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가 히로시마에 간다면
평화네트워크
http://peacekorea.org/zbxe/18194662016.04.25 10:14:08 (*.162.61.206)1990
16. 4.22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프레시안 편집위원
최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 여부가 국제사회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오바마는 5월 25∼26일 일본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할 예정인데, 방문지 가운데 한곳으로 인류 최초의 핵폭탄 투하지인 히로시마를 방문할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논쟁은 다방면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선 오바마가 히로시마를 방문한다면, 이는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의 일이 된다. 이는 곧 역사 논쟁과 직결된다. 미국의 공식적인 역사 해석은 원폭 투하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원폭을 투하하지 않으면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감행해야 하고 이렇게 되면 많은 미군들이 목숨을 잃게 되고 일본의 항복도 지연되었을 것이라는 점에 근거를 둔 해석이다. 이를 근거로 미국의 참전 및 전쟁포로 단체들은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당시 미국의 핵폭탄 투하는 일본의 항복보다는 경쟁자로 떠오른 소련을 겨냥한 무력시위의 성격이 짙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벌이지 않더라도 소련의 참전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었다. 미국의 두 차례의 원폭 투하보다 소련의 참전이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는 데에 보다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연구도 많다. 이는 일본이 결사항전을 하다가 두 발의 핵폭탄을 맞고 항복을 선언했고 그래서 해방되었다고 배워온 한국인들의 역사 인식에도 중대한 함의를 지닌다.
오바마의 업적과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 전략 사이에도 미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다. 오바마는 임기 첫해인 2009년에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에 따라 오바마가 임기 마지막 해에 핵시대의 비극을 상징하는 히로시마를 방문하면 그의 업적은 재조명받을 수 있다. 하지만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인 클린턴은 1기 오바마 행정부 때 국무장관을 지낸 바 있다. 그로서는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이 자신의 대선 가도에 역풍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지지하는 미국인의 여론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과반수 넘게 “정당했다”는 답변을 내놓고 있다. 2015년 퓨 리처치 센터가 원폭 투하 70년을 맞이해 조사한 것에 따르면, 미국인 응답자의 56%는 “정당했다”고 답했다. 반면 일본인의 79%는 “부당한 것”이라고 답해 대조를 보였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이 역사 왜곡을 일삼아온 아베 신조 총리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일본은 이중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전범국가’이고, 또 하나는 세계 최초의 ‘피폭국가’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은 가해자인 일본이 ‘피해자 코스프레’에 이용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국내 상당수 언론은 이 점을 부각시키면서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에 반대하고 있다.
핵문제에 관한 오바마의 업적도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해 지구적 차원의 관심을 환기시킨 것은 좋았다. 공화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러시아와의 새로운 전략무기협정(START)을 타결 지은 것도, 이란 핵 협상에 도달해 ‘중동 아마겟돈’의 우려를 줄인 것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핵 안보 정상회의의 의제를 핵군축이 아니라 핵 테러리즘 방지에 한정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전략적 인내’에 갇혀 북핵 문제 해결에도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핵무기 못지않은 전략적 위험을 지닌 미사일방어체제(MD)를 밀어붙여 군비경쟁을 격화시킨 것도 비판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핵무기 선제 불사용(No first use) 공약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무려 1조 달러에 달하는 핵무기 현대화를 승인한 것은 언행불일치의 대표적 사례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히로시마에 방문하는 것을 원하고 있을까? 이것도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일본 정부와 여론이 다르고, 정부도 어떤 정부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히로시마 방문을 타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임기 첫해에 일본 방문길에 오르면서도 이 문제는 미일간의 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2009년 9월 3일자 외교 전문에 따르면, 일본 외무차관이었던 야부나카 미토지는 “일본 국민들이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 가능성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면서도 존 루스 주일미국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양국 정부는 오바마 대통령이 2차 대전 중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 히로시마를 방문할 것이라는 일본 국민들의 기대를 누그러뜨려야 합니다. 그건 애시당초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당시 일본 정부가 난색을 표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그때가 일본의 정권교체기였다는 점을 여러 가지를 추론케 한다. 집권당이 된 민주당은 미국 핵 반입 밀약에 대한 조사는 물론이고 동북아 비핵지대 창설도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었다. 이에 따라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한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은 이러한 민주당의 정책에 힘을 실어주게 될 터였다. 이를 경계한 일본 외무성이 제동을 건 것이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전통적으로 일본 외무성은 미국의 핵우산을 신봉해왔고 이에 따라 오바마의 세계 비핵화 구상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베 정권은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원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노 코멘트’로 일관하고 있지만, G7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외교장관 회의를 히로시마로 정한 것부터가 오바마의 방문을 위한 사전정지 작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부응하듯 존 케리 국무장관은 원폭 피해자 위령비에 헌화한 뒤 “모두가 히로시마를 방문해야 한다”며 “나는 언제인가는 미국의 대통령이 그 모두의 한 명이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아베 정권으로서는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반길 이유가 여러 가지 있다. 우선 2009년 때의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바마가 히로시마를 방문하더라도 미국의 핵우산 정책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바마의 방문은 아베 신조가 작년 미 의회 연설에서 태평양 전쟁에 대해 사과한 것에 대한 답례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아베 정권의 역사 왜곡에 이용될 소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아베 정권의 지지율을 제고시키는 효과도 가져올 공산이 크다. 아울러 미일동맹의 “역사의 가시”를 뽑아냄으로써 미일동맹이 추구해온 아시아-태평양 재균형 전략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보면,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바마가 히로시마에 갔으면 한다. 섭씨 4천도에 육박하는 불덩어리와 A급 태풍 1천배에 달하는 핵폭풍, 그리고 거대한 버섯구름이 품고 있었던 방사능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수십만명의 사람들은 전범도, 군인도 아니었다. 징용된 조선인들을 포함한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미국 대통령이 조선인 원폭 피해자를 비롯한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장면을 보고 싶다. 그리고 퇴임 후에도 핵무기 없는 세계를 향한 여정에 나서겠다고 다짐하면서 지구촌 사람들에게 동참을 호소하는 오바마의 연설도 듣고 싶다.
그가 간다면, 한국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원폭 투하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인류사적 질문은 한국 내에서 진지하게 토론된 적이 거의 없었다. 그 만큼 오바마의 방문은 우리사회의 공론화에 기여할 수 있다. 미국의 원폭 투하를 ‘해방의 무기’로 인식해온 우리의 관성적 이해에 대해서도 성찰적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방문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우리사회의 외면과 망각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징용-피폭-외면으로 이어진 한국인 피폭자의 삼중고는 정의와 인권의 관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 겸 프레시안 편집위원.
* 이 글은 <프레시안(www.pressian.com)>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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