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전향적 대북정책 필요
김영희 /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
통일경제 2014. 제2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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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의 현주소
결론부터 말하면 내년 상반기 남북관계는 개선될 전망이 밝기 보다는 어두운채
일대 전환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실세 3인방인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
최용해 노동당 비서, 김양건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가 지난 해 10월 인천 아시안
게임 폐막식에 불쑥 참석할 때만 해도 김정은 제1위원장의 통 큰 결단으로 남북관
계에 극적인 돌파구가 열리는구나 하는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대내적으로는 북한
실세 3인방 방문의 후속으로 열릴 예정이던 남북 고위급회담이 대북전단 살포 문
제로 무산된 데 이어 대외적으로는 유엔총회 제3위원회의 강도 높은 북한 인권 결
의안 채택으로 북한의 자세가 다시 호전적, 도발적으로 돌변하면서 새해 남북관계
는 시계 제로에 가까운 지경으로 후퇴해버렸다.
북한 인권 문제와 남북관계
유엔 총회 인권 결의안에 대한 북한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 히스테리에 가깝다.
찬성 111, 반대 19, 기권 55라는 압도적 표차가 평양 당국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유엔 표결 전에 결의안 채택을 막아보려고 그들 나름의
최선을 다 했다. 이수용 외상이 유엔을 무대로 로비를 벌이면서 북한 인권문제를
국제사회와 논의할 용의가 있다는 선까지 양보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북한 외교의
베테랑인 강석주 부총리는 유럽 4개국을 돌면서 미소외교를 펼쳤다. 북한에 억류
되어있던 미국인을 석방하는 용단도 내렸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로 돌아갔다.
그들이 겁을 먹은 것은 인권결의안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인권 유린의 최고
책임자인 김정은 제1위원장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도록 건의하는 것이
었다.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김정은 제1위원장을 위시한 북한 최고지도
자들이 실제로 ICC에 제소되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을 전망이지만, 김정은 체제를
떠받히고 있는 지도부로서는 그들의 최고 존엄이 국제사회에서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짓밟은 반인류 범죄혐의를 뒤집어쓰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힘
으로는 대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김정은 제1위원장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할 수단은 인권 결의
안을 거부하는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뿐이었다. 유엔 인권결의안 채택 5일 후인
23일 국방위원회는 인권 결의안“전면 거부, 전면 배격”의 성명을 발표했다. 국방
위원회 성명은 미국에 대해서는 대조선 인권 소동에 광분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남한에 대해서는 이 땅에 핵전쟁이 터지면 청와대는 안전하리라 생각하는가 라는
강도 높은 대납위협을 지속하였다.
한반도 상황이 2014년 마지막 한 달 사이에 이렇게 후퇴한 채 2015년 새해를
맞이하게 된 것은 안타깝고도 불길하다. 왜 안타까운가? 그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
이 야심적으로 추진하는 경제개혁과 특구 사업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
이다. 왜 불길한가? 우리 국회가 북한 인권법을 제정하고, 북한 인권조사 사무소를
서울이나 인천에 설치하면 남북대화 재개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도 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은 제4차 핵실험의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북한이 한 번
더 핵실험을 하면 당분간은 남북, 북미, 북중, 북일 대화의 문은 굳게 닫힐 수밖에 없
다. 국제사회에서 북한은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
안타까운 이유는 더 있다. 북중관계가 소원하여 러시아로 눈을 돌린 북한이
지난 해 11월 말 최용해를 러시아에 특사로 보낸 것을 계기로 북러관계가 밀월을
맞을 전망이다. 북한이 기댈 수밖에 없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대립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 진출에 적극성을 보인다. 북한은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의 유일
하고도 유용한 교두보 역할을 한다. 그 구체적인 사업이 나진-하산 경제협력 프로
젝트다. 한국은 이 프로젝트의 러시아 지분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해 말
러시아산 석탄 4만5천 톤이 하산과 나진을 경유하여 포항에 입항한 것은 정문으로
북한에 못 들어가는 한국이 북한의 뒷문을 노크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류길재 통일부장관도 나산-하산 프로젝트는 사실상 5.24 조치의 부분 해제 성격을
갖는다고 해석했다. 지난 해 12월 초 필자가 모스크바에서 만난 러시아 외교 당국
자, 북러 경제협력 프로젝트 최고 책임자, 남북한을 상대로 사업을 하는 기업인은
북러 경협과 남북러 3각 경제협력에 대한 기대와 열정이 높고 뜨거웠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인권위기를 안고 새해를 맞이하는 상황에서는 관계개선과
복원을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잡겠다는 연목구어(緣木求魚)에 가깝다.
왼손에 핵과 미사일을, 오른손에 경제개혁 프로젝트를 들고 있는 김정은 제1위원
장에게 남은 선택은 오른손의 경제개혁을 내리고 왼손의 핵과 미사일을 높이 드는
것일 뿐이다. 그 대목에 4차 핵실험의 위험이 숨어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대내
권력기반 공고화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북한 권력 집단의 강경파와
온건파의 균형 위에서 유일 영도체제를 굳혀야 한다. 중앙일보 동서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고수석 박사는 지난 해 12월7일자 중앙 Sunday에 주목할 만한 글을
실었다. 그에 따르면 노동당 조직지도부가 김정은 제1위원장의 가장 버거운 세력
이다. 장성택 처형도 그들의 주도로 단행되었다. 그들은 최용해까지 권력의 핵심
에서 제거하려고 했지만 김정은 제1위원장의 반대로 최용해는 군 총정치국장 자리
만 내 놓고 당 비서직은 유지하고 있다. 그런 최용해가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
로 러시아를 방문하여 푸틴 대통령을 면담하고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까지 전달
한 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과 조직지도부의 타협의 산물이라는 것이 고수석의 분석
이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아직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대남,
대외정책과 전략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인권파동으로 북한이
궁지에 몰리면 조직지도부의 강경노선을 따를 수 밖에 없다.
남한에서도 생산적이고 전향적인 대북정책의 수행을 위해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인 입지가 강화되어야 한다. 대통령 최측근들의 엽기적인 권력투쟁이 횡행
하여 정국이 어지러우면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는 강경으로 흐르기 쉽다.
일반적으로도 외교는 국내정치의 연장이라고 하지만 남북관계야말로 남북 각각의
지도자의 정치적인 입지에 직접 좌우된다. 남북관계는 항상 일진일퇴를 거듭하면
서 앞으로 나갔다. 돌이킬 수 없는 위기 국면도 뜻하지 않은 사태, 남북한 어느 한쪽
지도자의 뜻밖의 결단으로 타개되어 왔다. 이번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북한 상황은 우리의 통제 밖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북한의 대화 노선파의
입지를 강화시켜 김정은 제1위원장이 실세 3인방을 인천 아시아 게임에 파견하는
것 같은 통 큰 결단을 내리게 간접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우리측에서도 대통
령이 통 큰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국회가 제정하는 인권법안을 최대한 포괄적인
내용으로 채워 북한의 반발을 최소화하고 동시에 5.24 조치의 해제와 금강산관광
재개의 수순을 밟을 필요가 있다. 의미가 애매모호한“진정성”을 보이라는 말만
되풀이해서는 돌파구를 찾을 수가 없다. 국민들이 겪는 생활경제의 어려움, 정치
판의 난맥, 청와대 주변에 넘치는 권력욕의 홍수로 인해 박근혜 대통령이 새해에도
창조적인 대북정책을 펴기는 어려울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든다. 정부가 구상하는
것으로 알려진 5.24 조치 해제와 이산가족 문제의 구조적인 해결을 주고받는
빅딜이 남북관계 개선의 작은 불씨로 남았다. 북미간에는 새해 벽두에 싱가포르에서
1.5 트랙 회동이 예정되어 있다.
남북한 빅딜과 북미간 1.5 트랙 만남이 의미 있는 결실을 맺을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희망이다. 남북관계 개선의 골든타임이 허망하게
우리를 피해 간다면 남북관계 개선은 다시 차기 정권의 과제로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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