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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정치적 무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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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판 확인일 : 2019-11-21
256쪽
138*214mm
410g
ISBN : 9788967351069
책소개
이 얇고도 작은 책은 그 외형적 인상과 달리 동서양 문명의 수천 년 역사, 그것의 빛과 그늘에 대해 ‘유교’를 화두 삼아 논하려는 진지하고도 두터운 내용을 담고 있다. 유교는 맹목화되기도 하고 수많은 오독을 낳으며 비판받았지만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서 우리의 ‘무의식’을 떠나지 않는다.
이미 유교 자체가 기나긴 역사 속에서 그 자신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17세기 스피노자의 텍스트와 고대 로마의 한 귀족 여성은 오늘날 유교와 어떤 지점에서 만나며, 유교의 전위 轉位와 변형은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저자는 이론틀들을 하나씩 세워나가며 이를 형상화해낸다.
목차
책머리에
제1장 유교의 윤리성과 비판성: 21세기 문명 재편의 한 축
1. 문명 재편과 중층근대
2. 카를 야스퍼스와 축의 시대
3. 맹자의 땀 성왕의 피
4. 유교의 전위轉位와 변형
제2장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
1. 유교, 스피노자, 민주주의
2. 조숙한 근대국가와 사족의 정치적 무의식
3. 유교세계의 ‘국가 부르주아’, 그 성취와 한계
4. 왕조 시대의 종말, 포스트 유교 시대의 시작
제3장 “아내는 남편의 스승”: 유교 문명화의 빛과 그늘
1. 문명화와 여성화
2. 루크레티아, 공화국 로마의 어머니
3. 죽음 앞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을 바꾸지 않는다
4. “아내는 남편의 스승”
5. 다시 루크레티아로?자살과 열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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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상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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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해남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랐다. 1980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에 입학하여, ‘서울의 봄’과 ‘광주사태’를 겪고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1982년 강제 징집되었다가 1985년 만기 제대하여 이후 1992년까지 인천, 구로의 공단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1993년 뉴욕으로 유학하여, 뉴스쿨에서 석사학위(사회학)를,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사회학, Paul F. Lazarsfeld Fellow)를 받았다. 2001년부터 경희대학교 공공대학원(전 NGO 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맹자의 땀 성왕...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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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은 무엇인가
『맹자의 땀 성왕의 피』 김상준 교수 신작!
중층근대성론으로 다시 읽은 유교의 심층
이 얇고도 작은 책은 그 외형적 인상과 달리
동서양 문명의 수천 년 역사, 그것의 빛과 그늘에 대해
‘유교’를 화두 삼아 논하려는
진지하고도 두터운 내용을 담고 있다.
유교는 맹목화되기도 하고 수많은 오독을 낳으며 비판받았지만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서 우리의 ‘무의식’을 떠나지 않는다.
이미 유교 자체가 기나긴 역사 속에서
그 자신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17세기 스피노자의 텍스트와 고대 로마의 한 귀족 여성은
오늘날 유교와 어떤 지점에서 만나며,
유교의 전위轉位와 변형은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저자는 이론적 틀을 하나씩 세워나가며 형상화해낸다.
왜 유교의 ‘무의식’인가
지난 2011년 『맹자의 땀 성왕의 피』(아카넷)로 학계와 독서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던 한국의 근대성 이론가 김상준 경희대 교수가 그 후속작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을 펴냈다. 전작에 대한 이론의 정교화 작업이자 사례 분석의 확대이며, 『맹자의 땀 성왕의 피』 논평에 대한 반론도 담고 있다. 전작에서 서구 중심적 근대성론을 시공간적으로 확장하고 보완한 중층근대성론을 유교문명 및 조선사회의 역사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새롭게 정초해낸 저자는 이번 책에서 인류 보편 가치(근대성의 핵심으로서)로서 향후 문명 전환의 한 축을 담당할 유교의 ‘윤리성’과 ‘비판성’을 구체적으로 확장·심화시켜 분석하고 있다.
저자가 수천 년 동양 문명을 지탱해온 ‘유교의 무의식’이라는 대륙에서 찾아내는 무의식들은 이 책에서 비판성, 윤리성, 민주, 민생, 문명화, 여성화 등의 기호로 해독되고 있다. 현실 세력관계로 볼 때는 국왕의 하위 파트너라 할 수 있는 유학 관료집단은 정신적으로 볼 때는 국왕의 상위 파트너로 존재하면서 성왕이 될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비판의 다양한 방식과 차원을 개발해왔으며, 부모의 시체를 뜯어먹는 들짐승의 모습에서 최초로 흘린 ‘맹자의 땀’이라는 윤리적 단초는 부단히 연마되고 국가적 예론 시스템이나 개별적인 인격 수양에서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춘추시대로 거슬러 올라갈만큼 오래된 유교의 구민정책은 주희의 사창제도와 조선의 환곡제도로 이어져내려오는 사회학적 성찰 거리를 던져주며, 저자는 여기서 ‘내발형 복지 메커니즘’의 중요한 사례를 읽어내기도 한다. 남편에게 “아내는 나의 스승”이라는 말을 끌어낸 강정일당의 인생은 유교 가정의 내부 풍경을 우리로 하여금 다시 사유하게 만들며, 가정 내 직유로서의 여성상은 일제강점기 반일운동, 해방 이후 반독재운동의 흐름에서 서서히 스스로 발언자요 행동가의 모습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오늘날 한국 사회의 민주적 역동성이 오직 유교의 비판적-윤리적 전통에서‘만’ 유래했다는 식의 주장으로 오해되면 곤란하다. 동아시아 문명의 윤리성, 비판성의 자원資源은 물론 유교 외의 영역(도가, 법가, 불교 등)에도 풍요롭게 내재해 있다. 동아시아를 넘어 더 넓게 봐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교 민주주의’니 ‘유교 복지주의’니 ‘유교 여성주의’니 하는 식으로 고정시켜 규정할 필요는 없다.
중층근대론의 자기성찰성, 유교 비판성·윤리성의 뿌리
자기성찰의 힘이 근대성 안에 내장되어 있다는 것은 중층근대론의 논점 중 하나다. 근대성은 한편으로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적 개발욕, 정복욕으로 인식된다. 막스 베버가 예견한바, 도구적 합리성이 뒤덮은 암울한 기술주의적 세계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근대성에는 무자각적 예속의 족쇄를 끊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이성적 주체로 향하는 기획, 이러한 이성적 주체의 자발적 연대로 이루어진 고차적 사회에 대한 전망이 포함되어 있다. 근대성의 역사는 이 두 개의 근대성 간의 변증적 쟁투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 역사를 끌어가는 본원적인 추동력은 물론 후자의 것이다. 근대가 만들어내는 파우스트적 문제점을 자기성찰과 비판의 범위 안에 포착하는 근대성 말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러한 자기 성찰, 비판, 또는 반조返照의 힘이 정확히 무엇이며 그것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윤리성과 비판성으로 집약한다. ‘맹자의 땀’은 유교 윤리성의 기원을, ‘성왕의 피’는 유교 비판성의 기원을 상징하는 기호다. 유교세계에서 이러한 윤리성과 비판성이 부단히 관철되어왔음을 이해할 때, 우리는 유교세계의 근대적 자기 동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유교세계, 유교 문명권에 대한 언급 이전에, 유라시아 차원에서 이러한 윤리성과 비판성이 어떠한 공통된 계기를 가지고 있었는지 먼저 밝혀둘 필요가 있다. 중층근대성론은 동아시아나 유교 문명권에만 적용되는 이론이 아니고, 최소한 유라시아 차원의 공통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류末流 유교의 재생사례 비판
지금까지 널리 운위되었던 유교 재생revival의 사례들은 그리 미덥지 못했다. 하나는 유교자본주의론이고 다른 하나는 리콴유류의 유교권위주의론이다. 모두가 친족주의 또는 유사친족적 공동체주의를 유교적 가치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개발독재와 유교를 파트너로 본 것이다. 그것이 유교라면 말류末流의 유교일 것이다. 유교에는 군주가 성왕이어야 한다는 도덕적 요청으로서의 유교도 있고, 현실 군주를 성왕으로 칭송하는 전제주의 이념으로서의 유교도 있다. 현상 비판의 윤리적 기제로서의 유교, 현상유지의 합리화 기제로서의 유교가 역사적으로 다 존재했다. 유교자본주의론, 유교권위주의론은 단연코 후자의 현상유지적 유교론에 의거하고 있다. 이들은 유교의 비판적-윤리적 핵심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지하다. 아울러 이들이 유교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있는 친족주의란 기실 유교의 본령이 아니라 부수 효과쯤 되는 것이다.
유교 예론의 역사를 보면 그것이 왕위 계승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왕조사회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심각한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유교사회는 이 문제를 특별히 안정적으로 해결했던 셈이다. 그 비결이 종법제를 축으로 한 예론이었다. 종법제 자체가 유교의 이상이요 목표였던 것이 아니다.
환곡은 나쁘기만 한 것이었나
우리는 흔히 환곡을 19세기 ‘삼정문란’의 하나로만 배웠기에 그저 나쁜 제도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퇴락한 말폐만 알지 건강했던 본체는 모르는 것이다. 17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200년간 전前 산업기 농업국가에서 대규모 아사餓死 사태가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인데, 여기에 환곡이 큰 역할을 했다. 특히나 이 시기는 임란과 호란을 거푸 겪은 이후로 국가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작해 어려움 속에서 놀라운 재건을 이룬 셈이다. 환곡은 주희의 사창 구상을 국가가 접수해서 전국 차원에서 운용했던 제도라고 할 수 있다. 환곡이나 대동미 등 구체적인 경세 정책을 놓고 조선시대 유자들이 벌였던 논쟁의 수준은 매우 높을뿐더러 지속적이었다. 이러한 경세론의 주역, 우환의식의 주역이 과거 왕조 유교사회에서는 뜻 높은 유자와 고급 관료들에게 한정되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경제 분야에서도 대중의 중지를 모아나갈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고 있다
‘절개’는 가부장제의 유산이 아니다
유교의 비판성·윤리성과 여성주의의 연관성이다. ‘남자는 지조, 여자는 절개’, 굉장히 익숙한 말이다. 그만큼 많은 비판을 받아왔던 관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전위와 변형’을 통한 재해석이 필요하다. 지조란 목숨을 건 과감한 권력 비판을 가능케 했던 윤리적 자세인데, 절개 관념 역시 당시 여성 생활의 범위 안에서 유사한 역할을 한 측면이 있다. 지조를 단순히 군왕주의 이데올로기의 소산으로 축소시킬 수 없는 것처럼, 절개 역시 가부장적 성적지배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간단히 기각되지 않는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유가의 이상적인 여성상은 스스로가 여군자女君子가 되어 남편과 아들이 직유가 되도록 떠받치고 인도하며 가르치는 존재다. 조선의 여성 강정일당을 두고 유학자였던 그의 남편이 “아내가 나의 스승이었다”라고 고백한 것은 유교 가정의 한 내면을 드러낸다. 물론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논하는 권위주의적 버전의 유교관에서는 남편이 가정의 군주요, 아내는 신하가 된다. 그러나 유교에 이러한 버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정朝廷에서는 신하인 유자가 군주를 가르치는 스승이 된다. 이것이 오히려 유교 정치의 정론正論이자 이상형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가정에서도 같은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즉 유교 성왕론에 군주 주권을 내파內破하는 공화적이고 민주적인 싹이 자라고 있었던 것처럼, 유교 여성론에도 예속적이고 불평등한 성 상황을 내파하는 평등적이고 민주적인 계기가 잠재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17세기의 스피노자, 동양에서 민주주의를 찾다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 「원목」 「탕론」에 여실히 드러난 밑으로부터, ‘중衆’으로부터 ‘권력이 형성된다下而上’는 생각, 대표자를 ‘추대하고推’ ‘뽑고選’ ‘바꾼다代’는 표현, 여기에는 분명히 ‘민주주의적’ 발상이 담겨 있다. 이러한 발상을 다산은 유교 경전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었다는 『서경』에서 뽑아온 것이다. 또 이러한 고찰과 해석은 그를 뒷받침하는 유교 고경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근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유교 자체를 현대적 의미의 ‘일관된 민주주의’와 연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 할지라도, 유교 교의와 유교 체제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의 단초를 이루는 ‘민주주의적’ 요소나 계기를 찾아본다는 것은 그리 무리한 시도가 아닐 것이다.
유럽 철학사에서 민주주의를 최초로 분명하게 지지하고 저작을 통해 이를 체계적으로 표현했던 인물은 17세기의 화란인 스피노자다. 스피노자의 ‘극동 요인要因’은 그보다 14세 연상의 친우親友인 아이작 보시우스Isaac Vossius를 매개로 작동했다. 보시우스는 스피노자와 같은 네덜란드인으로서, 이웃이면서 급진적 철학 서클의 동료 멤버로서 빈번히 교류했던 인물이다. 그는 1661년 출간된 De septuaginta interpretibus를 통해 성경에 묘사된 역사보다 중국 고문헌의 역사가 더 오래되었다고 논증해 유명해진 인물이다. 보시우스는 당시의 중국과 조선을 두고 ‘철학자들이 다스리는 나라’ 또는 ‘플라톤적 공화국’이라고 했다. 당시 유럽에서 ‘철학자’라는 용어는 ‘신학자’와 대비되는 급진적인 용어였다. 그는 중국과 코리아의 고위 관료들은 철학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또 이들 통치철학자가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지 못하면 인민이 이들을 판정할 자유freedom to judge를 갖는다고 했다. 이어 이곳에는 유럽과 같은 세습귀족이 없고, 오직 배운 자들lettered만이 귀하게 대접받는다고 썼다. 또한 이 나라의 왕이 잘못을 범하면 이 철학자들은 대놓고 비판하는데,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들조차 감히 하지 못했던 수준이라고 했다. 보시우스의 중국, 조선 이해가 어느 정도 이상화되어 있음은 사실이다. 특히 인민이 통치철학자들을 판정할 자유를 갖는다는 대목은 사실과 다르다. 아마도 ‘이곳에서는 민심民心을 천심天心으로 안다’라든가 어사의 민정감찰 제도에 관한 소식이 확대 해석되어 전해진 것이리라. 그러나 그 외의 언급들은 유교 정체政體의 과거科擧 관료제와 비판적 간의諫議, 대간臺諫 제도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17세기 유럽에 민주주의는 없었다. ‘신역사주의’를 제창해 유명해진 영문학자 스티븐 그린블랫Stephen Greenblatt이 최근 출간한 『1417년, 근대의 탄생Swerve』은 이 당시까지 유럽이 얼마나 혹독한 사상 탄압과 종교 폭정을 당했는가 하는 것을 생생하게 잘 보여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민주주의를 공개적으로, 명시적으로 옹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스피노자가 그런 일을 했고, 그 결과 극심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과 코리아의 유교 정치 체제에 관한 인상이 보시우스를 통해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론에 임팩트를 주었으리라 추정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러한 ‘바깥으로부터의 시각’은 민주주의란 오직 서구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재고하게 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죽은 자식 거기 만지기’(동양전제론) 비판
유교권의 강한 국가, 강한 왕권의 기원은 진시황제의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최근 저작에서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진나라는 이미 조숙한 ‘근대 중앙집권 국가modern centralized state’였다고 단언한다. 후쿠야마가 근대국가라고 했을 때 핵심적인 표징으로 삼은 것은 그가 ‘사촌들의 전횡tyranny of the cousins’이라고 부른 왕가 일족, 귀족 가문들의 전횡으로부터 국가 주권(당시에는 왕권)의 독립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사회도 근대국가가 아니라고 했다. 국가의 주권이 강력한 부족 세력들 간에 분할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후쿠야마가 진시황 이래의 중국을 이미 근대국가라고 했을 때, 그것은 중국의 조숙한 근대성을 칭송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지나치게 일찍 강력한 국가 체제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가 탄생했고, 그 결과 ‘법의 지배rule of law’도, ‘왕권에 대한 견제와 왕권의 민에 대한 책임accountability’도 성장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조숙한 국가 근대성이 오히려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일찍이 원천봉쇄했다는 뜻이다. 후쿠야마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실상 이미 폐기 상태에 있는 낡디낡은 ‘동양 전제론’을 되살려보려 한다. 또 이를 통해 오직 서구에서만 근대가 발생했다고 하는, 이미 충분히 논박된 편견에 대한 또 하나의 잘못된 논증을 추가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들이 군주의 자의恣意와 변덕에 따라 일시적으로 쓰였다가 짚더미처럼 버려지는 무력한 존재였다면, 굳이 후쿠야마가 오늘날에도 뒷북치며 거들지 않았더라도, 해묵은 이론인 ‘동양 전제론’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국시대에도 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사를 중용하는 정치 구조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것이었다. 사 출신의 능력자를 높이 썼다가 일관성도 원칙도 없이 무참하게 짓밟는 군주가 생사존망을 건 필사적인 군사 경쟁에서 살아남기란 어려웠다. 진나라가 채택한 법가라 해도 일단 정한 법에 대한 지속성의 보장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신흥 정치 엘리트로서 사 신분과 그들이 획득한 직위의 안정성에 대한 어떤 제도적 장치나 보장이 없는 상태라면 그런 위치란 상당히 위태로운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동양적 전제주의’가 작동할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문제가 실제로 해결되었다면, 동양 전제주의라는 이론 체계가 설 근거도 무너진다.
과연 유교국가에서 왕은 법보다 위에 있었는가?
후쿠야마는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 문명권에서는 군주보다 상위에 있는 ‘법의 지배’의 전통이 존재했고, 그 근거는 종교적 교의 체계라고 했다. 반면 유교 문명권에는 한사코 ‘법의 지배’의 전통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2 유교를 포괄적 교리 체계와 포교 조직을 갖춘 종교로 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초점은 유교의 종교/비종교 여부가 아니라, 실제로 유교가 왕권을 얼마나 포괄적으로 계도하고 규제했는가일 것이다. 유교 체제를 후쿠야마가 말하는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 사회와 비교해보면, 오히려 유교가 왕권을 위의 세 종교보다 더 강하게 규제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와 비교해봐도 마찬가지다. 유교를 종교로 인정하는 입장에서도 흔히 유교에는 독립된 교단敎團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권에 대한 정치적 독자성이나 영향력이 약했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는 오히려 반대다. 독자적 교단이 있을 때는 현세 정치의 개입이 제1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왕권에 대한 개입도 간접적이 된다. 반면 유교는 현실 정치에 대한 개입과 교정이 제1의 목표였기 때문에 왕권에 대한 개입도 직접적이고 전면적이었다. 유교는 역사적으로 존재해온 모든 윤리종교 중에서 제일 강하고 치열한 정치종교였다. 유교 교리의 핵심에 있는 성왕론은 흔히 왕조 체제, 군왕주의에 대한 열렬한 찬미로 오해받는다. 그래서 유교나 유학자라고 하면 「용비어천가」나 부르는 아부쟁이들이요 군주주의자라는 인식도 있다. 물론 국가 종교가 된 이상, 이런저런 세력과 인물들이 꼬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왕론 자체는 오히려 현실 군주, 왕조 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품고 있음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성왕론은 모든 임금이 요순이라는 뜻이 아니다. 모든 임금은 요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실로 막대하다.
왕망의 교훈 - 정신적 상위 파트너이자 현실 세력관계의 하위 파트너
이러한 상태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자 왕망王莽이 너무나도 이상스럽게 지극히 평화롭게 제위에 올랐다. 새 왕조의 국호를 신新(서기 8~24)이라 했다. 왕망은 태후 왕씨의 조카로서 황실의 인척이자 조정의 실권자이기도 했지만, 『주례周禮』를 직접 발굴해내고 이를 풀이했던 저명한 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당시 조정의 유교 관료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는데, 이들은 왕망의 제위 등극과 신왕조 개창을 별다른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왕망 자신과 왕망이 『주례』의 이상을 복원할 것을 주장하며 개창한 신왕조는 실은 유교의 감춰진 정치적 무의식을 여지없이 폭로한 셈이었다. 일찍이 동중서가 공자를 두고 ‘왕위 없는 왕素王’이라 하지 않았던가. 어떤 의미에서 실제 왕보다 더 높은 정신적 왕, 철학자 왕이다. 왜 소왕素王이 실제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그것이 진정으로 정의로운 것 아닌가. 공자가 왕이 되지 못했던 시대가 부정의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후 모든 정사正史에서 왕망은 신하로서 왕위를 빼앗은 찬탈자로 격렬히 규탄된다. 유교는 왕권을 정신적으로 압도하고 계도할지언정 신하로서 왕권을 찬탈할 수는 없다. 현실의 세력관계 속에서 유권은 왕권의 하위 파트너로 유지되어야 한다. 이것이 유교가 왕망의 사례를 통해 일찍이 얻은 교훈이었다.
‘정신적 상위 파트너이자 현실 세력관계의 하위 파트너’. 이것이 왕망 이후 유교와 왕권의 독특한 동거관계를 규정하는 유교의 공식 규범이자 원리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후한 이래의 유학은 왕망을 격렬히 규탄했지만, ‘정신적 상위 파트너이자 현실 세력관계의 하위 파트너’라는 공식은 이론적으로 오히려 공고하게 만들었다. 주희가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서 전개한 유명한 도통론道統論은 이를 명확히 드러낸다.
‘유교 국가 부르주아’의 정치적 무의식
초기 근대 유교 체제의 근본적인 절충성은 유교 ‘국가 부르주아’의 지평을 결정적으로 제약했다. 그들의 공 사상과 요순 선양론은 이미 고경에서부터 거듭 출현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적 단서들은 대담하고 체계적인 공화주의, 민주주의 사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것은 늘 강한 동기로 존속했지만, 선명하고 일관된 형태로 표현되지 못하는 정치적 무의식에 머물렀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봉건적 왕조제와의 절충이라는 틀 안에 한계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유교 ‘국가 부르주아’는 왕권에 대한 부단한 계도와 규제라는 게임을 통해서만 존속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었다. 왕권에 대한 이러한 계도와 규제는 자유주의적(견제와 균형)이며, 공화주의적(성왕론, 선출론)이자, 민주주의적(민본, 하이상下而上의 이념, 민위요순民爲堯舜)이기도 한 급진적 잠재성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왕조, 왕권이 무너지는 순간, 그 자신이 딛고 서 있는 토대도 무너지게 되어 있던 것이 유교 ‘국가 부르주아’이기도 했다. 아울러 이 유교 ‘국가 부르주아’의 정치적 무의식이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서세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 그들의 유교 왕조, 유교 체제가 재생의 여지없이 허무하게 무너질 때, 비로소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꿈-작업dream-work’에서 불현듯 깨어나 또렷한 의식의 세계로 튀어오르게 되는 것이기도 했다. 끝으로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의 ‘급진적 잠재성’이란 그가 대면한 서구 입헌제와 민주제 속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더 높고 일관된 형태로 완성시켜야 할 운명 속에 놓인 어떤 것이었다. 왜냐하면 유자들이 꿈-작업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이 대면한 서구 체제란 함포를 앞세워 땅과 바다를 찢어 삼키며 침략해오는 바다 괴수 리바이어던의 형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설妖舌의 독일 법학자 카를 슈미트가 “육지취득Landnahmen과 해양취득Seenahmen”의 국제법 체제라 불렀던 “유럽공법Volkerrecht des Jus Publicum Europaeum”이 바로 그 바다 괴수의 법이었다(슈미트, 1995). 접기
김상준은 정말 훌륭한 학자다.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손이상 2014-05-2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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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정치적 무의식
'이주의 발견'을 골라놓는다. 여러 권의 책을 꼽을 수 있지만 제목으로는 김상준의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글항아리, 2014)이 가장 눈길을 끈다. 기대만큼의 분량은 아니어서 긴가민가 하지만 소개에 따르면, "이 얇고도 작은 책은 그 외형적 인상과 달리 동서양 문명의 수천 년 역사, 그것의 빛과 그늘에 대해 ‘유교’를 화두 삼아 논하려는 진지하고도 두터운 내용을 담고 있다."
알라딘에는 저자 소개는 아직 뜨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감을 잡기 어렵지만, 흥미를 끄는 제목에다 첫번째 저작인 듯해서 '이주의 발견'으로 골랐다.
한편 '정치적 무의식'이란 말의 저작권자는 프레드릭 제임슨일 텐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주저라고 할 <정치적 무의식>(1982)은 감감 무소식이다. 번역본이 곧 나온다는 얘기를 들은 게 10년은 된 듯싶은데, 이 정도면 '미스터리'라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윌리엄 도울링의 입문서 <'정치적 무의식'을 위한 서설>(월인, 2000)이 미리 나온 게 멋쩍게도 십수 년 전이다. '원조'가 되는 책이 나와 주어야 '정치적 무의식'이란 제목이 붙은 책들도 체면이 좀 서지 않을까 싶다.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과 같이 읽어볼 만한 관련서는 어떤 게 있을까. <500>(글항아리, 2013) 같은 책이 유교를 너무 긍정적으로 보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런 걸 감안해서 읽어볼 만하겠고, 국외 한국학자들의 책으론 재출간된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한국의 유교화 과정>(너머북스, 2013)과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너머북스, 2014)도 일독해볼 만하다. 거의 '책사태' 수준이 된 지 수개월째라 제 때 책을 볼 수 없는 형편이지만, 한번 찾아봐야겠다...500>
14.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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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4-04-09 공감 (1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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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번달 '독서인'에 실은 '독서카페'를 옮겨놓는다. 자유롭게 쓰는 독서 에세이인데, 이달에 고른 책은 김상준 교수의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글항아리, 2014)이다. 출간시에 관심도서로 올려놓았었던 책. 저자는 <맹자의 땀 성왕의 피>(아카넷, 2011)의 저자이기도 하다. 참고로,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의 4장 '온 나라에 굶주린 자 없도록 하라: 유교 양민론과 구민 정책'은 한국국학진흥원 기획의 <500>(글항아리, 2013)에 먼저 수록됐던 글이다. 유교에 대한 시각을 크게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나눈다면, 저자는 강력한 긍정론자로 분류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이견을 덧붙였다.500>
독서인(14년 5월호) 유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책은 제목 때문에 눈길이 가고, 또 어떤 책은 만만하다 싶은 분량 때문에 손길이 간다. 김상준의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글항아리)은 그 두 경우에 모두 해당한다. 유교란 주제를 다룬 책은 적지 않기에 특별히 눈에 띌 건 아니지만 ‘정치적 무의식’은 호기심을 갖게 한다. 저자도 적고 있듯이 “미국의 문예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유명한 문화비평서의 제목”이어서다. 정확하게는 ‘문학비평서’라고 해야겠다. 발자크와 기싱, 콘라드 같은 서구의 정전 작가들을 견본으로 삼아서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접목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책이다. 그에 견줄 만한 이론과 해석을 제시한 책이라면 지적 자극으로는 충분하다. 게다가 분량이 상대적으로 얇은 책이라서 독서의 부담이 적다는 것도 장점이다. 저자의 전작 <맹자의 땀 성왕의 피>(아카넷)를 나처럼 모셔두고만 있는 독자라면 ‘후기’이자 ‘입문’ 격이 될 수 있는 이런 속편이 나름 유용하지 않겠는가.
책을 읽기 전에 미래 해본 계산이 그랬다면, 읽은 뒤의 정산은 반타작이다. 일단 제목은 제임슨의 책에서 따왔지만 저자는 “제임슨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 무의식을 다룬다. 그가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으로 지목하는 것은 “비판성, 윤리성, 민주, 민생, 문명화, 여성화라는 기호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호들이 오늘날 문명 재편의 시기에 여전히 유효한 현재적 가치임을 웅변하려는 것이 저자의 의도다. 제임슨이 시도한 것과 같은,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빠져 있어서 좀 추상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맹자의 땀 성왕의 피>을 읽어보려는 독자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돼주는 것도 사실이다. 너무 두껍다는 불평도 들었다는 전작에 비하면 훨씬 얇은 분량이고 한결 자유로운 기분으로 썼다는 고백이다. 그렇다고 내용까지 가볍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는 주의도 저자는 잊지 않는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유교에 대한 재인식과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유교를 교양이나 상식 수준에서 대강 알고 넘어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정확하고 비판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전례 없이 커졌다. 특히 사회과학적인 유교 이해가 긴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것은 그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저자는 유교의 비판성과 윤리성을 우리가 재발견하고 재평가해야 할 핵심 덕목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유교가 뭡니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주어질 법한데, 저자는 <맹자의 땀과 성왕의 피> 서두에서 미리 그에 대한 답을 마련해놓았다. 한마디로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것이다. <예기>를 출전으로 하고 있는 이 말은 “인간문명, 천하의 모든 일은 공(公)의 실현을 향해 나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공(公)은 요즘말로 공공성이요 정의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이 ‘천하위공’에 짝이 되는 것이 ‘우환(憂患)’ 의식인데, 천하위공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갖게 되는 근심, 혹은 윤리적 고통이 우환 의식이다. 그리고 그것이 공맹(孔孟)의 마음이었으며, 이러한 마음가짐은 ‘인류사 보편적인 윤리정신’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유교 이해다.
얼핏 유교 예찬론으로 분류됨직한데, 자연스레 갖게 되는 의문은 저자가 유교를 너무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공맹의 마음’을 하나의 제도와 종교로서의 유교와 곧바로 동일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저자 스스로도 말하고 있듯이 유교 역시 두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폭압과 약탈의 구조를 합리화하는 유교도 있었고, 여기에 항의하며 맞서 싸우는 유교도 있었다. 이 둘을 날카롭게 구분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주문은 저자에게도 향한다. ‘천하위공의 유교’가 한편에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폭압과 약탈의 구조를 합리화하는 유교’도 있었다. 이 모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폭압과 약탈의 구조를 합리화하는 유교’는 진정한 유교가 아니라 사이비 유교라고 배제할 게 아니라면, 유교의 두 얼굴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것 못지않게 그 두 얼굴 사이의 깊은 연관성도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례를 들자면, 저자는 <맹자의 땀 성왕의 피>에서 북한의 권력 ‘3대 세습’을 ‘유교적’이라고 보는 항간의 속설에 대해 비판하면서 “왕위는 세습이 아니라 선양(禪讓)에 의해 전승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맹의 유교원론(原論)”이라는 근거를 댄다. 이를 그대로 수용하면,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개창한 조선왕조는 선양이 아닌 세습 왕조였기에 유교원론에 따른 ‘유교국가’가 아니었다는 게 된다. 군주가 바로 국가였던 왕조시대에 국가를 매섭게 비판하고 엄하게 다스리는 역할을 유교가 담당했다지만, 그러한 유교정치의 주역인 사(士) 계급을 저자는 ‘국가 부르주아’라고도 부른다. 알다시피 군주와 국가 부르주아는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이면서 동시에 공생관계였다. 저자가 지적하듯 국가 부르주아로서 유자들의 한계는 국가-정치라는 틀을 결코 빠져나올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유교의 현재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에 앞서 이러한 한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더 우선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14.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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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4-05-09 공감 (1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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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랫만에 문학동네 블랙펜클럽이 출간되었다,라고 생각하며 봤는데 서른 한번째. 뭔가 좀 이상해... 중간에 내가 알지 못하고 빼먹은 것이 있었나? 하고 봤더니 이전에 출간된 것이 미미여사의 솔로몬의 위증 3권. 그러고보니 솔로몬의 위증을 읽으려고 꺼냈다가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겨 안으로 담아버린 것이 생각난다. 읽으려고 방에 있는 책장에 끼워넣었다가 다른 방으로 옮겨지고 이제 그 세권은 각각 다른 책장에 꽂혀있기는 할텐데 어디쯤에 있는지 찾기가 쉽지 않겠고.
읽은 책을 찾는 것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급기야 읽어야 하는 책을 찾는 것도 힘들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마음의 여유가 생겨 최근에 쌓아놓은 책탑을 넘어 구석에 박혀버린 새 책들을 찾아 읽으려고 책장을 서성거리게 되면 내 마음은 괜히 급해져버린다. 벌써 몇년째 책장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심지어 래핑도 벗기지 못한 책들이 수북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러고보니 이 책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말 그대로 [책장을]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고 해야할지도.
어쩌다보니 끄트머리에 넣은 책의 제목이 '진보의 착각'이네. 그와는 상관없이.
이 책들을 대하고 있노라면 외면하고 싶은 것들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부끄러움이 슬금슬금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그나마 그것을 위로랍시고 부끄러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제는 습관화되어버리고 있어서 또 괜히 맘이 저기하지만.
선물할 책을 고르기 위해 컴을 켰는데 생각하고 있던 책들이 안나온다. 오늘내로 장바구니에 넣으려고 했는데 이제 두권을 더 골라야하는데 마땅한 책이 눈에 안띄어.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은 선물하지 않던 습관도.. 읽지 않았지만 좋은 책들이 너무 많아서 이제는 그냥 무작위로 끄집어 내어 아무 생각없이 선물해주기 시작하고있다. 책의 취향이라는 것이 뭐... 어차피 내가 좋아하는 책을 그 누군가는 좋아하지 않을수도 있는 것이니.
아, 근데 정말 어떤 책을 고르지?
4월에는 책도 좀, 말 그대로 '좀' 사고, 평소보다 좀 많은 책을 받았다. 왠지 요즘은 양장본에 판형이 커다란 책들을 많이 구입해버려서인지 책탑이 점점 확장해나가고 있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온갖 책을 다 끌어모으고 있기는 하지만 최근 일주일내에 가장 많이 본 것은 역시 카툰일까? 여백이 많이 있으니 소설보다는 좀 더 쉽게 읽히는 건 사실이니.
아니, 그래도 꼬마비의 작품은... 음... 왠지 살인자 ㅇ 난감도 빨리 읽어봐야 할 것만 같단 말이지. 도대체 꼬마비의 작품을 뭐라 해야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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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14-04-13 공감 (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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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밑에 깔린 중요한 전제들 몇몇을 탐구하며 놀기
의식밑에 깔렸다고 볼 수 있는 재밌는 얘기거리들은 무척 많아 보인다. 다르게 범주지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이용하는 언어와 관념들 밑으로 끌어오면 재밌는 연관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조금씩 읽고 있는 중이라 다 읽으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저자가 쓴 <라일라>는 인간의 '질'이나 '가치'를 다룬다. 예전에 봤던 사람을 재회하고 변모한 모습에 인간의 가치를 생각해본다는데, 인간의 성장과 함께 변모한 인격은 무척 흥미로운 주제다. 유명한 nature vs. nurture 관점이나 사...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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