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30일 연합뉴스에 "함석헌과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사상적 간극 있어"라는 제목으로 영남대 박홍규 교수에 관한 글이 실렸다.
이 글에서 박 교수는 인도의 간디와 한국의 함석헌은 "두 사람 모두 민중을 말했으나 민중의 입장에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간디와 달리 함석헌은 사회주의를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간디는 경제적 평등을 주장했고,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옹호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자'였지만 함석헌 선생은 이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박 교수의 요지였다.
나도 박 교수 말대로 함석헌과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사상적 간극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간극은 자연스럽다고 당연하다고 본다. 세상에 사상적 간극이 없이 생각이 똑같은 사상가가 있을까?
집권한 정치인 간디와 재야사상가 함석헌
간디(1869-1948)는 생전에 권력을 잡은 집권정치인이었지만 함석헌(1901-1989)은 죽을 때까지 권력의 근처에도 못가 본 재야사상가였다. 역사 인물을 비교할 때 그 인물이 살았던 나라와 시대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한국은 지금도 국가보안법이 살아있고 분단 상황에 매카시즘이 여전히 판을 치는 분단된 지구상의 유일한 냉전국가(때로는 열전국가)다. 아울러 함석헌과 간디가 살았던 정치사회 상황과 시대배경이 너무 달랐다는 점을 두 인물을 비교할 때 간과해선 안 된다. 이 뜻은 한국과 인도의 정치사회적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한국과 인도, 함석헌과 간디를 평면적, 도식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함석헌 사상을 왜곡할 우려가 충분히 있다는 말이다.
함석헌은 능력에 따른 분배보다는 필요에 따른 분배 그리고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적 가치를 인정했다, 다만 한반도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정권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폭력투쟁을 택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한반도가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냉전체제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에 대해서 비교적 수용적이었고 특히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페이비언이란, 점진주의자란 뜻으로 페이비언(Fabian)이란 이름은, 카르타고의 침략에 대항해서 지구전을 주창했던 고대 로마의 파비우스(Fabius) 장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당면한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해서 급격한 혁명이나 투쟁보다는 꾸준한 연구와 운동을 통해 대중과 지도층을 설득해서 점차적 제도개혁을 추구하자는 사상이다.
마르크스가 영국에서 자신의 이론을 완성하고 친구 엥겔스가 출판까지 했으나 정작 마르크시즘은 영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극단적 혁명에 의해서만 자본주의 계급적 사회구조와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마르크시즘은 급격한 혁명보다는 점진적 개혁을 더 선호하는 영국인들로부터 거부되었던 것이다. 1880년 이후 마르크시즘 이 영국에 소개되고 과격한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런 '사회주의' 과격성에 대칭되어 일어난 점진적 사회주의 운동이 바로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 운동이며 함석헌 역시 나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라고 평가한다.
함석헌이 1940년 일제강점기 평양근교에 시작한 공동체 운동인 송산농사학원, 1957년 전개한 또 다른 공동체 운동인 천안 씨알농장, 1961년 강원도에서 시작한 안반덕 씨알농장, 1970년 전 사회를 대상으로 전개한 '같이살기운동' 등은 모두 그의 이상인 종교, 교육, 농사를 하나로 묶어서 돈과 물질만능주의의 세태를 극복하고자 시도했던 점진적 사회주의운동이었다. 1957년 당시 함석헌이 쓴 글을 직접보자:
"믿음과 교육과 농사를 하나로 껴붙이어 돈 아니고 사는 세상을 만들어봤으면 하는 꿈은 언제나 놓지 못하고 가지고 온다. 일제시대엔 그걸로 싸우려 해봤고 오늘은 또 그걸로 오늘의 대적과 싸우련다. 오산을 그만둔 것도 그 때문, 송산을 간 것도 그 때문, 인생대학 이후 용천서 농사를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함석헌이 1970년 창간한 <씨알의 소리> 창간사도 그의 사회주의 사상을 반영한다. "씨알의 소리는 같이 살기운동을 펴나가려고 합니다"는 이 선언은 함석헌이 <씨알의 소리> 중 "우리가 내세우는 것"에서 한 말이다. 그는 "우리가 내세우는 것"을 이렇게 맺고 있다:
"씨알은 선(善)을 혼자서 하려 하지 않습니다. 씨알은 너 나가 있으면서도 너 나가 없습니다. 네 마음 따로 내 마음 따로가 아닌 것이 참 마음입니다. 우리는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우리 하나하나 속에 다 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1970년대 <씨알의 소리>를 통한 '같이살기운동'을 펼치며, "공동훈련 안 하면 씨알 노릇 못한다"고 역설하며 또 다른 공동체 운동을 시도한 것이다. 노자가 "도가 어디 있는가? 전체에 있다"고 한 것처럼 함석헌은 "모든 것은 전체의 재단에 바쳐서만 보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전체만이 거룩한 것"이라고 보았다. "완전한 전체가 하나로 있으면 그것이 깨끗한 것, 거룩한 것이요, 전체에서 떨어지면 더러운 것이다. 때는 몸에서 떠난 살이요, 속(俗)은 하나님에게서 떠난 인간이다"라는 그의 표현도 보편주의, 사회주의, 공동체주의를 표방한다.
분단 상황은 정신분열 상황
정신적 분리만 아니라 공간적 분리도 함석헌에게는 그래서 분열 그 자체였다. 그에게 남북분단은 민족 정신분열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은 함석헌에게 가장 긴급한 극복해야 할 과제 중 하나였던 것이다.
조봉암(1898-1959)과 함석헌(1901-1989)은 6.25전쟁 후 냉전 하에서 평화통일을 옹호한 1950년대 후반 대표적 지성인들이었다. 조봉암은 진보정치인이었고 함석헌은 종교사상가였다. 둘은 매카시즘이 날뛰는 비슷한 시기에, 그 당시로서는 금기였던 남북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내려진 결과는 극명하게 달랐다. 조봉암은 1959년 결국 억울하게 이승만의 손에 의해 사형을 당했고 함석헌은 지금도 살아 있는 국가보안법으로 20일간 수감되어 매를 맞는 곤욕을 치르는 것으로 그쳤다(관련기사 보기).
동시대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두 지성인 중에 왜 조봉암은 사형 당했고 함석헌은 무사했을까? 조봉암과 다르게 함석헌은 정치인이 아니었고 조직된 정당의 지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정치적 조직력이 전혀 없었던 함석헌의 무조직 능력이 바로 어떤 독재권력 하에서도 그의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있었던 요소였다. 정치조직이 없고 정치일선에 서지 않는 함석헌을 이승만은 당연히 위협으로 느끼지 않았고 정적이 못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함석헌에 대한 정치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권력자로부터의 '업신여김'이 독재정권시대에 함석헌의 다양한 활동을 지탱해 줄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평화통일을 옹호하는 두 지성인의 생사를 갈라놓았다. 비정치인 함석헌에 대한 권력자의 '차별' 덕에 역으로 함석헌은 그 글과 말을 통해서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처럼.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사이를 보더라도, 좌우익을 막론하고, 김구(1876~1949), 여운형(1886~1947), 장덕수(1895~1947), 송진우(1889~1945) 등 주요한 좌우정치지도자들이 권력집단에 의해 수시로 제거되는데, 함석헌은 이때도 정치인이 아니었고 가지고 있는 정치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다행히 권력집단의 살생부에서 빠질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간디와 함석헌의 비교에 대한 박홍규 교수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민중을 말했으나 민중의 입장에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간디와 달리 함석헌은 사회주의를 거부했다.... 간디는 경제적 평등을 주장했고,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옹호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자'였지만 함석헌 선생은 이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박홍규 교수 논리에 나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간디와 함석헌을 비교하려면 아마 이런 표현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함석헌은 간디와는 달리 당대의 정치권력을 잡을 수 없었고, 자신이 꿈꾸던 사회주의, 경제적 평등, 토지개혁을 현실에 실행할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함석헌은 실패자였다. 함석헌은 일종의 '한국의 간디'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간디와는 달리, 함석헌은 전국적인 규모의 시민저항운동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고, 이것을 함석헌의 정치적(혹은 종교적)역량의 한계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단 상황, 냉전체제하에서 한반도의 정치사회적 한계, 함석헌이 살았던 시대의 한계와 실패로 표현함이 더욱 적합하지 않을까? 그래서 함석헌은 간디와는 달리 잘 짜인 조직력과 동원력보다는 그의 강연과 글, 성서공부, 노장공부모임 등을 통한 개인적 영향을 각 씨알에게 미침으로서 불의한 정권에 대항했던 것이 아닐까?
오리엔탈리스트 함석헌?
박홍규 교수는 또 위 글에서 "서양 기독교에 입각한 함석헌은 동서양을 철저히 구분한 오리엔탈리스트였고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다"고 지적했다. 반면. "간디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에 반대했고 인도문명에 대한 자부심으로 민중의 자부심을 고취했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는 '오리엔탈리즘'을 서양인이 동양을 볼 때에 선입견을 가지고 본다는 것,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방식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사이드는 열등한 동양이 존재하기에 우월한 서양이 존재하는 것으로 서양인은 인식한다고 보았다. 더욱이 서양인은 동양인이 열등하며 무능하고 게으르다고 생각하며, 자신들보다 두뇌나 신체 면에서 열등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수많은 문화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서양이 이를 통째로 동양이란 한 단어로 포함시키는 것이나, 서양이 쇠퇴하고 비참한 동양을 식민지화함으로써 동양을 구원해 내었다며 자신들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한다는 것 등이 사이드가 주장한 오리엔탈리즘의 주요골자다.
함석헌과 우치무라
함석헌 20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일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1861-1930)를 함석헌이 사상적으로 탈출하는 과정을 나는 박홍규 교수가 좀 정독해 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함석헌의 20대 기독교관 형성에 우치무라는 물론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함석헌이 30대 이후에 우치무라의 사상에 대해 점점 비판적으로 되어가는 이유 중 하나는, 또 40대 이후에 우치무라의 사상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이유 중 하나는, 우치무라가 동양철학에 서구기독교만큼 큰 비중을 두지 않은 것에 함석헌이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치무라가 만든 무교회운동도 기존의 기독교 교단처럼 "오직 성서만으로"(sola-Scriptura: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구원은 '오직 성서만을' 통해서 가능 하다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주장)의 원칙에 입각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함석헌이 우치무라나 무교회운동에 공감할 수 없게 된 것은 자연스런 결과다. 함석헌의 글을 직접 보자: "우치무라는 동양철학이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가 절대적으로 이런 입장을 취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영향은 내게 컸습니다."
1920년대인 20대에 우치무라를 처음 만난 함석헌은 시간이 경과 할수록 우치무라가 동양철학에 별로 기대를 안 가진 것에 대해 점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한 후, 함석헌은 그 자신의 종교관이 우치무라의 무교회운동과 더 이상 같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함석헌은 식민지화된 민족으로서의 한국과 식민 점령세력으로서의 일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우치무라는 일본인으로서 자연적으로, 한국을 무참히 식민지화한 일본제국주의 국가의 구성원 중 한사람 이었다. 반면 함석헌은, 일제하 한국인 식민지 지식인중 한사람으로 일본 식민통치에 의해 고난당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러니 두 사람이 처한 역사적 상황은 아주 상반될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치무라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화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우치무라는 이상적 한일관계를 영국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관계처럼 되기를 원했는데, 그것은 한국이 일본제국에 전적으로 귀속되면서 단지 필요에 따라 어느 정도 지역적 자치권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우치무라는 또한 동경대지진후 6000명 이상의 한국인이 일본인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에 대해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함석헌이 동경유학하던 시절인 1920년대에, 그는 우치무라의 한국관과 한국인관에 대해서 알 기회가 없었고, 단지 사회주의 이념과 기독교 윤리사이에서 번민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10여년 후인 1938년에 이르러, 비로소 함석헌은 친구 김교신을 통해서 우치무라의 한국관과 한국인관을 듣게 되었고, 동시에 이러한 우치무라의 시각과 태도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반발을 갖게 되었다. 식민지 한국인으로서 함석헌은 그 자신의 종교, 한국인의 종교, 한국인을 위한 종교를 발견하고자 온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던 궁극적인 질문의 해답을 함석헌은 일본인 우치무라를 통해서는 발견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그리고 이때부터 함석헌은 점차 서구 기독교 중심주의 종교관이나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다"라는 시각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러한 탈기독교적 혹은 탈서구 중심주의 함석헌의 입장은 결국 1952년 그의 시 「흰 손」과 1953년 「대선언」을 통해서 공식화되기에 이른다. 「대선언」의 이 한 구절은 지금도 나의 가슴을 뒤 흔든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물론 그 이전인 1940년 대 이미 함석헌은 서구문명 혹은 서구중심주의문명에 한계를 절감한다. 특별히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1943년에 걸쳐 일제의 한국민족 탄압정책이 점점 가혹해져 갔을 때가 그렇다. 이때 함석헌은 무력을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는 국제관계의 '약육강식' 논리를 정당화 해주며 세계를 국가주의로 몰아간다고 지적했다.
현대 국가는 본질적으로 강한 군사력 위주의 전투적 국가다. 경제적 의미에서 이건 군사적 의미에서 이건 각 국가는 서로 긴장대치되어 있다. 이 긴장대치 상황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현대 국가는 끊임없이 거대하고 강력한 국가체계를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강한 국가주의의 사회에서는 전체 민족과 국가가 철저한 중앙정부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이런 면에서, 국가주의의 근본은 이타주의라기보다는 강한 집단이기주의를 그 근본으로 한다. 이런 집단이기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국가주의에 대해 함석헌은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국가주의는 또한 그 체제유지를 위해 폭력 사용을 필수적 요소로 하기 때문에, 함석헌의 근본사상인 비폭력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
그는 민족과 국가 간의 평화는 역사의 '절대명령' 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평화는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말 문제가 아니다. 가능해도 가고 불가능해도 가야 하는 길이다. 이것은 역사의 절대명령이다. 평화 아니면 생명의 멸망이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노장사상, 새로운 문명의 안내자"
이러한 평화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함석헌은 노자의 평화사상에 매료되었고, 급기야는 노자를 최초의 평화주의자라고 이렇게 선포했다.
"노자는 전쟁의 무익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폭력이 국가의 정책으로 쓰여서는 안 되고, 국가 간에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함석헌은 제국주의와 국가폭력이 판치던 시대에 살았고,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시대 아래서 민중은 자유를 박탈당했고 삶은 억압당했다. 물질주의와 강한 군사력만이 중요시 되는 제국주의시대를 살면서 함석헌은 인류문명의 존폐문제를 염려했다. 또한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도 함석헌은 엄중하게 경고를 보냈다.
"사치스런 삶을 위해서 막대한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인류에게 전쟁을 초래 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윤추구가 모든 것의 동기가 되고, 이윤추구들 위해 기업들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보다는 더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값비싼 물건을 생산한다. 많은 경우에, 정치 및 경제적 힘의 추구는 인류에게 전쟁을 초래했다."
위와 같은 함석헌의 증언은, 왜 그가 자본주의나 서구중심주의 가치체제에 대해 회의를 품었는지 그 이유를 반영해준다. 그는 국가정책을 돋보이게 하기위한 한 방법으로 전쟁과 폭력을 권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므로, 국가 간의 평화적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런 질문을 한다. "만일 이 국가주의가 그대로 가려면 충돌할 테고 충돌 하면 전쟁 날 테고 전쟁한다면 핵무기 밑에서 생명의 종자가 없어질 것이니깐 이걸 건지려면 어떻게 할까?"
그는 인류의 새로운 희망은 국가관을 새롭게 가짐으로써야 가능하다고 스스로 답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국가관의 확립은 과거 인류의 고전철학을 재해석함으로써 성취 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고대인들이 현대인들보다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전철학중에서도 함석헌은 서양고전철학에 대해서는 기대를 걸지 않았다. 서양철학은 이미 서구의 문예부흥, 종교개혁, 산업혁명에 영향을 미쳤고, 그럼으로써 이미 과거에 그 사상적 역할과 공헌을 다했다. 결국 현대 세계의 자본주의나 물질주의는 서양철학과 서구문명의 소산이고, 인류의 미래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사상에는 더 이상 의지 할 수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지론이었다.
그럼으로 그동안 역사를 통해서 무시되어 왔던 동양철학을 재조명, 재해석해야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중세이후 역사를 통해 서구인들은 동적, 합리적, 실험적, 분석적, 세속적, 방법론적으로 지도자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서구인들은 그들의 임무를 다 끝내가고, 곧 인계를 해야 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정체성에 빠져있는 인류에게 새로운 문명의 사상적 안내자가 될 수 있는 고전철학으로 그는 노장사상을 역설했던 것이다.
함석헌은 노장사상의 유연함과 초월성에 매료되었고, 이러한 노장철학을 함석헌은 쓰이지 않고 감추어진 인류를 위한 사상적 보물창고로 여겼다. 노장사상은 연약함, 겸손함, 부드러움, 마음의 평정, 정념(情念)의 순화 등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는데, 함석헌은 노장사상의 이러한 면이 서구문명에 의해 조장된 제국주의 가치체계를 굳건히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다시 돌아가자. 위 글에서 박홍규 교수가 "서양 기독교에 입각한 함석헌은 동서양을 철저히 구분한 오리엔탈리스트였고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다"는 주장은 그래서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근거도 빈약하다.
함석헌이 동양의 노장사상에 매료된 것은 그가 살아야 했던 제국주의시대, 국가 간의 폭력이 횡행하던 시대에서, 동아시아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사상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였다. 아울러 그는 동양의 노자와 장자가 주장한 가치가 보다 나은 인류전체의 질적인 삶을 위해, 물질주의나 폭력주의를 앞세운 서구제국주의의 이념이 옹호한 가치를 대체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 박 교수는 인도의 간디와 한국의 함석헌은 "두 사람 모두 민중을 말했으나 민중의 입장에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간디와 달리 함석헌은 사회주의를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간디는 경제적 평등을 주장했고,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옹호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자'였지만 함석헌 선생은 이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박 교수의 요지였다.
나도 박 교수 말대로 함석헌과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사상적 간극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간극은 자연스럽다고 당연하다고 본다. 세상에 사상적 간극이 없이 생각이 똑같은 사상가가 있을까?
집권한 정치인 간디와 재야사상가 함석헌
▲ 함석헌 | |
ⓒ 함석헌기념사업회 |
함석헌은 능력에 따른 분배보다는 필요에 따른 분배 그리고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적 가치를 인정했다, 다만 한반도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정권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폭력투쟁을 택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한반도가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냉전체제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에 대해서 비교적 수용적이었고 특히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페이비언이란, 점진주의자란 뜻으로 페이비언(Fabian)이란 이름은, 카르타고의 침략에 대항해서 지구전을 주창했던 고대 로마의 파비우스(Fabius) 장군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당면한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해서 급격한 혁명이나 투쟁보다는 꾸준한 연구와 운동을 통해 대중과 지도층을 설득해서 점차적 제도개혁을 추구하자는 사상이다.
함석헌이 1940년 일제강점기 평양근교에 시작한 공동체 운동인 송산농사학원, 1957년 전개한 또 다른 공동체 운동인 천안 씨알농장, 1961년 강원도에서 시작한 안반덕 씨알농장, 1970년 전 사회를 대상으로 전개한 '같이살기운동' 등은 모두 그의 이상인 종교, 교육, 농사를 하나로 묶어서 돈과 물질만능주의의 세태를 극복하고자 시도했던 점진적 사회주의운동이었다. 1957년 당시 함석헌이 쓴 글을 직접보자:
"믿음과 교육과 농사를 하나로 껴붙이어 돈 아니고 사는 세상을 만들어봤으면 하는 꿈은 언제나 놓지 못하고 가지고 온다. 일제시대엔 그걸로 싸우려 해봤고 오늘은 또 그걸로 오늘의 대적과 싸우련다. 오산을 그만둔 것도 그 때문, 송산을 간 것도 그 때문, 인생대학 이후 용천서 농사를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함석헌이 1970년 창간한 <씨알의 소리> 창간사도 그의 사회주의 사상을 반영한다. "씨알의 소리는 같이 살기운동을 펴나가려고 합니다"는 이 선언은 함석헌이 <씨알의 소리> 중 "우리가 내세우는 것"에서 한 말이다. 그는 "우리가 내세우는 것"을 이렇게 맺고 있다:
"씨알은 선(善)을 혼자서 하려 하지 않습니다. 씨알은 너 나가 있으면서도 너 나가 없습니다. 네 마음 따로 내 마음 따로가 아닌 것이 참 마음입니다. 우리는 전체 안에 있고 전체는 우리 하나하나 속에 다 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1970년대 <씨알의 소리>를 통한 '같이살기운동'을 펼치며, "공동훈련 안 하면 씨알 노릇 못한다"고 역설하며 또 다른 공동체 운동을 시도한 것이다. 노자가 "도가 어디 있는가? 전체에 있다"고 한 것처럼 함석헌은 "모든 것은 전체의 재단에 바쳐서만 보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전체만이 거룩한 것"이라고 보았다. "완전한 전체가 하나로 있으면 그것이 깨끗한 것, 거룩한 것이요, 전체에서 떨어지면 더러운 것이다. 때는 몸에서 떠난 살이요, 속(俗)은 하나님에게서 떠난 인간이다"라는 그의 표현도 보편주의, 사회주의, 공동체주의를 표방한다.
분단 상황은 정신분열 상황
정신적 분리만 아니라 공간적 분리도 함석헌에게는 그래서 분열 그 자체였다. 그에게 남북분단은 민족 정신분열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은 함석헌에게 가장 긴급한 극복해야 할 과제 중 하나였던 것이다.
조봉암(1898-1959)과 함석헌(1901-1989)은 6.25전쟁 후 냉전 하에서 평화통일을 옹호한 1950년대 후반 대표적 지성인들이었다. 조봉암은 진보정치인이었고 함석헌은 종교사상가였다. 둘은 매카시즘이 날뛰는 비슷한 시기에, 그 당시로서는 금기였던 남북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내려진 결과는 극명하게 달랐다. 조봉암은 1959년 결국 억울하게 이승만의 손에 의해 사형을 당했고 함석헌은 지금도 살아 있는 국가보안법으로 20일간 수감되어 매를 맞는 곤욕을 치르는 것으로 그쳤다(관련기사 보기).
동시대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두 지성인 중에 왜 조봉암은 사형 당했고 함석헌은 무사했을까? 조봉암과 다르게 함석헌은 정치인이 아니었고 조직된 정당의 지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정치적 조직력이 전혀 없었던 함석헌의 무조직 능력이 바로 어떤 독재권력 하에서도 그의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있었던 요소였다. 정치조직이 없고 정치일선에 서지 않는 함석헌을 이승만은 당연히 위협으로 느끼지 않았고 정적이 못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함석헌에 대한 정치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권력자로부터의 '업신여김'이 독재정권시대에 함석헌의 다양한 활동을 지탱해 줄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평화통일을 옹호하는 두 지성인의 생사를 갈라놓았다. 비정치인 함석헌에 대한 권력자의 '차별' 덕에 역으로 함석헌은 그 글과 말을 통해서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처럼.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사이를 보더라도, 좌우익을 막론하고, 김구(1876~1949), 여운형(1886~1947), 장덕수(1895~1947), 송진우(1889~1945) 등 주요한 좌우정치지도자들이 권력집단에 의해 수시로 제거되는데, 함석헌은 이때도 정치인이 아니었고 가지고 있는 정치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다행히 권력집단의 살생부에서 빠질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간디와 함석헌의 비교에 대한 박홍규 교수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민중을 말했으나 민중의 입장에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간디와 달리 함석헌은 사회주의를 거부했다.... 간디는 경제적 평등을 주장했고,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옹호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자'였지만 함석헌 선생은 이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박홍규 교수 논리에 나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간디와 함석헌을 비교하려면 아마 이런 표현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함석헌은 간디와는 달리 당대의 정치권력을 잡을 수 없었고, 자신이 꿈꾸던 사회주의, 경제적 평등, 토지개혁을 현실에 실행할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함석헌은 실패자였다. 함석헌은 일종의 '한국의 간디'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간디와는 달리, 함석헌은 전국적인 규모의 시민저항운동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고, 이것을 함석헌의 정치적(혹은 종교적)역량의 한계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단 상황, 냉전체제하에서 한반도의 정치사회적 한계, 함석헌이 살았던 시대의 한계와 실패로 표현함이 더욱 적합하지 않을까? 그래서 함석헌은 간디와는 달리 잘 짜인 조직력과 동원력보다는 그의 강연과 글, 성서공부, 노장공부모임 등을 통한 개인적 영향을 각 씨알에게 미침으로서 불의한 정권에 대항했던 것이 아닐까?
오리엔탈리스트 함석헌?
박홍규 교수는 또 위 글에서 "서양 기독교에 입각한 함석헌은 동서양을 철저히 구분한 오리엔탈리스트였고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다"고 지적했다. 반면. "간디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에 반대했고 인도문명에 대한 자부심으로 민중의 자부심을 고취했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는 '오리엔탈리즘'을 서양인이 동양을 볼 때에 선입견을 가지고 본다는 것,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방식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사이드는 열등한 동양이 존재하기에 우월한 서양이 존재하는 것으로 서양인은 인식한다고 보았다. 더욱이 서양인은 동양인이 열등하며 무능하고 게으르다고 생각하며, 자신들보다 두뇌나 신체 면에서 열등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수많은 문화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서양이 이를 통째로 동양이란 한 단어로 포함시키는 것이나, 서양이 쇠퇴하고 비참한 동양을 식민지화함으로써 동양을 구원해 내었다며 자신들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한다는 것 등이 사이드가 주장한 오리엔탈리즘의 주요골자다.
함석헌과 우치무라
함석헌 20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일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1861-1930)를 함석헌이 사상적으로 탈출하는 과정을 나는 박홍규 교수가 좀 정독해 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함석헌의 20대 기독교관 형성에 우치무라는 물론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함석헌이 30대 이후에 우치무라의 사상에 대해 점점 비판적으로 되어가는 이유 중 하나는, 또 40대 이후에 우치무라의 사상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이유 중 하나는, 우치무라가 동양철학에 서구기독교만큼 큰 비중을 두지 않은 것에 함석헌이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치무라가 만든 무교회운동도 기존의 기독교 교단처럼 "오직 성서만으로"(sola-Scriptura: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구원은 '오직 성서만을' 통해서 가능 하다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주장)의 원칙에 입각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함석헌이 우치무라나 무교회운동에 공감할 수 없게 된 것은 자연스런 결과다. 함석헌의 글을 직접 보자: "우치무라는 동양철학이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가 절대적으로 이런 입장을 취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영향은 내게 컸습니다."
1920년대인 20대에 우치무라를 처음 만난 함석헌은 시간이 경과 할수록 우치무라가 동양철학에 별로 기대를 안 가진 것에 대해 점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한 후, 함석헌은 그 자신의 종교관이 우치무라의 무교회운동과 더 이상 같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함석헌은 식민지화된 민족으로서의 한국과 식민 점령세력으로서의 일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우치무라는 일본인으로서 자연적으로, 한국을 무참히 식민지화한 일본제국주의 국가의 구성원 중 한사람 이었다. 반면 함석헌은, 일제하 한국인 식민지 지식인중 한사람으로 일본 식민통치에 의해 고난당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러니 두 사람이 처한 역사적 상황은 아주 상반될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치무라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화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우치무라는 이상적 한일관계를 영국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관계처럼 되기를 원했는데, 그것은 한국이 일본제국에 전적으로 귀속되면서 단지 필요에 따라 어느 정도 지역적 자치권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우치무라는 또한 동경대지진후 6000명 이상의 한국인이 일본인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에 대해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함석헌이 동경유학하던 시절인 1920년대에, 그는 우치무라의 한국관과 한국인관에 대해서 알 기회가 없었고, 단지 사회주의 이념과 기독교 윤리사이에서 번민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10여년 후인 1938년에 이르러, 비로소 함석헌은 친구 김교신을 통해서 우치무라의 한국관과 한국인관을 듣게 되었고, 동시에 이러한 우치무라의 시각과 태도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반발을 갖게 되었다. 식민지 한국인으로서 함석헌은 그 자신의 종교, 한국인의 종교, 한국인을 위한 종교를 발견하고자 온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던 궁극적인 질문의 해답을 함석헌은 일본인 우치무라를 통해서는 발견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그리고 이때부터 함석헌은 점차 서구 기독교 중심주의 종교관이나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다"라는 시각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러한 탈기독교적 혹은 탈서구 중심주의 함석헌의 입장은 결국 1952년 그의 시 「흰 손」과 1953년 「대선언」을 통해서 공식화되기에 이른다. 「대선언」의 이 한 구절은 지금도 나의 가슴을 뒤 흔든다.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물론 그 이전인 1940년 대 이미 함석헌은 서구문명 혹은 서구중심주의문명에 한계를 절감한다. 특별히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1943년에 걸쳐 일제의 한국민족 탄압정책이 점점 가혹해져 갔을 때가 그렇다. 이때 함석헌은 무력을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는 국제관계의 '약육강식' 논리를 정당화 해주며 세계를 국가주의로 몰아간다고 지적했다.
현대 국가는 본질적으로 강한 군사력 위주의 전투적 국가다. 경제적 의미에서 이건 군사적 의미에서 이건 각 국가는 서로 긴장대치되어 있다. 이 긴장대치 상황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현대 국가는 끊임없이 거대하고 강력한 국가체계를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강한 국가주의의 사회에서는 전체 민족과 국가가 철저한 중앙정부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이런 면에서, 국가주의의 근본은 이타주의라기보다는 강한 집단이기주의를 그 근본으로 한다. 이런 집단이기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국가주의에 대해 함석헌은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국가주의는 또한 그 체제유지를 위해 폭력 사용을 필수적 요소로 하기 때문에, 함석헌의 근본사상인 비폭력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
그는 민족과 국가 간의 평화는 역사의 '절대명령' 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평화는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말 문제가 아니다. 가능해도 가고 불가능해도 가야 하는 길이다. 이것은 역사의 절대명령이다. 평화 아니면 생명의 멸망이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노장사상, 새로운 문명의 안내자"
이러한 평화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함석헌은 노자의 평화사상에 매료되었고, 급기야는 노자를 최초의 평화주의자라고 이렇게 선포했다.
"노자는 전쟁의 무익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폭력이 국가의 정책으로 쓰여서는 안 되고, 국가 간에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함석헌은 제국주의와 국가폭력이 판치던 시대에 살았고,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시대 아래서 민중은 자유를 박탈당했고 삶은 억압당했다. 물질주의와 강한 군사력만이 중요시 되는 제국주의시대를 살면서 함석헌은 인류문명의 존폐문제를 염려했다. 또한 이윤추구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도 함석헌은 엄중하게 경고를 보냈다.
"사치스런 삶을 위해서 막대한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인류에게 전쟁을 초래 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윤추구가 모든 것의 동기가 되고, 이윤추구들 위해 기업들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보다는 더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값비싼 물건을 생산한다. 많은 경우에, 정치 및 경제적 힘의 추구는 인류에게 전쟁을 초래했다."
위와 같은 함석헌의 증언은, 왜 그가 자본주의나 서구중심주의 가치체제에 대해 회의를 품었는지 그 이유를 반영해준다. 그는 국가정책을 돋보이게 하기위한 한 방법으로 전쟁과 폭력을 권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므로, 국가 간의 평화적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런 질문을 한다. "만일 이 국가주의가 그대로 가려면 충돌할 테고 충돌 하면 전쟁 날 테고 전쟁한다면 핵무기 밑에서 생명의 종자가 없어질 것이니깐 이걸 건지려면 어떻게 할까?"
그는 인류의 새로운 희망은 국가관을 새롭게 가짐으로써야 가능하다고 스스로 답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국가관의 확립은 과거 인류의 고전철학을 재해석함으로써 성취 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고대인들이 현대인들보다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전철학중에서도 함석헌은 서양고전철학에 대해서는 기대를 걸지 않았다. 서양철학은 이미 서구의 문예부흥, 종교개혁, 산업혁명에 영향을 미쳤고, 그럼으로써 이미 과거에 그 사상적 역할과 공헌을 다했다. 결국 현대 세계의 자본주의나 물질주의는 서양철학과 서구문명의 소산이고, 인류의 미래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의 사상에는 더 이상 의지 할 수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지론이었다.
그럼으로 그동안 역사를 통해서 무시되어 왔던 동양철학을 재조명, 재해석해야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중세이후 역사를 통해 서구인들은 동적, 합리적, 실험적, 분석적, 세속적, 방법론적으로 지도자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서구인들은 그들의 임무를 다 끝내가고, 곧 인계를 해야 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정체성에 빠져있는 인류에게 새로운 문명의 사상적 안내자가 될 수 있는 고전철학으로 그는 노장사상을 역설했던 것이다.
함석헌은 노장사상의 유연함과 초월성에 매료되었고, 이러한 노장철학을 함석헌은 쓰이지 않고 감추어진 인류를 위한 사상적 보물창고로 여겼다. 노장사상은 연약함, 겸손함, 부드러움, 마음의 평정, 정념(情念)의 순화 등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는데, 함석헌은 노장사상의 이러한 면이 서구문명에 의해 조장된 제국주의 가치체계를 굳건히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다시 돌아가자. 위 글에서 박홍규 교수가 "서양 기독교에 입각한 함석헌은 동서양을 철저히 구분한 오리엔탈리스트였고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다"는 주장은 그래서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근거도 빈약하다.
함석헌이 동양의 노장사상에 매료된 것은 그가 살아야 했던 제국주의시대, 국가 간의 폭력이 횡행하던 시대에서, 동아시아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사상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였다. 아울러 그는 동양의 노자와 장자가 주장한 가치가 보다 나은 인류전체의 질적인 삶을 위해, 물질주의나 폭력주의를 앞세운 서구제국주의의 이념이 옹호한 가치를 대체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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