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8

기자 62년···김영희 대기자, 그가 대한민국 외교의 역사였다 | 중앙일보

기자 62년···김영희 대기자, 그가 대한민국 외교의 역사였다 | 중앙일보



기자 62년···김영희 대기자, 그가 대한민국 외교의 역사였다
중앙일보


입력 2020.01.15 
김수정 기자 구독


김영희 대기자가 1997년 일본 요코스카 기지에서 미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에 탑승해 취재 중이다. [중앙포토]

고인은 1958년 고졸 학력으로 한국일보 수습기자가 되면서 언론계에 첫 발을 디뎠다. 10대 후반 결핵성 관절염 탓에 한동안 신세를 졌던 부산의 스웨덴 구호병원에서 영어를 본격적으로 익혔다.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학력 제한이 없던 한국일보에 수습기자로 합격했다.

65년 7월 중앙일보 창간 요원으로 스카웃돼 중앙일보 외신부 기자로 옮겨오면서 그의 인생은 변곡점을 맞게 된다. 중앙일보 창간호(65년 9월 22일자)에 영국의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으면서 그는 국제기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후 5년만인 70년 33세의 나이로 외신부장이 된다. 이듬해 워싱턴특파원으로 부임, 7년동안 활약했다. 이어 편집국 부국장, 논설위원을 거쳐 83년 11월 중앙일보 최초의 외신부 기자 출신 편집국장이 된다. 이후 편집국을 벗어나 문화사업담당 이사와 상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인, 출판본부장, 삼성경제연구소 등을 옮겨다니며 7년을 보냈다.

고인은 95년 3월 국제 담당 대기자로 임명돼 중앙일보로 컴백하면서 제2의 인생을 맞는다. 98년 6월부터 ‘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란 주 1회 고정칼럼 연재를 시작하면서 그는 국제 분야 대표 논객 이자 칼럼니스트로 필명을 날리게 된다. “주장은 실증적으로, 비판은 대안을 갖고”를 입버릇처럼 말해온 그는 새로운 정보, 통찰력, 대안 제시, 유려한 문장을 잘 쓴 칼럼의 기준으로 보았다.


1965년 중앙일보 창간호에 실린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와의 인터뷰 모습. 왼쪽이 김영희 대기자. [중앙포토]

고인은 팩트를 뒷받침하는 사실을 찾기 위한 취재도 한 순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실증의 근거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누가 됐든 어디에 있든 찾아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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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글은 아무리 오래 전에 썼어도 화덕에서 방금 갓 구워낸 빵처럼 커런트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그 비결을 그는 독서에서 찾았다. 고인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손에 책을 손에 들고 있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다. 그 중엔 한국어로 된 책보다는 영어, 일어, 독일어로 된 책이 더 많았다.

그는 70세가 넘어서 1년 간 ‘앙티 외디푸스’ 등 질 들뢰즈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혼자 읽기 어려워 이정우 교수가 운영하는 ‘철학 아카데미’를 두 학기나 다닐 정도였다. 영어판과 일본어판, 한국어판을 비교하며 읽기도 했다. 그의 칼럼에서 자주 등장한 차이와 반복, 노마드, 횡단, 주변부 등의 개념은 그 독서의 산물이었다. 그는 후배 기자들에게 문ㆍ사ㆍ철 공부, 발품, 인맥 등 세 가지를 늘 당부했다.

현역 기자 50주년을 맞아 중앙일보 사보와 한 인터뷰에서 “퇴근 후 밤 11시까지의 시간을 선용하고, 술을 마시더라도 고담준론도 좀 해서 지적인 자극을 주고 받고, 지적 재충전에 힘쓰자”고 후배들에게 말했다.


김영희 대기자가 2001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를 인터뷰하고 있다. [중앙포토]

수십년 어린 후배 기자들도 그를 어려워하지 않고 기사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고인의 따뜻함에서 비롯된 미덕이었다. '편집국 최고참 기자'는 그가 무엇보다 자랑스러워하는 타이틀이었다. 전화를 잘못받은 수습기자와 스스럼 없이 함께 찍은 셀카가 노보에 실렸을 때 더없이 기뻐했던 고인이었다.

고인은 한반도 문제와 한국의 주요 외교 현안에 대해 거침없이 견해를 펼쳤고, 정책 입안에도 시사점을 줬다. 한ㆍ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2015년 5월 미ㆍ중 간 갈등이 격화하는 가운데 역사수정주의를 꾀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손도 잡는 실용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 칼럼 ‘악마와 춤을’은 외교부 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칼럼 중 하나였다. 고인은 작고 불과 몇달 전에도 외교부 출입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정부의 대일 정책 기조 변화의 흐름을 확인하는 등 끝까지 한국 외교에 대한 걱정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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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로서 고인의 열정은 갓 입사한 신입 기자의 그것을 몇배 넘어섰다. 핵심을 찌르는 짧고 명료한 질문이 고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어떤 언어로 인터뷰를 하든, 몇 시간을 인터뷰를 하든 항상 전문을 원문 스크립트로 작성해 그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했다. 정확한 내용 전달을 위해서였다. 그간 부임했던 주한 미 대사들을 처음으로 인터뷰하는 언론인도 당연히 고인이었다. 고인이 한 인터뷰 기사는 항상 경어체로 작성됐고, 꼭 "감사합니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됐다. 기자로서 인터뷰이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그렇게 기사에 담았다.


2003년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와의 인터뷰. 왼쪽이 김영희 대기자. [중앙 포토]

그의 롤모델은 미국 언론인 월터 리프먼이었다. ‘키케로 이후 서양이 낳은 최고의 논객’이라며 리프먼을 흠모한 그는 “리프먼이 쓴 책이라면 뭐든지 찾아서 몇 번씩 읽고 또 읽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리프먼을 사표로 삼았던 김영희는 그 자신이 한국 후배 기자들의 롤모델이 되어 영면에 들었다. 타계하기 며칠 전 찾아간 지인에게 “다시 태어나도 기자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인은 바쁜 와중에도 ‘워싱턴을 움직인 한국인들’ ‘페레스트로이카 소련기행’ ‘마키아벨리의 충고’ ‘이 사람아, 공부해’ 등 여러 권의 저서와 평전을 남겼다. ‘소설 하멜’도 그의 작품이다. 장례는 중앙일보 사우회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0호. 발인 18일.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ㆍ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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