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은이),송태욱 (옮긴이)사회평론2001-12-07원제 : 倫理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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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쪽
142*191mm
291g
목차
머리말
01 부모의 책임을 묻는 일본의 특수성
1. '사회'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가진 힘
2. 엔치 후미코의 『식탁이 없는 집』이 그리고 있는 두 개의 투쟁
02 인간의 공격성을 인식하는 일
1. 정신분석을 단순히 육아나 교육에 응용해서는 안 된다
2. 아무리 평화적으로 키워도 인간의 '공격성'은 남는다
03 자유는 결코 '자연'에서 나오지 않는다
1. 인간을 강제하고 있는 구조에 대한 인식
2. '자유로워지라'는 의무와 자유
04 자연적·사회적 인과성을 배제한다
1. 자유라는 관점에서 도덕성을 본다
2. 책임을 지는 방법으로서의 원인에 대한 철저한 인식
05 세계시민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공공적인'것이다
1.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칸트적 전도
2. 다른 '공통감각'을 가진 타자와의 합의
06 종교는 윤리적인 한에서 긍정된다
1. 세계종교는 자유의지를 부정한다
2. 오십 보와 백 보가 차이가 가지는 절대성
07 공리주의에는 '자유'가 없다
1. 행복주의로는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2. '죽은 자를 두려워하라'는 말의 의미
08 책임의 네 가지 구별과 근본적 형이상학성
1. 칸트적 이념의 실현으로서의 국제법
2. 전쟁책임에 관한 '철학자'의 기반
09 전쟁에 대한 천황의 형사적 책임
1. 도쿄재판에서는 왜 천황의 전쟁책임을 묻지 않았는가
2. 천황제라는 '구조'와 천황의 전쟁책임
10 비전향 공산당원의 '정치적 책임'
1. 마루야마 마사오의 공산당 비판
2. 전시중의 전향-비전향을 현실 인식의 문제로 생각한다
11. 죽은 타자와 우리의 관계
1. '역사 다시 보기'는 불가피하다
12. 태어나지 않은 타자에 대한 윤리적 의무
1. 자본과 국가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가능한 코뮤니즘'
부록 트랜스크리틱 제1부
저자 후기
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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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서 ‘사적’(私的)이라는 것과 ‘공적’(公的)이라는 것에 관한 고정관념을 뒤집어 볼 수만 있어도 다른 책 수십 권을 읽은 것만큼을 얻을 것이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국가나 민족 등 공동체의 입장에 선 것이 ‘사적’인 것이고, 그런 공동체의 이해관계에서 떠나 개인의 윤리에 철저한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공적’인 것이다.
- 최재봉 (「한겨레」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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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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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이다. 1941년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나 동경대 경제학부와 동경대 대학원 영문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1969년부터 문학 비평가로 활동했으며 대표적인 저서로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マルクスその可能性の中心≫ (1978),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日本近代文學の起源≫ (1980), ≪은유로서의 건축隱喩としての建築≫ (1983), ≪내성과 회고內省と遡行≫ (1985), ≪탐구 Ⅰ探究 Ⅰ≫ (1986), ≪탐구 Ⅱ探究 Ⅱ≫ (1989) 등이 있다.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과 ≪은유로서의 건축≫이 영어로 잇...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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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욱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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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졸업 후 도쿄외국어대학교 연구원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하며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르네상스인 김승옥』(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케첩맨』,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환상의 빛』, 『천천히 읽기를 권함』, 『번역과 번역가들』, 『십자군 이야기』, 『깜깜한 밤이 오면』, 너머학교 「생각 그림책」 시리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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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갇혀있던 유교적인 세계관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점에서 인상이 깊다.
아이사랑 2008-03-1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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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의 책 중 알아먹기 쉬운 책
madwife 2014-05-18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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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일본인 사상가 중 하나인 고진의 대표적인 저술.
赤赤 2012-07-1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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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이 맞지 않으면 쏜 나를 돌아보아야지. 과녁을 탓하겠는가.˝ - 中庸
로지온 2011-12-1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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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코뮤니즘을 말하다!
고진의 책들이 번역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번역될 것이고, 번역될 필요가 있다. 최소한 그의 책을 읽으면 독자는 좀더 똑똑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이유에서만으로도. 최근에 무하마드 알리에 관한 자전적인 영화가 헐리우드에서는 만들어진 모양인데, 고진이야말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특기를 가지고 있다. 그는 가볍고 경쾌하지만, 정확하고 진지하다.
<윤리 21>은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다시 읽기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칸트론을 의도한 것이 아니며,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칸트와 대면했을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책은 칸트의 도덕론/윤리학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입문서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고진은 도덕이란 말을 공동체적 규범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윤리를 '자유'라는 의무와 관련된 의미로 사용한다. 이것은 그만의 독특한 어법이며, 그에 따르면 칸트가 말하는 도덕은 윤리를 뜻한다. 나는 흔히 절대론적 윤리설, 형식주의적 도덕론 등으로 분류되는 칸트의 도덕론에 대해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좀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고진의 시각을 통해서 칸트의 도덕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그는 칸트의 원전을 직접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 가령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하는 자연세계에서의 인과율과 실천이성비판에서 말하는 도덕적 당위의 주체로서 인간이 가지는 자유(의지)가 어떻게 양립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 등에 대해서 글의 서두에서부터 아주 간명하게 규정/해결하고 있다.
'칸트가 말한 지상명령이란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한 명령 혹은 의무에 의해 비로소 '자유'라는 차원이 나온다. 그것은 원인에 의해 규정당하는 세계로부터는 나오지 않는다. 혹은 인식의 차원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동시에 타자도 '자유로운' 주체로 취급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칸트는 스스로 '자유롭다'는 것, 나아가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자유로운 주체)로서 대하라', 라는 것을 보편적인 도덕 법칙으로 삼았다.'(<머리말>)
다소 길게 인용되었지만, 이것이 고진이 말하는/이해하는 칸트 도덕론의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주체로서의 자기정립은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복종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고진은 그 명령/의무를 사르트르의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졌다'는 표현과 연관짓고 그러한 바탕에서, 마르크스를 코뮤니스트로 다시 읽어낸다(사르트르와 맑시즘의 관계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그때의 코뮤니즘이란 타자를 수단으로 하면서 또한 목적으로 대하는 사회적 관계에 근거한다. 이 코뮤니즘을 통해서 '독일 사회주의의 진정한 창시자'인 칸트와 마르크스는 만난다.
'따라서 코뮤니즘에 대해서는 임노동(노동력 상품)의 폐기가 핵심이다... 임노동의 폐기란 바로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고 한 말의 현실적인 형태다. 마르크스에게 그것은 '지상명령'이었다. 그것은 결코 자연사적 필연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적 경제는 영원할 것이다. 그것은 폐기하는 것은 윤리적인 개입이다. 즉 그것은 '자유'의 차원에서만 오는 것이다.'(189쪽)
내 생각에, 이 대목에 고진의 칸트와 마르크스론이 집약돼 있다. 여기서 일차적 폐기처분되는 것은 역사발전의 합법칙성 따위를 주장하는 사적 유물론이다. 고진이 보기에 칸트와 마르크스는 그런 인과율의 과학을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에게서, 특히 마르크스에게서 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무망하다. 그의 정치학은 곧 윤리학이며,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의 실천과 책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제 단계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발전은 결코 역사적 필연'이 아니다.(191쪽) 자본주의(=인과율)로부터 코뮤니즘(=자유)로의 이행은 오로지 실천적(윤리적)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그런 자유를 원하기는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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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2-02-09 공감(3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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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새로운 세계를 구상하는 윤리테제
서구 철학계에 동양의 학자가 회자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양철학사를 꽤뚫고 있어야 하며, 서구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그 개념을 갖고 텍스트의 맹점을 비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20세기 이후 서양에 알려진 동양의 학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전무하지는 않다. 두 사람이 있다. 심리철학을 연구하는 재미 철학자 김재권과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이 바로 그들이다.
철학자 김재권은 아예 서양철학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제창한 ‘수반이론’은 심리철학계의 거의 모든 문헌에서 언급될 정도이다. 김재권은 한국인이지만 서양철학의 중심으로 파고들어갔고 거기에 한 획을 그엇다고 평가받는 ‘서양철학자’이다.
그렇다면 가라타니 고진은 어떤가? 그는 문학 평론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그의 문제의식이 서양철학으로 향하면서 현실의 문제 해결을 서구의 사색 속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가 행한 일련의 비평과 평론이 서구에 알려지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서양의 철학을 바라보는 그를 서구 학계가 주목했다. 그리고 그는 얼마 안가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일단 대가라고 통용되기 위해서는 선배 대가의 비판을 넘어 대가들의 사상을 자기 언어로 자유자재로 풀 수 있어야 된다. 칸트에 대해서 쇼펜하워가 그랬고, 헤겔에 대해서 맑스가 그랬으며, 스피노자에 대해서 들뢰즈가 그랬다.
모두 선배 대가들의 철학을 자기 철학으로 체화하여 다시 독창적으로 전개 시킨 사람들이다. 여기에 가라타니 고진을 올려 놓을 수 있다.
<윤리 21, 사회평론>을 읽으면 가라타니가 왜 대가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칸트에 대해서 쇼펜하워가 그랬던 것처럼 가라타니는 칸트의 윤리학을 통해 그 자신의 문제의식을 해결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21세기에 가라타니가 화두로 들고 나온 것이 ‘윤리’라는 사실이다. 헌데, 그 윤리가 한 물 간 것으로 평가되는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설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현대 윤리학의 지배적인 위치는 공리주의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지만, 윤리학계의 다수설이라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21세기에 칸트의 윤리를 들고 나온 것일까? 그것은 일본의 특수한 상황이 초래한 저자의 고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저자가 칸트의 윤리를 들고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책에 소개되어 있다.
“수년 전부터 나는 전쟁책임이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것에 대한 본질적인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책임이란 무엇인가, 윤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다. 그 때 나는 칸트의 『비판』이 지금도 가장 근본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논의의 출발점은 책임이다. 어떻게 전쟁 책임을 지울 것이냐의 고민이 일본의 상황과 맞물려 자유와 책임의 문제로 심화된다. 논의는 간단하다. 자유 없이는 책임도 없다는 사실이다.
형이상학적인 논의의 차원으로 넘어가기 앞서 가라타니는 현실문제의 윤리적 양상을 짚는다. 고베 연쇄살인 사건을 다루면서 아이의 잘못을 왜 부모가 책임을 지고 자살하느냐를 반문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부모가 사과하며 책임을 지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가라타니는 그것이 잘못됐으며 비윤리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부모가 아이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순간, 그 아이의 자유는 없고 따라서 그 아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는 얘기다.
이런 논리 전개는 그대로 천황의 전쟁책임론으로 이어진다. 태평양 전쟁은 천황이 일으킨 전쟁이다. 천황이 모든 명령을 했고 그 밑의 군사들은 그 명령을 이행한 것 뿐이다. 따라서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은 천황인데, 천황이 책임에서 제외되니 ‘일억총참회’라는 어정쩡한 주장이 나오게 된다.
가라타니는 여기에 일침을 가한다. “일본에서는 개개인이 과거를 알고 반성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 말은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미묘하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최고 책임자의 책임을 물은 뒤에야 비로소 국민 개개인의 정치적 책임 및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p151)
일본에서는 왜 이러한 현상이 빈발하는가? 그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원인을 묻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을 혼동하여, 철저히 원인을 밝혀내는 것을 철저히 책임을 묻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라타니는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원인을 묻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문제다. 원인은 철저하게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당사자의 책임 문제와는 구별해야 한다.”(p40)
왜냐하면 “어떤 사건에 관해 원인을 아는 것은 인식의 문제이며,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실천(윤리)의 문제”(p53)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원인을 묻는 것은 형이하학적인 반면, 책임을 묻는 것은 항상 자유라는 형이상학적 영역과 관련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라타니는 책임질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을 찾아야 했다.
이를 위해 가라타니는 자유의 형이상학적 탐구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나오는 제3 이율배반으로부터 시작한다.
◆ 정명제- 자연법칙에 따르는 인과성은 그것으로부터 세계의 모든 현상이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인과성이 아니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외에 자유에 의한 인과성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 반대명제- 무릇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것은 자연법칙에 따라서만 생겨난다.
정명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고, 반대명제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이 두 이율배반적 명제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 시도한다. 두 명제를 인식의 영역과 윤리의 영역으로 구분한 것이다.
스피노자-마르크스 계열의 구조론적 인식하에서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우리의 행동을 보면 모두 원인이 있다. 개개인이 자유의지로 결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pp55-56)
"예컨대 아이가 다마고치나 포켓 몬스터를 갖고 싶어할 때, 자신의 자발성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남들이 갖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 욕망은 타자의 욕망 혹은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지 자유(=자기원인)은 아닌 것이다." (p96)
한편, 가라타니는 인간에게 자발적인 자유가 있다는 것을 칸트의 정언명법으로부터 도출한다. 하지만 이 의무가 공동체의 의무(=도덕)로 봐버리면 다시 스피노자적 결정론으로 빠지기 때문에 가라타니는 이 의무를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가라타니는 이것을 ‘윤리’라고 명명한다.
“자유는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즉 그것은 결정론적 인과성을 배제하라는 명령이다.” (p71)
가라타니는 이렇게 인식의 영역은 결정론, 윤리의 영역은 자유로 대응시킨 후, 이 양자가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식대상이며 동시에 하나의 윤리적 판단 대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요컨대, 칸트의 의무, 그러니까 정언명법을 저자는 “자유로워지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럴 때에야 두 명제가 양립하게 되고, 칸트가 의도했던 게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도덕과 윤리를 키에르케고르의 구분법을 차용해 양자의 개념이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자유와 책임 문제를 검토한 후(전쟁의 세기에 대한 마침표) 가라타니는 마지막으로 ‘존재하지 않는 타자’에 대한 윤리의식을 건드린다. 바로 ‘죽은 타자’와 ‘태어나지 않는 타자’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의무이다. 가라타니는 말한다.
“뭔가 새로운 지점에 도달할 때 우리는 과거를 다시 본다. 그것은 죽은 자와의 관계 변화라고 말해도 좋다. 그 경우 죽은 자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변하는 것이다. 그보다는 죽은 자가 처음으로 우리 앞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억압하고 있던 ‘타자’가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p180)
"그런 의미에서 과거는 조금도 완료되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과거의 ‘타자’와 우리의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p182)
이는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도덕법칙을 견지하는 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다. 과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미래도 역시 현재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논지이다.
“우리는 합의를 필요로 한다. 덧붙여 말하면 오히려 위기를 체험하는 것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살아 있는 어른의 ‘행복’만을 생각해서는, 또 그들 사이의 ‘합의’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윤리성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의 ‘행복’을 향유하기 위해 미래의 인간에게 그 계산서를 돌린다면, 그들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p190)
‘전쟁과 혁명의 세기에 마침표를 찍고, 21세기 새로운 세계를 구상하는 윤리 테제’라는 부제가 어울리는 <윤리21>이다. 우리 시대,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한 책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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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02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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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출판을 기다리며
사실 이 책은 읽은 지 오래 되었다. 책 한 권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거니와 한꺼번에 여서일곱 권의 책을 읽는 습관이 있고, 다 읽은 책을 정리하는 데 읽는 만큼의 시간이 들다 보니 이제야 서평을 쓴다. <윤리21>과 어슷비슷한 시기에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엄기호의 <단속사회>를 같이 읽었던 것 같다. 근대 이후의 시대를 조망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책들, 그리고 개인화로 인해 오히려 몰개인화 되어가는 근대(현대)인들의 이야기며 공동체가 붕괴되는 현상에 대한 입장들이 묘하게 겹친다. 시대별로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아니면 통찰력 있는 인문사회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들일 수도 있겠다.
칸트는 도덕성이 공동체의 규범에서 유래한다는 생각과 공리주의를 둘 다 비판했다.
만약 사람이 공동체의 규범에 따른다면 그것은 타율적이지 자유는 아니다. 정말로 자유로운 행위나 자유로운 주체가 있을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없다.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동시에 타자도 자유로운 주체로 취급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근대를 철학적으로 살피지만 한국과 비교해 읽는 재미가 있다. 식민주의에 의해, 그리고 근대화를 표방한 개발독재에 의해 강제로 무너져버린 농촌공동체에 대한 아쉬움이 21세기의 새로운 대안으로 모색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공동체를 비판하는 일본 철학자의 시각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일본은 공동체 문화가 아직도 지배적인 듯 보인다. 그것이 오히려 탈근대화를 막았을지도 모른다. 밖에서 보면 일본이 자본주의 사회임에도 자본이 인성을 극악하게 부패시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단단한 공동체적 결속이라고 여겨지기도 하는데, 오히려 일본 내부의 진보적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는 걸림돌로 보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의 ‘사회’를 도쿠가와 시대에 일그러진 형태로 형성되고 메이지 시대 이후에도 해체되지 않은 마을공동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긴밀하고 친화력 있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은 없고 공동체만 있는, 그런 형태로 말이다. 식민통치와 전쟁, 분단으로 오히려 기존 공동체의 붕괴를 맛보아야 했던 우리와는 다른 경험이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말한 중세의 ‘공동체’와 비슷한 듯 보인다. 중세가 지나서야 ‘개성’이라는 게 생겼다고 본다. 물론 에리히 프롬은 그런 ‘개인화’의 갈 방향이 자본주의밖에 없었던 현실이 문제라고 지적하지만 어쨌든 ‘타자화’가 시작되면서 근대화가 시작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일본과 같은 동양도, 에리히 프롬의 서양도, 몰개성의 시대를 넘어 진정한 개성화의 시대는 맞이하지 못한 셈이 된다.
(근대화 이전의 일본)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적인데 ‘자기(자아, 에고)’는 없다. 분열증적 인간(깊은 관계를 거부하는)... 자신들의 소작료만 지나치지 않으면, 자기 땅만 지킬 수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알 바 아니다. 다만 ‘사회’를 두려워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행동할 따름.
(현대사회) 대개의 사람들은 단지 악인이 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태어났을 뿐이고 기독교 공동체에 태어났기 때문에 기독교도가 되는 것뿐.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이지 그것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잇는가가 아니라는 것(예 주식투자자의 경우, 개인적으로 좋은 사람일지라도 어디선가 전쟁이 나서 자기 주식이 오르면 좋아할 수 있다.). 즉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그가 무엇을 하는가’와는 다른 것.
고진의 ‘세계시민, 공공성’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항상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반해 자신의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때로 현저하게 제한되어도 좋다. .. 통상적으로 공적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적 차원의 것인데도 칸트는 그것을 사적인 것이라고 하며, 역으로 거기에서 벗어나 개인으로서 생각하는 것을 공적이라고 말한다. 그런 개인을 세계시민(코스코폴리탄)이라고 불렀다.
천재적인 예술가는 이 공통감각에 반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고립되지만, 결국에 그것이 받아들여지면 이번에는 그것이 공통감각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토마스 쿤도 과학적 명제의 진리성을 만드는 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패러다임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칸트의 ‘공통감각’과 매우 비슷하다. 아렌트나 하버마스가 ‘공공적 합의’라 부르는 것은 사실 공통감각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의 합의이다. 하버마스는 코소보에 대한 공습을 ‘공공적 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이유로 지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유럽 국가끼리의 합의였다. 아렌트와 하버마스에 의거하면 공공성 = 국가인 듯.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세계시민’을 말하면서 “‘좋은 사원, 좋은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사회의 도덕이다. 그러나 ‘윤리적’이라는 것은 그러한 도덕성을 거스르는 것으로, 세계시민으로 행동하면 대부분의 경우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고 말한다. 소시민과 의식 있는 세계시민 사이의 갈등을 말하는 듯하다.
칸트는 종교적인 주장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을 형이상학이라면 논박했다. 윤리적인 한에서 종교를 인정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면 저 세상에서 구원받는 식이 아니라 ‘자유로워지라’는 지상명령에 다르기 위해서 그러한 신앙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고진의 ‘윤리’는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을, ‘도덕’은 사회나 공동체의 도덕을 말하는 것이로 해석한다.
윤리에 대하여
예컨대 어떤 사람이 평생 사람이나 동물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면 돈이 있어서 그러한 입장에 놓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니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악을 면한 부자나 지배계급이 구원된다면 악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구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도 마찬가지. 부처나 예수도 저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타자에 대한 윤리가 중요했다.
이 대목은 고진이 현실에서 어떤 윤리로 살아갈 것인지를 설파했을 뿐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이제 고진과 같은 주장들은 많은 진보적 종교학자들 혹은 사회학자에 의해 반복 주장 되고 있지만 아직도 한국 기독교에서는 편협한 종교적 시각이 지배적인 것을 생각하면 그들을 붙들고 위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 우리가 더 크게 짓는 죄는 무엇인가, 도덕이 아닌 윤리의 영역에서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오십 보와 백 보의 차이
이 책에서 ‘오십보와 백보의 차이’라는 부분에서 매우 공감하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세상을 바꾸는 여러 가지 행동에서 ‘오십보나 백보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도망을 갈 때 가더라도 오십 보를 갔는지 백 보를 갔는지는 매우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예 도망을 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좋지만 ‘현실 앞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 악인에게 조용히 부역을 한 사람’과 소심하나마 무언가를 한 사람, 부정의한 세상에 맞서 하다못해 ‘불복종’이라도 한 사람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거부하지 못하는 많은 소시민 가운데, 망설이고 스스로 반성하던 사람들 속에 저항의 싹은 죽지 않고 숨어 있다. 가끔 꽤나 진보적인 사람들 가운데 그런 소심하고 나약한, 숨은 생활진보인들을 부역하고 침묵한 이들과 싸잡아 ‘오십보나 백보나’라고 비판하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이것은 나의 해석이고 고진이 말하는 담론은 보다 크고, 전복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내가, 나도 모르게 저지르는 죄에 대해 ‘사회구조’를 탓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현상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가의 문제다.
우리가 실제로는 죄를 범하지 않아도 간접적으로는 범하고 있다는 사실(내가 쓰는 전기, 내가 방관하고 있는 것, 내가 누리는 커피와 여행, 내가 향유하거나 눈감는 정치...).... 예컨대 나는 소를 죽이지 않지만 비프 스테이크를 먹는다. 나는 군사적, 경제적 제국주의에는 반대하지만 그것에 의해 얻어진 생활수준은 향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면 자기가 손수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차이를 배제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은)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논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될 논리이다... ‘자유’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르크스 역시 개개인이 관계들의 산물이면서도 그것을 초월한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개개인의 자본가와 경영자가 도덕적으로는 선하게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자본의 담당자인 한 강제되고 마는 관계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단지 악인이 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태어났을 뿐이고, 기독교 공동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기독교도과 되는 것 뿐.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이지 그것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괄호넣기, 배제에 대하여
나는 이 책을 한창 읽던 중에 한 동료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00샘이라는 젊은 교사는 매우 유능하고 학생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이인데 최근 들어 이런 발언을 자주 한다. “아침에 지각하는 학생이 있다. 많은 교사들이 지각하는 학생들 벌을 주거나 야단을 친다. 그러면서 약간 늦은 학생에 대해 출석부에 지각 체크를 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은 다르다. 벌을 줄 필요는 없다. 출석부에는 단호하게 체크를 해야 한다(물론 아이와 지각하게 된 사정에 대한 진심어린 상담은 꼭 필요하다).... 학생이 싸워 학부모 간 갈등이 생길 때 교사가 할 일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조사하고 학부모중재위원회를 잘 열어주어야 하는 것이지 사이에서 두 아이의 사정을 전하고 감정에 호소하고 설득하고... 하는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등등. 매우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그이지만 과연 교사가 그러해야 하는지에 대해 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문제는 그와 같은 교사의 태도에 대해 공감하는 젊은 교사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합리적인 것일까? 학생들의 속사정에 깊이 들어가 때로는 (학생의 사정을 이해해 출석부 지각 체크를 하지 않는 따위의) 탈법도 불사(?)하는 교사와 합리적이고 정확하게 학사와 학생을 대하는 교사 중 무엇이 교사의 지향점이어야 할까. 어느 새 나도 나이든 교사가 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 21>이란 책을 정리하다가 재미난 구절을 발견했어요.
'괄호에 넣는다'는 표현.
도덕적, 지적 관심을 배제하는 것
예를 들면 의사들이 자기 가족을 수술하지 않는 것 같은 현상이랍니다.
더불어 이에 대해 고진은 이런 말도 하네요.
"언제나 무엇이든 사물을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만큼 비과학적인 일도 없다."
괄호를 벗겨야 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요.
00샘은 참 독특하게 교사가 학생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요.
혹시 내가 받아들이기를, 고진이 말한 '괄호에 넣는'것과 황샘이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같은 것일까요?
잘못 받아들인 것일까요?
독특한 문제제기인데 받아들일 수는 없고(사실은 반박하고 싶은 것이오.),
그러나 아직 생각은 진행 중이고,
00샘은 좋은 교사라고 늘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꽤 좋은 교사라 믿었던 만큼 위와 같은 생각이 무겁고 두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논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논쟁할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므로 이야기를 던져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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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선생 2017-01-30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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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칸트의 윤리학으로 21세기를 열어젖히다
가라타니 고진. 문학 비평가로서 그 이름이 제법 귀에 익은 것과는 달리 여지껏 그가 쓴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한국 인문학계에 가라타니 고진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각종 비평집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는 서양 근현대 사상의 틀을 비서양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하여 인류 보편의 철학적 문제를 정교하게 탐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문학 비평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그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어떤 이야기를 펼치는지 궁금하여 그나마 내가 평소에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소재를 다룬 책 한 권을 골랐다. <윤리 21>은 기존의 철학자가 펼친 사상적 근거를 내세워 윤리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사회 비평이다. 그 영역이 일본 사회 중심이긴 하지만 전쟁과 혁명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닌 터라 일반적으로 읽히고 있으며, 특히 식민 행위를 어떻게 반성하는 것이 옳은가를 논하는 만큼 우리로선 흥미로운 담론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세기를 전쟁과 혁명의 세기라고 한다면 2000년에 출간된 이 책의 의미는 남다른데, 저자는 여기서 20세기의 윤리를 돌아보고 21세기의 그것을 내다보고 있다. 양은 적은 편이지만 단락별로 다양한 논의를 담아 정리하기가 만만찮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책에 대한 평을 쓰려는 게 아니고 저자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내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책을 독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책이 지닌 가치를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범죄자나 깡패가 등장하는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반응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사람에 따라 호오의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아무리 잔인한 행위가 스크린에 전시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연출된 것이므로 누구든 영화를 보면서 적당히 거리를 두게 마련이다. 일상 생활에서는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영화나 소설에서는 그들을 지지하고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여러 가지로 억울한 일을 당했던 주인공이 꾀하는 복수가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관객은 더욱 통쾌한 기분을 맛본다. 이것이 이른바 미적 판단이다. 그 근거를 칸트는 '무관심'에서 찾았다. 말하자면 도덕적이고 지적인 관심을 배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영화나 소설을 즐기는 것은 ㅡ 심지어 때로 현실에서도 그러한 시각이 나타나는 것은 문화적으로 훈련된 탓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도덕과 이성의 체계를 뒤흔드는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그로부터 관심을 떼는 훈련을 한다. 잔인한 게임에 자주 노출되는 것도 그것을 부추긴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끔찍한 범죄가 점점 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그렇게 관심을 배제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어쨌든 그것은 통상의 관심을 별도로 떼어놓고 보는 것이므로 예술 작품을 대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영화의 호불호를 나누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어떤 영화를 오로지 잔인해서 싫다고 말한다면 관심을 배제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뜻하고, 폭력적 행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반대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관심을 배제하는 행위, 그러니까 관심을 괄호 안에 넣는 행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괄호를 다시 푸는 행위다. 쉽게 말해서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문제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영화에 등장한 폭력적 행위가 단순한 오락에 그칠 뿐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과연 그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한다는 뜻이다. 근데 이것은 갈수록 무시되고 있다. 영화가 끝나면, 소설을 읽고 나면 사유를 멈추기 일쑤다. 그런데 영화나 소설을 통해 자꾸만 그런 식으로 폭력에 길들여지면 인간의 윤리 체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사람이 뭔가를 저질렀다면 그것이 아무리 불가피한 것이라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책임이 있다. 그것은 '자유로워지라'는 당위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인간에게 자유가 없었다 할지라도 자유로웠던 것으로 봐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먼저 위협하는 상황에서 정당한 방어 행위로써 내가 상대를 해쳤을 때조차 내게 책임이 있고, 운전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누가 도로로 뛰어들어 사고가 났더라도 보행자가 사망을 했다면 운전자에게 일말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의 이야기다. 칸트는 도덕성을 자유라는 관점에서 봤다. 그에 따르면 도덕은 선악이 아니라 자유의 문제다. '자유'는 상황에 따라 주체에게 주어지지 않기도 하지만, '자유로워지라'는 명령만큼은 언제나 인간의 행위와 함께 작동한다.
윤리를 선악의 문제로 바라볼 경우엔 모든 문제가 결정론적 인과성을 띤다. 악하면 죄를 짓는다는 식의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의 기본 개념과도 맥락이 같은데, 어떤 결과를 야기한 원인이 반드시 있다고 가정하는 식이다. 사회적 범죄가 발생하면 바로 그 원인을 진단하려고 애쓰는 태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윤리를 자유의 문제로 생각한다면, 의무가 그것을 좌우한다. 이때 의무 또는 지상명령은 국가나 공동체가 강요하는 규범이 아니고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령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이 경우엔 어떤 원인이 반드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A이면 B이다'에서 A는 B를 규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어떤 증상이 있을 때 A라는 원인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결코 A라면 B가 된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것을 구조론적 인과성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원인이 발견되어도 책임은 물을 수 없다. 윤리가 선악의 문제라면 결국 A이면 모두 B가 되어야만 하는데, 알다시피 실제로 그렇지 않다. 가령, 아버지가 폭력적이라고 해서 그 아들도 반드시 폭력적인 것은 아니듯. 따라서 저자는 칸트의 말처럼 윤리는 자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국 범죄 영화에서 인물이 저지른 행위마다 그 원인을 딱 규정하는 식의 연출은 문제가 있다. 원인을 구태여 제시할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짧은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파헤치면서 결정론적 인과성에 목을 매는 건 되려 영화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이토록 윤리가 자유의 문제라는 게 명쾌하다면, 왜 우리는 21세기에 들어서도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저자는 그것을 가로막는 요소로 종교, 자본주의, 정치를 꼽았다. 인간은 악한 존재이므로 '종교'로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이익을 취하는 건 곧 행복을 도모하는 일이므로 사람 위에 '자본'이 있고, 전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 같은 '정치'가 멈추지 않는다. 죽은 자가 산 자의 방편으로 이용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 세 가지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도덕적 영역은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서 나오는데, 그 명령은 죽은 자에서 비롯된다. 개인과 국가의 자유가 지상의 것으로만 이해될 때 윤리적인 문제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가 말한 대로 우리의 자유는 현전하는 타자만이 아니라 부재하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함의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공공적 합의 혹은 간주관성은 칸트의 윤리학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성을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사용하라는 도덕 법칙이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중요하다. 이와 같이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윤리학을 전면에 내세워 일본 사회를 비롯한 전 세계가 어떻게 21세기를 윤리적으로 살아 나갈 수 있을지 깊이 고찰한다. 그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칸트론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외려 그 반대에 가깝다. 칸트의 '윤리'가 오해되는 대목을 찾아 참된 의미를 밝히면서 현대 사회에서 그것이 지닌 가치가 얼마나 큰지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자의 담론은 식민주의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재 매우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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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 2012-05-29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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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밝히기와 책임지우기... 명백히 다르다...
21세기의 윤리...를 가라타니 고진이 들고 나온 것은... 20세기가 너무도 큰 전쟁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동감하는 부분도 많지만, 나는 자본주의의 생리가 전쟁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새로운 윤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진을 잘못 읽은 탓이리라...
원인을 밝히는 일은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한국 사회에서 과거사 규명은 원인을 밝히는 문제다. 아직도 원인을 밝히는 문제는 요원하기만 한데, 국립 현충원에 모신 두 전직 대통령들에 얽힌 사건들도 그렇고, 숱한 학살들과 사법 살인, 국가의 폭력으로 죽은 의문사와 광주들이 그렇다. 책임의 문제가 아니다. 책임만을 물으면 마녀 사냥이 되기 쉽다.
사물의 본질을 바라보는 데에는 (괄호)치고 보는 것이 중요하다.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샘'이란 제목으로 제출했을 때, '더럽게 변기를?'하고 보면 더럽지만, 거기 볼일보는 일을 괄호치고 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것. 누드화도 마찬가진데... 벗은 여자를 보고 흥분하면 안 된다. 그럼 예술이 아니고 외설이 되고 만다. 벗은 여자는 괄호치고, 그 그림을 보아야 예술미를 느낄 수 있다.
이런 예술의 형식을 통해서 윤리의 본질을 유추하는 방식도 재미있다.
우리는 사물을 판단할 때 인식적(참,거짓), 도덕적(선악), 미적(쾌,불쾌) 판단을 동시에 행한다. 그것들은 혼합되어있어 확연히 구별되진 않는다. 과학자는 도덕적, 미적 판단을 괄호에 넣어서 인식의 대상을 판단한다. 미적 판단에선 사물의 허구, 악은 괄호에 넣어진다. ...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괄호에 넣도록 '명령'을 받고, 그것에 익숙해지면 괄호에 넣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다...(197)
자유도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의하여 존재한다...
생각할 것을 많이 던져주는 이야기다.
일본의 패전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천황을 처벌하지 않은 것, 원인을 제대로 캐어 책임을 묻지 못한 것이 결정적으로 일본인들을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게 한 것이라는... 그 책임은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확산을 방어하기 위하여 천황을 명책하기로 한 미국 정부에게 있겠지.
책과는 상관없이 가라타니 고진...이란 이름을 들으면 柄谷行人 무늬진 골짜기를 걷는 나그네... 가을이라 단풍이 붉게 퍼진 숲길을 고요히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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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11-09 공감(2)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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