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규선생님의 일본여행기를 옮겨 놓았습니다... 작성자이강율|작성시간07.05.01|조회수115...
송진규선생님의 일본여행기를 옮겨 놓았습니다...
작성자이강율|작성시간07.05.01|조회수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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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도 그렇지만 다른 나라 여행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크기를 넓고 깊게 합니다.
나와 함께 이 시대를 사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여러 삶의 모습과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자연과 역사와 문화를 찬찬히 살펴 보는 일은 아주 유익합니다.
다른 나라 속에서 더러 나와 내 나라를 견주어 새삼스런 발견을 하게 될 때는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억지로라도 만들고 여러 달 돈을 마련하여 여행하기를 즐깁니다.
다른 나라 여행 경비가 워낙 적은 돈이 아니라서 쉬이 떠나기는 어렵지만 그 여행이 내게 남겨주는 걸 생각하면 남는 게 더 많은 일인 거 같습니다. 여행을 더 의미 있게 하기 위해 내가 가려고 하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와 사람, 그리고 자연에 관한 공부를 가기 전에 미리 하는 동안도 즐겁습니다. 아마 그 나라에 가서 배우는 거 보다는 가기 전에 공부하는 동안에 배우는 게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일본 구경한 글입니다.
글 재주가 없는 사람이 길게 쓴답니다.
주변머리가 알량해서 짧게, 의미 있게 쓰는 재주가 아직 없습니다.
한가한 시간 나시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천 칠년 이월 하순
송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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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遺憾
내 마음 속의 두 일본
일곱 살부터 진 지게를 구십 가까운 나이 되도록 지고 평생 농사만 짓다 이승 떠난 내 아버지는 일본 얘기를 늘 좋게 했습니다. 내 아버지가 일본(사람)을 좋아 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가 쓰던 농기구 중에 ‘거름대’라는 게 있었습니다. 돼지우리나 외양간에 두엄이 쌓이면 그걸로 퍼서 지게에 짊어지고 밭에 나가 뿌리는 도구입니다. 저팔계가 들고 다니는 삼지창 비슷하게도 생겼고, 서양 음식 먹을 때 쓰는 포크를 닮기도 했습니다. 삽자루 같은 나무 막대에 네 가닥의 쇠를 구부려 달았습니다. 우리 집은 이웃에 비해 농토가 많은 편이어서 거름대가 여럿 있었습니다.
그 거름대들 중에 하나는 아주 오래 돼서 쇠가 거의 다 닳아 다른 것들보다 길이가 무척 짧았습니다. 그런데도 쇠가 아주 빛나고 단단하여 아버지는 늘 그 거름대만 썼습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만든 일본 제품인데 내가 대학교 다니던 칠십년 대 초반까지도 멀쩡했습니다. 한 육십 년 넘게 쓴 셈입니다. 다른 거름대는 동네 대장간에서 만든 것인데 거름 잔뜩 퍼서 담을라치면 대개는 휘어 꼬부라지거나 심지어는 부러지기가 일쑤였습니다. 잘 가야 두어 해 넘기기가 바빴습니다. 쉬이 망가지고 부러졌습니다.
대장간에서 거름대를 벼려 오실 때마다 내 아버지는 일본 사람, 물건 참 잘 만들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동네 대장간 비난과 섞어서요. 그런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제대로 잘 만들어 오래도록 쓰게 하는 일본 사람 칭찬을 종종 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한 나절은 넘게 걸어가야 되는 외가 앞뜰에는 왜정 때 만든 수리 조합 시설물이 있었습니다. 경지 정리가 잘 된 논두렁 옆에는 시멘트 콘크리트 수로가 있었습니다. 자로 잰 듯 반듯하고 어디 한 군데도 망가진 게 없었습니다.
아직 어린 나를 앞세우고 처가에 가다가 내 아버지는 그 수로의 갑문과 콘크리트 옹벽을 가리키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든 세면(‘시멘트’의 사투리) 다리 봐라. 비 조금만 와도 넘어지거나 떠내려가고, 옹벽 공사도 몇 해 못가서 금 가고 무너지는 게 많지만 일본 사람들이 만든 거는 여태 끄떡없고 아마 생전 안 망가질 거다. 우리가 일본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영구적인 점령을 위한 음험한 기도가 담긴 식민지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고, 혹 물건을 잘 만들고 시설물이 견고하다 해서 우리나라를 강제로 침탈하여 영구 점령하려 한 일본이란 나라와 사람들은 절대로 본받을 만하고 좋은 사람들이 아니란 점을 아무리 설명해 봐도 내 아버지는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당시의 내 알량한 식견으로는 아버지를 그런 생각에서 돌아서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쪽바리’들에게 당한 국치(國恥)인 식민통치 극복을 대한민국 국민 된 의무라고 교육 받은 내게 아버지의 그런 생각은 참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당신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오직 농사이었던 내 아버지는 국가와 민족, 시대 의식이나 역사성, 그런 거창한 명제들과는 먼 거리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념이나 정체성, 민족 자존과 국가적 권위를 생각하고 살려내는 일보다는 그저 농사 잘 지어 아들 딸 공부 가르치고 먹고 살 걱정 없이 지내는 게 내 아버지의 가장 큰 삶의 목표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거름대 잘 만들고 오래 돼도 망가지지 않는 수로와 갑문 만든 일본 사람들이 부럽고 좋아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강원도 산골에 살아서, 더구나 일본(사람)에게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어려움 겪은 일이 전혀 없는 내 아버지에게는 제국주의 침략의 본보기인 식민 정책의 부당성과 민족 자존의 당위를 역설하는 아들의 그런 말들이 다 공허하게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내 아버지에게 일본(사람)은 본받아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더러 원망스러웠고, 때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재수까지 하면서 어렵사리 공부해 서울에 있는 대학 들어간 육십 년대 초반,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닌 사람 드문 강원도 시골 형편에서 보면 대단한 일일 수도 있어서, 서울 사는 사촌 매형이 ‘촌놈 출세했다’며 기특하다고 일본 제품인 세이코 시계를 선물했습니다. 금장이 유난히 빛나는 그 세이코 시계를 하숙집에서 자다 일어나 몇 번이나 매만졌는지 모릅니다. 반짝이는 유리에 지문이 묻으면 닦고 또 닦았습니다. 밤새 그랬습니다. 아마 그건 대학에 합격한 내 자신이 스스로도 대견한 데다가 매형이 준 일제 시계가 상승 작용을 한 탓일 겁니다.
시골은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시계를 찬 사람보다 시계 없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던 시절입니다. 그날 저녁 내게 ‘세이코’ 시계를 만든 일본은 원수 같은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촌놈 대학생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가정 교사’를 했고, 쓸 돈 아껴 가며 여러 달 모은 돈으로 벼르고 별러서 ‘Petri7S'라는 일본제 카메라를 샀습니다. 요즘과 비교한다면 DSLR이 아닌 ‘똑딱이’ 수준의 사진기였지만 번쩍이는 세이코 시계를 차고 일제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나를 주변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릅니다.
세이코와 페트리 사진기는 강원도 ‘깡촌놈’인 나를 서울 어느 부잣집 아들 부럽지 않은 사람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사진 찍을 일 없는 상황을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늘 사진기를 들고 다녔습니다. 두 가지 일본 제품이 나를 빛나게 해 주는 장식물임을 은연 중에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방학해서 고향에 가면 그 일본제 사진기는 동네의 대단한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평생에 한두 장 사진 찍기도 어려웠던 고향 사람들 눈에 그 일본제 사진기는 말 그대로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나는 늘 으스대며 동네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세월 더 지나서는 일제 아사히 펜탁스로 바꿨고 지금은 니콘F를 이십 년 가까이 쓰고 있습니다.
내게 사진기는 일본제가 가장 좋아 보입니다. 그런 좋은 사진기를 만드는 일본을 아직도 부러워합니다. 어릴 적 내 아버지처럼 나도 지금 드러내지는 않지만 여러 모로 일본을 좋아하고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거죽으로는 거의 알러지 반응처럼 ‘일본은 아니다.’라고 우기면서도 마음은 일본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중학교 때, 선생님께서 세계명작이니 꼭 읽으라고 해서 본 ‘또스또예쁘스키의 죄와 벌’이 분명 우리말로 적혀 있는 소설인데도 도무지 그 뜻을 알아먹을 수가 없어서 애면글면하며 국어사전을 찾으면 안 나오는 말이 하도 많아서 고생을 했었습니다. 몇 날 며칠 걸려 다 읽기는 했는데 남는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라스꼬 리니꼬쁘’라는 일본어 식의 주인공 이름과 그가 전당포 주인에게서 돈을 강탈하기 위해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올라가며 범행 합리화를 위해 내뱉던 말 몇 마디 정도만 기억에 남았습니다.
나중에 커서 알고 보니 우리나라의 유수한 출판사가 펴낸 그 책은 러시아어 텍스트에서 옮긴 게 아니라 일본의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의 세계문학전집을 중역(重譯)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등장 인물의 이름에서부터 구체적인 어휘 표현, 내용 전개에 이르기까지 원전과는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소설만이 아니라 그 시절 대부분의 외국 저작물들이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거라고 합니다. 잘은 몰라도 내가 초등학생 적에 읽은 안데르센 동화집, 소공녀, 소공자, 톰 소여어의 모험, 괴도 루팡도 다 그랬을 겁니다.
내가 ‘국민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서 배운 학문 중에 아마 어문학 일부를 제외하곤 일본의 학문적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흔히 ‘신문명’이라고 일컫는 개화기 이후의 거의 모든 학문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통하지 않고서 우리나라에 들어 온 건 드뭅니다. 내게, 그 시절 우리에게 일본은 물심양면으로 그렇게 지대하고 막대한 영향을 끼친 나라입니다.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일본을 통해서 세계를 보았습니다. 일본(사람)이라는 창으로 다른 나라를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것보다 훨씬 더 불행했던 것은 내 나라 내 땅의 문학과 문화와 역사도 그들의 눈과 생각을 통해서 배워야 했던 겁니다. 오꾸라신페이(小倉進平)의 이론을 거쳐서야 비로소 신라의 향가와 고려 속요가 무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고,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의 시각을 통해서야 청자와 백자, 석굴암, 광화문, 그리고 민화를 접근할 수 있었고, 무라야마지준(村山智順)의 책을 근거로 해야만 내가 사는 이 땅의 민속 공부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배운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이케우치히로시(池內宏)를 비롯한 한국사 왜곡의 주범들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조(李朝)’가 아니고 ‘조선 왕조’가 올바르다는 사실도 그 시절엔 잘 몰랐었습니다.
이런 식민사관에 입각한 저술들을 극복하고 우리 나름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가진 문화와 역사를 학문적 이론으로 정립한 것은 불행하게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사회의 여러 분야에는 아직도 그들의 음험한 기도가 담겼던 생각들이 남아 있는 데가 많습니다. 문화적 침략은 그렇게 오래 가고 깊은 생채기를 남겼습니다. 그런 상처는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고치는 것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한자어 중에는 일본어식 표기가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일본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도 일본에 가서 길과 건물을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고 때로는 일본 신문의 큰 제목만 보고도 기사 내용을 어림짐작으로 알 수도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나는 우리나라를 일본식민주의(자)를 통해서 배우고 익혔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선생인 내가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 중에는 아직도 그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게 많이 있을 겁니다.
역사적 인식이나 국가 간의 정체성 관계에서 일본은 우리에게 결코 편하고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배척과 비난의 상대였고, 극복과 타도의 대상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되던 팔십 년대에 ‘모든 국민이 마음 놓고 씹어도 되는 게 관상대(지금의 기상청)와 일본’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욕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은근히 부러워하고 닮으려 하는 미묘한 애증이 교차되는 그런 나라가 일본입니다.
오사카(大板)의 MP3 가게 주인
그 일본에 갔습니다.
시간과 여유를 억지로라도 만들어 여러 나라 여행을 다녔었지만 나는 일본과 미국은 여행 대상에서 늘 제외했습니다. 미국은 너무 ‘엄청난 나라(다른 말로는 미국이란 나라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과학,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뒤섞어서 ‘엄청나다’고 나는 여깁니다.)’여서 그렇고, 일본은 앞서 길게 말한 것처럼 뒤숭숭한 생각이 겹쳐지는 나라여서 많은 돈 들이고 귀한 시간 내서 편안히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가기가 썩 내키지 않아서였습니다. 무릇 여행이란 건 누구나 즐거운 기대를 품고 가야 하는 거니까요.
겨우 한 시간 남짓 걸리는 비행기 속에서 나는 여러 번 깊은 숨을 몰아 쉬었습니다. 주눅 들지 말아야지, 당당해야지, 의연해야지, 적어도 너희 일본(사람)에게는 기죽지 않는다. 아니, 기죽어서는 안 된다. 무슨 비밀결사의 행동강령이나 주문 외듯이 심호흡을 하면서 나를 채근하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처음 밟는 일본 땅은 무척 팍팍했습니다. 태풍 지나가고 쏟아지는 불볕더위 탓도 있었겠지만, 그게 아마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흔적이 많이 남겨진 오사카여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히라가나로 된 것 제외하고 영어와 내 눈에 익숙한 한자어로 쓰인 간판만 본다면 우리나라 어느 도시에 온 것 같았습니다. 오사카 인상은 건물과 차량들, 길거리가 조금 더 깔끔하고 정리 정돈이 잘 된 것 빼고는 우리나라 도시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습니다. 만만해 보였습니다. 괜히 주눅 들거나 긴장하고 시샘할 필요도 없어 보였습니다. 가슴을 내밀어 제대로 펴고 머리를 곧추 세웠습니다. 그런데 의연하려고 애를 쓸수록 옹졸한 내 마음은 무언지도 모를 어떤 것으로부터 계속 들볶이고 있었습니다.
팔월 중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아침 오사카 성에는 일본에 사는 말매미와 까마귀가 다 모인 듯 했습니다. 아직 해가 중천에도 이르지 않은 아침나절인데 매미와 까마귀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바로 옆 사람 말이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 매미는 그래도 이슬이라도 말라야 우는데 일본 매미는 시도 때도 가리지 않는가 봅니다.
날렵한 조형미를 뽐내는 그 성에서 내게 남겨진 것은 진저리가 날 정도의 매미 소리와, 그들은 길조라고 여긴다지만 흉측하게 검은 색이 두려운 까마귀 떼가 날아다니던 그림 뿐입니다.
처음 만나는 일본의 문화 유적인 오사카성을 나는 애써 무시하고 외면하고, 폄하하려고 작정을 하고 보았습니다. ‘감탄하지 말아야지, 놀라지는 더욱 말아야지, 쪽바리들 문화 다 우리에게서 비롯된 건데 뭐 크게 대수로울라구, 지금 좀 산다고 해도 사상이나 문화의 근본은 우리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란데 잘나고 대단하대야 별 거 있을라구.’ 그랬습니다. 그래서 오사카 성 입구에서 본 흑백으로 칠한 나무와 무쇠를 격자(格子) 형태로 짜서 조형미가 기막히게 아름다운 문짝 사진을 찍으면서도 감탄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날렵하게 들어 올려진 추녀가 허공에 그려내는 곡선, 새하얀 벽면의 가장자리를 돌려가며 칠한 금장(金裝)의 당초문(唐草紋)이 빚어내는 여백의 조화, 절묘한 공간 배치 그런 것들을 보면서도 놀라지 않으려고 연신 심호흡을 했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렸습니다. 그냥 편히 볼 수 없어서, 자꾸 무언가 트집을 잡고 험담을 하고 싶어서, 아름답고 좋다고 인정하기가 너무 싫어서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본 오사카성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좀 이른 시각에 저녁을 먹고 아들이 사다달라고 부탁한 MP3 가게를 찾았습니다. 호텔 종업원이 서너 블록 건너에 있는 제법 큰 전자상가를 소개했습니다. 다른 나라 여행 가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꼭 사가지고 오는 게 있습니다. 중국에 가는 관광객이면 얼마 전에는 우황청심환 등의 약품을 샀고 요즘에는 참깨나 들깨를 많이 사옵니다. 동남아에 가서는 몸보신에 좋은 것들을 사고 일본에 가면 전자제품을 주로 삽니다. 여러 해 전이지만 ‘코끼리 밥통’을 하도 많이 사들고 오다 세관에 걸려서 ‘밥통 같은 사람들’이란 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나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 부류여서, 우리나라 제품도 좋은 데도 불구하고 아들 부탁을 핑계로 전자상가를 찾아 갔습니다. 사람들이 무척 북적였습니다. 외국인도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삼층 매장에 가니 여러 모양의 MP3가 있었습니다. 소니 제품이 디자인도 괜찮고 값도 적절해서 골랐습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이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말로 무어라고 간절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난감했습니다. 지갑에서 달러를 꺼내 들고 계산을 하자는 데도 주인은 계속 손사래를 치며 말을 했습니다. 답답한 내가 변변찮은 영어로 말을 건네도 주인은 전혀 못 알아들었습니다. 물건 살 사람들이 내 뒤로 줄을 서 있었습니다. 이젠 괜히 내가 민망하고 곤란한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주인은 조금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더니 건너편에 있는 가게로 가서 손님들로 북적여서 정신이 없는 젊은 사장을 일부러 내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 사람은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영어를 할 줄 알았습니다. 내가 사려고 하는 물건은 일본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이 쓰이지만 최신 제품이어서 다른 나라에 가면 메모리 카드 호환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여건을 확인해야 팔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호환성이나 액세서리 구비, A/S 등이 원활하지 못해서 편히 사용할 수가 없으니 사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게 주인은 그 말을 내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가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보더니 그제서야 주인은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그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참 옹졸하게도 고맙다고 하거나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까닭 모를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호텔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잘못된 물건도 아니고, 바가지를 씌우지도 않았습니다. 더구나 나는 그 가게에 아마 평생 다시 갈 일이 없을 겁니다.
그런 나를 붙들고, 물건 사려고 줄을 선 손님들 아랑곳하지 않고 간절하게 이해를 시키려던 그 전자 가게 주인 얼굴이 계속 아른거렸습니다. 자동차 불빛과 네온사인이 뒤섞여 아름다운 꽃을 그려내는 오사카 밤거리를 내려다보았지만 그 전자상가가 있는 거리가 왠지 아름다운 경치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애꿎은 담배만 연거푸 뻑뻑거리고 피웠습니다.
베란다로 몰려드는 오사카 밤바람이 한여름인데도 서늘했습니다.
긴가꾸지(金閣寺)의 금빛 이끼
일본이 자랑하는 대단한 정원이고 개인 사찰로 유명한 긴가꾸지에서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제자이며 그 역시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명되었던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의 작품 ‘금각사’가 생각났습니다.
가스로 자살한 스승 가와바타 야스나리처럼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라기리(割腹)’로 자결해서 전후 일본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극우 파시스트의 전형적 무모함을 보여 준 그의 심미적이고 날카로운 소설 ‘금각사’의 글줄들이, 화려하다 못해 섬뜩하게 아름다운 긴가꾸지 몸통을 휘감은 황금빛에 가득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미시마 유끼오가 바라는 세상, 소설 ‘금각사’를 통해서 그가 그리고자 했던 이상으로서의 일본 사회와 일본인이 어쩌면 저 끔찍하게 아름다운 황금빛 너머에 감춰진 비수(匕首)와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긴가꾸지 인상은 말 그대로 전율(戰慄)이었습니다. 오사카성을 보면서 애써 무시하고 외면하려 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온몸에 섬뜩한 소름이 돋았습니다. 별로 크지 않은 누각인 긴가꾸지는 몸서리치게 찬란한 금빛 하나만으로도 나를 압도했습니다.
아침 햇살에 찬란한 금빛으로 번쩍이는 전각 너머에는 수십 수백 년 넘게 자란 노송이 짙푸르고, 절묘한 곡선을 그리는 맑은 연못에 비친 긴가꾸지는 ‘일본적인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소리치듯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긴가꾸지는 아주 고요했습니다.
침잠, 적막에 가까운 고요만 거기 있었습니다. 사람이 없는 시간이어서가 아닙니다. 숱하게 많은 사람이 오가는 데도 말 소리는 커녕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나 그렇지만 긴가꾸지에서 만난 일본 사람들은 마치 허깨비가 돌아다니는 듯 싶었습니다. 긴가꾸지의 형언하기 어려운 현란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잔뜩 주눅이 든 것보다는, 수 백 명은 족히 넘는 사람이 오가는 데에도 불구하고 쥐죽은 듯한 그 깊은 고요가 나를 더욱 못 견디게 했습니다. 겁이 나고 무서웠습니다.
예니레 남짓 일본 다니면서 긴가꾸지에서 만큼 긴장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긴장의 원인은 아마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일본(문화)이라면 어쭙잖게 얕보고 싶어 했던 알량한 내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과, 그리 크지 않은 정원인 긴가꾸지가 총체적으로 잘 드러내 보이는 ‘일본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내 눈에 보인 긴가꾸지는 너무 아름다워서 무서웠습니다.
여름 해가 중천에 솟아 고목의 이파리 사이로 그 빛을 하늘거리면 떨어뜨리는 숲에도 한낮의 정적이 가득했습니다. 그 숲에는 형형색색의 이끼가 숱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그냥 저절로 자라는 게 아니라 사람 손길이 안 미친 데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긴가꾸지를 ‘이끼의 정원’이라고도 합니다.
개장하자마자 바로 들어온 이른 시간이어서 한여름의 맑은 햇빛이 긴가꾸지의 금빛 몸통에 부딪쳐 솔숲 아래 깔린 이끼에 쏟아지듯 비쳤습니다. 그 빛을 받은 이끼는 죄다 금빛이었습니다. 금가루를 솔밭에 뿌린 듯했습니다.
이끼의 숲 여기저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신표(神標)로 여기는 여러 조형물들이 있었습니다. 주로 새빨강과 하얀 색으로 된 장식들이 그 찬란한 긴가꾸지의 금빛과 이끼를 배경으로 하여, 치밀한 계산으로 배치된 수로를 따라 머문 듯 흘러내리는 물길에 그림자를 드리워서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우리나라 산길 걷노라면 어디에서도 흔하게 마주치는 이끼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와는 참 다른 일본 사람들의 생각 범위가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전라도 담양 소쇄원 생각이 났습니다. 인공의 조형물과 건축물을 배치하였지만 바탕을 이루는 자연을 전혀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사람이 기거하기 위해 적절한 선에서 인간과 자연이 타협을 한 소쇄원과 긴가꾸지는 좋은 비교 대상이었습니다.
계곡 속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소쇄원 관풍각에 누우면 하늘로 지나가는 바람결이 보입니다. 그러나 긴가꾸지 그 찬란한 금빛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왠지 그림 속의 풍경처럼 보였습니다.
긴가꾸지가 보여주는 일본의 자연, 사람, 문화는 놀랍고,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고라꾸엔(後樂園)에서 만난 할아버지
겨우 하루 반나절 보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일본은 아무리 생각해도 참 불가해(不可解)한 나라였습니다. 도시에서 꽤 멀리 떨어진 시골길 다니다 보이는 마을 풍광도 그렇고, 큰 도시에서도 우리나라와 유별나게 낫거나 다른 점을 찾아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 길, 집, 차량, 사람들 차림새가 조금 정갈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것 외에는 일본이 우리보다 여러모로 몇 십 년이나 훨씬 앞서가는 나라라는 걸 인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건 아마 내 마음 속에, 운동 경기는 물론이고 삶의 어느 부분에서라도 일본에 져서는 안 된다는 옹졸한 자격지심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주변의 자연 경관을 건축물 안으로 끌어들여 멋을 내는 차경(借景)의 원리를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원림(園林)과는 달리 일본의 정원(庭園)은 인공적인 조경(造景)을 중심으로 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아주 자연스럽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일본 정원에는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커다란 나무 밑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걸로 뵈는 돌멩이 하나도 주변 어디엔가 그 돌과 어우러지는 다른 돌이나 나무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들의 인공적인 배려는 보는 이를 깜짝깜짝 놀라게 합니다.
고라꾸엔도 그랬습니다. 고라꾸엔은 긴가꾸지와는 비교가 안 되게 아주 큰 공원입니다. 그런데 그 고라꾸엔에 가로등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공원을 안내하는 브로슈어에는 분명 밤에도 개장을 한다고 씌어 있는데 가로등이 없었습니다. 한 시간 남짓 다녔는데도 건축물 주변에서만 더러 보이고 아무리 살펴도 가로등이 없었습니다. 이상하고 궁금했습니다.
가로등은 내 키보다 훨씬 낮은 높이로 있었습니다. 사람 다니라고 만든 길 주변에 가끔 가다가 한 개 씩 화강암 덩어리가 있었는데 그 돌 속을 파서 안에다 전구를 넣어 놓았습니다. 빛의 방향도 땅바닥으로 향하게 해서 길만 비추도록 만들었습니다. 나는 한참을 서서 그 키 작은 가로등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졌습니다. 하늘 쪽만 바라보면서 가로등을 찾았는데 키 작은 돌멩이 안에 감춰진 가로등을 보고나서는 생각이 뒤죽박죽이 됐습니다.
지극히 인공적인 설치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해치지 않고 밤길 밝히는 조명의 목적은 충분히 살려내는 일본 사람들의 배려가 참 놀라웠습니다. 일본 문화의 특징이 ‘축소 지향(縮小指向)’이라는 견해가 그럴 듯 해 보였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하며 숲길 걷다가 일행을 놓쳤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겁이 더럭 났습니다. 그 나라 말도 모르는 데다가 영어 실력도 변변치 않아 다른 나라에 가서 구경 다니다가 일행을 놓치면 낭패입니다.
구십 년 대 초반, 우리나라와 아직 수교도 하지 않았던 적성국인 ‘중공’ 천안문 광장에서 일행을 놓쳐 두어 시간 고생을 한 일이 떠올랐습니다. 치안 상태가 불안정한 나라도 그렇지만 그런 염려가 비교적 덜하다는 일본인데도 자꾸 불안해졌습니다. 만나는 장소가 후문인 줄은 알지만 내가 있던 숲 어디에도 안내 표지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데로나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자리에 마냥 서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일흔은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나 있는 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대개의 일본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할아버지도 생면부지인 내게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세워달라고 손짓을 하자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 대하듯 반가운 얼굴로 자전거에서 내렸습니다.
들고 다니던 수첩에 ‘後門?’이라고 써서 공손한 낯빛 지으며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할아버지는 ‘하이, 하이’를 연발하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할아버지 자전거에는 짐받이가 없어 두 사람이 탈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위해 일부러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가던 할아버지가 가끔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무언가를 설명하려 했지만 나는 아무 생각도 없었습니다. 빨리 후문에 가서 일행을 만나야 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가려던 방향과 정반대의 길로 나를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한 이십 분 가까이 걸으니 걱정스레 나를 기다리던 일행이 모여 있는 후문이 나왔습니다. 반갑고 미안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안도의 숨을 쉬고 담배를 물고 돌아서 보니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한 그 할아버지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오던 길 되돌아가면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왠지 나는 자꾸 부끄럽기만 해서 할아버지를 향해 고맙다고 손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오까야마(岡山) 온천장 주인과 던힐
어느 나라나 여행 가면 꼭 들러야 하는 데가 있습니다. 싫고 좋고 관계없이 여럿 함께 가는 여행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걸 따라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일본 가서 온천장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일본 여행 제대로 못 한 걸로 여깁니다. 우리 일행도 그런 풍조에 뒤지지 않게 여행 일정에 온천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오까야마는 온천이 지천으로 있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산간(山間) 온천지구입니다. 새롭고 근사한 건물은 거의 없고 아주 오래된 온천장들이 있는 그런 한적한 산골 동네입니다. 장마 뒤 질금거리는 비가 오락가락 하는 고속도로를 서너 시간 넘게 달려 오까야마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를 태우고 온 관광버스 운전자는 얇고 갸름한 평균치의 일본 사람 얼굴과는 아주 다르게 넉넉하고 퉁퉁하게 잘 생긴 젊은이였습니다. 말이 고속도로지 편도 일차로에 제한 속도가 칠십 킬로미터 밖에 안 되는 길이었습니다. 그 젊은 운전자는 그런데 단 한 번도 제한 속도를 넘는 적이 없었습니다. 앞뒤로 차 한 대 없는데도 그는 속 터질 정도로 느긋하게 제한 속도를 지켰습니다.
차창 밖에는 잘 그린 수묵 산수화 같은 아름다운 오까야마 산들이 낮게 깔린 구름 위로 봉우리를 드러내고, 빗방울 무게 견디지 못해 가지를 늘어뜨린 삼나무가 이등변 삼각형으로 서 있었습니다.
여행 다닐 때면 하나라도 더 구경할 욕심이 많아 늘 앞자리에 앉아야 직성이 풀렸었는데 갑자기 후회가 되고 느려 터진 일본 운전자 때문에 속이 뒤집힐 뻔 했습니다. 그렇게 오까야마에 도착하니 빗줄기가 제법 굵어지고 바람도 불었습니다. 한여름인데도 서늘했습니다. 산이 하늘에 가까워서 그런가 봅니다.
짐 챙겨 온천장 다다미방에 드니 담배 생각이 났습니다. 마침 담배가 떨어져 자판기로 갔습니다. 대표적 일본 담배인 마일드 세븐을 비롯한 일본 담배와 말보로, 켄트 등 미국 담배는 많이 있는데 내가 피우려는 던힐은 없었습니다. 주인을 찾아 손발 다 동원해서 던힐이 왜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못 알아듣는 말 계속하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나를 다시 내방으로 이끌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그는 나갔습니다.
일행 중에 던힐 피우는 사람 생각이 나서 짐 풀고 얻으러 갈 요량을 했습니다. 없으면 아무 담배나 사면되는 데도 담배라는 게 확실히 기호품이라서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담배 얻으려 일어서는데 서울서부터 동행한 여행사 안내자가 슬립가운처럼 생긴 일본식 옷 유카따(浴衣)를 가지고 와서 입으랍니다. 온천욕을 하려면 꼭 입어야 한답니다. ‘원, 내 평생에 왜놈 옷을 다 입어 보네.’ 주절거리며 그 옷을 입었습니다.
그 때 예순은 족히 넘어 보이는 온천장 주인이 비를 쫄딱 맞고 방에 들어와 던힐 한 갑을 내밀었습니다. ‘담배 자판기에 던힐 없는 걸 확인하지 못하고 손님을 불편하게 해서 주인으로서 매우 죄송하다. 그래서 비바람이 불지만 자전거를 타고 던힐을 파는 아래 동네까지 가서 사 왔다. 이해해 달라.’ 가이드가 통역해 준 주인의 말이었습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얼른 돈을 꺼내 값을 물었습니다. 주인은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했습니다. 나도 엉거주춤 맞절을 했습니다.
주인 나가고 다다미 위에 덩그마니 놓인 던힐 담배를 멀거니 바라보았습니다. 마음이 어수선하고 앞뒤 생각 가늠이 잘 안 돼서 담배를 얼른 집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주인이었다면 어찌 했을까? 그럴수록 마음은 고맙지를 않고 더 답답하고 까닭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런 내 생각이 매우 옹졸하고 창피한 것인 줄 알면서도 감정 제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고맙지를 않고 황당한 일을 당한 것처럼 낯이 뜨거워졌습니다. 주인의 태도를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단순한 문화의 차이로 여기지 못하고, 자꾸 그런 비슷한 상황에서의 내 모습과 우리 사회가 되돌아 보여서 그랬을 겁니다.
주인 앉았다 나간 다다미에 옷 적신 빗물 자국이 얼룽거렸습니다.
나는 참 한심하게도 주인을 고마워하지 못하고 그 던힐 담배를 다다미에 패대기를 쳤습니다.
기요미즈데라(淸水寺)에서 산 풍령(風鈴) 소리
여행 즐거움 중에 비록 잡살뱅이긴 해도 그 나라 토산품 사는 재미는 아주 쏠쏠합니다. 일본처럼 물가가 비싼 나라에서도 그러하지만 우리나라보다 물건 값이 헐한 나라에 가면 서로 못 알아듣는 말로 가게 주인과 흥정을 하는 일도 재미있고, 더러 값에 비해서 뛰어난 안목으로 만든 물건 만나면 쾌재를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 집 거실 귀퉁이에는 다른 나라 가서 사온 그런 잡살뱅이 토산품들을 한군데 모아 놓은 데가 있습니다.
캄보디아 시엠립에서 산 닭 그림을 보노라면 그 가게 언저리에서 풍겨오르던 퀴퀴한 땅 냄새도 나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사 달라고 조르던 가게 여자 주인의 검고 가녀린 손가락이 보입니다.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중국 둔황의 명사산 초입새에서 산 털실로 짠 낙타에서는 산만한 모래 언덕을 밤새 옮겨 놓는 거친 사막 바람결이 얼굴을 때리고, 숨을 못 쉴 정도로 찐덕찐덕했던 낙타 똥냄새가 납니다.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에서 산 미인송(美人松) 그림에서는 솜씨가 아주 엉성한 엉터리 수묵화이지만, 낯선 ‘남조선’ 관광객 만나서 애써 태연한 척하려 애를 쓰던 팔등신으로 아름답게 생긴 북한 아가씨의 어색한 낯빛이 슬며시 드러나고, 그 가게 앞에 철모르고 피었던 키 작은 코스모스 하늘거리는 꽃잎이 눈에 밟히는 듯 선합니다.
터키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에서 부르는 값을 삼분의 이나 넘게 깎아서 산 나자르(Nazaar,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부적임)를 보면 ‘내 할아버지가 한국 전쟁 때 참전 용사였다.’고 으스대며, 물건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손뼉을 치며 ‘대-한민국’을 외치고 엄지를 치켜들던, 능청스레 반죽 좋은 쿠르드족 젊은이의 뻔뻔스러운 얼굴이 떠오릅니다.
베트남 하롱베이 난전에서 산 은잠자리 다섯 마리는 일년 내내 하롱베이의 그 잔잔한 물결을 일렁거려 비릿한 바다 냄새를 전해 주고, 그 나라 물가로 본다면 무지막지하게 비싸게 먹은 ‘다금바리 회’를 ‘싸고 싱싱하다’며 침 튀기며 먹었던 씁쓸한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교토 기요미즈데라(靑水寺)로 향했습니다. 절집 오르는 비탈길에는 그런 토산품 가게가 두 줄로 죽 늘어서 있습니다. 커 봐야 두어 평 남짓한 가게들이 유별나게 다르지 않고 죄다 그렇고 그런 잡살뱅이로 그득했습니다. 대개는 눈으로만 사고 맘에 드는 물건을 집습니다. 이제 부터는 좀 긴장해야 합니다. 일본 돈과 달러와 우리나라 돈 가치를 비교하기 시작해야 하니까요. 머리가 좀 아픕니다.
다른 나라에 가면 언제나 그놈의 돈이 사람을 더 좀스럽고 치사하게 합니다. 생각나면 언제라도 이웃 마실가듯 쉽게 떠날 수 있는 부유한 사람들이야 그럴 리가 없겠습니다만, 나처럼 일 년 남짓 별러서 눈 꾹 감고, 큰 맘 먹어야 외국 여행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아마 너나없이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딜 가더라도 백만 원은 훌쩍 넘고 더러는 삼사 백까지 가는 외국 여행에서 돈을 따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사다 보면 그 돈 값이 뒤범벅이 됩니다. 우리나라 물가를 기준으로 그 나라 가격을 비교하고 거기다가 다시 미국 달러로서의 가치를 또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노라면 물건의 가치나 가격 기준이 애매해지기 시작합니다. 가난한 월급쟁이여서도 그렇지만, 그래서 나는 여행 다니면서 아직 오십 만원 넘게 물건을 사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물건을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왔다 갔다 해도 가게 주인은 말을 거는 적이 없었습니다. 일어나지도 않고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대개는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두리번거리며 천정 살펴봐도 감시 카메라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거 너무 믿는 거 아냐?’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주인 책 읽는 데 방해가 될까봐 소리 나지 않게 걸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옆 가게로 갔습니다. 거기도 그랬습니다. 또 다른 가게를 가도 주인은 첫 인사만 정중히 할 뿐, 다소곳이 앉아 책을 보거나 뜨개질, 자수 등의 잔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가게에 가서 무사 복장을 한 남자와 제대로 된 복식 갖춘 여자 인형 두 개를 샀습니다. 그리고 일본식 풍경인 풍령(風鈴) 하나를 더 샀습니다. 그 동안 가게 주인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성스레 포장을 해 주고 돌아서는 내 등 뒤로 다른 가게 나올 때마다 들렸었지만 못 알아들은 상냥한 말이 또 들렸습니다. 아마 인사였을 겁니다.
좋은 사람과 느긋하게 걸어보고 싶은 절집 입구마다 어김없이 줄지어 서서 제 집으로 오라고 지나가는 사람 끌다시피 붙잡아대는 우리나라 관광지 사람들의 천편일률적인 목소리가 짜증스러워 마음속으로 욕을 해댔었는데 갑자기 그 소리가 그리웠습니다.
기요미즈데라에서 산 풍령은 우리 집 현관에 매달려서, 겨우 얼굴 간질이는 봄날의 미풍에도 시도 때도 없이 흔들리며 청명한 소리를 내어서 내가 애써 무시하고 하찮게 여기려는 일본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합니다.
무사 내외 목각인형은 일본의 현재를 있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된 도꾸가와이에야쓰 시절의 일본적인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내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그 나라의 오늘을 만든 과거는 그저 단순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그 국가와 민족의 내일을 결정하게 한 오래된 미래라는 걸 그 인형들에게서 봅니다.
그리고 기요미즈데라 가는 비탈길 어느 가게에서나 그 많은 관광객이 드나듦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게 책을 읽거나 잔일을 하던 일본 사람들이 지금과 내일의 일본을 지탱하는 큰 힘이라는 걸 생각하며 일상의 나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이 느슨하게 사는 나를 다잡게 합니다.
‘경제 대국’의 차량과 공중 전화
요즘 우리나라 어느 시골엘 가도 소형 승용차는 드뭅니다. 아예 없을망정 소형차 보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제적인 능력으로 보나 삶의 모양새로 보아도 그리 큰 차가 소용없어 보이는 데도 대개는 큰 차를 몰고 다닙니다. 내남없이 과시가 심합니다. 십 수 년 전만 해도 어렵고 궁색하게 살다가 좀 넉넉해지자 한풀이 하듯 헤프게 씁니다.
그러나 사는 데 모든 게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밍크코트 입은 여자가 시장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할머니가 파는 콩나물 값은 깎는다.’는 우스개도 있으니까요. 넉넉하다고 다 헤프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 경제 규모는 수 십 년 사이에 세계에서 열 손가락 내외로 꼽힐 정도로 괄목할 성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만 해도 남의 나라 도움 없이는 살기도 어렵다가 지금은 많은 나라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식민지였던 나라 중에 독립해서 이웃 나라를 도와 줄 정도로 발전한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는 걸 가만히 살펴보면 분수를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개 발에 편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는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 겉치레에 괜한 돈을 들이는 때가 많습니다.
시골이든 도시든 일본 어느 곳에 가나 많이 보이는 대형 수퍼마켓 주차장에는 우리나라와는 아주 다른 두 가지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집에 차가 몇 대 씩 있는지는 몰라도 장보러 나온 사람들이 타고 온 차는 열 중 일여덟 이상이 소형차입니다. 우리나라 차처럼 날렵하게 잘 생긴 건 드뭅니다. 작고 투박하고 못 생겼습니다. 값나가고 좋은 차는 큰 도시에나 가야 보입니다. 일본 시골에서는 그런 차량 보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사는 강원도 중소 도시인 원주에서도 흔하게 보이는 토요타의 렉서스 시리즈나 혼다 제품의 고급 차량을 나는 오사카에서나 겨우 몇 대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도시에 가면 자주 보이는 비엠더블류나 사브, 벤츠, 폭스 바겐 같은 서양 차는 일부러 찾아보아야 한두 대 눈에 띌까 할 정도였습니다. 교토나 나고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형 수퍼마켓 주자창 옆에는 공중전화 부스가 여럿 있습니다.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손님들이 늘 많습니다. 우리나라 휴대전화 가입자 수가 사천만이 넘는다고 하는데 나는 일본의 휴대전화 가입자가 우리나라보다 많은지 적은지는 모릅니다. 인구 비례나 국민 소득 수준으로 보아도 아마 우리보다 적지는 않을 겁니다.
일본에서 본 공중전화 이용자는 아주머니들만은 아니었습니다. 젊은이들도 많았고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남녀노소 막론하고 아직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사람이 분명히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공중전화는 애물단지가 된 지 이미 오랩니다. 도시든 시골이든 공중전화 부스는 먼지만 뽀얗게 뒤집어쓰고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습니다. 처치 곤란한 골치덩이입니다. 비싼 줄 다 알면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중전화를 옆에 두고서도 휴대 전화를 씁니다. 마침 동전이 없었을 수도 있고 전화 카드를 마련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준비를 하려고 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다들 휴대전화를 씁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그런 일본은 미국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는 세계적인 경제 대국입니다.
다시 내 나라 한국에 와서
여행은 즐거워야 합니다.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비록 피곤하고 고단할지라도 돌아와서는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어야 합니다. 일부러 별러서 간 여행은 더욱 그래야 합니다. 일본에 다녀와서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뭐 하고 뭐 안 닦은’ 것처럼 마음이 찜찜했습니다.
그 사람들 사는 모습에서 배우고 본받아야 할 점들이 숱하게 많이 보였음에도 나는 줄곧 그런 것을 애써 외면하려 했고, 더러는 눈 흘기며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감추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일본에 대한 어쭙잖고 데데한 콤플렉스 때문이었을 겁니다.
위에 기록한 일들 외에 일본에서 내가 보고 겪은 것은 더 많습니다. 그 중에는 우리보다 못한 것을 보면서 조소로 경멸한 것도 있고, 한심해 보이는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나라(奈那)의 유명한 절집 동대사 옆 사슴 공원의 울타리가 여기저기 휑하니 뚫어진 채로 방치돼 있는 거라든가, 손길 안 간 데 없이 아름다운 고라꾸엔 뒷문 주차장 근처 수북이 쌓인 쓰레기 더미에 들끓던 파리 떼, 오까야마 가는 길에 들른 어느 휴게소 스끼야끼 집 마당의 대나무 평상에 배를 죄다 드러내고 벌렁 드러누워 있던 종업원 모습, MP3를 팔던 오사카 전자상가 뒷골목에서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던 사람들이 그런 예입니다.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그런 어둡고 추한 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명이나 문화의 정도가 남다르게 낫다고 해서 사람이 지닌 어두운 본성이 감춰지지는 않는가 봅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면 일본은 분명 내가 보고 배워야 할 게 훨씬 더 많은 나라였습니다. 아니, 단순히 보고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잡고 아프게 반성하게 만드는 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선진국은 어떤 나라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일본을 예니레 여행하는 동안 줄곧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일본식 말이 있습니다. 나쁜, 부정적인 사례나 사람에게서 좋은 교훈을 얻는다는 뜻이 담긴 말입니다.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 닮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으로서의 내 한계를 훌쩍 넘은 위대한 사람의 업적은 닮는 건 고사하고 이해조차 하기도 버거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만히 보고 우습게보던 상대에게서 발견되는 잘못은 금세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거울삼아서 내 삶의 자세나 생각의 방향을 바로잡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고 싶었습니다.
내 아버지가 아들의 간절한 설명이나 설득에도 불구하고 칭찬했던 일본, 세이코 시계와 페트리 사진기에서 비롯되었던 일본에 관한 내 견해의 혼돈, 개화기 이래 우리나라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나라로서의 일본, 근대 문물의 수입 창구(일본 나름의 여과 내지는 재생산의 과정을 다 포함해서) 기능을 했던 그 나라, 일본. 싫든 좋든 무시하고 외면하고 싶지만 지정학적으로도 도저히 그러지 못하는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던 육십 년대 중반 어느 겨울 방학에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이 일천만 엔의 상금을 걸고 공모해 당선된 미우라아야코(三浦陵子)의 ‘빙점(氷點)’이란 장편 소설 세 권을 밤 새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시절의 외국 소설이 대개는 일본어를 통해 중역된 거여서 나는 아주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다른 나라 글들에서 일본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읽으려 하지 않던 때입니다.
그 소설의 흡인력은 대단했습니다. 소설적 장치도 그렇고, 역자(譯者)의 역량이 워낙 뛰어나서 우리말로 옮겨진 일본어의 표현이나 느낌이 아주 절절하게 전달되었습니다. 그 뒤로 내가 읽은 유일한 책이 미시마유키오의 ‘금각사’입니다.
두 소설이 남긴 강한 인상은 내가 일본을 바라보는 창에 덮인 필터처럼 작동하고 있습니다.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소설적 장치들이 무서우리만치 치밀하게 계산된 두 소설은, 때론 부정하고 힐난(詰難)하고 싶은 일본이라는 대상을 비난하면서 부러워하는 이중의 척도로 보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일본 문학과는 늘 먼 거리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일본이라면 무조건 배척하고 백안시하면서 인정하고 타협하기 싫어하는 옹졸한 내 안의 자의식(自意識) 탓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겨우 며칠 일본을 구경하면서 지금까지 내 의식 속에 형성되었던 일본에 관한 가치 평가에 혼란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그것은 정신적 혼돈(混沌)에 가까웠습니다. 애증(愛憎)이 교차된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일본을 바라보는 내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 같았습니다. 그런데 미워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보다 늘 일본에 관한 생각의 앞자리에 있는 게 나도 싫습니다, 기독교도는 아니지만 나를 선생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늘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니까요.
열흘도 채 안 되는 동안 내가 본 일본은 청총마(靑驄馬)를 타고 달리며 태산을 구경한 것보다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인 일본은 지극히 작은 편린이었을 것이고 내가 만나 말 건넨 일본 사람은 그 땅에 사는 일억 넘는 사람 중에 단 몇 명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일본과 일본 사람의 상징적 모습이거나 대표성을 지닌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 어디나 다 그런 것처럼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사람들보다 그렇지 못한, 않은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두루 다녀 본 것도 아닙니다. 겨우 몇 안 되는 큰 도시나 유명한 관광지만 다녀서 세련되게 다듬어지고 정갈한 모습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름답게 잘 가꿔진 구경거리 뒤에 감춰진(가려진) 흉한 모습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를 보고 열을 알’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만난 몇 안 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내게 남긴 여러 복잡한 생각을 곱씹어 보면 일본과 일본 사람에 관해서 앞으로도 더 많이 알려고 노력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나는 싫건 좋건 앞으로도 일본을 계속 주의 깊게 바라볼 생각입니다.
무시하고 멀리하기엔 너무 가까이 있습니다, 일본은.
정 내버릴 수 없는 거라면 끌어안고 사는 게 현명합니다.
M.CAFE.DAUM.NET
송진규선생님의 일본여행기를 옮겨 놓았습니다...
우리 나라도 그렇지만 다른 나라 여행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크기를 넓고 깊게 합니다.나와 함께 이 시대를 사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여러 삶의 모습과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자연과 역사와 문화를 찬찬히 살펴 보는 일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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