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30

오철근

인권재단사람

유난히 느린 삼보일배
관리자 ㅣ 2008-01-09 ㅣ 1502
[%=사진1%] 찬찬히 들려진 발이 땅으로 안착할 때까지 허공을 가르는 공기의 움직임이 유난히 느리다. 연말 국회 앞, 여지없이 분주한 정장 차림의 사람들 가운데 베옷을 입고 국회 앞으로 한 땀씩 발을 내딛는 성성한 백발의 움직임은 자못 고행자의 그것과 닮았다. 지난 수십 년간 관 속으로 묻히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특히 남북정상회담 이후 폐지의 도움닫기에 탄력을 받으리라는 세간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망령으로 존재하는 국가보안법. 오철근 씨의 느릿한 발걸음에는 국가보안법 폐지의 바람이 실려 있다.


유독 매서운 여의도의 겨울바람이 견디기에 힘드시지 않느냐는 질문에, 오철근 씨는 추위보다는 삼보일배를 하지 못하는 비오는 날이 제일 걱정이라고 운을 뗀다. 지난 11월,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의 폐지를 촉구하는 선언문을 인터넷을 통하여 접하고 난 후, 폐지의 필요성에 시민의 한 명으로서 동감을 하고 정성스러운 발걸음을 시작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치며 감옥에서 48일 동안 단식을 진행한 바 있던 사진작가 이시우 씨가 12월 5일 임진각으로 고된 삼보일배를 떠난 것과 짝지어 국회 앞에서 조용하고 묵묵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셈이다.


오철근 씨는 비폭력평화물결과 함석헌기념사업회의 회원이자 퀘이커 신자이다. 함석헌 선생님의 임종 직전까지 약 10년 동안 곁에서 모시고 많은 배움을 얻었다는 그는 최근 함석헌 선생님의 글을 다시 곱씹어보고 장자, 논어 등의 동양 고전을 읽으면서 이제야 인생에 철이 들었다고 겸허하게 말씀하신다. 자기해방이 없는 사회해방은 뿌리 없는 나무이고 사회해방 없는 자기해방은 스스로를 파먹는 것과 다름없다며 내면적 성찰의 힘에 바탕을 두어 일희일비하지 않고 투쟁을 진행하자는 생각 역시, 함석헌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게 작용하여 생성되었다고 전한다. 


국회의 개폐여부에 따라서 투쟁 수위의 높낮이가 조절되고 시민참여가 더디다하여 일시적이고 단발적인 싸움에 머물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운동진영에 대한 반문은, 참마음이 아니면 민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진중함에서 비롯된 듯하다. 국회의 양심을 깨치라고 외치기 이전에 무기력과 암담함에 시달리기 쉬운 민중의 마음을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이를 위해 본인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철근 씨는 역사에는 에누리가 없다고, 역사적 병을 쉽게 고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욕망에 가려진 참을 밝히기 위한 성찰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좀처럼 ‘승리’를 허용하지 않는 고단하고 부박한 일상에서, 참마음이 참결과로 정직하게 이어지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녹록치 않은 시간들 틈새에서, 여기저기서 흘리는 향기로운 단내에 취하기 십상인 분초 앞에서, 소리 없이 느리고 끈끈한 행보의 발견은 적잖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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