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07

[북한경제와 협동하자④] 남북경제협력 역사와 미래(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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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경제와 협동하자④] 남북경제협력 역사와 미래(上)

기사승인 2018.10.02  17: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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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대한 이해를 사회적 경제라는, 어쩌면 비주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북한은 사회주의경제제도를 세웠으나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재조정기를 거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 하에서도 식량위기를 극복하고 산업생산 정상화도 이루어내고 있다. 중국과 무역 및 경제협력을 확대한 것이 큰 배경이 된 측면도 있다. 국내에서는 소비품 시장이 활성화하면서 개인상공업자들이 늘어났지만 이와 더불어 협동적 소유의 생산판매방식도 기능하고 소위 [돈주]들의 사회적 금융역할도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주류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고 실증적 검증이 더 많이 필요하다. 사회적 경제는 시장경제에서도 사회주의경제에서도 아직 주류는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모순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사회적 경제 관점에서 남북간 경제협력에 대해 제언하고자 한다.
남북교역과 남북경제협력의 역사 : 거시적 분석
남북간 경제관계는 1990년 전후에 태동해서 2016년초 개성공단 폐쇄까지 약 25년이라는 길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다. 남북경제관계가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은 90년 8월에 한국정부가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민간의 남북교류를 허용하면서부터이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과 더불어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이어서 남북고위급회담이 개최되고, 91년 12월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간 화해와 불가침 및 협력교류에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였다.
그때부터 시작된 남북경제관계는 외국과의 경제관계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무역]용어 대신에 [교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통일부는 상품교역, 위탁가공교역, 인도적 지원, 경제협력사업 등에서 발생하는 남북간 물자반출입을 모두 교역에 포함하였다. 이중에 경제협력사업은 개성공단사업, 금강산관광사업, 경공업협력(97-98년의 광물-경공업원료 교환), 그리고 기타지역에서의 투자사업이다. 기타 투자사업에는 평양 남포 등지에서 봉제, 자동차조립, 해상운송, 수산물가공, 전자, 통신, 소프트웨어 개발, 광고, 관광 등 분야에 50여 기업이 합계 7천만달러 이상을 투자하였다. 노무현 정부때에 18억달러 수준에 달했던 남북교역 총액은, 이명박정부때 2010년 대북제재 5.24조치로 위탁가공과 일반교역, 투자사업이 금지되고 개성공단사업만 남았어도 개성공단사업이 발전하여 2015년에 27억달러에 달했다.
박근혜 정부는 남북간의 마지막 경제협력사업인 개성공단사업마저 진출기업에 대한 사전양해 없이 16년 2월에 일방적으로 폐쇄하여 남북 경제관계가 사라졌다.
남북교역의 추이 (출처-통일부)
이렇게 90년 이후 북한의 사회주의경제 재조정기 시기에 이루어진 남북간의 경제관계는 인도적 지원을 제외하면 주로 남한기업의 북한상품(농수산물, 광물, 철강금속 등) 수입과 위탁가공(섬유류, 전기전자, 철강금속 등), 대북투자가 중심이었고 별도로 정부의 철도 및 도로 연결공사가 있었다.
북한상품 수입과 위탁가공은 남북간에 이루어진 유무상통(有無相通)으로서 서로 도움이 되는 비지니스 수익모델이었다. 그리고 북한은 남한의 대북투자로부터 외화획득과 기술습득을 통해 경제회생에 적지않은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금강산관광사업에서 2008년 7월에 관광이 중단될 때까지 누계 약 193만명이 금강산을 관광하였는데, 07년말까지 시설투자에 한국정부의 이산가족면회소 건설과 관광공사의 온천장과 문화회관 건설, 현대아산을 중심으로한 민간기업이 부두, 도로, 휴게소, 식당, 호텔 등 건설에 합계 약 3,057억원(3억달러)을 투자하였다. 그리고 관광 10년동안 포괄적 사업대가 4.5억달러(2000년 6월 송금; 후에 대북송금사건), 관광대가 4.9억달러, 예술단관람비용과 시설이용료 약 7천만 달러 등 합계 약 10억달러의 현금이 북한에 지급되었다. 이 금액은 북한으로서도 의미있는 외회획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돈이 핵개발에 쓰였는지 경제회생자금으로 쓰였는지 사용처를 특정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한국은행이 추정한 북한의 경제성장율을 보더라도 90년대의 마이너스성장에서 2000년 이후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하여 경제회복세로 들어선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핵무기개발을 통해 경제성장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남북경제협력을 통한 외화수입이 북한경제회생 자금으로 쓰였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서독이 동독에게 18년동안 576억달러(연간 평균 32억달러)를 지원했다는 점과 비교하면 창피한 규모이긴 하다.
개성공단 봉제공장
개성공단에 대해 북한은 70만명 고용, 선진기술도입과 같은 꿈을 꾸었다. 실제 입주한 125개 남한 중소기업은 05년 3월부터 15년말까지 북한 노동자 약 5만5천명을 고용하고 합계 32.3억 달러어치의 제품(주로 섬유류와 전기·전자)을 생산하였다. 공단건설에는 2004년부터 부지조성, 전력, 통신, 건물, 생산설비 등에 남한측의 토지공사와 현대그룹 그리고 각 기업이 약 1조원을 투자하였다. 그리고 50년간 토지사용료 1,600만달러, 철거보상비 870만달러, 북측통관사무소건설 400만달러로 합계 2,870만달러가 현금으로 지급되었고, 북한 노동자에게 현금으로 지급되는 임금을 합하면 총 6,160억원이 공단폐쇄시점까지 지급되었다. 그런데 노동자 최저임금은 06년 시작시기의 월50달러에서 시작하여 15년에 74달러이고 16년 2월 폐쇄시점에서 지급한 통상임금은 사회보험료(임금의 15%)를 포함하여 월150 달러(15만원) 정도였다. 이 임금에서 정부당국이 가져가는 몫은 사회문화시책비 30% 정도이다. 중국에서 일하는 북한노동자 임금의 1/3 수준밖에 안되는 낮은 임금을 지급하면서 이 돈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기 때문에 공단을 폐쇄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박근혜정부가 저질렀다. 개성공단사업은 입주기업들에게는 수익이 나서 [퍼오는 사업]이고 북한측이 상대적으로 손해보는 사업이었는데도 말이다. 개성공단 폐쇄 후에도 북측 노동자들은 조를 짜서 공장설비들을 녹슬지 않도록 보존하고있었다고 한다. 자재 빼돌려 시장에 팔 거라는 의심이 남한사회에 많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개성공단 아니면 일할데가 없고 남한기업이 다시 돌아올거라고 확신해서인가? 일부 그런 면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게 본질이 아니다. 시장경제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남북경협의 상징] 개성공단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너무한 거였다.
남북철도 연결구간 동시 시험운행(2007년 5월17일)(사진출처-청와대)
남북 정부간의 경제협력사업으로는 철도와 도로 연결사업이 있었다. 02년 9월에 남북동시의 경의선(문산-개성구간)과 동해선연결공사(제진-금강산구간) 착공식이 열리고 03년 6월에 철도연결행사를 거쳐 05년 12월에 남북간 철도궤도부설공사가 완료되었다. 07년 5월 남북동시의 시험운행이 있었고 12월에 문산과 개성 사이에 화물을 운반하는 경의선화물열차가 개통되었다. 이 운행은 08년 12월 북한이 철도통행을 제한하면서 중단되었다. 남북간의 철도와 도로 연결공사에 한국정부가 투입한 금액은 합계 6,580억원(약6.5억달러)였다.
위와 같이 90년대이후 남북경제협력의 역사를 살펴보았는데 그 흐름은 남측을 중심으로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90년대 : 남북경협의 태동시기로 교역을 통한 상호이익 추구가 형성되고 대북투자가 모색됨. 전반기는 핵문제와 연계되고 후반기는 아시아통화위기 등의 영향도 있어 경협에 신중함--일부 효과
② 2000년대 : 6.15공동선언 이후 노무현 정부시대까지 남북경협이 제도화하며 (투자보장 등 4대 경협보장합의서 체결), 정부사업과 민간기업의 교역 및 금강산관광, 개성공단 투자가 진행됨--효과
③ 2010년대 : 남측의 보수정권이 남북경제관계를 북한 비핵화를 위한 압력제재 수단으로 삼아 경제관계가 중단됨--효과 없음
그렇다면 북측을 중심으로 보면 어떨까. 다음과 같지않을까 생각된다.
① 90년대 : 남북 경제교류를 통해 경제회생의 밑자금과 선진기술을 확보함--효과미미
② 2000년대 : 금강산관광으로 경제건설자금 들여오고, 개성공단은 남북협력의 상징으로 밑지고 양보하더라도 키워나감--일부 효과
③  2010년대 : 중국과의 경제협력으로 전환하고 남측에 대해서는 압력(금강산관광사업 재산몰수)과 대화를 병행함--일부 효과
남북한의 경협 성격과 평가(자료출처-일본 테이쿄대학 이찬우교수)
그런데 이와 같은 남북경협 역사에 대한 거시적 분석에는 사회적 경제의 관점이 개입하기 어렵다. 경협주체인 남한의 정부와 기업 모두 시장경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북한은 남한에 경제를 개방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경제회생과 발전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도입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남한에서는 남북경협의 문을 연것도 닫은 것도 사실상 정부였다. 정권의 방침에 따라 기업이 따라야 하는 정경연계가 기본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내세운 정경분리 원칙도 경제를 앞세워서 햇볕정책을 실현하려는 정책의 일환이라는 측면이 있었다. 남북관계의 현실이 경제분야가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정치우선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은 남북경제협력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차단하려는 경향을 보였으며 남북경협을 상대하는 북측 기관은 당이나 행정기관 그리고 국영기업이었다. 북한은 남한기업인의 방북을 불허하는 방법으로 남북경협을 통제하는 방법을 사용하였고 남북경협이 이명박 정부에 의해 차단되자 경협대상을 바로 중국으로 전환하였다. 2010년 이후 북중무역이 급증한 것은 이를 반증한다.
사회적 경제의 관점에서 남북경협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미시적 분석이 필요하다. 그 사례로서 남북경협 초기 90년대 대우그룹의 대북투자를 들여다 본다.
남북경제협력 초기사례 (대우 남포합영회사) : 미시적 분석
남북경제협력의 물꼬를 튼 것은 대우그룹이었다. 당시 김우중 회장은 91년 5월에 대한축구협회장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었으며, 92년 1월에 남한 경제인 자격으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을 공식 방문하였다. 초청자는 당시의 북한 정무원 대외경제위원회 위원장 겸 부총리 김달현이었다. 
김우중 회장 일행은 평양시(칼라TV, 피복), 평북 구성(공작기계), 황북 사리원(시멘트, 면방직), 황남 은률(아연광산), 강원 원산(수산물 가공) 등 공장과 광산 그리고 남포항을 시찰하였다. 김우중 회장은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였으며 김달현 부총리와 ①경공업단지개발, ②지하자원개발, ③제3국공동진출(건설,제조업) 등 세분야에서 경제협력을 하기로 합의서를 체결하였다. 김달현 부총리는 대외경제위원장 겸 조선삼천리회사 이사장 이름으로 싸인하였다. 이것이 남북간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경제협력의 첫합의였다. 북한 김달현 부총리는 이어서 7월에 남한을 방문하여 산업시찰을 하는 등 남북 경제관계가 급물살을 타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후의 남북관계는 김영삼 정부 시대까지 냉탕과 온탕을 왕복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이유는 북한의 [핵개발]의혹에 대한 미국의 압박이었다. 남한정부는 북한과의 교류협력에 대해 교역확대→경공업개발→지하자원개발 등 협력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한다는 방침(92년 8월, 남북고위급회담 협력교류분과위 남측대책회의)을 정하면서도 북한핵문제와 연계, 정부승인제(민간기업에 대한 통제) 방침을 정하였다.
대우 남포합영회사(출처-mbc 95년 5월 17일 뉴스)
92년 10월에 정부의 남북경협사업자승인(대북투자사업자격부여) 제1호를  받은 (주)대우는 남포에 공단을 조성하는 사업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93-94년의 핵위기와 김일성 주석 사망 등의 시기에 남포공단 조성사업은 중단되었다. 94년 10월의 제네바 핵합의에 따라 미국이 95년 1월에 대북제재 1단계완화조치 (직접전화개방, 제3국경유 금융거래, 마그네사이트수입, 연락사무소 준비업무 등)를 발표하는 분위기에서 다시 남북 경제협력사업이 재개되었다. 남북간에 항로도 남포-인천, 나진-부산간에 개설되었다. 95년 5월에 대우는 정부로부터 남북경협사업승인 제1호 (투자사업에 대한 승인 : 남포경공업투자)를 받아 512만달러를 투자하였다. 연간 3백만장의 셔츠와 60만장의 재킷, 30만개의 가방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96년 4월에 대우는 북한의 조선삼천리총회사와 [민족산업총회사]라는 이름의 합영회사를 설립하고 9월에 조업을 개시하였다. 남북간의 최초의 합영기업이었다.
대우의 남포합영회사는 합영이라 하지만 북한내에서 자체의 원자재 조달을 못하고 남한의 원자재를 들여다 임가공하여 다시 남한으로 내오는 100% 위탁가공 형태로 운영되었다. 97년의 남북간 위탁가공 교역실적은 반입액 기준으로 4,157만달러였는데, 총65개 회사가 참여하였고 그중 대우, LG상사, 삼성물산 등 대기업 3개사가 2,838만달러로 68%를 차지하였는데 대우가 1,519만달러로 전체 위탁가공반입액의 36.5%을 차지하였다. 98년에는 2천만달러 이상을 수출하였고 예를 들어 일본 미즈노사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골프가방, 셔츠, 스키재킷을 수출하였다. 대우의 추가계획은 TV와 냉장고 등 가전공장도 남포공단내에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99년에 아시아통화위기의 영향으로 자금유동성이 악화된 대우그룹이 해체되는 상황을 맞으면서 남포의 합영회사는 2000년에 합영사업이 중단되고 북한의 국영기업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합영회사인 민족산업총회사의 출자비율은 남북이 5:5였고 운영은 6인의 이사회(남북한이 각각 3인씩)에서 결정하나 실질적인 경영권과 인사권은 북한측이 행사하였다. 인사권을 공장당위원회의 당비서(지금의 당위원장) 권한으로 두는 것이 북한의 [대안의 사업체계]이다. 당위원회는 합영기업의 생산계획에 독립성을 주지않고 국가계획경제에 맞물리도록 통제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사실상의 국영기업처럼 운영되었고 노동자의 채용도 북측이 직접하고 기술교육한 직원들을 다른 공장으로 재배치하는 등 합영기업 운영에서 남측의 입장은 별로 반영되지 않았다. 
대우가 공급한 새타이어에 한국명칭이 영어로 박혀있다고 줄과 페파로 밀어내는 촌극도 있었다. 북한측 생산노동자가 약 1,200명이었고 비생산(관리, 후생, 운전, 경비 등)부문이 약 100명이었는데, 생산직의 평균임금이 약 120달러로 이후에 개성공단 노동자들의 임금보다도 높게 책정되었다. 적정 생산노동자수는 1,000명 정도이었으나 각종 작업외 차출에 대비하여 적정인원 대비 120% 정도의 인원을 채용하였다. 200명 정도의 예비인원은 평소 보수 등의 일을 하며 휴가 등 부족인원 발생시 투입되는 형태였다. 90년대 후반 북한경제가 식량위기 에너지위기 등으로 곤경에 빠진 상황에서 남포합영회사가 점심 식당을 운영하지만 노동자들이 영양부족으로 오후 3-4시경에는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8.3 소비품생산반'이 만든 제품(사진출처-조선중앙TV)
임금지급, 자재구입 등 경영 및 상거래에는 외화사용이 원칙이었으나 전기료, 수도료 등은 내화지불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내화조달이 필요하였다. 그 조달원천은 불량품 또는 자투리천을 처분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8월3일 인민소비품생산] 이다. 1984년 당시 김정일 비서가 평양시 경공업제품전시장을 현지지도하면서 제시한 소비품생산운동인데 남는 자재와 폐기물을 이용해 국가계획에 맞물리지 않고 생산계획에 없는 일용품을 생산판매할 수 있도록 한 자율생산판매 허용조치이다. 이에 따라 기관, 기업소, 협동농장이 소비품생산조직을 내부에 따로 구성하거나 협동조합이 생산하는 방식, 그리고 가내작업반, 부업반을 모집해 생산하는 방식, 노인이나 주부 또는 무직자가 동사무소에 등록하고 집에서 자체로 소비품을 생산하는 방식 등 다양하다. 이렇게 생산한 소비품은 [8월3일인민소비품 직매점]에서 수매하여 판매하거나 시장에 나오게 된다. 각종 섬유제품, 식료품, 초물(왕골제품), 나무제품, 철제품, 학용품 등 소비품이 국가계획 밖에서 유통되는 것이다. 대우의 남포합영회사도 자투리천 등을 북측 노동자들로 구성된 [8.3소비품생산반]이 생활용품으로 만들어 판매하여 내화를 조달하였다.
대우의 남포합영회사가 북한의 사회적 경제를 담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만 대우의 경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을 확인하고 사회적 경제의 관점을 가진 분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① 북한 국영기업과 한 대우의 합영사업이 북한내 판매가 아닌 위탁가공 형태였지만 계획외 경영으로서 자투리천을 활용한 소비품 생산을 통해 내수에 진입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② 북한의 [8월3일 인민소비품생산]은 국영경리의 보완책으로 등장한 것이지만, 그 틀 안에서도 협동조합이 생산판매하는 것이 가능한 구조였다. 역으로 말하면 협동조합의 전통이 있었기에 [8.3 소비품생산]도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③ 남포합영회사의 [8.3소비품생산반]은 표면적으로는 불량품과 자투리 자재를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 규정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노동자들이 불량품이나 자투리천을 더 만들어내는 요량으로 회사제품생산과는 다르지만 불법이 아닌 계획외 생활소비품을 생산하는 사실상 전문화된 단위로 되었다.
④ 국가의 공급이 급감한 상황에서 식량 등 소비품을 스스로 조달하기 위한 장마당활동이 확대되고 이를 위해 현금수요가 커졌다. 여기에 하나의 예로서 [8.3소비품생산] 명목으로 국가계획생산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기업안에서든 밖에서든 단위로 모여 공동생산하고 판매하는 행위는 협동소유 방식의 협동조합운영이 아니더라도 협동조합적 활동에 가깝다
⑤ 남포합영회사는 임금이 외화로 지급되는 안정된 직장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경제를 자체에 담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8.3소비품생산반]의 활동이 단순히 내화조달 목적을 넘어 계획외 생산을 합법적 공간에서 공동으로 진행하고 더 많은 판매이익을 함께 추구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배타적 개인주의가 아닌 사회적 공동체의식이 배경에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사적으로 행동해서 불법적 시장판매이익을 추구했다면 그럴수도 있었겠지만 그리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상과 같은 분석을 해보면 북한이 90년대 이후 경제위기를 대처하는데서 인민들이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삶의 현장에서 개체화되지 않고 공동체적 해결방식을 찾아간 것을 사회적 경제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협동적 상품/서비스 생산이 현실로 가능하여 함께 헤쳐갈 수 있는 사회라는 측면에서 북한사회는 어쩌면 남한사회보다 구성원간 협력에 따른 자구력과 내구력이 더 강할 수 있다.
농담이지만 다시 생각하면 당시 대우의 경협사업이 이런 관점을 가졌더라면 노동자들에게 더 불량품을 만들게 하고(?) 더 자투리천을 만들도록 계획보다 더 많은 자재를 공급하는 소위 [사회적 경제 지원사업]을 추진했어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기업의 경제논리가 부딛치는 부분이지만 재료비가 20% 상승한다해도 이익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다음편 기획연재[북한경제와 협동하자]는 '남북경협의 역사와 미래 (下)'가 주제로 다뤄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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