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1

希修 | ‘자발적 $$$’라는 표현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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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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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발적 $$$’라는 표현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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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지어 교수의 주장은 나는 헤드라인만 봤기 때문에 말 얹을 입장이 못 되고, 다만 램지어 교수 때문에 다시 소환되고 있는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내 생각만 써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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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이나 월남전에 참전했던 한국 군인들. 논리적 의미만 따지자면야 파병을 자원한 병사들은 '자발적 살인자'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건만, 파병을 자원한 병사들조차 우린 그들을 '자발적 살인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사실은 아마도, "'자발적 $$$'라는 표현은 $$$가 수행하는 그 구체적 행위 자체를 행위자가 적극적으로 희망했을 경우에만 사용한다"라는 암묵적 조건이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어떤 표현의 사용에는 논리적 의미뿐 아니라 특정 단어에 대해 그 언어 사용자들이 갖고 있는 '인상'을 포함 사회적 화용론적 측면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 전쟁터의 군인이 수행하는 '업무'가 '인명살상'임을 알고서도 파병을 자원한 군인들에 대해서도 그러한데, 해야 하는 '일'이 '강간 당하기'임을 모른 채 동원되었던 여성들 (강제로 끌려간 여성이든 공장에서 일하는 것인 줄로만 알고 조선인 알선업자에게 속아서 따라나선 여성이든 무관하게)을 '자발적 매춘부'라고 부르는 일은 더욱 부적절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누군가 이 표현을 들었을 때 그 사건에 대해 왜곡된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불가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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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라고 규정/단정한 부분은 없다. '오해'의 소지를 포함하는 문장들은 있었지만:
-- "하지만 설사 '자발적'으로 희망했다 하더라도 그녀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추업'이라고 불리던 일을 선택하도록 만든 것은 그녀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사회적 구조였다." (무삭제본 158쪽)
--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우리가 부정해온 것 역시 그런 욕망,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무삭제본 296쪽)
박유하 교수 자신이 할머니들을 '자발적 매춘부'라고 규정한 게 아니라, 그런 인식이 존재했음을 현실로 인정한 것. 그런 인식이 잘못된 것인지 어떤지에 대해 박유하 교수는 논의하지 않았기에, 이런 인식 자체에 박유하 교수가 동의하는지 반대하는지는 나로서는 이 책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책을 꼼꼼히 읽지 못 했을 가능성도 물론 있다.) 그러므로 "박유하 교수가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로 규정했다"는 비판(a)은 성립하지 않으며, "자발적 매춘부라는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지 않고 그런 인식에 올라타 있다" 정도의 비판(b)은 가능해 보인다. 혹 그렇다 해도 형사소송은 불합리하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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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중요한 건, 강제로 끌려갔든 직업소개소의 농간 때문에 따라나섰든 무관하게 모든 위안부들이, 전쟁이라고 하는, 국가에 의해 조직된 반인륜적 범죄의 피해자임을 박유하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명시, 반복적으로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 이 문제를 '일본 vs. 조선'의 문제로 보기 보다 국가주의가 여성을 어떻게 착취하는지에 촛점을 맞추자 >는 것 이외의 다른 의도가 저자에게 있었다고는 나는 생각되지 않았다. 특히, 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군을 상대로 하는 기지촌 성매매 '산업'을 대한민국 정부가 어떻게 적극 장려, 관리해 왔는지 우린 이제는 안다. 자국 정부에 의해 자행된 '성노예화' 혹은 '성착취'였다는 점에서 한국의 기지촌 '산업'이 더 끔찍할 수도 있건만, 어떤 위안부 할머니가 인터뷰에서 "우린 양공주와 달라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서, 이 문제를 접근하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져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나는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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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종류가 성매매임을 알고서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직업을 선택한 여성들도 세상엔 존재한다. 그런 여성들에게 사회가 보내는 시선이 과연 정당한가?는 숙고와 성찰의 가치가 있는 문제다. 다만 이런 측면에 대한 논의는 위안부 문제의 기술과는 별도로 진행함이 덜 혼란스럽지 않을까 싶다. 역사적 사실의 기록은 '특정 단어에 대해 사회 구성원들이 이미 갖고 있는 인식의 교정!'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기록 자체만이 목적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인식이 정당한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현존하는 인식의 토양 위에서, 논리적으로 정확한 의미를 가졌을 뿐 아니라 사회적 화용론적으로도 적절한 표현을 찾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부적절한 표현이 있었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저자를 형사처벌할 수는 없는 일이며, 이런 문제는 학계나 공론장에서 다루어야 마땅하다고 나는 본다. 다양한 각도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도발한다는 점이 『제국의 위안부』의 가치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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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편을 ‘친일파,’ ‘민족주의’의 프레임에 가두려 하지 말고 논리만 보아야 생산적 논의가 가능하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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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이전 계정에서 내가 썼던 『제국의 위안부』 독후감을 아래에 네 개의 댓글로 나누어서 긁어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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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希修
제국의 위안부』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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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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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적 법적 사항들에 대한 저자의 기술, 해석이 정확한지 판단할 자신이 없어 미뤄두었던 『제국의 위안부』를 이제사 읽었다. '박유하 교수는 일본 우익의 편!'이라는 인상을 대중이 받는 배경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하는 것 같다. 

첫째는, 기계적 중립에 대한 저자의 강박. 
둘째는 표현방법의 문제. 하지만 기계적 중립에 대한 저자의 강박은 그동안의 위안부 운동이 지나치게 가부장적 민족주의로 기울어져 있었기에 이해도 간다. 
(저자의 이런 시각을 비판하는 분들은 똑같이 냉철하고 신랄한 자세로 정대협의 운동방식과 오류 또한 검토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세상 어느 누구도 100% '객관적'이고 완벽히 '균형잡힌' 시각은 어차피 가질 수 없는 것. 그런 평가조차 보는 이의 주관적인 판단일 뿐. 부부싸움이라고 하는, 역사 문제에 비해 훨씬 단순한 사건만 보더라도, 남편의 말을 들으면 아내가 나빠 보이고 아내의 말을 들으면 남편이 나빠 보이는 법이다. 그런데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났고 무수한 사람들이 연루된 이런 문제에 얼마나 많은 층위와 측면들이 존재하겠나? 다양하면서도 서로 간에 모순되는, 하지만 동시에 각각은 저마다 '사실에 입각한' 무수한 시각과 해석이 가능하지 않겠나? 그런데 이런 역사 문제를 하나의 색깔로만 그려야 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독재자의 발상이 아니겠는지? 다수의 경우였든 소수의 경우였든 일어난 사실들을 저자가 발견하는 대로 일단은 기술하는 것이 역사 연구자의 의무이고, 그 내용에 대한 평가는 대중과 학계에 맡기면 되지 않겠는지?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논란이 될 수 있을 법한 표현상의 문제들만 몇 가지 언급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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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표현상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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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강제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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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안부가 물리적 강제에 의해 끌려간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돈벌러 가자는 조선인 업자들의 꼬임에 빠져 따라 나선 이들도 있고 부모에 의해 팔려간 이들도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라 해도 가부장 사회의 구조적 강제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적시한다. 다만, "위안부 모두가 강제연행된 것은 아니라 해도 강제연행된 위안부가 있었음은 사실이며, 저자의 말대로, 강제성 여부와 무관하게 그녀들이 피해자이고 국가(일본)가 책임져야 할 일이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면, 강제연행의 경우가 오히려 소수였음을 저자가 이렇게까지 공들여 역설하는 '저의'는 무엇인가?"라고 반문할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그동안의 위안부 문제 기술이 너무 특정 부분만 강조하고 다른 부분들은 무시해 왔기에 그 균형을 맞추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정도로 이해가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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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자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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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는 조선인 업자들에 의해 모집, 관리되고 보수가 지불되는 매춘의 형식이었기에, 저자는 "매춘적 강간" 또는"강간적 매춘"이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위안부는 성노예였고 그 생활이 지옥같았음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는 점 또한 명시한다. ("매춘적 강간" 또는 "강간적 매춘"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이를 두고명예훼손이라 한다면 나는 그 판단을 지지할 수 없다.) 다만, 저자가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라고 규정/단정한 부분은 분명 없지만, 아래와 같은 문장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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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설사 '자발적'으로 희망했다 하더라도 그녀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추업'이라고 불리던 일을 선택하도록 만든 것은 그녀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사회적 구조였다." (158쪽)
--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우리가 부정해온 것 역시 그런 욕망,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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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간과된 것은 '무엇에 대한 자발/자원인가?'이다. '자원 위안부'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안부라는 일에 자원한 이들로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자원'한 조선 여성들은 공장에 취직하는 줄 알고 또는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서 흰 쌀밥이나 돈 얘기만 듣고 따라 나섰던 것이지 '일'의 성격이 성의 제공임을 알고서 따라 나선 경우는 없었다(? 소수였다?). 그렇다면, 절대 다수의 위안부들에 대해서는, '자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화용론적 관점에서 볼 때 무리가 아닌가 싶다 - 형식논리의 측면에서는 문제가 안 될지도 모르겠으나. 물론, 자발이든 아니든 그녀들은 피해자라는 저자의 주장은 적절하다. 그러나 전반적 논지는 논지대로 타당한 것이고, 언어사용의 부적절함은 또 그것대로 지적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즉 위안부 할머님들에게 모욕적인 표현이라서가 아니라 (학문의 1차 목적은 사실의 발견과 기술이지 피해자들에 대한 정서적 위무가 아니라고 나는 본다), 언어의 사회적 측면을 경시하여 불필요한 혼동을 초래했다는 점에서의 비판은 충분히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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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우리가 부정해온 것 역시 그런 욕망,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라는 문장. 우리가 그동안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억과 해석을 한 쪽으로만 몰고 갔음을 비판하는 부분인데..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우리가 부정해온.."이라고 씀으로써,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우리가 긍정해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을 품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가 그 이미지를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분 역시 책에는 없다.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판단과 표현을 애초에 누가 했으며 그 이미지에 대해 저자 자신이 갖고 있는 판단이 무엇인지를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럼 읽는 독자가 있다 하여 이것에 대해 "명예훼손"이라 비판하는 것은 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책을 읽고서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든다 하여 그 때마다 명예훼손 판결을 내려야 한다면, 7~80년대의 독재정권들이 저지른 사상통제와 과연 무엇이 다르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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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2.3. 책임소재: 국가 vs. 업자/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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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위안부들의 '주인'이 군대라기보다는 업자/포주"(116쪽, 136쪽 등)였다고 많은 지면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얘기한다. "위안부들 중에 어린 소녀가 있게 된 것은 '일본군'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 우리 안의 협력자들 때문이었다. 위안부가 된 소녀들을 가족이나 이웃으로서 보호하기보다는 공부라는 교육 시스템에서 배제해서 공동체 바깥으로 내친 우리들 자신이었던 것이다." (52쪽)라고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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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소 운영에 조선인들이 어떻게 협력했는지, 가난이, 가부장제가 어떻게 그녀들을 내몰았고, 해방 후엔 미군들을 상대로 하는 '양공주'들을 멸시하면서도 한국인들이 어떻게 기지촌 사업을 이용, 착취했는지 (상권형성을 통한 경제적 이윤 취득), 당연히! 알려져야 한다. 또 저자는, 위안소 운영을 기획한 것이 일본인 이상, 어찌 되었든 궁극적으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점도 분명히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가 성노예라면 그 노예의 주인은 업자/포주'라는 논리까지 인정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민간에 위탁하여 운영한 위안소뿐 아니라 군직영 위안소도 있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위와 같은 문장들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책임을 완전 면제는 아니라도 조금은 경감시켜주는 것 아니냐?"라는 의심을 살 수 밖에 없다고 나는 본다. 다만, 이런 식의 관심법(觀心法)이나 추정이 토론이나 법정에서 '비판 근거'로 사용될 수는 없지 않나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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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동지', '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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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것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68쪽)
-- "... '군인들이 총알 맞는 것'과 '위안부가 된 것'을 그저 운이 나빴다는 식으로 간주하고 군인을 원망하지 않는 위안부가 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이미 식민지가 된 지 오래인 땅에서 자라나 자신을 '일본'의 일원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 그녀에게 그런 동지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76쪽)
-- "... 그들의 성의 제공은 ... '애국'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37쪽)
-- "... 위안부의 '동지'성을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그녀들은 전시에 이미 간호부로 일하고 있었다." (138쪽)
-- "... 그렇게 그녀들은 ... 운명의 '동족'으로서 일본의 전쟁을 함께 수행한 이들이기도 하다." (162쪽)
-- "'조선인 위안부'는 피해자였지만 식민지인으로서의 협력자이기도 했다. ... 우리가 '조선인 위안부'의 다양한 모습을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은 그런 식민지의 모순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294~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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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국의 전쟁터에서 일본 병사들이 전장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위안부들이 파티를 열어 환영해 주기도 하고 부상당한병사를 간호해 주기도 하고, 또 작전 중간중간엔 병사들과 함께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고 이 책은 기록한다. 제3국의 전쟁터에서 일본군 기지가 폭격을 맞으면 조선인 위안부 자신의 생명도 위험해지므로, 연합군을 일본군이 물리치기를, 아마도 조선인 위안부는 바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위안부와 일본군 사이에 '동일한 운명 공동체'로서의 동병상련 의식이 충분히 가능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동지의식'이란, 단순한 '동병상련'보다 좀더 특수한 의미를 띤다고 생각한다. 즉, '같은 생각/목적을 가진 상대에 대해 느끼는 연대감과 우정'이라는 좁은 의미로 대개 사용된다. 이렇게 본다면,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 사이에 '동지의식'이 있었다는 주장은, 설사 그러한 경우들이 실제로 존재했다 하더라도 위안부 전체로 일반화하기는 무리라고 보여진다. 표면적으로는 '동지적'으로 보이는 관계도, 일부의 조선 위안부들이 때때로 가진 '일상의 평화로움'이나 일본군인과의 '사랑'도, 대부분은 스톡홀름 신드롬이 아니었겠는지. 그렇다 해도 그 당사자의 의식 속에서 자신의 감정은 물론 '진실'했을 것이지만, 동시에, 자력으로 바꾸지 못 하는 상황 속에서 그 상황을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위안으로 삼을 만한 대상을 찾는 것은 일종의 생존기제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왜 굳이 이런 부분에 집중하는가?'하는 질문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가 일본군에 대해 가졌던 두려움과 분노는 표현해도 되고 동병상련 의식이나 연애 에피소드는 기록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타당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전쟁같은 극단적 상황에서 인간의 생존욕구와 심리가 어떻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인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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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2.5.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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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20대 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녀상이 '10대'의 모습으로 제작된 것을 저자는 비판한다. 또 "그런 상상이 우리의 피해의식을 키워주고 유지하는 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52쪽). 이런 측면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10대 위안부가 전무했던 것이 아니라면 소녀상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소녀상을 보고 그것이 '10대 소녀'라고 생각하는 건 당시 여성들의 모습을 아는 한국인뿐, 서양인들의 경우 그 소녀상을 보고 몇 살이라 짐작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로는, 위안부 문제 관련 한국인들의 분노는'아동학대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일본인의 조선인 학대에 대한 분노'가 핵심이므로, 나이에 촛점을 맞출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 자발이냐 강제냐와 무관하게 국가/가부장제의 폭력에 대한 고발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라면, 그 국가주의 또는 가부장제의 피해자가 여성인 한, 연령은 부차적인 문제 아닐까. 피해자들의 다수가 20대였음에 집중하는 저자의 입장이나 피해자의 대부분이 10대였던 것처럼 과장하는 입장이나, 둘 다, 본질을 벗어난 '나이주의'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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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소녀상의 표정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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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자면 소녀상은 '저항하는 위안부'일 뿐 일본군과의 또 다른 관계는 드러내지 않는다. 혹은 그 분노가 '일본군 이외의 존재를 향한 것일 수 있다는 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 실제 조선인 위안부는 '국가'를 위해서 동원되었고 일본군과 함께 전쟁에 이기고자 그들을 보살피고 사기를 진작한 이들이기도 했다. 대사관 앞 소녀상은 그녀들의 그런 모습을 은폐한다." (205쪽)
-- "... 원한보다는 슬픔을, 분노보다는 절망을, 그리고 일제에 의해 이중인격저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의 모순을 표현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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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의 해석은 어차피 보는 이의 몫이다. 내게는 소녀상이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분노와 원한만을 표현한다는 저자의 해석은 얼마나 '객관적'인지? 일본군과 연애를 하는 장면 혹은 일본군의 상처에 붕대를 매어 주는 모습으로 담아 내야만 그것이 '온전한' 위안부의 모습은 아니지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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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한, '피해자' 소녀에게 목도리를 둘러주고 양말을 신겨주고 우산을 받쳐주던 사람들이, 그녀들이 일본옷을 입고 일본이름을 가진 '일본인'으로서 '일본군'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똑같은 손으로 그녀들을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위안부가 되기 전에 그렇게 어린 '소녀'를 내 몬 '손'또한 우리 안의 또 다른 손이기도 했다는 것은 잊은 채로." (206~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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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러 주는 행동은, 위안부들이 일본군에 대한 협력을 강요받았던 것까지 포함하여 위안부들의 모든 경험을 안아 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일본에 의해서든 국가에 의해서든 남성에 의해서든 인권이 유린되었던 위안부들의 삶 전체에 대한 연민이요 공감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그리고 그녀들을 그런 경험으로 내 몰았던 '우리 안의 또 다른 손'에 대해 모르는 이들도 있겠으나, 그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1차적 책임은 일본이라는 국가에 있기에 가해자로 일본을 지목하는 이들도 분명 다수일 거라고 나는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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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3. 맺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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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가능해 보이는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되묻고 따져야 할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점들 때문에 '친일파' 딱지를 붙이고 외면하기엔 『제국의 위안부』는 아까운 책이기도 하다. 사실의 기록과 운동방식에 있어 정대협이 보인 문제점들에 대한 해명/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 위안부들의 경험이 주둔지와 상대에 따라 다양했다는 기록, 일본인은 아니지만 제3국의 여성들과도 달랐던 조선인 위안부들의 이중적 지위와 그로 인한 내적 딜레마에 대한 통찰, '계급'이 높은 위안부가 계급이 낮은 위안부에게 행한 폭력에 대한 기술 등, '사악한 일본인 vs. 순결한 조선인'의 단순 선악구도에서 벗어나 인간과 폭력에 대해 좀더 깊은 사유를 하게 만들어 준다. 

피해자의 말이 언제나 100% 정확하지는 않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사실이고, 위안부 문제의 단 한 가지 측면만을 보고자 하는 우리의 좁은 시각이 오히려 위안부 당사자들에게 일종의 억압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에 대한 지적 역시 유의미하다. 여성에 대한 인권유린은 민족이라는 층위보다 국가와 자본이라는 층위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입장에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며, 한국의 위안부 운동이 일본의 친한파들의 운신범위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일본 내 정치적 상황이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에 어떤 작용을 해 왔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이 책은 큰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 민족감정에 사로잡혀 우리의 '피해자성'만을 강조하는 심리에 깃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지배의 욕망'을 반성하게 유도하고, 자신이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오만과 경직성이 가져올 수 있는 자기패배적 결과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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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쪽으로 치우쳐 온 그동안의 위안부 운동에 대한 저자의 반감이 작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나 역시 받는다. 가령, 부모로부터 학대받은 아이는 부모의 폭력에 대해서만 말할 것이고 가해자인 부모는 자신이 아이에게 잘 해 준 일들만 강조할 것이다. 이 둘을 50:50의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어야만 '공정'한 것은 아니며, 그러나 동시에, 그 두 상반된 측면을 모두 볼 필요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두 측면에 어떤 비율로 무게를 배분할 것인지는 저자의 재량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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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이 책에 대한 대중의 감정적 반발과 비난은 저자 자신의 시각이나 표현방법에 기인한 부분이 분명 있다고 보여진다. (역사적 법적 세부 사항들이나 연구방법론에 대한 판단은 내 능력 밖이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특정한 시각, 특정한 종류의 표현만을 허용하고 거기서 벗어날 경우 사법 처벌을 하는, 그런 사회를 우리는 진정 바라는 것인지? 저자의 시각과 어조가 대중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해서 "우익으로부터 돈 받고 저런다"거나 "저자를 일본인들에게 위안부로 보내야 한다"는 식의 비합리적이고 저열한 인신공격을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대중이 말하는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 (whatever it means)에, 또 한국 사회와 민족에, 이런 인신공격이 과연 어떤 공헌을 하고 있는지? '목소리의 크기'나 '언어의 과격함' 대신 '날카로운 논리'를 무기로 한 다각적 비판이 풍부하게 쏟아질 때 우리의 문제 '해결' 능력도 오히려 그만큼 커지는 것 아니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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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는 모순 투성이이며, '평범한' 한 인간의 삶도, 단 하나의 행동 기저에 깔린 배경과 심리도 완벽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할 만큼 복잡한 법이다. 하물며 역사적 사건이랴. 실제 일어난 일의 그 복잡한 측면을 다양한 시각에서 또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 보는 일이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에, 바로 그래서 박근혜 정부가 시도했던 단 하나의 국정 역사 교과서에 우리가 그토록 반대했던 것이 아니었는지? 그런데 그 시도에 반대했던 이들이 어떻게 저자의 '표현방법이 마음에 안 들'고 '저의가 의심된'다 하여, 이 이유만으로 사실로 확인된 부분들에 대해서조차 직시를 거부하고 오히려 재갈을 물리려 하는지? 대중이 느끼는 반발심과 문제의식은 사법 처리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충분히 다루어질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이 책을 읽고서 모욕감을 느끼거나 감정적 상처를 받은 위안부 할머니가 계시다는 것이 명예훼손 유죄판결의 이유로 충분하다고는 나는 생각지 않는다. 독일에서 불허되는, 나치 희생자들에 대한 비하에 준하는 그런 단정적인 표현이 이 책에 있었다고도 나는 판단하지 않는다. 참고로, 민족문제연구소 "백년전쟁"의 이승만에 대한 명예훼손 여부 재판은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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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ply · 15 h
Jihye Tak
자발적 매춘부라고 한게 아니고 전쟁이나 제국주의를 문제삼은 것 같던데 저자 본인의 해명을 믿어주지 않고 '자발적'이라는 단어에만 꽂혀서 저러고 있는거죠??
 · Reply · 15 h
希修
Jihye Tak 네. 너무 많은 층위의 너무 다양한 문제들이 뒤섞인 데다가 격렬한 감정까지 겹치니.. 수습 불가.. ㅠㅠ
 · Reply · 15 h
崔明淑
이제는 미루어 왔던 제국의 위안부를 나도 읽어 봐야겠네요. 옛날에 읽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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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국제사회에 채택된 현대 인권과 도덕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역사를 논의하는 신휘그주의는 사람들에게 과거로 가면 갈수록 인류(혹은 특정 인종이나 민족이나 신분 계층)는 야만적이고 끔찍했다는 인상만을 심어줄 뿐 개성, 성품, 재능으로 표상되는 과거 사람들의 개별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가령, 조선 시대의 양반들은 같은 종족을 노예로 삼고 생사여탈을 자의적으로 결정할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양반 사족"들은 철저한 악인으로 규정되어야 하고 지금도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그들의 저서에 대한 논의도 "모두" 금지해야 한다는 비약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1960년대 홍위병 운동 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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