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10

김수복 님에게 질문 > 민족게시판 |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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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님에게 질문
작성자 호돌이 14-01-24 15:41 조회1,149회 댓글0건


님은 - " ... 2012년에는 드디어 비료를 자급자족할 수 있으며 양곡생산의 획기적 증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 - 을 하였는데, 북한의 공장이 정상적으로 가동 된다면 외부의 원조 없이 주체적으로 자급 자족이 가능 해야 하는데 그 반대로 2013 년 에도 북한은 비료와 식량을 원조 받는 해로 전락 했습니다. 님은 어떻게 생각 하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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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김수복선생, 북에 대해 척척박사
노길남 특파원
기사입력: 2012/01/22 [19:24] 최종편집: ⓒ 자주민보

▲ 김수복 미국 뉴욕 동포 © 자주민보 / 노길남 민족통신 특파원


[뉴욕=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수행원 역할을 해 왔다고 자부하면서 북녘사회 지식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척척 대답하는 뉴욕동포가 있어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 주인공은 뉴욕 거주 김수복 선생(67)이다. 그는 특히 이북의 기술과 지하자원을 많이 이해하고 있는 지식인이며 동시에 재미동포 통일운동 진영의 숨은 인재이다.


그는 이북에 대해,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현지지도한 장소들과 그곳 사정에 대해 아주 자세히 알고 있었다.


“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1년 반 동안 현지지도한 장소들을 거의 빠지지 않고 다 찾아 살펴보았습니다.”


북녘 지도를 펴 놓고 현지지도한 장소들을 일일이 지도에 표식을 해 가면서 현지 시간보다 약 이틀 뒤에 김정일 위원장의 미국 수행원이 되어서 북의 여러 가지 생산 공장과 농장, 과수원 여러 건설현장 그리고 군부대 등의 사정을 꼼꼼하게 고찰하며 연구해 왔다.

파악한 정보들 대부분은 북녘 인터넷 언론들을 통해 찾은 것들이었다.



✦ 계기


북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에 대해 그는 “1976년에 도미하여 살게 되었지만 미국에 오기 전 1972년에 국제경상학회가 파견한 일본 관서대학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 공부하던 시기에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는데 당시 오사카에서 재일총련, 한통련 등 단체들이 그 회담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게 되었다. 그때 우리 민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오늘 날 이북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는 1980년대부터 미국의 청년운동에 불을 붙였던 윤한봉 선생의 영향이 컸고, 그 다음에 남녘 감옥에 있다가 2000년 북으로 돌아간 홍문거 선생을 비롯한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을 도우면서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살인적 구타, 배고픔, 인격모멸 수십 년 간 계속되는 죽음과 같은 상황에서도 조국과 지도자에 대한 믿음, 죽을지언정 배신하지 않는 의리를 다한 장기수분들에게 경외심과 가장 큰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이북을 두 번 방문한 것이 우리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돌이켜 본다.


그는 애국열사릉 고주몽릉 등을 참관하고, 교예단 같은 것들을 보고나서 뉴욕 5가(5th Avenue)같은 곳에서 주눅 들어 살아온 삶에 대해 “그게 아니구나”라는 가슴이 확 터지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를 포함하여 5,000년 단군문화가 다시 15,000년 전의 홍산문화와 다 연결이 되고, 그것이 다시 내려와서 주체철학과 맥을 잇는 우리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만주 시베리아 혹독한 기후 조건에서도 독립을 위하여 싸우던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적 긍지심과 자부심이 다시 내 핏속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 북의 저력

그는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서거 이후 특히 95년 큰물난리로 이북동포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설상가상으로 소련연방이 붕괴되어 사회주의 나라들과 교역활동이 완전 단절되고, 미국의 대북적대시 봉쇄 압박정책으로 겹쌓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이남 동포들은 어떻게 했고, 해외동포들은 또 어떻게 했던가를 반문하면서 미안하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이북동포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고난의 행군 길을 걸어 온 과거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선군정치로 먹을 것도 못 먹어가며 이룩한 인공위성 로케트 종합기술과 핵억지력 기술, CNC기계제작 기술 등 엄청난 기초 산업기술을 성취해 놓은 업적들을 평가하는 한편, 축구장 7배 크기의 ‘희천련하기업’을 위시하여 리승기 박사가 창조한 2.8비날론 공장의 내력, 즉 늘어나면 줄지 않던 비날론을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 신축성 있는 비날론으로 다시 만들어 놓은 그 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김수복 선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6년간의 긴 고난의 행군을 끝내고 드디어 2009년 석탄화학 기술에 기반한 비날론 즉 주체섬유를 다시 폭포수 같이 만들어 내고, 다시 석탄에서 주체비료를 만들어 내고 풍부한 철광석과 석탄으로 코크스 없이도 돌아가는 최신 공법의 제철기술을 이룩한 북녘동포들의 피눈물 어린 역사들도 소개했다.


그는 이어 2010년 10월 10만 함흥군중대회를 통해 주체섬유 생산 실적을 축하한 역사도 설명하면서 흥남비료공장과 남흥청년화학공장에서 생산한 비료로 2012년에는 드디어 비료를 자급자족할 수 있으며 양곡생산의 획기적 증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고, 만수대 살림집 건설 의의와 진행 정형에 대해서도 줄줄이 설명하였다.

특히 중국의 창지투(창춘 지리 투먼, 장길도-장춘, 길림, 도문-라고도 함) 개발계획과 러시아 극동의 개발 계획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가 물류문제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등장한 북의 라진, 선봉, 청진항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혜안이 10년은 미리 내다보았던 것으로 볼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술술 설명해 주었다.


또한 북녘 땅에 매장된 지하자원은 남쪽에서 이미 인정하고 있는 것만 해도 약 7조원 대인데 이 숫치는 원유 등 여러 전략 자원을 제외한 숫자다라고 했다.

북에는 철광석(쇠돌) 70억톤, 석탄 150억톤, 그리고 석회석 1000억톤 등 무한히 많다는 것이다.

이미 중국이 투자해서 개발을 시작한 서한만 분지의 석유도 660억 배럴로 추산한다. 국제 원유가가 한 배럴에 $50-$100를 넘나드니 석유만해도 천문학적인 가치이다.

또 북에는 우주선 등에 이용되는 마그네샤와 희토류도 엄청난 량이 있다는 것이다. 핵발전소 등에 이용되는 우라늄도 호주에 115만톤 가량 있다고 하는데 이북에 4백만톤 이상(비공식적으로 2천6백만톤)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석탄은 현재 남에서 사용하는 양으로 따지면 몇 천년을 사용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 시급한 남북 교류협력


그는 남과 북이 손을 잡고 서로 협력하기만 하면 세계 강국이 될 수 있는데 그 길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표정이다.

▲ 김수복 선생 © 자주민보 / 노길남 특파원
인공지구위성 발사 로켓도 100% 자체의 기술로 만들어 성공시켜 왔는데 이런 기술을 남북이 함께 이용하면 구태여 다른 나라 기술진을 들여올 필요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40년 전 일본 오사까에 교환학생으로 재학할 때 경험한 뜨거운 남북화해협력 분위기가 다시 재현되었으면 좋겠다고 기원하기도 했다.


그는 또 자신이 6.15동부지역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남과 북이 6.15선언 정신과 10.4선언 정신으로 가면 이미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은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속담과 같이 적당한 시기에 북에 가서 한 번 직접 둘러보기를 권한다.


웹사이트는 남녘의 통일뉴스를 포함하여 자주민보, 민중의 소리 등을 권유하면서 이북의 인터넷 언론 ‘우리민족끼리’로 들어가 ‘조선중앙통신’이나 ‘로동신문’ 등을 읽으면 북녘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재작년에 앞장서서 만들었던 대풍국제투자그룹에 대해서도 연대하고 앞으로 북의 경제를 좀 더 이해하고 배워서 북과 해외 굴지 기업과의 경제적 관계를 맺는데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찾아서 해보겠다”면서 그 선결 조건인 북미 간에 평화협정을 맺어 양국 간의 국교정상화가 이룩돼야 한다고 말하고, 이를 위하여 재미동포들이 힘써야 된다고 강조한다.


김수복 선생은 1944년 7월 공주에서 태어나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를 나왔다. 1976년 4월 도미해서 36년째 미국에 거주하며 재정융자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는 지금 퀘이커교 신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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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당국, 비료 확보에 올인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3-06-13

북한에 제공할 비료를 실은 화물차가 북중 국경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가고 있다.
PHOTO/ 중국-김준호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이 4월 양질의 비료를 중국에서 대량 수입했습니다. 비싼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수입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데요. 이 같은 현상은 북한의 농업에 대한 관리방식이 바뀌면서 비료에 대한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남한 농촌경제연구원 권태진 박사는 북한 당국이 최근 양질의 비료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권태진: 비료 중에서 주로 북한이 수입하는 것이 요소와 유안, 황산암모니아를 주로 하는데 요소는 황산암모니아 보다 훨씬 좋은 비료이기 때문에 중국이 수출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로 6월 까지는 수출할 경우 수출 관세를 75%정도 무겁게 해서 수입하는 입장에서는 비싸집니다. 북한은 6월까지는 수입을 많이 못하는데 이번은 4월에 수입을 많이 했습니다. 드문 현상이죠. 특징이 비료 수입이 양적으로 늘었다. 수입 시기가 당겨졌다. 비료 중에서도 고가 비료의 수입이 늘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설명이 잘 안 되는 부분입니다. 북한이 이번에 새로운 농업 부분에 관리방식의 변경, 이 부분과 관계가 있다고 저는 봅니다.

기자: 이번에 들여간 비료가 곡물증산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십니까?

권태진: 비료를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가가 관건인데 평균적으로 본다면 과거 한국이 북한에 비료를 많이 줬을 때 그때는 북한이 그래도 비료를 조금씩 생산하고 있을 때인데 그때 비료 1톤의 효과가 1톤을 추가로 투입하면 2톤 정도 곡물을 더 생산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비료를 사용하는 양이 그때보다 적다면 비료 1톤의 사용 효과가 훨씬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고 봅니다. 북한 시장에서 비료 유통 가격이 옥수수 가격과 비슷하게 형성되는데 옥수수 생산에 비료 1톤을 추가로 투입했을 때 옥수수 2톤이 나오니까 누구나 비료를 투입할 수밖에 없죠.

기자: 4월 한 달간 북한의 비료 수입은 정확히 얼마인가요?

권태진: 4월 비료 수입이 6만 2천 톤입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1만 5천 톤입니다.

기자: 1월부터 4월까지 합치면 누계는 어느 정도입니까?

권태진: 누계를 보면 9만 2천 톤입니다. 지난해에는 2만 2천 톤입니다. 수입 시기를 보면 작년에는 5월과 6월에 많이 했습니다. 작년에 비료 수입이 두 번째로 많았던 5월에 북한이 6만 9천 톤을 수입했는데 올해는 4월에 그만큼 했으니까 한 달 정도 당겨진 겁니다. 북한 전체 수입 품목을 보면 석유류가 1위, 비료가 그 다음입니다. 화학비료의 수입이 4월엔 높지 않았는데 올해는 두 번째로 나왔습니다. 수입하는 것이 먹는 것과 옷감, 자동차 운반용구들인데 올해는 북한이 비료 수입에 그만큼 열을 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자: 북한의 입장에서는 관세를 많이 물고 가져간 셈이 됐는데요.

권태진: 그렇죠. 관세가 요소 비료는 높고, 유안은 그리 관세가 높지 않은데 이상하게 북한이 3월에는 유안을 주로 수입하더니 4월에는 유안보다 요소 비료를 훨씬 많이 수입했습니다. 비료의 효과가 요소 비료가 유안보다 두 배정도 납니다. 가격도 요소 비료가 유안보다 두 배정도 되죠. 좀 더 질이 좋은 비료를 수입한 겁니다. 비료의 요구가 굉장히 강하다는 것이죠. 그 배경을 보면 두 가지 측면으로 해석이 되는데 첫째는 북한이 기대했던 것만큼 생산을 못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리방식의 개선에 따라서 비료의 수요가 더 높게 나타났다고 보입니다.

기자: 올해 지금까지 9만 2천 톤이라는 비료의 양이 한국에서 지원을 했을 당시와 비료하면 적은 것 아닌가요?

권태진: 많을 때는 35만 톤까지 줬습니다. 그에 비하면 아주 적은 양의 수입이지만 아직 영농시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지켜봐야 합니다. 작년에 보면 전체 25만 톤 정도 수입을 했습니다. 7월까지는 계속 비료 수입이 있을 겁니다. 작년보다 한 달 정도 당겨서 비료를 많이 수입했다는 것이 예년과의 차이고 올해는 작년 이상으로 비료를 더 수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만큼 먹는 문제를 강조하기도 하고 관리방식이 개선되다 보면 아무래도 비료 수요가 더 늘 것이기 때문에 비료 수입은 더 늘 것으로 보입니다.

기자: 중국이 대북제재에 동참하면서 영향을 주지 않겠습니까?

권태진: 아닙니다. 다만 2월 통계를 보면 중국에서 북한으로 원유가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3월에 보면 오히려 예년보다 두 배가 됐으니까 제재 국면은 지나갔다고 봐야 합니다.

기자: 중국에서 북한으로 수출할 때는 제값을 다 받습니까 아니면 헐값에 주는 건가요?

권태진: 통계를 보면 받을 것 다 받고 주는 것으로 보이는데 통계에 잡히지 않는 물량도 있을 수 있지만 그 부분이 불확실합니다.

기자: 일단 북한에서 비싼 값을 주고 수입한다면 장마당에서 개인이 사기에 부담스러운 것 아닐까요?

권태진: 아닙니다. 개인이 100원주고 사서 200원에 팔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장마당에서 비료와 옥수수 가격이 비슷한데 비료 1톤 사서 옥수수 2톤 생산해 팔면 되는 것 아닙니까? 비료 투입 효과는 어느 나라고 충분히 입증됐기 때문에 북한이 올해 비료 확보하는데 굉장히 신경을 쓴 것은 맞습니다. 중국에 나가있는 무역회사 마다 비료 확보 할당을 줄만큼 비료 수입에 굉장히 적극적이었습니다.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북한의 최근 비료 수입과 관련해 알아봤습니다. 회견에는 남한 농촌경제연구원 권태진 박사입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d81ae08c99d-d480c5b4c90db2c8b2e4/askquestion-0613201310442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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