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30

[중앙시평]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 중앙일보

[중앙시평]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 중앙일보

김규항 – [중앙시평]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김구는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나는 그렇지 않은 축에 속하는데, 오래전 『백범일지』를 처음 읽으며 받은 충격 때문인 것 같다. 감옥살이의 고통스러움을 한껏 토로하며 그는 적는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들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난다.”

오늘 어느 정치인이 김구처럼 말했다면 어떻게 될까. 사회도 변하고 사람들의 의식도 변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김구의 말을 어떻게 여기든, 그의 말이 당시 사회와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건 사실이다. 그걸 인정하는 건 역사를 대하는 기본적 태도를 이룬다. 오늘 사회와 의식을 역사적 상황에 들씌우는 건 역사 해석이 아니라 각색 혹은 창작이다.

지배수법에 악용되는 ‘반일감정’
중요한 건 친일 아닌 일제부역 여부
이젠 콤플렉스 민족주의 벗고
보편적 인류애의 개인으로 설 때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를 민족의 성녀라 추켜올리거나 자발적 매춘여성이라 깎아내리는 일도 그렇다. 위안부의 가장 주요한 정체성은 빈곤과 여성이다. 부유한 위안부도, 남성 위안부도 없다. 위안부는 ‘가난한 집 딸들’이었다. 딸을 파는 가난한 아버지들이 많았다. 김구의 말에서도 비치듯,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매매를 중계하는 조선인 업자들도 많았다.

팔려가는 딸들의 역사는 일본군 위안부로 끝나지 않았다. 해방 후 미군 위안부와 전쟁에서 한국군 위안부의 역사로 이어진다. 연구자들은 한국 정부가 미군 위안부와 한국군 위안부를 매우 적극 관리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팔려가는 딸들, 여성 인신매매는 그 후로도 매춘 산업의 주요한 공급 방식이 된다.

근래 많은 시민이 나눔의집과 정의연(정의기억연대)에 분노했다. 일본군 위안부 여성을 지원하고 그들과 함께 싸운다는 명분 하에, 사익을 추구했다 볼 만한 정황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앵벌이 집단’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으니 시민의 실망과 분노가 어떤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만일 그 정황들이 사실이라 해도, 그 단체들이 처음부터 그런 목적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들은 왜 변질했을까.

그 주요한 조건으로 콤플렉스 민족주의를 꼽을 수 있다. 한국인들이 반일 감정을 갖는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식민지 역사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 민족 전체와 일본 민족 전체 사이에서 일이 아니었다. 일본 지배계급(제국주의 세력)과 조선 민중 사이에서 일이었다. 대다수 일본 민중 역시 전쟁에 동원되고 착취당하는 피해자였으며, 조선의 지배계급은 일본 지배계급과 공조하며 안락을 유지했다.

해방 후 한국 지배계급은 그 역사를 민족 전체의 일로 만들어낸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부수면서도 반일 정책을 고수했고, 일본 군가를 즐겨 부르던 사무라이 박정희는 일본 문화를 엄격히 금지했다. 그들은 그런 정책 덕에 한국 내의 여러 모순적 상황들을 상당 부분 덮을 수 있었다. 반일 감정은 반세기에 걸쳐 극우 독재 세력의 손쉽고 효과적인 지배 수법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했음을 내세우는 현 정권이 이어받아 죽창가를 부르고 항일을 외친다.

‘친일파’는 그런 지배 수법에 최적화한 말이다. 우리가 문제 삼을 건 일본과 친했느냐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했는가이다. 이를테면 프랑스인들이 나치 부역자를 표현하는 말은 ‘콜라보’다. ‘친독파’에 해당하는 ‘제르마노필’은 단지 독일이나 독일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친일파가 아니라 ‘일제 부역자’라 고쳐 말해야 한다.

위안부 관련한 학문적 견해 때문에 정의연과 나눔의집과 갈등을 빚고 마녀사냥을 당했던 박유하 씨에 대해, 그 단체들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무너지고도 지식사회의 재평가가 없다는 건 인상적인 일이다. 박 씨의 재평가엔 자신들의 오류 인정이 수반되기 때문일 것이다. 논의는 사태의 구조가 아닌 개인 윤리 차원에 머물러야만 한다. 이제 윤미향이 새로운 마녀이며, 옛 마녀 박유하는 침묵으로 배제된다. 그들은 여전히 한나 아렌트에게 민족 배신자 낙인을 선사한 ‘악의 평범성’을 말한다.

콤플렉스 민족주의는 한국 남성 특유의 가부장적 피해의식과 관련이 있다. 일본에서 역사 관련 발언이라도 나오면 다짜고짜 발끈하기부터 하는, 일본과 스포츠 경기를 ‘전쟁’(대일전)으로 규정하며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피해의식 말이다. ‘가장 민족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괴테의 말도 의미가 바뀐다. 괴테의 말에서 ‘세계적’이란 인류 보편성을 뜻한다. 한국에서 그 말은 다른 민족과 비교와 우열을 표현한다.

민족은 실재하며 무시될 수 없다. 그러나 보편성을 잃은 민족주의는 언제나 예외 없이 악용된다. 콤플렉스 민족주의가 만연할 때, 지워지는 건 민족 내의 계급 현실이다. 그리고 계급 현실의 보편성에 기반을 둔 인류애다. 평범한 한국 노동자의 친구는 동족 이재용인가, 평범한 일본 노동자인가. 콤플렉스 민족주의를 벗고 보편적 인류애를 가진 개인들로 설 때도 되었다. 오늘 한국 시민은 당연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가도록 도와야 한다. 그게 진정한 역사 청산이며 회복이다.

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원문: https://mnews.joins.com/amparticle/24093297

Early Quaker women: general overview | Quaker Learning Austr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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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를 위해 2021 - 마이니치 신문 연재 2021. 1. 22 ~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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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30
화해를 위해 2021 - 마이니치 신문 연재 2021. 1. 22 ~ 6. 25
화해를 위해 2021

- 마이니치 신문 연재 2021. 1. 22 ~ 6. 25

朴裕河(박 유하)

1957 년 서울 출생. 한국 · 세종대 교수. 게이오 대학교, 와세다 대 대학원에서 일본 문학을 전공,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 "(河出書房新社한일 문화 교류기 금상 수상 훗날 「한국 민족주의의 기원」라고 제목을 고침 문고 화) 「화해를 위해 - 교과서 · 위안부 위안부 · 야스쿠니 · 독도 '(헤이 본샤, 대불 지로 논단 상 수상), 「제국의 위안부 - 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 "(아사히 신문 출판, 아시아 태평양 상 특별상, 이시바시 단잔 기념 와세다 저널리즘 대상) "인양 문학론 서설 - 새로운 탈식민에"(인문 서원) 등.



목차

01 과거 30 년에서 형성된 '책임 회피의 일본'의 배경

02 달라질 수있다 "팩트"는 - "제국의 위안부"저자가 지적, "학문의 정치화"

03 기본 조약 둘러싼 한일 인식 의 차이 - 냉전 붕괴 배경에

04 위안 징용 공 판결 '현재'가 재판 한 과거 - 역사의 사법 화

05 위안부 문제 재판 자체를 무효로 한 일본 정부의 대응 최선 이었는지

06 위안부 문제의 죄를 '일본' '국가'에만 집중시킨 판결의 문제점

07 국가 이익, 국가의 사정으로 동원되는 여성들

08 필요한 것은 지난 30 년의 역사 대하는 방식의 검증

09 '정의'에 억압 된 소리 내지 못한 채 사망 한 피해자에 생각을

10 피해자 중심주의에서 대변자 중심주의에 - 운동과 연구 진심인지

11 서양 인식을 만든 북한의 위안부 증언

12 있어야 "기억 상속"을 함께 생각 날을 요구하고
01
과거 30 년에서 형성된 '책임 회피의 일본'의 배경


일본과 한국은 갈등을 극복 못한 채 2021 년의 행보를 시작했다. 한 명의 한국인 여성이 자칭하고 위안부 문제가 다시 발견 된 지 30 년. 냉전 종결 후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있어야 관계를 모색하면서도 지금 한일 최대의 불협화음 속에있다.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은 쉬운.하지만 차세대를 위해 공존의 길을 찾고 싶다." "제국의 위안부」등의 저서로 알려진 한국 · 세종대의朴裕河(박 유하) 교수의 연재 「화해를 위해 2021"을 제공한다.




∙ ∙

「학문의 정치화 '달아

한일 관계 악화가 우려되고 오래다. 일본 총리가 대신했을 때,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전개를 기대하는 시각도 있었지만, 당분간은 어려운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대립하고있는 문제를 둘러싼 정확한 이해가 양국에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없으며, 게다가 문제의 소재를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본은 한일 관계 악화의 원인을 문재인 (문재인)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경향이있다. 그리고 지금의 정권이 계속되는 가운데는 관계 개선은 어렵다고하는 목소리가 많다. 분명히 문장 대통령은 박근혜 (박근혜) 대통령 재임 때 두 외교 관계자들이 어렵게 도달 한 한일 협정에 근거하는 「화해 · 치유 재단 '을 해산 해 버렸다. 그래서

화해를 위해 2021

그렇다고 10 억 엔을 돌려 준 것도 아니고, 합의 파기를 선언 한 것도 아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문장 대통령이 있어야 할 곳에없는 목소리를 내야 할 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거세지고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일 협정을 둘러싼 애매한 태도는 그런 거의 연장 선상에있는 것이다. 어쨌든 실질적으로 파기도 보이는 것은 당연한에서 (그러나 한국 측에서 보면 그런 애매한 태도를 외교적 흥정 평가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일 관계 회복을 바라는 사람들 이 포스트 문장 정권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도 한일 협정에 종사 직전까지 일본의 예상 · 실망 엄격한 태도였다. 즉 보수 정권이라고해서 일본에 대한 태도가 확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것을 배경으로 식민지 지배가 있다고보고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한 인식은 물론 실수가 아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는 식민지 지배에 마주 일본 상 이야말로 한국 사람들의 반감을 만들어 계속 원인이되고있다. 즉, '식민지 지배'자체보다는 '식민지 지배를 둘러싼 (일본의 태도 등) 제 인식 "이 바뀌어 온 결과라고 봐야한다. 냉전 붕괴 후 지난 30 년 동안 일어난 것,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인식의 사회적 확산의 결과 이야말로 오늘의 대립을 만들었다 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과거에 대해) 사과도 보상도하지 않는, 책임 회피의 일본 '의 이미지가 한국 사람들의 인식으로 정착 해 버린 결과이다. 일어난 일들 (역사)이 뿌리에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이상으로, "반성없는 일본 '과의 이미지가 1990 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정착 한 것, 즉 지난 30 년에 걸쳐 형성된 일본 관이 현재 한국의 대일 인식과 태도를 만들어 왔다고해도 좋다.

그러한 것을 지원하기 위해 90 년대부터 학자들의 다양한 연구 · 인식이 생산되고 그들이 정착 한 것이 이렇게 한국의 일본 인식을 만들어왔다. 예를 들어, 문장 정권의 역사 인식의 뿌리에 있다고 할 수있다 1910 년의 한일 합방 불법 론은 서울대李泰鎮(이태진) 교수가 90 년대에 제창하고 정착 한 인식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시 쓰지만, 그러한 '논리'가 만들어져 미디어 등을 통해 확산 · 정착 된 것이야말로 한국의 대일 인식 · 자기 인식을 변화 · 강화시킨 것 같은 것이다.

이에 따라 대두 된 65 년의 한일 기본 조약이 부족한 것이었다 인식도 예전부터 있던 것은 아니다. 이것 역시 90 년대 이후 주로 학자들에 의해 시간이 지남에 확산되어 온 것으로, 방금 전의 한일 합방뿐만 아니라 일본 학자 · 지식인도 연계하여 인식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90 년대 초 에서 시작되었지만, 확산 된 것은 2000 년대 이후라고 할 수있다. 안에는 원래 징용 공 소송을 지원하고있다崔鳳태안 = 최 본트 = 변호사가 저자로 참여한 책도있다).

갈등 낳는

'시대의 추이 "

그러한 논리의 시비는 지금은 묻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일본과의 '관계'를 규정 한 두 조약에 대해 한국 사람들 (한국 사람을 포함)이 냉전 시대는 존재감이 없었다 생각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한일 관계를 뒤흔든 전 징용 공 문제 - 일본을相手取る재판에서 18 년의 판결문은 바로 그 두 개념을 담고있다. 즉, 말하자면 20 년 이상에 걸쳐 발언권을 얻게 된 생각 이야말로 그 판결을지도했기 때문에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재판에 관여 한 사람들 - 변호사와 그 주변의 학자들이 공유하는 개념이며, 정치 · 외교 문제로되었을 때, 그러한 법정에서 공유 된 생각이 정치인에게 전해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문장 대통령은 변호사 출신으로서 자신 초기 전 징용 공 재판에 입후보했다. 면, 원고 측과 판결을 낸 재판부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보고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학자의 생각은 과거의 다양한 일들이 "문제"로 발생한 90 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역사 인식을 직간접 적으로 지원하면서 공유되어왔다.

그리고 본래는 정치에서 벗어나 중립적이어야 이러한 과거를 둘러싼 인식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잣대가되어왔다. 즉 좋고 나쁨을 떠나 그러한 '시대의 추이」이야말로 현재의 갈등을 낳고 지탱하고있는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는 정권이 바뀔 것으로 그대로 대일 인식을 바꿀 수 없게되어있는 것이 현실 라고 할 수 있겠다. 공유의 정도는 차이가도 이미 확산 된 그러한 인식을 논의하고 설득하는 과정없이 단순히 미래 지향적를 발동 할 수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 곳에와있는 것이다.

한층 더 말하면, 본래라면 이러한 논의에 따라 각각의 수 고려 대상이되어야하지만, 언론과 일반 국민은 거기까지 생각이별로 없기 때문에 단순히 "피해자로 징용 공 '이라는 것의 상황 인식에 머물러 경향이있다. 앞에 나온 법원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 할 이유가없는 일반인 으로서는 찬성 이외에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 그런 판결이 나왔다 가지를 생각할 수는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18 년의 판결에서 일본 기업이 지불한다고 한 보상의 내용이 「체불 임금 '이 아닌'위자료 '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여론은 피해라는 "사실과 결론"만으로 움직여 쉽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한일 협정 때 한국 헌신하지 않는 (헌신하지 않는) 대 문제 대책 협의회 (정대협. 현 일본군 성 노예 문제 해결을위한 공정 기억 연대, 정의 C)의尹美香(윤미향) 전 이사장은 합의에 찬성하고 있었다고도받을 (20 년 5 월 위안부李容洙= 이용수 = 씨는尹美香씨가 한일 협정을 알고 있었다고 호소 윤씨는 부인했다.하지만 당시 윤씨의 미디어를위한 설명은 모순되는 곳이 많다. 한국 외무부 차관 출신으로 당시 국가 안보 실 차장이었다趙太庸= 조 태연 = 씨는 "尹美香씨 한일 협정에 대한 사전 설명했다 "고 밝혔다. 윤씨와 합의 발표 직전에 만난 와다 하루키 씨도"드디어 일단 종지부가시기가 온다는 소원은 일반적인 것임을 확신했다 " 하고있다).

그러나 20 년 넘게 '운동'의 결과 사과의 모양이 "법적 책임"을 취할 것이다한다는 것은 적어도 지원자들 사이에서는 당연한 일로서 공유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비록 당시에 정대협이 수용해도 지방의 지원

단체를 끄덕이는 곧 어려웠던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 외교 협상 상대를 정대협에 한정 한 것도 문제이지만, 어쨌든도 아이러니하게도 더 이상 위안부 문제는 정대협의 중심 인물의 생각 만이 제어 할 수없는 곳에 와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지하여 정의 연속 전 이사장 윤 씨가 한일 협정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에 언급하면서 현 이사장 이모娜栄(이나영) 씨가 "영원히 투쟁을 계속하는 각오 을 정하고있다 "고 지적하는 사람도있다.

현재의 한일 관계가 심하게 꼬여 버린 배경에는 지금 말한 것 같은 복잡한 사정이 있고, 각각의 문제 (의 존재) 자체를 원인으로하고는 언제 까지나 상황을 타개 할 수 없다. 이러한 구조는 물론,이 밖에 상황을 달리고있는 다양한 요인 - 구조적인 요인에 착안하여 처음 왜 이런 끔찍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보이는 것이다. 지원자 내부와 외부에서 발생하는 '기억'전이 현상과 하나의 단어의 의미가 미묘하게 비켜 놓아 논의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운 상황 등 다양한 것이 역사 인식을 둘러싼 대화도 논의도 어렵게 해왔다.

문장 대통령 지지자의 중심 층 --386 세대 (60 년대에 태어나 80 년대에 대학생으로 민주화 운동의 주축이되어 90 년대에 30 대였던 세대의 것. 현재는 50 대가되어 있기 때문에 " 586 "로 불리게 된) 라 불리는 민주화 투쟁 세대야말로 이러한 인식이나 상황의 중심에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냉전 체제 시대에 억압되어 있던 세대이며, 식민지 시대에 대한 인식을 민주화 투쟁 시대와 냉전의 종말과 함께 학습하고 내면화 해 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내려 가면 제국에 저항 한 것은 좌파라는 구도도 돕고, 그들에게 일본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에도되어있다. 그런 사람들이 90 년대 이후의 한국의 대일 인식을 만들어 온 것이다. 즉 문장 정권이 바뀌어도 한국을지지하고있는 것은 그러한 현재의 50 대와 그들의 민주화 투쟁의 영향을받은 40 대이며, 당분간은 그러한 인식이 지속될 것으로보고 좋다. 한일 갈등은 실은 "좌우 갈등들"이다.

∙ 화해 · 치유 재단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의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 예산을 사용하여 보상하면 일본 정부가 표명하고, 한국 정부가 받아 들인 2015 년 12 월 한일 협약에 따라 한국 정부가 16 년 7 월에 설립 한 . 학자와 정부 관계자들이 이사를 구성하고 피해자의 마음의 상처를 고치다 것 등을 목적으로 일본 정부가 출연하는 10 억원을 재원으로 당시 생존 해 있던 위안부 1 명 1 억원 (약 920 만엔), 사망자는 유족에게 1 인당 2000 만원을 지급. 그러나 "결국 돌이킬 해결"라고 한 내용 등을 이유로 정대협 등이 반대 운동을 일으켜 문장 대통령이 취임 한 17 년 5 월 이후 사실상 활동을 중단하고 19 년 7 월 잔무 처리에 필요한 청산 법인되었다.

∙ 한일 합방 불법 론

1910 년의 한국 병합 조약은 체결 당시부터 무효, 즉 불성립이기 때문에 법적 근거가없는 불법 식민지 지배이며, 본질적으로 군사 점령이었다고한다. 이러한 인식은 항일 독립 투쟁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논거되어 왔지만, 90 년대 한국 등의 역사 학자에 의해 조약 무효의 사료 적 근거가 지적되기에 이르고 일본의 지배에 대한 한국의 일반적인 인식되었다. 李泰鎮서울대 교수는 칙령 · 조칙에 순종 황제의 서명이 통감부의 일본인 직원 위조 인 것 등을 책에 저술했다. 이에 대해 한국 병합에 이르는 과정에서 맺어진 조약은 그 내용과 절차가 매우 부당 이었지만, 법적으로 유효하다고하는 반론이있다. 일본에서는 1998 년부터 2000 년까지 종합 잡지 「세계」에서 논란이되었다.

∙ 기억의 전이

다른 증언자 (구술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으로 이야기 같은 것. 예를 들어, 위안부 "정신대를 길가에 닥치는대로 공출 해 갔다"고 발언에서도 그러한 것을 확인할 수있다. 또한 구술 역사 연구자 정恵瓊(정혜경) 씨도 이러한 방법을 '기억의 사회화'로 지적하고있다.


02
달라질 수있다 "팩트"는 - "제국의 위안부"저자가 지적, "학문의 정치화」


「제국의 위안부 '의 저서로 알려진 한국 · 세종대의朴裕河(박 유하) 교수는 식민지 지배에 마주 일본의 모습, 즉 "사과도 보상도하지 않는, 책임 회피의 일본 '의 이미지가 1990 년대 이후 한국에서 학문에 확산되고 정착되어 온 것으로, 악화 일로를 따라 현재 한일 관계를 만들어 왔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교수는 이러한 구조적 요인에 주목하고 역사 인식을 둘러싼 '논의의 차이 "를 염두에두고 차세대를 위해 양국이 서로 마주 보도록 제안한다.


∙ ∙

불안정한

'팩트'

역사 갈등을 둘러싸고 "사실"을 볼 것이라고하는 사람들이있다. 최근 일본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반일 종족주의 - 한일 위기의 근원 '도 그 중 하나라고해도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함정 (간사이)이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사실'되는 것의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종종 학자이지만, 그러한 의견이 학문이라는 연구 결과 인만큼 언제든지 달라질 수있다. 즉 연구의 진전에 의해 "사실"은 언제든지 달라질 수있다. 게다가, 학문도 연구의 결과이기 때문에, 한 학자의 견해도 달라질 수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그 이상



화를 명확하게하지 않을 수있다. 게다가 그 학설이 이미 미디어를 통해 널리 퍼진 후에는 수정하기 어려운 경우도있다.

예를 들어, 위안부 문제의 '강제 연행' '강제성'라는 말을 놓고 일본 학자들과 한국의 운동가는 그 말의 의미를 조금씩 바꾸어왔다. '성 노예'도 마찬가지이다. 즉, 비록 "반일 종족주의 '학자가"위안부는 성 노예가 아니다 "라고 했더니, 그동안'강제 연행 ''성 노예 '라고 주장 해 온 사람들은 이미 그 의미를 바꾸어 그래서 논의가 맞물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른 채 각각의 논제를 신뢰 해 마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접점이 만들어 되든지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강제성'의 의미는 동원 둘러싼 상황이 아니라 "위안소 (에서 장애)"(요시미 요시아키 · 중앙대 명예 교수)를 둘러싼 것이되어 있기도하다. 게다가 거기에 장애인 = 감금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는 상황이있다. 무엇보다, 전장에서 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위안부 안전과 정보 보호를 위해 외출을 엄격히 제한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알려져있는 것은 '외출 금지'의 '사실'뿐이지 그 금지의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한층 더 말하면, 전장이든 후방 지역 인 위안부에 도망되지 않도록 단속하고 주체의 많은 업체입니다. 자금을 들여 데리고 온 것이니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기도했다. 그러나 그러한 '배경'까지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기 때문에 역사 인식을 둘러싸고 "논의의 차이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한 '차이'자체가 인식되지 않는 한 역사 인식 역사 논쟁의 자리에서 아무리 논의 했더니 접점을見いだすこ

수는 없다.

이런 일이 오는 것은 역사 인식을 둘러싼 논의의 장에서 '학문의 정치화 · 학문의 운동 화'라고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학문적으로는 (논문이나 학회보고 안에) 달라 식견을하거나 새로운 지식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면서도 공개적으로 말하지 · 표에 내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있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이해가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필요 접전 된 것을 의미한다. 즉, 거기에서 '역사'는 이미 단순한 과거의 일 - 역사는 없게되어있다. '역사'가 현재에 동원되었다면서 현재를 제어하는 같은

일이 벌어지고있는 것이다.

개인하게되는데 2015 년 여름, 나를 둘러싼있는 사태가 계기가되어 만들어진 작은 한일 시민 모임이 서울에서 심포지엄을 열었을 때, 그 제목을 "역사와 마주 방법 "이라고 붙였다. 그것은 이러한 다양한 어긋남이나 뒤틀림이 일어나고있는 것을 눈치 채고 제목이며, '사실'의 인식과 공유는 당연히 필요하지만, 역사와 어떻게 마주 있는가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었다. 거기에서 소송을 다시금 일본으로도 제창

바꾸고 싶기.

오늘 역사는 '사실'을 넘어 해석의 투쟁이있다. 또한 반대로 앞서 해석에 맞추기 위해 동원되는 사태를 설명해야 개념의 내용이 관계자간에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것조차 일어나고있다. 도대체이 이상한 민과 그로 인한 왜곡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향후 그러한 것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있다.

1990 년대 이후 위안부 문제와 구 징용 공 문제가 생겼을 때 일본의 지원 등 많은 관계자들은 이러한 역사의 모든 문제를 '법'에 따라 생각하고, 거기에서 얻은 결론 을 "법"에 호소하고 그 가치를 스스로 법정에서 확인하려고했다. 역사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일찌감치 포기한 때문 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법적"접근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 것이었다이라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법정에서 역사를 둘러싼 투쟁의 증거로 나오는 것은 구술 (증언)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학문'이라는 논문과 거기에 사용 된 자료이다. 즉 역사 그 자체보다는 역사를 둘러싼 '견해'가 차용되는 것이다. 그러하지 법정도 결국 역사를 둘러싼 학문의 투쟁의 장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 8 일 서울 중앙 지법이 일본 정부에 배상을 명령했다 위안부 소송도 일련의 맥락 속에 위치시킬 것이다. 국제법상의 "주권 면제"의 원칙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행해진 반 인도적 범죄 행위에 대해 적용 할 수 없다"고 재판장이 판단

이 판결은 원고를 다시 논거야 이다.

원래 역사 문제가 법정에 등장하게 된 것은 위안부 문제의 경우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것을 단순히 "전쟁 범죄"라고 생각 뉘른베르크 재판 등을 참조하면서 관계자 의 "처벌"을 목표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운동에 가장 빨리, 그리고 오랫동안 해왔 던 것은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에 있고, 조선인 위안부라는 존재는 전쟁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의 구조 속에서 동원 된 존재였다 . 말하자면 처음부터 이해의 틀에서 큰 실수가 발생했던 것이다.

각각의 사회 변화를 향한

한일의 현재를 생각하고 미래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본 연재 제목 "화해를 위해"16 년 전에 내가 한국에서 낸 책의 제목이다. 그때는 갈등이 있어도 사람들의 기분이 지금처럼 얼어 붙어 있지 않았다니까, 아직 평화로운시기였다. 그러나 한일이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조차 공유하지 않는 것을 깨닫고 쓴이 책은 본래 도달해야 비판 대상이 닿지 않았다.

그때 내가 목표로 한 것은 제목과 화해 "를 위해"필요한 정보의 공유했다. 대립하는 것들 놓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귀하의 정보가 동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역사적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정치 · 외교적 접근도 바라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이 미일 동맹 등 사실상의 정치 · 외교적 인 것이 아님을 많은 독자 이해 준). 그러나 지금은 두 공동체의 '화해'자체를 목표보다 각각의 사회가 좋아지는 것이야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있다. 상대를 깊이 알고 속단이나 비난이나 포기 대신 판단을 유보하면서 타인에 마주 자세를 가지고하는 한 언젠가는 말 그대로 화해도 가능하게되어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앞으로도에서 목표는 어디 까지나 「생각」의 제안에 지나지 않는다. 동시에 그 때와 변하지 않는 것은 그러한 제안을 통해 기대 한 것이 "차세대를 위해 '라는 것이다. 그 시절에도 한일 젊은이들이 서로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발상을 고무시키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손을 잡고 경우

うこと를 몽상했다. 그리고 그 소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최근 특히 일본 측에서 포기와 떨쳐의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그러한 포기는 지난 30 년 동안 직접, 간접 역사 문제에 관련되어 온 우리의 책임을 포기하게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유는 어쨌든 나쁘지했다 책임과 더 나은 관계를 인계 할 책임도. 무엇보다 그러한 포기와 방치는 관계 가면서도 악화시켜왔다 구조의 고착을 강화하고 한일 관계를 더 악화하여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리버럴 (혁신 층)은 어떻게 몰락 할 것인가」(陳重권, 2020 년, 천년의 상상社)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그 직전에는 "전례 경험 한 적이없는 나라 '(陳重권한 외에도 2020 년, 천년의 상상社)라는 책이 나와 베스트셀러가되었다. 즉, 문장 정권을 비판하는 진보적 논객들의 책

이다.

재작년 가을 이후曺国(조국) 전 법무 장관의 직권 남용 사건으로 일이며, 한국은 이제 자유의 분열이 시민 사회 수준에까지 확산되고있다. 무엇보다, 그러한 사람들을 "우경화"고 지적 교양 층도 있고, 많은 문장 대통령의 지지자이다. 민주화 투쟁 세대도 분열 해오고있는 것이다. 정권 비판으로 돌린 자유주의의 특징은 한때 정치적으로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고해도 비판 할 것은 엄격하게 비판하는 자세에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일본에 대해서도 지극히 냉정하게 물건을 생각하고있다.

이러한 새로운 계층의 부상은 한국 사회가 지금 전환기의기로에 서있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새로운 움직임이 힘을 얻은 후 지난 30 년 포스트 콜로니 아 리듬도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디딜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하고있다.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한일 갈등을 저변으로지도하고 있었다 "좌우 갈등"대신 앞으로는 "왼쪽 왼쪽 갈등"이 같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보여 주어서있다. 그러한 움직임이 주시되고 존중되어 응원되었을 때 한일 간의 생산적인 역사 대화도 다시 가능하게되면, 나는 생각하고있다.

∙ 뉘른베르크 재판

1945 년 11 월부터 46 년 10 월까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제 2 차 세계 대전 독일의 주요 전쟁 범죄자 22 명에 대한 연합국의 국제 군사 재판. 사상 처음으로 전쟁 범죄에 대한 재판에서 평화에 대한 범죄와 반 인륜 범죄를 불문하고 12 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03
기본 조약 둘러싼 한일 인식의 차이 - 냉전 붕괴 배경에


한국의 서울 중앙 지방 법원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에 대한 배상을 명한 판결이 1 월 23 일로 확정하고 모기敏充외무 장관은 "매우 유감 결단코 용납 할 수없는 '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한편, 문재인 (문재인) 대통령은이 판결에 대해 "솔직히 당황했다"고 기자 회견에서 말했다 원고 측과의 홈이 확산되고 있다고한다. 한일 역사 문제는 어떤 경과를 더듬어 온 것일까. 갈등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는가? "제국의 위안부」등의 저서로 알려진 한국 · 세종대의朴裕河(박 유하) 교수가 분석 한 (매월, 상 · 하 2 회에 걸쳐 게재). ∙

∙ ∙

마주보고 아직

30 년의 한일 양국

30 년 가까이 일한 갈등의 중심에 계속 위안부 문제는 1990 년에 한국의 신문에 위안부의 궤적을 쫓는 르포 기사가 실렸다 다음 해, 위안부 한사람이 스스로 나선 것 에서 "발생"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위안부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찍부터 일본에서도 센다夏光씨의 "종군 위안부 -"소리없는 여자 "8 만인의 고발」(73 년 후타바 사) 등 간접적이지만 그 목소리는 사회에 나와 있었고, 한국에서도 국교 정상화가 있었던 65 년에 주요 소재는 아니하여도 영화에 등장하거나 (정昌和<정 장화> 감독 "사루빈 강이 저물어가는") 노골적인까지의 성적 관심은 있어도 주인공 로 한 영화도 존재하기도했다 (羅奉한나라 <내셔널 본



한> 감독 "조선 여자 근로 정신대 '74 년). 또한 70 년에는 신문 해방 25 년 시리즈의 하나로서 위안부 문제를 거론 ( 「서울 신문」70 년 8 월 14 일자), 80 년대에도 "수기"의 형태로 대중 잡지에 그 목소리 이 직접 올라 시작도 있었다 ( 「여성 동아」1982 년 9 월호, 「레이디 경향」84 년 4 월호).

그러한 것이 90 년대 이후 사회 문제가 크게 부각 된 배경에는 냉전 붕괴가있다. 특히 한국은 해방 이후에 구축 된 냉전 체제에서 굴레가되고 있고,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식민지 지배 문제에 대해 충분히 고찰 할 수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국민의 대부분이 어떻게해서든지 그러한 정치 상황에 긴장과 억압의 나날을 면치 못하고 있고, 과거를 되돌아 같은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도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은 얇고, 김대중 (金大中) 씨 납치 사건과 광주 사건과 같은 눈앞의 정치적 사건의 주체로서의 관심 이외는 없다와 다름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조금 바뀌는 것은 88 년 서울 올림픽 이후의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65 년 이후에도 반세기 가까이 일한 모두 서로에 대한 관심은 아니었다 고 할 수 있겠다. 냉전 붕괴와 한국의 민주화 - 정치의 계절이 끝나게 때 처음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식민지 지배 문제 - 역사 문제가 양국에 '발생'한 것이었다. 즉 한일 국가로의 교제의 세월은 이미 55 년에도 본래의 의미에서 마주 시작 아직 30 년 인 것이다.

무엇보다, 전후 일본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몇몇 지식인들은 식민지 지배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그러한 자세와 인식이 전후 일본 사회에 팽배 것은 아니었다. 졸저 「제국의 위안부 '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전후 일본은 전쟁에 대해 계속 생각 "반전"의식의 공유에 성공해도 한국 병합의 결과로'지배 '를 둘러싼 고찰 국가

백성 수준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90 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그 움직임을 주도한 것은 양국 모두 이른바 혁신 계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제국주의와 좌파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러한 경향은 과거 대하는 방식에서 어떤 문제를 내포하게된다. "현재"의 정치적 입장에서 과거를 바라 결과적으로 과거 둘러싸고 좌파와 우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 두 끝에 서 사람들이 맞물리지 않는다 논쟁을 반복하면서 정치색을 강화 해 온 것이 지난 30 년의 세월이다.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아직 일본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90 년대가 지나면 해외도 말려 들게 한 대립과 갈등을 시작한 2000 년대를 맞아 한일 합의와 같은 덧없는 접근을 사이에두고, 한일 합의 된 '화해 · 치유 재단 "해산 및 수출 규제와 같은 본격적인 대립의 시대를 맞이하게되었다. 현재의 한일 관계의 분 기점은 위안부 문제의 책임자로서 쇼와 천황을 유죄로 한 '민중 법정」의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이 열린 00 년 지금으로부터 약 20 년 전이라고 할 수있다.

<법정> 후 '혐한류'의 책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의 정치적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 보는 한, 한일 간의 과거를 둘러싼 접점 만들기는 불가능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그러한 정치적 입장을 넘어 과거와 마주 자세 일 것이다.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 시대라는 인식

현재 현안이되고있는 전 징용 공 문제를 둘러싼 판결은 65 년의 한일 기본 조약을 불완전한 것으로한다 인식과 한일 합방 (1910 년) 불법 론에 힘 수있다. 이전 말한 것처럼 전 징용 공 판결은 징용 공의 삶과 노동의 실태 이전에 한일 합방과 새로운 한일 기본 조약을 둘러싼 사고 방식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이끈 것은 주로 좌파 계열의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95 년에 나온 「한일 협정을 재검토」(민족 문제 연구소 편, 주 : 한국에서는 한일 기본 조약과 관련된 제반 협정의 것을 일반적으로 한일 협정이라 함)이라는 책의 저자에 90 년대부터 위안부 문제에 깊이 관여 한 변호사, 박원순 (박원순) 씨 (후의 서울 시장 고인) や姜 昌一 (강창일) 씨 (당시 대학 역사학과 교수. 현재 주일 한국 대사) 알이 줄 지어있다. 즉, 나중에 한국의 좌파 계의 주요 정치인이되는 2 명이 각각 학자와 변호사로 역사 문제에 참여했다이며, 첫 번째 질문이 나왔다는 한일 합방 불법 론과 마찬가지로 90 년대이었다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박씨의 논문 제목은 "일본의 전후 배상 정책과 그 실태 '에서 강씨의 논문은" "과거 청산"의 과제와 한일 협정'였다. 그리고 서문을 쓴 김 봉 비 (킨 본우) 씨의 식민지 인식은 "살육과 민족의 멸종으로 이어 식민지 적 상황"아래의 "모든 민족적인 요소를 부정 · 말살 된 '시대에 더욱 일본을'38 선 설정 '의 원인 제공자로 간주 관점이었다. 95 년 시점에서 해방 이후의 한국의 과제 였을의 "식민 유제 청산"(참고 : "식민지 유제 '는 식민지 시대가 남긴 제도 나 관습의 것으로 한국에서는 자주 사용되는)이 그 까지 실현 될 수 없었던 것으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독립군 토벌을 이끌고 일본 군인이 주도 "한 정권이"합법적으로 성립 된 정권을 총칼로 쫓아 생긴 "일로 요청했다. 즉 '반란 정권 반민주적인 정권 "이"민족적 지향을 가진 모든 개인과 단체를 총검으로 억누르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서둘렀다 "라는 인식이 90 년대에 본격적으로 만나는 같이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이러한 협정에 동의 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일본 제국주의와 그 선봉 (尖峰)에 서 앞잡이 그리고 양국의 보호자가기도하고 진행 한 우리 민족을 파탄시키기위한 예속 문서 에 불과하다 "고 아이디어는 이러한 인식에서 나오고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해 깊이 사죄하고 우리 민족을 분단시킨 책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모든 관계자와 민족, 모든 피해에 대해 분명한 배상과 보상을 실현 한 조건에서 논의가 진행 것이었다 "고 과거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정신적, 물질적 인 보상을 피해자가 납득할 때까지해야하고, 그러한 조건에 합의가 이루어지고 비로소 올바른 화해로 인정되는 것이 상식 "이라는 미래에 대한 인식이 언급했던 것이다.

또한 "역사적 조건을 무시하고 체결 된 한일 협정은 실로 깊은 상처를 우리에게 남겼다. 우선 민족 분단의 고정화 및 강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통일의 가능성을 닫아 버린 것 을 의미한다. 다음은 친일 매국노 정권의 기반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친일파 정권이 강화되고 그들의 국내 기반이 강화 될수록 일본은 물론 미국에도 좋은 것이다.이 친일파 정권은 물론 군사 독재 정권이다 "며"한일 왜 국교를 정상화 할 것인가. 그것은 물론 진정한 우호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뼈의 골수에서의 반성이 비로소 가능하게된다 ""한국의 경제와 문화를 다시 일본에 예속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 그리고"다시 침략하고 침략 될 우려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정의를 유린하고 성립 된 것이라면 당연히 폐기하고 새롭게 개작 할 것이다. 거기서 처음으로 양국 관계가 제대로 이전 추진 것이다 때문이다 "라는 인식이 나타나고있다. 이런 문제 제기가 "지금까지 언급조차되지 않고 뚜껑 (뚜껑)을하고 있던 것 자체가 민족사의 비극이었다"고하면서, "이 책은 실제 문제 제기의 시작에 불과하다"며 "앞으로 좀 더 구체적인 정치적 대안과 해결 방법을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라고 매듭 짓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 금奉雨민족 문제 연구소 소장). 긴 인용되어 버렸지 만, 마지막에 나타나는 사고 - 65 년의 조약을 '정상'인 것이 아니라 "잘못된"것으로한다 인식 이야말로 일본에서하면 단순히 "국제 약속을 지키지 없다 "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생각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오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생각 자체 검증은 지금은하지 않지만, 이러한 생각 이야말로 그 전 징용 공 판결 맺어진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 1991 년 위안부 증언

1991 년 8 월 위안부 김학순 (김 하쿠슨) 씨가 한국 서울에서 자칭 일본의 책임을 고발했다. 김씨를 포함 위안부 나 전 군인 · 군속, 그 유족들은 그 해 12 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전후 보상으로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도쿄 지방 법원에 제기했다.

∙ 한일 기본 조약

1965 년 6 월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 된 조약. 현재의 한일 관계는 동 조약 및 제 협정을 기초로하고있다. 이에 따라 일본은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한국과의 사이에 국교를 수립했다. 한국 병합 조약 등 전쟁의 조약의 무효 확인했다. 양국 간 협상 끝에 총액 8 억 달러 (무상 3 억 달러, 정부 차관 2 억 달러, 민간 차관 3 억 달러)의 원조 자금에 대한 대가로 한국 측은 청구권을 포기했다. 한편, 한일 조약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합법적이고 정당 하였다는 일본 측과 불법적이고 부당한 였다고하는 한국 측이折り合え하고, 65 년 시점에서 "이미 무효 '라는 한일 양국에서 해석 가능한 조항을 만들었다. 또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 된"청구권에 대해서도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를 포함한 모든 해결 된 것으로하고 있지만 한국은 위안부 등 문제가 논의되지 않았으며 현재도 미해결 있다고하고있다.


04
위안 징용 공 판결 '현재'가 재판 한 과거 - 역사의 사법 화


한국의 문재인 (문재인) 대통령은 1 월 기자 회견에서 전 징용 공 소송을 둘러싸고 패소 한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매각하는 "현금"으로 언급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사법 존중 '의 원칙론에서 탈피하고 정치 주도의 해결을 요구하게되는 것일까. 한국 · 세종대의朴裕河(박 유하) 교수는 법률가와 법학자들이 1990 년대부터 '법적 책임'의 추구를 주도 해 온 경위를 지적하고 재검토를 제안한다.


∙ ∙

2018 년 전 징용 공 판결은 한국 병합 불법 론과 한일 기본 조약 불충분

분 이론에 근거한다. 신 일본 제철에 명령하는 것이 '임금'이 아닌 '위자료 "지불 인 이유도 바로 이러한 1990 년대의 인식에 있었다. 즉 전 징용 공 판결은 징용 공의 삶과 대우 등의 "피해"사실을 넘어 "비정상"으로 간주되었다 과거 청산 방식을 "시정"시도이기도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시도가 형태를 이루는 데는 20 년 이상의 세월이 걸려 있었다. 만약 우파의 재판관이 같은 우파적인 생각으로 판결을 내고 있으면, 결과는 달랐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8 년의 판결은 좋고 나쁨을 제외하고 '현재'가 과거를 재단 한 판결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분명 정치 외교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文在호랑이 대통령이 일관되게 "사법부의 판단 때문"이라고 참여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다처럼 그런 생각이 사법부의 판단 =



"판결"됨으로써 역사 문제에 관한 최종 판단로서의 위치를 확보 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연재의 Part 1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문장 대통령 자신이 한국에서 일어난 첫 번째 재판에 변호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도 있을텐데, 그 이상으로, "법"의 판단에 대한 신뢰가 시킨 것이다. 위안부 문제의 관계자들이 '법적 책임'을 요구해 온 것을 받고, 문장 대통령이 "법적 책임"을 말하게 된 것도 그러한 것의 결과이다 (지원자들은 오랫동안 국회에서 만든 법에 따른 '법적 배상'과 '공식 사과'를 요구 해왔다. 그 것이 '법적 책임'을 취할 것으로 생각되어왔다이다. 일본군 성 노예 문제 해결을위한 정의 기억 연대 <정의 련> 홈페이지에는 '법적 배상'과 '공식 사과'를 내걸고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재판에 의한 보상을 요구하게되어 있고, 지금도 국회에서 입법을 요구하고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전 징용 공 문제의 경우 90 년대부터이 문제에 관여하고 판결의 중심에 있던 변호사는 사실 마지막 해결책으로 "정부가 나서서 개인 청구권을 취소 재단을 만드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즉 기업을 상대로하여 사법부에 판단을 요구하고 있으면서, 최종 해결 주체는 정부를 상정하고있는 것이다. 거기에 실제로는 "법정 해결"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소송은 단순히 정부에 압력을 넣어 무

기로 만 사용 졌다고 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상황을 선도 한 것은 법률가와 법학자들이었다. 역사 청산의 방법을 「법」에 요구 한 것도 한일 양국의 법률가 · 법학자들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생각은 올바른 것일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해도 '법적 책임'을 요구 한 것은 "강제 연행"이라고 이해이며, 위안소 설치 = 범죄 = 처벌 할 것, 그리고 생각했다. 역사를 둘러싼 '책임'의 추구를 "법"에 따라 진행하는 것이 반드시 화해와 역사의 청산으로 이어질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의 '법적 책임'을 인정 받아 국회에서 법률이 만들어진 "배상"가 열렸다해도 많은 일본 사람들의 납득을 얻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러 한 국민적인 한일 역사 화해로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비록 15 년 말 한일 합의가 비판 한 이유는 한국의 지원 단체가 주장하는 '공식 사과'는 없던 일로했다. 여기서 말하는 '공식 사과 "의 의미는 반드시 명확하지 않지만, 한국 정부가 지원 단체와 거의 같은 의견으로 움직이게 된 것은 11 년의 헌법 재판소 결정으로 한국 외무부가 위안부를 위해 움직 없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고 간주 되었기 때문이다.

'법'지상주의의 한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논의에서도 역사 학자뿐만 아니라 법률가의 역할은 컸다. 그 선두에 선 것은 사실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 변호사 등이다. 그들은 80 년대부터 인권 문제를 유엔에 호소하는 활동을 전개했지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 사회에 호소를 지향하는 한국 헌신하지 않는 (헌신하지 않는) 대 문제 대책 협의회 (정대협 현 · 정의 C)와 제휴하면서 활동했다. 토 츠카悦朗변호사의 저서 ""위안부 "대신"성 노예 "인"(일본어 버전 '일본이 모르는 전쟁 책임')에 의하면, 지금은 완전히 정착 한 '성 노예'라는 말을 만든 는 토 츠카 씨 본인이다.

90 년대 이후 정대협과 제휴하면서 쿠 마라 스와미 보고서 (스리랑카 여성의 쿠 마라 스와미 씨도 법학자 인)과 맥 두걸 (미국 변호사) 보고서의 제출을 가능하게 한 것도, 토 츠카 씨 같은 일본 사람 지원자이었다. 또한 일본 변호사 연합회가 조직으로 일찍부터 이러한 활동을 지원하고도 있었다. 위안부 문제와 전 징용 공 문제 등 '피해자'문제에 일찍부터 참여했습니다崔鳳타이 (최 본트) 변호사는 자신이 피해자 문제에 관여 된 계기가 일본 유학 시절에 일본인 변호사들이이 문제에 열정적으로 임하고

했다고 밝혔다.

위안부 문제가 대두되고 얼마되지 않은 무렵의 1994 년 국제 법률가위원회 (ICJ)가 보고서를 정리 한 것도 일본의 법률가들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 국제 사회가 위안부 문제를 파악하는 관점 만들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사 학자와 증언자 이상 변호사 · 법학자들이라고해도 좋다. 쿠 마라 스와미 보고서 등 다음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세계의 인식에 큰 영향을 준 문서도이위원회의 보고서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법률가들의 생각은 '식민지 지배'가 아니라 과거와 동시대의 '전쟁'이 일으킨 상황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보고서의 구석 구석에서 엿볼 수있다.

90 년대 이후 한일 갈등을 둘러싼 문제에서 '법'관계자들이 해결을 위해 지불 한 노력과 선의은 높이 평가 돼야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러한 주장과 활동은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기반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마도 바로 그 때문에)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지난 현재에도 갈등은 계속되고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루어져야 역사를 고려할 때 '법'참여의 효과를 묻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닐까. "역사의 사법 화 '의 가능성과 한계를 다시 한번 물어야 없게되어있는 것이다.

∙ 쿠 마라 스와미 보고서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임명 된 쿠 마라 스와미 특별 보고관이 제출 한 1996 년 1 월 보고서 부록. 위안부은 "군대 성 노예 '의 사례라는 인증하에 일본 정부가 국제 인도법 위반에 대해 법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일본 정부가 도의적 인 책임을 인정 아시아 여성 기금을 설립 한 것을 평가하고있다.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보상을하고 자료를 공개 사과하고 역사 교육을 생각하고 책임자를 가능한 한 처벌해야한다는 것이 보고서의 권고에 유엔 인권위원회는 이 보고서 부록을 "유의 (takenote)"고 결의했다. 또한 쿠 마라 스와미 보고서의 약 2 년 후인 98 년 6 월 전시의 여성에 대한 폭력에 관한 특별 보고관 맥 두걸 씨의 보고서가 유엔 인권위원회 차별 방지 보호 소위원회에 제출되었다. 이 보고서는 위안부 제도를 "강간 센터에서 성 노예 '라고 파악 것이었다.

∙ 국제 법률가위원회 보고서

국제 법률가위원회 (ICJ)는 1994 년 조사 보고서 "국제법에서 본 '종군 위안부'문제 '를 발표했다. ICJ는 52 년 법학자, 변호사에 의해 제네바에서 설립 된 '법의 지배'에 따라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하는 인권 NGO (비정부기구). 조사는 1993 년 4 ~ 5 월, 필리핀, 일본, 한국, 북한에서 총 40 명의 증언자에서 듣기, 자료 수집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보고서는 "여성 및 아동의 매매 금지에 관한 국제 협약"의 당사국이었던 일본의 조약 위반 등을 인정 한일 청구권 협정 등은 면책 사유도 얻지 않을로서 일본에게 위안 시설의 운영 · 유지에 관해 보유하고있는 정보의 공개와 피해자의 재활 조치 등을 요구했다.


05
위안부 문제 재판 자체를 무효로 한 일본 정부의 대응 최선 이었는지


올해 들어 한일 관계를 더욱 냉각 된 것이 위안부에 대한 배상을 명령 한 1 월 서울 중앙 지법의 판결했다. 국가는 다른 국가의 재판권에 복종한다는 관습 국제법의 원칙이다 "주권 면제 '를 인정하지 않는 결정에 일본 정부는 강하게 반발하고있다. "제국의 위안부 '의 저서로 알려진 한국 · 세종대의朴裕河(박 유하) 교수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위한 지금까지의 일본의 노력을 인정하면서도 문제가 많은 판결 이기에 일본 정부는 재판 장소에서 대응 했어야했다 호소 (매달 상 · 하 2 회에 걸쳐 게재).


∙ ∙

"주권 면제 '를 이유로 한 재판 회피 옳았다 하나

지난 1 월 8 일, 한국 서울 중앙 지법에서 일본 국가는 한국의 위안부에 대해 1 억원 (약 960 만원) 씩 손해 배상을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한국에서는 판결까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단, 문재인 (문재인) 정권의 여당 '함께 민주당 "국회의원은 판결 직전에이 재판의 경과를 논의하는 심포지엄을 열어 놓았다 (이재용汀<이재정> 의원 주최" "정의 "로 향하는 여행 - 일본군 '위안부'소송의 의미와 과제 ', 5 일). 재판 후에는 승소의 의미를 설명하는 심포지엄이 적어도 3 회 열린 (18 일, 28 일, 2 월 26 일). 이들은 국회의원, "일본군 성 노예 문제 해결을위한 공정 기억 연대 '



(정의 연, 구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일본군'위안부 '연구회, 민주 사회를위한 변호사 모임 가 공동 주최했다. 문장 대통령이 선고 "수수께끼"를 표명했기 때문에, 여당의 일부는 대통령과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 정부는이 소송에 대해 "주권 국가는 다른 국가의 재판권에 복종한다"고하는 "국제 법상 주권 면제의 원칙 '을 내걸었다. 주권 면제이므로 소송은 기각되어야한다는 입장을 외교 경로에서 한국 정부에 전달하고 재판 절차에 응하지 않았다.

이 소송의 원고는 대부분이 위안부 지원 시설 '나눔의 집'거주자였다. 같은 1 월에 판결이 선고 될 예정이었는데 서둘러 일정이 연기 된 또 다른 소송의 원고는 위안부 지원의 중심이되어왔다 정의 련이 지원하고 있다고 듣는다. 8 일에 판결이 내려진 소송은 1 억원, 또 다른 소송은 최대 2 억원의 배상을 요구하는 차이가있다. 그리고 8 일의 판결에 의하면, 그 손해 배상금 명목은 '위자료'이다. 징용 공 판결이 그랬던 것처럼,이 재판에서도 요구 한 것은 체불 임금 등이 아닌 "불법 점령 중이던 한 (조선) 반도 '(판결문)의'국민 '으로 입은'불법 행위 "에 대해 배상 이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일본 정부가 재판 자체를 거부 해 온 이유는 "국제 법상 주권 면제의 원칙"- 이른바 국가 면제 이외에도 2015 년 한일 협정과 1965 년 한일 협정 (참고 : 한국에서는 한일 기본 조약과 관련된 제반 협정의 것을 일반적으로 한일 협정이라고 부른다)이 있었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위안부 등에 의한 국내 소송에 관한 우리나라의 입장을 한국 정부에 전달"(8 일)의 제목에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한일간의 재산 · 청구권 문제는 1965 년 한일 청구권 · 경제 협력 협정으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 된 "에서"2015 년 한일 협정에서 "결국 돌이킬 수없는 해결"한일 양국 정부 사이에서 확인되지 "하므로 판결은"국제법 위반 "이라며"용납 할 수없는 취지 "를 언급하며"적절한 조치 "를 요구,

고있다.

일본의 입장은 원칙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 - "국가 주권 면제 '에 대해서는 판결 후 평가에도 있듯이'예외 '가있을 수 있다고 생각이 국제 사회에서 받아 들여지고있는 것이 사실 인 것 같다 ( 백 뽀무소쿠 "국제 인권 법적 시각에서 본 2016 가합 505092 손해 배상 (기) 사건 판결의 의미」 「자료집 202101181 차 토론회 일본 상대 손해 배상 청구 소송 재판 판결의 의미"). 이러한 생각이 받아 들여지는 것은 바람직이라고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추이는 국가가 개인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은 채 개인의 피해를 처리해온 과거를 극복 방향이라고 말할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일본이 그동안 다양한 노력을 해 온 것은 알고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재판 자체를 무효로 한 일본 정부가 그런 생각을 포함한 자신의 주장을 법원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과연 최선의 대응 이었는지 생각 수밖에 없다. 일본 정부가이 판결을 상대로 않았던 것은 한일 협정과 한일 합의를 무시하는 것 같은 한국의 사법부와 행정부에 대한 항의는되었을지도 모르지만, 한일 합의 내용이 아직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만큼 한국 사람들은 단순히 한국을 무시하고 오만한 행위로 비칠 수밖에 없다. 일본이 사죄를하고 있는지 모르고 일본은 한번도 사과도 보상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또한 일본이 적극적으로 마주 않은 이유로 그러한 '정직한 이유 "이상으로 지난 10 년 쌓여 온 한국에 대한 혐오도 근무했다면 그야말로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온 상대의 틀에 빠지게되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법원에서 일본의 주장을 이야기 한국 언론이 그것을 제대로 보도하고 있으면 적어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주장을 한국 사람들이 널리 아는 계기가 된 것이다. 혐한 사람들은 한국의 행동이 비합리적으로 보일 때 원래 그런 민족이라는 식으로 본질주의에 입각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실수 문제는 정확한 정보의 부재와 편향적인 해석에 이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이 무엇을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한국인은 아직도 적다는 현실을 일본은 잊어야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을 물려받은 판결

이번 재판은 2000 년 도쿄에서 열린 민중 법정,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을 계승 완수했다고도 말할 재판이었다. 즉 00 년의 도쿄 법정에는 실효성은 아니지만 쇼와 천황을 유죄로 선고하고 '전쟁 범죄자'로 21 년 서울 법원은 위안부들에게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을 명할 같은 판결 내용의 차이는 있어도 운동 측에서는 30 년 요구해온 얻어낸 첫 성과

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이다.

00 년 법정에서는 위안부의 다양한 체험이 "불법 행위" "전쟁 범죄"로 고소되었다. 그것은 조선인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을 이끌어 온 정의 련 (구 정대협)가 90 년대부터 몇 년 전까지 위안부 문제를 "전쟁 범죄"라고 호소 해 온 것과 일 맥상 통한다. 00 년 법정에서 구 유고 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의 소장과 르완다 국제 형사 법정의 참가자가 판검사로 재직 한 것도 그러한 파악하는 방법의 결과였다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 이외의 나라의 피해자도 포함 "전쟁 범죄"재판했기 때문에 그것은있을 수있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과 한국은 함께 "남북 공동 기소장 '을 만들어 제출하고, 조선 고유의

케이스를 호소하려 한 흔적이있다.

그러나 00 년 법정의 판결문은 "국제 공동 기소장에 대해서만 판단하는 것으로, 남북 공동 기소장 다른 케이스에 대해 별도의 판단을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의 조선 병합의 '불법 성 "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은 채 였다고한다 (이상趙時아키라 <조 시현>"2000 년 일본군 성 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과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 가능성 "동북아 역사 재단 편"한일간 역사 현안의 국제 법적 재조명」, 2009 년). 20 년 후 서울 중앙 지법의 재판은 조선인 위안부 만 원고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묻는 것이었다 때문에, 21 년 법정은 2000 년 법정에서 이루어 않았다는 것을 시도 재판이기도 했다.

그러나 판결의 전제가되는 것이다 "피해 사실」에는 차이가 많다. 판사들이 그렇게 한 것에 주목 한 흔적도 없다. 판결은 "위안부 동원"을 "폭행, 협박, 납치 해 강제로 동원」 「지역 유력 인사, 공무원, 학교 등을 통해 모집" ""취직시켜주는 많은 돈을 벌 "고 속여 모집」 「모집업자에게 위탁」 「근로 정신대, 공출 제도를 통한 동원 '를 이용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원고들의 경우는 실은 반드시 이러한 설명과 일치하지

셈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본 국가가 " '위안부'를 동원하는 과정에서 식민지로 점령 중이던 한 (조선) 반도에 살고 있던 원고 등을 납치하거나 납치하기도하고, 한 (조선) 반도의 밖으로 강제 이동시켜 원고를 위안소에 감금 한 채 항상 폭력, 고문, 성폭행 아래에 놓인 "라고 적고 있고, '식민지'상태를 '점령 기간"으로 본다 인식이 볼 수있다. 이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을 '불법 행위'라고하는 법적 논리를 이끌 기위한 것으로, 법적으로는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교전국"으로 본다 전제가 필요 때문이다 것이 관계자들의 문헌 등에서 확인할 수있다. 그렇다고 논리가 일관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판결은 전체적으로 "교전국 '의 논리에 의거하여'식민지 지배 '의 죄를 묻고있다. 운동을 지원하는

학문 "강제 연행"이해

하지만 그 근거가되는 것의 "강제 연행"관련 관계자들의 이해도 크게 변화하고있다. 예를 들어 최근의 '식민지 유곽 - 일본의 군대와 한반도」(金富子·金栄2018 년)과'성매매 제국 -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기저」(요시미 요시아키 2019 년 )의 존재는 그러한 변화의 세월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위안부'가 공창 (결착) 제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것을 인정하면서도 지금까지의 주장 - "강제 연행" "불법 행위"설 -이 취하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위안부를 둘러싼 상황 인식은 심화하면서도 이번에는 공창제 자체를 국가 책임으로 간주하고 문제 발생 초기의 주장 - 불법 행위 · 국가

가 책임 주장은 바꾸지 않았다이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90 년대에 유엔 등에 호소 해 획득 한 위안부 동원 = 군의 강제 연행하는 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국제 사회도 인정한 사실"이라고하는 주장이 자주 묻는 만 외부를 향해 강제 연행 설을 유지하고 내부적으로는 '공창제 = 성 노예 "라고하는 설을 바꾼 결과라고 할 수있다. 그것은 90 년대에 르완다와 구 유고 슬라비아에서 일어난 부족, 민족 사이의 강간 사건을 참조하면서, 그 폭력에 대해 열린 법정에서 "체계적인 강간 ''성 노예 '의 이해를 위안부 문제에 적용 (보鉉娥<(얀 현아> "2000 년 법정을 통해 본 피해자 증언과 법 언어의 만남 '동북아 역사 재단'한일 역사 현안의 국제 법적 증명 ', 2009 년)하고 의 것이며, 그것이 이번 판결이었다고 말할 수있을

것이다.

이번 판결도 위안부 피해자를 일본 국가가 "원고를 유괴하거나 납치하기도하고, 한 (조선) 반도 밖으로 강제 으로 이동시켜 원고를 위안소에 감금 한 채 항상 폭력, 고문, 성폭행 아래에 놓인 ""체계적 "행위의 결과로 이해하고있다."유괴 나 납치 ""감금 " "폭력"의 직접적이고 중심적인 주체가 군대가 아닌 업체였다가 어느 정도 알려져하면서도 이러한 판결이 된 것은, 그렇게 해석 할 수있는 다양한 법률을 동원한 때문이다 그 결과, 거기에서 열린 모든 행위는 '범죄'로 간주되며, 그 주체는 '일본 국가'로만 것이다.

무엇보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성적 억압, 폭력의 죄를 묻는 시도 자체 매우 평가 될 것이다.하지만 앞으로 언급하게 될 국가 책임의 물음 방법을 오로지 '법'에 따라, 책임 받게 방법을 "처벌"에두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 여성 국제 전범 법정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은 2000 년과 2001 년 위안부 제도의 범죄 성과 책임의 내용과 소재를 명확하게하고 피해자의 정의와 존엄의 회복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민간의 형태로 개최되었다. 시민 단체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일본 네트워크 피해국 지역의 지원 단체, 세계 각국의 인권 운동가에 의한 국제 자문위원회 3들로 구성된 국제 실행위원회가 주최 단체로 만들어졌다. 대상을 일본군의 성폭력에 대한 개인의 형사 책임과 국가의 책임, 전후 책임이 수석 판사를 구 유고 슬라비아 국제 형사 법정 전 소장이 수석 검사 중 하나를 동 법원과 르완다 국제 형사 법정 젠더 담당 법률 고문이 맡았다. 00 년 12 월 도쿄의 「법정」에서는 쇼와 천황에 유죄 일본 국가 책임이 있다고 판단, 2001 년 12 월 헤이그에서 발표 된 "최종 판결」에서는 천황과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을 유죄 일본 정부의 책임도 인정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보상을 권고했다.

∙ 구 유고 슬라비아 국제 형사 법정

유엔은 1990 년대 구 유고 슬라비아와 르완다와 그 이웃 나라에서 심각한 범죄 혐의를 기소 할 목적을 가진 두 국제 형사 재판소를 이사회의 보조 기관으로 설치했다. 구 유고 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는 1993 년 안전 보장 이사회에 의해 설립 된 91 년 이후 구 유고 슬라비아에서 집단 살해, 전쟁 범죄, 반 인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기소. 91 년부터 01 년에 걸쳐 161 명을 기소하고 90 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06
위안부 문제의 죄를 '일본' '국가'에만 집중시킨 판결의 문제점


일본 정부에 위안부들에 대한 배상을 명령 한 서울 중앙 지법 판결은 국가는 다른 국가의 재판권이 미치지 아니하는 국제법상의 "주권 면제"의 원칙을 인정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를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행해진 범죄 행위"라고 인정하고 기본적인 가치의 침해 등 어떠한 일탈도 허용되지 않는다 "강행 법규"라고 파악했다. 한국 · 세종대의朴裕河(박 유하) 교수는이 판결의 배후에는 전쟁 전의 일본과 조선을 "교전국"끼리 본다 법적 논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국가 범죄 '를 입증하려는 한국 사법의 움직임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는 것일까.


∙ ∙

일본과 조선을

"교전국 '이었다고 본다 논리

1 월 8 일에 내려진 서울 중앙 지방 법원의 판결문은 국가의 관리 책임을 묻기도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지만, 앞서 언급 한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교전국"으로 본다 외에 "내 남자"행위도 '국가의 책임'으로 물을 수있는 논리를 제공 하고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군인이 민간인에 대한 강간과 학살을하면 전쟁 범죄로 재판을 가능하게하려면 그 관계가 '교전국'끼리해야만했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관계자가 처벌 된 예로 자주 꼽히는 네덜란드 여성 강제 매춘시킨 군인을 처벌 한 예는 일본과 네덜란드가 교전국끼리 이니까 가능했던 것이다. 1 월 8 일 위안



위안부 소송의 판결이 최종적으로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점령'관계 - "교전국"끼리 간주하고있는 것도 바로이 때문이라고

るだろ것이다.

그리고 이번 판결은 1990 년대 초에 과거 청산을 목표로 한 지원자들이 30 년 동안 행동하고 생각하면서 만들어 온 논리가 주효 한 것으로해도 좋다. 즉, 위안부의 피해가 균일하지 않다는 것을 반드시 '강제 연행'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아무튼 일본이 주체가 된 '불법 행위'였음을 증명하는 대한 "법적 논리"가 만들어 온 지난 30 년의 운동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감금"의 주체가 직접적으로는 업체였다가 굳이 말하지 않고 기록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업체의 많은 위안부 전에 빚에 의해 구속하고 일해해야만했다. 도망 가지 않게 감시하고 있던 사람이 많이업자였던에는 그러한 사정도있다). 한편 군에 의한 위안부의 「감시」은 전장에서 군인의 개인 행동이 자유로운 아니라 탈주가 금지 한 것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다. "고문"로 불리는 폭행 - 신체적 학대에 대해서도 군인에 의한 것이없는 것은 아니지만, 증언 · 구술에 의한 한업자에 의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무엇보다 군인의 폭행은 기본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위반하면 '불법'으로 처벌되고 없어도 어떤 징계를받은 흔적도 존재한다 ( "군기 위반 사항 니 관 스루들보고」 「육군 군인 군속 비행 표"다른 여성을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편 "정부 조사 '종군 위안부'관련 자료 집성 2"龍渓書사, 1997 년).

즉 2021 년 서울 중앙 지법 판결은 위안부 피해 - 불행을 만든 '가해자'의 복잡성을 도외시하고 피해를 단순화하고 그 죄를 '일본' '국가'에만 집중시켰다 것이다. 문제는 일본 만 가해자로 단순화 된 판결이 지원자들이 주장하는 '재발 방지'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가부장제와 빈곤 문제도 위안부의 비극을 만든 중요한 원인으로, 비록 그러한 일의 책임을 일본에지지 할 수있다하더라도 그것을 "법"에서裁ける여부 별도로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판결은 '식민지 지배'의 죄를 물으면서 교전국의 틀을 사용한 결과, 식민지 통치를지지하는 가부장제와 식민지의 빈곤과 계급 착취의 문제에 눈을 감는 것으로되어 있었다.

판결문과 정부에 신고서, 증언집과의 차이

판결문이 말했다 "원고 등의 개인별 위안부 동원 과정 및 위안소 생활 '로 12 명의 경험 많은 위안부임을 정부에 신고했을 때의 이야기와 증언집을 위해 남긴 이야기와 상당히 다른 내용이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은 이러한 문제가 소홀히 못한 채왔다 결과라고 좋다.

예를 들어, 피해자로 먼저 이름이 나오는裵春공주 (배 츈히) 씨에 대한 판결은 "친구 집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찾아와 취직을 권유"하고 따라 갔다하고있다. 그러나裵씨는 스스로 직업 소개소에 갔다고 말한 사람이다 (裵春姫·朴裕河"일본군 위안부, 또 다른 목소리 '뿌리와이빠리 출판사, 2020 년). 그리고 "강제 연행은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裵씨가 남긴 그림도 다른 사람들이 그렸던 '강제 연행'의 흔적은 없다. 물론 그렇다고해서보기 평화로운 분위기의 그림이 그대로 위안소 생활이 행복 이었다는 것을 이어지지

는 않는다.

김 군자 씨는 "양부"에 의해 판매됐다고 위안부 지원 단체 "한국 헌신하지 않는 (헌신하지 않는) 대 문제 대책 협의회 (현 공정 C) '가 만든 증언집에 나와있다. 그러나 판결은 "군복 사람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중국으로 이동 한 것으로되어있다. 또한 여성이 도망 한 경우 (군인이 아닌) '주인 (업체)에 붙 잡혔다 "고 말했다. 그리고 1 일 40 명을 상대로 한 것이 군의 잔혹함을 강조하는 맥락에서만 말씀 쉽지만, 그러한 비참한 숫자를 만든 것은 군인뿐만 아니라 '위안부'를 '사용'うほど이윤을 창출하게된다 업체 적도 판결이 삭제되어있다. 판결이 국제 노동기구의 규약을 가져와 강조하는 '강제 노동'의 주체가 실은 업체였다 수 거기에서는 무시되고있는

것이다.

군이 주체 인 것처럼 쓰는 '낙태'도 그 주체는 '주인'였다고 김씨는 증언집에서 말했다 (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 위안부 위안부 3」, 한울, 1999). 하지만 일본군에 폭행 귀 고막이 파열 된 것은 증언집도 쓰여져 있기 때문에, 군은 '폭행'죄를 추궁 할 것이다. 물론이 경우에도 개인의 죄가 국가의 죄가되기위한 합당한 절차는 필요한 것이다.

C 씨의 경우 (공개 된 「판결문」은 원고의 이름을 일부 엎드려있다). "순경이 징용 서류를 가져와 끌려했다"고 판결문에 있지만, C 씨 추정 할 수있는 사람이 한국 정부의 여성 가족 성 낸 신고서에 의하면, 그녀를 보낸 것은 "이장 (최하급의 행정 구역의 길이) '이었다"형부 "이며,"보국 대에 송'진이라고되어있다. 이 사람은 영화 '鬼郷」의 등장 인물로 유명한 사람으로, 영화에 나오는'산에 데려가 구이 살해당한 위안부 '의 이야기는 장티푸스 - 전염병이 원인이었다 적이 신고서 및 증언집 (한국 정신대 연구소 편 「중국에 끌려 조선인 군 위안부

위안부들 2」, 한울, 2003 년)에 기록되어있다. 즉, 모든 비참한 이야기를 '국가 주체가 ""범법자 "'범죄 '로하려고 한 시도가 결과적으로 위안부 경험을 정확하게 듣지 않고 왜곡했다는 수밖에 없다. 판결문에서 다양한 과장이나 삭제는 바로 그 흔적 인 것이다.

D 씨의 경우 '납치'된 '수용소'에 감금되어 "전기 철조망 공사 현장에서 공사"를했다고 판결문은 말하지만, (위안부로 인정 받기위한) 신고서에는 납치와 감시 주체는 조선인과 일뿐 "공사"를했다고도 적혀 있지 않다. 아이가 낳을 수 없게 된 이유로 꼽힌다 "수은 치료 '를시킨 주체도 신고서는 군이 아닌업자 였다고 적혀있다. 또한 일본군에 "폭행 귀머거리됐다"고 판결문에 있지만, 신고서에는 폭행의 주체가 '조선인 경찰'이었다고한다. 위안부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이루어진 '폭행'은 '주인이 헌병을 불러'의 것이지 "주인이 감시하고 도망 어렵다" "주인이 쉬게했다"고 업체의 가해 성이 언급 된 것이다. 또한 판결문에는 30,40 명을 상대로 한 서면되지만, 신고서에는 "사람은 30,40 명"(자신이 적을 때는 10 명, 많을 때는 20 명)이다. "패전 후 업체 기다리고있어 라라고 도망"며 "유기"의 주체를 업체로 인식하고 있던 것도 신고서에 기록

되어있다.

E 씨의 경우 "친구의 권유로 공장에 갈 것이라고 생각 업체와 유지」 「1 일 15 명" "폭행"탈출 위안부 나 자살 위안부를 '목격'한 수 피해 사실로 언급하고 있지만, 신고서에는 "집이 가난 때문에 돈을 벌어 볼까"고 빈곤이 배경에 있었던 것이 명확하게 적혀있다. 또한 "군인이 여자들에게 폭행을 일거나하지는 않는다"며 패전 후에도 "관리인은 도망 군인은 (자동차에) 올려 주었다"라고 말했다.

F 씨의 경우 판결은 "공장에 가서 돈을 벌 듣고 붙어"하고는 "관리인은 조선인"에서 "상대 할 사람이 적다고 관리인 체벌된다" "장교가 빚을 갚아주고 나온 있지만 출산 후 스스로 돌아 "냈다고 밝혔다. 신고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으로 부모에 2 번 판매 한 경험을 말해, 후에 용서 생각되었지만 "부모를 죽이려고했다"라고 말했다. 도망을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남편이 잡는" "잡히면 죽는 때문"이며, 패전 후 "부대에서 전화가왔다. 대피하라 '고 말씀 하셨다이라고도 말했다. 판결에서는 기록되지 않은 업체의 역할과 가해 성을 부각하고, "유기"했다고하는 군의 행적이 반드시

성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고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꼽았다裵春姫씨는 일본 정부에 배상을 요구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면, '피해자 중심주의'의 '피해자'는 누구 인지도 재차 물어야 할 것이다 (이상 비교가 된 것은 우연히 이번 재판에서 원고들이 1 명을 제외하고 내 재판의 원고이며, 결과적으로 원고들의 서류를 법원에 제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채택한 사람 이외는 신고서가 법원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생략).

지금 이야말로 역사 대하는 방식을考え直そ입니다

즉 이번 판결은 처벌의 근거가되는 죄에 물어야한다 "피해"확인하지 못한 채 결론이 선행 판결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이런 일을 단순히 '위안부 사기」나 「지원자의 거짓말 "이라고 받아 들여야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수많은 사기 (사기)가 보여 지지만, 지금에 와서는 왜 이런 일이 일어 났는지 그러한 현재와 마주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생각 이야말로 중요하다.

판결문이 위안부의 피해를 「일본 국가 범죄 "로 간주하고"법적 책임 "을지지시키기 위해 내놓은 것은 만국 평화 회의 인 (판결의 논리는 일본이"교전 "당사자의 의무를 위반 - 가족 구성원의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이하 괄호 안은 판결의 논리). 그 외, 백인 노예 매매의 억제를위한 국제 협약 (성매매와 성매매를 목적으로하는 납치, 인신 매매를 금지하는 조항을 위반) 여성과 아동의 인신 매매 협약 (미성년 여성을 속여 납치 행위) 노예 약관의 노예 해방 규정 (유엔이 위안부를 성 노예로 간주 한 일본군에 의해 일부 또는 모든 권한 행사가 제한된) 국제 노동기구의 여성의 강제 노동을 폐지하는 조항 이전 형법 226 조 (유괴, 약취 죄를 공무원이 범 정부가 조장 방치) 등이다. 이러한 법적 논리의 적용을 주도 해 온 것은 반드시 한국 측 관계자가 아니다. 구체적인 논리를 지원 대전제이다 한일 합방의 성격에 관한 의문도 빨리 일본 측에서 나오고 있었다 (토 츠카悦朗"1905 년 <한국 보호 조약>의 무효 종군 위안부 · 강제 연행 문제의 행방」 「법학 세미나 "

NO466 1993 년 등).

판결문은 일본 국가가 위안부를 "속이거나 강제 연행하고」 「폭행」 「기아와 상해, 질병」 「죽음의 공포」(판결문)에 빠뜨리고 위안부들은"불법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의 수행과 직결 된 반 인도적 불법 행위를 전제로 위자료를 청구」(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위안소에서의 죽음과 전장에서의 폭격 죽음 외에 위안부를 둘러싼 가혹한 상황은 얼마든지 확인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전쟁을 일으켜 거기에 조선 사람들을 끌어 들인 일본의 책임은 크기

입니다.

하지만 판결이 근거로하고있는 피해 사실과 가해 주체에 관한 합의가없는 한,이 판결이 일본에 받아 들여지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괴리 현상이 '법'의지 '재판'이라는 형식으로 호소하고 승패를 결정 같은 역사 대하는 방식 때문에의 것이었다면, 지금은 그러한 '역사의 사법 화 '자체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논리가 도쿄 재판과 뉘른베르크 재판이 "노예화 등 비인간적 인 행위를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전쟁 범죄자를 소급 해 처벌"했다는 생각을 전제 하고 '전쟁'중에 수행 된 것을 참조 성립 된 개념 인 이상 조선과 일본의 과거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 하는가도 필수 작업해진다.

∙ 위안부의 강제 연행

위안부 모집시에 일본군이 직접 관여 한 '강제 연행'이 있었는지 여부 관리가 얼마나 강제이었다 여부가 오랜 문제가왔다. 일본군과 관헌이 위안부를 강제 연행 한 것을 나타내는 공문서는 아니지만, 일본군에 의한 소집의 공문서는있다. 위안부와 군인들의 증언과 기록, 해석에 따라 "광의의 강제성 '의 존재가 엿 보인다. 많은 위안부의 증언에 따르면, 업체의 감언, 기망 (ぎもう)에 의해 끌려 사실상 지배하에 놓인 사례가 많다. 피해 여성들은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초등 교육도받지 못하고 위안부 수밖에없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관리면에서도 관헌의 조직적 개입은 명확하지 않다. 단지 업체가 일상적인 업무를하고 있었다고해도 위안소 설치의 목적이 기밀 유지 및 성병 예방 이었기 때문에 위생 관리와 위안소 규칙 등을 통해 군의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 만국 평화 회의

1899 년 제 1 회 헤이그 평화 회의에서 체결 된 1907 년 제 2 회 헤이그 평화 회의에서 개정 된 전쟁 노 법규 관례 니 관 스루 조약. 만국 평화 회의로 약칭된다. 일본은 11 년에 비준했다. 구체적인 육전 법규는 부속 규칙에 맡길 수있다. 부속 규칙에는 포로의 취급 교전의 해 적 수단의 규제 점령지에서 점령의 의무 등을 규정하고있다. 조약 3 조는 교전 당사자는 그 군대 구성원의 모든 행위에 대해 책임을지지 부속 규칙의 조항을 위반 한 교전 당사자는 손해가 발생한 경우에는 배상 책임을 규정하고 있으며, 전후 보상 재판에서 그 해석이 쟁점이되어왔다.


07
국가 이익, 국가의 사정으로 동원되는 여성들


위안부 등 20 명이 일본 정부에 배상을 요구 한 소송에서 서울 중앙 지법은 21 일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동 법원은 1 월에 국가는 다른 국가의 재판권이 미치지 아니하는 국제법상의 "주권 면제"의 원칙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에 배상을 명하는 판결을 내고있어 사법 판단이 엇갈 렸다. 1 월의 판결문과 원고들이 위안부 것을 한국 정부에 신고했을 때의 이야기 나 증언집을 위해 남긴 말의 차이를 지적하는 한국 · 세종대의朴裕河(박 유하) 교수는 판결 내용을 계속 검토 한 후 2015 년 한일 협정을 보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 ∙

판결에 기록 된 위안부 피해 사실이 위안부에 의한 한국 정부에 신고시나 각자의 증언을 구술 집에 담긴 약 20 년 전의 내용과 다른 같은 것 이 일어난 이유를 "역사의 사법 화 '- 즉 법정에서 승부를 결정하려고 한 역사 대하는 방식에 있으면 이전 썼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과정을 바라 보면 위안부 둘러싸고 일어난 모든 것이 사법의 장에서 "법적"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되는 바와 같이, 많은 논의가 조립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21 세 이상 "창기 (쇼기)"아니면 해외로 여행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21 세 미만의 아동을 일한 것은 불법이라는 논쟁이있다 (일본 여자 과 아동의 인신 매매 협약을 비준 한 결과로). 그리고 한반도는 식민지이기 때문에 (식민지를 대상으로 위안부를 모집했다는 확인



식별이 일부 연구자의 뿌리에있는) 그러한 법률이 적용되지 않고, 미성년자를 많이 모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본토에 적용된 법률을 식민지에 적용하지 않은 것은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를 가진 다른 국가에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말하면, 그러한 논리를 사용하면 조선이라고 미성년자 모집이 오히려 불법으로한다.

거기서 제기 된 것이 위안부들이 '일본 령으로 인정받는 일본 선박'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에 "일본 제국의 조약의 적용」이 가능 (토 츠카悦朗" "위안부"대신 " 성 노예 "인"소남 2001 년)라고하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조선에서는 미성년 소녀가 모아지고 (그래서 피해자) 일본에서는 성년의 프로 게이머가 모아진 (그래서 피해자가 아니다)라고하는 이해를 학계에서조차 오랫동안 존속 시켰다.

마지막 쓴 판결문에 정리되어있는 여섯 법률 (만국 평화 회의, 백인 노예 매매의 억제를위한 국제 협약, 여성과 아동의 인신 매매 협약 등)의 적용에도 이러한 모순이 많이 보여진다 .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역시 "법적"에 문제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재판 과정이 피해자들에게 '삶의 보람'을주고 "먼지"(꽃송이 토시오 · 꽃송이 에미코 「관부 재판을 목표로 한 것 - 한국의 할머니들에 기대어 "白澤펴냄,現代書館출시 2021 년)을 준 것은 크게 평가해야한다. 그러나 결국 재판하는 방법은 피해자들이 원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1 월 서울 중앙 지법의 판결은 일본 정부가 거부하는 한 형태 만의 승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면, 역사를 둘러싼 판단 승패 결정하려고 한 것 자체가 지금은

져야 할 것이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두 번, 즉 1997 ~ 2002 년 아시아 여성 기금과 2015 년 한일 협정을 통해 사죄와 보상을 시도했다. 그것을 받아 들인 사람도 꽤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죄와 보상의 시도를 거부하여 얻은 결과가 보상 - 돈 밖에 없다고하면, 비록 그것이 "법적 책임"= 지원자들이 원했던 '배상'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해도 그것이 과연 당사자들이 바라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위안부 문제가 당사자와 지원자와 일본 정부 사이의 대화를 넘어 정치 · 외교 문제가되어, 정부에 압박을 목적으로하는 운동이되어 버린 결과 있다. 운동과 정치는 대중의지지를 원한다 때문에 위안부 문제도 거기에 맞추어 최대한 단순하고 자극적 인 내용으로되어 갔다 보인다. 왜냐하면 위안부 지원 단체 "한국 헌신하지 않는 (헌신하지 않는) 대 문제 대책 협의회 (현 공정 C) '가 90 년대에 낸 증언집을 바탕으로 2001 년에 발행 된 연구 보고서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산하의 전쟁과 여성 인권 센터, 2001 년 일본군 "위안부"연구 보고서 "일본군"위안부 "증언 통계 자료집」한국 정부 여성 가족 성)은 이후 한국 사회 널리 정착 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반의 이해와 반드시

든지 일치하지 않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안부를 데리고 갔다 주체로 가장 많았던 것은 "조선인 모집 업체"에서 일본 군인과 "가까운 관계"였던 사람이 20 % 이상 있었다고 있으며, 군사 훈련이나 간호 군인의 환송 을 경험 한 것도 제대로 "경험"으로 정리하고있다. 일본의 패전 후 위안부는 대부분 "버림받은"와 만 한국에서는 거듭 강조되지만, 군인의 "보호"와 "정보"를받은 사람이 15 % 있었음에도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위안부가 된 사람들의 빈곤과 문맹을 당시 식민지의 일반적인 사항으로 간주 식민지 전체에서 "무차별 모은"고 해석도 있었다. 즉, 지금까지의 통설을 벗어나는 통계를 보여 주면서도 해석은 기존의 '무차별 강제 연행'의 틀 범주 (범주) (실제로 "범주 화"를 연구해야한다고도 적혀있다 )에 넣으려고하고있다.

무시 망각 된 일본인 위안부

서울 중앙 지법 판결의 원고의 첫 증언에 위안부로 함께수록 썩은 "15 명 중 일본인이 6 명"(한국 정신대 연구회 편 「중국에 끌려 된 조선인 위안부들 2 "131, 한울, 2003) 있었다고 있듯이 일본인 위안부를 무시 망각되어 있던 것도, 위안부 문제의 이해를 크게 제한했다. 45 년의 패전 당시 주한 조선 일본인은 70 만 명으로되어있는 바와 같이, 한반도에 많은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이미 일본의 공창제의 이식이 위안부 제도를지지했다는 지적은 일찍부터 나와 있고 위안부가 된 일본인이 한반도에 있었다고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두고 생각한다면, 위안부의 모집을 둘러싼 이해는 매우 다른

있었던 것이다.

또는 일본인 위안부 입후보했다고하면 일본 국가와 위안부의 관계의 본질이 제국에 의한 식민지 사람의 동원 이상의 국가

들에 의해 개인의 동원에 있었던 것도 더 이해 된 것이다 . <법적 책임 = 배상>를 둘러싼 주장도 그 내용은 조금 달랐다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 (시로타すず子"마리아의 찬가"일본 기독교 단 출판국, 1971 년)가주의 있으면서도 일본인 위안부에 관한 연구서가 나온 것은 문제 발생에서 반세기 것들 세월이 지난 때의 일이었다. (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리서치 액션 센터 편, 니시노 루미코 ·小野沢아카네 책임 편집 '일본인'위안부 '- 애국심과 인신 매매 "現代書館2015 년).

즉 조선인 위안부를 둘러싼 혼란은 이들이 어디 까지나 "대체 일본인"(졸저 「제국의 위안부 '아사히 신문 출판, 2014 년)로 끌려 것으로, 완전히 무시되고 망각 된 때문에

의 이다.

관계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열린 것으로 규정 한 것은 1998 년 유엔 인권위원회 차별 방지 소수자 보호 소위원회에서 채택 된 특별 보고관 맥 두걸 씨 보고서와 90 년대에 구 유고 슬라비아에서 열린 '인종 청소 · 성폭력'의 성격을 도입 한 것이었다. 그러한 집단 성이 '반 인도적 범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인 위안부가 삭제 된 때문에 가능해진다 논리 것이다. 목표로하는 집단을 '국가 기관'(군대)이 공격 해 처음으로 '반 인도적 범죄'의 개념이 성립하는지

라다.

굳이 도식화한다면, 당사자의 목소리 일본의 학문, 한국의 운동이 지난 30 년의 위안부 문제를 이끌어왔다. 하지만 끝까지 군인이있는 전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 위안부의 수 누락 있었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의 이해는 단순화되어 버렸다.

그리고 관계자들은 조선인이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임을 알고하면서 군인 (일본)을 전쟁 범죄로 재판 때문에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점령'관계 조선인을 '교 전국의 국민 '으로 자리 매김하게 고집했다. 그런데 그것은 "한일 협정을 바로 잡기"(참고 : 한국에서는 한일 기본 조약과 관련된 제반 협정의 것을 일반적으로 한일 협정이라 함)하거나 "북한의 대일 협상력 (일조 국교 정상화 향한 협상력의 뜻) "(서 시환"2000 년 일본군 성 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과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 '동북아 역사 재단'한 · 일 역사 현안 국제 법적 증

아키라」, 2009 년)을 의식하면서 일도 있었다. 실제로 90 년대 초반의 일 국교 정상화 협상에서 북한은 "보상 문제를 해결할 때 교전국 사이의 배상 형태와 재산 청구권 형태의 두 가지를 적용한다 '는 입장을 이야기하고 있고 (신 엄정화 "북일 교섭"과거 청산 ""민족 문제 연구소 편 「한일 협정을 재검토」, 1995 년 아세아 문화사) 이전 만졌다 "교전국"개념은 실제로 북한이 스스로의

사랑으로ン티티로 강하게 의식하고있는 것을 알고있다.

그것은 국가 간의 문제로 해결되어야 아니므로 "주권 면제"를 부정했다 서울 중앙 지법 판결과도 일치한다. 위안부 문제가 30 년 동안 이어 우익 (우익) 곡절을 거쳐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 이상으로 길어 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까지는 단정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과거에 국가의 이익을 위해 동원 된 여성들이 다시금 국가의 사정으로 (구체적으로는 그것을 목표로 한 사람들의 의도에 의해) 다시 동원되어 있었다고하면, '인권'을 물어 온 것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은 과연 무엇 었는지

와 묻지 않을 수 없다.

위안부 문제는 냉전 붕괴 후 교류를하게 된 한일 시민뿐만 아니라 북한과의 교류의 영향도 받고있는 것 같다. 물론 그 자체가 문제 것은 아니라 생각해야는 이미 일본의 지원 단체가 지적했듯이, 오늘의 위안부 문제의 국제 이해의 토대를 만든 유엔위한 증언에서도 북한의 위안부 이 "너무 무시 무시한" "너무 이질적인 증언 '에서"북한 정부의 역사 인식을 말하게 된 것이 아닐까 위기'하는 내용 (전출 「세키

솥 재판이 목표로 한 것 ")와 되어 있던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65 년 한일 협정 체제의 한계도 알고 있고, 적어도 일조 국교 정상화 때 이러한 문제가 남지 않는 것을 바라고있다. 그러나 금지みなそ하려는 의식이 위안부 문제를 과장이나 왜곡의 대상으로 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면, 일본의 지원 단체들도 즐겨 사용해온 '당사자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을 음미 다시 할 것이다. 원래 피해자는 한

様도 없었다.

사실 큰 문제가 된 '강제 연행'이라는 말에 대해 관계자들은 내부에서 논의하고있다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한일 공동 세미나 '강제성이란 무엇인가」2007 년). 거기에서는 일본의 연구자, 요시미 요시아키 씨도 한국의 지원자들과 한자리에 모여 '강제

성 "을 어떻게 정의하면 좋은 것인지 논의하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같은 장소에서 위안부는 "군속"봐야한다는 의견도 나오고있다. 원래, 한국 정부에 위안부 였음을 신고 할 때 자신을 스스로 '군속'으로 쓴 사람도 한 것도이 자리에서 이야기

되고있다.

위안부는 반드시 모든 장소는 아니지만 "군속"인증서를 부여했다는 (華公平"종군 위안소"바다乃家"의 전언 - 해군 특수 해병대 지정 위안부들 ' 일본 기관지 출판 센터, 1992 년). "군속"라고하면, 매춘부 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성 노예 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반발 할지도 모르지만, 위안부로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 한 소송의 원고 중 한 명으로 96 년 사망文玉珠(문 오쿠츄) 씨도 스스로를 '군속'으로 간주했다. 우파 사람들은 문씨에 상당한 저축이 있었던 돈을 벌 수있는 증거라고 거기 만 주목했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가 아니다. 문씨가 군인과 함께 이동되고, 이동 중에 위안부 피해자가 나온다고 화장을 지시하고 '일본인'으로 전장에와있는 자신이 폭력을 부진 이유가 없다고 군인에 항의 같은 존재 였다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 그러나 지원 단체는 것을 알면서도 적어도 외부 용으로는 그렇게 한 것을 삭제했다.

더 빨리 위안부 문제를 한국 사회에 널리 알린 한국 정신대 대책 협의회 대표도 군인 위안부 사이에 "인간과 인간의 공포

서로"가 있었다는 것을 쓰고 있었다 (90 년 1 월 24 일자 <한겨레 신문」). 90 년대에는 위안부의 영혼 결혼식 것이 보통 신문에 실려 있었다 (98 년 8 월 27 일자 「중앙 일보」. 위안 위안 척容洙씨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후 죽은 특공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대만의 원래 위안소를 찾아 열렸다). 그러나 00 년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을 경계로 그러한 인식은 더 이상 공개적으로 나오지

게끔했던 것이다.

그리고 11 년에는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에 '강제로 끌려 된 소녀 "상이 서 16 년에는 소녀들이 무차별 강간의 대상이되고있는 영화'鬼郷"이 공개되어 300 만명 이상의 사람이보고 위안부를 둘러싼 강제 연행과 학살의 '기억'만 이후 한국의 위안부의 '공적 기억'이된다.

판결도 언급하지 않았다 착취 한 업체의 존재

00 년 여성 국제 전범 법정에서는 남북 공동 기소장에서 "강제 동원에 협력 한 조선인들을 기소에 넣으려고 한 의견"이 있으면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たいう(전술 '2000 년 일본군 성 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과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 "). 즉, 관계자들이 업체의 존재를 일찍부터인지하고 공유하고 있었는데, 그 후 20 년 동안 업체의 연구는 진행되지 않고, 기소도하지 않고 서울 중앙 지법 판결이 업체를 잡아도 마침내 없었다. 대신 업체의 존재를 지적했다 학자는 일본의 죄를 면죄

하는 것과 비난 한 것이다.

그러나 업체는 폭행의 주요 주체였다뿐만 아니라, 위안부 착취하고 경제적 이익을받은 존재이기도했다. 많은 위안부 수입의 절반 정도를 가지고 구조 속에으니 위안부의 고통은 그대로업자의 이익되었다. 일본에서는 조선인 업체 만言い募り쉽상이지만, 당연히 일본인업자의 존재도 증언이나 자료에서 보이고, 대규모 위안소를 운영하고 있던 것은 오히려 일본인업자처럼 보인다. 일본 내지에 유곽을 17도 경영하고 있고, 또한 부산 유곽을 내놓은 업체도 있었다 (전출 '일본인'위안부 '- 애국심과 인신 매매 "). 실제로 점령지의 "생활 상태는 대개 부자이며, 또한 일支事변수에 의해 절반 이상은 막대한 것으로 막대한 물질을 축적했다"고 설명했다. 다양한에있는 직종 중에서도 "가장 경기가 좋은 것은 위안 소행"( 「무한의 조선 동포 '1940 년 5 월 1 일 「삼천리」제 12 권 5 호,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에서 무게 할인) 라고 언급했던 것이다.

∙ 관부 재판

제 2 차 세계 대전 동안 위안부와 여자 근로 헌신하지 않는 대원으로서 강제적으로 일했다로 한국인 여성 10 명이 나라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부산 종군 위안부 · 여자 근로 정신대 공식 사죄 등 청구 사건」, 통칭 「관부 재판」에서 야마구치 지방 법원 시모노세키 지부는 1998 년 4 월, 위안부 3 명에 대해 93 년의 고노 요헤이 관방 장관 담화를 통해 위안부의 배상 입법은 헌법상의 의무가 로서 국가의 불법을 일부 인정, 합계 90 만엔의 지불을 명했다. 그 후, 2001 년 3 월에 히로시마 고등 법원 항소심 판결은 원고들의 손해 배상 청구를 모두 기각 2003 년 3 월 대법원에서 원고들의 패소가 확정됐다. 원고를 오랫동안 계속 유지 후쿠오카시의 꽃송이 토시오 씨와 아내 에미코 씨는 올해 2 월 피해자의 존엄 회복에 마주한 28 년간의 활동을 기록한 저서 「관부 재판을 목표로 한 것 - 한국의 할머니 우리에 기대어」

(白澤펴냄,現代書館발매)을 간행했다.

∙ 일본인 위안부

"디지털 기념관 위안부 문제와 아시아 여성 기금 '은 위안부를"과거의 전쟁의 시대에 일정 기간 일본군의 위안소 등에 모으고 장병에게 성적 봉사를 강요 여성들 "이라고 정의한다. 그 실수는 불명하지만, 최대 40 만 명, 최소 1 만 수천 명 등의 연구자에 의한 시산이있다. 국가에 대한 현대 역사의秦郁히코 씨는 내지 인 (일본인)이 최다 2 위 현지인 (중국인, 필리핀 등), 3 위 조선인 - 추정하고있다. 일본인 위안부가 관심 밖으로 유지되어 온 이유는 공창 제도 아래에 "장사이기 때문에 피해자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된다. 최근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 지배와 전쟁 범죄의 틀에서 파악 움직임을 볼 수 한편, 일본인 위안부는 전후 보상 문제도 실태 조사되지 않았다.






08
필요한 것은 지난 30 년의 역사 대하는 방식의 검증


한 명의 한국인 피해자가 1991 년에 처음 본명을 밝히고 일본을 고발 한 이래, 위안부 문제 해결을위한 지원자들은 일본 국가의 '법적 책임'을 추구 해왔다. 한일 양국 정부도 각각의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모색 해왔다. 그러나 처음에는 피해 실태 파악이 지연 일본인 위안부 나 업체의 연구는 거의 진행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위를 근거로 한국 · 세종대의朴裕河(박 유하) 교수는 지금 필요한 것은 75 년 전 역사의 검증 이상으로 위안부 문제가 다시 발견 된 이후 "30 년의 역사와 마주 분과 검증하다 "고 호소한다.


∙ ∙

일본의 지원과 한국의 지원 단체가 협력 해 위안부 문제를 국제 사회에 호소 전장의 성폭력 문제를 크게 어필하여 지금은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 를 공유 할 수있게 된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한다. 그러나 "법"에 따라, 위안부 둘러싸고 일어난 일을 모두 "법률 위반"고하려고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사기 (사기)과 문제가 일어난 것은 확실하다. 최근 한국에서 열린 몇몇 회의에서 "처음에는 운동부터 시작한 것이지만, 연구를 시작해 보면 이건 좀 다르지 말아라라고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 지금까지 뒤죽박죽되어 있었다"(강 김정숙 심포지엄 '3 · 12 긴급 토론회 - 라무자이야 교수 소란 본 아카데미 역사 부정론')와 참가자가 중얼 거렸다 수 있었다. 더 빨리, 그리고 공개적으로 말한 후 지금과 같은 혼란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필요한



75 년전의 역사 대하는 방식 이상으로 지난 30 년의 역사 대하는 방식의 검증 된 것이 아닌가.

"어둠의 사람 '으로 전락 거의 보이지 않는 당사자들

즉, 지난 30 년 일본인 위안부 나 업체가 배제되면서 30 년이었다고 할 수있다. 가해 국의 피해자도 피해국의 가해자도 그것을 시각화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선과 악 "당사자"권한을 취득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1990 년대 아시아 여성 기금을 받아 들인 사람들과 2015 년 한일 협정을 받아 들인 35 명과 유족 64 명 (沈揆대상 '위안부 운동 성소에서 광장」나남, 2021 년) 예 아직 이름 이 밝혀지지 않고 「어둠의 사람」로 바뀌고있는 것도 생각해야한다. 당사자들은 목소리를 발하고 시작된 것 위안부 문제가 30 년 후에는 대부분의 당사자가 보이지 않고 대변자와 함께있는 당사자 만이 보이고있는 것이다. 죽은 것만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아니다.

00 년 이후의 사회의 집단 기억이 연구자의보고와는 다른 형태로 정착 공적 기억이 갔다는 위안부 지원 단체 "한국 헌신하지 않는 (헌신하지 않는) 대 문제 대책 협의회 (현 공정 C) "대표의 첫 번째 이해의 틀 영향처럼도 보인다. 어쨌든도 2000 년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은 90 년대를 망각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할 수있다. 그리고 90 년대에는 아직도 "씨"지정으로 불리고 있던 위안부들은 할머니라고 유교적인 경로 적 감수성과 가족 같은 친밀감이 더해져 그 주체성을 꺼 그냥 지켜야 할 존재 로만 처리 할 수있게되었다. 한국 헌법 재판소에 나와 있던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 헌법 위반 소송에서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하지 않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는 판결을 받아 정부가 11 년 이후 지원 단체와 생각 과 행동을 함께하게 된

것은 생각하면 이러한 시대의 흐름이 만든 것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지난 30 년 옛 종주국 측에 있어서도 옛 식민지 측의 과거 대하는 방식은 피해자 측이 이상적으로 한 해결의 모양에 맞게 선택적인 것이었다. 그런 일의 결과 이야말로 오늘의 혼란을 초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논의는 미국 에까지 퍼졌다.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 "고 규정 한으로 주목을 받고있는 미 하버드 대 라무자이야 교수의 논문을 둘러싼 혼란도 이런 일의 결과 일 것이다. 라무자이야 교수는 위안부 (과 주변 인물)와 공급자 사이에 체결 된 계약을 강조하고 있지만, 비록 계약 관계가 있었다고해도 그것이 그대로 '자발적'의 증거가되는 것 이 아니다. 속아서 간 사람들은 계약 (서)의 존재 등 몰랐다 호적이나 계약서를 위조 한 업체는 많았다 (한국 · 경성 지방 법원 판결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연구보고 '일본 군 "위안부"신문 기사 자료집」한국 여성 성, 2004 년 참조)에서이다.

반대로, 라무자이야 교수를 비판하고있는 관계자들이 위안부와 공창 (결착) 제 관계에 공공 장소에서 접하게되는 현실도 무시할 수는 없다. 연구자는 그런 거를 만지는 것에 대한 우려의 시선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지만 (박 죤에 심포지엄 '3 · 12 긴급 토론회 - 라무자이야 교수 소란 본 아카데미 역사 부정론'), 그것도 세계를 혼란시키고있는 것이다.

지원자들은 지금은 공창제를 운영하는 것 자체가 불법으로 일본 국가의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논리 자체도 검증 대상이지만, 그 이전에 그러한 것을 빨리 인식하고 있으면서 덮을 온 배경에 있었을 지원자들의 '성매매'차별도 논의 돼야한다.

전 징용 공 문제가 그러 하듯이 위안부 문제도 법적 해결을 요구하게되면 한일 합방 자체의 합법적 · 불법 론으로 대립하게된다. 이것은 이제 접점을 발견 할 문제 겠지만, 그것은 당연히 시간을 요한다. 라면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이러한 논의는 선반에 올려 부랴 부랴 해결책을 생각해야한다. 이대로 모든 위안부가 죽으면 한일간의 깊은 가시가 더 이상 뺄 수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문제'가 부상하고 연구가 뒤쫓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가장 큰 문제는 연구라고 할 정도의 축적이별로없는 가운데 갑자기 이것이 "문제"로 부상하고 연구가 뒤쫓하게 점 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갈등도 있었지만, 15 년 한일 협정은 한일 외교 관계자가 "메이지 일본의 산업 혁명 유산 '의 문제로 한일 관계가 꼬인 것 같았다 것을 넘어 이끌어 낸 것이었다.

그리고 90 년대 아시아 여성 기금 '속죄 금'이 민간에서 모금으로 충당 한 것을 비판 한 데 따른 국고에서 전액을 기부했다. 지난번, 와다 하루키 교수 등 일본의 지식인들이 새로운 솔루션으로 합의 내용을 문서로 일본의 주한 대사가 직접 전달할 것을 제안했다. 한일 협정을 주도한 아베 신조 정권을 인수菅義웨이 정권에서 이러한 보완 작업을하고 '화해 · 치유 재단'을 해산 해 버린 한국의 문재인 (문재인) 대통령이 복구 있다면 의미가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때 한일 양국 정부는 지금까지 30 년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대립의 역사를 함께 읽어함으로써 국민과 역사를 공유 할 수 있도록하면 좋을 것이다. 수많은 갈등과 대립이있는 가운데 한일 지원 · 연구자들의 노력을 구체적으로 칭찬 1995 년 아시아 여성 기금을 설립하고 노력한 발기인들과 응답 한 일본 국민의 마음도 소개 하고 한국 외무성과 일본 외무성의 노력도 치하한다. 그리고 아시아 여성 기금과 '화해 · 치유 재단'에서 보상 금 등을받은 사람들의 인원수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있다면 이름도 읽을 것으로, 그녀들의 행방 만들기 작업도 가면 좋은 것이다.

30 년 동안 위안부 문제에 관련된 사람들은 수없이 모두 각각의 자리에서 위안부의 처지에 마음 아파 마음을 기울여왔다. 그 사람들의 노고도 치하하고 처음 위안부 문제는 미래로 향하는 역사이 될 수있는 것이다. 그것은 위안부들뿐만 아니라 관련된 사람들도 다양하게 상처 왔기 때문 그러한 가까운 과거도 치유하고 처음 이전 갈 것 같은 것이다.

한국 대통령은 일본 측의 노력도 인정하고 일본 측은 "화해 · 유야 재

단 '에서 부족했던 것을 보완한다고 명언해야하나요 (예를 들어, 일본은 아시아 여성 기금 때는 직접하던 전달 또는 애프터 케어를 한국 측에 맡겨 버렸다). 아시아 여성 기금과 한일 협정까지의 경과도 개봉하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위안부 분들

을 참여시켜 않았던 것도 사죄한다.

위안부 문제를 "결국 돌이킬 해결"그러자 한일 동의를 받아 기자의 질문에 대답 아베 신조 총리 (당시) = 총리 관저에서

2015 년 12 월 28 일, 야마모토 진 촬영 확대

위안부 문제 을 "최종적이고 돌이킬 해결"그러자 한일 동의를 받아 기자의 질문에 대답 아베 신조 총리 (당시) = 총리 관저에서

2015 년 12 월 28 일, 야마모토 진 촬영

그러한 공적 이벤트와 함께 " 화해 · 치유 재단 '을 재생시켜 남은 돈을 사용하여 아직까지받지 못한 분들은 한일 정부 관계자가 지금까지 일을 함께 전해 받아 줄 수 있도록 시도하고 더 남아 돈은 연구 및 기타 필요한 사업

에 사용하면 좋다.

한국이 마련한 100 억원 (약 10 억엔)은 별도 재단을 만들고 한일 화해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이전 징용 공 문제를 포함, 앞으로 더 나올지도 모른다 문제에 대응할 수 있도록하면 좋을 것이다 . 이러한 작업을 한국뿐만 아니라 한일 관계자가 "함께"모

소피 해 나갈 수 있도록하면 좋다.

거기에서는 업체와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연구도 반드시 실시하고 싶어요. 여러가지 혼란이 생긴 것은 위안부 문제에 분명히 존재 그, 그녀들에 대한 연구가 30 년 누락 한 채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때문이다. 그들이 할 때 처음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인권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일을한다면 과거의 역사 공동 연구의 틀 (테츠)을 밟지 않도록 인선도 신중하게 이루어져야한다. 자국의 생각을 밀어 붙이는 것만으로는 이해는 태어나지 않는다. 이런 일을하고 더 이상 위안부가 정치와 외교의 대상이되지 않고, 1 명의 개인으로서 여생을 조용히 살게하도록 배려하는 것을 모색했다

있었다.

이제 포기와 침묵과 비난을 그만 대화를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그것은 위안부와 차세대 때문 있고, 대립의 30 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책임이기도하다.

∙ 라무자이야 논문

미국 하버드 대 로스쿨의 J · 마크 라무자이야 교수가 쓴 논문 「태평양 전쟁에서 성행위 계약」이 2020 년 12 월 국제 학술지 '법 경제학의 국제 리뷰'온라인 판에 게재 된 했다. 교수는 위안부에 대해 "높은 수익이 기대되는 경우에만 작업에 띄었다. 계약 기간을 완료하거나 부채를 상환하면 귀가 할 수 있었다"라고 쓰고있다. 이에 대해 한국의 각료가 '연구자로서의 기본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내용 "이라고 비판했다. 일본의 역사 연구자의 4 단체가 「선행 연구를 무시하고있다 "며"업체와 조선인 위안부의 계약서를 보여 없다 "등으로 학술지에서 게재 철회를 요구하는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대학 라이 샤워 일본 연구소도 학문적 근거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 와다 하루키들의 새로운 제안

한일 관계와 전후 보상 문제를 해결할 일본의 연구자와 변호사가 3 월 24 일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 우리는 이렇게 생각"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 교수와 다나카 히로시 ·一橋大명예 교수 등 8 명으로 피해자의 "마음에와 닿는 성실한 사과 '가 필요하다고 일본 정부에 호소했다. 서울 중앙 지법이 한국인 위안부에 대한 배상을 일본 정부에 명령 판결은 인권을 우선하는 '국제법의 최근의 생각을 반영한 판결 "이라고 평가하면서"판결에 의해 즉시 역사 문제 이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고 유보를 달았다.

2015 년 한일 협정에 나타난 아베 총리 (당시)의 '사과와 반성의 마음 "을 기술하고 간 총리가 서명 한 일본의 주한 대사가 위안부에게 전달하도록 제안.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고 계속 증거 씨가 될 연구소 설립을위한 한일 양국 정부가 협의하도록 요구했다.


09
'정의'에 억압 된 목소리 내지 못한 채 사망 한 피해자를 생각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국 사법부의 판단은 양분되었다. 위안부 여성들이 일본 정부에 배상을 요구 한 제 2 차 소송에서 서울 중앙 지방 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 동 법원은 지난 1 월 일본 정부에 배상을 명령했다 제 1 차 소송 판결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제 2 차 소송 판결에서 일본 정부의 입장이 받아 들여졌다 원고 측은 판결에 불복 해 항소 소송은 장기화 될 전망이다. 한국 · 세종대의朴裕河(박 유하) 교수는 "두 사법 판단"을 검토하고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파악 못한 논리에 경종을 울린다.


∙ ∙

피해자 본인이 거의 없다

"원고"분열도

지난달 위안부에 의한 일본 국가 상대의 또 다른 소송 판결이 서울 중앙 지법에서 나왔다. 1 월의 판결의 원고가 주로 위안부 지원 시설 '나눔의 집'의 거주자였던 것에 비해, 4 월에 판결이 나온 소송은 "일본군 성 노예 문제 해결을위한 정의 기억 연대 '(정의 연속. 구 한국 헌신하지 않는 = 헌신하지 않는 = 군단 문제 대책 협의회, 정대협) 측이

주도한 것으로 듣는다.

"피해자"라고 기록 된 16 명 중 판결 시점에서 생존자가 4 명 밖에 없기 때문에 이제 실제 "원고"거의 유족과 양자 인 것이지만, 그 중 한 사람은 "(사)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라고 기록되어있다 (4 월 21 일자 아사히 신문 인터넷 판 기사는이 시대



표했다 윤 미카 = 윤미향 = 국회의원이 "위안부 금福童(김 보쿠톤) 씨 승계인 "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김씨는 생존 당시부터 장학금으로 재산을 기부 해 왔기 때문에, 지원 단체 사람에게 "원고 승계인"의 자격을 건넨 것은있을 수있는 일이다. 그러나 횡령 혐의로 불구속 기소 된 윤씨에 일본의 "배상금"을 추구 자격이 나오 있는지 생각한다

밀랍.

게다가 판결문에 사망자로 기록되고있다 "피해자"12 명을 대리 한 "원고"중 성조차 기록되지 않은 사람이 5 명이나된다. 이 소송은 원고 측이 승소하면 누가 그것을받을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진행되어왔다. 요구하는 손해 배상액은 1 월 소송의 2 배로 2 억원 (약 2900 만엔)이다.

"피해자"본인이 거의 없다 "원고"들은 패소 5 월 6 일 판결에 불복 해 서울 고등 법원에 항소했다. 제 1 심 판결문에서 "피해자"가 16 명이었다 반해 공소 참가자는 12 명이라고한다. 이 곳 지원 단체의 분열이 눈에 띄는 데, '원고'들도 분열하기 시작하고있는 것 같다.

또한 계속되는 소송 관계자에 의한 비난, 갈등

4 월의 판결은 위안부 문제 소송을 주권 면제의 예외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점에서 1 월의 판결과는 정반대라고했다. 확실히 "주권 국가는 다른 나라의 법원에서 심판한다"는 주권 면제를 둘러싼 사고를 비롯해 1 월의 판결과는 다른 사고 방식이 곳곳에서 확인할 수있다. 그렇다고해서 위안부 문제 자체에 대한 생각이 1 월의 판결과 근본적으로 차이가있는 것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지만, 그렇지만큼 이미 나와있는 것처럼, 관계자들의 비판, 비난이나 그 이후 소송과 갈등은 계속 될 것이다.

4 월 판결은 주권 면제의 예외는 아직 국제 관습법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위안부 문제가 주권 면제의 예외를 적용해야 "중대한 인권 침해"며 원고에게 중대한 여부 심리 하고 처음으로 알 것으로, 그러한 판단을 "관할권 존부의 판단 기준」라고 할 수 없다고했다. 또한 한반도 (조선 반도를 가리킴)는 현실에 (일본의) 교전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일본을 외국으로 간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을) 주권 면제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한 원고 측의 주장에 대해 위안부 문제는 "법정 국가의 영토 (조선 · 한국) 내에서 무력 충돌 과정에서 외국 군대 또는 그와 협력하는 외국의 국가 기관에 의해 만들어진" "주권 적 행위" 간주했다. 이러한 인식에서 일본을 주권 면제 인정

된 것이다.

또한 2015 년 한일 합의는 정치적 합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원고 측에 대해 17 년에 나온 한국 외교 실무 그룹의 한일 협정 검증 보고서를 바탕으로 "피해자의 의견 수렴 (수련) "는 있었다고 한일 합의를"대체적인 권리 구제 수단 "이라고 인정하고 새로운 조치를 찾아가는 것을 제안하기도했다.

원래,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을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 재판소의 결정 이후 한국 외무부가 달린 결과 이야말로 한일 협정 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이 판결은 타당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 자체에 대해서는 "피고의 군대의 요청에 따라 조선 총독부가 각 지자체에 인원을 할당하고 지역 경찰이 업체를 선정하여 보내진」 「행정 조직 · 지역 조직이 동원 (위안부 피해자) 전체의 80 %가 조선의 여성이었다 "는 원고 측의 주장 그대로 위안부 문제를 '불법 행위'라고 인식하고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의 판결이 어떤 것이 될지라도, 위안부 문제의 본

질을 파악한 것으로는되지 않을 것이다.

약 30 년 동안 위안부 문제의 연구가 있으면서 (법원이 80 %로 인식) 조선인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물론, 그 숫자조차도 학계에서 정설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판결은 "10 만 ~ 20 만명"설을 끌고 있고, 몇 가지 이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숫자를 원고 측이 채용 한 것을 알 수있다. 게다가이 수치는 가장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온 일본의 학설이 아니라 '북한'이 계산 한 숫자 (토 츠카悦朗""위안부 "대신"성 노예 "인"지적 개소의 주석에 <조선인 강제 연행 진상 조사단 편 「검증 · 조선 식민지 지배와 보상 문제」아카시 서점 1992>을들 수있다)도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이 위안부 모집의 주체가 공급자임을 일찌감치 눈치 채지하면서 후속 연구와 운동은 업체의 존재를捨象하고 연행에서 징집 동원 등과 말만 바꿔 하거나 "강제성"의 의미를 바꾸거나하여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세계의 인식'을 만들어왔다. 법원이 증언집 등은 오히려 소수이다 "군대에 의한 (강제) 직접 동원"(그것 많은 군복이나 국민 복을 착용 한 유괴범이나업자로 간주)라고 적고 그 것을 중심적인 사실과하고있는 것도 그러한 '상식'에 의거하여 온 결과 일 것이다. 하지만 법원뿐만 아니라 유엔 보고서 및 판결에 나타난 피해 사실이 많이 실제 체험과는 거리만큼

분리되는 것이되어 있었던 것이 여기에서 덮을 수있다 (김福童씨의 경우도 사망 당시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가 내놓은

내력 증언 내용은 다르다).

4 월의 판결도 "불법 식민지 지배 '라는 전제를 바탕으로"피고 (일본) 소속의 경찰 또는 그들의 지시를받은 자들의 취업 사기, 협박, 납치 등 불법적 인 방법」라는 인식을 보인 것은 원고 측의 불만을 그대로 인용 한 결과 일 것이다. 일본 측이 대응하지 않은 결과라고해도 그러한 인식은 초기 위안부 문제가 "별다른 연구가없는 가운데, 피해자의 공개 증언, 재판 등이 급속하게 확장하고 국제적 논의 등이 진행 그리고, 실제로 충분한 역사적 토대 위에 서있는 법적 논의가 진행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강 김정숙"한국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법 관련 연구의 동향과 역사 인식」김 케이이치 외 「동아시아 일본군 위안부 연구 "한국학 중앙 연구원 출판부, 2017)의 결과 인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은 아직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를 "조직" "체계적"인 "제도 = 국가 행위"라고 주장 해 온 원고 측이 이번 소송에서 위안부 동원을 "사법 행위"(상업 행위)로 간주 한 것은 국가 의 "주권 행위"이면 (불법이라하더라도) 주권 면제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취한 전략 일 것이다. 이런 것도 오로지 "역사의 사법 화 '가 가져온 결과라고 할 수있다.

판결 후 반발은 "사안 (대상)에 맞게 적용을 결정한다」 「피해의 성격과 의미에 주목해야한다"<보鉉娥(양 현아), 제 2 차 소송 판결 제 1 회 토론회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판결 기각 판결, 어떻게 볼 것인가 '자료집 동> 어떤 같이 지금까지의 관례에서 위안부는 예외로해야하며, 그 이유는" 인권 침해 '이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이 눈에 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야말로 인권 침해의 내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호소해야는 없었나.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의 회장도 맡고있다 법학자 보鉉娥씨의 경우, 위안부 문제를 "사기와 위력에 의해 강제 동원"했다고 인식하고 그곳을 잠시 보류하면 적어도 식민지 지배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교전국"논리의 모순

이 알고있는 것 같다.

실제로 보鉉娥씨는 "일본군이 외국에 해당한다고 표명은 매우 심각한 언명" "(조선은) 일본의 차별받는 국민의 일부」 「국적법 등의 적용이 배제되는 부족한 상태와 는해도 현재까지 유효한 법원과 행정의 판단이 나와 있으며, (식민지가 - 필자 주) 소유 관계가 맺어진시기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것은



들을 모두 무효 화 할 수 없다고하면, 당시의 '식민지 적 법치 상태'에 대한 별도의 논급이 필요」 「식민지라는 강점에 의한 법적 군사적 정치적 지배가 이루어진 점에 기인한다 것이 본 손해 배상의 피해 사실 "이라며 핵심을하고있다. 이러한 인식 이야말로 향후 공유 가야 올바른 방향 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30 년 동안 국제 사회를 향한 운동에서 "교전국 '논리를 사용하면서 현대의 다른 성폭력 피해와 동일시하는 운동의 방식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 관계자 스스로의 반성이 있어야만 앞으로의 혼란을 막을 것이다.

단, 반드시 위안부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러한 방향 설정은 물론 관계자들에 의한 것이다) 유엔의 권고를 내걸고 "실정법 위반" "불법 행위"로 간주 근거하고 있음 "대량 학살, 노예, 인종 차별"을 언급하고 그들과 위안부 문제 같은 문제가있는 것처럼 보이게하는 것, 또한 일본의 혐한 감정의 도화선이되었다고 말할 2000 년 여성 국제 전범 법정 (보鉉娥씨 자신이 법정에 검사로 참여했다)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는지를 보는 한, 식민지 문제로 문제 제기가 곧 기대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 오랫동안 관여 해 온 또 한 명의 법학자,金昌禄(김 챤노쿠) 씨는 "한국 법원이 국제법 심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해야한다"며 "인권 대국 '자체를 목적으로 돌고래와 같은 모습 마저 내 비치고있다.

"(일본이 출연 한) 10 억 엔을 돌려 한일 협정을 파기하라"고 주장 배경에 그런 생각이 있다면 그야말로 주객 전도와

화해를 위해 2021

말할 수밖에 없다.

보鉉娥씨가 말하는 것처럼, "손해 배상, 만족, 공식 사과와 리하 빌리 테이션

리 서비스 '가 과연 지금까지 없었던 있는가하면, 그렇지는 않다. 일본은 아시아 여성 기금 이후에도 매년 국가 예산을 짜고 위안부들을 케어 해 왔고, 그 예산을 폐지 한 것은 한일 협정을 맺은 뒤였다. "화해 · 치유 재단 '이 존속하고 있으면되어

있었다 것이다.

토론자 1 명 판결은 "모두에 의해 설득적이고」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고 정오의 문제가 아니라고했다 (朴倍根씨, 전술 토론회). 또한 "당사자"는 다양하며, 국제 사회와 국내 사회에서 받아 들여질 지 등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30 년에 걸친 운동과 연구를 이끈 주류 운동가와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생각 만 "정의"며 다른 의견은 모두 '실수'로 간주하고 억압 해왔다. 그러한 모습이 피해자 본인에게도 미치고 있었다, 그리고 피해자들은 결국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사망 한 것을 관계자들은 다시금 상기해야한다.

∙ 한일 합의

한일 양국이 위안부 문제 '결국 돌이킬 수없는 해결 "을 확인했다 2015 년 12 월 합의. 일본은 군의 참여와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고, 한국이 설립 위안부 지원 재단에 10 억 엔을 기부. "위안부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마음의 상처 유야을 진행할 것"이라고했다. 한국은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을두고 "적절하게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한일 협정에 따라 한국은 16 년 7 월 "화해 · 치유 재단 '을 설립했다. 합의 당시 생존 해 있던 위안부 1 명이 1 억원 (약 950 만엔), 사망자는 유족에게 1 인당 2000 만원 (약 190 만엔)을 지급하기로했다. 문재인 (문재인) 정권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걸고 재단을 해산 시켰으나, 위안부 여성들이 일본 정부에 손해 배상을 요구 한 올해 1 월의 제 1 차 소송 판결 후에는 "양국 정부의 공식 합의"고 효과를 밝혔다. 또 다른 위안부들에 의한 4 월의 제 2 차 소송 판결은 한일 협정에 근거하는 「화해 · 치유 재단 '설립을 평가. 많은 위안부 재단 지급의 현금을받은 경위에 대해서도 언급, "합의는 지금도 살아있다"고 확인했다.

화해를 위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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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중심주의에서 대변자 중심주의에 - 운동과 연구 진심인지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반성의 의미가 담긴 구제 조치이다." 일본 정부에 배상 청구를 기각 한 4 월 서울 중앙 지법 판결은 2015 년 한일 양국 정부의 합의에 따라 한국에서 위안부 구제 「화해 치유 재단 '이 설립 된 것을 평가했다. 많은 위안부가 재단에서 지급 된 현금을받은 경위에 대해서도 언급 합의의 유효성을 재확인했다. 한국 · 세종대의朴裕河(박 유하) 교수는 판결을 근거로 한일 합의를 정확히 이해하도록 요구하면서 30 년간의 운동과 연구가 피해자 중심주의에서 멀리 떨어져 버린 것을 지적 한다.


∙ ∙

4 월 서울 중앙 지법 소송을 담당 한 변호사는 "위안부 피해자가 한일 협정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화해 · 치유 재단 '이 해산 "했다고했다 (얀 성우 2 차 소송 판결 제 1 회 토론회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판결 기각 판결, 어떻게 볼 것인가 '자료집). 또한 (공식 조약이 아닌) 정치적 합의에 불과한 피해자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추가 조치 요구 등의 외교 보호권을 기대할 수 없다라고 생각이 원고 측의 이해임을 판결

문장 에서 엿볼 수있다.

그러나 판결문에 적혀있는 것처럼 한국 외무부는 지원 단체와 15 회 이상의 회의를했고, "화해 · 치유 재단 '돈의 신청을 한 것은 107 명으로 재단 돈을 최종적으로받은 인원은 총 99 명 (생존자 35 명, 사망자 64 명)한다. 이것은 소송을 제기 한 시점의 생존자의 대부분라고 좋을지도 모른다.



위안부를 지원하는 '일본군 성 노예 문제 해결을위한 공정 기억 연대'(정의 연, 구 정대협 = 싶어 오늘)은 한일 협정 반대 운동으로 모인 국민 성금에서 합의에 반대 한 8 명의 위안부에 1 억원 (약 950 만원) 씩을 여성 인권상의 이름으로 전달했다. 그 8 명 중에는 사망 한 사람도 몇 명있다.

받지 않은 사람이 소수이기 때문에 그 요구와 목소리를 무시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시되어야하지 때문에 그 몇배의 사람들의 목소리와 의사가 지금까지 억압되어 왔던 것에 주목해야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한일 합의가 발표 된 직후, 위안부 지원 시설 '나눔의 집'에서 인터뷰에 응한있는 위안부는 "정부의 생각이 그러면"받아 들일 자세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다음날 이미 거부의 자세로 돌아 섰다. 그 변화가 무엇 때문에 일이 될, 확인해야한다

입니다.

지원 단체의 전국적인 반대 운동에 1 억엔 이상이 순식간에 모인

것은 오직 그러한 배경이 있던 일이었다. 게다가 바로 그 돈을 바탕으로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정대협, 현 공정 C)는 "정의 기억 재단 '을 만들어 계속해서 스스로 정의 련과 이름을 바꾼 것이기 때문에 그 정당 성은 차치하고, 자금과 사람 전 국민의지지를 후원 그룹에 집중시키는 계기가 된 것은 다름 아닌 한일 합의했다. 전 소장 등 직원이 횡령 혐의로 기소 된 '나눔의 집'의 경우도 100 억원 이상의 돈이 모인 것은 한일 합의 후에한다. 그 모두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바꾸는 노력없이 합의가 이루어진 결과이기도하다.

한국에서는 지금도 정확하게 인식되지 않은 한일 협정

한일 합의 내용을 한국 사람들은 아직까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다. 합의 발표 당초 일본 측의 대응이 주목되지 않고 한국 정부의 대응 만 강조되고, 거기에 이목이 집중되고 순식간에 비난의 대상이 된 결과이다. 사과와 보상이 아니라 '돌이킬 수없는 해결'이나 '소녀상 문제 해결 "이라는 단어 만 인정 합의 반대 운동이 확산 된 과정은 1990 년대 아시아 여성 기금의 때와 다르지 않았다. 운동은 한국 사람들의 자존심을 다치게 작전에 성공한 것이다. 한일 문제가 아니라 여성 문제라고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한국에서 무엇보다도 민족 문제로 기능하고있는 상황 이상한

불구 그러한 상황이 잘 쓰였다.

긍지와 표리 관계에있는 피해자 의식이 문제를 제기 한 정대협의 초대 공동 대표였던 윤정옥 (윤정옥) 이화 여대 명예 교수와李効다시 (이효재)이 대학 명예 교수 생각의 핵심이기도 (2 명 모두 위안부 문제를 일본의 조선 민족 말살 정책으로 생각하는) 그런 의식 이야말로 한국 본토뿐만 아니라 해외 거주자를 자극하여 운동은 성공한 것이다 . 윤 명예 교수는 "조선의 위안부 제도는 일본 정부의 조선 지배 정책이었다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이라고하고 있지만 나중에 인용 리 명예 교수처럼 임신 할 수없는 몸이 한으로 "재생산 기능 "을 말살 한 것으로 생각하고,"지옥 같은 노동과 지옥 같은 강간」 「참을 수 없다면 "죽어라"라는 제도」 「살아남은 사람은 버리지 죽이거나하는 제도 " ( ""조선 식민지 정책 '의 일환으로 일본군'위안부 '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 "역사 비평

사, 1997)로 이해하기도했다.

무엇보다, 위안부 문제는 조선인에게 식민지 지배의 결과로서, 민족 문제인지 자체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차별은 어디 까지나 차별이며, 홀로 코스트 같은 (민족) 말살 정책과 겹치는 시절은 있어도 같지 않다. 아마도 70 년대 김일 츠토무 씨 (저서로는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 '1976 재일 조선인 한국의林鐘국가 <임 김종국> 씨가 81 년에'정신대 '의 제목으로 번역하고있다>와 90 년대 보스니아 분쟁 등의 집단 강간의 영향을 받고있는 것 아닐까 생각된다 초기의 이해 (일부는 지금에 이르기)가 한국의 그 이해의 틀을 만들었다.

90 년대 초기부터 유엔에 위안부 문제를 호소하는 활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정鎭星(정 진선) 서울대 명예 교수도 한국에서의 운동이 '민족 (성) 말살의 일환임을 주목 " 했다고한다. 정 명예 교수도 정대협의 전 대표했고, 유엔에서의 활동

도 계속해왔다.

한일 협정은 "당사자가 배제 된 ''피해자 중심주의하지 않았다"도 비난했으나 합의의 반대자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법적 책임'이 아닌, 는 것이다. 그것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의 연구자와 운동가들도 보조를 맞추고있다 (나카노 토시오 외 편 「 '위안부'문제와 미래에 대한 책임 - 한일 '합의'에 맞서 '2017,大月書店등). 게다가 그 피해자를위한 이상 운동이나 연구를위한 것이되어 온 것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거는 법학자 "한국과 일본의 외무 장관이 공표 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 을 지켜 보면서 위안부 문제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까지해온 연구 활동이 물거품이되어 버린 느낌 "(보鉉娥"2015 년 한일 외무 장관의 위안부 문제 합의 피해자는 어디에 있었나 " )라는 말에도 뜻밖에 나타나고있다

( '2015'위안부 '합의, 이대로는 안된다 "景仁문화사,

2016).

90 년대 이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연구와 운동은 어느덧 피해자 중심주의에서 끝없이 멀리 떨어져 버렸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대변자 중심주의가되고, 그러한 것은 "범죄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에 법적 책임이며, 일본의 책임이기 때문에 국가 책임"(金昌禄<김 챤노쿠> · 전술 '2015'위안부 '합의 이대로는 안된다 ")라는 말에 응축되어있다. 합의에서 "상호 비판을 자제하겠다"고 담긴 것에 대해 "한국 정부는 세계적인 의제 -로 떠오른이 운동의 깊은 역사와 의미를 스스로 훼손하고있다"(이나영 동) 라는 말에도 당사자 이상으로 운동의 '의미'가 중시되고있는 모습을 간파 할 수있다. 개별 위안부에 성실하고 정확한 사실 이었는가?

운동의 의미와 성과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운동의 내용이 과연 피해자 개개인에 성실하고 사실은 정확하게 였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세계 여성 연대라는 값진 성과를 유지할 수있게 있어도 30 년 동안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는 무시 · 은폐 된 구 유고 슬라비아와 아프리카의 동시대 전시 폭력과 동일시하도록 같은 방식으로 호소 해 온 운동의 방향을 묻고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노력은 단순히 "(갈등을) 끝낼위한 것"으로 "처리"된 "피해자와 가해자를 삭제"하는 것으로되었다 (이상 나카노 상 게서) . 이러한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를 단순히

"(일본 국가) 변호인"으로 간주 서슴지 않는다.

위안부 문제 전문가로 알려져왔다 요시미 요시아키 씨도 "주된 책임은 업체에 있음에하고 싶은 것"(요시미 나카노 상 게서)으로하면서 업체를 단순한 '군의 손발 " 이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90 년대 관계자가 업체를 기소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위안부의 모집을 둘러싼 '강제성'의 논의 내용은 어느덧 「공창 제도는 사실상 노예 "(요시미 동)는

같은 논의로 변해 버렸다.

요시미 씨는 16 년의 시점에서 위안부를 '무급 군속 또는 군 종속 자 "라고하고있다. 그것은 90 년대 초에 이미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온 인식이었던 것 같지만, (일본 변호사 연합회는) "피해자 본인이나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등이 '성 노예는 일본 제국군이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가해자의 군속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고 주장했다 것에 동의하고 피해자 감정을 존중했다"(토츠悦朗""위안부 "대신"성 노예 "인"). 즉, 사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다 "원래 식민지 사람의 입장을 존중"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자면 "제국 주의적 온정주의 '(졸저 「한국 민족주의의 기원」2020)의 발로 일 뿐이다. 즉 90 년대 이후 한일이 거의 처음 함께 과거에 마주하게 된 공간에서 양국의 뜻있는 시민들이 반드시 대등 한 관계 였다고는 말할 수없는 것이다. 미정 제국 주의적 심정은 위안부 문제를 놓고 노골적인 부정론을 벌여왔다 우파보다 좌파에 남아있다. 그러나 그러한 구조가 계속되는 한 제국주의 식민

주의도 극복 할 수 없을 것이다.

관계자들은 한일 협정을 규탄해야 할 이유로 유엔 여성 차별 철폐위원회의 비판도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세계를 향해 운동의 성과를 거둔 한국의 고학력 여성에게 '세계'가 아시아가 아닌 유럽 이었다는 것을도 나타내고있는 것은 아닐까. 일련의 움직임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였던 구미 제국에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 지배의 문제로 묻는 것은하지 않았다. 식민지를 둘러싼 싸움이기도했다 "제국의 전쟁 '의 주체였던 구미와 같은"교전국 "위치에 서서 계속하면서 필요에 따라 식민지의 논리를 내거 같은 운동 이었다는 것을 많은 모순을 초래 한 것이다. 00 년 여성 국제 전범 법정 최종 판결을 앞두고 이루어졌다 관계자 사이의

메일은 그러한 모순을 고통스럽게 보여주고있다.

"일본의 성 노예가 필리핀과 중국 점령 강간과 다른 점이 (판결에서 - 필자 주) 강조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우리의 기소장에서 식민지라는 말을 쓰지 않았기 때문 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습니다. 대만 기소장에는 식민지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우리의 기소장에는 점령, 병합이라는 말은 나오지도 식민지라는 말은 없다 때문에 (판사들이 - 필자 주) 젠더의 관점에서만이 문제를보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은金富子씨의 견해이며, "소위"라는 말을 사용하여 "소위 식민지 "아래의 성 노예 제도 아래에서 끌려 것이라고두면 식민지 제도를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것이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점령 한 강제 점령했다라고하면, 마빠니케 (필리핀 마을 이름 일본군에 의해 여성들이 위안부되거나 집단 강간하기도했다 - - 필자 주)과 난징 점령 된 것과 구별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입니다. 백인들은 합병이 무엇인지 모르는거야 "(0 1,12.10. 윤정옥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전 대표가 법학자

에게 보낸 E 메일, 성 평등 아카이브)

위안부 문제 운동 세계적인 성공을 자신뿐만 아니라 서양 - 원래

제국을 사기 (사기)하는 것이었다 것을이 편지는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이전 쓴 것처럼 윤씨는 위안부와 군인의 관계도 위안부에 "30 세의 여성이나 아이를 낳고있는 여성 '이 있었다 것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에도 불구해야 "조선의 부녀자를 강제로 연행 해 성 노예로 만든 것" "재생산 기능을 파괴함으로써 민족 말살을 도모 한 범죄」 「제노 사이드」(李効재 · 이화 여대 명예 교수"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다 - 강제 종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 방안 "성 평등 아카이브)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이후 위안부 인식의 토대를 만들어 온 것이다.

앞으로도 일본 정부에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소송과 함께 한일 협정의 완전한 폐기를 요구하는 운동은 계속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바꿀 수는이 문제를 주시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인식 뿐이다 것이다.

∙ 아시아 여성 기금

정식 명칭은 여성을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1993 년 고노 요헤이 관방 장관 담화에 따라 무라야마 도미 이치 내각이 95 년에 설립했다. 보상 사업은 국민의 기부금에 의한 피해자 1 인당 200 만엔의 「보상 금액 "과 정부 출연 120 만 ~ 300 만엔의 의료 · 복지 지원, 총리의 사과 편지 등으로 구성된다.

2007 년 3 월에 해산했다. 국가 · 지역별 실시 인원수는 한국 61 명 (중 1 명이받지 못한 주장) ▽ 대만 13 명 ▽ 필리핀 211 명 ▽ 네덜란드 79 명. 2002 년 시점에서 한국 정부가 인정한 피해자 207 명에서 사업을 받아 들인 것은 3 분의 1 미만이었다. 전 전무 이사 와다 하루키 씨가 밝힌 내용은 기부금 수익 5 억 6535 만 5469 엔, 정부 보조금 34 억 8431 만 2000 엔, 정부 출연금 13 억 3059 만 2497 엔. 한편, 보상 금 5 억 7008 만 5616 엔, 의료 복지 11 억 5144 만 522 엔. 기금 해산 후 일본 정부는 한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대상으로 후속 사업을 9 년간 실시했다. 08 년도 이후의 실적은 올해 720 만 ~ 1,500 만엔으로, 한국이 많이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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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인식을 만든 북한의 위안부 증언


1991 년에 한국인 위안부, 김학순 (김 하쿠슨) 씨가 자신이 위안부 였다고 자칭 이후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일본 정부와 사회는 크게 요동 쳤다. 여성에게 성적 봉사를 강요하는 극단적 인 인권 침해이며, 많은 일본인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해야 할 문제라고 파악했다. 동시에 과거에 관한 것으로 일본이 비판받는 것을 나눌 수없는 생각을 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한국 · 세종대의朴裕河(박 유하) 교수는이 문제에 대한 서방의 이해의 배경에는 북한 원래 위안부의 충격적인 증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 ∙

8 월이되면 김학순 씨가 목소리를 높여 '위안부 문제'가 등장하고 나서는이나 30 년이된다. 그동안 목소리를 높였다 위안부 중 많은 분들이 돌아가 일본의 사죄와 보상도 아시아 여성 기금과 한일 합의에 따라 2 회 시도되었다. 그러나이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은 전혀 들어가있을 것 같지 않다.

지금까지이 연재에서는 지원 단체가 위안부 문제를 민족 말살을 도모 "식민지 정책"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한일 법률가들이 뉘른베르크 재판을 본보기로 도쿄 재판에서 못했음을 완수 시키려고 한 것, 지원에 나선 일본의 역사가 주로 공문 만 문제 이해의 분석 자료에 사용한 결과, 공문서에 나와

오지 않는 다양한 목소리에 충분히주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한 목소리를 직접 듣고 구술 집을 만든 한국의 지원 단체가 그 목소리를별로 발신하지 않은 것, 또한 그러한 지시가 나타내는보다 근본적인 구조 (위안부 피해자가 '황국 신민'으로 간주 " 애국 "의 구도에 동



위원 된 것) 몰랐어요 것 등을보고왔다.

한국의 지원 단체가 문제 발생 직후 필리핀과 북한 등과 연계 시작한 것도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를 간과하고 일본인 · 조선인 · 대만인 위안부들의 실태와 문제의 본질 - 국가의 전쟁에 여성들이 법률의 이상으로 동원 된 것 - 보이지 않는시킨 원인이라고 할 수있다. 그동안 뿌리 깊게 존재 한 것은 '매춘부'와 '순수한 소녀'의 구별과 차별화했다. 이면서도 원래 식민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때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있었을의 조선인 위안부 문제 = 식민지 문제의 구도는 어느새 보이지 않게 위안부 문제는 오랫동안 단순히 '전쟁 범죄'의 틀에서 이해되어 「제국」 「식민

지 '의 문제로 간주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원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은 그러한 모순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2000 년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을 가능하게 한 국제 연대가 "전시 하의 여성 폭력 문제에 둘러싸이라는 한계"(정鎮星"일본군 성 노예 ', 2004)이 있었다고 지원 단체 전 대표는 빨리 쓰고있다. 그러나 올해 1 월과 4 월의 한국의 위안부 소송의 판결문에서 확인 된 바와 같이, 원고 측은 그 후에도 일본과 조선은 "교전국 '이었다는 논리를 전면적으로 내세워 식민지 문제 로 고소했다.

한국의 지원자들이 식민지가 아니라 교전국의 논리를 사용한 배경에 위안부 문제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북일 국교 정상화 협상에서 협상력을 높이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이미보고 했다. 게다가 유엔에이 문제를 호소하는 과정에서 만난 북한의 존재가 관계자들의 위안부를 둘러싼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 같다는 것을 보인다. 한국의 시각과 운동의 방향에 영향을 준 것은 일본의 학자와 지원자 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국에 정착 오랫동안 상식이기도 한 <20 만명의 소녀 강제 연행 · "유례없는"잔학>은 그대로 90 년대 초 북한의 주장이기도하다 ( "일본 정부는"종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을 밝히고 사과해야한다 "-"종군 위안부 "및 태평양 전쟁 피해자 보상 대책위원회의 고소장) 「월간

조선 자료」1992 년 11 월호 외).

일본의 변호사와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정대협, 현 공정 C)가 유엔에 문제를 제기 한 운동 초기부터 북한도 한일의 지원자들과 연계 해 활동했다. 또한 북한은 1991 년 1 월 평양에서 열린 제 1 회 북일 국교 정상화 교섭에서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고 보상 조치를하도록 일본 측에 요구도 있었다 (조선인 강제 연행 진상 조사 단 편 '조선인'위안부 '· 강제 연행 진상 규명과 보상을 "1992). 65 년 한일 협정 (참고 : 한국에서는 한일 기본 조약과 관련된 제반 협정의 것을 일반적으로 한일 협정이라 함)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를 불법으로 간주 형태로 과거 청산을 호소 가운데에서 위안부 문제도 배상을 받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91 년 5 월에는 도쿄에서 91 년 11 월에는 서울에서 남북 여성 대표단은 회의를 가진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편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20 년사」한울, 2014)하게된다. 92 년 8 월이라는 이른시기에 "북한은 정치적으로 북일 협상을 진행하면서 (일본에) 전쟁 범죄 배상을 보장하려하고있다. 지금은 어느 때보 다 남과 북 모두 일본에서 정신대 문제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배상을받을만큼 주체적 인 역량이 갖추어지고있는 때다 "(尹美香<윤미향>"정신대 문제 해결 운동의 전개 과정」 「제 1 회 헌신하지 않는 군단 문제 아시아 연대 '보고문, 1992)라는 말은 훗날 지원 단체의 장은이되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

은 그러한 경과가 있던 일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놓고 북한이 만든 단체는 "사실상 정부의 일부분"(정鎮星동)이었고, 유엔에 참여하고 위안부 문제를 한국의 단체와 함께 호소 일본에서의 단체 "조선인 강제 연행 진상 조사단 '도 대표들의'국적은 북한"(辛惠秀"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을위한 국제 활동의 성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이었다 했다. 이후 한국의 단체와이 단체는 1992 년 9 월에는 평양에서 회동을 갖고 "긴밀한 협력 관계"(辛惠秀동)이다. 유엔 인권위원회에서도 1 년에 2 번 만났 니 (辛惠秀동) 한국 관계자가 북한 정부의 입장을 의식하게 된 것은 필연적 인 추세이기도했다.

유엔에서의 잔혹한 이야기와

병사들을 위로 "효과"와

한국의 지원 단체는 92 년부터 유엔에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다. 북한의 단체와 일본의 '조선인 강제 연행 진상 조사단'도 같은시기에 유엔 인권 소위원회 등에 참여하고 도쿄에서 국제 청강 회 등으로 피해자와 함께 발언하고있다 (정鎮星"일본군 성 노예"辛惠秀"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을위한 국제 활동의 성과"토 츠카悦朗""위안부 "대신"성 노예 "인"등 참조)하지만, 세계를 향한 북한의 위안부의 이야기는 한국의 위안부의 평균적인 이야기는 매우 달랐다. 일본의 지원자도 북한 위안부의 증언 단수에 닿아 있는지 이미 지적했지만, 이러한 북한 위안부의 증언이 이후의 서양 인식을 만들었다 가능성

은 작지 않다.

92 년 도쿄 국제 청문회와 94 년에 발행 된 국제 법률가위원회 (ICJ)의 보고서에 등장하는 북한의 위안부 증언은 아이를 낳은 것이나 질병을 이유로 '자녀 함께 강에 던져 "있는 등"3 명의 소녀가 살해당하는 것을 보았다 "(김 영실) (국제 법률가위원회 <ICJ>"국제법에서 본 「종군 위안부 문제 ""아카시 서점 1995)라는 것이나, 패전 후 '조선 여성을 죽였다'(김태일) (이)라는 것이었다. 도쿄 국제 공청회에 참석 한 김 영실 씨는 조선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위안부가 "참수했다"라고 말했다. 유엔 "노예제 실무 회의 '에서도 남북의 위안부들은 모두 발언하고"위안부 문제가 회의장을 완전히 압도 "(辛惠秀동)했다고한다.

00 년 여성 국제 전범 법정에서 원고였던 북한의 위안부,朴栄心씨도 "(저항하면) 칼을 뽑아 목을 찔러 제국군의 맛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며, (인후 ) 피를 삼켜 사이에 강간 당했다 "( 「남북한 공동 기소"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2000 년 일본군 성 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 자료집」2004) 고 말했다 . 유엔의 쿠 마라 스와미 보고서에 거론되고있는 북한의 위안부의 이야기도 목을 잘라 국물에하라고 군인이 명령하거나 참수 시체를 토막 절단되거나했다는도

이었다 .

한국의 위안부의 이야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적어도 유엔과 ICJ 등의 증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유방을 도려하거나 배와 질 (질)을 군도에 할애하기도했다 등 잔인하고 참혹한 이야기는 북한 위안부에 압도적으로 많다 (이토 타카시 「기억합니다 -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과 북한의 위안부들 '알마 2017 일본에서 14 년에 출판 된 「무궁화 (무궁화)의 슬픔 - "증언"성 노예로 된 한국 · 조선인 여성들 " 한국어 번역).

그러나 예를 들어 위의 박栄心씨의 사례가 기소장에서 "12 명 중 8 명은 포격으로 죽고 4 명만이 생존 중국인에 의해 포로가되었다"(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동) 라고 쓰여져하면서 동일한 기소 검사들이 쓴 것은 "의도적 인 방치" "대량 학살" "학살 범죄 증거를 체계적으로 파괴하기위한 고의적 인 행위"(이)라는 것이었다 했다. 그리고 참수에도 언급하면서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공격 집단 강간 · 노예 사냥"고 비난 한 것이다. 법정 전후에 관계자들이주고받은 메일의 교환을 봐도이 문제가 관계자들의 자의적 (시이) 인 '선택'과 '해석'의 응수했다는 것을 알 수있다.

하지만 이미 쓴 것처럼 일본군은 때때로 폭행을 일했고, 때로는 폭력적인 동반 자살 사건도 일으켰지 만, 일본인, 조선인 중심의 위안소는 북한 위안부들의 증언에 같은 수 이 보통으로 할 공간이 없었다. 이용 규범을 무시하는 군인을 위안부들은 헌병에 고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위안소 규정은 음주 폭행도 금지했다.

위안소는 처음에는 성욕 해소를위한 발안 된 그중 "전쟁에倦(우) 무"병사들을 위로하는 효과가 발견되어 그러한 방향으로 강화되어 갔다. 물론 이러한 효과를 낳는 역할이 기대되는 것은이 민족의 일본인 위안부 들이며 전쟁의 격화에 따라 교통편 등의 이유로 상대적으로 이동하기 쉬웠다 조선인 위안부 이 일본인의 대체되었다 (졸저 「제국의 위안부 "). 초기의 위안부가 병사의 고향에서 수집 위안소의 이름에 일

본의 지명이 이용되거나 한 것도 그러한 구조에 의한 다.

무엇보다 그러한 '효과'는 국가의 제멋대로 인 기대에 지나지 않고, 그 것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다고해서 그런 일이 은폐되어 좋은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유엔에 호소 네덜란드 국제법 학자들의 조언을 받으면서 점차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의 틀이되고, 결국 재판에 핵심적인 논리로 사용된다 <위안부 = 체계적 · 조직적 강간>라는 이해가 보인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임을 인정받은 구 유고 슬라비아의 경우 였지만, 그것 동일시 된 <위안부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 "> 논리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유럽과 아프리카의 '전쟁 범죄'에 해당되지 않는다고해도 그 수 위안부의 불행을 감추게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인 차별과 멸시의 구도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중국과 네덜란드 등 연합군의 여성에 대한 정복의 의미를 갖는다 적대시과 같은 것이다 것처럼 해 버리는 것은 역사에 불성실하는 수밖에 없다. 활발하게 활동 해 온 전 조선인 위안부,李容洙(이영수) 씨도 "성 노예"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0 년 5 월 31 일 「문화 일보」). 그것은 그러한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 것이다.

군인들이 위안부를 잔인하게 "죽였다"고하는 이야기 나 배와 자궁을 손상 이야기 (이토 타카시 동)은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민족 말살 "고 생각했다 관계자들의 이해에 맞는 한 것이있다. 한국의 전직 지원 단체 대표들의 이해이기도했다 "재생산 할 수없는 몸에 대한 정책 '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해를 북한도 빨리 보여주고 있고, 이러한 이해가 90 년대 초기의 교류 중간에서 공유되게

된 것은 확실하다.

북한과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 (조총련)'계의 사람들은 일본이 위안부들의 '오체를 찢어 죽였다 ""유방을 도려 "며"태아를 칼에 가리 내걸고 " "환자는 총을 발사"( 「조선인 '위안부'· 강제 연행 진상 규명과 보상을 ""조선인 위안부 문제에 대한 종군 위안부 태평양 전쟁 피해자 보상 대책위원회의 고소장 "조선인 강제 연행 진상 조사단, 1992) 고 강조했다. 위안부를 '전쟁 수행과 관련하여 일본 정부와 군부의 정책에 따라 조직적인 집단 강간과 윤간 관리 제도 하에서 피해를 입은 여성 "며"주로 조선 여성을 충당 것을 정책 화 "하고"조선 민족 말살 정책을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는기도의 일환으로 강행 "했다고 이해했다. "그녀들의 거의 대부분을 섬멸 (섬멸)"하고 "장기간의 구금"을 "노예로 연행"했다고 이해가 이렇게 성립되었다.

그리고 "독일 전범을 재판하기 위해 설치 된 뉘른베르크 국제 군사 재판 조례 제 6 조 C 항"과 도쿄 재판의 "반 인륜 범죄"를 참고하여 "민간인에 대한 살인, 섬멸 노예적 혹사 강제 이주 (추방) "로 간주"책임있는 자들에 대한 처벌 '을 요구 한 것이다.

BC 급 전범를 추궁받은 세마 랑 사건과 동일시도

이런 말을 듣고, 위안부 문제를 인권 문제로 주장해야한다고 조언 한 네덜란드의 테오 반보벤 씨 (Theo Van Boven : 인권 전문가 유엔 인권 소위원회 위원으로 쿠 마라 스와미 씨에 앞서 위안부에 관한 보고서도 쓴 .ICJ 조사가 이루어졌다 시절 멤버이기도했다)라고한다. 반보벤 씨가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세마 랑 사건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 한 것은 그의 보고서에서 엿볼 수있다 ( "중대한 인권 침해 피해자에 대한 배상"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정신대 자료집

ⅳ」1 993).

그리고 유엔은 "보스니아에서의 조직적, 집단적 강간 사건"을 위해 "(위안부 문제) 국제적인 관심과지지를받는 큰 계기가되었다"(辛惠秀동). 그러나 보스니아 사건은 세르비아계의 남성들이 이슬람 여성들을 집단 강간, 낙태하지 못하도록 감금 한 사건으로 일본 제국의 일원으로 포섭되어 일본인의 대안을당한 조선인 위안부의 처지와는 다르다.

위안부 문제의 세계 인식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했다 보스니아와 르완다 참사를 언급하면서 위안부 문제를 "목표 집단에 대해 정책적으로 행해진 대규모 공격" "대량 학살"이라고 정의 하고 00 년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이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적 성격을 가져야 국가 기관의 행위로 이뤄져야한다"( 「2000 년 일본군 성 노예 전범 여성 국제 법정 자료집」)과 이해를 반복 한

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것이었다.

00 년대 이후에도 유엔 인권위원회 여성 차별 철폐위원회 고문 금지위원회 등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일본 정부에 권고를 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이 보고서의 인식 이은 것 인 것이다. 전쟁에 관한 성폭력 문제에 보편적 인 '여성'의 문제로 접근 할 때 유럽 · 아프리카와 조선인 피해자들의 차이가 돌 보십니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법"에 의한 판결을지도에는 피해 사실의 정확성 이야말로이 필요했던 것이다.

91 년 이후 서울과 평양, 해외에서 구축 된 남북 연대는 나중에 "남북 통일을 이룩했다"(00 년 여성 국제 전범 법정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완벽하게 통합 된 기소를했다"(정鎮星"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20 년사 ')"위안부 문제를 넘어 미래의 남북한 통합에 중요한 기반이되고있다 "(尹美香동)와 자부심을 창출하게된다 .

∙ 김학순 씨

1924 년 옛 만주 (현 중국 동북부) 출생. 91 년 여름에 위안부 이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명을 내고 증언하고 같은 해 12 월에 일본 정부를 상대로 1 인당 2000 만원, 총 7 억 엔의 보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을 때 원고에 참가한 . 또한 1993 년 '한국 정신대 문제 연구회'가 발행 한 증언집에서 경험을 상세하게 밝혔다. 김 씨는 위안부 였음을 공표 한 이래, 매주 수요일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항의 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다. 97 년 12 월 16 일 73 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스물 몇 년 전에 남편과 아이를 잃은 이후 서울 시내에서 독신 생활을하고 있었다.

∙ 세마 랑 사건

일부 일본군 관계자, 구 네덜란드 령 동인도 현재 인도네시아 수용소에 억류 된 네덜란드 여성들을 위안소에 강제로 연행하여 거기서 일본 장병에 대한 성적 봉사를 강요 사건. 아시아 여성 기금의 자료위원회의 보고서에 담긴 논문에 따르면 1944 년 초, 중부 자바 안바라와과 세마 랑에 있던 안바라와 제 4 또는 제 6 수용소, 안바라와 제 9 수용소, 할마 헤라 수용소 , 겐단간 수용소에서 네덜란드와 혼혈 여성 35 명이 연행되어 위안부로했다. 추진 한 것은 남방 군 간부 후보생 군단의 장교들이었다. 사건은 도쿄에서 시찰하러 온 장교가 네덜란드에서 호소를 받아보고 한 것으로, 군 상층부가 알려지게되었다. 자카르타의 군 사령부의 명령으로 위안소는 폐쇄 된 여성들은 해방되었다. 그러나 위안소의 일부는 이후 같은 장소에서 재개됐다. 전후 네덜란드 인을 강제로 위안소에 연행 해 갔다 일본군 장교들은 BC 급 전범 재판에서 심판을 받았다.


12
있어야 "기억 상속"을 함께 생각 날을 요구하고


2002 년 9 월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북한의 김정일 (金正日) 국방 위원장이 정상 회담에서 서명 한 날 아침 평양 선언에서 내년 로 20 년이된다. 만약 일조 국교 정상화 교섭이 진행되고 있으면, 난항 위안부 문제도 어려운 한일 관계도 다른 것이되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한국 · 세종대의朴裕河(박 유하) 교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해의 틀에 맞추어 피해자의 증언을 취사 선택하는 것도 교과서에서 위안부 문제의 계정을 삭제하는 것도 아니다 "기억 상속 '의 길을 탐구 호소.


∙ ∙

냉전 붕괴 후 북한과의 교류는 본래 원한 것이었다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탈냉전 시대에 드디어 시작된 포스트 콜로니 아 리듬의 움직임은 냉전의 틀에 처박혀 있었다. 그것은 과거 일제가 좌파를 억압 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하고 끝 마치려면 사태가 심각습니다.

2000 년대 이후尹美香(윤미향) 씨가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정대협, 현 공정 C) 대표가되고 나서 위안부 운동은 "남북 통일 = 위안부 문제 해결"( 15 년 3 월 29 일 '통일 뉴스')의 경향을 강화하고 남북 모두 조를 넘어 20 만명 강제 연행 설 등 북한의 인식을 전면 해지고 한국 사회에 정착했다. 그 윤씨가 '386 세대'(1960 년대에 태어나 80 년대에 대학생으로 민주화 운동의 주축이되어 90 년대에 30 대였던 세대의 것. 현재는 50 대가되어 있기 때문에 "586"과



불리게되고있다)이며, 결국 국회의원이 된 것은 이러한 세월을 상징하고있다.

지금도 한국의 인터넷에 나돌고있는 위안부의 경험 중 가장 잔인한 것은 대부분 북한의 위안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북한의 위안부의 구술이 들어있는 증거 사진도 몇 년 전에 번역 된 (이토 타카시 「기억합니다 -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과 북한의 위안부들 '알마, 2017 일본에서 14 년에 출판 된 「무궁화 (무궁화)의 슬픔 - "증언"성 노예로 된 한국 · 조선인 여성들 "한국어 번역). 게다가 거기에 실려있는 체험은 90 년대 초 국제 법률가위원회 (ICJ)를 향해 말한 것이 더욱 커지고있다. 김태일 씨의 경우 3 명 죽였다는 이야기가 150 명의 여성의 목을 잘랐다는 이야기가되고있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가 어쨌든 '불법'으로 간주되어 일본의 '배상'을 요구하는 재판이 일본과 미국에서의 패소를 뒤집기 위해 계속되고있는 것도 이런 것과 무관

는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과 북한이 국교 정상화되어 있으면 위안부 문제는 여기까지 꼬여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있다. 처음에는 불법 · 배상을 주장하고 북한도 2002 년 평양 선언은 한일 국교 정상화와 마찬가지로 경제 협력 방식으로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 좋고 나쁨을 제외하고, 적어도 한국에서 현재 진행되고있는 것 같은 위안부 문제를 차치하고 '불법'으로 간주하고 배상을 요구 같은 재판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양 선언은 다시 떠오른 일본인 납치 사건과 핵 문제로 인한 감정 악화로 공중에 뜬 이후 세계는 07 년 미국 하원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대일 비난 결의안'을 시작으로 00 년 여성 국제 법정의 인식을 넓혀 갔다 (캐나다 의회, 유럽 의회 결정

회의 등).

한국에서는 65 년 한일 협정 (참고 : 한국에서는 한일 기본 조약과 관련된 제반 협정의 것을 일반적으로 한일 협정이라 함)시의 문서가 공개 된 결과로 전 징용 공 · 징병 자 등 문제는 한일 협정시 해결되었지만,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민관 공동위원회 (한국 정부가 2005 년에 외교 문서 공개를 받아 대책을 검토하기 위해 설치) 결론이 나오고, 위안부들은 06 년에 헌법 재판소에 한국 정부를 제소했다. 헌재는 11 년 위안부 문제 해결을위한 외교적 노력을 한국 정부가 다해 않은 부작위 위헌이라고 결정을 내게된다. 같은 해 12 월에는 소녀상도 세워졌다. 이후 지금까지 지원 단체에 약간 거리를두고 있던 한국 정부는 지원 단체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세월이 10 년이된다.

북일 국교 정상화가 한일 갈등을 완화 할 가능성도

핵 문제가 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지만, 일조 국교 정상화가 위안부 문제와 전 징용 공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을 완화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그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 그렇다고해서 이미 50 년 이상시에 흔들리면서도 우호의 세월을 쌓아 온 한일이 그날까지 지금과 같은 대립 관계를 계속 변명이 없다. 국가 관계는 국가 간의 관계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냉전 체제의 해체 30 년 한국 헌법 재판소의 판결에서 10 년 계속 된 갈등의 결과는 이미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있다. 한국의 무역 의존이 일본에서 중국쪽으로 옮겨 버린 것은 그 경제적 측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양국 국민의 마음을 매일 아프게하고 분노와 혐오

스러움의 것이다.

한국의 지원자들은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 유례가없는 것으로 강조함으로써 전문화 해 왔지만, 그러한 견해는 위안부의 올바른 이해를 오히려 멀리 뿐이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본의 단수는 오히려 전장에서 자결도 마다하지 않도록 한 철저한 정신 교육 (황민 화 정책)에있다. 그리고 거기에 휘말린 조선인과 대만인을 함께 논의 할 수있을 때 위안부 문제는 처음 국가주의를 넘어 탈식민 시대에 맞는 보편적 인 문제

가 될 것이다.

30 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으니까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연구에서도 새로운 견해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의 경우 처음부터 정치화 해 버린 결과, 초기의 틀이 유지되었다. 그동안 있었던 것은 개념의 "밀어"과 확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는 즉시 적대시되고 구축되었다. 주류 관계자들은 다른 견해에 귀를 기울였다에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도의적 · 정치적 결함 때문에 문제로 간주하고 그에 따른 비난 · 공격을 계속 해왔다. 이제 그러한 공격은 냉전 적 사고가 냉전 붕괴 이후 30 년간 관계자들을 강하게 잡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은 일반인에게까지 확산 표면적으로는 '한일 불화 "에 보여도 내용은 좌우 왼쪽 왼쪽 대립의 시대가 계속되고있다.

00 년 여성 국제 전범 법정 증언들 중 한 명이었다 위안부 강바닥 슈 (하 산스쿠) 씨 둘러싸고 한국 측의 검사 (지원자)들이주고받은 문서에는 병참 (평면)에 위안부 이 출두했을 때, "18 세 이상에서 처음 허가장을 냈으니 내 나이가 들고 18 세했다"(성 평등 아카이브) 고되어 있었다. "위안부가 도착하면 사진, 호적 등본, 계약서, 부모의 승낙서 경찰 허가서, 신분 증명서」를 제출하고"이것을 가지고 위안 계 상사가 신원 조사서를 만들어 헌병대에 보냈다 "고 이야기는 '무한 병참」(야마다清吉1978)에 나오는 내용이다. 즉 관계자들은 이러한 것을 알면서도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있는 것처럼 업체가 서류를 속였다 가능성을 잊어서는 안된다). 말하자면 최초의 틀에 맞게 증언의 취사 선택을하고 온 것이다.

위안부에 미성년자가있는 등 의사에 반하여 접전 한 사람들이 있었다 것은 많은 중개인이나업자에 의한 납치 속임수 호적 위조 및 계약서 위조가 있었지만 따라서의 것이었다. 일본인 위안부로 알려져있다 시로타すず子씨도 끌려 때의 나이는 17 세였다. 창기 (쇼기)가 될 나이 일본은 18 세, 조선은 17 세, 대만은 16 세에 한 것은 이러한 제도가 우선 식민지에 나간 일본인 남성을위한 것이었다 수 를 나타내고있다. 일본인도업자에 의해 식민지로 끌려간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전장에 끌려 미성년자와 속아 온 위안부를 군인이 때 다른 곳에 취직 시키거나 국가에 반환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군과 일본 정부의 명령에 의한 제국의 여성들에 대한 납치와 속임수가 구조적으로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연구자들은 돌아 오지 않았다 위안부들이 대부분 학살되거나 버림하거나 한 것으로 간주하고있다. 하지만 돌아 오지 않은 이유는 반드시 버림받은 때문이 아니다. "조선에가는 것은 가능했지만, 이런 몸으로 조선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 가지 않겠다고했다"(전게 강바닥 슈 씨 자료) 등 고있는 사람은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심리시키는 원인 제공자로서 전장에 여성을 동원한 일본을 비판 할 수도 귀국하지 않은 이유를 학살되거나 버림하거나했기 때문이라고 만 생각하는 것은 그녀들을 전장에 보내 무관심 함께했다 많은 일반인을 면죄하게된다. 최근 간신히 가부장제와 업체 등의 수 지적되게되었지만, 책임에 차이를 내려고하는 한, 30 년 동안 계속 "법"의 생각에서 자유 로워지기는 불가능이다 왁스.

이러한 혼란이 계속 된 것은 '식민지'자체의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기도하다. 물론 통치자에게 식민지 측의 인간은 아주 간단하게 죽일 수있는 존재였다 (위안부 관련 자료로 말하면 <산곡 테츠오의 다큐멘터리 영화 「오키나와 할머니」(1979)에 나오는 도둑질을했다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고발만으로 조선인 군속을 그 자리에서 내려서 원래 군인의 고백은 그 하나 다). 그러나 식민지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국민 취급을하는 제국의 '자원'이었다. 언제든지 죽일 수 있지만, 섬멸 (섬멸)해야 (로 된) '적'이 아닐 수밖에없는 존재 인 것이다.

99 년에 일어나 06 년까지 계속 된 미국에서의 위안부 소송을 이끈 사람은 그 시점에서 연구가별로없고, 북한과 일본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한탄하고 있었다 (한 · 우성 "미국에서 진행중인 일본군 위안부와 징용 소송에 대한 보고서"일본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법적 해결의 전망」). 실제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연구의 수는 일본이 압도적으로 많고, 한국은 몇 년

전까지 아주 조금 밖에 없었다.

관계자들은 "국제 사회의 견해"에 치명적인 사기 야 (숙박 씽씽)를 만들게 다른 의견은 모두 '역사 수정」 「역사 부정 "이라고 비난 해왔다. 그러나 있어야 '역사'를 미리 상정하는 것 자체가 '역사'되는 것의 이해를 좁혀있다. 중요한 것은, 매춘부 또는 성 노예 가지 논의가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국가에 의해 여성들이 동원 돼 비참한 처지에 놓였다 때로는 부상 목숨을 잃고 아직도 유골이 수집되어 있지 않고, 이국 땅에 잠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스럽 를 날리는 것, 게다가 그러한 비극이 많은 일본군 병사와 함께있는 가운데 일어난 일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기위한 것이다 것이다. 군인 위안부에 품은 생각을 성별 이론으로 비판하는 움직임도 있지만, 그랬다 "세련"된 비판이 엘리트 여성에 의한 억압이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정의'를 추구 엘리트 여성이 많은 "말할 수없는 사바루탄 (피 억압 민중, 하층민) '를 만들어 온 것은 이미 지적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 위안부 문제의 계정을 삭제해야한다고하는 일본의 일부 목소리에 더 문제가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위안부 '종군'을 클릭해야하는지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세력 확장과 함께 이동되어 희생 된 위안부들의 처지를 생각 날렸던 그러한 수있는 차세대를 양육 의사가 지금의 일본 사회에 있는지 여부가 아닌가. 위안부들은 군인과 달리 '법'도 필요없이 전장과 주둔지에 동원되었다. 거기에 여성 차별에 전국 각지주의 것이야말로 "법 지상주의 '에 의한 폐색 (막힘) 느낌 만이 강한 현재를 극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법'은 할 수없는 일이었다 고노 담화의 의의

93 년의 고노 담화 폐기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고노 담화의 의미는 오히려 그 모호함에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법'에서는 할 수없는 것이었다 것이다. 세계에 퍼진 소녀상도 일본군 위안부로 처음 동원 된 것은 일본인이었다라는 인식을 담는 것이된다면 동상을 둘러싼 10 년간의 갈등도 해소 될지도 모른다. 한반도 이외의 국가의 여성들을 늘려 봐도 그냥 보편적 인 "여성"문제가되는 것은 아니다.

서울 중앙 지법의 4 월 재판에서 패소 한 원고 측은 항소했다. 원고의 대리인들은 "마지막 구제 수단"고 호소하고있다. 그러나 '법'만 피해자를 구할 생각하게되었다이 30 년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것이야말로이 필요하다. 있어야 "기억 상속"이란 무슨 뜻인지 대립 해 온 쌍방이 함께 생각할 수있는 날을 향한 모색을 시작하고.

∙ 일북 평양 선언

2002 년 9 월 17 일 북한을 방문했을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서명 한 문서. 일본은 과거 식민지 지배에 의해 "다 대한 손해와 고통을 줬다"며 "통절 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마음"을 표명했다. 국교 정상화 이후 경제 지원을 실시했다. 납치 문제는 "일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현안 문제 '라는 표현으로 만지지 북한이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핵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북한은 탄도 미사일 발사 실험을하지 의향을 나타냈다. 회담에서는 또 북한 측이 일본인 납치 사실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하고 사과했다.

∙ 유럽 의회 결의

유럽 ​​연합 (EU 27 개국)의 유럽 의회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는 2007 년 12 월 13 일 본회의에서 제 2 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 등 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찬성 다수로 채택했다. 결의안은 위안부 문제를 "20 세기 최대의 인신 매매의 하나"라고 규정. 일본 법정이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에 대한 배상을 거부하고 일본 정부는 문제를 해명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게다가 일본에 공적 사죄 · 배상 외에도 역사 교육의 재검토 등을 요구하고있다. 결의에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EU의 정책에 큰 영향력이있다. 같은 해 미 하원이 7 월 30 일 본회의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총리가 공식 사과하도록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네덜란드 하원, 캐나다 하원도 11 월에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