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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 Kang 방북기30]나의 하와이 개인농장과 조합의 실패
CJ Kang 방북기 2015-04-07 Like 0
북부조국에서 1946년 3월부터 실시된 토지개혁에 의하여 출발한 개인농은 이후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4년부터 협동조합으로, 그리고 그 이름을 바꾸어 협동농장으로 점차 바뀌어지게 된다. 그 자세한 사항에 대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내가 미국에 이민을 온 후 20여년 동안 운영하였던 개인농장을 통한 경험을 먼저 이야기하려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사를 지어 그것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먼저 이해하면 북부조국이 토지개혁으로 개인농으로 출발을 하였지만 이후에 협동농장 혹은 국영농장으로 진화되어간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81년 후반에 내가 로스앤젤스에서 하와이의 가장 큰 섬인 빅아일랜드로 농사를 짓겠다는 마음으로 이사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한국에서 어렸을 때 이웃이 농사하는 것을 구경은 했지만 아버지가 선생님이었던 우리집은 직접 농사를 짓지는 않았기 때문에 농사일을 거의 모르는 내가 미국땅에서 직접 스스로 농사를 하게 되리라고는 그전엔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민 와서 노동으로 터를 잡는 것이야 농사나 다른 일이나 힘든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개인농이 그렇게 힘든 것인 줄을 미리부터 알았더라면 아무리 도시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해도 농사를 하는 것은 피했을 것이다. 당시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여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마음 하나로 하와이 섬의 친지가 권하는 생강농사를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래 하고 있던 다른 사업을 접고는 하와이로 이사를 했는데 그때 나의 가족은 집사람과 큰 딸이 막 돌을 지났을 무렵이었다.
땅이 없는 상태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길은 남의 땅을 빌려야 하는데 마침 그때 나를 비롯하여 모두 다섯 사람의 한인이 새로 농사를 짓기로 하고 함께 제법 넓은 땅을 빌려서 나누었다. 당시에 땅을 빌리는 값은 에이커당 200달러로 그리 비싼 편은 아니었다. 내가 농자금이 필요한 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당시 한인들 가운데 봉사하기를 즐겨하던 닥터 박이라는 귀한 분이 있어 내가 내 몫과 함께 그분 몫의 농사를 지어주고 수확해서 남는 것은 반반씩 나누기로 하고 1년 농자금 만 달러와 생활비 만 달러, 합하여 2만 달러를 빌려서 시작하였다. 생강농사는 아주 높은 비용이 들어가는 농사여서 종자값에다 땅을 소독하는 비용, 그리고 비료와 농기계 사용료로 1만 달러는 기본 비용으로 족히 들어가게 된다.
그동안 값이 좋았던 생강이어서 우리가 심을 때 구입한 종자만 해도 생강 3천 파운드로 3천 달러가 들었다. 파운드당 1달러였다. 하와이 생강은 30센티 이상으로 크게 자라는데 씨는 그 큰 생강을 마디마다 잘라서 심게 된다. 첫해 농사는 오랫동안 농사를 지은 데다 개인적으로 도매업을 하는 전문가가 땅을 빌려주는 일도 도와주었고 밭을 갈고 장비를 빌려주는 일, 그리고 종자의 구입을 주선해주고, 판매까지 맡아주는 조건이었기에 조언을 들어가면서 농사를 지었다.
생강농장은 힘겨운 노동을 해야 했고 많은 신경을 써서 관리해야 한다. 땅은 깊이 갈아서 아주 부드럽게 만들어야 하고, 검은 비닐을 모든 땅에다 씌워서는 메틸브로마이드 개스를 집어넣어 완전히 소독을 해서 땅속의 풀씨들과 병균을 모두 죽이고 소독해야 했다. 종자를 자를 때엔 매 생강마다 칼을 알콜에 담궈 소독을 하는 정성을 들였다. 작은 경운기로 두 번을 골을 타서 비료와 닭똥을 넣고 잘 섞어서 파종준비를 하고, 종자를 심은 후엔 다시 여러 차례 비료를 주고 필요한대로 농약을 살포하면서 생강이 자라는 대로 4번 정도로 다시 경운기로 북을 쳐주어야 했다.
추수는 12월부터인데 4월이 되면 생강에서 다시 싹이 터져 우거지고 뿌리가 얽혀서 추수가 힘들어지므로 그 기간 안에 추수를 하면서 다시 새 밭에다 파종을 해야 했다. 빅아일랜드 섬은 겨울에 우기라 비가 와도 비를 맞으면서 추수해야 했고, 트럭이 밭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자신의 트랙터가 없으면 다른 사람이 시간을 내어서 돈을 받고 내 땅을 갈아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건 시간을 다투는 일이고, 추수 때는 거의 매일 트랙터가 필요하기도 해서 트랙터를 갖는 것은 농사를 제대로 짓기 위해서 필수적이었다.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도 농사를 지어 수확을 할 때쯤에 생강이 썩는 병이 번져서 농사를 망쳤다. 그 비싸게 구입한 생강 종자를 소독해준다고 가져간 전문가가 오히려 더운 물에 오래 담궈서 상하게 만든 탓이었다.
게다가 수확할 때 그 값은 작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실제로 하와이 생강은 외국 어느 나라에서 들어오는 것보다 품질이 좋은데다 공급이 부족한데도 그해는 미본토의 생강을 사는 장사꾼들이 미리 선수를 써서 40센트로 내려간 것이었다. 수확을 하여 모두 팔아서 계산을 해보니 들어간 비용밖에 나오지 않았다. 남는 돈을 닥터 박과 반반으로 나누기로 했는데 들어간 비용 외에 남는 것이 없었으니 1년 생활비는 빚이 되었다. 가격만 그대로였으면 농사가 잘 안 되었다 해도 1만 달러를 투자했으면 2만 달러가 나와야 하는 것이었는데 작년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참담한 실패를 하고 만 것이었다.
한해 농사를 망쳤다고 농사를 포기할 수는 없다. 생강은 해마다 새 땅에 심어야 하기에 이제 내가 혼자 새로 땅을 구해야 하는데 빌려줄만한 곳이 없어 신문에 광고를 낸 결과 아주 높은 고지대에 위치한 땅 두 에이커를 구할 수 있었다. 묵혀놓아 한 길 이상 풀밭이 된 땅이라 먼저 불도징을 해야 했고, 트랙터로 밭을 갈아줄 사람도 구해야 했다.
어려운 가운데 거기다 다시 3월에 파종을 하고 12월부터 수확을 하였는데 고지대여서 기온이 낮은 곳이라 수확은 좋지 않았다. 가격 역시 40센트로 생강농사를 지은 것으로는 본전밖에 찾지 못했다. 그래 첫해부터 생강 외에 오이, 토란, 차이니스 태로, 고구마, 마디호박 등 팔아서 돈이 될 만한 작물들은 생강을 캔 곳에다 부업으로 심었는데 일은 힘들어도 그건 큰 비용이 들지 않는 것이어서 그것들을 수확하여 생활비와 농사 경비로 삼으면서 생활하면서 겨우 버텨나갔다.
2년 동안 농사가 잘되지 못한데다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져 고생만 한 상황에서 3년째엔 사탕수수 밭이었던 곳을 겨우 빌리게 되었다. 사탕수수가 사양산업이라 더 이상 심지 않고 묵히는 어떤 개인의 땅을 다행히 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 이젠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했다. 정성을 다한 결과 한 정보(2.4 에이커)쯤 된 3년째 농사는 아주 잘되었다. 생강 대가 자라서 내 키보다 큰데다 옆골과 서로 닿아서 사람이 들어가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졌고 생강이 자라는 대로 북을 쳐주었는데 그 안에 생강이 빼곡하게 들어찬 것이었다.
내가 농사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풍년이 된 이 해는 아주 뜻 깊은 해였다. 그곳 빅아일랜드 시장이 나서서 생강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여 협동조합(cooperative)을 만들도록 설득한 것이다.
미국에서 이렇게 질 좋은 생강을 생산하는 곳은 그곳 빅아일랜드 밖에 없는데 바이어의 농간과 농부들 스스로의 경쟁으로 먼저 팔려는 바람에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냥 농부들이 가격을 정하면 그건 가격담합이 되어 법을 위반하게 되지만 농부들이 조합을 만들면 최저가격을 합법적으로 정할 수 있고 그 가격 이상으로 판매할 수 있게 된다는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너나없이 조합에 가입했다. 내가 한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생강농사를 시작했었는데 그때쯤엔 생강농사가 알려져서 서른 가구 정도의 한인들이 생강농사를 짓고 있었고 그 외 로컬 사람들 합쳐서 모두 백 몇 십 명이 가입한 조합이 생겨났다. 조합엔 파운드당 2센트의 조합비를 떼어서 그걸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해 수확과 좋은 가격으로 나는 비로소 일어설 수 있었다. 조합에서 생강을 파운드당 89센트로 정해서 그 가격을 수확기 내내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빌렸던 돈을 닥터 박에게 갚고는 농사하기 좋은 주택을 10%만 다운페이먼트로 하고 30년 융자로 구입했다. 다음해도 농사가 잘 되었고 가격도 조합 덕분에 같은 가격을 유지했다. 트랙터가 없이는 제 철에 파종도 수확도 불가능하기에 기계를 월부로 구입하고 새로 트럭도 월부로 구입했다.
조합엔 10명의 임원이 있어 여러가지 일을 의논하고 결정하였는데 조합이 생긴 지 2년째에 한인 농민들을 대표해서 내가 참여하도록 부탁을 받고는 30여 한인들을 대표해서 조합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일하게 되었다.
한데 조합이 생긴 지 3년째 되던 해 수확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몇 십 명의 사람들이 조합에서 탈퇴한 것이다. 일부 새로 농사를 시작한 사람들은 생강조합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한인들 가운데 나와 같이 시작했던 고집이 센 한 사람도 탈퇴를 했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욕심을 억제시킬 방도는 없는 것인가? 그들은 조합비 2센트를 아끼면서 좀 더 일찌감치 자신의 수확물을 팔려고 최저가격을 지키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조합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도저히 그들 때문에 조합에서 정한 가격으로 이미 보낸 물건값을 받을 수가 없게 되자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조합으로서는 정해둔 가격을 도저히 고수할 수 없어서 가격을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조합원들이 더 단결하고,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함께 가도록 해야 하는데 포기하고는 모두들 자신의 일이 아니란 듯이 조합을 탈퇴하게 되었다.
150여 명의 조합원들이 30여명만 남고는 모두가 떨어져 나갔다. 그해 가격은 다시 40센트로 폭락하고 말았다. 한 마디로 쥐새끼 같은 몇몇 무지한 자들 때문에 조합원들과 농민들 모두가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 것이다.
내가 그 이후에도 조합이 완전히 해체될 때까지 오랫동안 두어 사람의 임원들과 나머지 20여 명의 조합원들과 끝까지 함께 봉사하면서 그 의지를 꺾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남아있던 조합원들이 훨씬 더 좋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함께 좀 더 나은 바이어를 통하여 판매하고, 그 과정에서 조합의 힘으로 안전하게 판매대금을 거둬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농부들 개인이 직접 판매했다가 대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고, 드센 바이어와 상대하기엔 개인보다는 단체가 되어 교섭하는 것이 여러 모로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와 함께 조합의 리더로 끝까지 남아서 자주 만나 둘이서 당면한 일을 함께 의논하고 이끌어가며 집행했던 일본계 3세인 싸이러스(Cyrus) 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근래에 인편으로 안부와 함께 하와이 커피를 선물로 보내왔다. 아직도 그 친구는 하와이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고, 고맙게도 그 친구가 지금도 나를 동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당시의 조합은 내 인생에 있어 하나의 혁명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농부들 각자가 제대로 의식화만 되어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스스로의 삶의 터전을 지켜낼 수 있는 일이었지만 개인들의 이기심으로 인하여 그 혁명은 실패했다. 조합을 탈퇴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했던, 인간이기 보다는 쥐새끼같은 족속들과, 그런 자들이 있어도 굳건히 조합에 머물러서 조합을 지켜나가야 했지만 흔들려서 탈퇴한 사람들, 그리고 우리 몇몇처럼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들 모두가 참담하게 실패한 것이다.
조합이 성공하지 못한 하와이의 생강농사는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개인농의 말로가 거기에 있다. 외국에서 수입되는 생강과는 품질이 다르므로 얼마든지 좋은 가격으로 팔 수 있는데도 개인 각자는 바이어가 정해주는 값싼 가격대로 생강을 팔게 되니 그렇게 생산비용이 높게 드는데다 일손이 많이 드는 생강을 계속 생산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한때 수백만 파운드의 산업이었던 하와이 생강이었고 그 가운데 나도 몇 퍼센트를 생산하던 농부로 내가 하는 일에 크게 보람을 느꼈던 하와이의 생강농사가 지금은 완전히 사양산업으로 되어 겨우 몇몇 농부에 의해서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가 되고 말았다.
하와이에서 내가 십여 년 동안 농사를 주업으로 하면서, 미국이민으로 중단했던 대학을 늦게야 마치고는 이후 다른 사업을 하면서도 파트타임으로 모두 20년 가까이 생강과 다른 작물을 재배했다. 그러는 동안 농사가 잘 될 때도 있었고 못 될 때도 있었지만 조합이 처음 만들어져서 2년 동안 잘 운영될 때와 같은 시절은 결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시도했던 농사는 파파야를 재배하는 것이었다. 한인으로서는 내가 처음이자 유일하게 파파야 농사를 했었는데 그 일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 하와이에서 1등급 파파야를 파운드당 30센트에 우리가 팔던 것이 미본토의 식품점에서는 2~3달러씩에 팔리는 것을 생각해보면 생산하는 농부들이 얼마나 자본주의 구조상 착취를 당하는 것인지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트럭에 가득 파파야를 싣고 독점으로 파파야를 취급하는 회사에 가져다주면 그마저도 1등급이 많아야 할 내 생산품이 전체의 절반 이상 2등급으로 분류되었다면서 1주일 후에 우편물과 함께 수표가 오는데 그걸 내가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2등급은 파운드당 10센트 남짓 했으니 공장의 노동자들만 착취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제도 아래서는 농민들 또한 이렇게 중간상인들에게 농락당하게 되고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나의 이어지는 방문기에서 북부조국의 토지개혁으로 개인농으로 시작한 농촌이 이후 협동농장으로 발전하게 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나의 개인농 경험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농민에게 돌아올 가격에 관한 사항 외에도 개인농으로 농사를 짓는 것은 협동농장보다 어려운 점들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차차 그 부분들도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매스컴에서 떠드는 소릴 듣고는 북부조국의 협동농장을 개인농으로 바꿔준다면 생산성이 좋아질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데 북부조국의 농민들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서의 높은 정신으로 잘 무장되어 있는데다 협동농장으로도 충분히 개인의 몫을 더 분배받을 수 있는 길이 있도록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을 만큼 협동농장은 꾸준하게 진화발전되어왔다.
한마디로 개인농은 한 세기 전에 농사를 지어서 농민 자신과 그 가족들이 먹는 것을 해결하는 것으로 생활이 가능하던 시대와 달리 지금처럼 고도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절대로 농민을 위한 제도가 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으로 살아남지 못하면 회사가 망하듯이 농민들 또한 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개인농들이 농촌을 떠나거나 아니면 농사를 지어도 대부분 저소득층 상태로 머무는 것이나 남한의 농촌이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것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201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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