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3

유영익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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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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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2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유영익
柳永益 | Yu Yeong-ik
유영익
출생
사망
2023년 7월 26일 (향년 87세)
재임기간
학력
경력
휴스턴 대학교 역사학과 조교수·부교수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
스탠퍼드 대학교 역사학과 객원교수
한림대학교 부총장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한국학 석좌교수
한일역사공동연구촉진위원회 운영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한동대학교 국제개발협력대학원 석좌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제12대 / 박근혜 정부)
상훈
하성학술상 (1993)
제13회 성곡학술문화상 인문사회과학부문 (1998)
제3회 효령상 문화부문 (2000)
옥조근정훈장 (2001)
제2회 경암학술상 인문사회부문 (2006)

1. 개요2. 설명3.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며, 제12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 설명[편집]

4.19세대로 본래 젊은 날에는 이승만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6.25전쟁을 겪는 중에 장성들이 군수물자를 빼돌리는 바람에 민방위군으로 징집된 국군 사병들이 대거 아사하거나 다치게 되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보면서 이승만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대를 졸업하고 4.19혁명을 겪으면서 반(反)이승만의 입장을 더욱 확고하게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 유학하면서 역사를 공부하던 중 우연히 하버드-옌칭 도서관에서 청년기 이승만이 저술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읽고 그의 개혁사상과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에 큰 감동을 받아 이승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박사학위 논문을 이승만에 관한 주제로 작성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승만이 박사학위를 받은 프린스턴 대학교를 방문해 학적부 등 주요 자료를 살펴보려고 했는데, 당시 한국에 있는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의 동의 서명서를 받아야 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까지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갑오경장동학농민운동갑신정변 등에 대해서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말에 이승만의 양자인 이인수로부터 이화장에 있는 10만 여 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이승만 및 한국근현대사 관련 사료를 기증받고 연구를 시작했는데 열악한 연구 여건과 비용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이건희 삼성 회장을 찾아가 50억원의 연구자금을 기부 받고, 최송옥이라는 한 독지가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소재한 자신의 저택을 이승만 연구를 위해 써달라고 연세대에 기부하게 된다. 그래서 1997년 연세대학교에 현대한국학연구소가 설립되어 이 곳에서 연구를 수행했다. 2011년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이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에서 분리, 독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영익 교수의 연구 성과를 읽고 싶으면 『젊은 날의 이승만』부터 시작해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건국대통령 이승만』, 『이승만 연구』 등의 저서들을 차례대로 올라가는게 좋다. 유영익의 저작들을 읽고 다시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의 『우남 이승만 연구』와 고정휴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의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를 읽으면 한국 역사학계에서 논의되는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비판적인 평가에 대해 고루 알 수 있다.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석좌교수, 한동대학교 석좌교수 등을 역임하였다.[1]

2023년 7월 26일 이대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

3. 여담[편집]

한동대 석좌교수로 재임 중이던 2012년 2월 9일 당시 서울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열린 ‘제12회 이승만 포럼’에서 강의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과 실정을 총체적으로 평한다면 적어도 ‘공7 과3’이고, 이승만의 독재는 불가피했다 혹은 필요악이었다라고 할 때는 그게 ‘공9, 공10’이 될 수도 있어요. 저는 이승만 대통령은 확신을 가지고 자기가 하는 일종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불가피하고 오히려 한국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믿고서 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역사에 이승만만 한 인재는 거의 없지 않았는가. 이승만은 그 세종대왕 하고 거의 맞먹는 그런 유전자를 가졌던 인물 같아요", "정치학자들이 정직하게 후진국에서 독재라는 것에 대해 사실상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를 좀 해주기 바랍니다"라는 등의 발언을 한 사실이 보도되어 논란이 되었다.*

종교적으로 기독교(특히 개신교) 편향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1996년 8월에 한국논단에 기고한 '리승만 : 그는 누구인가 - 세목에 철저하며 거시적판단 구비한 업적자'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한성감옥에 갇혀 있을 때 기독교로 개종하고 동료 정치범 40여 명을 개종시켰다며 이를 "한국 개신교 선교 사상 획기적 사실"이라고 하는가 하면 "짐승과도 같은 저열한 상태에 빠진 한국민을 기독교를 통해 거듭나게 할 목적으로 신학 공부를 곁들여 했다"고 썼다. 2005년 3월 30일에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열린 제9회 '영익 기념강좌'에서는 '이승만과 한국의 기독교'를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이 전 대통령이) 6년 동안 감옥 생활 중에 성경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바가 컸다. 그것은 한국이 독립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도덕적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2]

[1] 강만길 고려대 사학과 교수가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해임 당했을 때(1984년 복직)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이다.[2] 참고로 이 기사는 중국의 쑨원이나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에 비견될 만한 사상가로 한국엔 이승만이 있었다는 의미로 한 유영익의 발언 중 맥락을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한국에서 인식이 좋지 않은 이토 히로부미 부분만 강조하여 기사 타이틀로 다는 등 상당히 의도적으로 작성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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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예찬' 원로 역사학자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 별세

입력
2023.07.28 13:38
수정
2023.07.28 13:50
 21면

초대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 연구에 큰 역할을 한 원로 역사학자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지난 2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경남 진주 출신인 고인은 서울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인문대학원 역사·동아시아언어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휴스턴대 부교수와 고려대 사학과 교수,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객원교수, 한림대 부총장,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한국학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역사학회 회장 등을 지냈고 2013~2015년에는 국사편찬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하성학술상, 성곡학술문화상, 경암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이승만 예찬론자'라고 불릴 정도로 이승만 연구와 재평가에 천착했다. 유학 중 하버드 옌친도서관에서 이승만이 1904년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 정신'을 읽고 빼어난 식견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에 우남사료연구소를 차려 이승만 대통령의 사저였던 이화장에서 접한 10만여 장에 달하는 관련 자료를 정리했다. ‘이승만의 삶과 꿈’(1996), ‘이승만 연구’(2000), ‘젊은 날의 이승만’(2002),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2006), ‘건국 대통령 이승만’(2013)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광복절을 이승만 정부 수립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건국절로 바꾸자는 움직임에 앞장섰던 고인은 이 전 대통령을 '국부(國父)'로 칭하는 등 지나치게 전직 대통령을 예찬한다는 학계와 정치권의 비판에 맞닥뜨리기도 했다.

유족은 아들 유승덕(주일 미 대사관 상무관)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 이대서울병원 장례식장에 29일 마련된다. 발인은 31일 예정. (02)6986-4440

유영익(오른쪽)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2014년 국회 동북아 역사특위에 참석해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유영익(오른쪽)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2014년 국회 동북아 역사특위에 참석해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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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2309100046

발자취

'이승만 재평가'의 선구자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 별세

"언젠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승만이 옳았다고 인식하게 되고, 내가 한 일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 것"

글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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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장 시절의 유영익 교수. 사진=조선DB

 

휴전협정 70주년을 맞은 7월 27일 경북 칠곡 다부동 전적지에서는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이 대통령 동상 옆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보내온 화환이 놓여 있었고, 강승규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이 참석해 대통령의 축사를 대독(代讀)했다.
감개가 무량했다. ‘이삼십년 전만 해도 거의 잊힌 존재이다시피 했고, 이승만 대통령을 다룬 변변한 전기(傳記)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민간 모금으로 아주 멋진 동상이 세워지고, 대통령이 축사를 보내오고, 나라에서 기념관을 짓겠다고 하고 있으니...’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살리기 위해 애써온 분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갔다.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 《월간조선》에 12년 간 《이승만과 김구》를 연재하고 이를 7권짜리 대작으로 펴낸 손세일 전 국회의원,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 신동설 청미디어 대표 ....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세우려 애써온 이 분들이 없었다라면 ‘이승만 재평가’의 길은 열리지 않았으리라.
행사 후 이승만‧트루먼‧박정희동상건립추진모임 참석자들이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가 “앗, 유영익 교수님이…”라고 탄식을 토해냈다. 유영익 교수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날 저녁에는 1950년대사 연구에서 좋은 업적을 많이 내놓고 있는 신진 학자 이택선 박사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같은 소식을 전했다. 생전에 유영익 교수를 여러 번 뵙고 인터뷰했던 기자도 큰별이 떨어졌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독립정신》 초판본 읽고 이승만 다시 보게 돼

 

유영익(柳永益) 교수는 ‘이승만 재평가’의 길을 연 선구자이자, ‘이승만 연구’의 1인자였다. 1936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유 교수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 1972년 갑오경장(甲午更張)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휴스턴대 역사학과 조교수·부교수를 지내다 귀국, 고려대‧한림대 사학과 교수, 한림대 부총장,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한국학 석좌교수, 한동대 국제개발협력대학원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유영익 교수도 많은 동시대 지식인들처럼 당초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다. 여기에는 어린 시절 6·25 당시 목격했던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기억이 크게 작용했다. 2008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유 교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부산 동래에서 피란 생활을 하는데, 인근에 있던 야전병원에서 매일 아침 5~6구씩 국민방위군 병사의 시신이 들것에 실려 나오더군요. 못 먹고 못 입은 병사들이 몽유병 환자처럼 헤매는 것도 봤습니다. ‘자기 집에서는 다 귀한 자식들인데, 저들을 저렇게 죽이는 이 정부는 도대체 어떻게 된 정부인가? 이런 정부가 세상에 어디 있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1960년 4·19가 일어났을 때, 유영익 교수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갓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던 차라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후배들을 뒤에서 응원했다고 한다.


 유영익 교수가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하게 된 것은 하버드대에서였다. 한국현대사를 개척하겠다고 생각한 그는 하버드대 ‘하버드·옌칭(燕京) 도서관’에 소장된 한국학 관련 논저들을 찾아 읽다가 이승만이 1904년 지은 《독립정신》 초판본을 발견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출간된 한국인의 저서들 가운데 《독립정신》은 단연 백미(白眉)였습니다. 이승만은 청말(淸末)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나 쑨원(孫文), 혹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나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에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그들 이상 가는 당대 최고의 언론인이자 개혁가,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의 구한말 독립협회에서 펼친 개혁운동-일제하의 독립운동-해방 후의 건국운동-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활동 등을 연결하는 논문을 써 보기로 결심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이를 포기하고 갑오경장 연구로 발길을 돌렸다. 이후 한동안 그의 연구는 ‘19세기 후반’에 머물렀다.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설립, 이승만 자료 정리

 

 유영익 교수가 본격적으로 이승만 연구에 들어가게 된 데는 1994년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와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당시 한림대 교수로 있던 유 교수는 이인수 박사가 소장하고 있던 이승만의 영문(英文) 일기, ‘하버드 앨범’이라는 사진첩, 초서(草書)로 쓰여진 한문 간찰(簡札) 등 ‘이승만 관련 자료들’을 본 순간 “한국현대사 연구에 필수적인, 국보적 가치를 지닌 자료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 관련 자료들을 정리해 달라”는 이인수 박사의 제안을 그 자리에서 받아들였다. 유 교수는 “그때까지 이승만 관련 논문은 한 편도 쓰지 않았지만, ‘역사가로서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유 교수는 이인수 박사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내가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데다가 미국 대학에서 가르친 적도 있어 이승만 문서를 정리하기에 적임자라고 생각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이후 유영익 교수는 본인의 말처럼 ‘이승만 자료와 함께 살았다’. 1996년 연세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긴 유 교수는 1997년 현대한국학연구소를 설립한 후, 이인수 박사를 설득해 《이승만 문서》를 연세대에 기증하도록 했다. 이후 10여만 장에 달하는 이승만 관련 사료를 정리하는 일에 착수했다. 유 교수는 2001년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장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류석춘 교수 등 후임자들이 그 일을 이어받았다. 2011년에는 연세대 한국학연구소에서 이승만연구원이 분리됐다. 《월간조선》에서 펴낸 《비교평전-이승만과 김구》의 저자인 손세일 전 의원은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에서 펴낸 《우남 이승만 문서》가 없었다면, 《이승만과 김구》도 없었을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유영익 교수 본인도 자신이 이승만 연구를 하면서 가장 크게 기여한 일로 ‘이승만 자료를 정리해서 편집했다는 것’을 꼽았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라는 천재의 작품"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 박사는 한 마디로 기가 막힌 천재”라면서 “ 《이승만 문서》를 보면,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라는 천재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유영익 교수는 생전에 “대학 졸업 후 한국사 연구에 할애한 시간의 절반을 이승만 연구에 바치면서 이따금 학문적 고독감에 쓸쓸해질 때도 있었지만, 1994년 이화장 ‘이승만 문서’의 정리 작업에 착수한 이래 이승만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학자로서 천행(天幸)이었다”고 말했다.

  “이제 이승만에 대한 국내외 학자들의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언젠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승만이 옳았다고 인식하게 되고, 내가 한 일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리라고 믿는다.”

 

 "부당하게 매도당하고 있는 이승만 박사에게 정당한 자리매김을 해드리는 것이 나의 꿈"

 

  유영익 교수는 평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이승만 대통령과 이순신 장군이라고 당당하게 말했고 “부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꿈이었다면, 부당하게 매도당하고 있는 이승만 박사에게 정당한 자리매김을 해드리는 것이 나의 꿈”이라고 공언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생애 사상 업적의 새로운 조명》 《이승만의 삶과 꿈》, 《젊은 날의 이승만-한성감옥생활(1899~1904)과 옥중잡기 연구》 등의 저서는 그 꿈의 소산이었다. 

 

 그러한 꿈은 유영익 교수에게 영욕(榮辱)을 함께 안겨주었다. 이승만 연구의 1인자로 인정받으면서 그 업적을 인정받아 성곡학술문화상, 효령상, 경암학술상 등을 수상했고, 박근혜 정권 시절 제12대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임명된 것이 영(榮)이라면, ‘독재자 이승만 옹호자’라는 비난이 따라다닌 것은 욕(辱)이었다. 2013년 6월 그가 국사편찬위원장으로 내정됐다는 보도가 나오자 한국역사연구회·한국사연구회 등 5개 학회는 공동성명서를 내고, “국사편찬위원장은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인물이 맡아야 하는데, 유 교수는 이러한 기준과 너무나 거리가 먼 인사”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유 교수가 이승만 재조명에 힘써 온 것을 겨냥, “자신이 세운 동상이 국민들에 의해 무너지고 국외로 망명하는 순간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일단락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은 “지금 일부 세력이 유영익 교수의 국사편찬위원장 임명을 그토록 헐뜯고 있는 것은 그가 바로 현대사를 ‘있는 그대로’ 연구하는 것을 저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이승만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지 말고 ‘나쁜 ×’을 만들라고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을 뿌리째 ‘나쁜 것’으로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부당하게 매도당하고 있는 이승만 박사에게 정당한 자리매김을 해드리는 것이 나의 꿈’이라던 유영익 교수의 소망은 하나둘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유  교수가 세상을 떠난 7월 27일 윤석열 대통령은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식에서 강승규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이 대독한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야말로 역사의 원동력이라 확신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하여 이 나라가 나아갈 비전과 전략을 마련한 선각자였습니다.” 

 

 빈소는 서울 강서구 마곡동 이대서울병원에 7월 29일 마련될 예정이다. 발인은 31일이다. (02)6986-4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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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2023 MAGAZINE전체기사

발자취
‘이승만 재평가’의 선구자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1936~2023년)
“부당하게 매도당하고 있는 이승만 박사에게 정당한 자리매김을 해드리는 것이 나의 꿈”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 “언젠가 대부분의 사람이 이승만이 옳았다고 인식하게 되고, 내가 한 일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리라고 믿는다”
⊙ “이승만은 청말(淸末) 중국의 량치차오·쑨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후쿠자와 유기치 이상 가는 당대 최고의 언론인이자 개혁가, 독립운동가”
⊙ 10여만 장에 달하는 이승만 관련 사료 정리, 《우남 이승만 문서》 펴내
⊙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라는 천재의 작품”

연세대 한국학연구원장 시절의 유영익 교수. 사진=조선DB
휴전협정 70주년을 맞은 7월 27일 경북 칠곡 다부동 전적지에서는 이승만(李承晩)-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이 대통령 동상 옆에는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이 보내온 화환이 놓여 있었고, 강승규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이 참석해 대통령의 축사를 대독(代讀)했다.

감개가 무량했다. ‘이삼십 년 전만 해도 거의 잊힌 존재이다시피 했고, 이승만 대통령을 다룬 변변한 전기(傳記)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민간 모금으로 아주 멋진 동상이 세워지고, 대통령이 축사를 보내오고, 나라에서 기념관을 짓겠다고 하고 있으니….’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살리기 위해 애써온 분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갔다. 유영익(柳永益) 전 국사편찬위원장, 《월간조선》에 12년간 《이승만과 김구》를 연재하고 이를 7권짜리 대작으로 펴낸 손세일 전 국회의원,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 신동설 청미디어 대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세우려 애써온 이분들이 없었더라면 ‘이승만 재평가’의 길은 열리지 않았으리라.

행사 후 이승만·트루먼·박정희동상건립추진모임 참석자들이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가 “앗, 유영익 교수님이…”라고 탄식을 토해냈다. 전날인 26일 유영익 교수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날 저녁 1950년대사 연구에서 좋은 업적을 많이 내놓고 있는 신진 학자 이택선 박사 또한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같은 소식을 전했다. 생전에 인터뷰 등을 위해 유영익 교수를 여러 번 뵈었던 기자도 큰 별이 떨어졌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독립정신》 초판본 읽고 이승만 다시 보게 돼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 재평가’의 길을 연 선구자이자, ‘이승만 연구’의 1인자였다. 1936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유 교수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 1972년 갑오경장(甲午更張)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휴스턴대 역사학과 조교수·부교수를 지내다 귀국, 고려대·한림대 사학과 교수, 한림대 부총장,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한국학 석좌교수, 한동대 국제개발협력대학원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유영익 교수도 많은 동시대 지식인처럼 당초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다. 여기에는 어린 시절 6·25 당시 목격했던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기억이 크게 작용했다. 2008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유 교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청주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피란을 갔습니다.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장정들과 함께 내려갔는데, 마을마다 부모들이 마을 어귀까지 배웅 나와 자식을 눈물로 보내는 것을 봤습니다. 부산 동래에서 피란 생활을 하는데, 인근에 있던 야전병원에서 매일 아침 5~6구씩 국민방위군 병사의 시신이 들것에 실려 나오더군요. 못 먹고 못 입은 병사들이 몽유병 환자처럼 헤매는 것도 봤습니다. ‘자기 집에서는 다 귀한 자식들인데, 저들을 저렇게 죽이는 이 정부는 도대체 어떻게 된 정부인가? 이런 정부가 세상에 어디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1960년 4·19가 일어났을 때, 유영익 교수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갓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던 차라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후배들을 뒤에서 응원했다고 한다.

유영익 교수가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하게 된 것은 하버드대에서였다. 한국현대사를 개척하겠다고 생각한 그는 하버드대 ‘하버드·연경(燕京) 도서관’에 소장된 한국학 관련 논저들을 찾아 읽다가 이승만이 1904년 지은 《독립정신》 초판본을 발견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출간된 한국인의 저서들 가운데 《독립정신》은 단연 백미(白眉)였습니다. 이승만은 청말(淸末)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나 쑨원(孫文), 혹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나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에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그들 이상 가는 당대 최고의 언론인이자 개혁가,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동학운동 당시 ‘폐정개혁안 12조’ 허구성 밝혀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의 구한말 독립협회에서 펼친 개혁운동-일제하의 독립운동-해방 후의 건국운동-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활동 등을 연결하는 논문을 써보기로 결심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이를 포기하고 갑오경장 연구로 발길을 돌렸다.

이후 한동안 유영익 교수의 연구는 갑오경장과 동학농민운동 등 ‘19세기 후반’에 머물렀다. 이와 관련된 유영익 교수의 주요한 업적 중 하나가 동학농민운동을 혁명 혹은 전쟁으로 규정해온 남북한 역사학계의 통설에 반기를 든 것이다. 유 교수는 1994년 5월 한국정치외교사학회-조선일보사 공동 주최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갑오농민봉기의 보수적 성격〉이라는 논문에서 “혁명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반외세-민족주의, 반봉건-평등주의라는 이론 틀에, 전쟁을 주장하는 측은 계급전쟁(class war)의 시각에 맞추어 이 봉기를 성격규정 해왔다”며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1, 2차 자료들을 볼 때 갑오농민봉기는 근대 지향적 혁명이나 전쟁이 아니라 충군애민(忠君愛民)의 유교적(儒敎的) 사상에 바탕을 둔 보수적 무장개혁운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더 나아가 2007년 2월 《한국사시민강좌》에 실린 〈동학농민운동의 기본성격〉에서는 종래 동학농민운동의 혁명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던 ‘폐정(弊政)개혁안 12조’가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소설’인 오지영의 《동학사》에나 나오는 허구임을 밝혔다.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설립

유영익 교수가 본격적으로 이승만 연구에 뛰어들게 된 데는 1994년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와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당시 한림대 교수로 있던 유 교수는 이인수 박사가 소장하고 있던 이승만의 영문(英文) 일기, ‘하버드 앨범’이라는 사진첩, 초서(草書)로 쓰인 한문 간찰(簡札) 등 ‘이승만 관련 자료들’을 본 순간 “한국현대사 연구에 필수적인, 국보적 가치를 지닌 자료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 관련 자료들을 정리해달라”는 이인수 박사의 제안을 그 자리에서 받아들였다. 유 교수는 “그때까지 이승만 관련 논문은 한 편도 쓰지 않았지만, ‘역사가로서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유 교수는 이인수 박사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내가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데다가 미국 대학에서 가르친 적도 있어 이승만 문서를 정리하기에 적임자라고 생각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이후 유영익 교수는 본인의 말처럼 ‘이승만 자료와 함께 살았다’. 1996년 연세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긴 유 교수는 1997년 현대한국학연구소를 설립한 후, 이인수 박사를 설득해 《이승만 문서》를 연세대에 기증하도록 했다. 이후 10여만 장에 달하는 이승만 관련 사료를 정리하는 일에 착수했다. 유 교수는 2001년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장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류석춘 교수 등 후임자들이 그 일을 이어받았다. 2011년에는 연세대 한국학연구소에서 이승만연구원이 분리됐다. 《월간조선》에서 펴낸 《비교평전-이승만과 김구》의 저자인 손세일 전 의원은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에서 펴낸 《우남 이승만 문서》가 없었다면, 《이승만과 김구》도 없었을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유영익 교수 본인도 자신이 이승만 연구를 하면서 가장 크게 기여한 일로 ‘이승만 자료를 정리해서 편집한 것’을 꼽았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 박사는 한마디로 기가 막힌 천재”라면서 “《이승만 문서》를 보면,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라는 천재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승만 연구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천행”

유영익 교수는 생전에 “대학 졸업 후 한국사 연구에 할애한 시간의 절반을 이승만 연구에 바치면서 이따금 학문적 고독감에 쓸쓸해질 때도 있었지만, 1994년 이화장 ‘이승만 문서’의 정리 작업에 착수한 이래 이승만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학자로서 천행(天幸)이었다”고 말했다.

“이제 이승만에 대한 국내외 학자들의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언젠가 대부분의 사람이 이승만이 옳았다고 인식하게 되고, 내가 한 일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리라고 믿는다.”
유영익 교수는 평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이승만 대통령과 이순신 장군이라고 당당하게 말했고 “부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꿈이었다면, 부당하게 매도당하고 있는 이승만 박사에게 정당한 자리매김을 해드리는 것이 나의 꿈”이라고 공언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생애 사상 업적의 새로운 조명》 《이승만의 삶과 꿈》 《젊은 날의 이승만-한성감옥생활(1899~1904)과 옥중잡기 연구》 등의 저서는 그 꿈의 소산이었다.

이러한 꿈은 유영익 교수에게 영욕(榮辱)을 함께 안겨주었다. 이승만 연구의 1인자로 인정받으면서 그 업적을 인정받아 성곡학술문화상, 효령상, 경암학술상 등을 수상했고, 박근혜 정권 시절 제12대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임명된 것이 영(榮)이라면, ‘독재자 이승만 옹호자’라는 비난이 따라다닌 것은 욕(辱)이었다. 2013년 6월 그가 국사편찬위원장으로 내정됐다는 보도가 나오자 한국역사연구회·한국사연구회 등 5개 학회는 공동성명서를 내고, “국사편찬위원장은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인물이 맡아야 하는데, 유 교수는 이러한 기준과 너무나 거리가 먼 인사”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유 교수가 이승만 재조명에 힘써온 것을 겨냥, “자신이 세운 동상이 국민들에 의해 무너지고 국외로 망명하는 순간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일단락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은 “지금 일부 세력이 유영익 교수의 국사편찬위원장 임명을 그토록 헐뜯고 있는 것은 그가 바로 현대사를 ‘있는 그대로’ 연구하는 것을 저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이승만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지 말고 ‘나쁜 ×’으로 만들라고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을 뿌리째 ‘나쁜 것’으로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윤석열, “이승만 대통령은 선각자”



윤석열 대통령은 7월 27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지에서 열린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식에 강승규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을 보내 축사를 대독하도록 했다. 사진=배진영
‘부당하게 매도당하고 있는 이승만 박사에게 정당한 자리매김을 해드리는 것이 나의 꿈’이라던 유영익 교수의 소망은 하나둘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유 교수가 세상을 떠난 7월 27일 윤석열 대통령은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식을 위한 강승규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의 대독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야말로 역사의 원동력이라 확신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하여 이 나라가 나아갈 비전과 전략을 마련한 선각자였습니다.”

유영익 교수의 아들 유승덕씨(주일 미국 대사관 상무관)는 “장남과 아내를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시고도 의연하게 신앙심으로 이겨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면서 “그동안 일생 천착해오셨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그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뜨거워져 기념관 건립도 추진되고 있는 요즈음 그 결실을 보지 못하고 가시지만 후학들이 꼭 완성해놓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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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viewsnnews.com/article?q=104253

유영익 내정자, 저서에 '식민지근대화論'..."철회해야"서정석 기자2013-09-25 12:16


배재정 의원 "일제통치가 '정치근대화''민주정부수립''여권신장' 기여" 등 황당한 주장 담아


지난 23일'국사편찬위원장'으로 내정되어 민주당과 역사학계, 시민사회에서'최악의 인사'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유영익 한동대 교수가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주장이 담긴 자신의 저서를 쓴 것으로 드러나났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배재정 의원이 유영익 교수의 1992년 저술서 '한국근현대사론'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일제가 조선왕조를 타도해 한국민은 혁명을 거치지 않고 민주공화제 정부 수립을 시도 할 수 있었고, △ 일제 총독부 정치가 해방 후 남·북한 정부의 중앙집권적 통제력 강화와 행정 효율성 제고에 공헌 했으며 △일제식민통치는 해방 후 한국의 경제발전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주었고 △일제의 일본어 교육이 주효하여 해방 당시 한국인 중 22%가 일본어를 해독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기술하는 등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한 사관을 그대로 드러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우리나라 역사를 관장하는 가장 권위 있는 국가 기관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교과서를 검정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이런 기관의 수장은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 중립성과 학문적 전문성이 확실히 검증된 자가 맡아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배재정 의원은 "유영익 교수는 현재 독재와 친일을 미화해 비판받고 있는 교학사 역사 교과서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한국현대사학회의 상임이사 출신으로 이미 정치적 중립을 잃었고, 이승만을 우상화하는 것에 치우친 그의 업적도 객관성을 지녀야 할 학자로서의 자격을 의심케 만든다"며 "더구나 뉴라이트 사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까지 그의 저서에 고스란히 담겨있어 국사편찬위원장의 자격에 부적합하다는 것은 충분히 검증되었다"고 밝혔다.


배재정 의원은"일제가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도움을 줬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이 뿌리깊이 박힌 사람이 우리 역사 편찬과 역사 교과서를 총괄하는 국가 기관의 수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박근혜 대통령은 당장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의 내정을 철회하고 자격을 갖춘 중립적인 인사를 임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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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년간의 일제식민통치는 장기적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이 여러모로 한국의 정치 근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다(p191)


○ 일제가 1910년에 조선왕조를 타도함으로써 조선의 군주제 전통에 치명적 타격을 가한 위에 몰락왕조의 지배계급을 친일세력으로 매수, 농락함으로써 동족 간에 그들의 권위를 실추시켰기 때문에.....그 결과 한국민은 국민혁명을 거치지 않고 1919년 이후 민주공화제 정부수립을 시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p193)


○ 총독부는 육, 해군대장 출신의 총독이 방대한 관료군과 경찰을 앞세워 다스리는 일정의 군사독제체제였다. 이러한 일제의 군사독재형 정부는 의식, 무의식중에 1948년 이후 북한에 대두한 군사적 성격의 공산주의 정권, 그리고 1961년 이후 남한에 탄생한 군사정권의 원형으로서 작용하였다고 여겨진다(p193)


○ 일제 총독부 정치의 주요 특징은 중앙집권의 효율적 행정체계에 있었는 바, 이 요소는 해방 후 남·북한 정부의 중앙집권적 통제력 강화와 행정의 효율성 제고 등에 공헌한 것으로 여겨진다(p193)


○ 일제식민통치는 해방 후 한국의 경제발전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p195)


○ 일제가 야심적으로 추진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토지제도가 확립된 것은 사실이며 또 이를 통해 총독부 지세수입이 조선왕조 정부의 그것에 비해 2배 정도 증가 하였다. ....이와 같은 총독부 재정규모의 확대는 장기적으로 현대 한국 중앙정부의 재정기반을 조성하는 데 공헌했다고 볼 수 있다(p198)


○ 일제가 강조한 '실용주의'교육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조선시대의 유교위주 '허학(虛學)'대신에 서구의 과학과 학문을 본격적으로 수학, 연마케 함으로써 장기적으로 한국인의 가치관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p205)


○ 일본에서 급진적 혁명사상을 흡수한 유학생은 1920년대 이후 대두한 국내외 사회주의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반면에 일부 친일파 일본유학생은 해방전후 국내 학계의 중심으로 자리잡아 그 후 근대적 학문과 교육개발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 일제가 가용한 일본어 교육이 주효하여 해방 당시 한국인 중 약22%가 일본어를 해독하는 수준에 도달하였다(p206)


○ 일제의 식민통치기간 한국의 인구는 배증하였고 교통과 물산 교역의 중심지에서 중소도시가 발달하면서 그곳에 근대적인 도시문화가 발달하였다(p193)


○ 1922년에 발효된 민법 제13호에 의하여 축첩제가 금지되고 법적으로 이혼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한국사회 내에서의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일제하에서 꾸준히 강조된 여성 교육도 한국여성의 여권을 어느 정도 신장시켜 주었다(p210)


○ 그들(일본인)이 한국에서 생활하는 과정에서 한국인에게 준 자극은 무시할 수 없다. 즉, 일본인이 먼저 섭취한 서구의 문물과 기술 그리고 가치관 중에서 한국인이 요긴하다고 느낀 여러 가지 요소가 일제 식민통치기에 일본인 거주지를 통해 한인사회에 전파되었다고 여겨진다(p212)


○ 일제 식민통치는..해방 후 우리나라의 본격적 근대화 작업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특히 그것은 조선시대의 지도이념인 유교적 가치체계와 이에 바탕한 정치, 사회적 지도체제를 뒤흔들어 놓을 만한 발전충격을 가함으로써 새로운 '근대적'가치관 도입 및 전파와 지도세력의 등장을 용이하게 만들었다고 여겨진다(p213)


○ 일제의 식민통치는 1960년대 이후 남·북한 정부의 관주도형 근대화운동의 선행모델로서 주목된다. 특히 일제가 구축한 효율적 통치기구와 총독부가 입안한 각종의 경제개발계획 등은 남·북한의 야심적 근대화 운동에 간접적으로 원용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해방 후 한국민은 한편으로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중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을 본 따는 애증 상반적 갈등 증세를 무의식중에 표출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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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석 기자www@topd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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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익 망언, "한국인은 짐승 같이 저열"
"한국인, 도덕적 수준이 낮아 독립 지키지 못해"2013-10-18 10: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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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이 한국인을 "짐승 같이 저열"하며 "도덕적 수준이 낮아서" 일제 식민지가 됐다고 비하한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18일 정진후 정의당 의원에 따르면, 유 위원장은 지난 1996년 8월 <한국논단>에 게재한 '리승만: 그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이승만 전 대통령을 소개하면서 "미국에 건너간 그는 짐승과 같이 '저열한 상태에 빠진' 한국민을 기독교를 통해 거듭나게 할 목적으로 신학 공부를 곁들여 했다(133쪽)"고 적었다.

유 위원장은 또 지난 2005년 3월 30일 서울신대 성봉기념관에서 열렸던 '제9회 영익기념강좌'에서 '이승만과 한국의 기독교'를 주제로 강연하면서도 "(이승만이) 6년 동안 감옥 생활 중에 성경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바가 컸다"며 "그것은 한국이 독립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한국 사람들의 도덕적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라며, 한국인의 '도덕적 수준이 낮아' 일본식민지가 됐다는 황당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는 또 2004년 8월 한국사시민강좌 학술논문 '이화장 문서 속에 숨겨진 이승만의 참모습을 찾아서'라는 글에서는 "나는 이승만을 청말 중국의 량치차오나 쑨원 또는 메이지시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나 후쿠자와 유키치 등에 비해 손색이 없는, 그들의 능력을 능가하는 당대 우리나라의 대표적 언론인이자 개혁가요, 독립운동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며,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토 히로부미와 이승만을 동격으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이렇듯 국민을 비하하는 친일적 극우인사가 계속 국사편찬위원장을 맡아야 하는지,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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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언 종결자' 유영익, 대한민국 역사 위해 사퇴해야"

[국감-교문위] "햇볕정책=친북정책" 발언 파문 확산... 민주 "일본 우익 왜곡보다 심각"
13.10.15 12:14l최종 업데이트 13.10.15 18:21l
이경태(sneerc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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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국감 참석한 유영식 역사편찬위원장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교육부·국사편찬위원회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 우편향 논란의 유영익 역사편찬위원장이 참석해 의원들의 질의를 경청하고 있다. ⓒ 유성호관련사진보기
민주당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친북정책'으로 규정한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의 사퇴를 강도 높게 촉구하고 나섰다.

앞서 유 위원장은 15일 오전 1시까지 계속된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친북정책'으로 규정했다. 그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친북·반미 정책이 뭐가 있느냐"는 우원식 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햇볕정책이 친북 정책 아닙니까"라고 반문했다.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신 직후에 미국에 대해서 약간의 비판적인 발언을 하신 적이 있다"고도 덧붙였다. 우 의원이 "그것이 반미냐"고 되묻자, 그는 "(노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서 우리가 당당하게 나가야 된다고 말씀하셨다"고 맞받았다.


"기억이 없다"고 버티다가 나온 '진심'이었다. 앞서도 우 의원은 "유영익 위원장이 지난 2009년 미래한국상을 수상하면서 한 축사에서 '김대중·노무현 집권기 친북·반미정책의 부당성을 과감하고 예리하게 비판함으로서 좌파정권을 퇴진시키는 데 발군의 노력을 다했다'고 했다"면서 "친북 반미 정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나 당시 유 위원장은 "기억이 없다"고만 답했다.

유 위원장의 '진심'을 확인한 야당 의원들이 거세게 항의했지만, 교육부와 새누리당은 사실상 그를 감쌌다.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이런 시각을 가진 분이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유은혜 의원의 질의에 "제가 판단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고 즉답을 피했다. 김세연 새누리당 의원은 "유 위원장이 고령이시고 심야시간이기 때문에 (그의) 발언에 오해가 있을 수 있다"고 감쌌다.

야당 교문위원들 "역대 대통령 모독하고 역사 왜곡해, 즉각 사퇴하라"

그러나 야당은 이번 문제를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윤관석 민주당 의원은 이날 24시 비상국회 운영본부회의에서 "교문위 심야 국감현장에서 '유영익 폭탄'이 하나 터졌다, 전직 두 대통령을 친북과 반미로 모는 망언의 폭탄이었다"면서 유 위원장을 '망언 종결자'로 규정했다.

그는 또 "위험천만한 역사인식이 그 본색을 만천하에 드러낸 만큼 이제 유영익 위원장은 더 이상 국사편찬위원장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며 "본인을 위해서나 대한민국의 올바른 역사를 위해서나 즉각 사퇴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야당 의원들도 이날 공동성명문을 내고 유 위원장의 사퇴를 강력히 촉구했다. 또 유 위원장의 '햇볕정책=친북정책' 발언을 '망언'으로 규정했다.

이들은 "유 위원장이 지난 민주정부 10년을 욕되게 한 데 대해 분노하고 규탄한다"면서 "이념 편향에 치우쳐 왜곡된 역사관을 갖고 있는 것도 모자라 국감장에서 이러한 망언과 망발을 주저없이 하면서 역대 대통령들을 모독하고 역사를 왜곡한 데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 밝혔다.

또 "(우리는) 뉴라이트 학회인 한국현대사학회 상임고문이고 교학사 교과서의 원조격인 '대안교과서'를 감수한 바 있는 유영익을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임명한 데 대해 부적격함을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다"며 "그럼에도 이러한 인물을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임명 강행한 결과가 민주정부 10년을 매도하고 편향된 잣대로 왜곡하는 행태로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국감장에서도 이런 발언을 서슴지 않는 유영익이 국사편찬위원장으로서 이 정권에서 할 일은 친일 미화,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 찬양 그리고 이러한 역사를 집필하는 일이 될 것"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은 유 위원장을 경질하고, 유 위원장은 역사 앞에, 역대 대통령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박용진 민주당 대변인도 이날 논평을 통해 "햇볕정책이 친북정책이면 그를 지지하고 발맞춰 보조했던 클린턴의 미국, 고이즈미의 일본, 장쩌민의 중국과 국제사회 모두가 친북활동을 했다는 해괴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며 유 위원장의 발언을 비판했다.

박 대변인은 이어, "자신의 왜곡된 시각을 강변하기 위해 클린턴 미 전 대통령을 친북인사로 만든 유 위원장이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앉아있는 한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칠 게 없고 올바른 역사편찬을 기대할 수 없다"며 "일본 우익의 역사왜곡보다 더 심각한 역사왜곡 인식을 갖고 있는 유 위원장은 즉각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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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문가가 본 '건국전쟁' 흥행..."586세대의 이승만 찾기"
중앙일보
입력 2024.02.19 18:22

영화 '건국전쟁'의 한 장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전 모습이 담긴 기록 영상이다. 사진 김덕영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건국전쟁'(1일 개봉)이 7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하고 있다. 이승만 평전과 함께, 그에 의해 희생된 조봉암의 평전을 썼던 학자로서 이 영화의 흥행을 ‘586세대의 이승만 찾기’로 정의하고 싶다. 주로 비판만 받았던 이승만이 2000년대 들어 유영익 교수 등에 의해 재인식됐다면, 이번에는 586세대인 김덕영 감독의 '건국전쟁'으로 재정의되며 다큐 관람 열풍으로 이어졌다. 관객 역시 50~60대가 주를 이룬다.
작품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승만의 업적을 조명했다. 이승만 정부가 수행한 농지개혁의 의의를 세계사와 비교해 설명한 부분이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성과, 세계적으로도 매우 앞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사실, 제1공화국 시기의 교육 열풍이 산업화와 경제 발전의 기반이 됐다고 평가한 것 등이다.
특히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토지개혁으로 평가 받는다. 지니계수가 0에 가까우면 평등, 1에 가까우면 불평등하다는 뜻인데, 1960년 한국의 토지 분배 지니계수는 0.3 수준으로 한국은 세계에서 토지 분배가 가장 평등한 나라 중 하나였다. 세계은행의 『세계경제발전 보고서』(2006)는 세계적으로 토지 분배가 상당히 평등했던 한국, 대만, 일본이 높은 장기 경제 성장률을 달성했다고 지적했는데, 특히 한국은 대만, 일본보다도 토지의 지니계수가 낮은 것은 물론 공산국가인 중국보다도 낮았다. 이는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이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지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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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건국전쟁'. 다큐 '김일성의 아이들'을 만든 김덕영 감독이 3년간 취재해 완성했다. 사진 김덕영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는 부분들은 옥의 티로 느껴졌다. 다큐가 지적한 대로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한강인도교 폭파 당시 수백명이 폭사·익사했다는 주장과, 당시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음성이 계속 방송됐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인도교 폭파 시기가 적절했는가 여부와, 이승만 정부가 전쟁 정보를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아 수많은 국민들이 피난가지 못하고 납북되거나 북한군 치하에서 신음했다는 점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이승만 정부에게 무조건 면죄부를 줄 수 없다는 말이다.
3·15 부정선거에 관한 묘사에서도 맹점이 드러난다. 선거 부정의 범위를 부통령 선거 과정으로 한정하고, 이승만은 대통령 선거 출마자이자 단독 후보였다는 이유로 면책 논리를 구성하는데, 국정 최고 통치자인 이승만에게 선거 부정에 대한 잘못과 책임이 없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또 1945년 9월부터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북한 공산화가 진행됐다는 서술은 학계에선 논쟁이 진행 중인 담론이다.
또 이승만 단독 주연이라는 설정에 충실하다 보니 함께 등장하면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그리고 이승만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해줄 국가 건설의 조연들이 등장하지 않거나 평가절하됐다.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고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키며 이승만을 형님으로 모신 김구는 차치하더라도, 김규식의 경우 그가 대한민국의 탄생을 긍정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여러 자료에서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도 부정적으로만 묘사한 것은 시간 제약 때문 만은 아닌 듯 하다.
이승만 열풍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이승만의 시대와 현 시대의 유사성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이승만 시대를 ‘시대 전환기’로 규정할 수 있는데, 현재의 우리 또한 유사한 성격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수백 년 걸린 근대화 여정을 한국 사회는 불과 수십 년의 여정, 즉 일제 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그리고 산업화에서 민주화로 이어지는 압축적 근대라는 형태로 경험했고, 이에 우리 사회는 전근대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 충돌하고 공존하는 장이 됐다.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4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환영 인파 속에 자동차 행진을 하는 동영상을 70년 만에 공개했다. 김덕영 감독이 당시 기록 사진을 본 뒤 미국 교민들의 도움을 받아 동영상까지 발견했다. 사진 김덕영


구한말에 태어나 근대 국가를 세우고 지도자가 된 이승만은 그런 다중적 시간을 최전선에서 통과한 인물이다. 이승만 내부에는 전통과 근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계몽주의와 유교적 가부장주의가 공존했고, 이는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체제도 마찬가지였다. 4·19 혁명의 발발은 이승만 개인의 문제나 잘못으로 국한되는 게 아닌, 우리 역사의 궤적에 내재한 모순의 폭발이기도 했다.
얼마 전 우리 사회는 ‘탄핵’과 ‘정권 교체’를 기점으로 극심한 정치 변동을 경험했고, 언론은 이를 조선시대 당파 간 정치 보복에 비유하기도 했다. ‘왕당파’ ‘여왕’ 같은 단어가 빈번하게 사용되더니, 최근에는 ‘윤핵관’, ‘용핵관’, ‘진명’, ‘수박’ 등의 단어까지 등장했다. 진보, 보수 모두 전 근대적 요소들과 공존하는 현 상황을 많은 이들이 개탄하고 있다.
국제정치적으로도 ‘시대 전환기’인 것은 이승만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이 패권을 다투는 G2 시대에 살고 있고, 패권의 향방에 따라 서로 다른 문명권을 수용하고 또 편승해야 하는 시대를 살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속에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우리 시대가 이승만의 시대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는 근대 국가를 완성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근대 국가 건설을 시작한 이승만과 그의 시대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이 이를 느끼고 있고, 이런 정서가 진원지가 돼 보수와 노년층을 중심으로 이승만 열풍이 강하게 일고 있는 건 아닐까?
제주 4·3 사건, 한국전쟁 중 참변(거창 양민학살 사건,국민방위군 사건)의 희생자와 후손들이 존재하기에 이승만 평가에 대한 감정적 저항이 있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지금부터 시작된 것이며, 모든 은원(恩怨)과 이해관계를 초월한 후손들인 MZ세대에 의해 객관적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과 그의 시대가 역사의 화석으로 남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시대 전환기’ 속에서 방향성을 상실한 채 휩쓸려가고, 진정한 근대로 완전히 진입하지 못하는 한 이승만과 그에 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재소환될 것이다.
이택선 명지대 교수(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29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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