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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아북녘동포>26.집단농사에 흥미잃은 지도농민들
<아북녘동포>26.집단농사에 흥미잃은 지도농민들
<아북녘동포>26.집단농사에 흥미잃은 지도농민들
[중앙일보] 입력 1995.04.09 00:00 | 종합 6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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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적인 식량부족과 농업부진은 북한 경제난의 직접적인 증거다.북한이 중국식의 농업개혁에 착수할지에 외부의 관심이 모아지고있다.그러나 북한은 가족.개인 생산청부제와는 달리 집단화를 더강화하고 있다.
93년 12월 이후 「농사제일주의」방침을 내걸고 농업에 전력을 쏟으면서도 협동농장을 국영농장(평양 만경대구역 등).농업연합기업소(평남 숙천군)로 바꿔나가 중국과는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생산수단의 「협동적 소유」보다 「전인민적 소 유」가 우월하다는 이론을 고집한 탓이다.이런 방향으로 농정 실패를 만회할지는 의문이다.
김일성(金日成)이 창안했다는 주체농법에 대해 김태범(33)씨는 『늙은 농민들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면서 『농사는 지역특성이나 기후를 고려해 절기를 맞춰야 하는데 정무원의 농업위원회에서 주체농법의 이름아래 농사일정표를 정해 일률 적으로 지킬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또 『당국의 시간표가 현실과동떨어졌다고 위로 건의해도 중간(郡)에서 위로 올리지 않고 깔아뭉갠다』고 한다.주체농법이 내건 적기적작(適期適作).적지적작(適地適作)은 말 뿐이라는 얘기다.
물질적 인센티브가 결여된 협동농장 운영 때문에 농민들이 근로의욕을 보이지 않는다는 증언.분석도 많다.모내기.논밭갈이.가을걷이등 주요 작업이 축력(畜力)이나 노동자.학생.군인등의 노동력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거나 농기계.화학비료.농약 이 부족하다는 등도 농업부진의 요인이다.석유수입의 격감은 농기계 운영이나화학비료 생산에 차질을 빚는다.
식량통계는 대외비(對外비)다.북한이 유엔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에 보내는 수치가 「허구」란 사실은 전문가들에 의해 지적돼왔다.식량통계의 미공개나 과장은 생산량이 수요에 훨씬 못미치기 때문이다.
『당국은 식량생산 1천5백만t고지를 점령하자고 촉구하지만 4백50만t에 머무르고 있다.
먹는데 지장이 없으려면 6백50만t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2백만t은 수입해야 한다.
70년대 말 한때 8백만t을 생산한다는 소문이 났을 때는 쌀이 남아 돌았 다.』(고청송.34)
『농업과학원 정주분원에 근무하던 재일교포출신 연구사에게 경지면적은 1백50만정보(논 80만,밭 70만)라고 들었다.재일교포들끼리 모이면 9백만t생산이라는 당국의 주장이 거짓이고 4백50만t도 채 안될 것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평안남북도. 황해남북도는 농사지은 것으로 먹고 살 수 있지만다른 지역은 만성적인 식량부족으로 허덕인다.』(정기해.52)
곡물생산량에 관한 통계가 정확할 수 없는 것은 협동농장이나 군(郡)같은 하부단위에서 허구적으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의 농촌진흥청은 모형실험조사를 통해 북한의 곡물생산량이정곡기준으로
90년 4백81만t,
91년 4백43 만t,
92년 4백27만t,
93년 3백88만t,
94년 4백12만5천t등으로 파악하고 있다.
FAO도 92년부터 북한측 통계를 재조정함에 따라 93~94년에 조곡기준으로 5백60만t(정곡 4백10만t)으로 추정하기에 이르렀다.주민들의 식량 소비량을 정곡기준으로 5백50만~6백60만t으로 추정(김성훈교수)할 때 적어도 연간1백40만t은 수입해야 할 실정이다.
귀순자들이 밝히는 농업부진의 요인은 갖가지다.
『80년대 이후 식량사정이 나빠진 것은 기후악화,농기계및 비료부족,농민의욕저하 때문이다.』(고청송)
『함남의 농촌에서는 6~7월에 벌레잡기에 여념이 없다.병충해로 한 농장이 쑥밭이 된적도 있다.냉해도 농사를 망치는 주범이다.』(안명철.26)
『83~88년간 함흥수리대학을 다닐 때 함남의 함주.정평.금야군과 황해남도의 청단.은천군등지에 농촌지원을 나갔는데 논관개는잘 돼있지만 밭의 수리화는 시원찮았다.농장마다 한 작업반에서만은 남새(채소)밭 관리를 위해 스프링클러를 시범 적으로 설치했다.
생산저하를 낳는 땅의 산성화를 막으려면 석회석을 많이 뿌려야 하는데 운반수단이 문제다.이를 대체하기 위해 농한기에 농장원들은 흙갈이전투를 벌인다.백설희.김상종등 농업연구사들이 새 벼를 개발하기도 했지만 수지가 맞지 않아 지금은 재래종으로 돌아갔다.』(이정철.27)
『알곡수확고의 하락은 농사꾼들이 농장일을 열심히 하려는 관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주는대로 먹고 일은 시키는대로 하라」는 말이 유행하는 분위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새땅찾기를 하면서 전쟁때 생긴 물웅덩이를 메웠는데 땅이 늘자이제는 물이 모자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갈수기에 웅덩이물을 펌프로 퍼올려 사용했으나 이마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정기해) ***
농업기계화
북한의 선전화보집에 등장하는 기계화영농에 대해 대부분의 귀순자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청산리협동농장같은 시범농장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트랙터(북한식으론 뜨락또르)가 상당히 갖춰진 곳에서도 기름사정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다 고 한다.
『홍원농업전문학교에서는 기계화영농을 배우고 졸업과 동시에 준기사 자격을 따지만 기계화가 덜 된 실정에서 장래가 불안해 이학교를 중퇴했다.함남 홍원군의 구룡.원덕.용심.용산리는 기계화가 덜 돼있고 읍내농장(남산농장.남춘농장)은 기계 화가 더 된편이다.뜨락또르가 구룡리에 3대,남산농장에 50대 있었다.그러나 부속품.기름부족 때문에 남산농장에서도 20대만 가동했다.읍내농장에선 봄에 뜨락또르,가을에 손으로 농사를 짓는다.기계화가잘 된 곳을 기준으로 해도 모내기의 70%는 기계로,강냉이농사는 전부 사람이 한다.』(안명철)
『김책제철소에 근무할 때 중앙사로청이 조직한 사회주의농촌청년지원대에 동원돼 82년초 2개월간 주체농법등 농사에 관해 강습을 받고 황해남도 배천군에 파견된 적이 있다.지원대는 주체농법대로 농사 짓는가를 감독하는 한편 농촌의 사상.문화 수준을 끌어올리는게 임무였다.농사를 잘아는 농장원과 주체농법을 강조하는 지원대간의 마찰이 적지 않았다.
작업반(몇개 분조로 구성)마다 뜨락또르 1대,분조(10~20명 한팀)마다 부림소 2마리씩 있었다.작업반에는 농민 80명에 농토가 40정보였다.기계 고장이 잦고 기름도 부족해 농사에도움이 안됐다.다만 탈곡은 기계로 했다.』(엄만규.38) 『기계가 있지만 안쓴다.콤바인은 시범농장이나 부전군등 일부에서나 볼 수 있었다.뜨락또르가 있어도 기름이 없어 소달구지를 이용한다.』(이정철)
***지도농민 농장원들이 농사철에 학생.노동자.군인들이 지원나오면 뒷짐지고 지도만 한다고 해「지도농민」이란신조어가 만들어졌다.
『함북의 길주.명천.선봉.온성군 협동농장에 농촌지원을 나가보면 농장원들은 「지도농민」으로 불리며 농사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박수현.28)
『대학생들은 인민학교때부터 농사에 참여했기 때문에 웬만한 농사일은 알아서 척척 한다.농민들은 학생팀을 몰고 다니면서 일을 시키는 지도농민이다.협동농장의 한 작업반 35명중에 20대 청년은 3~4명밖에 안된다.10대후반~20대는 군에 입대하거나 광산등에 배치돼 떠나기 때문이다.30대부터 55세까지의 청장년들과 처녀들이 농장을 지키고 있다.』(이정철)
『농사짓는 것도 고되고 농업을 천한 직업으로 여기는 사회풍조가 있어 총각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농촌을 벗어나려고한다.』(조승군.28)
***텃 밭 농가 주변에 흩어져 있는 텃밭에서 생산한 강냉이와 협동농장의 것이 비교가 안된다는 증언에선 귀순자들이 한결같다.당국이 농민들의 사상의식을 개조해 이기심을 없애려고 수십년간 노력했지만 허사라는 얘기다.
『황해북도 황주군의 농촌관개관리소에 근무할 때 보니 농장원들이 협동농장의 비료를 빼돌려 자기 텃밭에 쓰는 일이 많았다.당연히 농장 강냉이보다 텃밭 것이 월등히 크고 좋았다.』(고청송) 『함남 홍원군에서도 농민들이 협동농장의 일에는 시큰둥하며,조퇴해 집근처의 텃밭을 일구는데 신경을 쓰고 있었다.학생들이 농촌지원을 나간 동안 농민들이 텃밭 수확물을 농민시장에 팔려고나가는 경우도 보았다.
홍원군에서 단위면적당 강냉이 생산에서 텃밭이 농장보다 1.5~2배 많았다.
굵기는 3배쯤이고 길이는 1.5배다.텃밭 것은 3백알갱이가 기본인데 농장 것은 1백50~2백알 정도다.가구당30평에서 1천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텃밭은 대 대로 물려받은앞마당과 새로 개간한 것 두종류다.텃밭에는 강냉이.남새.콩등을복합적으로 심는다.그러니 농장엔 신경쓰지 않고 텃밭에만 비료를주고 김을 매는 것이다.』(안명철.26) 『텃밭 규모는 농가근처의 3백평 정도가 많고 넓은 경우 1천평까지도 가능하다.텃밭옥수수가 크고 농장의 것은 작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이정철) 『협동농장 작업반에 등록돼있지 않은 부대노력(附帶勞力)이 모여 땅을 새로 개간해 농사짓는 경우가 있다.이때는 전통농법에 따라 농사짓는데 땅이 산성화되지 않은데다 자기 밭이라는 생각때문에 열심이어서 생산량이 많다.』(김태범)
『군부대 주변 자투리땅이나 농가에서 부업으로 생산되는 양곡이 상당하다.
우리 중대앞 3정보의 땅에 강냉이를 심어 1정보에 2t가량 수확했으나 국가에 일부만 보고하고 나머지는 소대장.중대장들이 챙겨놓았다 상관들에게 예우해야 할 때 사용했 다.』(임영선.31)
[출처: 중앙일보] <아북녘동포>26.집단농사에 흥미잃은 지도농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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