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4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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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

최근 수정 시각: 

1. 개요2. 사건 경과3. 범인4. 명칭 논란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84년 9월에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자교 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생 등 타 학교의 학생을 포함한 민간인 4명을 경찰의 프락치로 몰아서 납치 감금하고 물고문과 각목으로 폭행하는 등 고문을 가해서 피해자들의 인생을 망치게 한 사건이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달라.
"가해자들이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해서 따라갔다. 내가 프락치라고 몰아세웠다. 계속 아니라고 하니까 교련복으로 갈아입히고 눈을 가렸다. 그때부터 폭행이 시작됐다. 돌아가면서 몇 시간 씩 나를 폭행했다. 가해자들은 우발적인 사건이었다고 하는데 나를 감금한 장소 창문을 미리 신문지로 다 가려놨더라. 물이 담긴 세면대에 머리를 쳐 박거나, 바닥에 눕히고 주전자로 얼굴에 물을 붓는 등 물고문도 했다. 이 과정에서 치아가 부러지고 전치 8주 부상을 입었다. 고문에 못 이겨 내 군대시절 상관이 시켜서 왔다고 아무렇게나 말했다. 고문 도중 실신해 2일 만에 풀려났다. 이틀간 식사도 못했다. 풀려나기 직전에야 빵을 주더라. 당연히 먹지도 못했다. 병원에서도 한동안 혼자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사건 발생 후 각 대학에 피해자들이 오히려 잘못한 것처럼 대자보가 붙더라. 당시 저는 방송통신대 법학과 3학년에 다니며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방송통신대 학생들은 서울대 법대에서 수업을 받기도 했다. 레포트 작성을 위해 서울대 모 교수님에게 책을 빌리러 갔다가 붙잡혔다. 가해자들에게 그 교수님에게 확인해보라고 했다. 교수님이 내 신분을 확인해줬는데도 믿지 않고 폭행을 계속했다."
"폭행을 당한 후 대인기피증이 생겨 고시공부를 포기했다. 이후 구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후 보안원, 경비원 등으로 근무했다. 올해 만 64세인데 아직까지 결혼도 못했다. 다 그 사건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당한 일이라 후유증이 컸다. 사건 이후로도 제가 실제 프락치라는 음해를 계속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고 피해자 중에는 현재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사람까지 있다."
"나는 당시 누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눈을 가린 채 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사건의 전말을 몰랐다. 판결문에 따르면 유 이사장은 피해자 소지품을 뒤져 신분을 확인하는 등 직접 프락치 색출작업을 했다. 유 이사장은 피해자들을 신문하면서 '계속 다른 말을 하면 나중에 두고 보자'는 등 협박성 발언도 했다. 가해자들은 유 이사장 앞에서 피해자들을 폭행했다. 유 이사장은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으로 이들을 말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피해자 4명 중 가장 심하게 폭행을 당했다.
"당시 운동권 사람들이 전두환을 미워하지 않았나. 내가 전두환과 같은 전 씨라고 심하게 폭행했다. 정말 미개한 사고방식이었다."
"지난 1997년 유 이사장이 자기 책에서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는 명칭을 써서 소송을 걸었다. 피해자들은 프락치가 아니라 민간인들이었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아니라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이다. 판사가 합의를 권유하면서 유 이사장에게 사과하라고 하더라.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 이사장이 제게 사과했다. 진심어린 사과가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소송 때문에 유 이사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사과는 커녕 아는 체도 안하더라."
- 민간인 감금 폭행 사건의 피해자 전기동의 2019년 증언#-

2. 사건 경과[편집]

당시 사건을 다룬 기사. # # (경향신문, 1984. 10. 5. 10-11면)

매일경제 심재철 서울대프락치결...

피해자 4명은 각각 2일~6일간[1] 감금되어 각목으로 구타 당하고 물고문을 당했다. 피해자 4인 각각의 피해 기간 및 피해 내용에 대한 뉴스타운의 기사.

고문 피해자 중 한 명인 손현구는 모진 고문 끝에 자신이 프락치라고 말했으나, 나머지 3명은 끝까지 자신은 프락치가 아니라며 억울함을 주장하였다. 사건을 조사한 경찰과 법원은 피해자 4명이 프락치가 아니라고 판결하였다. #조선일보

3. 범인[편집]

납치, 감금, 고문 피해자들의 증언과 자료들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폭행자는 서울대 공과대학 학생회장 조현수, 서울대 학도호국단 총학생회장이었던 백태웅[2], 이정우[3]윤호중[4] 등 여러 명이다. 당시 서울대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 이었던 유시민은 직접 물리적 폭행을 한 혐의가 없고 폭행을 지시하지 않았으나 고문실 안에서 폭행을 방관하여 당시 함께 처벌받았다.

이 사건으로 유시민은 구속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이 끝나고 유시민이 재판정에서 구치소로 끌려갈때 방송카메라에 찍혔던 장면[5]이 유명하다. 끌려가던 유시민이 법원 건물쪽에 대고 "전대가리 깨져라"라고 외친 장면인데, 대부분 사람들은 "전대가리 개들아"[6]라고 외쳤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노무현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유시민이 2019년 4월 20일 KBS의 대화의 희열에 출연해서 저 장면이 영상자료로 나오고 기자(신지혜)가 질문하자 "사실 개들아가 아니라, 저때 제가 좀 화가 나서 전뭐뭐뭐 깨져라라고 말한 거였는데, 잘못 알려진거 같네요."고 말해서 진실이 공개되었다.[7]

유시민을 비롯한 가해자들은 아직까지도 피해자들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2006년 유시민이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되었을 때 피해자 정용범씨의 모친이 기자회견에서 “사과 한마디도 없다”며 “장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다른 피해자 전기동씨도 2019년 언론 인터뷰에서 "판사가 합의를 권유하면서 유 이사장에게 사과하라고 하더라.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 이사장이 제게 사과했다. 진심어린 사과가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소송 때문에 유 이사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사과는 커녕 아는 체도 안하더라."고 밝힌 바 있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되었을 당시 해당 사건이 재조명되어 큰 곤욕을 치룰 때도 "당시의 모든 서울대 학생을 대신해서라도 사과 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는 책임회피성 발언을 한 적이 있고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에도 사과는 커녕 피해자에 대한 언급 자체가 거의 없다.

4. 명칭 논란[편집]

이 사건은 예전엔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알려지기도 하였으나,, 고문당한 피해자들이 프락치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피해자 측은 그 명칭은 사건을 왜곡한다고 주장하며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으로 부르기를 원하고 있다. 관련 기사

5. 관련 문서[편집]

[1] 흔히 11일 동안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건이 발생한 총 기간이 11일인 것이고, 한번에 4명이 동시에 감금된 것이 아니라 각각 따로 붙잡혀 감금되었다.[2] 유시민과 비슷하게 징역 1년을 살고 풀려났다. 노동운동가 박노해, 당시 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조국, 나중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되는 은수미 등 200여명과 함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를 준비하고 운영했었다. 이 사노맹 사건으로 감옥에 갔지만, 김대중 정부에서 특별복권된 후 미국 유학을 떠났다. 현재는 미국 하와이대학교 로스쿨 교수로 재직중이며, 유엔의 각종 실무그룹에 인권문제 관련 자문을 하고 있다.[3] 서울대 수석 합격생 출신, 서울대 학도호국단 총학생장직무대행으로 나중에 학생회장이 된다. 열혈 386 운동권 인사이다. 이후 정계진출은 하지 않았다. 사법시험, 행정고시, 외무고시 모두 합격해서 일명 '고시 3관왕'으로 불리기도 했다.[4] 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21대 국회의원이자 법사위원장.[5] 당시 뉴스에서 그 부분이 방송되지는 않았고 그냥 방송국에 남아있던 걸 세월이 지나 민주화 이후 방송국이 공개했다.[6] 영상 속 음성은 "전대가리 깨들아"라고 들리는데, 흥분해서 개를 깨로 발음했다고들 생각했다. 당시 영상 속 유시민의 눈빛만 봐도 아주 크게 울분에 찬, 매우 사나운 표정이었기에 그 정도 흥분상태에 발음 문제는 당연하다고 일반인들 모두 생각했었다.[7] 이후 그해 연말인 2019년 12월 20일 주진우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 "아닌 밤중에 주진우"에 출연했을때도 다시 한번 깨져라가 맞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 방송에서는 "전대가리"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당시 너무 처참하고 절망적이어서 성질이라도 한번 질러버리고 싶어서 그냥 전대가리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징역 1년 6개월이긴 했지만 판결 나오기 전에 사전구속 상태로 징역 6개월 정도 살았을때라, 딱 1년이 남았을 때였다. 1년을 감옥 속에서 더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화가 나서 그거라도 했던 거라고 한다. 근데 실제로는 항소이유서를 쓰고 항소를 했고, 1985년 6월말 2심 선고에서 징역 1년으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2심 이후에는 생각보다 남은 징역이 적었다. 3개월 정도만 더 살고 10월초에 풀려났다. 그때는 전대가리 깨져라를 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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