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 나무위키
제주 4.3 사건
최근 수정 시각: 2018-11-18 19:43:34
분류
제주 4.3 사건
상위 문서: 학살
관련 문서: 사건 및 사고 관련 정보, 여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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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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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말 촬영된 사진. 사진 촬영 직후 그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유골 발굴 작업.
제주 4.3 사건
濟州四三事件
Jeju 4.3 Incident
발생 시기
1948년 4월 3일 ~ 1954년 9월 21일
발생 위치
제주특별자치도 전역
관련 기관
토벌대
대한민국 제1공화국, 대한민국 국군, 대한민국 해병대, 제주 경찰
국방경비대, 미군, 서북청년단
무장대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
피해 내역
확인
사망자[1]
10,715명
추정
사망자
6만 ~ 8만 명[2]
행방불명자
3,171명
무장대 측
약 1,500명
토벌대 측
약 220명
1. 개요2. 기원
2.1. 해방 직후의 제주도2.2. 1947년 3.1 발포 사건과 저항2.3. 총파업에서 4.3 전야까지3. 전개과정4. 결과5. 인물
5.1. 무장대5.2. 군경토벌대6. 사건 이후
6.1. 관련자의 이후 동향6.2. 피해자들의 후유증6.3. 민주화(6월 항쟁) 이후에도 계속된 부정7. 진상규명운동과 추모 및 사과
7.1. 1960년대 ~ 1970년대7.2. 1980년대 ~ 1990년대7.3. 2000년대
7.3.1. 노무현 전 대통령 위령제 추도사 전문7.3.2. 문재인 대통령 4.3희생자 추념일 추념사 전문8. 문화에서의 4.3사건9. 학계의 시각과 평가
9.1. 4.3 사건을 다룬 역사책들10. 4.3 수형자 문제11. 4.3과 일본12. 제주 4.3 사적지13. 여담14. 참고 문헌15. 관련 단체
"처녀 때, 가다보면 일본군인들이 총 메고 말 타고 지그락지그락 다녀도 본 척도 않고 그냥 지나가지, 아무 말도 않더라고. 무섭지 않았지. 나는 4.3사건 때야 사람 무서운 거 알았어요."
- 4.3 수형생존자 송ㅇㅇ 씨 증언.
한재림 감독이 제작한 제주 4.3 사건 공익광고.
5분 만에 요약한 제주 4.3 사건.[3]
1. 개요[편집]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개정 2007.1.24>
1.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4]당한 사건을 말한다.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제주 4.3 평화공원 내 전시장에 있는 문구. 4.3 사건을 한 줄로 요약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가장 끔찍하고 참혹한 학살사건 중 하나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5] 제주도에서 일어난 대학살극이다. 일본제국의 패망 이후 남북한의 이념갈등 발단이 되어 봉기한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과 국군, 경찰 간의 충돌 과정과, 이승만 정권 이후 미국 정부의 묵인하에 벌어진 초토화 작전 및 무장대의 학살로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도는 이미 일제에게 가혹한 수탈을 당한 걸로도 모자라 결7호 작전이 시행되어 섬이 초토화될 위기에 처했던 적이 있었고, 1945년 이후부터 종전 전까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주도는 미군정의 폭정과 사상 최악의 지속적 흉년에 시달렸다. 그야말로 제주도 역사상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봐도 무방했을 때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단독으로 무장대 조직, 경찰서 기습을 가해 제주 4.3 사건이라고 불린다. 물론 실제로는 그날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고 1947년 3월 1일부터 한국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에 이승만 망명 이후로도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치는 반공정권이 수많은 제주도민을 4.3 사건을 언급하였다는 이유로 체포하고 고문했던 것까지 합치면 실질적인 지속 기간을 더 길게 볼 수도 있다.
목호의 난과 함께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이며, 결7호 작전과 함께 근현대 한국사에서 제주도를 슬픔의 섬, 침묵의 섬으로 바꾼 비극이다. 그리고 여순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6].
또한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미군정 역시 무거운 책임이 있다. 아무리 미국 입장에서 제주도는 냉전 상황에서 군사 요충지 및 임시 거점으로 쓰일, 공산화되면 안 되는 곳으로 보일 수도 있더라도, 미군정은 결코 그 요충지와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좋게 대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주민들을 탄압하던 일제에 협력했던 기존 관료들을 그대로 쓰고 복시환을 비롯한 밀항선을 통해 자원을 자신들의 주머니으로 빼돌리는 모리(謀利)행위를 하였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주민들의 항의를 경찰이 총부리를 겨누어 일부 주민을 진짜로 죽이자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좌익 탄압이라는 이념하에 폭력의 소용돌이를 더 크게 키웠다. 결정적으로 경비대가 이 폭력의 소용돌이를 수습하려 무장대와 맺은 4.28 협정이 정체불명의 세력의 훼방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군정은 김익렬의 진상 보고를 무시하였고 끝내는 학살을 결정하였다. 실제로 피해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초토화작전으로 인해 생긴 것이었다.
이승만과 미군정도 문제였지만, 남로당 제주도당 또한 사건의 책임을 져야 할 주역이자 범죄자들이다. 미군정의 폭정을 기회로 삼아 자신들이 권력을 쟁취하고자 선동과 무장봉기를 통해 대안 없이 일을 크게 벌리면서도, '등산(입산)'[7]하면 혁명적, 부등산은 비겁 행위'라며 제주도민들에게 입산을 요구했다. 이들과 북한이 연결되면서 제주도민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해진 반면 김달삼, 강규찬, 안세훈, 고진희, 문등용, 이정숙 등 남로당 지도부 6인은 도민들이 죽어가는 와중에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구실로 떠나버렸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무장대 역시 조금이라도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주민들을 상대로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다.
결론적으로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각각의 집단들이 학살행위를 벌였다는 점에서, 그 누구도 책임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끔찍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인민의 해방과 자주를 부르짖던 무장대, 폭동에서 국민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대한민국 정부에 속한 군과 경찰, 그리고 정부 수립 전 지역의 치안유지와 주민 안전의 총 책임을 맡고 있던 미군정까지 모두 학살에 가담하거나 방관, 조장하여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제주도에 흩뿌려진 비극적 사건이기도 하다.
2. 기원[편집]
제주섬, 강요배, 1989
2.1. 해방 직후의 제주도[편집]
2.2. 1947년 3.1 발포 사건과 저항[편집]
제주 4.3 사건의 직접적인 기원
1947년 3월 1일에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려 2만 5천~3만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이 날 행사를 끝낸 군중들이 가두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던 관덕정을 지나가고 기백 명 정도의 군중이 시위행렬을 구경하고 있던 도중 사건이 하나 터졌다. 오후 2시 45분 경, 기마경관 소속의 임영관(任永官) 경위가 시위를 막기위해 군중들을 헤치다가 제북교에서 관덕정으로 들어서는 길 모퉁이를 돌려 할 때 고빗길에서 서성대던 어린이를 타던 말의 말굽에 아이가 채었는데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을 비난하며 몰려들었고 기마경찰은 황급히 도망쳤다.[그러나][진실은] 군중들은 도망가는 기마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돌팔매질과 더불어 거리가 난장판이 되기 시작하자 그러자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은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 알고 응원경찰들롸 하여금 관덕정 주변의 사람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10] 이 일로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11][12]
경찰의 발포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이 날 시위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사망자는 하나도 없었고,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망자 6명 중 5명이 등 뒤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사망자들이 시위가 관련이 없으며 경찰의 발포가 과잉 대응이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미군 정보보고서도 이들의 발포를 비이성적이라 규정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경찰은 자신들의 이 발포를 정당화하기에 급급했다. 관덕정 앞에서의 발포가 치안을 위한 정당방위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3월 1일의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다는 미확인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흘렸다. 3월 1일 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이 제주도에 선포되었고, 다시 수백 명의 응원경찰이 육지로부터 파견됐다. 여기에 3월 1일의 시위와 관련하여 여러 명이 경찰에 끌려가자 제주도의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
2.3. 총파업에서 4.3 전야까지[편집]
한편 발포사건으로 격앙된 민심은 남조선로동당에게는 좋은 기회로 다가왔다. 남조선로동당은 제주도 내의 좌익 세력을 이끌면서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여기에 호응했다[13]. 거기에 3.1 발포사건의 진상을 아는 우익 세력들도 우려를 나타내며, 점차 경찰을 향해 광범위한 비판적 여론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3월 10일부터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파업(!)이 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14] 관공서는 물론이고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회사, 학교 등에서 공무원,[15] 노동자, 학생들은 일제히 파업했고, 이는 13일까지 제주도 전역으로 퍼졌다. 파업 참여자들은 3.1 발포사건에 대한 사과와 발포자 및 책임자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 등을 주장했다. 심지어 제주도 출신의 경찰들도 파업에 참여하여 직장을 이탈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총파업은 이후의 이념적인 무장봉기나 국가권력 주도의 학살이 연상되기 어려운, 어느 정도 민중항쟁의 성격을 띄고 있었고, 총파업에 참여한 직장과 사람들은 166개 기관, 41,211명이었다.
하지만 중앙정부인 미군정은 철저히 이런 요구 조건을 무시해버렸다. 미군 보고서는 총파업의 원인이 3.1 발포사건에 대한 분노와 남조선로동당의 선동에 있다고 봤지만,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이라며 제주도민들을 좌익으로 몰아갔다[16]. 미군정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좌익을 탄압해 총파업을 와해시키려고만 했다.곧 파업에 참여한 66명의 경찰이 해임되고 그 자리는 육지[17]에서 온 서북청년회[18] 소속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그러면서 경찰은 파업 본부를 습격하고 파업 참여자들을 잡아가며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탄압 때문에 3월 말부터는 총파업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탄압은 계속되었다.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파업 참여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한동안 이어졌고, 검거된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47년 3.1 발포사건 이후부터 1948년 4월 3일까지 2500여 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들을 수용하기에 제주도의 감옥은 너무 좁았고, 때문에 미군 감찰반의 보고에 따르면 약 3평 정도의 방에 35명이 갇혀 있을 지경이었다. 수용자들의 상태가 최악이었던 것처럼 감옥에 갇히지 않은 사람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1947년 유해진이라는 사람이 도지사로 부임했는데, 그는 미군정에게도 극우파로 규정된 인물로서 도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정치적 반대파만 탄압하고자 하였다. 유 지사는 "일반 대중을 극좌단체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극우단체의 힘을 빌렸다"고 발언하기도 하여, 제주도를 감찰하던 미군정 넬슨 중령은 "유 지사가 무모하고 독재적인 방법으로 정치이념을 통제하려는 헛된 시도를 해왔고... 경찰은 수없이 테러활동을 했다"며 사태가 봉기로 치닫을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에 맞춰 도내 곳곳에서 서북청년회원들은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거나,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 여러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되면서 점차 제주도민과 경찰 사이의 충돌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1948년에 접어들면서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했다. 경찰에 끌려간 20대 젊은이 3명이 잇달아 사망한 것이다. 경찰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망한 이들은 모두 고문으로 죽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이 때문에 1948년 남한을 방문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회의에서 프랑스 대표가 고문치사 사건을 언급하며 질문을 했으며, 국제적인 관심이 있던 덕분인지 관련 경찰들은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형벌을 내렸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날을 기점으로 제주도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3. 전개과정[편집]
제주 4.3 사건/전개과정 문서 참조
4. 결과[편집]
제주 4.3 사건 민간인 피해자 조사 결과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19]
구분
신고인 수
희생자 수
유족인 수
계
사망자
행방불명자
후유장애자
총계
9,917
14,028
10,715
3,171
142
28,561
제주도
57
87
73
12
2
203
제주시
3,146
4,606
3,389
1,180
37
7,743
서귀포시
953
1,322
1,012
297
13
2,974
북제주군
3,404
4,714
3,626
1,024
64
10,031
남제주군
2,357
3,299
2,615
658
26
7,610
● 사망자 중 10955명(78.1%)가 토벌대에 의해, 1764명(12.6%)가 무장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 대부분의 사망자는 대토벌작전이 벌어졌던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까지의 기간에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대 제주도민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추정치는 3만명에서 최대 8만명)된 것으로 추정된다.[20] 말하자면, 친척 몇 다리만 건너면 4.3사건 희생자라는 뜻인데 실제로 오늘날도 제주도에 가 보면 촌락별로 제사가 거의 비슷한 날 치러지는 걸 보면 당시에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학살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21]
브루스 커밍스는 제주 평화포럼에서 1949년 제주도민 사망자가 6만명 발생한 것으로 당시 임관호 제주도지사가 미 정보국에 전달했다는 전문가의 주장을 제기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바다를 건너 부산으로, 일본으로 피난을 떠난 제주도민들이 상당수 있었다. 뭍으로 건너온 피난민들의 대부분은 영도 쪽에 정착해서 살았다. 제주은행 부산지점이 부산의 중심가가 아닌 영도구 남항동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며, 영도에는 여전히 많은 제주 출신 해녀가 활동하고 있다. 덤으로 제주도민회관도 영도구에 있다. 공교롭게도 영도도 부산 안의 섬이다. 일본으로의 피난은 밀항으로 일단 자료로 확인된 일본행 밀항자는 281명이다. 자료로 확인된 숫자만 저 정도고 여러가지 밀항 루트로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 인물[편집]
※ 학살 및 폭력행위에 관여한 경우 ★ 표시
5.1. 무장대[편집]
김달삼 ★
이덕구 ★
김의봉 ★
5.2. 군경토벌대[편집]
송요찬 ★
유해진 ★ [22][23]: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제주도지사로 부임해 학살에 깊이 관여했다.
조병옥 ★ : 제주도 강경진압 및 학살에 가장 깊이 관여했다.
탁성록 ★
김익렬
유재흥: 이승만 정권이 승인한 계엄령 이후 송요찬이 벌인 결과를 치운 공로가 있으며, 정부에 계엄령 해제를 건의해서 받아낸 것도 유재흥이다. 한국전쟁 당시 현리 전투 등의 실책과 겹쳐 학살자로 오해받았다.
문형순: 당시 성산포경찰서, 모슬포 경찰서장을 역임. 예비 검속으로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총살을 거부하고 모두 석방했다. 이 때 일명 '자수사건'도 벌어졌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군경이 주민들에게 '자수'를 강요해놓고 정작 자수한 주민들을 '빨갱이 혐의가 있다'며 학살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자수를 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다'라는 생각에 제대로 자수하거나 군경에게 협조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군경에게 협조하도록 주민들을 설득하는 일을 하던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이 문형순에게 '자수하는 주민들은 죄가 없으니 살려달라'고 부탁했고, 문형순은 이를 받아들였다. 주민들이 자수하러 경찰서에 오자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주민들을 처벌할(= 학살할) 준비를 하였으나 문형순은 이들을 내쫒고, 이후 주민들의 자술서를 읽고는 '시시하다. 아무런 내용도 없다'며 주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런 노력으로 그가 관할하던 지역은 제주도에서 가장 적은 8명의 사상자만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때 미운 털이 박혔는지 1953년에 경찰에서 퇴직한 뒤 쌀 배급소, 극장 직원 등의 일을 하다가 1966년 병사했다. 문형순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나온 제주 지역언론 기사 이를 소재로 한 역사 만화 상편/하편
6. 사건 이후[편집]
6.1. 관련자의 이후 동향[편집]
4.3과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은 4.19혁명을 기점으로 많이 축출당하거나 사망했다. 면밀히 들여다보면, 좌익 측 사건의 주동자인 김달삼은 협상이 결렬되자 북한으로 빤스런도망갔다가 6.25 전쟁 때 무장공비 지휘관으로 강원도 쪽을 헤집다 정선군에서 처형당해 죽었다. 김달삼이 북한으로 향한 후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과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자리를 넘겨받은 이덕구는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게 집중사격을 받고 사살됐다. 유격대가 무너져가고 도민들의 희생이 누적되는 가운데 투쟁을 중단하고 대피 생활을 지시했던 유격대 사령관 송원병, 조직부책 백창원, 군사부책 고승옥은 이에 반발한 대원들 손에 죽었다. 우익 측 인물 중 강경 진압을 지시한 조병옥은 4.19 혁명 전 병으로 사망, 송요찬은 정군운동으로 강제 예편당했고, 탁성록은 언제 죽었는지 모르나 학살을 저지른 데다가 마약쟁이라 오래 못 살았을 것이고, 김창룡은 이승만 정권 밑에서 충실하게 개 역할을 하다가 1958년에 프래깅당하고, 김종원 역시 4.19 혁명 이후 병으로 사망한다. 미군정 치하에서 제주지사를 역임하며 서북청년단을 제주도 내 공직에 앉혀 불씨를 만든 유해진은 인민군에게 붙잡혀 전주형무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예외적으로 최덕신은 박정희 정부 때까지 잘 있다가 중간에 내쳐지고 월북하였다.
이렇게 4.3 관련자들은 최덕신을 제외하곤 이승만 정권 중 사망하거나,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쫒겨났지만, 그 중 아무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은 처벌할 수 없었고, 박정희 정권의 '반공논리'에 의해 4.3 사건이 부정되면서 그나마 살아있는 사람마저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끝내 처벌받은 무장대 측 인물 역시 민간인 학살이 이유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이유에서 처벌받았을 뿐이었다. 한편 학살을 방조하고 묵인한 미군정 역시 사죄나 반성이 없이 본국으로 복귀했다.
6.2. 피해자들의 후유증[편집]
4.3사건을 경험한 유족들의 회고를 들어보면 이념과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
얼마나 미쳤냐면 총살은 기본으로, 비협조적인 사람이나 경찰과 군인의 가족들은 본보기로 참수형에 처했고 연좌제를 적용한다며 친인척이나 면식이 있는 사람들을 공개처형했으며, 손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육지 출신 군경이 직접 죽이지 않고 제주 사람들으로 구성된 민보단을 이용해 사람들을 한라산에 몰아 죽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사냥'하였고 이들이 추위에 못 버텨 귀순하자(일명 '귀순자'들) 격리 수용하다가[24] 한국전쟁의 발발로 이들을 학살하는 일도 있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을 모아두고 돌팔매질을 하게 린치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비학동산이라는 곳에서는 임산부를 나체로 팽나무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들의 잔인함에 대한 증언 중에는 당시 폐허가 된 마을에서는 땅을 조금만 파도 시체가 마치 젓갈(멸치젓. 제주 말로 '멜젯') 담근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는 증언, 제주 폭포 상당수는 '민간인'을 과녁으로 쓰는 서청이나 군대의 '사격장'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심지어 일본군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영아 살해' 마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수습하고 진압하려 한 14연대는 자신들이 개입하기 전까지 살아 남은 제주도의 거주자 대부분이 직간접적인 가해자라는 상황 속에 수습할 타이밍을 놓쳐 보복성의 성격을 가진 여순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특히 이 모든 학살은 1940년대, 1950년대의 섬에서 벌어졌다. 지금에서야 항해, 비행 기술이 발달해 더 이상 섬도 단절된 기분이 들지 않고 마치 한반도와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지만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배가 몇 척 없을 정도로 제주도는 거의 단절된 섬 수준이었다. 그 시대에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몇 사람만 거치면 4촌 아래 혈족일 수준으로 외부 사람의 유입이 적을 텐데, 그곳에서 연좌제를 적용하여 잔인한 학살을 한 것이다.
4.3 사건 기간 동안 가족과 지인 등 가까운 주변인들도 쉽게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계속 반복되자, 마을에 남아있으면 누구든 빨갱이로 몰려서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과 억울함에 휩싸여서,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 라는걸 증명함과 동시에 민간에서 억울한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많은 제주도 청소년들이 일찌감치 국군에 자원 입대했는데, 당시 제주도에 주둔했던 군대가 해병대였기 때문에 자연히 해병대로 입대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 제주도 청년들은 한국전쟁 동안 거제도 탈환작전, 인천상륙작전 등에 참여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25]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4.3 사건기간의 후반기 때 당시 제주지역 계엄군을 맡고 있던 해병대도 양민학살에 가담했었다는 것이다.#[26] 어쨌든 해병대도 양민 학살에 참여했다는 것은 해병대의 흑역사로 남아 있다.
4.3 사건 후기에서 정부는 계엄령을 폐지하고 산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에게 귀순을 권유하였는데, 6.25 전쟁 중 예비 검속으로 이때 귀순한 사람들 다수가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27] 게다가 귀순한 사람들 말고도 무고한 사람들 다수가 모함이나 잘못된 정보에 의해 희생되었다. 마을 유지들한테 밉보였던 이들, 아니면 그 사람들의 일가친척 등이 학살 당한 경우가 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 중 가족이 사건에 연루되어 가족에게 전과기록이 남은 사람은 민주화 이전까지만 해도 연좌제를 적용받아 공무원, 교사 등 공직에 진출하거나 출국하는 게 불가능했다. 이는 본인이 아무리 반공주의자라고 해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올가미였다.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지대하여, 제주도민의 보통 제주 밖을 일컫는 육지(한반도 측) 사람들에 대한 인식마저 극도로 악화되어 1990년대까지(!) 육지에서 제주로 시집오거나 장가온 사람들은 괜히 그런 이미지를 덧씌워받아 고생한 일이 많았다. 21세기인 지금도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과 대화하다 그쪽 화제가 나오면 진저리를 치시며 심하면 아예 대화를 끊으실 정도이다. 바로 눈 앞에서 가족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걸 본 입장에서는 절대로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을 무덤덤하게 꺼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제주도에서 이 슬픈 역사의 자화상 때문에 레드 컴플렉스가 극심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육지 측에서는 제주도 출신을 공산주의자의 자손 취급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한편 제주도 방언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사건 당시 제주도 방언을 쓰는 사람들은 피해를 당하지 않게 제주인인 척을 안 하려고 억지로 제주도 방언을 기피하는 경향이 생겼고, 사건 이후에도(현재는 사라졌지만) 제주도에서 제주도 방언은 훈육의 대상이었다. 수업 중 제주어를 사용한 교사는 장학관에게 지적을 받았고, 제주어를 사용하는 학생은 수업중에는 반드시 표준어만 사용하도록 강요받는 사례도 있었다. 게다가 6.25 전쟁 이후 육지 학생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사투리는 촌스럽다'라는 인식까지 퍼져 현재 언어 사용인구가 약 5,000~10,000 명까지 줄어들었으며 이는 현 제주도 인구의 1/60수준이다. 그래서 현재 유네스코에 의해 소멸 위기의 언어 가운데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에 등록될 정도로 소멸 위기 상태이다. 다행히 현재 제주어는 보존되고 지켜야 할 소중한 유산이자 언어로 자리 잡았으며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에선 거주민들에게, 특히 학생들에게 제주어를 배우고 사용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일례로 제주의 초등학교들에서는 '제주어 사투리 연극 대회'가 열린다. 실제 제주어 대본을 가지고 연극을 한다.
또한 이 사건은 제주도에서 기독교 전체에 대한 인기가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미 신축민란을 계기로 천주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이 4.3 사건 당시 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회는 보수 개신교와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고, 이는 당연히 개신교에 대한 반감으로도 이어졌다. 이 때문에 21세기 현대에도 제주도 기독교 신자의 비율은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틀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그리고 4.3 사건은 제주 지역의 정치 성향이 '육지'에 있는 당과 상관없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제주도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한 학살을 저지른 이승만 정권은 4.19 혁명으로 인해 축출되고, 조병옥이 중심인물이던 민주당이 세운 제2공화국 정권도 5.16 군사정변으로 해치워져 어느 당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게 되었기에 제주도의 선거 양상은 당보다는 지연에 기반한 인물을 중시하고, (일명 제주도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당, '궨당'.) 제주도 출신 중 중앙 정계에 영향력 있는 인물을 배출하고 싶어하게 되었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4.3 사건의 진상규명을 도와준 적이 많은 민주당계 정당의 성적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 계열 성향의 무소속 후보(우근민)가 당선되었고 2008년 18대 총선과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가 모든 선거구를 싹쓸이해갔으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3개 선거구에서 모두 당선되었다.
그렇다고 보수정당의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새누리당 후보였던 박근혜와 원희룡이 각각 승리하였다. 새누리당 후보들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4.3 사건, 지연 등이었는데, 박 후보는 4.3 해결과 국가추도일 지정을 공약했으며, 원 후보의 경우는 본인이 고향인 제주도에서 먼치킨 급의 좋은 이미지(학력고사 및 사법시험 수석, 보수 정당 내 소장파 등)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주 출신을 중앙 정계에 고위 정치인으로 진출시키고 싶은 것이 보수정당의 당선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현오봉 전 의원의 경우 공화당의장을 역임했고 19대 총선 당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현경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도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에서 6선을 거두었으며, 민정당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친박계 측근으로 비서실장에 유력시되었다. 물론 박정희, 전두환 역시 4.3 사건을 부정하며 이를 언급하기만 해도 탄압하였기에 제주도민들이 보수정당에 대한 (호남보단 덜 하긴 하지만) 껄끄러움이 어느 정도 남아있다.
또한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제주해군기지 사업이나 제주 신공항 사업 등에 대해 제주도민들의 거부감이 굉장히 높아지게 된 영향이 있다.
6.3. 민주화(6월 항쟁) 이후에도 계속된 부정[편집]
민주화 이후에도 4.3 사건에 대한 탄압은 계속됐다. 노태우 정부까지만 해도 정도가 비교적 약해졌을 뿐이지 경찰에서는 학살 피해자들의 유족들을 단순한 안부인사나 행정상의 가정방문 등을 명분으로 주기적으로 감시하고 방문/소환조사를 하였으며[28]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는 중에도 다른 면에서는 이런 탄압이 존재하였다. 문민정부와 역사바로세우기가 끝난 김대중 정부까지도 주민들은 진상규명과 경찰의 감시/연행/연좌제 중단, 피해보상 등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냈다. 아래 항목인 '문화에서의 4.3 사건'에 적혀있듯이 다큐멘터리와 관련자들이 탄압받은 적이 있으며, 이는 참여정부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참여정부 이후 다시 돌아온 보수정부 시대에는 다시 묻으려고 했다. 이명박 정부 시기, 원세훈 국정원장 시절인 2009년에 어처구니 없게도 최고의 간첩전문가도 탄압을 받은 일이 있다. 윤 모 단장은 지난 2009년 5월 때 감찰실 직원과 점심을 먹다가 "제주 4.3 진압은 정부 쪽에서 심하게 한 측면이 있다"는 말을 했다. 감찰실은 윤 단장의 발언을 '좌파적 발언'이라고 몰았고, 윤 단장은 대기발령당했다[29]. 미군 G-2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한 제주도민들 중 80%이상은 토벌대에게 죽었다. 윤모 단장이 한 말은 좌우파를 떠나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기발령을 받은 것이다.
2014년에 새로 바뀌는 역사 교과서에서는 실리지 않는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사 교과서에 기재되었다. 설명이 줄기는 했는데 이건 과목 전반의 문제라...
마침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인 이영조[30]가 2010년 11월 5일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벌어진 국제학술회의에서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 폭동(communist-led rebellion)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빚게 되었다. 사실 관계만 논하자면 4.3사건은 일단 남로당에 의한 폭동이 맞긴 맞지만, 문제는 이를 진압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의 희생을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논란이 된 것.
2014년에 박근혜정부의 공약에 따라 4.3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공약을 안 본 거 같은) 자칭 우파 단체가 반발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까지 언급했다. # 또한 제주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박원순 서울시장이 만든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좌익폭도들을 감싸고 이승만 대통령을 학살자로 만드는 등 왜곡되었다며 박원순 시장의 사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요즘 "대한민국 예비역 영관장교 연합회" 라는 어버이연합과 비슷한 시기에 반짝 하고 나타난 극우단체가[31] 제주 4.3사건때 일어났던 군의 학살을 극구 부정하고, 군이 오히려 정당한 대처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2017년 시점에도 제주 4.3 사건은 다른 대한민국의 민간인 학살사건인 보도연맹 학살사건, 광주학살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인지도가 적고, 공교육 과정에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교과서만 해도 국사 과목 시절 국정교과서에는 4.3 사건이 날개로 아주 짧게 나온 것으로도 모자라 반공논리를 내세운 서술이 눈에 띌 정도였다. 그나마 제7차 교육과정 내 한국사 검정교과서에서는 비상교과서 기준으로 서술도 좀 중립적으로 바뀌었고 탐구활동으로 관련 자료를 더 추가했다.
〈제주4·3 인지도 및 인식조사〉 에 따르면 응답자 중 68.1%는 4.3사건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다" 고 답하긴 했지만, 4.3사건에 관심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의 비율은 16.2%에 그친 반면, 관심이 없다고 응답한 사람들의 비율은 50.2%에 달했다. 이는 99%가 관심을 보인 5.18 광주민주화운동, 75.7%가 관심을 보인 노근리 학살 사건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수치이다. #관련기사
또한 남로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4월 3일 이전에는 제주 4.3 사건이 민중항쟁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걸 선뜻 떠올리는 국민은 연령과 지역을 막론하고 드물다. 4.19 혁명, 부산·마산 민주 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 다른 대한민국의 민중항쟁도 유명세에 비하면 놀랍도록 전문가에 의한 학술적 연구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인데, 4.3에 대해서는 제주지역 언론, 시민단체, 향토사학자들이 아니고서는 거의 관심을 가져 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4.3에 대해서 남아있는 자료의 수는 결코 적지 않지만 대다수의 논자들이 이를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는 것도 문제다. 십수년 전 제민일보사에서 출간한 '4.3은 말한다' 같은 연구서만 해도 두꺼운 책이 5권이나 현재 절판되어 도서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다.
7. 진상규명운동과 추모 및 사과[편집]
7.1. 1960년대 ~ 1970년대[편집]
7.2. 1980년대 ~ 1990년대[편집]
민주화 이후, 4.3 사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추모와 진상 규명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1989년 4월 3일,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제주에서 '41주기 4.3추모제'를 지냈다. 같은 날, '제주신문'에서 '4.3의 증언'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0년 6월 '제주도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를 조직하여 1991년 4월 3일에 유족들을 비롯한 제주도민의 주도로 위령제를 진행하였다. 제주도의회 역시 1993년에 '4.3특별위원회'를 설치해 피해 조사를 하기 시작했고, 1994년을 기점으로 위령제를 유족회와 제주도의회 공동 주도의 합동위령제로 지내게 되었다. 비록 노태우 정부 시절까지는 이런 움직임조차 탄압의 대상이 되었지만, 민주화가 된 이상 탄압이 진상 규명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언론도 4.3에 대한 보도에 나섰다. 제주지역의 신문들이 앞장섰는데, 특히 『제민일보』가 1989년부터 연재한 <4.3은 말한다>는 1999년까지 10년 동안 5000여 명 이상의 사람들의 증언과 한국과 미국의 관련 자료들을 통해 500회가 넘는 기사를 내는 성과를 내었다. 그리하여 제민일보는 1993년 한국기자상을 수상했으며, 연재기사 대부분이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한편 일부 연구자와 저자를 통하여 4.3을 진보적 시각에서 다룬 책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정치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우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대에는 역사바로세우기와 맞물려 "공인된 단체에서 진상규명 작업을 할 경우 정부에서 모든 협조를 하겠다"는 정부 입장이 표명되었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제주도의회에 의해 '4.3피해신고실'이 설립되었다. 1996년 3월에는 신구범 당시 제주도지사가 정부에 제주 4.3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고, 11월에는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국회 4.3특별위원회 구성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전 대통령 당시 대선후보 역시 제주 4.3 사건의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당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진상 규명에 힘을 쏟았다.
질문: 한국과 미국정부는 1948년 제주 4·3사태에 대한 진상을 서로 언제 공개할 방침입니까?
대통령의 답: 제주 문제가 국회에 청원되어 있습니다. 정부로서는 과거의 억울한 문제에 대해서는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지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문제는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해서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1998년 11월 23일 CNN 회견 중
김대중 대통령은 CNN과 가진 회견에서도 제주 4.3 사건을 언급하였고, 이 내용은 당시 ‘한라일보’에도 보도되었다. #[32]
특히 15대 국회의 회기와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에는 제주 4.3 사건의 문제 해결을 21세기로 미룰 수 없다는 구호 아래 4.3도민연대, 제주종교인협의회, 4.3범국민위원회 등이 4.3특별법 제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응하여 4.3특별법안을 발표하고 제출한 국회의원 113명은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새정치국민회의 측은 위원회 설립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특별법 제정에 소극적이었지만, 시민들의 거센 반발으로 인해 선회하여 특별법 제정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렇게 1999년 12월 16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해 2000년에 시행되었다. 비록 특별법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부터 세세한 내용까지 살피는 완벽한 법안이었던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2000년대 이후 진상 규명 논의는 더욱 활발해졌다.
7.3. 2000년대[편집]
사과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정부는 참여정부였다. 2003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사건 55년 만에 최초로 국가원수의 첫 사과를 하고, 200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최초로 4.3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2006년 4월 3일 4.3사건 58주기 위령제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과거사 정리 약속을 포함한 추도사를 하여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사과하였다. 위령제 당시 김태환 제주지사와 4.3 사건 유족 대표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33].
반면 참여정부 이후 보수정권 측은 사과 및 진상규명에 미온적이었고, 그나마 2014년에 박근혜정부에서 '4.3희생자 추념일'을 처음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였으나 9년 동안 대통령(이명박, 박근혜)의 참석이나 특별한 언급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국가정보원 소속 간첩전문가인 윤 모 단장이 2009년에 점심 식사 중 4.3 사건의 토벌대 책임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대기발령을 당하고, 박근혜정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로 나온 한국사 국정교과서에서는 제주 4.3 사건에 대한 기술이 기존 교과서보다 축소·후퇴하였다는 게 밝혀지는 등 어느 정도는 제주 4.3 사건을 묻으려 한 정황도 있었다. #
4.3사건 70주년을 앞둔 2017년 4월 8일에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하였고, 10월 17일에는 제주 4.3 관련 유관단체들은 서울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학살 당시부터 침묵해 온 미국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고자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UN의 책임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서명 운동'을 개시하였다. 서명을 원하시는 분은 이곳을 찾자.
2018년 4월 2일에 제주도 교육청과 대만의 가오슝시교육청은 4.3사건과 2.28 사건에 대한 교류협약을 체결했다.# 같은 날, 교황 프란치스코가 제주 4.3 사건 70주년 추념식을 앞두고 교황청 국무원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 명의로 보낸 메시지를 통해 이 행사가 치유와 화해를 증진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 교황이 4·3 사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해 위로 메시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8년 4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이 70주년 4·3희생자추념식에 참석하였다. 문 대통령은 12년 만에 4.3 추모행사에 참석하는 대통령으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다시 한 번 사과하고,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
7.3.1. 노무현 전 대통령 위령제 추도사 전문[편집]
추도사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제주도민과 4.3 유가족 여러분,
우리는 오늘, 58년 전 분단과 냉전이 불러온 불행한 역사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저는 먼저,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4.3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오랜 세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디어 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무력충돌과 진압의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 되었던 잘못에 대해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제주도민과 유가족 여러분,
2년 반 전, 저는 4.3사건 진상조사 결과를 보고 받고,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하여 여러분께 사과드린 바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보내주신 박수와 눈물을 저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동안 희생자 명예회복과 추모사업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지난달에도 2,800여명을 4.3사건 희생자로 추가 인정했고, 이곳 4.3평화공원 조성을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유해와 유적지를 발굴하는 일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이제 4.3사건위원회가 건의한 정부의 사과와 명예회복, 추모사업 등은 나름대로 많은 진전이 이뤄진 것 같습니다.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국민적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가능한 부분부터 점진적으로 풀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4.3사건을 제대로 알리고, 무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자랑스런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야 합니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국가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입니다. 그랬을 때 국가권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확보되고 상생과 통합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과거사 정리 작업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의 걸림돌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벌하고, 무엇을 빼앗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분명하게 밝히고, 억울한 누명과 맺힌 한을 풀어주고,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다짐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통해 통합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하나하나 매듭지어갈 때, 그 매듭은 미래를 향해 내딛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보배입니다. 우리 국민은 물론 세계인이 사랑하는 평화의 섬, 번영의 섬으로 힘차게 도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주도가 반드시 해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도민 여러분은 폐허를 딛고 아름다운 섬을 재건해냈고, 어느 지역보다 높은 자치역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민 스스로 결의해서 항상 중앙정부가 기대하는 이상의 높은 성과를 이루어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앞장서 나아가는 만큼 정부도 열심히 성원하고 힘껏 밀어드리겠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풍요롭고 활력 넘치는 제주를 만들어 나갑시다. 이 평화의 섬을 통해 한국과 동북아의 평화, 나아가 세계의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합시다. 그리고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이 행사를 지켜보면서 엄청난 고통과 분노가 시간이 흐르면서 돌이켜 볼 수 있는 역사가 되고, 역사의 마당에서 진행되는 공연을 보면서 수십년이 흐르면 이게 제주도의 새로운 하나의 문화로써 자리 잡고, 그것이 우리 모든 국민들에게 분노와 불신과 증오가 아닌, 사랑과 믿음, 화해를 가리켜주는 그런 중요한 상징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됐습니다. 함께 노력합시다.
다시 한번 4.3 영령들을 추모하며,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7.3.2. 문재인 대통령 4.3희생자 추념일 추념사 전문[편집]
추도사 전문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제주도민 여러분,
돌담 하나, 떨어진 동백꽃 한 송이, 통곡의 세월을 간직한 제주에서 “이 땅에 봄은 있느냐?”
여러분은 70년 동안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주의 봄을 알리고 싶습니다.
비극은 길었고,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 만큼 아픔은 깊었지만 유채꽃처럼 만발하게 제주의 봄은 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4.3을 잊지 않았고 여러분과 함께 아파한 분들이 있어, 오늘 우리는 침묵의 세월을 딛고 이렇게 모일 수 있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4.3의 통한과 고통, 진실을 알려온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제주도민들께 대통령으로서 깊은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습니다.
이념이란 것을 알지 못해도 도둑 없고, 거지 없고, 대문도 없이 함께 행복할 수 있었던 죄 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습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마을 주민 전체가 학살당한 곳도 있습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1, 3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념이 그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학살터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한꺼번에 가족을 잃고도 ‘폭도의 가족’이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고통은 연좌제로 대물림되기도 했습니다.
군인이 되고, 공무원이 되어 나라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자식들의 열망을 제주의 부모들은 스스로 꺾어야만 했습니다.
4.3은 제주의 모든 곳에 서려있는 고통이었지만, 제주는 살아남기 위해 기억을 지워야만 하는 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 못할 세월동안 제주도민들의 마음속에서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4.3을 역사의 자리에 바로 세우기 위한 눈물어린 노력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1960년 4월 27일 관덕정 광장에서, “잊어라, 가만히 있어라” 강요하는 불의한 권력에 맞서 제주의 청년학생들이 일어섰습니다.
제주의 중고등학생 1천500명이 3.15 부정선거 규탄과 함께 4.3의 진실을 외쳤습니다.
그해, 4월의 봄은 얼마 못가 5.16 군부세력에 의해 꺾였지만, 진실을 알리려는 용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4.3 단체들이 기억의 바깥에 있던 4.3을 끊임없이 불러냈습니다.
제주4.3연구소, 제주4.3도민연대, 제주민예총 등 많은 단체들이 4.3을 보듬었습니다.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되었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 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분들도 있었습니다.
유신독재의 정점이던 1978년 발표한,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석범 작가의 ‘까마귀의 죽음’과 ‘화산도’.
이산하 시인의 장편서사시 ‘한라산’.
3년간 50편의 ‘4.3연작’을 완성했던 강요배 화백의 ‘동백꽃 지다’.
4.3을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 조성봉 감독의 ‘레드헌트’.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임흥순 감독의 ‘비념’과 김동만 감독의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故 김경률 감독의 ‘끝나지 않는 세월’.
가수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
때로는 체포와 투옥으로 이어졌던 예술인들의 노력은 4.3이 단지 과거의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4.3의 진실을 기억하고 드러내는 일이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의 길을 열어가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민과 함께 오래도록 4.3의 아픔을 기억하고 알려준 분들이 있었기에 4.3은 깨어났습니다.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리고, 또한 깊이 감사드립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의 승리가 진실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2000년, 김대중 정부는 4.3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고, 4.3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4.3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위령제에 참석해 희생자와 유족, 제주도민께 사과했습니다.
저는 오늘 그 토대 위에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합니다.
더 이상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유해 발굴 사업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끝까지 계속해나가겠습니다.
유족들과 생존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배·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습니다.
4.3의 완전한 해결이야말로 제주도민과 국민 모두가 바라는 화해와 통합, 평화와 인권의 확고한 밑받침이 될 것입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지금 제주는 그 모든 아픔을 딛고 평화와 생명의 땅으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4.3 영령들 앞에서 평화와 상생은 이념이 아닌, 오직 진실 위에서만 바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좌와 우의 극렬한 대립이 참혹한 역사의 비극을 낳았지만 4.3 희생자들과 제주도민들은 이념이 만든 불신과 증오를 뛰어 넘었습니다.
고 오창기님은 4.3 당시 군경에게 총상을 입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3기’로 자원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습니다.
아내와 부모, 장모와 처제를 모두 잃었던 고 김태생님은 애국의 혈서를 쓰고 군대에 지원했습니다.
4.3에서 ‘빨갱이’로 몰렸던 청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을 지켰습니다.
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화해와 용서로 이념이 만든 비극을 이겨냈습니다.
제주 하귀리에는 호국영령비와 4.3희생자 위령비를 한자리에 모아 위령단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희생자이기에 모두 용서한다는 뜻”으로 비를 세웠습니다.
2013년에는 가장 갈등이 컸던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조건 없는 화해를 선언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이 시작한 화해의 손길은 이제 전 국민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민들께 호소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4.3의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낡은 이념의 굴절된 눈으로 4.3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대한민국엔 낡은 이념이 만들어낸 증오와 적대의 언어가 넘쳐납니다.
이제 우리는 아픈 역사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행한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만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도 4.3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낡은 이념의 틀에 생각을 가두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보수와 정의로운 진보가 ‘정의’로 경쟁해야 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공정한 보수와 공정한 진보가 ‘공정’으로 평가받는 시대여야 합니다.
정의롭지 않고 공정하지 않다면, 보수든 진보든, 어떤 깃발이든 국민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의 모든 곳에서 이념이 드리웠던 적대의 그늘을 걷어내고 인간의 존엄함을 꽃피울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 나갑시다.
그것이 오늘 제주의 오름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국민 여러분,
4.3의 진상규명은 지역을 넘어 불행한 과거를 반성하고 인류의 보편가치를 되찾는 일입니다.
4.3의 명예회복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으로 나가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제주는 깊은 상흔 속에서도 지난 70년간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외쳐왔습니다.
이제 그 가치는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으로 이어지고, 인류 전체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로 전해질 것입니다.
항구적인 평화와 인권을 향한 4.3의 열망은 결코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대통령인 제게 주어진 역사적인 책무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추념식이 4.3영령들과 희생자들에게 위안이 되고, 우리 국민들에겐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8. 문화에서의 4.3사건[편집]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9. 학계의 시각과 평가[편집]
※ 제주 4.3 사건의 역사적 평가 : 보기 / 접기
단독정부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지향한 4.3 민중항쟁?
남로당 좌익들이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자 일으킨 4.3 폭동?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새기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4.3 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의 설명판에 적힌 글귀
아직까지 '완벽히' 정의되지 못한 4.3
오랜 시간 동안 4.3은 좌익에 의한 폭동이라는 것이 대한민국 정부와 학계의 논지였다. 게다가 수십년 동안 계속된 부정과 탄압으로 인해 학술적인 연구는 전혀 이뤄지지 못하였다. 6월 항쟁 이후인 80년대 후반부터 연구자들이 점차 4.3 사건을 다루면서 어느정도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참여정부 시절 국가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져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되어 사건 당시의 무차별한 학살행위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사건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성격을 정의내리지 못하고 기계적 중립의 명칭인 '사건'으로만 결론내렸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한편 운동권을 비롯한 진보계열에서는 항쟁이라는 단어를 주로 썼다.[34] 이러한 시각은 8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학자들의 연구성과와 4.3을 다룬 예술작품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제주도민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단독정부 수립에 저항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했으며 이 때문에 공권력에 의한 무차별적인 초토화작전으로 대학살이 일어났다고 봤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남로당이 연관된 무장대와 그들에 의해 자행된 학살행위를 설명하는 데에 무리가 따른다.
보수계열과 극우세력에서는 주로 폭동과 반란에 초점을 두어 군경의 진압작전을 정당한 것 내지는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본다. 이러한 주장은 4.3 발생 때부터 줄기차게 이어져 온 것으로 무장대와 좌익의 폭력성과 잔학상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자칫하면 제주도민들을 폭도로 몰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으며 군경의 비인도적 학살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35] 게다가 일부에서는 무장대와 북한과의 관련성 또는 무장대의 잔학성을 강조하면서도, 군경의 학살행위에 대해서는 외면해버리는 내로남불을 보인다.
한편 최근에는 4.3 당시에 발생한 학살에 주목하여 제노사이드의 시각에서 분석하는 관점이 나오고 있으며, 당시 제주도 민중을 피해자로 보고 군경과 무장대의 행위를 동시에 비판하는 관점도 있다. 다시 말해 4.3 사건은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우파와 좌파라는 거대한 세력의 싸움 가운데 애꿎은 제주도민들만 학살당한 사건이며 여기에 논점을 둬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 줄 요약: 우파도 병신, 좌파도 병신
허나 군경들이 빨치산을 잡기 위해서 제주도민을 학살한 일은 부정해서는 안된다. 니콜라이 예조프 항목에도 나와 있는 "한 명의 스파이를 놓치는 것보다 수십 명의 무고한 사람이 고초를 겪는 것이 더 낫다."를 숫자를 수백배로 불려서 실행한 결과이기 때문이다.[36]
9.1. 4.3 사건을 다룬 역사책들[편집]
시인 김명식이 이끌던 재야 역사학 단체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연구원(이하 아라리연구원)'이 1988년에 엮은 <제주 4.3 민중항쟁(총 3권)>이 있는데 이 책은 4.3 학살과 미국의 책임관계를 다룬 서적이었으나, 1990년에 해당 도서가 이적표현물로 판정되고 이를 저술한 김명식이 국보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루기까지 하였다.
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학생이던 노민영이 존 메릴의 논문과 항쟁 관련자인 김봉현의 현장기록 등을 토대로 같은 해에 쓴 <잠들지 않는 남도>가 있었으나, 이 책 역시 이적표현물 판정을 받고 더 이상 나오지 못하다 2018년에 복간되었다.
1994년에는 전예원이 제민일보에서 연재된 <4.3은 말한다>를 책으로 묶어 5권을 펴냈다. 이 책은 일본어판으로 나와 6권이 출판되었다.
2006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역사다시보기'라는 시리즈에서 <제주 4.3>을 펴냈다. 후에 이 책을 집필했던 허영선은 그 내용을 보강하여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를 2014년 출간했다.
한편 뉴라이트를 비롯한 극우세력을 필두로 4.3을 '좌익폭동'이라며 군경의 진압을 정당화하는 내용의 책들이 여러 권 출판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도서들은 불쏘시개 수준으로 군경의 학살이나 제주도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학계에서는 이미 사장된 내용의 학설(남로당 중앙지령설, 북한관계설)을 주장하는 등의 한계를 보인다.
10. 4.3 수형자 문제[편집]
11. 4.3과 일본[편집]
학살을 피하기 위해, 혹은 빨치산에 있다가 검거를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 많다.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도 일본으로 도망간 친척 등을 통해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재일교포 1세대 중에 제주 출신이 유난히 많은 이유가 바로 이 사건 때문.[37] 이러한 이유로 과거에는 한국보다 일본 쪽에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김석범의 장편소설 <화산도>가 본 사건에 대한 재일교포 문단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는 이 사건의 원인을 미국의 남한 점령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 주장하였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피와 뼈' 등으로 잘 알려진 최양일도 4.3 사건을 다룬 영화를 준비 중이라는 얘기가 있었으나 현재까지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제작이 무산된 듯하다.
또한 조류 때문에 학살된 제주도민의 시신들이 일본까지 떠내려 가는 것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일본에는 이때 거두어진 시신들을 화장한 곳에 위령비를 세운 곳이 있다고.
90년대 말에 은퇴한 한국통 일본 외교관이 쓴 회고록이 국내에 출판된 적이 있는데 이 외교관은 젊은 시절 제주도에서 근무했다. 그는 당시 일본인 외교관으로 보기 드물게 한국어를 전공했기에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일반 제주도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는데, 그가 현지에서 사귄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그 사람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사귄 이웃 친구에게 형을 고발당하고 그 형이 처형 당하는 것을 눈 앞에서 보는 참사를 겪었다. 이후, 아버지의 그 이웃 친구는 일본으로 달아났다 수십 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기 아버지에게 "죽기 전에 용서받고 싶다."면서 노구의 몸으로 대문 앞에 무릎 꿇고 빌었으나 아버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대문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 아들은 저런 노인이 저렇게까지 비는데 용서해도 되지 않을까, 했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다고. 이런 내용을 생각하면 피해자와 가해자를 불문하고 가까운 일본으로 달아난 경우가 적지 않은 듯.
2000년대 초반 아직 한국에 대한 정보가 일본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전, 일본의 우익들이나 우파 네티즌은 상기한 4.3 사건의 일본에의 여파와 제주도민들의 일본으로의 탈출 때문에 제주도가 아직도 한국 본토와 사이가 안 좋다거나, 독립을 염원하고 있다거나 하는 낭설이 진지하게 돌았었다.오키나와 생각났나 거기에 근거해 한국과 전쟁을 하게 되면 제주도민의 도움을 받아 제주도를 해방시키자고 하는 주장도 있었다. 이후 한국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흘러들어가며 그런 낭설은 줄었지만, 개중엔 아직도 제주도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2018년에 오사카에서는 4.3사건 위령비가 건립될 예정이다.# 그리고 11월 18일에 위령비가 들어섰다.
12. 제주 4.3 사적지[편집]
제주 4.3 유적지와 제주 4.3 길 항목 참고
13. 여담[편집]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in Korea:Cheju-Do)
11분 53초 경에 불에 타는 오라리 마을이 보인다.
제주 4.3 사건 초기에 발생한 오라리 방화 사건은 4.3사건과 관련한 여러 사건들 중 드물게 영상이 있다. 바로 미군이 화재현장을 지상 및 상공에서 촬영한 영상인데 미군측에서는 이 영상을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in Korea:Cheju-Do)>라는 제목의 기록영상물로 제작하여 보관하였다. 불의의 사건을 급작스럽게 찍은 영상치고는 퀄리티가 좋기 때문에 미군 측에서도 방화 계획을 사전에 알고 대비하여 촬영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늘푸른 프로덕션의 한국전쟁[38] 마지막 권을 보면 제주 4.3사건의 피해자들에대한 보상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김영삼, 노무현 정부는 바보같이 간첩들한테 보상금이나 줘서 잘못됐다." "4.3사건때 일어난 군의 학살은 정당했다"는 논조로 이야기한다. 애초에 이 만화는 극우적 성향이 아주 심한 만화이다. [39]
제주도 출신인 배우 김부선의 어머니는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로 알려져 있다. 첫 남편과 아들들을 사건으로 인해 모두 잃고, 새 남편과 재혼하여 김부선 남매를 낳았다고 한다.
14. 참고 문헌[편집]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 70년 어둠에서 빛으로』, 2017.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
4·3 초토화 작전에 사라진 마을…학살의 현장
《4.3은 말한다》(전 5권)[40], 제민일보 4.3 취재반, 전예원, 1994 ~ 1998
1권 : 해방의 환희와 좌절, 3.1절 발포와 4.3의 길목
2권 : 4.3 봉기와 거부된 단선
3권 : 유혈사태 전초전
4권 : 초토화작전(上)
5권 : 초토화작전(中)
6권[41] : 초토화작전(下)
7권 : 초토화작전 이후의 4.3 ('김종민의 다시 쓰는 4.3'으로 연재 중)
<4.3과 제주역사>, 박찬식, 각, 2018
<4.3 그 진실을 찾아서>, 양조훈, 선인, 2015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서해문집, 2014
<잠들지 않는 남도>, 노민영, 온누리, 2018
<제주 4.3 연구>,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사, 1999
<제주민중항쟁>(전 3권),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연구원(아라리연구원), 소나무, 1988
<제주 4.3 항쟁>, 양정심, 선인, 2008
<4.3과 미국>, 허상수, 다락방, 2015
<화해와 상생(제주4.3위원회 백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8
<무덤에서 살아나온 4.3 수형자들>, 제주4.3연구소, 역사비평사, 2002
<늑인>, 4.3도민연대, 각, 2018
<다랑쉬굴의 슬픈노래>, 제주민예총4.3문화예술제사업단, 각, 2002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제주4.3제50주년학술문화사업추진위원회, 학민사, 1998
<이제사 말햄수다>>(전 2권), 제주4.3연구소, 한울, 1989
<제주4.3유적>(전 2권), 제주4.3연구소, 각, 2003 ~ 2004
<제주 4.3 구술자료 총서>(전 8권), 제주4.3연구소, 제주4.3평화재단, 2015
<제주4.3 사건자료집>(전 12권)[42],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1 ~ 2002
1~3권 : 신문
4권 : 정부문서, 국회속기록, 잡지
5권 : 군경자료
6권 : 관보
7~11권 : 미국자료
12권 : 북한자료, 러시아자료, 무장대 자료
<양민학살사건보고서>, 대한민국 국회, 1960
<제주 4.3 피해신고서>, 제주도의회, 1994
<김익렬 장군 유고록>, 김익렬
15. 관련 단체[편집]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제주 4.3 평화재단
제주 4.3 평화공원
제주 4.3 아카이브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
제주 4.3 연구소
무명천 진아영 할머니 삶터 보존회
제주국제평화센터
제주4.3연구정립유족회[43]
[1] 공식적으로 발견된 사망자다.[2] #[3]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어떻게 해서 친미파로 태세 전환했는지에 대해서는 반공주의/유래, 빨갱이/유래, 친일반민족행위자/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문서 참고.[4] 일부 극우단체들은 왜 빨갱이들에게 보상을 해야하냐고 반발하지만, 법에 나오다시피 이러한 대치 상황에서 죽은 민간인에 대한 법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민간인들 중에 협력자가 있어야 빨치산도 움직인다며, 이런 민간인도 결국 협력자이자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6.25 당시 일어난 북한군들이 저지른 학살에 대해서 아무 말도 못한다.[5] 9월 21일 한라산 금족구역이 해제됨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막을 내렸다. 한라산 금족구역 해제라는 말은 당시 무장 공비들이 한라산에 숨어 지냈기에 한라산을 금족구역(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서청, 민보단 등의 무차별 진압으로 인해 한라산으로 도망친 일반인 가족들도 많았다. 이때 산에 올라간 사람들은 공비나 일반인이나 할 것 없이 '산폭도'라고 불렸다. 이들은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산에서 내려와 투항해 '귀순자'라고 불리며 일종의 게토에 수감되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6.25 때 의심이 간다는 이유로 사살당했다.[6] 이 학살의 공통점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뿐 아니라 학살이 벌어진 지역 전체를 초토화 시킨 것이다. 그중 제주 4.3 사건은 사망자 숫자 자체를 비교하면 한국전쟁 다음으로 단일 사건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이다.[7] 산에 올라가는 그 등산 맞다. 당시 빨치산은 투쟁에 참가하는 것을 산을 오른다고 표현하였는데, 즉 한라산으로 올라가 투쟁하라는 것.[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아이가 말에 채인 사건 자체가 없었고, 좌익 분자에 의한 선동으로 경찰서 습격 시도가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 사건에 관해서는 목격자가 엄연히 존재하며, 시위 중에 벌어진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피해자 무덤까지 있다.[진실은] 실제 이 상황의 목격자였던 송 모씨는 관덕정 외곽을 봉쇄하던 기마경찰들이 시위대의 무리에 가둬지면서 폭행을 당하고 말은 눈과 몸, 항문 등이 찔러대어 날뛰기 시작하자 이 과정에서 어린이가 말발굽에 치었다고 하였다.[10] 당시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들이 경찰서에 있었는데, 아마 이들은 대구 10.1 사건같은 봉기를 겪으며 신경이 꽤나 곤두서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날 발포로 인한 부상자들이 제주도립병원으로 몰려왔는데, 마침 교통사고를 당한 순경을 경호하고자 병원에 온 경찰들이 이에 놀랐는지 군중에게 발포해 민간인 3명이 다치기도 했다.[11] 부상자 수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5,6,8,10 명으로 각각 다르게 나온다. 2003년 정부보고서는 8명으로 규정하고 있다.[12] 사망자 중에는 국민학교 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아낙네가 있었다.[13] 박헌영의 비서 출신이라고 자처하는 박갑동에 따르면, 이 사건을 이용 및 선동하여 공산당이 제주도에서 어느 정도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14]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가 동참하였다.[15] 심지어는 미 군정청 통역단까지 파업에 참여하였다.[16] 이러한 관점은 경찰 간부들에게도 나타났다. 어느 경무부 차장은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색채를 가지고 있다"는 매카시즘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총파업 상황을 보러 왔던 조병옥 정무부장의 인식도 이와 거의 비슷했다.[17]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본토를 뜻하는 제주 방언으로 제주 화자가 '육지'라고 말하면 십중팔구는 이 뜻으로 봐도 무방하다.[18] 약칭 서청. 북한 평안도 지역 지주 계층 출신으로 북한의 토지개혁 때 재산을 몰수당하고 빈손으로 월남한 사람들, 공산주의가 아닌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 개신교인 등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다가 소련군정에게 탄압 받은 사람들이 함께 조직한 단체다. 따라서 사회주의에 대해 엄청난 피해의식과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빨갱이는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분단 초기 이들은 일종의 의용군 비슷한 조직으로 경찰과 함께 좌익 탄압이나 빨치산 진압 등에 투입되었으며, 대한민국의 정부 체계가 잡혀감에 따라 차츰 군대나 경찰 같은 공식 조직으로 흡수되었다.[19] 위 조사 자료는 2000년 6월 8일부터 2001년 5월 30일까지 조사된 결과에 따른 것이다. 조사되지 않은 피해자 수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20] 기록상에는 자체 조사를 했을 때 '신고만' 들어온 게 15,000명이라고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신고만으로 파악한 인원이 15,000명이다. 사실 일가족 전체가 몰살당하거나 학살 도중 육지로 도피, 살아남았어도 트라우마로 인해 신고조차 하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현재까지 유해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에따라 희생자 수는 아직까지도 늘어나고 있다. 또한 유해 발굴이 되었어도 신고한 사람 대부분이 70~80대를 넘긴 고령이거나 이미 사망한 경우도 허다해서 유해가 발굴되었어도 신원이 파악되지 못해 피해자로 등록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21] 트위터를 중심으로 광주에는 5월에, 제주에는 4월에 향냄새가 진동한다는 글이 나돈 바 있는데, 이는 너무 단순하고 무식한 도식적인 비교다. 4.3 사건은 5.18과 비교했을 때 인구가 적은 도서 지역에서 만 단위 이상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제주도에 인구학적인 영향(최대 1/8 추산 학살을 피한 주민의 일본으로 이주 등)을 줄 정도였지만, 5.18의 경우는 당시 80만 인구에 피해자 규모가 몇백명 정도 이므로 비교가 안되는 규모 및 비율의 차이가 있다. 사건의 성격도 꽤 다르며, 무엇보다도 4.3은 5.18과는 달리 4월 3일 전후가 중심이 된 사건이 아니다. 4.3이란 명명에는 이 헬게이트의 원인을 무장대의 봉기에 귀인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고, 실제 사건의 단초는 위에서도 서술하였듯이 3.1절 발포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4.3 사건에서 가장 중대하게 다루어져야 할 부분인 민간인 학살은 1948년 11월부터 본격 실시된 초토화작전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아마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일부분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이 어느 하루에 동네 집집마다 다같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아해하는 대목이 있는데, 사실 이 소설의 소재가 된 북촌리 학살은 1949년 1월에 발생하였다. 즉 토벌대가 전도를 돌아다니며 순차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각 촌락별로 학살이 발생한 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지, 제주도 전체가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다.[22] 신임 제주도 도지사. 4.3 사건 이후 제주도 도지사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6.25 전쟁때 귀향 도중 북한군에게 붙잡혀 전주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 #[23] 배우 유해진과 동명이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둘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24] 이 때 귀순자 자신들이 현무암으로 돌담을 쌓아 일종의 게토를 형성했는데 해가 지면 아무도 출입하지 못했다고 한다.[25] 이는 어떻게 보면 한국 현대사의 안타까운 장면이다. 비슷한 예로, 2차 대전 당시 많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유럽전선에서 싸운 것도 "우린 쪽발이가 아니라 너희들과 같은 미국인이다!"라는 걸 보여주고 미국인들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이유로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코사크와 유태인들이 스탈린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에 입대하여 용맹히 싸웠고, 현대 러시아의 체첸인들도 보스토크 대대 등에 입대하여 싸우고 있다.[26] 참고로, 당시는 일반 주민들이 정보도 얻기 힘들고 워낙 정신 없던 아수라장일 때라서 제주도민을 학살한게 정확히 어느 부대/조직들인지 일일이 알려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해병대라는 부대에 대해 특별히 반감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후 제주도에서 해병대 입대자가 많았고 무엇보다 제주도내 예비군 훈련을 해병대에서 담당해왔기 때문에 현재도 제주도내에서의 해병대에 대해 특별한 반감 정서가 있는건 아니다. 사실 현재의 제주도민들도 구체적으로 어느 부대가 학살을 저질렀는지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예를들어 경찰이 그랬다는건 많이들 안다고 해서 오늘날의 경찰을 싫어할 리가 없는 것처럼 해병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27] 대표적으로 송악산 기슭의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일어난 학살 등이 있다. 현재 그 희생자들의 무덤이 백조일손지묘란 이름으로 사계리에 조성되어 있다.[28] "○○ 잘 지내냐", "요즘은 허튼짓 안하고 잘 사느냐",."순찰도중 생각나서 들러봤다" 이런 식이다. 이미 과거 군사정권 시절 연좌제에 휘말려 수시로 연행되거나 참고인 등으로 소환조사를 받아 진절머리가 날텐데, 표면상의 이유를 들먹이니 항의를 할수도 없고 버틸 수가 없다.[29] 출처 : 여기.[30] 뉴라이트계열의 정치학자 출신이다.[31] 그 재향군인회 소속 단체이다. 단체이지만 듣보잡의 인지도였는데 최근 뉴스타파에서 제주4.3사건을 왜곡하고있다는 보도로 알려지게 됐다. 회원들은 재향군인회 소속 회원이 주요 구성원들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영관장교연합회라면서 위관급장교들까지 짬뽕으로 뒤섞여있다. 그리고 약장과 훈장을 전투복에다가 주렁주렁 붙이고다니는 사람들까지 보이는데 과연 이들은 군의 흑역사를 감추고 싶어하는 국방부에게 아주 호의적인 시선을 받고 있다. 현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난뒤 친박집회에 이들이 참여하고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데 자세한 추가바람[32] 여담으로 이를 '4.3은 공산폭동이지만~' 부분에서 끊어버리는 식으로 발언의 의도를 왜곡한 가짜뉴스도 있었는데, 이를 홍준표가 그대로 인용하면서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33] 그로부터 3년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4.3 사건 유족들이 직접 봉하마을을 찾아가 눈물로 애도했고 김태환 제주지사 또한 도내 분향소를 직접 찾은 뒤 서울에서 열린 영결식에도 참석했었다. 당시 기사[34] 대표적인 예는 2018년 4.3 70주년을 맞이하여 열린 노동자 대회에서 비석에 '4.3 민중항쟁'이라고 쓴 것이다.[35]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말이 왜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자. 일단 소위 '빨갱이'의 정의와 구분조차 모호한데다가 정말 '빨갱이'가 처벌받을 만한 일이라고 쳐도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지 재판도 없이 무조건 학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말을 주장한다면 정작 북한에서 "반동은 죽여도 돼"라고 떠벌리는 것에 대해 반박할 말이 없어져버린다.[36] 니콜라이 예조프는 스탈린의 앞잡이였던 소련인으로 스탈린의 대숙청을 주도하였다 스탈린에게 숙청당했다.[37] 1945년 당시 조선 전체 인구 3,000만 명 중 1%인 30만 명 정도가 제주도민인데, 재일 한국인의 20%가 제주도민이다.[38] 말 그대로 한국전쟁 만화로,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에 있는경우가 많다.[39] 예를 들면 우리나라 초등학생의 70~60%가 한국전쟁은 남한이 먼저 침략한 거라고 주장한다고 그려놓은 거부터 시작해서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북한과 맞서기 싫어하는 겁쟁이들이라는 내용, 초등학교 교사들이 극좌여서 미군철수, 주체통일을 하게 만든다는 둥.[40] 사실 '4.3은 말한다' 전 5권은 1998년까지의 취재기사(411개)만 출판한 것이다. 제412회부터 제456회는 1999년까지 연재되어 6권으로 출판될 예정이었지만 실패했고 그 이후 연재는 중단되었다. 그러다 당시 취재기자 중 하나인 김종민이 2017년 3월부터 제주의 소리, 오마이뉴스 등에서 제457회부터 김종민의 다시 쓰는 4.3이라는 제목으로 재연재를 하고 있다. 김종민에 따르면 <4.3은 말한다>는 전 7권으로 완결할 계획이라고 한다. #[41] 실제로 출판된 것은 아니지만 4.3 아카이브 사이트에 자료가 있다. 1부 2부[42] 1~11권은 책자로 출판되었고, 12권은 출판되지는 않았으나 복사본으로 존재한다. 이 자료집은 모두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발간된 것이다.[43] 겉으로는 제주 4.3 사건의 올바른 역사적 정립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4.3 사건이 폭동임을 강조하면서 남로당 혹은 무장대 관련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 104명(혹은 107명)의 위패를 묘지에서 내리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단체와 관련하여 '대한민국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가 2010년 4.3 희생자 결정에 항의하여 제기한 위헌 심판은 헌법재판소에서 각하된 바 있다. 참고로 이 단체는 극우단체인 어버이연합,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5.18 왜곡으로 유명한 지만원이 설립한 단체)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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