 신의주학생사건(반소, 반공항쟁, 1945. 11.)의 배후로 지목되어 소련군 당국에 체포, 구금되었다가 풀려나자 월남(1947. 2.)한 그는, 초야(草野)에 묻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있는듯없는듯 살아온 터였다. 그러나 그 글 때문에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반공법 위반. 서대문형무소는 그가 일제당국에 의해 감옥살이를 했던 곳, 그곳에 ‘해방된 우리의 정부’에 의해 다시 투옥되었으니.

이를 계기로《사상계》와의 관계는 깊어졌다. 발행인 장준하의 튼실한 버팀목이었다. 장준하가 머뭇거릴 때면 그가 먼저 치고 나갔다.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상계》 1961. 7.), 소위 ‘5.16군사혁명’을 맨처음 비판한 이도 함석헌이었다. 두려울 게 없었다. 그는 한낱 씨이었으니까. 군사정부와의 모질고 기나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체포, 구금, 재판의 연속이었다. 함석헌의 팔자가 사나운 것일까, 역사가 미쳐 지랄을 한 것일까? 일제식민지 때에도 감옥살이, 해방된 북조선에서도 감방살이, ‘자유 대한’ 남한에서도 감옥살이.

조선 식민지 통치에 앞장섰던 일본군장교 출신 박정희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광복군 출신 장준하를 파멸시킨다. 《사상계》는 강제 폐간되었다. 그나마 말길이 막혔다. 함석헌이 나섰다. 1970년,《씨의 소리》를 창간,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지치지 않고 강연을 하며 글을 썼고, 잡지를 창간, 운영했음에도 그는 언론인 체하지 안했다. 시집을 냈어도 시인이 아니었고, 종교인이면서도 성직을 부정하였다. 사상가이면서도 대학 강단에 서질 안했다. 그가 꼿꼿이, 당당하게 자기를 내세우며 섰던 곳은 오직 재판정뿐이었다.

함석헌은 민중(씨)의 말투와 말씨에 철저하였다. 글도 순 한글로, 말하듯 썼다. 《사상계》에 처음 실렸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도 구어체의 순 한글로 쓰


였다. 이른바 지식인 잡지로 평가 받았던 《사상계》는 물론이려니와 일간신문조차도 사회면을 빼고는 온통 한문투성이의 글로 메우던 그 때에 순 한글로 말하듯 글을 썼으니 그것만으로도 충격이었다. (함석헌의 이 글은 《월간조선》(2000. 7.)이 선정한 <한국의 명문>에 들었다.) 이 역시 씨의 확인이요, 씨과 함께하려는 노력이었다.

함석헌 삶의 참값

한국현대사에서 함석헌만큼 동서양의 종교, 사상을 폭넓게 안으면서 여러 분야를 아우르고 있는 지성인도 흔치 않다. 기독교인이면서도 불교와 노장사상을 받아들이고, 종교와 과학의 이분법적 사고를 뛰어넘고 있다. 과학으로서 진화론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중심에 두면서도 과정철학적 접근을 허용한다. 한마디로 규정하고 특정지울 수 없는, ‘근대 백년 논쟁의 인물’ (<교수신문>2010. 4.)이다.

그럼에도 그의 삶의 참값은 실천적 삶에 더 있다. 그렇다, 실천적 삶, 행(行)이다. 공부하고 생각하면서 다지는 것도 값있는 일이지만, 보다 값진 일, 누구나 할 수 없는 가치는 행(行)에 있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공자)했거니와 이에 더해 행이 따라야 한다. 행(行)이 따르지 않는 학(學), 사(思)는 씨을 밀어내고 억압하는 도구로 떨어진다는 사실(史實)을 역사는 누누이 밝히고 있다. 학과 사는 행을 전제하며, 행을 거쳐서만이 학과 사가 더 튼튼해지고 힘을 얻게 될 터이다. 행은 다른 말로 하면 부딪침이다. 세월 좋을 때, 과연 역사에서 세월 좋은 때가 얼마나 있었을까, 만은 그 세월과 함께 쫄랑대고 나대는 것이 실천이 아니다. 어렵고 힘들 때,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무리들과 그들이 만들어 논 장치에 대드는 것, 참 실천이다. 일제에 대들고, 외군통치에 대들고, 독재체제에 대들었던 것이 참실천이다. 따지고 보면, 역사적 성과를 늘 지배층의 공으로 둔갑시키고 있지만, 실은 씨이 대든 역사 아니던가?

당연히 함석헌은 평생을 들사람[野人]으로 살았다. 시대와 타협하고 상황에 그럴듯하게 부합하지 않았다. 뒤집어서 말하면, 그가 살았던 시대와 상황은 그로서는 도저히 타협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일제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당시로는 드믄 인재였다. 그가 다녔던 평양고보(제2고보)는, 경성고보(제1고보), 대구고보(제3고보), 함흥고보(제4고보), 전주고보(제5고보) 등 일제가 각도에 세웠던 엘리트 식민교육기관이었으며, 동경고등사범학교 역시 일본에서도 손꼽이는 대학이었다. 그렇지만 식민교육기관을 통해서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고 세계를 넓혀갔을지언정 그는 일제의 식민교육목적을 거부하였다. 이미 평양고보 3학년 때 3.1운동에 참여함으로써 퇴학을 당하였음은 물론 일본인 교장이 제시한 복교조건(반성문)을 단호히 거부한 데서 그의 결기를 읽을 수 있다. 해방 후에도 일제하의 학벌과 경력이 그대로 힘을 발휘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야인의 길을 고집하였다. 그의 학력이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함석헌, 그는 진정 씨, 그 자체였다. 씨인 그는 언제나 씨과 함께였으며, 씨의 되어짐에 온 정신과 마음과 몸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이승을 떠났다. 그의 허연 수염, 흰 두루마기는 씨의 다짐이었으며, 끊임없는 자기확인에 다름 아니었다. (*)


*이글은 <LA사람사는세상>이 마련한 <함석헌탄신111주년기념강연회>(로스앤젤레스, 2012. 3. 9.) 강연원고이다. 소개에 중점을 두었으며, 인용주는 생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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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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