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06
[북한경제와 협동하자⑧] 북한경제의 자강력과 국제협력(농업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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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경제와 협동하자⑧] 북한경제의 자강력과 국제협력(농업下)
기사승인 2018.10.31 12:24:28
북한은 식량생산에서 자력갱생(自力更生)하는 데 다가가고 있다. 지난호에서 북한이 안정적으로 정곡기준 500만톤 이상을 생산하고 기타 식품류로서 축산물과 수산물의 공급을 늘릴 수 있다면 사실 수입 없이도 [먹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식량비축, 산업용 원료 및 축산 수요 증가, 지역적 편차, 이동곤란 등의 제반요인을 고려한다면, 520-600만톤 정도가 정곡기준 곡물수요량으로 타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현재 곡물생산이 정곡500만톤에 좀 못미치는 수준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더 고려해야할 사항이 있다. 곡물의 구성이다. 지난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추계한 2018년 식량가용량인 정곡기준 472만톤은 쌀 157만톤, 옥수수 220만톤, 그리고 감자 47만톤, 콩 27만톤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쌀의 비중이 33%에 불과하다. 옥수수가 47%, 감자와 콩이 합쳐서16%이다. 삼시세끼중 한끼 정도만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라 조선 사람이 소망하는 쌀밥을 양껏 먹기에는 쌀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감자는 김정일 시대에 주곡의 위치에 올라섰다고는 하지만 [이밥에 고기국]을 따지는 조선 사람의 심정에선 쌀의 수요가 높을 수 밖에 없다. 쌀이 부족하고 옥수수, 감자, 콩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북한이다. 남한은 쌀 생산량이 400만톤 정도인데 2017년 쌀재고량이 350만톤이라 쌀이 남아돈다. 향후 남북협력시대에 식품가공용과 사료용으로 쓸 수 있는 옥수수, 감자, 콩을 남한에도 공급하고 남한의 쌀을 북한에도 공급하는 곡물의 유무상통이 필연적이라고 본다. 자력갱생은 폐쇄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류의 원천이된다. 그 원천이 되는 자체의 역량, 그것이 자강력일 것이다.
이번호에는 북한 농업의 과제로서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향후 국제협력의 전망을 살펴보고자 한다.
농업생산력 : 자강력이 있다
북한에서 농사는 자립경제의 근간이다. 북한은 1964년에 농업부문 실행지침서인 [사회주의농촌테제]을 발표한 이후 기본적으로 농업의 주체화, 현대화, 과학화를 중심으로 농촌4화(수리화, 전기화, 기계화, 화학화)를 통한 식량증산에 주력해왔다. 1970년대 중반까지 해도 북한의 비료 생산능력은 남한을 능가하였다. 그 결과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시기에는 식량의 자급자족을 어느정도 실현하였다. 1979년에 당시 김일성 주석이 “우리나라에서도 한때에는 다른나라에서 쌀을 사다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1973년부터 농사를 직접 틀어쥐고 지도하였습니다. 그후부터 우리나라에서 식량을 자급자족하고 있습니다.([황해남도 농촌경리부문과 공업부문에 나서는 과업], 노동당 황남위원회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한 연설, 1979.9.21)”라고 한 바도 있다.
사실 북한에서 “주체농법”이 등장한 때가 1973년이었는데 그 내용은 단위면적당 수확량을 높이기, 적기적작(適期適作), 적지적작(適地適作), 밀식재배, 집약농법, 품종개량, 과학적 시비체계수립 등이었다. 특히 옥수수(북한에서는 강냉이라 한다)를 주곡으로 삼고 집약농법의 일환으로 [강냉이영양단지]를 고안하여 학생동원 등 집중적인 노동력 투입으로 옥수수생산량을 늘린 것으로 식량자급을 가능케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강냉이영양단지란, 흙에 퇴비와 부식토, 질소비료를 한데 섞어 물을 부어 이긴 것을 기계로 찍어서 단지로 만들어 그 안에 옥수수 씨를 넣고 키운 것인데, 이 단지를 밭에 이식하여 옥수수를 키운다. 직파에 비해 노동력이 많이 들지만 수확이 많아지고 빨리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시정배들 말로 개고생을 하더라도 수확이 월등하게 좋다면 농민들이 자기집 텃밭에도 영양단지 방식을 썼을 텐데 그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1990년대 들어서도 북한의 농업정책의 기본은 식량증산으로 정책에 큰 변화는 없었다. 변화가 있다면 감자농사를 중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김일성 주석이 비료 걱정없이 [강냉이]에 꽂혔다면 김정일 위원장은 비료 걱정에 [감자]에 꽂혔다고 할까. 비료공급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비료를 많이 먹는 옥수수보다는 비료를 적게 들이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감자 생산이 1998년부터 장려되어 재배면적도 98년에 4만ha에서 2005년에는 20만ha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식량증산은 생산력이 높아져야 가능하다. 농산물의 생산력을 결정하는 요인은 자연기후 여건과 더불어 노동력의 양과 질, 토지의 면적과 질, 종자, 농업기술, 관개시설 그리고 비료, 농기계, 농약, 비닐박막 등 각종 농자재 공급이다. 이러한 결정요인들 중 중요한 중요한 부분들이 1990년대 이후 20년 가까이 악화 또는 부족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자체의 역량 즉 자강력이 약화된 시기였다.
북한은 식량위기가 시작된 1990년대 중반인 95년부터 2012년까지 20차례의 홍수와 7차례의 태풍, 3 차례의 심각한 가뭄(97년, 2001년, 2012년) 등의 자연재해를 겪었다. 자연재해에 취약한 농촌이 된 것은 땔감확보와 산간 경사지 다락밭 조성을 위해 삼림벌채를 하여 민둥산이 많아져 토지가 침식에 취약해진 결과이기도 하다. 또한 비료 등 농자재공급이 부족했던 결과이다. 북한에는 “질소비료 1톤을 쓰게 되면 쌀이 10톤 나온다”는 1:10 원칙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비료생산은 성분량 기준으로 1985년에 76만톤 수준에서 94년에 22만톤, 98년엔 5만톤 수준으로 급감하였다. 2008-12년 평균 국내 생산량이 약 22만 톤 정도로 다시 회복되었으나 필요성분량 약 70만톤의 30% 수준에 불과했다. 중요 농자재인 비닐박막은 조기수확, 냉해방지, 잡초 방제, 동물피해방지 등의 효과가 있으나 석유화학산업 미발달로 국내생산량이 부족했다. 그리고 석유에너지 부족에 따르는 농기계화 미진도 농업생산력을 제약하는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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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다락밭. 다락밭은 1976년 3월 전국농업열성자회의에서 김일성주석이 알곡증산을 위해 산비탈밭을 다락밭으로 만들 것을 교시한 것을 계기로하여 대규모로 조성하기 시작했음.(사진 - 2014년, 중북국경, 필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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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농업생산력이 감퇴하는 상황에서 1996년에 쌀은 논에서1ha당 벼(조곡) 2.91톤을 생산하여 국제수준의 절반으로 추정되었다(통일부 추정. 정곡기준 평균생산량은 쌀 2.33톤/ha, 옥수수 3.08톤/ha). 이렇게까지 생산력이 떨어지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는 것이고 문제의 책임소재를 가려야했을 것이다. 북한이 공식으로 발표하지 않은 카더라통신으로 매스컴에 보도된 것이긴 하지만 당시 노동당 농업담당비서 서관히는 97년에 [30년 동안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암약하며 당의 농업정책을 깡그리 말아먹었다]는 죄목으로 공개처형되었다고 한다.
생산력 감퇴의 중요 요인으로 협동농장의 집단주의적인 조직 및 분배 방식으로 인해 생긴 부작용으로서 농민들의 노동의욕 상실을 꼽기도 한다.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 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 1997년 8월4일자 보도에 따르면 1996년에 협동농장의 분조*관리제 개선(분조원규모 7-10명으로 축소, 초과 생산물을 분조 자율처분)으로 1ha당 벼(조곡기준)를 6.54톤 생산하여 계획량 6.3톤을 초과달성하였으며, 옥수수(조곡환산)는 5.2톤으로 0.4톤을 초과달성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 통계 수치의 신뢰성은 별도로 하더라도 분조관리제 개선으로 생산성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조직관계를 개선하고 농민들에게 계획초과분의 자율 처분권을 주는 분배 관계 개선이 생산력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분조 : 농사일을 담당하는 말단 단위
북한은 협동농장 시스템을 근원적으로 변경하지 않고 곡물생산을 다시 회복하고 있다. 2017년의 FAO의 추계를 보면 국제수준인 1ha당 벼 5.40톤을 생산하는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남한은 2016년에 1ha당 벼7.23톤을 생산하였다. 북한은 협동농장을 해체하지 않고서도 운영상 개선으로 생산력을 회복한 것이어서 생산 관계의 문제점 보다는 생산력의 문제점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농자재 투입이 더 원할해 진다면 생산력은 더 높아질 수 있다.
남북한의 농업부문 비교(북한의 경지면적에 산간경사지 다락밭 약 55만ha 제외)((자료 - FAO, 통계청)
생산력을 회복하게 된 외부경제 요인으로는 2013년이후 자연재해가 별로 없었던 점을 들 수 있다. 내부경제 요인으로 가장 큰 요인으로는 곡물생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비료공급이 회복된 것을 들 수 있다. 비료공급은 FAO 통계로 2010년 성분량 기준 50만톤 수준(중국으로부터 수입 29만톤-4,123만달러 상당-포함)에서 2016년에 85만톤(중국으로부터수입 16만톤 -3,762만달러 상당-포함)으로까지 증가하였다. 중국으로부터 비료 수입이 줄고 총공급량이 늘어난 것은 국내의 비료생산이 정상화하고 증가한 것에 기인한다. 국내 화학비료 공급은 흥남비료공장이 중심역할을 하고있다. 이 공장은 1927년에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가 세운 조선질소비료 흥남공장이 전신으로 1930년부터 비료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세계 제2의 생산능력이었는데 석탄화학으로 비료 원료인 유안 생산능력이 48만톤이었다. 흥남비료공장은 현재 갈탄가스화를 통한 비료생산공정을 건설 중에 있다고 한다.
흥남비료연합기업소 (사진출처 - 내나라홈페이지)
흥남비료연합기업소 포스터
그렇지만 질소비료에 과다하게 의존하는 시비체계는 토양 산성화와 지력감퇴, 미네랄부족으로인한 작물양분 불균형, 병충해 심화, 지하수 오염, 인체축적시 산소결핍증 등의 우려가 있다. 토양의 건전성은 중요한 문제인데 화학비료는 유익한 미생물을 죽일 수 있다. 농업은 원래 미생물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어서 화학비료나 농약 사용으로 미생물이 죽으면 생산력은 점점 떨어지게 된다. 북한에서도 유기농법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데 우렁이 농법, 퇴비 이용등 친환경 자연농업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다.
노동신문은 2014년 3월16일자에서 유기농법을 적극 장려하자고 호소하면서 “유기농법에서 기본은 유기질비료를 많이 생산하여 리용하는것이다. 효과성이 높은 흙보산비료와 유기질복합비료, 미생물비료, 후민산염, 아미노산미량원소복합비료를 비롯한 유기질비료생산에 힘을 넣어 정보당 시비량을 늘여야 한다. 고리형 순환생산체계를 확립하고 생물농약을 적극 리용하며 우렝이유기농법을 받아들여야 한다. 큰모재배, 감자 대 알곡 두벌농사방법, 록비작물재배를 비롯한 좋은 재배방법과 기술을 적극 받아들여 유기농법도입성과를 계속 확대해나가야 한다.”라고 언급하였다. 그후 서해안 염주군의 남압협동농장에서 우렁이유기농법을 적극 받아들여 곡물생산이 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근로자 2018년 제8호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농장들에서 우렝이유기농법을 비롯한 선진영농방법을 적극 받아들이고 매 영농공정들을 주체농법의 요구대로 알심있게 진행하도록 하였다”고 알리고 있다(리재남 신의주시당위원회 위원장 [당조직정치사업을 진공적으로 벌리는 것은 새로운 전략적로선의 승리를 위한 중요한 요구])
포전(圃田, 구획을 나눠놓은 경작지)안의 퇴비묻이(사진 - 2017년, 필자 촬영)
생산관계 : 자강력을 높이는 협동농장 시스템의 과제
북한의 농업 생산력이 뒤쳐진데는 사회주의적 생산 관계로서 ①소유관계인 농지의 집단소유, ②조직관계인 협동농장의 집단주의, ③분배관계인 국가의 저가수매—가 주요한 원인이라는 지적이 있어왔다. “내땅이 아닌데서 열심히 일하나 안하나 마찬가지고 분배도 적다면 누가 열심히 경작을 하겠는가” 라는 지적인데, 이는 구쏘련, 중국, 동유럽의 집단농장의 해체후 농업생산증가라는 경험들로 인해 그 타당성이 확고한 것으로 회자된다.
북한도 사회주의국가로서 1950년대에 협동농장화를 실현한 것은 당시 공산권의 공통된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쏘련과 중국은 국가의 행정사법체계(관료체제)와 집단농장(쏘련은 콜호즈, 중국은 인민공사) 관리체계를 일원화시켜 농업에 비전문적인 관료들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비효율, 낭비, 그리고 경작과 경영관리에서 발언권이 없는 농민들의 반발과 동기부여 상실을 낳았다. 국가의 일괄저가수매와 판매는 도시노동자의 생계비 지출을 억제함으로써 저소비→국가자본축적→중공업투자증가→공업성장으로 이어지는 발전전략에 따른 것이었고, 당연히 농업부문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북한의 협동농장화 방식은 기본틀에 있어서는 중국의 방식과 같았다. 즉, 중국이 토지개혁후 1953년부터 소토지자영농민들로 합작사(협동조합)를 만들게 하고 1958년부터 토지집체화를 통해 인민공사로 나아가고 궁극적으로는 전민소유의 완전공유제인 국영농장으로 전환한다는 방향과 같았다. 그러나 그 방식은 달랐다. 북한은 개별 협동농장이 리(里) 단위로 행경체계와 일원화(1958년)되어 리협동농장관리위원장이 리인민위원장을 겸직한다. 그러나 도(道)와 군(郡)의 행정체계와 농업관리 체계는 분리되었다(1962년). 쏘련과 중국에선 집단농장화 과정에서 수많은 폭동과 아사자가 발생하였다. 중국의 경우 1958년 식량생산이 57년대비 26.4% 감소하는 식량위기 상황까지 생겼었다.
그러나 북한은 1950년대 협동농장화 과정에서 농촌의 안정과 발전이 이루어진 특이한 경험을 하였다. 해방후 토지개혁으로 땅을 갖게 된 농민들이 전쟁후 피혜화된 농촌에서 1955년까지 전체농가의 45%가, 노력협조반 방식(제1형태), 토지출자후 공동경리와 출자몫 배분방식(제2형태), 생산수단통합과 노동분배 방식(제3형태) 등 다양한 농업협동조합을 만들었다. 1958년에 이르러 농업협동조합이 리단위로 통합(3,843개소)하여 제3형태의 농업협동조합으로 모든 농민이 참여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조선중앙년감, 1960년). 알곡(조곡)생산은 1954년 226만톤에서 1960년 380만톤으로 증가하였다. 농민의 자발성과 국가의 유도가 결합된 방식이었는데, 리단위에서 국가의 행정체계와 통합하면서 교육, 문화, 보건, 후생 부문도 포괄하는 생활전반의 조직체계가 되었다. 단위협동농장의 최고기관은 농장원총회(대표자회의)이다. 여기서 관리위원장(리인민위원장 겸임) 선출과 관리위원회 구성 비준, 협동농장 규약과 제반 규정의 제정 및 수정, 조합원의 가입∙탈퇴∙상벌의 결정, 계획∙계약∙결산∙분배 등 결정사항에 대한 비준 등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농촌소비조합 상점과 농촌신용협동조합 등이 농업협동조합(나중의 협동농장)에 흡수되어 협동농장이 생산, 분배, 소비의 전 경제활동을 책임지게 되었다. 북한에서 다양한 협동조합은 농촌부분과 어촌부문, 그리고 도시부문으로 나뉘는데 농촌부문이 농업협동조합으로 통합되어 협동농장으로 개명된다. 어촌부문에는 수산협동조합이 계속 존재하고 도시부문은 생산협동조합, 생산판매협동조합, 편의협동조합이 계속 존재한다.
하지만 북한에서 60년대이후 50년이상 협동농장 시스템이 이어지면서 생산수단통합과 노동에 의한 분배 방식이 농민의 생산의욕을 감퇴시키는 요인으로 된 것도 사실일 것이다. 다만 1966년이후 분조관리제(작업반 우대제, 분조도급제), 2014년 포전담당책임제 등 제도적 개선이 진행되면서 사회주의시대의 쏘련이나 중국과 달리 농촌이 피폐화하지 않고 자력갱생의 기반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리 단위의 협동농장 운영은 내부에 작업반, 분조 등의 생산담당조직 세분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분조내에 3-5명 단위의 포전담당책임제를 2014년부터 전면실시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분조관리제 구성인원 축소와 초과생산물 자율처분 등이 추진되어 오다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현물분배와 초과생산물 처리권을 주는 것으로 김정은 시대에 전면실시로 되었다. 포전담당책임제에 대해 김정은위원장은 2014년 2월 [전국 농업부문 분조장 대회] 참가자에게 보낸 서한에서 “농장원의 생산 열의를 높이기 위해 분조관리제 안에서 포전담당책임제를 실시하도록 했다”면서 “분배에서 평균주의는 사회주의 분배 원칙과 인연이 없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국가에서 공급하는 비료를 받지않고 자체 퇴비를 생산해서 시비함으로써 분배몫을 늘리거나 작목 선정에서 농장생산계획달성 조건하의 자율권(자기 포전에서 땅콩농사를 해보겠다면 협의하여 인정해줌)을 주는 형태가 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생산의욕이 높아졌다한다.
이러한 제도개선에 대해 중국식 개혁개방이 필요하다는 지적들이 있다. 중국에서는 1978년에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 소강촌(小崗村)에서 농민들이 비밀리에 생산협약을 맺고 농가가 생산과 판매를 직접 담당하고 인민공사에 토지청부비를 납부하는 [농가생산청부제]를 실시하였는데 성공하였다. 이 성과가 정부에 보고되어 등소평이 1980년에 이를 공식 인정하고 1983년에는 인민공사를 폐지하였다. 실패한 인민공사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토지소유는 지방정부의 집체소유로 두고 농민에게 토지경작권(사용권)을 주었다. 그리고 농민이 세금을 낸 후 수매와 직접판매를 할 수 있는 이중가격제를 실시하였는데 시장가격이 중심이 되어갔다. 2008년에는 농민이 농지사용권을 대여, 양도, 매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소유권은 아니지만 사실상 소유권과 같은 권리 행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농민은 토지사용권을 농촌에 투자하는 기업에 대여 또는 출자하여 이용료 또는 수익배분을 받을 수도 있게 되었다. 소유관계인 토지의 공유를 유지하면서 조직관계인 인민공사와 분배관계인 국가일괄수매를 폐지하고 농가생산책임제로 전환한 것이 농민의 생산의욕을 불러일으켜 농업생산이 발전했다고한다. 1985년부터는 정부가 식량계약주문수매제를 실시했다. 1978년부터 88년까지 10년간 농업생산의 평균성장율은 6.5%로, 생산력 증대에 생산관계의 변화가 크게 기여한다는 실증으로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은 이른바 도시-농촌의 격차인 3농(농촌, 농민, 농업) 문제가 대두되면서 소농화된 농민의 사회보장문제, 농업 생산력의 한계문제, 농촌 피폐화 문제가 현실로 되었다. 시장경제에 옷벗고 나온 농민들이 온포(温飽, 따뜻하고 배부른 생활) 문제는 해결하였으나 상대적 빈곤문제로 농촌을 버리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제는 농업용수 부족과 환경오염 등으로 농업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의 농업생산관계 개선을 말하면서 중국식 농업개혁을 제기하려면 신중해야한다.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앞으로 협동농장의 혁신을 전망할 때 몇가지 다음과 같은 과제를 고려해야할 것으로 본다.
첫째로, 식량완전자급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전략적 곡물은 자립을 추구하고 영양 밸런스를 고려한 농업생산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앞으로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현재처럼 옥수수, 감자 등과 함께 밀가루로 만든 빵의 수요도 높아질 것이다. 이미 중국으로부터 들여오는 밀가루 수입량이 2017년에 9만톤 정도에 달했다. 그리고 축산과 수산부문의 발전은 영양 밸런스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다 줄 것이다. 협동농장은 환금성이 높은 특용작물과 축산물을 더 많이 생산하여 국내공급을 늘이고 외화를 벌어들여서 그 외화로 필요한 곡물, 곡분을 수입하는 것도 필요하다. 완전자급자족이 자강력이 아니라, 자력갱생하면서 생활의 질을 높이는 것이 자강력이다.
둘째로, 협동농장의 시스템을 혁신하는 문제이다. 소유관계는 중국처럼 집체소유(협동소유)로 그대로 두고 조직관계와 분배관계의 혁신을 하는 것인데 그 방식에서 중국이 한 것처럼 협동농장을 해체하고 개인가족경영으로 바꾸는 방법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북한의 역사에서 농업협동조합으로서 협동농장이 가져왔던 긍정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1950년대 협동농장화 과정에서 생산수단통합과 노동분배라는 제3형태로 1958년까지 3년만에 협동화가 완성됨으로써 제1 또는 제2형태에서 있었던 농민의 자기토지소유의식과 출자몫에 따른 분배가 사라졌던 것은 급속한 사회주의적 전환의 결과이고, 그후 농민들의 생산의욕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점의 단초가 되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앞으로는 농민이 중심이된 협동농장의 생산결정권과 농민의 토지사용권 행사에 대한 관심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집단적 공동체 경리를 통한 사회보장과 안전망 확보도 중요하다.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전략적인 곡물을 계속 보장하는 식량안전보장 문제도 중요하다.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직관계에서 협동농장을 유연하게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협동농장은 독립채산제로 운영되고 있는데 전략작물을 생산담당하는 부분은, 국가수매량 (수매가)과 농민의 자율처분량(판매가) 사이의 조정이 어렵지만, 포전담당책임제 등 방식으로 운영한다. 그리고 기타 농산물에 대해서는 일부 작업반 또는 분조를 그 자체로서 독립채산제로 운영하거나, 일부 지역을 선정하여 시범적으로 일부 분조들이 협동농장에서 독립하여 소규모 농업협동조합으로서 협동농장 또는 도시부문과 자유로이 계약주문생산하는 방식을 혼용하여 실험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분배관계에서는 협동농장의 농민현물분배와 협의가격 수매(계약주문판매)를 중심으로 관리하여, 시장가격의 폭등/폭락을 막고 농민에게 실질적 이익이 주어지는 협동조합적 분배를 강화하는 것도 고려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셋째로, 농업부문의 남북협력을 비롯한 국제협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는 북한의 자강력을 키우는 일이다. 생산기술, 자재공급, 품종개량, 비교우위 품목의 유무상통, 계약재배, 협동조합간 직거래, 판매시장 확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는 것이 좋다. 북한의 옥수수, 감자, 특용작물과 남한의 쌀, 기타 특용작물의 교환도 좋고, 북한이 필요로하는 농업기술과 농자재에 대한 국제협력도 좋다. 농업부문의 인재육성은 특히 중요하다. 기술연수등을 위해 남북간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장기체류하면서 기술교류를 하는 시대가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자강력이 있는데 왜 대외협력이 필요하냐고 묻는 것은, 사람이 튼튼한데 왜 밥먹냐고 묻는 것과 같다.
*다음편 기획연재[북한경제와 협동하자]는 '북한경제의 자강력과 국제협력(공업)'가 주제로 다뤄질 예정입니다.
일본 테이쿄대학 이찬우교수 webmaster@lifei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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