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13

‘위안부’는 어떻게 잊혀 졌나? 1990년대 이전 대중영화 속 ‘위안부’ 재현* 김청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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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는 어떻게 잊혀 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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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문화연구 제71집|149~193쪽|2017.11
‘위안부’는 어떻게 잊혀 졌나? 
1990년대 이전 대중영화 속 ‘위안부’ 재현*
44)
김청강**
45)
1. 들어가는 글
2. 침묵인가? 숨기고 싶은 기억인가?: ‘위안부’ 재현의 오래된 구조(들)
3.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 사이: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 1965> 4. 남성주의의 공모: 한국의 <여자정신대, 1974>와 일본의 <작부이야기, 1965>
5. 순수한 피해자와 남성중심적 민족주의의 결합: 
5. <여자정신대, 1985> 그리고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1991> 6. 나가는 글
<차 례>
 
[국문초록]
1990년대 초반 김학순의 (최초)증언을 시작으로 전세계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한 ‘위안부’ 문제는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역사(unresolved history)’의 하나로, 첨예한 대립이 계속 되고 있는 기억 투쟁의 장이다. 과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촉발되기 시작한 이 암울하고도 놀라운 ‘감추어진 역사’의 발견은 일본의 식민주의, 전쟁과 폭력, 남성주의와 젠더 와 섹슈얼리티, 그리고 하위주체(subaltern)에 관한 많은 사회적 관심과 각성 그리고 새로운 연구와 교육의 촉발 계기가 되었다. 식민지 군대에서 벌어졌던 처참한 기억들은 재소환되었고 이 문제는 ‘인권’ 유린의 관점에서 전세계적 이슈로 확산되었다. 이는 즉시 다큐멘터리로 제작 되었으며, 영화는 ‘말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시각적 재현을 통해,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하 위주체 여성을 바라보는 방식을 전했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서야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의 수면 위로 드러났다는 일반적 
인식과는 다르게, ‘위안부’에 관한 재현은 1990년대 이전에도 ‘대중물 (대중소설과 대중영화)’ 을 중심으로 상당수 존재해왔다. 이 논문은 199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대중물이 위안부를 재
 
** 이 논문은 2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08-361-A00005).
**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교수
현하는 방식을 살펴보며, 대중문화 속 ‘위안부’의 재현이 ‘위안부’를 바라보는 가학적이고, 남 성중심적인 시각을 만들어내었음을 주장한다. 영화 속 ‘위안부’ 아이콘이 남성의 소비물로 유 통되면서 궁극적으로는 이들을 수치스러운 ‘망각’의 대상이라는 대중적 사회 인식을 만들어 내 었기 때문이다. 연구 대상은 1965년작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 같은 해 일본 감독 스즈 키 세이준에 의해 만들어진 <작부이야기>, 1975년 작 <여자정신대>, 1985년작 <여자정신 대> 그리고 1991년작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이다. 이 영화들은 동아시아 사회의 뿌리 깊 은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위안부’라는 하위주체가 어떻게 폭력적으로 재현되어 왔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또한 이 영화들은 서로 상당한 참조성(referenciality)과 간텍스성 (intertextuality)을 가지고 만들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식민자였던 일본 남성이 조선인 ‘위안부’ 를 대하는 남성주의적 시각이 피식민자였던 한국 남성에게 공유되고 있었음도 확인이 된다. ‘위 안부’ 여성에 대한 ‘순수한 피해자 (pure victim)’ 혹은 ‘타락한 여성(fallen woman)의 이분법 적 태도를 시각적으로 각인시켜온 것은 물론이다. 동시에 ‘순수한 피해자’든 ‘타락한 여성’이든 관계없이 여성의 신체나 성폭력의 장면은 남성 관객의 시각적 쾌락(visual pleasure)을 위한 스펙타클로 재현된다. 이러한 방식의 ‘재현’은 ‘기억하기’ 위한 방식이라기보다 여성들의 ‘부끄 러움’을 드러내 ‘잊기’을 것을 강요하는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1990년대 이전의 ‘위 안부’ 재현을 추적하는 것은, ‘위안부’가 ‘잊혀지는’ 방식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분명히 하지만 이 연구의 목표는 1990년대 이전의 대중 영화가 ‘위안부’를 기억하는 방식
이 동아시아 남성주의의 폭력성과 민족주의의 공모 속에서 만들어졌음을 밝히는 것이지, 한국 사회의 폭력성을 드러냄으로써 식민주의의 폭력을 축소하거나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남성 폭력적 재현을 드러내고 이 과정에서의 한-일 남성간의 성적 공모를 밝 히는 것은, 한국 남성중심주의의 후기-식민주의적 발현을 드러내는 것이고 현재에도 지속되 는 ‘위안부’에 대한 남성들의 성적판타지나 가학성의 근원을 들춰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동아시아 남성중심의 폭력적 문화가 사회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한 ‘위안부’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해결되지 않는 역사’로 끊임없이 재소환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주제어] 위안부 재현, 대중영화,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 <여자정신대> <춘부전>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피해자 민족주의, 남성중심주의, 망각
1. 들어가는 글
1990년대 초반 김학순의 (최초)증언을 시작으로 전세계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한 ‘위안부’ 문제는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역사(unresolved history)’의 하나로, 첨 예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는 기억 투쟁의 장이다. 과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중 심으로 촉발되기 시작한 이 암울하고도 놀라운 ‘감추어진 역사’의 발견은 일본의 식 민주의, 전쟁과 폭력, 남성주의, 젠더와 섹슈얼리티, 그리고 여성 하위 주체 (subaltern)에 관한 많은 사회적 관심과 각성 그리고 새로운 연구와 교육의 촉발 계 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문)역사학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식민주의의 부당성 혹은 강제동원에 관한 ‘진실’을 찾아내는 연구를 통해 ‘위안부’의 역사적 실 체를 밝히는 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복원 과정에서 문서 중심적으로 사료 를 채택함으로써 증언을 부인하거나 축소하는 효과 또한 낳았다. ) 또 다른 일군의 연구들은 구술과 기억을 중심으로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다양하게 보 여주고 있다. ) 이러한 연구들은 개인의 기억과 민족-국가의 역사쓰기의 관계에 다
양한 의문을 제기하며, ‘복수의(multiple) 기억’을 통해 ‘단수의(singular) 역사’에 균 열을 내고 있다. 이러한 두 태도는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개인의 기억’이 ‘역사적 사실’과 긴장관계를 형성하며 ) 새로운 역사의 복원을 시도한다는 측면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이 기억 투쟁의 장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 동안 삭제되었던 
역사의 복원을 통해 발견된 과거는 “현재의 과거(present pasts),” 즉, 현재의 시점에 서 재구성된 과거라는 점이다. ) 안드레아 후세인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역사적으 로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 (홀로코스트와 전쟁 학살 사건 등)은 각종 기념관이 나 박물관의 건립, 그리고 그림, 사진, 영화, 다큐멘타리 등 각종 미디어 재현물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붐’을 일으키며 복원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재현 불가능’한 고 통은 서로를 참조하며 복원된다. 특히 홀로코스트와 같은 ‘글로벌(global)’한 기억 방 식은 ‘로컬(local)’ 기억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참조점이 되고, ‘재현’의 참조를 통해 고통은 시공을 초월한 ‘현재’의 과거로 구성된다. 이런 면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다분 히 정치적인 행위이며 다방향의(multi-directional) 트랜스내셔널한 사회문화의 영 향을 받으며 구성되어, ) ‘현재’에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기억의 정치학이란 ‘현재’의 기억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다방향의 영향을 주고받으며 구성되어 왔는지를 섬세히 살펴보는 것이며, 이를 통해 기억이 어떤 사회문화적 기능을 맡아왔는지를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주지해야할 바는 ‘기억하기(remembering)’ 작업은 근원적으 로 ‘잊기’ 작업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글로벌한 참조점을 가지고 재현된 현재 의 트라우마는 선택과 배제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로컬’의 기억과는 항상 일정 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의 ‘위안부’ 문제는 글로벌과 로컬이 교차하는 가운데 식민과거를 둘러싼 여성, 인권, 민족의 담론이 가장 복잡한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는 현재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김학순의 증언 이후 식민지 군대에서 벌어졌던 처참한 기억들 은 재소환되었고 이 문제는 여성 인권의 유린이라는 관점에서 전세계적 이슈로 확산
되었다. 이는 즉시 ‘말하는 여성 주체(speaking female subject)’의 역사로 기록되기 시작했고, 다양한 매체적 재현을 통해 새롭게 기억되기 시작했다. 특히, 다큐멘타리 를 포함한 영화는 ‘재현 불가능한’ 트라우마의 시각적 재현을 통해, ‘문자’로 기록되 지 않은 하위주체 여성의 역사를 기록했다. 한국에서는 1995년부터 만들어진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연작, ) 미국에서는 2000년에 다실 김-깁슨(Daisil Kim- Gibson)의 <침묵을 깨다 (Silence Broken)> 등이 만들어지면서,7) ‘위안부’의 삶이 시 각적으로 재구성되었다. 시각 미디어는 ‘위안부’ 문제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피 해자의 감정, 그들이 사는 (살던) 공간/터, 신체와 움직임 표정 등 문자가 재현하기 어려운 영역을 섬세하게 살려내며 ‘위안부’ 여성들의 삶과 역사를 그려냈다. 개인의 기억과 구술로서 복원될 수밖에 없는 삭제된 역사를 감각으로 재현하고, 이를 통해 역사 의 ‘주변’에 위치한 하위주체의 목소리를 ‘현재’의 시점에서 복원하였다. 2017 년 현재 위안부 문제는 한-일 외교의 가장 중요한 이슈이고, 이에 따라 많은 영화가 제작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념관도 건립되고,8) 소녀상이 세워졌으며,9) 다른 국가 혹은 식민주의 폭력의 피해자들의 기억 운동과 연대하며10) 기억/기념의 붐을 이루
Young-Joo's The Murmuring, 1995,” Positions: Asia Cultural Critique, 22(1), 2014. ‘위안부’ 관 련 다큐멘타리의 시초로서 변영주 감독의 영화를 분석하고 이후 영화들의 변화에 관한 글로는 정민 아, 「일본군 ‘위안부’소재 다큐멘터리의 기억 기록과 담론 전개 방식」, 영화연구 68(한국영화학회, 
2016) 참고.
7) 이 영화의 제작과정에 관해서는 다실 김-깁슨의 인터뷰는 다음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Megan 
Ratner, “Dreamland and Disillusion: Interview with Dai Sil Kim-Gibson,” Film Quarterly, 65(1) 2011. pp.34~38.
8) ‘위안부’ 기념관 건립에 얽힌 기억의 정치에 관해서는 다음 논문 참고. 김은경, 「일본군 ‘위안부’ 기념 관의 ‘위안부’ 재현과 기억정치」, 한국학연구 35(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9) 소녀상은 2011년 12월 14일 수요집회의 1000회 기념으로 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졌다. 전국에 퍼져 있는 소녀상건립의 역사와 소녀상 재현의 비판에 관한 내용을 담은 논문으로는 김진령, 「한국을 휩쓰 는 평화의 소녀상 설립 열기」, 내일을 여는 역사(민족문화연구소, 2015) 참고. 2015년 말에 한일 협의를 통해 소녀상을 철거하려는 압력이 전해지자 소녀상을 지키는 것은 ‘민족’을 지키는 시민운동 으로 점차 변모하며, 소녀상은 현재 민족주의 피해자를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조형물로 인식되고 있다.
10) 이러한 연대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뉴욕의 홀로코스트 센터에의 ‘위안부’ 센터 건립이다.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의 각지에서도 소녀상 건립운동은 각 나라의 소수자 정치를 강화하는 측면에서 재 외국 동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위안부’문제가 한국에서 시작된 만큼, 중국이나 타이완, 그 리고 필리핀 등지의 ‘위안부’의 문제 혹은 전시 성폭력의 문제도 한국의 ‘위안부’가 취했던 여러 방식 과 ‘경쟁’을 이루며 열렬히 복원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건립된 소녀상에 관한 정보는 다음 
글에 소개되어 있다. 신상범, 「What is it and Why is it here?-글렌데일의 위안부 소녀상」, 수필시 대 9(문예운동사 2014). 이 외에도 재외동포를 중심으로 한 ‘위안부’ 관련 문학작품이 쏟아져 나오 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다음은 ‘위안부’를 소재로 하고 있는 소설 작품들이다. 창래리, 
Gesture Life, 1999; 노라 옥자 켈러(Nora Okja Keller)의 종군위안부 Comfort Woman, 1997; 정미킴(Chungmi Kim), Comfort Women, 2006; 창킴(Chang Kim), A Dream Called Laundry, 
2006. 요컨대 ‘위안부’의 문제는 전세계적인 소수자, 피해자, 성폭력,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제와 연동되어 이해되고 있다. 구재진은 외국의 ‘위안부’ 재현이 한국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를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구재진, 「<종군위안부>의 역사전유와 향수」, 한국현대문학연구 21 (현대한국문학회, 2007), 385면. ‘위안부’표상의 초국가적 이동에 관해서는 다음 논문 참고. 이유혁, 「이동하는 또는 고통스러운 기억들: 한국인 종군위안부들의 트라우마의 초국가적 이동, 그것의 문학 적 재현, 그리고 식민의 망각에 관하여」, 인문연구 64호(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2).
고 있다.
그런데 ‘위안부’ 기억의 글로벌한 연대가 로컬리티와 충돌하는 지점도 분명히 존
재한다. 이 글은 1990년대 이후의 많은 ‘위안부’ 재현물이 폭력이 발생했던 시점인 ‘식민 과거’에 환원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식민 과거의 기억이 현재로 소환되면서, 한국인을 현재의 피해자로서 구성하는 ‘공동기억(collective memory)’이 만들어졌고 대중적 인식으로 확산된 것이다. 이는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이 민족 고 통으로 치환되는 “희생자 민족주의”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 때문에 1945년 이 후 ‘위안부’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해 온 한국사회의 로컬리티는 상대적으로 잊혀 지게 된다. 물론 시간과 공간을 넘어 피해의 시점으로 돌아가 트라우마를 환기하는 방식은 ‘재현 불가능한’ 고통의 순간을 현재로 불러와 ‘다른 기억’과의 연대를 만들고, 이를 통해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의 순간을 50년 전의 과거로 고정하여 이 를 민족주의적으로 전유하는 방식은,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국민이 되지 못한’ 여성 하위주체가 1945년 이후 한국 사회를 살면서 겪은 폭력을 상대적으로 축소하는 효과 도 가져온다. 양현아는 1945년 한국인 군 ‘위안부’들이 침묵해 왔던 기저에는 가부장 적 정조 규범에서 비롯된 ‘위안부’들의 ‘죄의식’과 이러한 경험이 “황급히 덮어진” 후 기 식민주의 사회의 상황이 있었다고 서술한 바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황급 히 덮어왔던” 1945년 이후의 역사가 현재에 깊이 성찰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후에 보다 상세히 밝겠지만, 본 연구자의 자료조사에 의하면, ‘위안부’에 관한 재
현은 1990년대 이전 ‘침묵’의 시기에도 ‘대중물 (대중소설과 대중영화)’을 중심으로 상당수 존재해 왔다. 그렇다면 왜 1990년대에서야 ‘위안부’ 문제가 ‘새삼스러운 일’ 로 여겨지게 된 것일까? 이러한 현상의 근원은 두 가지에 있다. 첫째, 1990년대 이전 에는 ‘위안부’ 문제가 이러한 재현물을 통해 ‘기억되기’보다 ‘망각’되기를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센다 가코가 1970년대에 이미 지적하였듯이 “위안부가 되어 비천해진 여 성에 대한 어떤 종류의 의식이 한국사회에 있으면서도 위안부가 문제시되지 않는 것은 그녀들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회 한쪽 구석에서 죽은 듯이 몸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 ‘위안부’에 관한 많은 대중적 재현물들은 동아시아와 한 국 사회의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이며 가학적인 인식을 드러내며 이를 과거에 ‘끝 난’ 일로 취급함으로써 ‘망각’을 강요했다. 둘째, ‘재현’ 자체의 문제이다. 재현이란 ‘(영화 언어를 포함한) 언어체계’를 통하여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유통함으 로써 사회적 의미나 정체성을 구성해내는 것이다. ) 지배적 재현을 통해 생성된 이 미지는 일종의 통념의 감각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유통되면서 ‘보이는 것’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보이는 것’을 구성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위안부들이 현실에서는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에도 ‘위안부’ 의 이야기가 많이 재현되었다는 아이러니는 결국 이러한 재현이 이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는 뜻일 수 있다.
따라서 이 논문은 199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대중 영화가 ‘위안부’를 재현하는 
방식을 살펴보며, 대중문화 속 ‘위안부’의 재현이 가학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지배적 인 시각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음을 주장한다. 연구 대상은 1965년작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 같은 해 일본 감독 스즈키 세이준에 의해 만 들어진 <작부이야기>, 1975년 작 <여자정신대>, 1985년작 <여자정신대> 그리고 1991년작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이다. 이 영화들은 동아시아 지역의 뿌리 깊은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제 속에서 ‘위안부’라는 하위주체가 어떻게 폭력적으로 재현
되어왔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또한 이 영화들은 상당한 참조성(referenciality)과 간텍스성(intertextuality)을 가지고 만들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식민자였던 일본 남성 이 조선인 ‘위안부’를 대하는 남성주의적 시각이 피식민자였던 한국 남성에게도 공 유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위안부’ 여성에 대한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적 태도를 시각적으로 각인시켜온 것은 물론이다. 공통적으로 이 영화들 모두 표면상으로는 ‘문제작’으로 만들어졌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에로 영화’로 제작과 배급의 경로를 통 해 구성된 남성의 쾌락을 위한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 속 ‘위안부’ 아이콘이 남성 들에게 소비되었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남성 중심주의 사회가 이들에게 어떤 2차 가 해를 끊임없이 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분명히 하지만 이 연구의 목표는 1990년대 이전의 영화가 ‘위안부’를 기억하는 
방식이 남성주의의 폭력성과 민족주의적 공모였음을 밝히는 것이지, 이를 통해 식민 지 폭력을 축소하거나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에노 치즈코는 ‘위안부’가 안 고 있는 두 문제, 즉 젠더와 민족의 문제가 결코 ‘무엇이 앞서는가’를 따질 수 있는 선후의 문제로 여겨질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 이와 같은 입장에서, ‘위안부’ 문제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폭력 체계, 즉 일제의 식민주의와 한국사회의 민족주의 적 가부장제는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 결국 피해자들을 ‘말할 수 없는 상태’로 지속시키는 공모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1945년 이후 남한의 영화에서 ‘위안부’가 남성 폭력적 시각과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방식을 밝히고, 이 이면에 국경을 초월하는 한-일 남성간의 성적 공모가 있었다는 점을 밝 히고자 한다. 이는 현재에도 지속되는 ‘위안부’에 대한 남성들의 성적판타지나 가학 성의 기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남성중심의 폭력적 문화가 사회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고, ‘위안부’라는 하위주체 여성의 위치를 ‘민족적 시민권’ 을 되찾는 데에만 두는 한, ‘위안부’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해결되지 않는 역사’로 끊임없이 재소환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2. 침묵인가? 숨기고 싶은 기억인가?: 
‘위안부’ 재현의 오래된 구조(들)
“전선의 노리개, 짓밟힌 17세. 정신대 피해자가 처음으로 일제의 잔학성을 고발하 고 나섰다(필자 강조).” 경향신문은 1991년 광복절 특집기사에서 김학순의 ‘정신대’ 문제에 대한 증언을 보도하며 “처음”과 “일제의 잔학성”이라는 수식어를 쓴다. 물론, 김학순의 증언과 일본정부에 대한 소송 이후 ‘위안부’ 문제가 전세계적 문제로 위상 이 바뀌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가 최초로 알려졌다는 것은 일종 의 ‘수사(rhetorics)’에 불과하다. ‘위안부’가 모집되기 시작한 때부터 김학순의 증언 이 있기 전까지 ‘위안부’는 문학, 영화, 혹은 신문지상에서 수없이 회자되어왔기 때 문이다. 다만, 이 이야기들은 주로 남성들이 전쟁이나 군대 앞 사창가를 기억하며 나누던 에로틱한 ‘뒷얘기’들로부터 시작하여 은밀히 이루어지던 성매매의 기억으로 이어지며 공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야마시타 영애는 일제의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 해방 후 미군 위안부 등 국가가 주도하여 이루어진 성매매와 본질적으로 인식을 같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가로 막는 것이 위안부 문제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적인 분노와 직결” 되는 점과 따라서 “미군기지 주변이나 일상에서 일어나는 성매매와 단절시켜 취급”해야 한다는 한국의 논리라고 지적한 바 있다.” ) 다시 말해, 하나의 흠도 없는 순수한 ‘민족의’ 피해자로서의 위안부가 아니었다면,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가 결코 오늘날 과 같이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 세워진 수많은 소녀상이 표상하듯이 우리의 어린 누이가 일본 군인에게 짓밟혔다는 이미지 는 오히려 ‘위안부’들이 공통적으로 겪었을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폭력을 간과하게 한다. 또한 이들이 강제로 끌려가서 저항했는가라는 지점이 순수한 피해자라는 증거 가 되며 1945년 이후 이들을 침묵하게 하는 사후적 폭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야마시타 영애가 지적하였듯이 “‘자유의사’로 ‘위안부’가 되었다고 보이더라도” 여성 들은 “이미 결정된 선택을 해야만 하는 노예적 상태”에 놓여 있었고, ‘위안부’ 여성 들은 대개 폭력적인 형태로 여성의 성노예화를 강요받았다. 즉, 강제로 동원되었으 며 범죄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범죄가 아니라는 인식은, “여성이 ‘위안부’로 만들어지 는 것 자체에 이미 사회적, 구조적인 ‘강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망각하게 한
다.17) 따라서 ‘위안부’를 재현할 때 자유로운 성의식을 가진 성매매 여성과 위압에 의해 동원된 여성을 끊임없이 분리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이유로든, ‘위안부’ 여성을 이분화하여 순결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의 이미지와 기억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기제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위안부’에 관한 남아 있는 이야기들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위안부’에 
관한 고정된 ‘공동기억’을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며, 현재까지도 ‘순수한 피해자 상’을 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김학순의 증언 이후는 ‘위안부’에 대한 새로운 기억이 생성되는 시작점이자, 이전에 ‘위안부’가 기억되어온 방식에 대한 부인(denial)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왜 부인되어야 했고 그러한 ‘수치’의 기억은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가? 다음에서는 1945년 이후부터 1990년대 이전의 ‘위안부’에 대한 이미지와 기억이 어떻게 일본과 한국에 만들어졌 으며 어떻게 서로 참조되어 구성되었는지를 추적하며, 이러한 이미지가 종국에는 어 떻게 ‘위안부’에 대한 망각의 공고한 문화 구조를 만들어 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1) 일본에서의 ‘위안부’에 관한 이야기들
1945년 이후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는 의외로 일본에서 많이 나왔다. 일본에서는 1945년 패전 직후부터 다무라 다이지로로 대표되는 전장문학계 소설류나 르포타주, 논픽션 류, 주로 남성을 독자층으로 한 잡지나 주간지 기사 등에 적지 않게 활자화 되었다.18) 다무라 다이지로가 쓴 <육체의 악마, 1946>, <춘부전, 1947>, <나녀가 있 는 대열, 1954>, <황충, 1964> 등이 그것인데, 이 작품들은 전장의 병사나 ‘위안부’ 의 “삶과 성”을 주제로 하여 전장에 있는 일본군의 비인간성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는 비교적 무관심하였으며, 주로 남성비평가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다. 이 소설들에 드러난 ‘위안부’ 묘사는 대부분 “저열하고, 다분히 남 성독자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듯한 표현”19)이 쓰여져, 진보적 남성 지식인 사이 에서 ‘위안부’의 문제가 아직은 식민주의의 문제로 공론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중에서도 다무라 다이지로의 <춘부전>은 저자가 ‘조선인 낭자군’에 대한 연민 에 의해서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조선인 ‘위안부’가 두드러진 작품인 데, 이 소설에서 주인공 ‘하루미’는 조선인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다.20) 조선인 위안 부를 전면에 배치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비록 ‘위안부’를 묘사하는 저열한 표현이 쓰 였을지라도 ‘위안부’에 대한 특별한 동정심이 없이 쓰여진 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려
 
20) 최은주, 「타자화된 여성들, 일본 영화 속 '조선인 위안부' 표상 오하루와 쓰유코의 사이에서」, 일본학 연구 제44집(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2014), 262면.
울 것이다. 이러한 텍스트의 특수성 때문에 이 소설은 이후 구로사와 아키라와 다니 쿠치 센키치에 의해 영화화가 시도되었지만 연합군최고사령부 GHQ의 검열에 의해 서 제작이 무산되었다. 그러다 조선인 ‘위안부’를 위안단 여가수로 바꾸고 나서야 다 니쿠치 센키치에 의해 <새벽녘의 탈주, 1950>로 제작될 수 있었다. 그리고 15여년이 지난 이후 닛카츠(日活)의 스즈키 세이준에 의해 <작부이야기 (춘부전), 1965>로 완 성되었던 것이다.21) 
<작부이야기>는 문학이 영화 매체로 옮겨오면서, 또 15년의 시차 속에서 흥미로 운 변화를 겪는다.22) 다무라 다이지로의 소설에서는 조선인 ‘위안부’ 하루미가 일본 인 병사의 연애 대상으로 그려졌지만, <작부이야기>에서는 원작에서는 조선인 ‘위안 부’였던 주인공 하루미가 일본인 ‘위안부’로 변화한다. 영화에도 조선인 ‘위안부’가 등장하지만 이는 일본인 ‘위안부’와 구분되는 이질적인 존재로 표상된다. <작부이야 기>에서 일본인 ‘위안부’ 하루미는 유부남에게 농락당한 후 성매매업에 종사하게 된 여성이다. 그녀는 남성의 시선에서 성적 대상으로 타자화되어23) 스크린에 재현되지 만, 동시에 많은 남성과 성관계를 마음대로 하는 자유로운 여성으로 표현된다. 최은 주는 또 다른 ‘위안부’ 이야기인 <피와 모래(血と砂)>의 ‘위안부’ 오하루의 표상이 “비밀스럽고 에로틱한 기억”으로 재현되었다고 지적하는데, 마찬가지로 <작부이야 기>에서의 일본인 ‘위안부’ 하루미는 자신이 성관계를 맺고 싶은 남성을 직접 선택 하여 먼저 바지를 벗기는 등 자신의 성적 욕망을 발산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러 한 재현은 ‘위안부’를 성욕을 이기지 못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했다는 일본의 남 성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본 남성 작가 혹은 작 가주의적 감독의 ‘위안부’ 여성 재현은, 비록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일부 강조하고 
21) 요모타 이누히코, 「더 큰 조감도를 바탕으로-박유하를 변호한다」, 대화를 위해서:<제국의 위안부> 라는 물음을 펼치다(뿌리와 이파리, 2017), 105~106면.
22) 이 논문에서는 혼돈을 피하기 위해 다무라 다이지로의 소설 <춘부전>은 <춘부전>으로, 이를 바탕으 로 제작된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는 <작부이야기>로 표기하고자 한다. 
23) 일본 영화에 나타난 조선인 ‘위안부’ 표상에 관한 논문으로는 최은주의 다음 논문들을 참고하였다, 「노래를 둘러싼 공감의 정치: ‘조선인위안부’의 현재에 대한 일고찰: 영화 <일본춘가고>와 <박치기> 를 중심으로」, 일본어문학 제69집(일본어문학회, 2015); 「오시마 나기사의 조선 위안부 표상: 전 후 일본 영화 속 위안부와 영화 <일본춘가고>」, 일본학보 제10집(한국일본학회, 2015); 「전후 일 본의 '조선인 위안부' 표상, 그 변용과 굴절: '춘부전'의 출판/영화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전후 일본의 전쟁기억 /표상/젠더」, 페미니즘연구 14(2)(한국여성연구소, 2014); 「조선인 위안부의 연애=사랑 을 둘러싼 정치: 식민주의적/민족적 욕망의 미디어로서의 ‘위안부’」, 일본연구 제64호(한국외국어 대학교 일본연구소, 2015).
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전장에서 수많은 남자를 상대하던 타락한 성매매 여성으로 이미지화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물론 ‘위안부’의 성적 주체성을 인정한 다는 점은 오히려 ‘위안부’를 성노예로만 재현하는 것의 위험성에서 ) 벗어났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루미가 일본여성으로 바뀌면서 ‘위안부’ ‘피해자’라는 시선은 비가시화되고 일본인 ‘위안부'는 성적으로 자유로운 성매매 여성이라는 인식으로 고 정된다. 
스즈키 세이준의 <작부이야기>에서 일본인 ‘위안부’ 하루미의 재현에 비해, 조선
인 ‘위안부’ 쓰유코의 정체성은 상당히 이질적이다. 쓰유코는 스즈키 세이준에 의해 영화화되면서 만들어진 인물이며 영화의 전체 흐름상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쓰유코가 차지하는 바가 아주 작다고는 할 수 없다. 영 화 내내 쓰유코는 일본인 ‘위안부’에 비해 돈도 적게 받고, 아름답지도 않고, 늙어버 려서 찾는 ‘손님’이 없는 성적(性的), 인종적으로 더욱 타자화된 조선인 여성으로 재 현된다. 패전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식민주의의 폭력에 관한 성찰과 65년 당시 이미 ‘나이가 들어버린’ ‘위안부’를 반영한 듯한 이 독특한 조선인 ‘위안부’이 재현은, 이런 의미에서 1965년 당시 일본의 진보주의적 지식인의 시선과 그들의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사랑하는 남자 와 전선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하루미에 비해, 쓰유코는 “미카미(하루미의 애인)와 하 루미는 살려고 하면 살 수 있었다. 죽는 것은 비겁한 일이고.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다!”라는 대사를 결연한 모습으로 내뱉는다. 요모타 이누히코는 이 장면을 조선인 ‘위안부’가 “주체성을 잃지 않고 세상을 투철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이에 반해 한국에서 재현된 조선인 ‘위안부’는 이러한 비판적 의식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하루미와 쓰유코를 이분화하여 재현함으로써 성매매 여
성으로 정조를 중시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여자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주체성을 가진 조선인 피해자상이 분리되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해 조선인은 ‘피해자’이지만 그 삶을 살아내는 주체성을 가진 여인으로, 성매 매업에 종사하던 (일본인) ‘위안부’ 여성은 욕망으로 인해 멸망하는 여성으로 그려진
다. 일본에서의 ‘위안부’에 대한 이러한 표상은 젊은 남자들이 집단강간의 상상과 ‘위안부’를 겹쳐놓은 오시마 나기사의 <일본춘가고(日本春歌考), 1967/ Sing a Song of Sex>의 ‘위안부’ 표상에 비해 좀 더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이런 위안 부 이미지의 생산은 최은주가 지적하였듯이 1960년대에 전쟁 오락영화 속에서 대체 로 “오락”의 하나로 소비, 유통되고 있었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26) 때문에 <작부이야기>의 비판적인 톤이 조선인 ‘위안부’는 피해자로, 좀 더 주관이 있는 여성 으로 그린 것은 사실이나, 성적 대상인 하루미는 피해자로 인식되기 어렵다. 오히려 자신을 배신한 유부남 애인의 혀를 물어뜯어 피투성이를 만들거나, 남성의 바지 지 퍼를 이빨로 물어서 내리는 하루미의 강렬한 섹슈얼리티는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후 에 더욱 자세히 진술하겠지만 <작부이야기>의 이러한 상반된 ‘위안부’ 표상이 한국 과 일본의 영화에 공통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일본의 진보주의적 남성 정치와 한국 의 남성주의적 민족주의 정치가 공모되는 지점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상업적 영화 소비의 맥락 속에서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서 표상되던 ‘위안 부’ 재현은 1970년대 센다 가코의 <종군위안부>의 발간과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 부’ 배봉기에 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변화를 겪는다. 1975년 재일 조선인의 국적법 문제가 불거지면서, 불법체제자로 강제송환 될 위기에 놓였던 조선국적 여성 배봉기 는 특별체제허가를 받아야 했다. 틀별체제허가를 받기 위해 당시까지 숨기며 살아왔 던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고, 이 과정에서 그녀가 종군‘위안부’출신임이 밝혀졌다. 배봉기의 이야기에 관해서는 가와다 후미코(川田文子)가 <붉은 기와집─조선에서 온 종군위안부(赤瓦の家─朝鮮から来た従軍慰安婦)>라는 제목으로 소설화하였다.27) 또한 야마자키 도모코(山崎朋子)의 <산다간 8번유곽>(筑摩書房, 1972)와 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의 <가라유키상>(朝日新聞社, 1976)과 같은 여성에 의한 기록물은 여성 독자를 상당수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선 남성 작가/감독들과는 달 리 이들 여성 작가들에 의해서 재현된 ‘위안부’는 남성 시선의 소비물로 다뤄지지 
26) 최은주, 「타자화된 여성들, 일본 영화 속 ‘조선인 위안부’ 표상 오하루와 쓰유코의 사이에서」, 255면. 27) 소명선, 「종군위안부의 문학적 형상화에 대해: 양석일의 <다시오는 봄>을 기저로」, 일어일문학 제 56집(대한일어일문학회, 2012), 182면.
않았다. 특히 가라유키상은 여성의 “해방의 길”을 모색했다. ) 또한 배봉기의 이 야기를 바탕으로 1979년에 야마타니 테스오(山谷哲夫)는 <오키나와의 할머니>라는 다큐멘테리를 제작하였는데, 이는 이전에 일본 남성들을 중심으로 소비되던 ‘위안부’ 의 표상과는 현격히 다르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배우지 못하고 사람에 속아 남자 의 ‘도구’로 취급”되었던 배봉기 할머니의 일생을 다루었다. ) 센다 가코의 <종군위 안부>가 한국사회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에 비해, 이 다큐멘타리는 상당 분량 한 국 사회에 소개되었고, 이후 일본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각성을 불러일으켜, 1982년 오사카의 한인들을 중심으로 <일제36년>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되는 등 일본 사회에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 요약하자면, 일본에서도 ‘위안부’ 표상은 상당 히 많이 존재했으나 1960년대 까지는 남성주의적으로 소비되었던 경향이 강했고,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이 문제가 점차 여성의 문제, 식민주의의 문제로 전환되 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2) 한국에서의 ‘위안부’에 관한 이야기들
1990년대 이전에는 ‘위안부’ 문제가 ‘침묵’되고 있었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한국 문학 자장 내에서도 ‘위안부’의 문제는 상당히 많이 거론되었다. 일본에서는 ‘위안부’ 여성의 삶이 군인과의 성적관계에 중심이 있었다면, 한국의 문학에서의 ‘위안부’는 피식민지자의 입장에서 민족의 수치스런 과거로 종종 소환되어왔다. 이미 일제시기 인 1941년 조용만의 단편소설 <여정>에는 “팔려가는 계집”들에 대한 묘사가 있으며, 같은 해 최명익의 단편소설 <장삼이사>에서도 멸시를 받는 ‘위안부’ 여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31) 해방 직후에도 엄흥섭의 <귀환일기, 1946>과 박용구의 <함락직전, 1953>에도 ‘위안부’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만, 이들이 돈을 받고 팔려가 “매음굴”에 서 일하게 된 것으로 묘사되었다.32) 이 소설들에는 공통적으로 팔려가는 여성에 대 한 경멸과 반감과 더불어 ‘어린 소녀’가 속아서 매음굴에 넘겨진 것에 대한 측은함과 조선인 남성으로서의 무기력함이 담겨있다. 
이에 비해 조금 시차를 두고 1969년 출간된 김정한의 <수라도>에서는 ‘위안부’를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희생물로 보는 시각이 담겨지기 시작했다.33) 1969년 동아방 송에서 방송되었던 이호원 작 <태평양전쟁>도 실록소설의 형태로 발행되었고, 부록 으로는 2차 세계대전의 사진집이 같이 출판되었다.34) 이 속에 ‘여자정신대’의 문제 도 등장한다. 1977년 일간스포츠에 김성종이 연재한 <여명의 눈동자>는 ‘위안부’ 문 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하근찬의 <월례소전, 1978>도 월례가 공출되는 장 면을 담고 있다.35) 임종국은 1981년에 <정신대실록>를 발간하였고, 같은 해 경향신 문에 유재용이 <비바람 속으로 떠나가다>를 연재하며 ‘위안부’의 문제를 다루었다. 윤정모의 <에미이름은 조센삐였다>와 한백흥의 <실록 여자정신대 그 진상>이 1982 년에 출간되었다. 1984년에는 한수산의 <우리들의 시대>와 조갑상의 <살아 있는 사 람들>이 출간되었고 이 두 소설 모두 ‘위안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1989년 무렵에 는 더 많은 ‘위안부’에 관한 소설들이 출간되었다. 1989년 백우암의 <여자정신대>는 “환향녀편”과 “버마편” 두 권으로 출판되었고, 허문순이 <분노의 벽>을 출간하였는 데, 이 책은 여자정신대, 여자봉사대, 여자수용소의 3부로 구성되어 “증언”과 “실록” 을 토대로 정신대의 실상을 생생히 전했다는 평을 받았다.36) 같은 해 정현웅은 <잃 어버린 강>을 출판하였다. 이렇게 보면 1990년대까지 한국사회에서 ‘위안부’의 존재가 ‘잊혀졌다’고 가정하
31) 구마키 쓰토무, 「한국문학에서 본 위안부상, 그 기록의 형성」, 대화를 위해서(뿌리와 이파리, 
2017), 113~129면.
32) 구마키 쓰토무, 앞의 글, 129~132면.
33) 구마키 쓰토무, 앞의 글, 133~135면.
34) 이 소설은 가미카제, 관동군의 생체실험 등 태평양 전쟁의 잔혹사를 담고 있다. 경향신문, 1969년 11월 26일. 1974년에 신문에 난 광고를 보면, 최장기 베스트셀러로 발간 3년 만에 93만부가 팔려나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 육백만명이 동원된 태평양전쟁」, 동아일보, 1974년 7월 4일. 
35)「최남일 산책:노수복 할머니」, 경향신문, 1984년 3월 21일.
36)「여인 수난<분노의 벽> 작가 허문순씨」, 동아일보, 1989년 5월 19일.
는 것은 낭설에 가깝다. 70년대 말부터 사실상 무더기로 나온 역사소설에 ‘위안부’가 어떻게 재현되었는가에 관해서는 앞으로 보다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점이 있다면, 이 소설들은 대체로 역사소설 혹은 전쟁소설의 범주에 서, 개인의 고통보다는 조선이 처했던 슬픈 역사의 일부분으로 ‘위안부’의 문제를 다 루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안부’의 문제는 대개 처녀 공출에서 시작하여, 일제 의 만행으로 인해 ‘위안부’가 죽음에 이르는 내용을 주로 하고 있다. “스스로 ‘민족사 적 고발이며 인류의 아픔’으로 일컫고 있는 작품”이 많았지만 “최소한의 문학적 배 려도 없이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에 대한 성학대라는 형식을 빌려 시종 가학적 성유 희에 대한 외설스러운 묘사로 일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7) 1980년대에는 위안부들이 생존하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돌면서 이들을 직접 취재
하여 ‘위안부’의 실태를 알리려는 시도들도 다양 하게 존재했다. 특히, 1979년 야마타니 테스오 의 배봉기 할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한국에 알려지고, 1984년에는 태국에 있던 노수복 할머 니가 한국을 방문하자38) 생존하는 ‘위안부’에 관한 관심은 증가한다. 서울에 살고있는 배옥수 할머니의 이야기가 여성월간지 <레이디 경향>에 르뽀로 대대적으로 실렸고 MBC 뉴스다큐멘타 리 <나의 전쟁범죄 고백>에서 ‘위안부’의 문제를 다루었다.39) 또한 1980년대부터 일본 교과서의 역사왜곡 문제가 불거지면서 ‘위안부’ 문제가 일
<그림 1> <레이디 경향> 1984년 
4월호에 실린 위안소 규칙과 위안소의 사진 본의 역사왜곡의 한 사례로 공적 영역에도 등장 하기도 하였다.40) 세월이 흐름에 따라 ‘위안부’
37) 조선희, 「민족수난의 상징을 선정주의 소재로」, 한겨레, 1989년 5월 26일. 
38) 「정신대에 끌려간 태국 거주 할머니 40년만에 혈육 찾아」, 동아일보,1984년 3월 10일. 「그렇게도 그리던 고국의 품」, 동아일보, 1984년 5월 16일.
39) 이 뉴스 다큐멘타리는 1984년 MBC가 처음으로 <시네텔 서울>이라는 독립영화 프로덕션에 외주 제 작하여 방영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으로 승부하는 영상시대 첨병」, 경향신문, 1996년 6월 22일자. 이 다큐멘타리가 어떤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접근하고 있는 지는 영상이 확인되지 않아 서 알기 어렵다. 그러나 제목으로 추정하건데, 요시다 세이지가 일본에서 1983년에 간행한 <나의 전쟁범죄, 조선인 강제연행>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도 보인다. 
에 관한 기억은 차차 역사화되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레이디 경 향>에 실린 한국에 살고 있는 ‘위안부’ 배옥수 할머니의 이야기는 ‘위안부’가 오키나 와나 태국뿐만 아니라 서울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이것이 “민족”의 아픔으로 구조화 된다. 
여자정신대! 우리나라 역사가 속옷을 벗어 보이는 부끄러움과 통한이 서린 이름, 여자정신대. 일제가 총칼로 위협하고, 속임수로 꼬여 내어 성의 노예로 삼았던 배달의 어린 딸들. 우리의 언니, 누나들의 발가벗은 이름이었던 정신대. 그러나 역사는 숨길 수 없는 것. 그것이 헤어지고 찢어진 상처뿐이어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상처를 치료 하고, 환부에서 새살이 돋아나게 해야 한다. 얼마전 ‘오끼나와 할머니’라 불리는 배봉희 할머니 (70)나, [배봉기] 지난 2월 태국에 살아남은 노수복(61) 정신대 출신 할머니의 이야기는 아직도 충격과 분노와 한숨으로 우리들 가슴 속 깊이 남아있다.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이기에 그들의 상처가 우리의 통증으로 다가오는 것이다.(필자 강조)41)
위에 지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주로는 여성독자들을 위주로 하는 여성지에 실린 이 르포는 이들을 “우리의 언니, 누나”로 호명하고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이 느끼는 아픔으로 차원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 르포에서 특기할만한 사항은 배옥수 할머니의 증언뿐만 아니라 위안소의 사진과 위안소 규정을 일일이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위안부’의 문제는 이제 소설 속에서만 보던 사라진 과거의 이야기 들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 (혹은 진실)과 함께 ‘민족’이 겪은 트라우마로 적극적으로 구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를 향한 이중적인 시선, 즉 일제에게 수치를 당한 우리 의 누이이자, 정조를 유린당했기 때문에 한국 남성들이 감당하기에 버거워하는 부분 도 눈에 띤다. 1984년 건국대학교 국문과 조남현 교수는 조갑상의 <살아 있는 사람
 
40) 1980년대부터 신문지면을 통하여 일본의 교과서에 일제 시대에 관한 서술이 왜곡되어 있다는 점이 대서특필되기 시작했다. 특히 경향신문 1982년 8월 5일자 신문에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일본 교과서 의 왜곡된 서술을 신문 두 지면에 걸쳐 전면 분석하여 실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일교과서 한일관계 왜곡 내용」, 경향신문, 1982년 8월 5일. 이후에도 이러한 신문보도는 이어졌다. 이현희, 「일교과서 역사 왜곡을 고발한다」, 동아일보, 1986년 7월 15일.
41)「완전특종:배옥수, ‘정신대 할머니’가 서울에 한 명 살고 있다」, 레이디 경향, 1984년 4월호.
들>에 대해 논하며, 이 소설이 “정신대에 대한 비화보다는 젊은 세대들이 김금자(위 안부)와 같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할 것인가”를 묻고, “잘못된 과거 역사로 인해 수치스럽고도 한에 찬 경험을 한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할 것인가”를 질문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이 ‘위안부’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이한 것은 그가 이 소설이 궁극적으 로는 “김금자의 상처와 한은 당시의 사건을 영원히 묻어버릴 때 오히려 서서히 아물 수 있다”는 결론짓고 있다는 점이다.42) 이런 결말은 ‘위안부’들의 증언이 직접 나오 기 시작한 1980년대의 상황에서 ‘살아있는’ 위안부들의 목소리에 당황한 남성 지식 인이 이 문제를 어떻게 봉합하려고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상의 사회, 문화적 맥락은 영화 속 위안부 재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듯 하다. 다음에서는 네 편의 영화를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며 ‘위안부’가 어떻게 재현해 되어왔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3.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 사이: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 1965>
한국 영화에서 최초로 ‘위안부’를 재현한 것은 1965년작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 다>이다. 이 영화에 관해서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은 박유하인데, 박유하는 이 영화 에 재현된 ‘위안부’의 모습을 그녀들이 성인으로 공출되었던 증거로 쓰고 있다. 그녀 는 “위안부가 된 사람 중에는 소녀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1960년대 한국영화를 보 면 조선인 학도병들이 만난 위안부가 성인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43) 이 주장은 재현을 사실로 취급하여 역사의 증거로 쓰고자한 것이기에 주장 자체가 이미 유효하지 않을 뿐더러, 재현이 사회적 맥락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점 또한 간과 하고 있다. 박유하와는 논지는 다르지만 요모타 이누히코는 영화 속 ‘위안부’들이 속 아서 전쟁터로 왔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지적하며 이것이 강제연행과는 다른 기억 의 파편임을 지적하고 있다.44) 그러나 이 영화의 바로 이 장면이 아니더라도, 앞서 
42) 조남현, 「이달의 소설, 조갑상의 <살아있는 사람들>」, 동아일보, 1984년 4월 27일.
43) 박유하, 「위안부,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위안부 문제 제대로 이해하기」, 미래한국, 2015년 4월 
15일.
44) 요모타 이누히코, 앞의 글, 102면.
살펴본 대다수의 대중서사와 ‘위안부’의 증언에는 일본군이 총칼을 들고 와서 강제 연행했다는 증언은 소수에 속한다. 따라서 1945년 이후에 재현된 ‘위안부’의 의미를 강제연행의 증거로 파악하는 것은 넓은 맥락에서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정작 영 화의 중요성은 1965년 시점에서 이들이 전장에서 겪었던 폭력과 이러한 경험을 한 여성들을 한국 사회가 어떻게 망각하려 했는가이다.
영화의 내용을 간추리자면, 이 영화의 주인공인 수남(마츠모토)은 조선 출신의 일 본군 장교로 태평양 전쟁 중 버마 전선에 파견된다. 그는 일본의 전쟁에는 가지 말라 는 애인과 헤어지고 전쟁터에 갈 정도로 일본 제국에 충성되고 성실한 조선인이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버마에서 그곳까지 동원된 '위안부' 여성들을 만나고 난 후 흔들 리기 시작한다. 특히 일본 제국 군대가 전장에서 민간인 여자와 아이를 학살하는 반 인륜적인 행위를 일삼는 것을 보고, 일제의 이상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 다. 갈등하던 마츠모토는 급기야는 자신이 아버지같이 여기던 일본인 사단장을 죽이 고, 자신도 전쟁 중에 죽고 만다.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는 영화로 제작되기 이 전에 동아방송에서 라디오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며,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이영미는 이 영화를 기성세대가 “‘민족주의’를 주장하고 일제의 피해자임을 소리 높여 외치지 만, 결국 그네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비겁하게 혹은 어리석게 살아온 역사의 죄인이 며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으로 파악한다. ) 다시 말해, 1964년 당시 한일회담에 반대했던 젊은 세대가 일본과의 굴욕적 수교를 감행한 기 득권 세대를 고발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는 식 민지를 겪은 엘리트 세대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폭로하고, 어떻게 보면, 황급히 덮어버리고 싶었던 ‘위안부’ 문제까지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다. 
요모타 이누히코는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가 B급 영화이기 때문에 한국인들 이 언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는 전쟁과 액션영 화의 일인자였던 정창화 감독에 의해 매우 잘 만들어진 영화이며, 이 영화의 시나리 오 작가인 김기팔은 지속적으로 한국영화의 지배적 플롯을 따르지 않는 사회 비판적 시나리오를 써왔다. ) 또한 이 영화는 식민지 조선인이 전시기에 느꼈을 민족과 국 가 사이에서의 극단적 갈등을 전면적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지배적인 대중서사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영화가 영화사가들의 ‘해석’과 관심의 영역에서 벗 어나 있었던 이유는 영화에 드러난 사회 비판적 의식이 실상은 식민과거를 황급히 덮으려는 한국사회의 지배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림 2>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의 장면. 조선인 ‘위안부’와 조선인 장교 마츠모토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며, 조선인 ‘위안부’의 강한 섹슈얼리티가 강조된다.
이제 한걸음 더 들어가서 이 영화에서 ‘위안부’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지 
살펴보자. 영화는 버마에 파견된 마츠모토가 아직 국어(일본어)가 서툰 조선인 ‘위안 부’를 관리할 것을 지시 받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들을 처음 접견하는 자리에서 마츠모토는 ‘위안부’들을 향하여 “귀하의 애국심에 경의를 표하며...”라는 말을 하고, 이를 들은 ‘위안부’들은 마구 깔깔거리며 비웃는다. ‘위안부’들은 “쑥맥이군,” “저것 도 같은 동포야?” “별을 달아주니 아주 환장을 했나보군!”하며 마츠모토를 경멸한다. 이러한 말을 하며 과도하게 웃는 ‘위안부’ 재현은 이후에 등장한 한국 대중 영화 속 ‘위안부’의 이미지와는 상이하다. 오히려 1950년대 한국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위 
‘양공주’ 혹은 ‘아프레걸’의 모습과 흡사하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아래에는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가 특수를 이루었는데, 전쟁 영화에는 종종 미군을 대 상으로 한 ‘위안부’(혹은 유엔마담)의 모습도 등장한다. 이들은 완전한 서양식 드레 스를 입고 자신들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양공주’ 혹은 ‘아프레 걸’”로 표상된다.48) <사르빈 강에 노일이 진다>의 위안부 표상은 정확히 이 미군 ‘위 안부’의 그것이다. 이런 재현으로 볼 때, 외국인을 위한 ‘위안부’라는 개념이 당시 ‘위안부’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또한 흥미롭게도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의 ‘위안부’ 재현은 일본에서 재현되 던 ‘위안부’의 이미지와도 흡사하다. 주인공 격인 ‘위안부’는 여배우 최지희가 맡았는 데, 최지희는 1950년대 영화 <아름다운 악녀>에서부터 출발하여 강렬한 여성 섹슈 얼리티의 페르소나를 가진 배우이다. 최지희가 연기한 ‘위안부’는 다분히 성적으로 강렬하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진 여성으로 그려진다. 마츠모토를 처음 만난 밤, ‘위 로’해주겠다며 적극적으로 다가서서 옷을 벗어 제끼는 최지희의 모습은 일본의 <작 부이야기>에서 주인공 하루미의 강한 섹슈얼리티나 <피와 모래>의 ‘위안부’ 오하루 가 “치마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리고 신체를 노출시켜 동정인 소년병들이 관능을 자 극하는” 것49)과 유사하다. 더구나 한국 전쟁 기간 동안 미군을 위한 한국군위안대가 존재했다는 사실과 위안소의 경영이 실재적으로는 일본 제국의 ‘위안부’ 동원 방식 에 유사점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50) 1960년대 중반 일본인인 외국인을 상대 로한 ‘위안부’의 표상이 1950년대 전쟁기간동안 미군을 상대하던 위안소의 ‘위안부’ 로 표상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하다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에 나타나는 ‘위안부’의 모습은 이미지 상으로는 ‘피해자’로 보여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영화상으로는 최초로 조선인 ‘위안부’가 재현된 만큼 당시에는 이들을 재현할 수 있는 영화적 기표가 부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같이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를 철저히 분리하려는 반일-민족주의적 태도가 이 당시에는 오히려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48) 김청강, 「냉전과 오락영화: 1950~60년대 군사주의적 남성성과 반공적 주체 만들기」, 한국학연구 61(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7), 100면.
49) 최은주, 「타자화된 여성들, 일본 영화 ‘조선인 위안부’ 표상-오하루와 쓰유코의 사이에서」, 256면.
50) 일제하 위안소와 한국전쟁기 한국군위안부제도에 영향을 주었다 사실에 관해서는 다음 두 논문 참 고. 김귀옥, 「일본식민주의가 한국전쟁기 한국군위안부제도에 미친 영향과 과제」, 사회와 역사 103 집(한국사회사학회, 2014); 박정미, 「한국전쟁기 성매매정책에 관한 연구: '위안소'와 ‘위안부’를 중심 으로」, 한국여성학 27(2)(한국여성학회, 2011).
‘위안부’가 강한 여성 섹슈얼리티를 가진 여성으로 형상화되면서, 이들이 일본제 국의 피해자라는 점이 부각되지는 않지만, 내러티브 상으로는 이들이 일제의 피해자 라는 점은 명확히 지적된다. 예를 들어, 마츠모토의 친구들인 조선인 병사들은 조선 인 위안부가 일본인들에게 나뉘어 들어가는 장면을 보며 “우리 누나나 동생들이란 말이야! 아무리 식민지 백성이로기서니!”하며 울분을 터트린다. 그러나 마츠모토는 아직도 일본 제국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다. 그날 밤 조선인 ‘위안부’가 마츠모토 의 숙소에 들게 되는데, 마츠모토는 딴 곳으로 가보라고 한다. 이런 마츠모토에게 그녀는 “아니, 군부의 명령으로 왔는데 그냥 가라니, 나보고 그럼 저 지옥으로 가란 말이에요?”라고 되받아친다. 마츠모토는 “지옥이라니! 그럼 왜 데이신다이(정신대) 에는 왜 지원한거지?”라고 되묻고, 이에 그녀는 “지원이요? 아하하하하. 어떤 벨빠 진 년이 이 짓을 하러 지원을 한다구요?” “그러면 끌려왔단 말이야?” “일본 제국주 의가 신사적인줄 아세요? 쪽발이 새끼들!”이라는 말을 내뱉는다. 이 장면에서 분노 에 찬 최지희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고, 비록 ‘타락한 여성’과 같이 재현되기는 하였 으나, 그 이면에 그녀들이 가진 일본에 대한 반감이 드러나는 것이다. 
요컨대,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에 나타나는 ‘위안부’ 재현은 ‘위안부’가 10대 가 아닌 성인이었다는 증명도 강제연행이 아니었다는 것에 대한 증명도 아니다. 오 히려 ‘위안부’라는 이름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표상들이 중첩되며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위안부’는 ‘순수한’ 피해자도 아니요, 자유로운 성 욕을 가진 성매매 여성도 아니다. 이 영화의 원작자인 김기팔이나 감독인 정창화가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를 참고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이 영화 속의 ‘위안부’ 는 <작부이야기>의 일본인 ‘위안부’ 하루미와 조선인 ‘위안부’ 쓰유코의 중간쯤에 있 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민족의 수치’로 여기는 강한 남성주의적 담론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남한이 포스트-식민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초기 단계에 있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조선 인 ‘위안부’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제국적 가치를 받아들였던 친일파 마쯔모토 마저 모두 죽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결말은 결국 식민 기간 동안 이중적 정체성을 가졌던 인물들을 삭제할 수밖에 없는 포스트-콜로니얼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4. 남성주의의 공모: 한국의 <여자정신대, 1974>와 일본의 <작부이야기, 1965>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 이후 위안부가 등장하는 영화는 거의 없다가, 1974년 <여자정신대>가 ‘민족영화 감독’의 대부로 알려진 나운규의 아들 나봉한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1970년대 이 영화의 다소 뜬금없는 등장은 다음 두 가지 맥락에서 그 배경을 유추해볼 수 있다. 첫째는 1969년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 이후 ‘위안부’ 문 제를 소재로 한 많은 소설들이 신문에 연재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러 한 1970년대의 분위기 속에서 이 영화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다. 현재 영화의 필름 은 손상이 되어 영상은 볼 수가 없지만, 남아있는 시나리오와 스틸컷에 의해서 이 영화의 분위기는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심의자료를 살펴보면, 원래 제목은 <종군 위 안부>였다가, 영화 등록과정에서 <여자정신대>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심의과정에서 <여자정신대>라는 제명이 “부도덕”하다면서 공보부에서는 제명을 바꿀 것을 영화사 에 요청하였으나, 영화사인 신푸로덕션은 “정신대”라는 단어는 우리 국어일 뿐만 아
 
니라 “용사”라는 뜻을 담고 있다며 이의 신청을 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여자 정신대>라는 제목이 확정되었다. ) 이로 보아, 당시 정신대 문제가 폭발적으로 알 려진 것은 아니나, 상당히 민감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 영화가 만들어졌음을 유 추할 수 있다.
둘째로는 영화사적 맥락이 있다. 1970 년대의 한국영화계는 소위 1960년대 ‘황 금기’를 거쳐 주로는 남성 관객을 위주로 하여 상영되는 ‘호스테스’ 영화가 붐을 이 루고 있었다. <여자정신대>는 “영화사상 최대의 충격을 던진 문제의 대하드라마”
 
 
<그림 3> <여자정신대> 신문광고
 
 
<그림 4> <여자정신대> 검열대본, 오른쪽 손으로 줄그어진 부분은 
일본어 가사로 된 노래이다. 영화에는 일본어가 쓰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로 소개되고 있지만 ) 사실은 ‘호스테스’ 영 화의 유행의 일부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 하여 남성관객의 쾌락을 위해 만들어진 상품 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누구도 외면해 버릴 수 없는 이 엄청난 性戰爭의 全線! 소리 는 없어도 들어야하며 차마 못 볼 일이지만 우리는 보아야한다!”라는 광고문구 )와 함께 배치된 여성 배우의 반 나신과 남성을 올려다 보는 전형적인 포르노그래피적 사진 구도, 그 리고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표지 등으로 보 아 영화의 목적은  일제에 대한 분노보다 오
히려 ‘위안부’의 육체를 전시(exhibit)에 중심 이 있는 듯하다. 또한 영화의 심의자료에서 
 
“(정신대원이) 약 천 이니까 백 대 일,” “계집은 확실히 센징이 우세해” 등을 삭제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보아, ‘위안부’를 비하하는 대사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 이후 이 영화는 홍콩에도 수출되어 상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홍콩에서 이 영화가 어떤 맥락으로 소비되었는지도 앞으로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할 부분일 
것이다.55) 
그런데 더욱 중요한 점은 이 영화가 원작이 사실상 스즈키 세이준의 <작부이야 기>를 베낀 표절작이라는 점이다. 당시에는 일본 영화의 국내 수입이 금지되어 있었 기 때문에, 가끔 이러한 문화 불통의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 영화를 표절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 이 영화의 경우에는 표절시비가 붙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스즈 키 세이준의 <작부이야기>를 거의 완벽하게 베꼈다. 천진에서 ‘위안부’로 지내던 몇 명의 여성이 만주로 이동하여 최전선에서 ‘위안부’ 일을 하게 된다는 점부터 위안소 에 온 군인과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모두 <작부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검열대 본에는 일본어로 쓰여진 부분이 검열되어 잘려나간 것이 종종 눈에 띤다. [그림 4참 고] 이 베끼는 과정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도 발견되는데, <여자정신대>에서는 주인공이 일본인 여성에서 조선인 여성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텍스가 약간 분열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일단, 주인공 춘자는 <작부이야기>의 하루미의 역할을 거 의 복사한 듯이 재연하지만, 하루미의 대사 중 일부는 조선인 춘자가 아닌 일본인 위안부 화자의 입을 통해서 전달된다. 천진에서 만주로 이동하면서 “온 중국이 우리 를 기다린다! 나는 많은 남자들을 상대하고 싶어!”라고 말하는 부분이나 손님으로 온 남성을 유혹하는 장면은 모두 화자가 발화한다. 다시 말해 <작부이야기>에서의 하루미가 가지고 있는 강한 섹슈얼리티는 일본인 ‘위안부’인 화자를 통해서 표출된 다. 이러한 차이는 ‘위안부’의 섹슈얼리티의 다면성-피해자로서 혹은 강한 섹슈얼리 티를 가진 여성으로-을 조선인 ‘위안부’의 것으로 재현하기 어려웠던 한국인 감독 의 고민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는 부분에서의 춘자는 이미 ‘위안부’로 상당한 시간을 보내 성매매에 익숙한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초 반의 이런 화자와 춘자의 역할분담은 점차 사라지고, 춘자는 점차 강한 섹슈얼리티 를 가진 여성으로 그려진다. 식민주의의 피해자를 그리는 데에도 식민자인 일본 남 성의 재현에 극히 의존하고 있다는 이 아이러니는 한국 남성주의의 매우 독특한 포 스트-콜로니얼리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춘자의 경우 <작부이야기>의 하루미와 달리 조선인 ‘위안부’로 설정되어 있 기 때문에, 몇몇 플롯이 추가된다. 예를 들어, <여자정신대>의 앞부분에는 춘자가 정 신대에 지원하게 되는 과정과, 이 과정에서 부모가 업자로부터 돈을 받는 장면들을 추가되어 있다. 또한, <작부이야기>에서는 하루미가 사랑하는 일본인 남자가 군대 내 하급자라면, <여자정신대>에서는 춘자가 사랑하는 남자가 일본인 남성이 아닌 조 선인 병사 성철로 설정이 되어있다. 즉, 두 영화는 모두 사랑은 민족 안에서만 이루 어지는 것으로 경계 짓는다. 춘자가 사랑하는 남자가 ‘조선인’ 성철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가 성철을 유혹하려는 장면은 ‘(남성) 민족 정서’에 크게 반하지 않는다. 춘자를 좋아하는 일본인 상급자와의 성관계는 어쩔 수 없는 것 혹은 변태적이고 가 학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면, 조선인 남성인 성철은 사랑하기 때문에 성욕을 내비칠 수 있다. 여기에서 관객인 조선인 남성들의 이상 심리를 볼 수 있는데, 같은 ‘위안부’ 를 ‘구매’한 남성이더라도 일본인의 경우에는 변태적인 것으로, 조선인과의 관계는 ‘사랑’으로 그리고 싶은 심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영화에서 모두에서 ‘위안부’가 피해자라는 의식은 약하다. 오히려 <작
부 이야기>에서는 일본인 ‘위안부’인 하루미에 비해 조선인 ‘위안부’는 굳은 의지를 가진 여성주체로 그려지는 반면, <여자정신대>에서의 춘자의 주체성은 조선인 남성 을 사랑하는 여성으로만 그려진다. 다음은 그녀가 성철과 사랑에 빠지자 말하는 대 목이다. 
 
<그림 5> 남아있는 영호 1974년작 <여자정신대>의 스틸컷. 왼쪽의 일본 남성과의 관계는 ‘강간’으로 오른쪽 조선인 남성과의 관계는 ‘사랑의 행위’로 그려져있다.
나는 당신을 나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해요. 당신이 아니었던들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굴러다니다 죽어버릴뻔 했거든요. 정말 행복해요. 이러고 있으면 뭐라 고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전신이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아요. 행복해요. 행복해요. ) 
이렇듯 조선인 병사만을 위한 순정만은 간직한 것으로 재현된 춘자는 일본인 장 교에게는 스스로를 “몸파는 계집”이라고 일컫는 행위를 통해, 타락한 여성임을 자인 한다. 그러나 오직 조선인 병사에 대한 완벽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순수함을 증명 받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를 보는 1970년대 남성관객이 에로 영화 에서 가졌을 법한 ‘순수한 여신’과 같은 성적 판타지가 ‘위안부’를 그리는데 얼마나 많이 투영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위안부’에 대해 만들어진 기억이, 이후 정신대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더욱 강화되는데, ‘위안부’는 확고히 피해자의 옷을 입 기 시작한다. 거기에 민족주의적 남성성이 가미되면서, ‘위안부’의 이미지는 더욱 ‘순 수한 피해자’로 변모한다.
5 . 순수한 피해자와 남성중심적 민족주의의 결합: 
<여자정신대, 1985> 그리고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1991>
1) ‘애국’하는 피해자
사와 한-홍콩 합작으로 기획되어, 이상언, 정
중 두명의 감독에 의해서 만들어졌다.58) 합작 영화였기 때문에 상당수의 연기자가 홍콩 배 우로 채워졌다.59) 앞서 1974년작 <여자정신 <그림 6> 1985년 <여자정신대>의 포스터. 여배우는 벗은 몸이 아니라 한복을 입은 순결한 누이가 강간당하 는 조선인 여성의 모습으로 이미지화 된다. 
 
1974년작 <여자정신대>가 나온 이후, 한동안 정신대를 소재로 한 영화는 등장하 지 않았다. 일간지의 소설이나 주간지의 르포기사로 ‘위안부’의 문제가 소설이나 기 사의 소재가 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이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영화가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은 특기할 만 한데, 이는 공식적 담론이 ‘위안부’의 문제를 적어도 민족 의 아픔으로 강화시키는 가운데, 앞서 1974년 작 <여자정신대>에서 춘자가 보여주는 ‘강한’ 섹슈얼리티가 한국사회에 가시화되는 것이 어 쩌면 부담스럽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에 반해 1985년에 개봉한 <여자정신대>에서는 변화한 사회분위기가 잘 반영되어 있다. 이 영 화는 한국의 대양영화사와 홍콩의 대화영화공
58) 요모타 이누히코는 이 영화의 제목을 1980년대 초에 만들어진 <종군위안부>로 소개하고 있으나, 이 는 잘못된 정보이다. 요모타 이누히코, 앞의 글, 104면. 
59) 한국영상자료원의 KMDB 기록에 따르면, 장지평, 원가페, 주평, 황국동 등의 홍콩 배우가 출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KMDB, (http://www.kmdb.or.kr/vod/vod_basic.asp?nation=K&p_dataid=0387 
대>가 1978년에 홍콩에서 상영되었던 기록으로 보아, 한국과 홍콩의 관객을 타겟으 로 만들어진 영화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1974년 영화 <여자정신대>와 제목이 같지만 실제로는 1982년 
윤정모의 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를 원작으로 하고 있어서, 앞선 <여자정신 대>와는 완전히 다른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일본 영화인 <작부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1974년 <여자정신대>에서는 ‘위안부’의 피해자적 재현이 거의 부재했다면, 이 영 화에서는 조선 여성은 ‘순수한 피해자(pure victim)’로, 성매매에 종사했다가 ‘위안 부’로 오게 된 ‘타락한 여성(fallen woman)’은 일본인 여성으로 명확하게 구분한다. 주인공 여성은 ‘춘자’와 같은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순결하고 순수한 토종 한국 여성 의 이름인 ‘순이’를 갖게 된다. 또한 <그림 6>의 포스터에도 보이듯이 순이는 치마 저고리를 입은 순수한 소녀의 모습의 피해자로 이미지화된다. 영화에서 조선인 ‘위 안부’ ‘순이’는 일본군의 빨래를 해주러 가는 것이라고 속아서 전장으로 가는 배에 오른다. 배안에서 타락한 듯한 일본인 여성을 마주한 순이는 그들에게 다가가 “여러 분도 군대에 세탁하러 가시나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일본인 성매매 여성으로 보이 는 여성이 “하하하. 그것도 세탁이라면 세탁이지. 남자의 살갗을 세탁하는 거지!” 라 고 대답한다.60) 여기에 또 다른 일본인 여성이 나서서 일본인 스스로를 비난하며 “똥깔보들!! 우리는 모두 깨끗한 처녀였다고. 나는 일본인이기 때문에, 일본을 혹평 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저 사람들은 조선과 대만인이야. 너무하는구나!!”라며 다른 일본인 여성을 나무란다. 그제서야 자신들의 처지를 알게 된 조선 여성들은 놀라게 되고, 그 중 하나는 바다로 몸을 던져서 자살을 한다. 이 장면에서, 조선여성은 모두 속아서 온 ‘처녀’로, 일본인 여성은 자신들이 가는 곳을 명확히 알고 온 성매매 여성 으로 완전히 분리된다. 이러한 구분은 일단 윤정모의 원작 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 삐였다>의 묘사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뜻밖인 것은 선실에는 약 백 명쯤의 일본 여성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모두 돈이나 벌어 보자고 많은 선금을 받고 지원해 온 창녀나 기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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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이 대사는 <작부이야기>에서 처음 나오는데, 1974년작 <여자정신대>와 1985년작 <여자정신대>에 모두 쓰인다. 위안부를 재현한 영화가 서로를 참조했음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사이다. 
이었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저렇게 막돼먹은 여자들과 한 배를 탄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 
이렇듯 여성이 ‘자발적 성매매’에 동참했는가 강제로 연행을 당했는가의 문제가 민족적으로 구별되는데, 일본인 여성은 자발적 성매매자요 타락한 여성으로, 조선인 여성은 순결하지만 업자에게 속아서 온 누이임이 강조된다. 이렇게 연약한 누이이기 에 영화에서 순이는 처음으로 강간을 당한 후 병원신세를 질 정도로 크게 앓는다. 다른 조선인 ‘위안부’도 첫 강간을 겪고 혀를 물고 자살을 하려고 하거나, 계속해서 성관계를 거부하여 고문을 당하는 애국투사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성관계를 강 요하는 일본인 군인의 얼굴에 침을 뱉는 조선인 ‘위안부’ 여성들의 저항도 강하게 부각된다. 이러한 장면은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 남성의 행위에 저항했다는 의미로 도 해석되지만, 반대로 죽음을 당할 정도로의 심한 저항을 하지 않은 여성은 동정을 받을 수 없다는 강간에 대한 남성주의적 시각이 나타난 것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1991년작 영화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에는 ‘위안부’ 영화로서는 최초로 “총칼 을 든 군인”이 한복을 입은 조선인 소녀를 강제로 징집해가는 이미지가 등장하고 일본의 잔혹한 행위는 더욱 강조 된다. 현재에는 ‘위안부’ 재현물에는 의례히 등장하 는 이러한 문제적 시각 이미지는 이 영화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다. 윤명 숙은 현재 ‘위안부’를 다룬 재현물에서 총칼을 든 일본군이 조선인 여성을 데려가는 것이 문제적인 이유가 이러한 물리적 동원에서 “친일세력”의 역할이 비가시화 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 그러나 ‘총칼을 든 일본군’이 재현이 문제적인 이유는 친 일/반일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동원’의 과정이 일본 군대의 물리적 위협을 통해서 만 이루어졌다는 이미지로 고정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딸을 파는 아버지와 같은 가부장적 한국사회의 문제나 직업 사기 등의 다양한 측면 은 비가시화 된다. 
일본인과 조선인을 ‘적’과 ‘우리’로 분리하는 방식도 훨씬 더 강화된다. 예를 들어 1985년 <여자정신대>에서는 순이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는 일본인 병사가 등장하 지만,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에는 이 일본인 병사가 삭제되고, 이 역할을 조선인 병사(독고영재 분)가 맡는다. 일본인 군사와 다르게 조선인 병사는 잔혹한 행위를 하는데 거부감을 갖고, 조선인 ‘위안부’와는 진실된 사랑을 하게 된다. 반면 일본인 병사와의 성관계를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일본병사는 거의 성적 변태로 그려진다. 1975년작 <여자정신대> 보다 훨씬 더 완전하게 포르노그라피적으로 구성된 이 영화 에서 대부분의 성관계는 칼로 위협되고,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것으로 재현된다. 이 와는 다르게 조선인 병사와 ‘위안부’의 성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은 로맨틱한 음악과 뽀얀 조명으로 처리하여, 완전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로 전시하는 완벽한 대조 를 보인다. 앞선 영화에서도 이러한 장면들이 연출되기는 하였지만, 영화는 끝까지 일본인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는 여성과 이를 죽어가며 안타깝게 바라보는 조선인 병사를 교차 편집하며, 조선인 사이의 사랑을 비극의 극단에 있는 사랑으로 완결시 킨다. 외국인에게 정절을 빼앗긴 여성을 순전하게 사랑하는 자아로 그려내는 한국 남성의 환상이 투영된 장면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일본 군인의 변태적인 행동은 ‘위안부’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적에 대한 잔혹행위로도 드러나는데, 이러한 변태적이고 인륜에 반하는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일본 군사에 대해 ‘위안부’ 여 성들은 칼을 들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고문을 당하는데, 이러한 장면은 1985 년의 <여자정신대>와 흡사하면서도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2) 강간의 전시
1991년 김학순의 증언으로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자 ‘위안부’를 소재로한 대중 물은 더욱 늘어난다. 1991년작 지영호 감독의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는 1985년 <여자정신대>와 마찬가지로 윤정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마닐라 로케이션까지 감행하여 흥행에도 상당히 성공했던 영화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이 논문의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다큐멘타리를 통하여 ‘위안부’의 삶과 목소 리가 영상을 통해 재현되었다. 그러나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가 상영된 1990년 대 초반만 하더라도 ‘위안부’ 문제는 선정적인 소재로 더 많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1977년 소설을 기반으로하여 만들어져 1990년 초반을 강타했던 드라마 <여명의 눈 동자> 1회는 채시라가 분한 여주인공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을 당하는 장면이 파격적 으로 연출되었다. 물론, 이 드라마를 통해서 ‘위안부’에 관한 인식이 대중에기 파격
 
적으로 확산되었다고는 하나, 드 라마 상에 드러나는 ‘위안부’의 강 간 장면은 지나치게 선정적이었
다. 
85년작 <여자정신대>와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가 가장 문제 적인 부분도 ‘위안부’ 여성의 강간 을 재현하는 방식이다. <여자정신 대>에서는 영화의 내러티브가 발 전하면서 ‘위안부’ 여성들이 일본
 
<그림 7>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의 한 장면. 이 장면에서는 여성의 나신을 아무런 이유없이 수 없이 늘어놓아 전시한다.
 
인들의 요구에 응하게 되는 시점이 생긴다. 이 때 이들이 일본군의 성관계 요구에 응하는 이유는 군사 정보를 빼내어 탈출하기 위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군과 성관계를 갖는 장면은 적나라하고 과도하고 길게 나타난다. 정보를 빼내거나 일본인 병사들에게 열심히 싸울 필요가 없다고 속 삭이는 장면, 그리고 이를 위해 각각의 ‘위안부’들이 ‘애국적 역할’을 하는 동안 영화 에는 신나는 군가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며 이들의 성관계는 일본에 대한 싸움인 것처 럼 위장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위안부’와 일본인들의 성관계만이 경쾌한 음악과 함께 전시되는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이는 명백히, 남성 관객의 시각적 쾌락을 위해 만들어진 장면이라고 밖에 해석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순수한 피해자’든 ‘타락한 여인’든 관계없이 여성의 신체의 노출과 성폭력의 장면은 남성 관객의 시각적 쾌락 (visual pleasure)을 위한 스펙타클로 재현되며 ) 이를 지켜보는 남성의 관음증적 욕 망만을 드러낸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에서도 군에 동원된 ‘위안부’들의 신체검사 장면은 아 무런 이유 없이 수십 명의 여성의 나체를 카메라가 훑고 지나가고, 고문하는 여성의 나신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며, 명백히 그 중심이 ‘위안부’ 여성이 성적으로 학대당 하는 장면을 즐기려는 남성 관객에게 맞추어져 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 지영호가 
<고금소총>이라는 에로영화를 만든 사람이고, 제작자 문태선도 80년대 내내 <빨간 앵두, 1982>, <애마부인, 1982>, <어우동, 1985> 등에 자주 출연하던 배우이자 제작 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영화가 이런 잔혹행위를 보여주는 것이 일제에 대 한 반감을 키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포르노그래피에서 가학적 성을 다루는 방식에 더욱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정확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진실은 방 안에서 일어난다.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쓰지 않으면 고통의 아픔을 알 수 없다’”라는 이유로 “위안소라는 방의 내부를 절시(窃視)하는 것처럼 그 안에서 반복되는 성폭행 장면을 묘사하는 것”을 리얼리즘에 대한 욕망일 수 있는가를 묻는 소명선의 질문은 중요해 보인다. ) 야마시타 영애는 ‘위안부’를 둘러싼 전후의 담론이 남성중심의 추억이나 오락 속에서 소비, 재생산 되었으며, 따 라서 “일본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지 시작하자마자 일본인 남성은 병사가 아닌 일 반인으로서 타이완이 한국 등으로 매춘 관광에 나섰다”고 말하고 있다. ) 마찬가지 관점에서, 한국 남성들은 겉으로는 일제의 잔혹행위에 순결을 잃은 조선의 ‘위안부’ 에 대한 동정심이나 반일감정을 앞세워 영화를 만들었지만, 결국 이러한 포르노그래 피적 영화를 만들어서 소비하고, 여성의 성에 대한 침해는 타민족에 의해서만 일어 났다는 허구적 인식을 공유한다. 결국 조선인 여성에 대한 과도한 순수성을 부과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이들을 지키고자 했던 가부장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사랑이 있 는 순수한 남성들로 재현함으로써, 자신들이 빼앗긴 여성에 대한 박탈감을 상쇄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들이 자신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나갈 사회 구성원이 아니라, 그렇게 처참히 죽어간 여성으로 기억케 함으로서, 최소한 가부장으로서 여성을 ‘지 키지 않았던’ 책임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부장성은 위안부 자손의 순혈성을 의심하는 극도의 남성 불안으로 드러나고 이를 봉합할 새로 운 내러티브를 요구한다. 
3) 성스러운 어머니와 안도하는 순혈 아들
 
사회평론 3월호에 게재된 <정신대, 영원한 십자가>는 반갑게 읽었습니다…그러나 그 글을 쓴 기자는 혹시 근로정신대와 종군위안부를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오는 피해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그들이 정신대로 동원되었다는 사실하나만으로 종군 위안부로 인식된다면 그들의 가정은 어떻게 될까요?....정신대와 종군위안부는 제도적 으로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양지는 엄격히 구별되어 이해되어야 합니다.”66)
위 글은 경제학자 안병직이 1992년도에 <사회평론>이라는 잡지에 실은 글의 일
부이다. 김학순의 증언 이후 ‘위안부(당시는 정신대로 통칭되서 불림)’라는 표현을 사람들이 잘못 쓰고 있음을 지적한 글이다. 글의 요지는 무엇보다도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한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근로정신대로 갔던 사 람들이 종군위안부로 오해 받았을 때 그들의 가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
다. 이 말을 다시 뒤짚어 생각하면, 종군위안부로 살았던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서는 곤란하다는 말과 동일하다. 이러한 인식은 단순히 안병직이라는 남성 엘리트의 사고 일 뿐만 아니라, 당시에 ‘위안부’ 문제가 여전히 어떤 사회적 취급을 받고 있었는지 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위안부’는 오염된 여성이기 에 ‘정상’ 여성과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1985년작 <여자정신대>의 설정 중 조금 특이한 부분에 주목 하게 된다. 이 영화는 윤정모의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를 기본 설정으로 하고 있 지만 중간에 <작부이야기>의 설정 일부를 차용하는 간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보 인다. 여기에는 1975년작 <여자정신대>에서 조차 보이지 않았던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병사의 연애관계가 그려진다. 주인공인 순이에게 동정적인 시선을 갖는 일본 인 병사 마츠모토(영화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의 남주인공이 마츠모토인 것은 우연인지 모르겠다)는 윤정모의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영화에는 등장한다. 이 일 본인 병사는 성관계를 갖지 않고 순이와 대화만 하는 ‘소년’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는데, 그는 “그들(다른 일본인)은 짐승이야. 나는 아니야. 난 달라요.”라고 말하며, 순이와 서로 좋은 감정을 갖게 된다. 그러자 순이는 갑자기 성철에게 남자로서의 호 감을 느끼며 유혹을 한다. 좀처럼 순이와 성관계를 갖지 않으려는 마츠모토에게 순 이는 “제가 못생겨서 그래요?”라며 다가간다. 이에 마츠모토는 “난 아직 여자와 관 계를 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두려워요...죽은 누나와 너무 닮아서..내 마음속에 당신
66) 안병직,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구분해야」, 사회평론 4월호, 1992.
은 고귀하고 깨끗한 성녀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에 순이는 속으로 “왜 나는 이 남자를 만족하게 못해주지? 만약 그가 죽는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라고 독백하 며, 이 남성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관계를 갖게 된다. 이러한 설정은 스즈키 세이준의 <작부이야기>에 나오는 하루미와 같이 유혹적인 여성이 모습이며, 동시에 일본의 전 쟁기간 동안 일본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남자 아이를 안은 모성상” 바로 그것이
다. )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이미지 속에서, 조선인 ‘위안부’는 ‘범하여진 여성’임과 동시에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한 성모자로 재현된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결과적으로는 이는 한국의 가부장성에 균열을 낳는다. 조선인 여성의 외국인 에 의한 순결의 파손은 동시에 한국 남성의 가부장의 허약함을 드러내며, 조선의 여 성이 일본인 병사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는 이러한 남성 불안이 ‘혼혈’에 대한 두려움의 서
사로 나타난다. 소설의 주인공 배문하는 아버지로부터 냉대를 당하는데, 그 이유를 모른다. 다만 자신이 “쪽바리”의 자식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불안해한다. “도대체 피라는 게 뭐냐. 피가 무엇을 결정한단 말인가. 나를 결 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두뇌일 뿐이다. 내가 37년간 길들여져 온 정서와 습관, 그것이 곧 내 존재의 설명서다.”라는 말로 계속해서 스스로를 위안해보지만 불안을 떨쳐낼 수가 없다. 이러한 불안은 자신이 ‘혼혈’일 수 있다는 순수하지 못한 자신의 피에 대한 불안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혹시라도 일본인에게 정절을 잃은 ‘위안부’ 일 가능성을 생각해볼 때 오는 불안인 것이다. 이러한 불안은 배문하 뿐만 아니라 아버지인 배광수에게도 상시적으로 존재한다. 전시에는 전장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 해준 ‘위안부’ 순이에게 의지하였지만, 막상 해방 이후 한국사회로 돌아왔을 때 그는 순이에 대해 이유모를 화가 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순이. 내가 왜 자꾸 화가 나는지 그 문제를 한번 깊이 생각해봤는데 말야. 그건 우리 고향 처녀들이 갖고 있는 질박하고 수수한 미가 당신에겐 없기 때문에…” )
결국 순이가 일본인에게 정절을 빼앗기고, ‘위안부’ 생활을 하여 “질박하고 수수
한 미”를 잃어버린 여성이기 때문에, 그녀는 더 이상 그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쟁 상황에서는 사랑의 대상이 되었던 순이가 포스트-콜로 니얼의 상황에서는 부인(denial)된다.
순이의 아들 배문하는 어머니가 ‘위안부’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입을 타격은 어 머니뿐만 아니라 혼혈의 가능성이 있는 자신의 존재마저도 위태롭다고 느끼며, 자신 의 근원을 확인하고자 어머니를 찾아가 과거를 묻는다. 결론적으로 그는 어머니의 입을 통해서 자신이 일본인의 자식이 아니라 아버지 배광수의 아들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 순간 그는 “나는 어머니의 손을 끌어 잡았다. 당신이 옳았어요. 어머니. 어 머닌 나를 낳고부터 배문하로 키웠을 테지만 나는 이제야 막 배광수이 아들 배문하 로 완성되었어요”라고 외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출생이 조선인임이 확실해지자 불 안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아들의 ‘안심’은 한국 남성사회의 가부장성이 ‘오염된’ ‘위안부’ 여성에 의해 위태롭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안도이며, ‘순수 혈통’을 유지했다는 (비겁한) 자랑인 것이다.
1985년 <여자정신대>는 윤정모의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가 원작이지만, 원작 과는 달리 배병수의 어머니는 이미 죽고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부터 ‘쪽바리 새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배문하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정신대에 끌려갔다가 대만에 살고 있는 ‘위안부’를 만 나러 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머니가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준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한국에 돌아와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다가, 어머니가 임신을 하자 문제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버지 배광수가 아이의 순수성에 대해서 의심하면서, 둘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어머니의 친구 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듣고, 배민수는 자신이 배광수의 아들이라는 확인을 받은 후 아들은 죽은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어머니 저는 이제야 배왕수씨의 아 들로 완성되었습니다. …어머님의 증언을 실려드리려고 합니다. 어머님은 누가 뭐래 도 나의 어머니였다고. 한국의 자랑스런 여자였다고.” 이 말을 통해 어머니는 비로서 “자랑스러운 여자”의 위치로 격상된다. 어머니가 ‘혼혈’을 낳지 않은 ‘성모자’로 새로 운 민족국가 안에서 위치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어머니가 이미 죽은 것으로 처리하는 것 또한 이들을 이미 죽은, 과거에 묻힌 여인으로만 ‘기억’하고자 했던 의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991년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에서는 아예 조선인 병사와 ‘위안부’의 해방 후 후일담은 존재하지 않는 다. 이 영화에서는 조선인 병사가 ‘위안부’ 여성이 일본인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을 목 격하고 둘의 눈이 마주친 채 죽어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렇듯 전쟁에서 이들의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것은 이들이 아직도 살아있을 가능성을 부인하고, 그렇게 되 었을 때 생길 수 있는 ‘혼혈’의 위태로움을 남성-민족주의적 국가 이야기 안에서 미리 제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안부’ 여성에 대한 기억은 이렇게 식민지 과거에 일어났던 일로 맺음이 되고, ‘그 일’은 과거에 고정되는 것이다. 이는 ‘위안부’에 대한 완전한 망각의 강요이자, ‘망각’으로만 이들을 기억하려한 한국 가부 장사회의 남성-민족주의적 집단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6. 나가는 글
현재 ‘위안부’를 기념하고자 한 <전쟁과 여성인권 기념관>은 ‘독립유공자’들로만 구성된 독립공원에서 배제되어 서대문구의 매우 외진 곳에 지어졌다. 아직도 남성적 민족주의가 득세하는 상황에서 ‘위안부’들의 투쟁은 먼저 남성 중심적 헤게모니적 민족주의와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 이렇듯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의 과도한 남 성-민족주의 속에서 ‘위안부’의 문제를 여성과 인권의 ‘글로벌’한 자장에서 지속하 며 한국 디아스포라 그룹과의 ‘피해자 의식’을 연대해 나가는 것은 이들의 투쟁이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전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녀상’의 제작이나 ‘위안부’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은 상당히 문제적인 부분이 많다. 특히 민족 주의적 남성의 시각이 그려냈던 ‘순결한 피해자’의 형상이 과도하게 드러나고 이러 한 순결이 일본인 남성의 ‘총칼’에 의해 짓밟혔다는 단순한 구도화는 ‘위안부’ 역사 가 가지고 있는 복잡한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화 한다. 물론 이미지가 작가의 의도대 로 읽힐 것이라고 가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위안부’를 어떻게 재현하고 기억할 것인 가의 문제는 보다 섬세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위안부’ 문제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이에 관한 심각한 연구들이 아직까지도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우에노 치즈코에 따르면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에 일본 병사들의 자비 출판을 포함한 공식, 비공식 문서가 3만여종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문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들은 아주 최근에서야 연구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는데, 우에노 치즈코는 이를 두고 일본이 전시강간이라는 첫 번째 범죄와 이를 망각해온 두 번째 범죄를 저지르는 “현재의 범죄”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이러한 현상은 일본 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2016년 한-일 협상 이후로 ‘위안부’ 문제는 더욱 뜨겁게 정치 문제화 되고 있지만, 한국 사회가 1945년 이후 이 문제를 얼마나 황급히 덮어왔고, 잊으려고 했던 로컬의 기억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가 이루 어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2004년 이승연 화보집 사건이나 김구라의 “정신대는 창 녀”라는 막말 사건 등이 보여주듯이 “성의 상품화 시장에서 남성독자를 만족시킬 것 이라는 상품 가치”로 ‘위안부’를 바라보는 “한국 남성의 본심”은 ) 아직까지도 지속 되고 있다.
이 논문은 ‘위안부’ 문제가 얼마나 남성중심의 가부장제에 의해 잊혀지기를 강요 받았는지를 1945년 이후의 대중서사와 영화에 재현된 ‘위안부’의 모습을 통하여 추 적하였다. 이 추적을 통하여 1945년 이후 ‘위안부’에 대한 기억이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한국과 일본 남성이 모두 ‘사용자’로 가지고 있었던 가학적 지위를 이용 하여 공모하여 왔음을 밝혔다. 이러한 구도 아래에서 여성의 고통과 트라우마는 남 성 관객에 의해 성적 대상으로 소비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다무라 다이지 로의 소설 <춘부전>에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 <작부이야기> 에서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성적 타자화와 이분법적 여성상은 ‘위안부’를 소재로 한 한국의 대중영화에 참조-공모점이 되었다. 순결한 희생자나 순수한 사랑을 간직한 ‘위안부’는 동정을 유발하는 순박하고 정결한 누이로, 한국 남성은 보호자와 순수한 사랑으로 화답하는 가부장의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또한 ‘위안부’ 여성을 전장에서 죽어 없어진 순수한 피해자로 재현하거나, 일본 제국주의와 남성에게 저항하는 애국 여성으로 재현함으로써, 이러한 구조에서 벗어한 ‘위안부’의 존재는 비가시화 되었
다. 
독립공원에 ‘위안부’ 기념관을 만들고자 했던 시도도, 결국은 한국사회의 남성적 
가부장주의와 경쟁하는 가운데, ‘위안부’ 운동이 민족주의의 지배적인 기억으로의 편 입되고자 했던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구도 속에서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수많은 ‘위안부 재현’들이 과거의 남성-가부장-민족주의적 재현의 방식을 상당수 채택하고 있다는 점은 심각하게 재고되어야 할 일이다. 단순 화된 이미지가 만들어질수록 ‘위안부’의 기억은 잊혀진다. 잊어왔던 기억의 로컬리티 를 더욱 세밀하게 찾아내고, 식민주의, 하위주체,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권, 남성중심 주의의 복잡한 그림 속에서 재현의 정치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대안을 고민함으로 서, 기억하되 잊지 않는 ‘기억의 방식’들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투고일 17.10.08 심사완료일 17.10.27 게재확정일 17.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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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mdb.or.kr/column/masterpiece_list_view_new.asp?choice_seqno=170
The Representations of ‘Comfort Women’ in 
Pre-1990s South Korean Popular Cinema and the 
Politics of Memory
73)
Kim Chung-kang*
In the 1990s, beginning from the first testimony of Kim Hak-soon who was mobilized as a sex slave for the Japanese imperial army during the Asia-Pacific War, the issue of ‘comfort women’ have become the most ‘unresolved’ history between Korea and Japan. While the previously unrecorded testimonials of former comfort women have enlivened the academic discourses of Japanese colonialism, war crime, feminism and subaltern studies, bringing them into conversation, they also ignited the controversies over the politics of ‘history and memory.’ On the one hand, some (often) Japanese historians emphasize the ‘fact’ in historical writing that heavily relying on conventional historical sources, which minimized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memories’ of comfort women. On the other hand, other (mostly feminist) scholars take more careful approaches arguing that history is always ‘situational,’ and testimonial process itself reveals not just ‘fact’ of the past but signifies the history of ‘the present.’ While still precarious how to integrate memory into history, many realize that the conventional historical sources have restricted the historical writing within the realm of ‘official’ history, and ‘private memory’ could challenge official history, and make the history retold.
In the course of historical ‘retelling,’ the most notable was the rise of small budge independent filmmakings. Starting with serial documentary of Nazûn moksori 1, 2, 3 
 
* Hanyang University
(The Murmur, 1995, 1997, 1999) by Pyŏn Yŏng-ju, these films functioned to deliver the ‘reality’ or the ‘fact’ of the comfort women issues by authenticating and visually documenting the ‘memory’ of comfort women. The visual representations of these independent documentary films provided the present images of comfort women provocatively revealing the traumatic histories embedded in these women’s bodies. ‘Minor’ filmmaking, in this sense, was a significant medium bringing private memory into history, and relocate ‘marginal voice’ into a central political realm. However, it is should be also noted that there had been popular and dominant representations of comfort women suggesting strikingly different images before this film movement. Mostly produced before 1990s, some popular historical films (sagûk) surprisingly present graphical gaze of comfort women’s bodies and sexual violence, and erase the voices of comfort women in the movie, which displays the reasons for the silence of comfort women issue prior to 1990s. 
This paper, thus, explores the representations of ‘comfort women’ in South Korean popular cinema produced from the 1960s to the early 1990s. Considering the fact that there are few public records of the comfort women remaining before 1990s, popular films’ representations of comfort women in pre-1990s period are small outlets revealing the historical perceptions of comfort women, and explain the ways in which the history of comfort women had been silenced until 1990s. This paper particularly focuses on three films that mainly deal with comfort women issue: Sarûbin kang e noûl i chin-da (Sunset in the River Sarûbin, 1965), Yŏja chŏngsindae 1, 2(The Comfort Women, 1974, 1985) and Emi irûm ûn chosenppi yŏtta (Your Ma's Name Was Chosŏn Whore, 1991). The aim of this paper, however, is not on discovering historical ‘fact’ of the comfort women in pre-1990s period, but on critically examining how ‘major’ films marginalized the comfort women’s image in given historical time and contributed to create a collective memory of ‘comfort women’ as a national shame in male-dominant South Korean society. 
Keywords: representation of comfort women, popular cinema, Sunset in the 
Rever Sarûbin, The Comfort Women, Your Ma's Name Was Chosŏn Whore, The Story of a Prostitute, victimhood nationalism, male-centrism, politics of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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