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없는 비판과 혁신
[서평] 《마르크스와 세계경제》(정성진/ 책갈피)
2016년 01월 23일 12:42 오후
새해가 밝자마자 중국 증시가 폭락하면서 세계 증시가 같이 출렁거리는 모습이 목격됐다. 그토록 뜸 들이다가 금리 인상에 나섰던 미국은, 추가 금리 인상을 쉽게 못할 처지가 됐다.
스페인 총선에서 급진좌파인 포데모스의 약진, 베네수엘라에서 마두로 정부의 선거 패배,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충돌,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 추진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많은 정치적 충돌들의 배경에는 유가 하락, 금융 불안, 경기 침체가 깔려있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 전 아주 시의적절하게도 정성진 교수의 새 책 <마르크스와 세계경제>(책갈피)가 출판됐다. 한국 사회에서 많지 않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의 최신 연구 성과와 주장을 접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반갑고 유익한 경험이다.
정성진 교수의 이 책은 그런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키고 있다. 정성진 교수는 그동안 급진적 관점을 잃지 않으면서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교조적 해석에 머무르지 않아 왔다. 또 성실한 탐구와 치밀한 분석을 통해서 이론적 견고함을 유지해 왔다.
나아가 추상적 이론에만 치우치기보다는 현실적·정치적 쟁점들에 대해서도 발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번 책에서 다시 한 번, 정성진 교수의 이런 장점들을 보고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물론 깊이 있는 이론적 논의를 다루는 것이라서 불가피하게도, 그리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국가 – 외국무역 – 세계시장
특히 이번 책의 핵심적 내용은 “마르크스주의 세계경제론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시도”에 맞춰져 있다. 이런 재정립을 위해서 기존의 좌파 운동과 학계가 보여 온 몇 가지 문제점들도 지적하고 있는 데 여기에 큰 공감을 느끼게 된다.
예컨대 “마르크스 원전의 불명확한 자구의 해석이나 … 가정에 몰두하는 경직된 자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그렇다. 실제로 이런 태도는 과학적 탐구보다는 종교적 교리 해석에 더 어울릴 것이다.
이런 태도는 이 책이 지적한 ‘과소소비설, 불비례설, 이윤율 저하 공황설 간의 격렬한 공방’에서도 관찰된다. 서로 마르크스 <자본론>의 문구를 끌어와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추상적이고 일면적인 대립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해석 공방의 토대가 되곤 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미완성 저작이었다. 정성진 교수는 마르크스가 1850년대 말에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스스로 제시한 ‘6가지 플랜’(자본 – 토지소유 – 임금노동 – 국가 – 외국무역 – 세계시장)을 기준으로 제시한다. 이 기준으로 보면 <자본론>은 그중 전반부 3가지(자본 – 토지소유 – 임노동)에 주로 초점이 맞춰진 내용이라고 지적한다.
더구나 마르크스는 주로 영국의 경험적 현실을 바탕으로 높은 추상 수준에서 이것들을 일반화하고 있다. 이것마저도 마르크스 자신이 완성하지 못해서 엥겔스가 최종 편집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여기에만 기초해서 자본주의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단지 ‘자본 – 토지소유 – 임금노동’으로만 구성된 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런 분석은 세계체제로서 자본주의라는 측면을 놓치고 ‘일국자본주의적 문제설정’에 빠지기 쉽다. 정성진 교수의 지적처럼 “일국자본주의”적 문제설정의 잔재는 좌파와 학계에서 여전히 흔적을 볼 수가 있다. 그동안 공황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연구성과들에서 그 범위가 주로 “미국경제에 한정돼”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이에 대한 대안적 방향으로 마르크스의 플랜 후반체계(국가 – 외국무역 – 세계시장)로의 ‘논리적 상향과 구체화’를 제시한다. 국가, 외국무역, 세계시장은 ‘자본축적 체제 자체의 필수적 구성요소이며 전제’이므로 이 모두를 “상호 연계시켜 총체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인용된 마르크스 자신의 말도 이를 뒷받침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더 구체적인 형태들을 포괄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자본의 일반적 성질을 파악한 다음에야 가능하다. 또 이와 같은 형태들의 서술은 이 저작[자본론]의 계획 밖의 것[이다.]” “세계시장을 창출하는 경향은 자본 개념 그 자체에 직접 주어져 있다.”
이 책은, 이윤율 저하의 주된 경향과 그것을 일시적·부분적으로 저지하는 상쇄 경향과 비유해서, 자본주의의 세계화를 ‘주된 경향’으로 국가화를 ’상쇄 경향‘으로 설명한다. 이런 관점과 방법을 통해 세계적 양극화 과정을 분석하고,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을 재구성할 뿐 아니라, 특히 “글로벌 자본주의 위기론”으로 확장해 나간다.
마르크스 자신도 단지 한 나라에 머물지 않고 ‘세계시장 공황’으로 자본주의 위기에 접근했다는 것이다. 이런 언급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세계시장 공황에서 부르주아 경제의 모순과 적대는 충격적으로 드러난다. … 세계시장 공황은 부르주아 경제의 모든 모순의 현실적 총괄 및 폭력적 조정으로 파악돼야 한다.”
따라서 정성진 교수는 어느 한 가지 요인을 가지고 일면적이고 추상적으로 공황을 분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자본축적의 모순이 국가와 외국무역을 매개로 세계시장공황으로 귀결된다는 관점”을 바탕으로 종합적이고 구체적으로 경제 위기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8년 위기 또한 “세계적 규모에서 이윤율 저하와 자본의 과잉축적에서 비롯된 생산과 소비의 모순 및 현실자본과 화폐자본의 축적의 모순의 중층결정의 산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마이클 로버츠 등이 세계 주요 국가의 국민계정과 자본스톡 데이터를 통합해 도출한 “세계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독점’과 ‘종속’을 넘어서
이처럼 “세계화란 자본축적의 모순과 위기의 전 지구화”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보여 주는 이 책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존재하는 불평등에 대해서도 새로운 분석을 시도한다. 이 부분에서 좌파는 “독점과 종속의 문제설정”에서 좌충우돌을 겪어 온 것이 사실이다. 스탈린주의적인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제3세계주의적인 ‘종속이론’의 대립이 대표적이다.
정성진 교수는 이런 틀을 벗어나서 마르크스주의 가치론과 가치법칙을 통해서 이것을 더 정교하게 분석하려는 시도를 보여 준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탐구가 부족한 나같은 사람에게는 특히 이 부분이 어려웠다.)
여기서 정성진 교수는 먼저 ‘국제적 시장가치설’과 ‘국제적 생산가격설’이라는 앞선 이론적 논의들을 검토한다. ‘국제적 시장가치설’은 국가 간 노동생산력의 차이 때문에 국제적 시장가치와 국제적 개별가치의 괴리에 따른 부등 노동량 간의 교환이 이뤄지고, 그 차액이 선진국 자본의 초과이윤이 된다는 이론이다. 즉 선진국 노동자의 더 적은 노동량이 후진국 노동자의 더 많은 노동량과 교환되면서 잉여가치의 국제적 이전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1시간 노동이 인도의 80시간 노동과 교환되는 식이다.
반면 ‘국제적 생산가격설’은 세계적 차원에서도 시장경쟁 속에서 평균이윤율과 생산가격이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경쟁 속에서 균등화가 이뤄지기 전에는 유기적 구성의 차이 때문에, 주변부의 이윤율이 중심부의 이윤율보다 높고, 따라서 서로 다른 부문 간의 부등 가치 교환 속에 가치 이전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정성진 교수는 경쟁 속에서 이윤율의 국제적 균등화가 이뤄진다는 ‘국제적 생산가격설’의 기본 취지를 지지하면서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두 이론의 종합을 시도한다. 자본주의 민족국가들은 보호관세, 수출장려, 무역 정책 등을 통해 가치법칙을 일시적으로 수정할 수 있지만, 세계화가 진척될수록 결국은 가치법칙이 관철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자본주의 중심부와 주변부 간의 불평등 교환”은 “주변부 노동력의 초과착취, 즉 가치 이하로의 임금 지불이라는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선진국 자본이 획득하는 초과이윤의 원천은 후진국 자본이 후진국 노동계급으로부터 전유한 잉여가치의 이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제국주의 국가와 초국적 기업들은 저개발국 노동자들에게 노동력 가치 이하로 임금을 지불하며 초과착취를 한다. 이런 초과착취는 안정적인 노동력 재생산에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전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전가’해버린다는 것이다. 또 저부가가치의 제조 공정을 ‘저임금 지역에 아웃소싱 형태로 이전하고 하위 공급자들 간의 경쟁을 부추겨 더 많은 부가가치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제국주의 국가의 주요 역할은 세계적 초과이윤의 원천을 독점”하는 데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과 분석은 로자 룩셈부르크에서 비롯돼 오늘날 데이비드 하비같은 학자들에게로 이어지는 제국주의에 대한 분석과 ‘강탈을 통한 축적’의 문제의식과도 접점이 있어 보인다.
‘혁명적 패배주의’냐 ‘평화강령’이냐
이런 분석은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바탕으로 해서, 주로 ‘독점’과 ‘자본 수출’을 통해서 제국주의의 경제적 메커니즘을 분석하던 여타 설명보다 더 구체적이고 정교하며, 현실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레닌의 기존 분석은 스탈린에 의해서 더욱 더 도식화되면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론’으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정성진 교수는 이 책에서, “레닌과 다른 것은 오류라고 전제”하는 “기존의 평가들”과 분명히 선을 긋는다. ‘레닌이 말한 것은 곧 정답’이라는 식의 이런 교조적 태도에 대한 이 책의 과감한 선 긋기는 “혁명적 패배주의”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에서 더 분명해진다. 이 부분은 처음에 ‘혁명적 패배주의’를 의심할 수 없는 무언가로 여겼던 나 같은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 왔다.
혁명적 패배주의는 ‘전쟁에서 사회주의자는 자국의 패배를 추구하며,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켜야 한다’는 공식이었다. 사회민주당들이 사회주의적 원칙을 져버리고 전쟁을 지지하는 당시 상황에서, 사회애국주의에 대한 비타협적 도전으로서 ‘혁명적 패배주의’에 대해 나는 그동안 어떤 의문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자국 국가권력이나 전쟁 노력에 대한 조금의 지지도 보내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혁명적 패배주의의 정신을 높이 평가해 왔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계급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그 급진적 지향에 공감해 왔다.
물론 이런 점들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고 의미있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라는 구체적 상황에서 ‘혁명적 패배주의’가 과연 전략·전술로서 타당하고 효과적이었느냐는 것은 제기될 만한 의문이었다.
정성진 교수는 많은 급진좌파들의 해석을 뒤집으면서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와 트로츠키의 ‘평화강령’ 중에서 후자가 옳았다는 도발적 주장을 제시한다. 그리고 1차 대전 당시의 논쟁에서 트로츠키의 비판을 소개한다.
여기서 트로츠키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가 1905년 혁명을 낳았지만, 또한 일본제국주의의 강화도 낳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혁명적 패배주의의 공식이 러시아의 패배를, 따라서 독일의 승리를 뜻하게 되는 모순을 지적한다.
“러일 전쟁은 한편에서 차리즘을 약화시켰지만, 일본 군국주의를 강화했다. … 사회민주주의자는 자신의 목적을 이 전쟁이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 가능성의 어느 쪽과도 …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 [혁명적 패배주의의] 역설적이며 내적으로 모순적인 공식은 우리의 독일 동지들을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으며 우리의 선동을 풍부하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방해하고 있다.”
그러면서 트로츠키는 ‘무배상과 무병합을 통한 즉각적인 전쟁의 중단, 모든 민족의 자결권 보장’ 등을 내용으로 하는 ‘평화강령’을 제시했다. 반전 평화를 위한 투쟁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이행기강령으로서 말이다.
이것은 심지어 트로츠키 자신도 (레닌과 자신의 차이를 부각하는 것을 꺼렸는지) 굳이 들쳐내지 않았고, 그래서 그동안 잊혀져 왔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성진 교수는 망설임없이 역사적 사실들을 상기시킨다.
먼저 1915년 치머발트 반전회의에서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는 압도적으로 부결된 반면 트로츠키의 평화강령이 채택됐었다. 사회민주당들의 전쟁 지지에 반대해서 모인 반전 사회주의자들의 국제회의에서 말이다.
이어서 이 책은 “레닌은 1916년말부터 혁명적 패배주의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1917년 <프라우다> 편집부가 “혁명적 패배주의”라는 문구를 삭제했던 사실 등을 지적한다. 무엇보다 러시아 혁명이 바로 “빵, 토지, 평화”라는 이행기 강령을 통해 성공적으로 전개됐다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킨다.
나아가 “코민테른의 최초 4개 대회의 어떤 문건에서도 패배주의 슬로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 또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나 한반도에서 대규모 전쟁연습같은 상황에서 ‘폭격의 즉각적인 중단과 전쟁 반대’같은 구호를 내걸고 있는 게 사실이다. 비록, 제국주의나 자국의 전쟁 노력에 어떠한 지지도 보내지 않는다는 ‘혁명적 패배주의’의 정신은 여전히 이어져야겠지만 말이다.
결국 이 모든 사실과 논의들은 “실천적 타당성이 입증된 것은 트로츠키의 대안”이었고 “오늘날 더 현재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는 이 책의 주장을 거부하기 어렵게 한다.
어떤 성역도 인정하지 않는 정성진 교수의 태도는 “유럽합중국” 슬로건을 둘러싼 레닌과 트로츠키의 논쟁을 돌아보면서도 반복된다. 1차 세계대전 상황에서 트로츠키가 민족국가 간 갈등과 충돌을 제거하기 위한 “소비에트 유럽합중국”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세계 사회주의 연방”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본 것은 타당하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유럽합중국이 자본주의에서는 진정으로 실현될 수 없으므로, 이를 위한 투쟁은 곧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봤다. 이행기 강령의 문제의식이었던 것이다. 또 노동자 권력은 한 나라를 넘어서 국경을 허문 민주적 연방의 형태로 수립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레닌도 1914년 초기에는 이를 지지했고, 나중에 1923년 코민테른 확대집행위원회에서도 이 슬로건이 승인됐었다는 점을 일깨운다.
하지만 레닌은 1915년에 곧 입장을 바꾸었고 “사회주의의 승리는 처음에는 몇몇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혹은 심지어 단 하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가능하다”며 트로츠키를 비판했다. 이것은 ‘일국적 관점’의 약점을 보이는 것이며, 이것이 나중에 스탈린 ‘일국사회주의’의 핵심 근거로 이용됐다는 게 이 책의 지적이다. 이 또한 매우 설득력있는 주장이다.
자극과 진척
다만 오늘날 ‘유럽합중국’ 슬로건을 반복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지금은 1차 세계대전과 달리 신자유주의와 경쟁의 논리에 기반한 유럽연합과 유로존이 등장해 있는 상황이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유럽연합과 유로존은 그리스 등에서 신자유주의적 긴축정책을 강요하며 제국주의적 압박을 가해 왔다.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이탈)가 대안으로 제기된 것은 이런 구체적 조건에서다. 유로존 내에서는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따라 온 구조조정을 계속 강요당할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긴축정책과 신자유주의 논리를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이에 따라 더 이상의 채무상환을 거부하고 유로존과 긴축정책에서 벗어나자는 그렉시트가 제기됐다.
그러므로 이 책이 그렉시트를 “민족주의적 경쟁력 담론”이라고 비판한 것은 쉽게 수긍이 안 간다. 물론 이 책의 지적처럼 ‘유로존에서 이탈해 통화를 평가절하하고 수출경쟁력을 강화하자’는 관점에서 그렉시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그리스 좌파 경제학자인 라파비차스가 그런 혼란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입장을 경계하고 비판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렉시트 자체가 반드시 그런 입장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을까? 유로존에서 벗어나 자본 통제, 은행 국유화 등을 요구하는 투쟁을 국제적 반긴축 연대 투쟁으로 발전시킨다는, 이런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반자본주의 투쟁과 연결시킨다는 대안도 존재한다. 오늘날의 조건에서는 이것이 더 적절한 이행기 강령으로 작동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밖에도 이 책에는 더 진척된 결과물을 보고 싶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다. 예컨대 이 책은 “생산부문에서 이윤율의 장기적 저하경향이야말로 유로존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본원인이 어떤 다른 요인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위기로 나아갔는지에 대한 좀 더 구체적 분석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앞서 2008년 세계경제 위기를 “세계적 규모에서 이윤율 저하와 자본의 과잉축적에서 비롯된 생산과 소비의 모순 및 현실자본과 화폐자본의 축적의 모순의 중층결정의 산물”로 분석했던 것에 비추어 볼 때도 그렇다.
“‘국가와 시장 간의 교대운동, 진자운동’ 자체의 혁명적 전복”이 필요하다는 용기있고 과감한 주장도, 이런 투쟁의 발전을 가능케 할 더 구체적 전술, 이행기 강령들에 대한 고민을 자극한다. 이는 “개량을 위한 투쟁은 반자본주의 노동자 혁명의 전망과 유기적 연계 아래 수행돼야 한다”는 이 책의 주장과도 연결되는 고민일 것이다.
무엇보다 광기어린 자본축적의 논리가 “자연환경과의 충돌로까지 치닫고 있는 과정”이 계속되고 있다는 경고는 묵직하다. “경제 위기와 생태 위기의 복합 위기로서 전지구적 위기”에 대한 전망은, 이에 대해서 앞으로 더 발전되고 확장될 분석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다.
물론 이것은 정성진 교수가 이 책에서 제시한 기본적 방향을 바탕으로 우리 모두가 같이 고민하게 토론하며 수행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세계 자본주의의 불안정과 위기는 그런 고민과 토론을 재촉하는 채찍질처럼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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