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06
19 이은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참된 발선(發善)의 신학이 되기 위해 한국교회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
에큐메니안 모바일 사이트,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참된 발선(發善)의 신학이 되기 위해 한국교회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참된 발선(發善)의 신학이 되기 위해 한국교회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
기사승인 2019.01.01
-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한국교회
지난 11월27일 생명평화마당이 한국기독교회관2층 조에홀에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평화신학과 발선(發善)” 심포지움을 개최했습니다.
이날 주제 발표는 한완상 교수(전 통일부총리,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 위원장)가 맡았고,
논찬으로는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 서보혁 교수(통일연구원 연구위원) 그리고 김희헌 목사가 참여했습니다.
이번 글은 이날 논찬을 맡으신 이은선 명예교수님의 논찬문입니다. 원고를 보내주신 생명평화마당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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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착한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
“내 소원은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所願 善人多), 이 말은 16세기 한국의 성리학자 퇴계 선생(1501-1570)의 시 속에 들어있는 구절이다.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안에 세워진 그의 동상 옆에 새겨져 있는 시구로서 16대손 이근필 옹(86세)이 퇴계 선생의 생각을 가장 집약하는 언어로 선택해서 그곳에 새겼다고 한다. 또한 지난 6월에는 연극을 사랑하는 아마추어 연극인 모임 ‘시민극단2010’이 “서울의 착한사람 되기 프로젝트”(연출 이경성)라는 연극을 올렸는데, 원래 독일의 사회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원작인 ‘사천의 선인(善人, der gute Mensch)’을 극단이 재창작해서 어떻게 서울의 선남선녀(善男善女) 시민 11인이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악한 사회 구조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선한 마음을 상하지 않고 지켜나갈 수 있을까를 들여다보는 연극이었다고 한다. 한완상 선생님이 주신 발제문의 제목을 받고서 생각난 두 가지 에피소드다.
그런데 사실 이 두 이야기는 모두 직접적으로 기독교나 한국교회와는 관련이 없다. 그에 반해서 지금 한국교회의 발선의 신학을 위해서 함께 모인 우리에게 오히려 더 가까운 사람들은 요즈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가장 강하게 반대를 하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거짓으로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거리에 나가서 미국기와 이스라엘 기를 들고서 정부 반대시위를 하며 냉전체제를 유지 고착시키려는 한국 대형교회 보수신앙인들이 있다. 어떻게 이러한 어색함과 이율배반적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까? 어느 다른 그룹보다 자신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발선하는, 선을 불러일으키는 복된 소식의 주체임을 강조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특히 한반도 평화의 물음과 관련해서는 그와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 ‘발선’(發善)이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언어를 가져오신 한완상 교수님의 이 글은 이와 관련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2. 평화신학의 논리와 구조
한 교수님은 이번의 글, “한반도 평화 위한 성서 담론들: 발선(發善)의 복음을 촉구하며”에서 지난 4.27 판문점 공동선언 이후 급변하고 있는 한반도 정세를 위한 “평화신학”과 “평화신앙”을 새롭게 구축해 내는 일이야말로 한국교회와 신학자들에게 새로이 다가온 큰 “신학적 도전”임을 지적하신다. 이 “카이로스의 상황”을 맞이해서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젖어있던 “냉전근본주의”를 떨치고 하나님의 평화를 확산시키기 위한 큰 과제임을 상기시키시면서 자신이 “한국평화신학”을 세우기 위한 “자그마한 마중물의 역할”로 이 글을 준비하셨다고 밝힌다. “평신도” “교회지도자”로서 일종의 마중물이라고 하셨지만 선생님의 탐색과 성찰은 깊고도 포괄적이다.
▲ 지난 11월27일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진행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평화신학과 발선(發善)” 심포지움을 개최했다. 이날 주제 발표에 대해 첫 번째 논찬자로 나선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생명평화마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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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전체와 평화담론 주제를 크게
1) 창조담론과 평화,
2) 희년담론과 평화,
3) 성육신담론과 평화,
4) 부활담론과 평화의
네 카테고리로 조직신학화 하면서 그와 연결해서 성서 본문을 가져와 나름의 해석으로 한국평화신학적 의미를 밝혀내신다.
창조신앙과 예언서를 연결하여 생태 삶 속에 들어온 불평등을 반(反)창조 신앙적 악의 현실로 밝히고, 구약의 희년담론과 나사렛 예수의 선교와 선포가 동일한 ‘사랑담론’이고 ‘평화담론’인 것을 지적하시면서 성서의 성육신 담론이야말로 당시 세계 정치권력의 보편적인 우상 숭배적 신격화와는 반대로 참으로 구체적이고 몸적으로 창조주의 자기 비움(육화)이 실천된 이야기라고 강조하신다.
이러한 자기 비움의 실천이 바로 악을 선으로 이기는 발선의 질적 변화를 가능케 한다고 역설하는데, “예수선교는 바로 발선선교요, 발선선교는 바로 평화 만들기 선교”로서 그것이 “예수선교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이 분단현실에서 바로 그 사실을 “온 몸으로 절감해야”하고, 그 예수선교는 요한복음 20-21장이 전해주는 예수부활의 “포스트모던적” 의미와 연결되어서 “선제적 사랑실천”(preemptive love)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평화 만들기(peace-making)의 일을 하게 하는 “오늘의 동력”이 된다고 밝히신다.
3. 상투화된 기독교 복음이야기와 태극기 부대
하지만 이렇게 오늘 한반도의 변화된 상황을 위한 평화신학을 구축하기 위해서 성서 전체를 아우르고 그것을 세계창조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궁극적인 구원 이야기까지를 모두 통섭하는 큰 이야기로 구성해 내셨지만, 그러나 과연 그것이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로서 우리의 계속적인 평화 만들기를 위해서 실행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답이 그렇게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논리와 구조의 복음이야기는 우리가 유사하게 많이 들어왔고, 심지어는 앞에서 먼저 언급한 태극기 부대 보수 기독교가 주창하는 복음 이야기와도 그렇게 다르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와 같은 언술의 구조는 기독교가 매번 세계의 여러 문제들과 마주해 오면서 답변을 주고자 할 때 거의 반복적으로 내세우는 논리와 유사하고, 그러한 고정화된 반복은 앞에서 살펴본 한국 보수 기독교에서의 예처럼 선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악’의 근거로 작용하는 기독교 복음을 새롭게 하는데 역부족이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일찍이 안중근 의사는 아직 하얼빈의 거사 전 고향 황해도에서 천주교인이 되어서 열심히 전도도 하고 프랑스말도 배우면서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대세를 크게 염려하던 때, 우리 민족을 위해서 큰 효과가 있을 ‘대학’을 세우려는 뜻을 품고 주교를 만나서 열심히 설득해 보았다. 하지만 그 주교가 ‘한국인에게 학문이 있게 되면 교(敎) 믿는 일에 좋지 않게 된다’고 하면서 끝내 거절하자, “교(敎)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된다”라고 대답하며 프랑스 말 배우던 것도 걷어치우고 말았다고 한다.(1) 이 이야기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안중근의사는 서구로부터 전해 받은 천주교 신앙과 그것을 전해준 신부나 국가 프랑스를 그대로 동일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의 많은 한국 기독인들은, 특히 앞에서 말한 분단 냉전주의를 고수하고자 거리로 나선 교인들 중에는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과 유대 문명, 오늘의 국민국가인 미국이나 이스라엘을 그대로 실체론적으로 일치시켜 보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된 요인이 이미 기독교 신앙과 특히 그 신론과 기독론(구원론) 안에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에게 전해진 기독교가 한국의 민중들을 궁극자 하나님과 급진적으로 직접적으로 만나게 하고 관계 맺게 하면서 그들의 삶을 이전의 어느 종교그룹도 이루어내지 못한 정도로 크게 변화시켰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 그러한 기독교적 궁극자와 구원의 길이 다시 우상화 되고 실체화 되어서 사람들의 삶과 사고를 옥죄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예전 안중근 의사가 민족의 물음과 신앙 사이의 관계 물음에서 성찰했듯이 특별히 오늘 분단 상황에 놓여있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라는 주제를 탐색할 때는 기독교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되뇌어오던 논리구조에서 과감히 벗어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진정한 발선의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복음도 포함해서 기독교 ‘이전’과 그 ‘이후’를 함께 아울러서 보다 통합적으로 보는 새로운 성찰이 요청되고, 그것은 더욱 포괄적이고, 지금보다 더 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안목과 성찰로 우리의 과제를 새롭게 보는 것을 말한다.
4. 지구신학 시대의 보편적 창조이야기
이미 30여 년 전 여성신학자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는 “생태학적 핵시대를 위한 신의 형상”(a cosmological theological agenda, models of God)을 탐색하면서 이제 인류는 자신들을 더욱 포괄적으로 묶을 수 있는 공통의 “보편적인 창조 이야기”(a common creation story)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우리가 소위 ‘빅뱅이론’(the Big Bang theory)로 알고 있는 과학이야기로서 지금부터 150억 년 전에 ‘빅뱅’이라고 하는 대폭발을 통해서 우주가 탄생했고, 그로부터 계속 진행된 태양계나 지구, 인간, 인류문명 등의 탄생을 말하는데, 그녀에 따르면 인류는 이렇게 20세기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함께 그러한 보편적인 공통의 창조이야기를 가질 수 있게 되면서 지금까지의 편협한 인간중심주의나 서구문명권 중심주의 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발상을 매우 의미 있게 생각하면서, 그렇다면 오늘 한국인들도 그가 아무리 기독인이라 하더라도 기독교 성서가 가르쳐주는 창세기의 이야기만을 세계창조의 유일한 이야기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오히려 특히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물음과 관련해서는 우리에게 고유하게 전해져오는 ‘단군세기’ 등의 창조이야기가 있는 것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고, 그것이 결코 무의미한 성찰이 아닌 것이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특히 3.1운동 전후의 항일독립투쟁에서 그 어느 다른 종교그룹보다도 치열하게 나라의 독립과 자주, 세계를 품는 이상을 위해 투쟁을 펼쳐나간 그룹이 한반도의 ‘대종교’이고, 그 대종교는 바로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성찰을 토대와 출발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즉 당시 민족의 독립과 자주, 세계의 하나됨을 염원하는 일에서의 최고의 발선 종교는 대종교였다는 것이다.(2)
5. 동북아의 세계 창조 이야기와 한국 대종교(大倧敎)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가 동북아시아의 세계창조 이야기인 단군 이야기와 만나 온 과정과 내용을 살펴보면 그 이야기를 아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고 하는 경우도 동북아의 단군 이야기가 메소포타미아 유대문명의 창세기 이야기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고,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으로부터 환인, 환웅, 환검의 『삼일신고三一神誥』나 『신사기神事紀』의 셋이면서 하나인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보는 정도이다.(3) 즉 유대기독교 문명이 보편이고, 한반도의 것은 그 아류의 특수라고 보는 입장인데, 이러한 시각의 역이나 또는 각자의 독자성이 더욱 인정되는 시각이 오히려 진실일 수 있다는 생각은 왜 해볼 수 없는가라고 나는 묻고 싶다.
오늘 인류 문명을 모두 함께 어우르는 보편적 창조이야기와 지구신학이 가능하게 되었다면 서구 기독교 문명의 창세 이야기도 한반도의 창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특수로 여겨져야 한다. 그래서 인류의 문명들이 전해주는 다양한 창조이야기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앞으로 인류가 삶을 개척하고 전개시켜 나가는 데에 함께 도움을 줄 수 있고 자극할 수 있는 풍성한 종교적 창세의 이야기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반도의 삼일신고(三一神誥)는 셋이 곧 하나인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기독교의 그리스도와 견줄 수 있는 ‘신인’(神人)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의 현현을 단군왕검뿐 아니라 인간 누구나의 지향점으로 제시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 안에 신적 가능성으로 내재하는 거룩의 ‘씨알(性)’을 일구는 일로 보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기독교가 빠져있는 예수에 대한 실체론적 ‘그리스도우상주의’를 제고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미 유영모 선생이나 함석헌의 씨알사상이 그와 깊이 연관되어서 전개된 것인 바,(4) 대종교는 그러한 의식으로 항일운동도 그렇게 치열하게 수행했고, 대종교의 대종사(나철) 등 대표적 지도자들(이기, 서일)이 모두 스스로 숨길을 닫는 순절로써 나라의 독립과 인류의 하나 됨을 위해서 저항했고, 일제는 그러한 종교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 김좌진의 청산리대첩(1920) 등을 계기로 대종교인 10만 명 이상을 참살했다고 한다. 오늘 한국의 기독인들에게는 잘 전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6.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주인의식’
대종교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상해임시정부의 기초를 다진 예관 신규식(睨觀 申圭植, 1879-1922)은 한민족이 나라를 잃은 이유를 망각과 ‘주인의식’의 상실로 보았다. 그의 『한국혼』은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신 역사의 근거와 거기서의 뛰어남과 치욕을 잊고서 자신을 스스로 대접하지 않으면서 주인의식을 잃고 종처럼 사는지를 여러 가지로 지적한다. 나는 여기서 신규식 선생이 지적한 ‘주인의식’은 일반적인 주체의식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전해진 기독교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각자 궁극자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게 되면서 뛰어난 ‘주체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그 주체의식은 자칫 개인주의나 사적 이기심으로 변질한 소지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해서 ‘주인의식’은 자신의 보다 더 근원적인 시작과 근거의 역사를 아는 의식이므로 “결코 불행을 도피하지 않”고, 민족적 상황에 대한 책임의식을 크게 느껴서 자신의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행위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한반도 상황에 대한 대처에서는 단지 주체의식이나 자주, 자립, 독립 등만을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다시 이 ‘주인의식’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경우 자신이 속해있는 민족적 공동체의 역사와 그 생각할 수 있는 기원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밝힌 대로 기독교 복음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서는 한계가 있고, 비록 거기서의 복음이해가 새로운 ‘평화신학’으로서 예수 삶과 죽음, 부활에 대한 민중신학적 관점에 더해서 역사적 예수 탐구의 시각도 함께 가지면서 ‘포스트모던적’으로 해석되었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맥페이그도 그런 의미에서 인류 모두가 공통으로 가지게 된 빅뱅의 창조이야기와 더블은 지구신학의 등장은 바로 1960년대 이후로 전개된 ‘해방신학’의 확장이라고 이해한 의미라고 생각한다.(5) 그렇게 우리가 이제 보다 포괄적인 의미의 공통적 창조이야기를 가지게 되었다면 전통적으로 지역과 문명권의 경계 속에서 이루어진 예전의 한 특수한 종교적 창조이야기를 모두의 절대적 보편 이야기로 독점하는 일을 내려놓고 다른 문명권의 창조 이야기들에게도 그 독자성을 인정하는 ‘해방’을 실행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7. 사유하고 성찰하는 기독교, 참된 발선의 신학을 향한 출발점
1945년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던 소련의 스탈린주의를 냉철하게 희화화한 『동물농장』에서 조지오웰은 그 마지막의 장면을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라고 그리고 있다. 이 말은 자신들을 착취하는 인간 사회에 대해서 돼지가 지도자가 되어 동물들의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지만 그 사회주의가 다시 타락해서 독재 국가가 된 상황에서 비참해진 공동체 삶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그 중 큰 특징은 그곳에서는 모든 디테일과 구별과 개별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오늘 우리의 주제와 관련시켜 보면, 서구 기독교 문명의 독점으로 인류 문명에서의 다양한 디테일들이 모두 사라질 지경이며, 이렇게 디테일과 개별성이 사라지고 전체주의화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고와 성찰이란 존재와 삶의 디테일과 개별성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되는데, 그렇게 전체주의화한 곳에서는 사유는 정지되고, 모든 것이 획일화되며 사람들이 쓰는 언어도 상투어와 인습적인 말 외에는 다른 서술을 할 능력을 잃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한나 아렌트가 밝힌 사유하지 못하는 아이히만의 악의 출발이었고, 나는 오늘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인들의 언어도 거의 그러한 수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래서 거기서 나오는 것은 선이 아니라 오히려 ‘악의 평범성’을 말할 정도의 악의 만연이며, 책임과 자립과 주체는 사라지고 오직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기계적이고 앵무새처럼 자신들만이 가졌다고 하는 ‘진리(복음)’를 반복하는 무사유의 신앙이거나, 거기에 더해서 만약 자신이 믿고 수립한 진리나 목표가 타자에 의해서 방해를 받는다고 여기면 그 신앙이 가장 기초적으로 금하는 거짓과 폭력을 행해서라도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초이념의 폭력적 행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평화신학이 고려해야 할 것은 그것이 참된 발선의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누려왔던 자신들의 보편의 독점을 내려놓는 일이다. 한민족의 삶이 고유하게 전개시킨 또 다른 창조이야기가 이제 다시 경청될 수 있어야 하고, 오늘 세계가 놀라는 BTS나 최근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은 젊은 작가 최은영의 예에서 보듯이, 그들이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가 그들의 존재와 노래, 문학작품이 전하는 ‘선함’과 ‘삶의 긍정성’(好生/生理) 때문이라면 한국의 시원인 홍익인간의 평화와 사랑, 대동의 일치를 염원하는 창조이야기는 결코 무의미하거나 실효가 다한 것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성의 대가로 서구 유럽사회는 하나가 되었지만 오늘 이제 그 서구 안에서의 하나 됨이 아니라 지구의 동서가 하나로 되는 더 큰 일이 남아있다면, 그것이 결코 또 다른 세계대전을 통한 일이 되게 해서는 결코 안된다. 그 일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핵심이라는 것은 세계인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방향을 잘 잡는 운전대의 역할을 용기있고 착실하게 하려면 나는 한반도의 모든 사람들이 주인의식으로 서로를 보듬고, 소통하고, 화합하면서 1919년 3.1운동과 2017년 촛불혁명의 경험을 살려서 평화와 민주와 시민들의 자발성과 주인의식으로 이루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일이 꼭 이루어지도록 참된 발선의 신학을 위해서 간절히 마음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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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미주 1) 화문귀 주필 유병호 역, 『안중근 연구』, 대련시근대사연구소 여순일러감옥구지박물관 학술연구총서, 2009, 83.
(미주 2) 이은선, “3.1운동 정신에서의 유교(대종교)와 기독교-동북아 평화를 위한 의미와 시사”, 한국종교교육학회 3.1독립운동 백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2018.11.23 서강대학교 발표문.
(미주 3) 윤성범, “기독교와 한국 윤리”, 『신학과 세계』, 감리교신학대학, 1977, 9.
(미주 4) 이은선, 같은 글, 127; 이규성, 『한국현대철학사론-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 이화여대출판부, 2015, 255.
(미주 5) 이은선, “과학시대에서의 종교와 여성-한 한국 에코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포스트모던 시대의 한국 여성신학』, 분도출판사, 1997, 108.
이은선(세종대 명예교수, 한국信연구소 소장)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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