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1
[기고/이영진 교수] 착한 사마리아 일본인, 나쁜 사마리아 한국인 - 펜앤드마이크
[기고/이영진 교수] 착한 사마리아 일본인, 나쁜 사마리아 한국인 - 펜앤드마이크
[기고/이영진 교수] 착한 사마리아 일본인, 나쁜 사마리아 한국인
이영진 교수
최초승인 2019.11.22
이영진 호서대 신학과 주임교수
사회적인 글에 기독교적인 주제를 꺼내 들면 종교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가로막기 십상이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종교뿐 아니라 사회개혁으로 통용되고 있듯이 한국 개신교의 형성기는 시기적으로 일제시대와 함께 하기에, ‘한국교회 역사’는 사실상 ‘한국 근현대사’와 동의어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가령 일제시대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사인(死因)인 신사참배 거부가 종교적 사안일 뿐이라면, 당시 전 인구의 2% 남짓했던 기독교인만을 제외한 모든 한국인이 신사참배로부터 무해한 친일파였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 논리는 오늘날 <백년전쟁>의 아류처럼 이승만·박정희 추종자만 아니면 모두 친일파가 아니라는 식의 일반화의 오류요, 현재는 물론 미래를 좀먹는 역사의식이 아닐 수 없다. 역사 교사들이 왜 그런 식으로 역사를 가르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주기철 목사 말고는 모조리 다 신사 참배한 친일파라는 식의 주술을 불어넣기 전에, 우찌무라 간조 같은 일본 기독교인도 신사참배 거부로 큰 불이익을 받았던 사실 또한 함께 알려줘야 한다. 우찌무라는 일찍이 1891년경에 일본에서 그런 일을 겪었지만, 1938년 오다 나리지는 한국인과 더불어 한국 내에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한 일본인이다. 목사이다. 일본경찰에 구속까지 되었다. 이런 사실도 다 함께 알려줘야 한다.
이 오다 나리지는 스무나흘 길을 걸어서 고난의 순례를 돌며 서툰 한국말로 선교하다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오인까지 받아 자국으로부터 많은 고초를 겪은 인물이다. 역사 교사들은 ‘창씨개명’만 가르쳤지, 이 오다 나리지처럼 ‘전영복’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개명해 살다간 일본인이 있다는 사실은 잘 가르치지 않는다.
한국에는 서양인 선교사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이미 1896년경 들어온 노리마쯔 마사야스라는 일본인 선교사도 있었다. 그가 알려지지 않은 것은 교파에 소속하지 않아서 일 뿐이다. 어떤 선교사보다 가난한 일생을 조선인과 함께 보냈으며, 아내는 33세의 이른 나이에 죽어 이 땅에 먼저 묻혔고 훗날 자신도 아내 묻힌 한국 땅에 함께 묻어 달라 유언한다. 우리의 역사 교사들은 잔혹했던 제암리교회 사건만 신랄하게 묘사하느라, 이들 노리마쯔 부부의 유골이 같은 지역인 수원에 묻혔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는다.
일제시대는 이와 같이 우리 역사 교사들이 단편적인 것만 가르쳐 준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합적인 사회였는데 역사 교사들은 특히나 다음과 같은 대목들은 알려주지 않는다.
당시는 경제적인 이유로 정치적인 이유로 이른 시기부터 만주나 시베리아 쪽으로 이주하는 한인들이 속출했던 시기이다. 교회가 이들을 대상으로 해당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지만 자생적으로 이념을 발전시킨 사회주의/공산주의자들도 북쪽으로 향하였다. 만주에는 감리교와 침례교가, 시베리아에는 감리교가, 산동성에는 장로교가 각각 목회자를 파송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항상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에 노출 되어 있었다.
이들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은 교회는 1925년경 ‘동아 기독교 교회’였다. 이곳에 파송된 윤학영 외 여러 신도가 살해당했다. 침례교회였던 이 교회는 얼마 안 있어 또 공격을 받아 김영국 목사와 김영진 장로 두 형제를 잃었다. 왜 죽일까. 공산당에 가입하라는 것이다. 거절하면 목사라고 죽이고 친일파라며 죽였다. 1932년에는 간도 지역의 교회가 공비 30여명의 공격을 받는다. <기독신보>에 따르면 공비들은 이들의 피부를 벗겨 죽였는가 하면 한 남성에게서는 고환도 빼갔다는 기막힌 기록을 남기고 있다(1932년 11월 9일자).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해외 동포 교회의 수난은 만주에 그치지 않았다. 시베리아 쪽에서도 공산당 가입을 거절하는 이유로 학살이 자행되었다.
어찌하여 헐벗고 불쌍한 해외 동포 교회들만 주공격 대상이 되어 이런 잔인한 학살에 노출되었을까? 그 위기의 상황에서 탈출에 성공한 몇몇 기독교인들이 본국으로 보내온 글을 보면 왜 그런지 짐작할 만하다.
배형식이라는 감리교 신도가 본국에 보내온 글이다.
“...공산당에 포위되었다가 얼마 후 일본군(日本軍) 토벌로 인하여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감리회보. 1933.4.10.)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했던 도인권 목사도 공비들로부터 구사일생 살아난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다.
“...오늘 내일...하고 기다리기를 어제더니 올해(1933년) 1월 27일에 일본군 토벌대가 구해줌으로써 비족(공산당)은 도망치고... 안도를 얻게 되었습니다... 황군(皇軍) 다까모도 헌병대장에게... 감사를 금치 못하여...”(감리회보. 1933.7.10.)
충격적인 기록이다. 독립운동하던 사람이 황군 헌병대장에게 감사를 하다니. 이는 한마디로 본국과 비교도 안 되는 만주, 시베리아 일대의 치안 부재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한말 해체된 조선군의 참령이었던 이동휘 같은 인물은 러시아 쪽을 돌며 ‘조선사회당’, ‘고려공산당’을 창설하는 등 비교적 고급정치 행위를 하고 다녔지만 상기와 같이 이념 추종자들은 교회를 거점으로 하는 동포 부락을 돌며 세력을 심고 넓히려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거기에 교회가 무참하게 짓밟히고 빼앗기고 희생당했던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독립군으로 자처하였을 것이다.
동포에게 짓밟혀 피부가 벗겨지고 고환이 잘려나가는 고문을 받는 것이 참혹한 현실일까, 민족의 숙적 일본군 헌병대장에게 감사를 금치 못하는 현실이 참혹했을까.
역사는 한 가지만을 말하는 장르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역사 교사들은 한 가지만을 강제했다. 그것은 아마도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사마리아’ 콤플렉스에 기인할 것인데, 우리 역사 교사들께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간과한다.
이 글의 제목이다. 즉, ‘착한 사마리아 일본인’이란 말은 사마리아와 같은 일본 국적을 가진 착한 사람이란 뜻이고, ‘나쁜 사마리아 한국인’이란 말은 사마리아와 같은 한국 국적을 가진 나쁜 사람이란 뜻이다. 줄여서 말하면 나쁜 사람은 한국인이어도 나쁘며, 착한 사람은 일본인이어도 착하다는 단순하고도 단순한 진리가 바로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역사의 텔로스라는 사실이다.
지소미아(GSOMIA)가 오늘로 종료라 하여 몇 자 적어 기록으로 남긴다.
이영진 호서대학교 신학과 주임교수
필자는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신학사(B.Th. 4년) 과정의 주임교수로 있으며, 저서로는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사용설명서>,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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