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3

알라딘: 의암 손병희 평전 - 격동기의 경세가 김삼웅

알라딘: 의암 손병희 평전


의암 손병희 평전 - 격동기의 경세가
김삼웅 (지은이)채륜20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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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서 수많은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한 김삼웅. 그가 이번엔 의암 손병희의 삶과 업적을 이야기한다. 손병희의 생을 좇으며, 그가 남긴 작은 흔적까지 놓치지 않고 살핌은 물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평론을 덧붙이고 있다.


목차


여는 말_ 의암 손병희 선생을 찾아서
추천하는 말, 하나_ 의암 손병희 선생의 뜻을 오롯이 담아낸 평전
추천하는 말, 둘_ 이 시국의 해결 단초를 가진 손병희, 그를 만나다

1장 격변기에 서자로 출생
2장 암담한 시대, 동학에 입도하다
3장 동학의 조직과 교조신원운동
4장 동학, 농민혁명으로 불타올라
5장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6장 동학 3세 교조로 승통
7장 일본 망명기의 활동
8장 망명지에서 「삼전론」 쓰다
9장 망명지의 고투, 천도교 창건
10장 배신자의 처분과 천도교 기반 구축
11장 일제강점기 초기의 저항활동
12장 일제 무단통치기의 민족운동
13장 천도교단의 줄기찬 항일투쟁
14장 세계만방에 조선독립선언 발표
15장 민족대표들 당당하게 재판 받아
16장 총독부 재판정에 서다
17장 임시정부 대통령 추대, 서대문감옥에서 옥고
18장 병보석 석방, 62세로 서거
19장 기념사업회 발족과 그의 잔상

닫는 말_ 민족사에 남긴 업적과 유향
덧붙이는 말: 역사를 되짚는 기행_ 일본 속의 의암 손병희를 찾아서

접기


책속에서


P. 25~26 어느 날 친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찾아온다. 아버지가 관가의 돈 100냥을 축내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손병희는 친구에게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었다. 자기 집에 100냥의 돈이 있으니 몰래 가져가라는 것이다. 친구는 일러 준대로 하였다.
덕분에 친구의 아버지는 풀려나지만 손병희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결국 손병희가 사실을 털어놓자 아버지는 친구가 어려울 때 돕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며 오히려 칭찬을 하였다. 접기
P. 86~87 손병희가 북접의 중군통령으로 임명되어 직립 동학혁명의 최전선에 참여한 것은 그의 생애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동학에 입도하여 수행과 포교 그리고 교조신원운동의 중견간부에서 이제 비록 훈련받지 않은 오합지졸이지만 보국안민·척왜척양의 기치를 든 혁명군의 리더로 바뀌었다. 중국 청대의 홍수전洪秀全 등 역사상 종교지도자가 혁명가로 ... 더보기
P. 236 손병희는 민족적인 거사를 앞두고 기금을 준비하였다. 자금이 없으면 ‘운동’은 불가능하다. 특히 많은 사람을 동원하고 타종교의 협력을 위해서는 적지 않은 기금이 소요되었다. 그동안 손병희는 국내외의 독립운동에 많은 돈을 지원하였다.
여운형이 김규식을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할 때 3만 원을 비롯하여 3·1혁명 준비과정에 기독교 측에 5천 원 등 독립운동 자금의 ‘뒷돈’은 대부분 천도교의 몫이었다. 손병희의 부인 주옥경의 증언이다. 접기
P. 258 천도교는 동학의 창도 이래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기치를 내걸었다. 백성이 학정에 시달릴 때 보국안민의 동학혁명으로 봉기하고, 민족이 외적의 압제에 짓밟히자 광제창생의 3·1혁명을 주도한 것은 교헌(敎憲)의 정신에 충실한 종교운동이자 곧 민족해방운동이었다.
P. 321 손병희의 마지막 가는 길도 순탄하지 않았다. 일제는 그가 형집행정지자로 석방된 죄수의 신분이기 때문에 영결식을 성대하게 치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영결식장에 다수의 시민이 모이면 만세시위라도 벌어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저자 및 역자소개
김삼웅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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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지금의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맡아 바른 역사 찾기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 등 이 분야의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필화사》, 《백범 김구 평전》, 《을사늑약 1905 그 끝나지 않은 백년》,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안중근 평전》, 《이회영 평전》, 《노무현 평전》, 《김대중 평전》, 《안창호 평전》,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 《김근태 평전》, 《이승만 평전》, 《안두희, 그 죄를 어찌할까》, 《10대와 통하는 독립운동가 이야기》, 《몽양 여운형 평전》, 《우사 김규식 평전》, 《위당 정인보 평전》, 《김영삼 평전》, 《보재 이상설 평전》, 《의암 손병희 평전》, 《조소앙 평전》, 《백암 박은식 평전》, 《나는 박열이다》, 《박정희 평전》, 《신영복 평전》, 《현민 유진오 평전》, 《리영희 평전》, 《송건호 평전》, 《외솔 최현배 평전》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백범 김구 평전>,<노무현 평전>,<조지훈 평전> … 총 17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격동기의 경세가, 역사적 변혁의 중심
의암 손병희를 찾아서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서 수많은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한 김삼웅. 그가 이번엔 의암 손병희의 삶과 업적을 이야기한다. 손병희의 생을 좇으며, 그가 남긴 작은 흔적까지 놓치지 않고 살핌은 물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평론을 덧붙이고 있다.
동학혁명, 천도교 창설, 3·1독립혁명이라는 세 가지 역사적 변혁의 중심에 서 있던 손병희. 게다가 그는 110여 년 전인 당시에 이미 보국안민의 계책으로 삼전론을 정립하였으며 교육구국 운동에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국민의 인지 계발에 미치는 언론의 영향을 깨닫고 신문과 기관지를 창간하고 출판사를 차려 그곳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도 했다. 즉 시대를 앞서 볼 줄 아는 지도자였다는 말이다.
‘역사정의’가 점차 사라지는 시대. 진짜 지도자를 갈망하는 우리 국민에게 손병희의 삶과 뜻이 담긴 이 평전은 하나의 귀중한 역사 자료가 될 것임은 물론 지도자를 뽑는 앞으로의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암울한 시대,
그 속에서 싹튼 역사적 변혁의 중심에는
앞을 내다보는 눈을 가진 손병희가 있었다
격변의 근현대사. 그중 손꼽히는 세 가지 역사적 변혁이 있었다. 반봉건·반외세 투쟁의 근대적 분기점인 동학혁명, 민족정체성 보존을 위한 종교개혁의 시발점인 천도교 창설,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주의를 연 현대사의 출발점인 3·1독립혁명이다. 세상을 뒤흔든 이 변혁의 한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 바로 의암 손병희다.
그는 110여 년 전인 당시에 이미 보국안민의 계책으로 교육·문화의 도전론(道戰論), 정치·외교의 언전론(言戰論), 경제·산업의 재전론(財戰論)을 정립한 절세의 경륜가였다.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 보성전문학교와 동덕여학교를 경영해 인재 양성에 전력을 다하고 국민의 인지 계발에 미치는 언론의 영향을 깨닫고는 『만세보』와 『천도교월보』를 창간했으며, 3·1혁명 당시 독립선언서가 인쇄된 보성사를 차려 출판을 시작한 인물이었다.
즉 그의 삶은 단순한 종교지도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생애 전체가 우리 시대의 사표이자 겨레의 스승으로 삼아도 모자람이 없는 삶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싹튼, 아주 중요한 역사적 변혁의 중심에는 모두 손병희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3·1혁명일 것이다.

3·1혁명을 통해 열린 민주공화주의
하지만 3·1혁명은 3·1운동이 되어 버렸다
한국 역사의 참담하고 암울한 페이지 일제강점기. 선열들의 수많은 피와 눈물로 결국 우리는 표면적으로나마 해방을 맞이해 독립국이 되었으며 민주공화제를 이룩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3·1혁명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3·1혁명은 일제에 대항해 민중이 한 목소리로 자주독립을 외친 투쟁임은 물론,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국시대’의 서막이 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만세 시위’가 아닌 ‘혁명’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런 혁명이 손병희의 존재가 아니었으면 성사가 가능했을까 할 만큼 그는 인격·신앙심·리더십·인력동원과 자금지원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큰 역할을 했다. 권위와 명예를 중시하는 종교계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서 첫 서명자를 의암 선생으로 추대할 정도로 헌신적이었고 출중한 인격을 가졌다. 이 책에는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때의 비화도 담겨 있는데, 낌새를 맡고 들어온 조선인 형사가 손병희의 독립정신과 인격에 감화되어 끝내 입을 다물었다는 내용으로 볼 때 우리는 선생의 고결한 인품을 알 수 있다.
하지만 3·1혁명은 그동안 일제의 관제용어인 3·1운동으로 불리면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세계혁명사에서 어디다 내놔도 손색이 없는 사회과학적인 혁명의 정명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요즘 세태를 보면 3·1혁명의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참된 지도자 대신 지배자만 남아 국민을 우롱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산하지 못한 아픈 역사의 반복,
손병희의 정신을 되새겨
길 잃은 우리에게 시대정신을 제시할 책
지금 우리에게는 역사정의가 없다. 일제에 강탈당한 조국과 주권을 되찾고자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애국선열의 숭고한 뜻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말뿐이고 모두가 앞을 내다보지 못한 채 제 욕심 차리기에만 급급하다.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았으며 그 후손들은 여전히 나라의 요직을 차지한 채 떵떵거리고 국민은 좌우로 남북으로 분열되어 서로를 헐뜯기 바쁘다.
지금 이 시점에 “의암 손병희 평전”을 읽어야 하는 것은 그 안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해답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는 우리 시대의 사표이자 겨레의 스승으로 삼아도 모자람이 없는 삶이었다. 비록 일제 치하여서 제민(濟民)의 기회는 갖지 못했지만 보기 드문 경륜가였고 민족사의 격변기 때마다 시대정신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한 입체형 지도자였다. 우리 역사를 바꾼 3·1혁명의 핵심에 의암이 있었고 천도교가 중심이 되었음에도 이 부문에 조명이 덜 되었으며, 평가에 있어서도 인색한 면이 없지 않다. 또한 동학혁명 과정에서 그리고 천도교 역사에서 손병희의 역할이 묻힌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시기 손병희와 천도교의 역할에 대한 재조명, 재평가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공적을 되찾자는 것이 아니라, 3·1혁명이야말로 우리나라 민주공화제의 출발점이며, 국민통합과 남북평화통일을 위해서 민족공동체의 키워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정의’를 바로잡자는 의미이다.
역사를 바르게 보자는 의미에서 수많은 인물 평전을 집필한 저자의 통찰력과 필력으로 태어난 손병희는, 역사를 바르게 세워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찾아야 하는 중요한 이때, 난제를 해결할 답을 제시해 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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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평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우리가 막연히만 알고 있던, 저자 김삼웅 선생의 규정에 따르면 "격동기의 경세가" 중 한 분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평전입니다. 의암에 대해서라면 천도교계의 지도자라든가, 개화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분 정도로 아는 게 고작이었습니다만, 이 책을 통해 의암의 생애에 대해서는 물론, 강점기 초기 핍박받던 겨레의 현실에 대해서, 또한 나라가 쇠망해가던 시절 민족의 지도자들이 어떤 정신적 열의와 구체적 수완으로 민족의 명운을 구하려 드셨는지 그 행적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 중 하나가, 의암께서는 중인 가문 출신이며, 그것도 적자가 아닌 서자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김삼웅 선생도 본문 중에서 각별히 언급하는 바가 있습니다만, 정확히는 첩의 자식이 아니라 본처 사망 후 다시 맞이한 재가녀와의 결합에서 태어난 경우인데, 여튼 크게 보아(물론 왜곡된 유교 도그마의 파생적 폐습입니다만) 서얼의 범주에 드는 출생이므로 그를 보는 눈이 고울 리 없었습니다. 이 책 중에도 나옵니다만 가문의 제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그에게 문중의 어른들이 방해의 언동을 보이자 위력과 당당한 언사로 맞받아치는 그의 모습이 나옵니다. 서얼 출신이라는 점이 여전히 사회적 활동에 장애가 되었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통념상으로는 신덕왕후 강씨의 자녀들을 "서자"로 몰아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방원이 이 원칙을 세웠다는 통념과 달리, 김삼웅 선생은 명백히 전거를 들어 가며 "서얼, 천출이었던 정도전이 난을 일으켜 질서를 어지럽혔으므로 향후 이들의 출사를 금고한다"는 정확한 유래를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뭐 정도전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어떤지는 구태여 재론이 필요 없겠고, 김 선생의 저서는 이처럼 주제에 대한 명철하고 폭 넓은 분석뿐 아니라 역사 주변 지식에 대한 정확한 상기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여튼 요점은 이게 아니라, 한 개인의 자아실현을 옭아매는 요인으로 시대적 상황(국운이 멸망의 시점에 몰림), 개인적 한계(서얼 출신) 둘을 동시에 짚어 가며 개인사와 역사의 입체적 분석을 도모하는 저자의 바람직한 서술 방침입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의 문하에서 의암은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책은 꼼꼼한 서술을 이어갑니다. 재미있는 건 우리가 잘 알듯 백범 김구도 청년 김창암(창수) 시절 동학 조직에 몸 담아 번잡한 실무를 맡으며 평판을 쌓았는데, 갓 입문한 시절 손병희를 먼발치에서 보고 이후 <백범일지>에 당시를 회고한 대목이 있다는 거죠. 책은 <백범일지>에서 해당 대목을 발췌, 인용하는데 독자로서는 정작 <백범일지>를 읽는 동안에는 무심히 넘긴 부분에서, 이처럼 의암의 생애를 조명하는 맥락으로 새로운 의의를 찾아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인용문에서 백범이 의암을 "최시형의 사위"라고 말한 건 백범 자신의 착오이며, "청년"이라고 표현하지만 백범보다는 의암이 15년이나 연상인데다 사회 생활을 백범 못지 않게 일찍 시작한 그이기에 이무렵이면 까마득한 선배이자 스승에 가까운 위상이었겠습니다. 김연국에 비해 젊어 보였다는 뜻이겠고, 김연국은 사실 의암보다 겨우 4년 연상에 지나지 않으니 초췌한 그의 풍모까지 짐작되는 바 있습니다. 부처님도 아끼는 제자에게 화장실 청소부터 시켰다는 일화가 있듯, 해월 최시형도 일부러 시험하려고 의암에게 온갖 까탈을 부렸는데도 묵묵히 지시를 따르는 그의 인품에 감탄했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그 앞에도 나오지만 의암은 청년 시절부터 혈기가 엄청난 성격이었다는 점, 우리 독자는 상기할 필요가 있죠(이런 분들이 대개 나이보다 좀 젊어 보이기도 합니다).

책은 이후 갑오농민혁명 양상을 잠시 언급합니다. 녹두장군 전봉준과 의암(역시 두 분이 나이 차가 크게 안 납니다) 사이의 간단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인연을 소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죠. 여기서도 저자는 1) 과연 전봉준은 동학 교도였음이 정확한가 2) 남접과 북접의 치열한 갈등은 과연 사실인가(혹시 일본 당국의 편견 섞인 자료에 지나치게 의존한 인상은 아닌지) 등에 대해 객관적인 의문의 시선을 던집니다. 이런 부분이 참 유익했고요, 앞으로 학계의 연구가 좀 더 필요한 이슈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배운 내용에 대해 너무 의심 않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죠. 물론 의심과 비판, 전복과 재정립도 기존의 성과를 바탕으로 해서 이뤄져야 "근본 있는" 태도입니다.

책에서도 그런 서술이 있지만 이 동학운동 진압 과정에서 일본 병력의 손에 의해 수십만 명이 학살되었고, 이 정도 시련을 거쳤으면 동학 조직이 거의 궤멸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주 최시형은 혹독한 문초 끝에 (책에 사진이 나오는 대로) 목숨을 잃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헌데 어떤 곡절인지, 동학 조직은 이후 재건에 성공하고, 손병희 선생이 망명(문제가 있는 표현입니다만- 적국에의 망명이 있을 수 없으니 - 저자의 견해대로 다른 마땅한 대체 용어가 없어 서평에도 그대로 씁니다)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왔을 때도, 4만에 가까운 인파(모두 동학교도는 아니었겠으나)가 몰렸다는 점으로 보아 이 의암의 놀라운 수완으로 조직이 보기 좋게 부활한 듯합니다("듯하다"는 건 독자로서 제 개인의 시각입니다).

손 선생의 "망명"은 사실 조정(고종의 대한 제국)이 워낙 역적이라며 핍박을 가했기에, 반정부 인사로서의 망명이라면 그나마 맞는 구석도 있는 표현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책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는데요. 일본 당국의 허술하고 부정확한(저자의 표현입니다) 보고서를 길게 인용하시는데, "...여러 여인을 거느리고 돈을 물 쓰는 듯하는 태도로 보아 한국 정부에서 원조를 받거나 따로 큰 자금줄이 있는... " 같은 부분을 우리 독자들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암은 1912년에도 메이지 일왕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후에도 따로 일제 당국에 거금을 기부하여 조직의 안위를 꾀한 바 있습니다. 물론 워낙 배포가 크고 멀리 내다보는 시야를 지닌 인물이라 지엽말단의 행보를 두고 전체를 평할 수는 없습니다만(그래서 저자도 "경세가"란 표현을 쓴 겁니다), 객관적으로 확실한 건 그의 수중에 돈이 상당히 많았다는 겁니다. 일제에 돈을 내려 해도 지닌 돈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또 1900년대 초반의 망명기에도 여튼 그가 현지에서 돈을 넉넉히 쓴 건 사실처럼 보입니다. 이런 수완 좋은 인물의 빼어난 조직 경영 능력이 아니었으면 동학 조직이 그 결정적인 위기를 버텨 내지 못했으리라는 게 상식에 비추어서도 타당합니다.

저자도 아쉬움을 표하는 행적 중 하나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한반도 패권을 둘러싸고 본격 충돌의 조짐이 보이자, 의암은 "기왕 나라의 명운이 기로에 놓인 것, 승전국에 가담하여 향후 발언권을 높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결단으로 당시 참모총장 다무라와 접촉, 러시아와의 결전에 병력과 자금 등을 지원할 계획이 실행 단계에까지 접어들었던 사실입니다. 사실 독자로서도 뒷맛이 개운치 않았습니다만, 이때만 해도 향후 역사의 전개가 어떤 국면까지 갈 지 알 수 없었으며, 의암으로서는 어디까지나 민족의 자존을 지키는 한 방편으로 택한 길이죠. 참고로 책 첫머리에는 재미있는 일화와 함께 소개된 곽씨 부인이 나오지만, 사실 생전에 의암은 부인을 여럿 둔 바 있습니다. 그 중 우리가 잘 아는 분은 동학의 지도자이자 독립 운동가를 겸했던 여걸 주씨 부인이죠.

한편 그와는 별개로 제가 흥미롭게 본 건,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일본의 승리를 점쳤다는 사실인데, 1) 원거리에서 물자와 병력을 나르는 러시아군에 승산이 없다 2) 일본은 문명이요 러시아는 야만이니 전자가 승리하는 게 필연이다 같은 그들 나름의 근거였습니다. 특히 2)에 대해서는 유럽과 전세계가 오히려 반대 시각으로 파악하는 게 대세였는데 우리 조상들의 날카로운 통찰을 입증하는 바인지는 좀 더 생각이 필요하겠습니다. 참고로 러일 전쟁 발발 직전에도 이 교활하고 음흉하기로는 첫째를 다툴 두 나라는 로젠- 니시 협정(양국 외무 당국자의 이름입니다)을 맺어 시간을 벌 속셈이었는데, 이 책에는 "서(西) 로즌 협정"으로 표기되었으니 행여 오해는 없어야겠네요.

의암의 친일(미미합니다만) 행적을 완전히 상쇄시켜 주는 일등 공신이 한 명 있는데, 우리가 (의암만큼이나 이름이 익은) 일진회 리더 이용구가 바로 그 장본인입니다. 이용구는 본래 의암이 매우 아끼던 후배 중 한 명이었는데, 어쩌다 가장 못된 길로 진로를 틀어 민족 자존의 훼손은 물론 동학 조직의 약화, 의암 개인의 속을 톡톡히 썩이는 행보로 악명이 자자했습니다. 이놈을 두고 악질 친일파로는 우리가 잘 알지만, 마치 석가모니의 가는 길마다 훼방을 놓았던 제바달다 캐릭터와도 같았던 면모는 이 책을 통해서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여튼 이런 놈 때문에 우리가 의암의 진면목도 오해 없이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의암은 중국에 체류할 당시 아직은 확고한 명성이 없던 손문(쑨원)이라든가 원세개(위안스카이) 등과도 만나 교류를 텄다는 기록이 이 책에 잘 나옵니다. 쑨원은 참고로 의암보다 네다섯 살 아래입니다. 일본에서 그는 이등박문을 만나 엄청난 주량으로 기를 죽였다거나(그러나 이토는 이때 이미 노인이고, 의암은 아직 장년의 나이였으니...), 고종의 사위 박영효를 만나 그 방종한 처신에 호통을 쳤다거나 하는 일화가 책에 실려 있습니다. 이 일화들은 의암선생사업기념회에서 출간한 다른 전기에서 저자가 재인용한 내용인데, 독자로서 믿고는 싶습니다만 그런 일화가 당시 크게 회자되었다는 정도로 좀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해당 종교 단체의 입장도 강하게 반영된 내용이기도 하겠으니 더욱 말입니다.

앞에 말했듯 의암은 망명 전엔 내내 대한제국 정부와 긴장 갈등 관계였습니다. 러일 전쟁 발발초기 그는 논설을 통해 "...상책은 폐혼입명이겠고 중책은 악정부를 멸하고 신정부를 앞세움이겠으나..." 같은 주장을 합니다. 이 "폐혼입명"에서 "혼"은 당시의 맥락으로는 별 의심의 여지 없이 "혼군, 암군"을 뜻합니다. 그러나 뒤의 "입명(명철한 군주를 세움)"에서 알 수 있듯, 아직은 그가 철두철미한 공화정 사상에까지 인식이 이르지는 않았다는 점도 눈치챌 수 있죠. 이처럼 여전히 전근대적 인식의 프레임에 한 발목이 잡혀 있는 듯한 한계는 김정인 박사의 학위논문(서울대학교) 인용 파트에서도 드러납니다. 참고로 책 중의 그 인용은 손병희 선생의 저술이 아니라 김 박사의 논문 일부이며, 말투가 옛것이라 혹시 착각하는 독자들이 없었으면 합니다(^^). 여튼 이러던 게 귀국 후에는 <만세보>를 창간하고, 이인직의 <귀의 성> 등 신소설을 연재케 하는 등 유연한 처신으로 고종에게 은사금까지 받았던 사실은 그의 정치적 수완이 매우 빼어났음을 잘 드러내 보입니다.







김삼웅 선생의 평전이 언제나 그렇듯 다양한 자료를 철저히 분석한 후 적시적소에 인용하는 학문적 태도가 돋보이는 책이기도 합니다(p35 중간쯤의 "들어낸→드러낸" 같은 오타는 아마도 이이화 선생 책 원문의 오류인 것 같네요). 이 책의 완독을 독자가 치를 떨며 이루는 게 되는 주된 이유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대로 3.1운동(이 명칭에 대해서도, 그저 고종의 인산 일자를 앞둔 단순 일자를 표시하는 게 아니라, 삼위 일체 등 신학문 신문물의 세례를 받은 그의 식견에 따른 보다 의미깊은 해석이 나옵니다) 이후 일제의 의해 주동자로 몰려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한 폐인이 되어 풀려난 후, 후유증으로 서거하시는 그 참혹한 과정에 있습니다. 후손으로서 이런 대목을 접할 때면 참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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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혈 2017-03-14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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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일제강점기, 조국독립, 임시정부 등 다양한 키워드를 생각할 때, 빠질 수 없는 분이 바로 의암 손병희 선생입니다. 민족 33인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입니다. 다양한 독립운동가가 있지만, 이 분은 특히 많은 분야에서 조국독립을 위해서 힘쓰셨고, 기억해야 하는 독립운동가입니다. 철저하게 일본에게 저항하면서 조국이 가야 하는 길을 제시했고, 많은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그의 생애는 독립과 일제에 저항한 삶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조선 말, 격동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흐름, 근대화를 바탕으로 전혀 다른 세계가 우리에게 직면했고, 쇄국과 무관심으로 일관한 대가는 엄청났습니다.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여 새로운 군국주의, 제국주의를 표방하며 대륙을 향해서 뻗어왔고, 우리가 사대했던 중국은 개혁에 대한 의지와 실행이 있었지만, 워낙 국력이 기운 탓에 결국 반식민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암울했습니다. 여전히 기득권과 피지배 세력의 대립이 심했고, 결국 일본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손병희 선생은 동학농민운동으로 유명합니다. 조선왕조의 무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동학농민운동에 대처하는 자세, 결국 중국과 일본의 개입을 유도했고, 자국민을 외국 군대의 힘으로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결국 새로운 국가, 국민이 주권인 나라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고 그 중심에는 손병희 선생이 있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잘사는 나라, 외세에 대한 강한 저항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고, 결국 일본에 의해서 탄압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죽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는 이유이며, 기억해야 하는 당연한 명분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근현대사는 아픔의 과정이지만, 이들의 깨어있는 의식과 노력, 나라를 위해 개인을 끊임없이 희생했던 정신이 없었다면, 아마도 독립은 요원한 소원이 되었을 겁니다.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부역한 사람도 많고, 친일로 돌아서며 동족을 말살하고 수탈했던 악인들도 많습니다. 반대로 손병희 선생처럼 철저하게 투쟁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했지만,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경의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특히 손병희 선생은 유연함을 지닌 인물입니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조국을 지키려 했지만, 상황에 따라서 외교적인 노력, 교육에 대한 투자와 관리, 무장투쟁 등 다양한 노선을 섭렵하면서 끝없이 싸웠습니다. 어느 하나에 머물지 않고, 급변하는 정세를 읽으면서 대처했습니다. 또한 왕조국가는 이미 무너진 구시대적인 발상임을 알고, 근대적인 헌법수립 및 국민의 가치를 드높였습니다. 임시정부 활동시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3.1운동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손병희 선생이지만, 이 책은 그곳에 머물지 않고, 몰랐던 인물과 사건에 대한 해석과 재조명을 담고 있어서 보다 깊이있는 역사공부가 가능할 것입니다. 여전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때로는 미화나 삭제가 반복됩니다. 오늘 날까지 뜨거운 논란을 낳고 있는 당시 인물들의 행적, 의암 손병희 평전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 하루가 개벽과 같이 변했던 격동의 시기, 그를 통해서 시대상을 느끼고 그만의 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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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kidol 2017-03-16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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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평전



천도교의 지도자로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민족대표 33인으로 3.1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라고 알려졌던 의암 손병희. 최근 유명한 역사쌤이 3.1 운동시 독립선언문과 관련하여 민족대표 33인이 우리나라 최초의 룸싸롱격인 태화관, 당시 손병희와 내연 관계였던 주옥경이 있던 그 술집에서 낮부터 술을 마셨다는 강의가 논란이 되어 구설수에 올랐던 일이 바로 어제였어요. 기존에 우리는 수업시간에 민족대표 33인 인물 중 한분으로 알고 있던 인물의 반전 설명을 듣게되니 책과 강의 내용이 겹쳐져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답니다.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역사란 것이고 그 시선의 다름으로 인해 굉장한 왜곡과 오해가 만들어지는 것이 역사인 점을 감안할 때 역사에 대한 발언이 굉장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에요. 사학자 사이에서도 파가 나뉜다는 말을 어느 책에서 보았기에 관련책들을 읽으면서 다가오는 글귀의 다양성에 혼란스러움을 많이 느꼈던 것도 또한 역사에 대한 것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역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그것을 내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느 관점이든 모든 관점에서 다가가 그것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것이 저의 생각이기에 책을 읽던 시점에서 터진 그 일에 대해 또한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이 책의 추천하는 글에 천도교종학대학원 원장은 손병희의 업적이 실제 그가 이루었던 업적보다 미미하거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속상하다고 적어놨어요. 친일파와 기생과 놀아났다는 등의 이야기까지 전해듣게 되어 참담함 심정이라는 말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그 무엇이 되었건 올바른 시대상황을 바라보고 다가가는 것이 또한 우리 후손된 입장이라는 사실을 책을 보며 깨닫게 되었고 교과서에서 만나 뵈었던 의암 손병희라는 인물은 상상했던 것보다 성격이 불같은 분이라는 걸 일화를 보며 알게 되었답니다. 지금의 시선에서 따지면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 있을 수 있지만 당시 손병희 선생이 살던 시대였다면 가능했던 일화들이 소개되는데 결혼 당시 손병희의 서자격인 출생신분을 따져 혼사를 시킬 수 없다는 장인어른에게 "선 본 값을 내든지, 혼인을 승낙하시든지, 그것도 아니면 내 주먹맛이라도 한 번 보고 가셔야 합니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장인어른의 눈에는 들어 결국에는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이런식의 일화들은 지금 상황으로서는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얼마나 강직하고 정의로운지를 알 수 있어 손병희 선생의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잡혀 수감소에 있을 때 재판장에게 앞으로도 평화적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고 당당히 말했던 그의 또 다른 일화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해방된 해 백범 김구 선생이 환국하여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우이동 봉황각에 묻혀 있는 의암 손병희의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보며 백범 김구 선생이 제일 먼저 찾을 정도로 존경해마지않던 인물이었다면 의암 손병희 선생에 대해 왜곡된 내용들에 대해서 더 많이 추적하고 바로잡는 것이 우리 후손된 자들의 사명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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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고양이 2017-03-18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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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륜] 의암 손병희 평전



3.1 혁명의 중심, 경세제민의 경륜가 의암 손병희를 찾아서



해방된 해 백범 김구가 가장 먼저 찾으곳이 의암 손병희 선생님의 무덤이었다고 한다. 무덤에 엎드려 "선생님 덕분에 우리가 오늘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를 보고했다는 것 만으로도 그가 해방을 위해 애쓴 사람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임시정부도, 3.1혁명도, 조선의 개화혁신도, 동학혁명도 호남지방에 국한한 민란으로 그쳤을 거라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선생님이라 부를 만큼 대단한 인물임에도 알려진게 많지 않은 그를 「의암 손병희 평전」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워낙 역사에 관심이 없었던 학창시절을 보낸 나였기에 3.1 독립선언 서명한 33인중 한명이라는 것 외에 손병희 선생님에 대해 아는게 없었다. (그것조차 확실하지 않은 기억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인물이라 칭하는 김구 선생님이 선생님이라 부른 손병희 선생님에 대한 삶을 이 책을 통해 제대로 알 수 있었다.




1861년 아버지 손두흥과 둘째 부인 경주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손병희 선생님은 서자로 태어났다. 아무리 똑똑해도 인정받을 수 없었던 서자로 태어나 방황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동학에 입문하고 천도교의 제3대 교주로서 동학을 널리 알리는데 힘쓴 인물이다. 최근 한 유명 강사가 손병희의 세번째 부인인 주옥경을 룸싸롱 마담이라 설명했으며, 대낮에 모여 술을 먹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는 표현을 했다며 강력하게 항의할거라는 기사를 보았다. 이 책을 읽던 중 보게된 기사라 관심읽게 읽어보았다. 예전이었다면 제목만 읽고 넘겼을 기사였겠지만 이 책을 읽으며 접하게 된 기사라 제대로 된 사실을 알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명강사라 믿고 들었던 강의였는데 살짝 실망감이 들었다. 이 책을 읽고 있었기에 잘못된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어 다행인듯 했다.




책을 통해 손병희 선생님의 삶을 엿보고 그의 행적들을 쫓으며 우리 기억에 얼마 남아있지 않은 선생님에 대한 정보들을 알게 되었으며, 다시한번 차분하게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김상웅 선생님의 다른 위인들의 평전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사에 대해 더 많은걸 알기위해 책을 읽곤 하지만 여전히 모르는게 더 많기에 이런 책을 통해 한사람 한사람 꼼꼼하게 알아가고 싶다. 아이들의 위인전을 통해 선생님에 대해 읽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단 평전을 통해 깊이 있게 알게되는 것이 더욱 좋은듯 하다. 이해하는 부분보다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그런점은 여러번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듯 하다.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된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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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건우맘 2017-03-19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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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평전



손병희선생은 격변기인 1861년에 서자로 태어났다. 지금은 근대로 치는 시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자로 입신할수 있는 길은 여전히 없었다. 공부해서 입신할수 없었던 그의 젊은 날은 한 때 방황하기도 했지만 동학에 입문하기전에 있었던 의로운 이야기들이 전해지는걸로 봐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반드시 고치거나 바른소리를 했던 인물이었다.




최제우, 최시형에 이은 천도교의 제3대 교주이기도 했지만 실제 그의 나이 21세 때에야 천도교에 입문했다.

당시 세력을 떨치던 서학에 반한 학문이라 하여 동학으로도 불린 천도교는 최제우가 1860년에 설립한 교인데, 사실 이책에 있는 내용의 교리들은 읽어도 무슨말인지 잘 모를정도로 한자위주의 교리여서 충분히 알기 힘들다.

천주 즉 하눌님을 믿는다고 하여 흔히 하늘을 믿는다고 착각할수 있지만, 한= 크다, 눌=우리(울타리), 님=존재에 대한 인격화를 나타내는, 즉 우주를 의미한다고 한다.




1897년 부터 1907년 까지 실질적 3대 교주로서 동학을 알리는데 힘써온 그는 러일전쟁 당시 진보회를 조직해 정치개혁을 주장했다.




3.1운동 당시는 천도교측 대표로 참가했다가 채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재판정에서 앞으로도 평화적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의암 손병희는 임시정부 수립당시 서울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는 내각이 구성되기도 했지만, 현실적 어려움으로 무의로 돌아갔다. 병보석으로 풀려나 62세로 생을 마감(1922)하기 까지 대한독립을 보지 못했던 독립운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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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eangel 2017-03-14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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