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8

[이순자 자서전 영상 #오디오북] 1장 1화 인연의 시작 │ 당신은 외롭지 않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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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자 자서전 영상 #오디오북] 1장 1화 인연의 시작 │ 당신은 외롭지 않다 ②

Awakening Fl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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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자 #이순자자서전 #이순자_자서전 #오디오북 #광복 #625전쟁 #전우원 #가족이야기

이 영상 오디오북(https://www.study21.org/isunja/audiob... )은 이순자 자서전 프롤로그인 "글을 시작하며"(https://www.study21.org/isunja/audiob... 이어진다. 

이 자서전의 모든 이야기가 여기서 시작된다. 여기에 19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순자 여사 집안의 이야기가 있다. 이순자 여사는 자신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첫 인연을 두 사람 모두 대구 희도국민학교 출신이라는 데서 본다. 부친 이규동 장군은 소년시절인 1918년 아버지를 따라 북만주로 이민가서 17세의 나이에 결혼을 하였고, 그 슬하에서 이순자 여사가 출생하였다. 1945년 8월 15일에 조국이 해방되자 6세 소녀 이순자와 그녀의 가족 및 친척들이 모두 귀국선에 탔다. 서울에서 정착한지 얼마 안되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순자는 집안 어른들과 함께 피난을 갔다. 1.4 후퇴 후 두번째 피난을 갔을 때는 대구에서 희도국민학교를 다녔는데, 훗날 만난 육사생도 전두환이 바로 그 학교 출신이었다. 일제 시대와 해방 정국 및 6.25 전쟁 당시의 우리의 선조들 및 선배들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순자 자서전 제1장 중 첫번째 제목 '인연의 시작' 오디오북을 방금 유튜브에서 발행하였다. 이순자 여사께서는 자신이 6.25전쟁 중 대구에서 피난생활하셨을 때 잠시 다녔던 희도국민학교가 자신의 여중생 시절 만난 전두환 육사생도의 모교이기도 하다는 것을 소중한 인연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신다. 아마도 두분의 첫 대화 물꼬가 희도국민학교 시절의 추억담에서 터졌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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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0:00
1939년 3월 24일 홍매화 움 추는 봉 [음악]
0:06
나는 만주 길림성 동간 에서 태어났다 그 21년 천인 1918년 겨울
0:14
만 주소와 각 인근에 삼송 에 한 조선소 냥이 가족과 함께 도착했다
0:22
대한제국 멸망 8년이 지난 때였다 고양이 경상북도 성주 인 그 소년의
0:29
가족이 길림성 삼성으로 이주해 온 것이다
0:34
액 유독 이라는 이름의 8살 랑 그 소년이 바로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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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아버지가 부모님을 따라 만주의 정착하게 된 사연은 알 수 없다
0:49
다만 조 상태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 땅으로 이주하게 된 데에는
0:56
일본의 식민 통치하에 들어간 조국의 사정과 관련이 있으리라 는
1:01
생각만 해 볼 뿐이다 당시 만주 길림성 화순 양은
1:08
조선 통 닙 운동의 중심 지었다고 한다 드넓은 대룡 만주에서
1:15
그 소녀는 어떤 인연인지 길림성 화 수년의 흥 화 학교에 입학하고
1:22
이후 이 학교 설립자 이 화구 선생의 장려와 혼인 하게 된다
1:28
먼 타국에서 만나 1927년 11월 15일 부부가 된
1:35
그 젊은 조성 남녀가 바로 내 부모님 이다
1:41
아버지가 어떻게 흥어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게 됐고 그 학교의 설 자 인
1:47
외에 알아본 임 가문과의 인연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1:54
다만 내가 어머니한테 서 들어 알고 있는 것은 의 알아보 님께서 아버지를 무척
2:00
좋아하셔서 맏딸인 어머니와의 혼인을 흔쾌히 허락하셨다 는 사실이다
2:08
2분은 17세 동갑내기 어따 결혼 어머니는 딸만 셋을 연거푸
2:16
나오신 후 나를 임신 하셨다고 한다 아들을 귀 여기는 시절이니 참으로
2:23
민망한 일이었다 게다가 나를 임신 하실 무려 딸 셋
2:30
중 두 딸은 이미 여 이었고 생존한 달 마저도 심장병을 앓고 이
2:36
떨 우울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7회 만에 겨우
2:42
태기가 잊자 그넘 하기로 소문난 할아버지 까지도 할머니와 함께 꼭 또 새벽 송화
2:50
상가의 나가 백일기도 의 정성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2:56
카 부장의 권위가 대단했던 당시 농경 사회 전형적인 어른이었다
3:02
할아버지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그 100일 기도 는 확실히 쉽지 않은
3:08
일이라 할 수 있다 장소 늘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영웅에
3:14
그만큼 컸던 것이다 그런데 출사 라고 보니 또 딸이었다
3:22
실망이 컸습니다 도 집안 어른들은 우선 태어난 아기가 유난히 튼튼한 데 만족하셨다면 한다
3:30
어쩌면 단명 안 아이들을 줄줄이 땅에 묻었던 손으로
3:36
오랜만에 송강 않아 이를 알아보는 기쁨
3:41
그 자체만으로도 병과 와 죽음으로 침울해 뜬 집안의 8기가 사랑한다고 여기 션 는 지
3:48
모르겠다 그런 연유로 장소 늘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 하던
3:54
질환의 네번째 딸로 태어난 나의 출생은 타액 스러운 안도감과
4:01
민망함 이 함께 교차하는 그런 등장이었다 북만주 오지 장춘 의 8.15 광복의
4:09
소식이 들려왔다 장춘 은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4:16
광복 이라고 하면 힘차게 펄럭이는 태극기와 만세 함성의
4:21
연상 되지만 겨우 7살 어린 나이에 북만주 오지에서 내가 맞은 조국의
4:28
광복 은 그것과는 꽤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4:33
광복이 임박했을 무렵은 전쟁 말 개었다
4:38
심한 폭격과 공습이 이어 졌다 그때마다
4:44
어른들은 급히 아이들을 끌어 않고 반공 으로 쓰이던 마루 밑으로 들어가
4:50
폭격을 피하고 했다 무성 폭격이 지축을 흔들었다
4:58
허공을 찢는 폭음과 날카로운 섬광은 우리가 엎드려 있던
5:04
마루 짱 틈새를 통해 금방이라도 전부를 삼킬 듯 뚫고 들어
5:09
왔었다 섬광이 번쩍일 때면 어린아이들 증도 응가
5:16
자지러질 듯 까르르 웃어 되던 것이 기억난다 철없는 어린 아이들로 내는
5:22
끔찍한 전쟁도 공포의 공습 또 하나의 놀이 같이 보였는지 도 모르겠다
5:30
하지만 웃음소리도 잠 간이었다 놀란 어른들이
5:36
급히 수건으로 아이들의 입을 막아 버리면 마루 짱 아래 쌍 더 이사후 숨소리도
5:43
신음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나는 공습에 공포를
5:49
하나의 유 이 로 착각할 만큼 처리 없지는 않았지만 그 공습이 뜸해지면 서 찾아왔던
5:57
광복이 무엇인지 또 광복이 되면 우리
6:02
가족의 삶의 대체 어떤 변화가 올 것인지를 할 만큼 제대로 처리 된 것도 아니었다
6:10
어머니는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아내
6:15
어머니에게도 해방이라는 가슴 복장 현실과 함께 만주 벌판에서 용트림 하던
6:23
현대사의 지각변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6:29
일본의 패전으로 한반도의 해방이 찾아왔을 무려 동아시아 전체가
6:35
새 질서 새 구조 새 이데올로기 의 물결 속에
6:41
격렬한 몸살을 앓던 시기 없다 그 대격변 한가운데에서 소용돌이 치던
6:49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어내는 일은 당시 만주에 거주 알고 있던 사람들의
6:55
식견이 나 청구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회 방이 되자 아버지는 동북 태안
7:03
민단 에 들어가 보 안 돼 를 조직했다 보안 대원들은 현지 중국 정부의
7:10
협조를 얻어 무장할 수 있었다 보 안 되는
7:15
해방이라는 상황이 주는 기쁨과 혼란 의 불확실성 속에서
7:20
불안했던 은 조선 동포 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치안 기능을 수행했다
7:28
그러나 가장 시급한 것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는
7:33
동포 들의 귀 굵기를 돕는 일이었다 교육 활동은 일 영광 계속됐다
7:41
이 드 메 1946년 이 되자 아버지도 동지들과 함께 조선 으로
7:47
가는 귀국선 을 탔다 아버지는 만주 생활 27년 동안 온 가족이
7:54
땀을 쏟아 땅을 일군 덕에 어느정도 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8:00
귀국하면서 정착 자금으로 쓸 수 있었다
8:06
앞날을 살아갈 길이 불 확실했지만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그 한 가지
8:11
사실만으로도 아버지는 주저없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8:16
결심하는 것이었다 비록 데 밑엔 소금을 잔뜩 싣고
8:24
창공을 향해 솟아 있던 깃대에 남루한 헝겊 조각을 이어 만든 돛대가
8:30
위태롭게 달려있던 작은 배웠지만 그 초라하기 짝이 없던 소 군대가
8:37
그해 이웃들과 우리 가족의 귀국선 이어 따
8:42
그리하여 광고계 대한 나의 기억은 언제나 눈이 시리도록 푸른 도라지꽃
8:50
빛깔의 바다를 배경으로 떠 있던 소금 배에 남루한 모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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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도 때 완만한 펄럭 이므로 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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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단배를 타고 순풍 마늘 의지해 떠난 귀국길에 는 순조로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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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부터 위트 했었다 급기야 대련 부분에서 심한 폭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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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항해 가 아예 불가능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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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대로 찾아 들어간 항구에 한 허름한 여관에서 땅이 꺼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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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쉬며 하늘을 원망할 던 어른들의 좌절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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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몇이 로 바다는 잠잠 해줬고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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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인 한 분을 먼저 재상으로 보내야만 했던 가슴 아픈 귀국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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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대 멀미 때문에 거의 초죽음이 되어 있던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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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진 사람들을 인근 섬에 묻어 가며 강행한 귀국에 험한 항로 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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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소금 배가 인천항의 탓을 내린 것이다 피로 도 때는 형편없이 찍기 고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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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는 파도가 할퀸 자국 으로 사정없이 페어 나간 상처투성이의 귀향 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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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당당하게 조국 땅을 팔 봤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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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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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토록 고대하던 조국 땅 의 첫 채 류진 월미도 수용 성 은 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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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식으로 우리를 맞았다 사정없이 뿌려 되는 ddt 가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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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가 그 것이었다 이가 들끓어 발진티푸스 의 위험이
10:48
있다는 이유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행 모두에게 뿌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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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ddt 가 로 그것이 조국이 우리에게 건네는 첫 한영
11:00
인사였다 8살이 얻는 데도 유난히 몸이 작고 피부가 까맣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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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ddt 가루를 온몸의 뽀얗게 뒤집어 쓰고 나니 마치 흰 덕구 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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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놓은 경당 같았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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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고 촬영했던 월미도 수용소를 벗어나 다시 서울 장충동에 또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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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리고 또 얼마간의 체류 기간을 거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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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야 경우 수용소 생활을 마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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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서울 원유로 도원동 에 있는 적삼 각 한 채를 구입하신 것이다
11:47
해방후 정부가 일본인 소유였던 그 집을 풀어 할 때 아버님이 얼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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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을 치르고 그 집을 사들인 것이다 일본식 다다미 방으로 꾸며진
12:01
그 슬레이트 지붕 탄 층 집 입구에 두 그루 수양버들이 서 있었다
12:08
우물이 없어 집 근처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 써야만 했던 것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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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고국으로 의견이라는 길고 고된 창정 이 끝난 셈이었다
12:25
1946년 9월 23일 아버지는 요건 사관학교 제 2기로 입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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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일 아버지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하셨고 소위로 임관 돼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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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모두가 가난했다 어느집 이건 산다 라는 말보다는
12:48
연명 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산하 움 가난의 시간을 통과하고
12:53
있었다 특히 우리집의 경우 여러 형제가 모여
12:58
사는 대가족 살림 이어서 어려움이 더욱 컸다
13:03
어머 신 할머니를 모신 채 아이들을 여럿 거느린 형제들과 함께 사시던 부모님은 내가 태어나고 도
13:12
밑으로 딸만 둘을 더 나 그야말로 딸만 수복한 딸부잣집 이었고
13:18
그래서 집안 어른들께 는 여전히 민망한 입장이었다
13:25
그렇다고 내가 딸이라는 이유로 무슨 설움 같은 것을 받아 본 기억은
13:30
없다 오히려 신기 하리 만치 부모님은 당신들의 딸들을 참 알뜰하게 고도
13:39
정성스럽게 키워내 셨다는 고마움이 남아있다 군의 몸담고 계시면서 도
13:46
성품이 원아 온유 하셨던 아버지 덕분이었습니다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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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 수도가 에서 냉수 마찰을 하셨다
13:58
냉수 마찰을 끝내고 나면 을해 눈부시도록 하얗게 반 수건으로
14:04
줄줄이 잠든 딸 들의 얼굴과 목을 닦아주시고 냈다
14:09
그것이 어머니나 우리에게 음성 한번 높이 신 적이 없던 아버지가
14:16
곤히 잠든 딸들을 깨우는 방법이었다 부모님께서는
14:21
내외간에 정도 깊어서 사소한 다툼 한 번 없이 정답게 지내 셨다
14:29
여럿이 구가한 집에 살다 보니 묘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아이들을 출사
14:34
라는 일이 찾았다 만주로 부터 함께 귀국해 살고 있던
14:40
바로 아래 동서가 아들을 낳을 때 어머니는 어김없이 딸을 나오셨다
14:47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들을 나올 수만 있다면 다시 낳고 싶다 며
14:53
돌아 놓으시고 4 따 그런 어머니를 위로해 주신 것은 아버지였다
15:00
아버지는 평소에도 어머니가 아들을 못 나 고개를 못 들고 다닐까 염려에
15:07
각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니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과
15:14
정성도 각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15:20
유별나게 구수한 손맛과 송씨는 음식 장만으로 아버지께 정성을 쏟았던 어머니 덕분에
15:28
수제 빚은 나물이 든 볼이 죽을 먹으면서도 우리가 여명 한다는 각박한 보다는
15:36
푹 으나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2년 반 정도의 탈락한 시간이
15:43
흘렀다 그리고 그 일요일 아침에 왔다
15:49
예사롭지 않은 비상소집 연락을 받으시고 아버지가 황급히 달려 가셨던 그
15:56
아침에 6.25 가 발발한 것이다
16:01
그때 아버지는 막 축력 으로 진급해 육군본부 군수 국 발급과 의 근무중
16:07
이셨다 숙부 들도 모두 영관급 장교 했따
16:14
전쟁 발발의 로 서울은 순식간에 인민군에게 차명 되엇다
16:20
당시 아버지는 물론 삼촌들 까지도 모두 천 쟁 터에 나가 있었다
16:27
적 치하에서 국군 장교 의 가족이라는 신부는 꽃 죽음을 의미 했으므로
16:34
우리 가족은 서울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동네 사람들이 우리 가족
16:42
사항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처지라 누가 언제 밀고 할 지 몰라 온
16:48
가족이 한꺼번에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였다 결국 한강 마포나루 토 에서 만날
16:56
약속을 하고 한 사람씩 집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17:02
가족들이 다시 나루터에서 만났을 때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17:09
모두가 경황이 없어 떠나기 전 간신히 마련해 땅속에 묻어 뒀던
17:15
얼마 되지 않는 비상금 마저 두고 왔다는 사실이었다
17:21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17:26
그렇다고 피난 가는 가족들의 생명줄 과도 갔던 그 비상금을
17:31
두고 갈 수는 도저히 없었다 황망한 가운데 위험을 무릅쓰고
17:38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은 또 어머니 몫이었다
17:44
당시 11살이 어떤 나는 밀려오는 p 난민으로 넘치던 마포 나르 터에서
17:51
돌이 막 지난 막내동생 청순 을 얻고 어머니가 돌아 옷이 김하늘 하염없이
17:57
기다렸다 그때는 이미 한강 다리가 폭파된
18:02
후였다 그러니 나 루터는 목숨걸고 도강 하려는 사람들로
18:09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p 나미는 늘어나는데
18:14
어머니는 좀처럼 돌아 오시지 않았다 이 와중에
18:20
엄마를 영영 못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극도의 불안 속에서
18:26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였다 할머니가 문득 항 물로 뛰어들었다
18:34
그리고는 아이들을 닥치는 대로 아무나 a 때나 노태우 시는 것이었다
18:40
젊은 시절 쌀 가마니를 척척 등 해지고 나르 셨다는 여장부 할머니
18:46
할머니 덕분에 우리 가족은 그날 모두 무사히 한강을 건널 수
18:51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았다
18:57
그날 오후 항온 무렵 목을 빼고 기다리던 어머니를
19:02
극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던 그 일요일
19:09
비상소집 연락을 받고 황급히 집을 나가신 아버지한테서 는 연락조차
19:15
없었다 막상 강을 건너 찜한 우리 가족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19:23
결국 아버지의 근무처 이던 육군본부 가 수원으로 옮겨 갔다는 소문 하나만을
19:29
믿고 우리는 뭐 작정 수원을 향해 떠났다
19:34
아버지는 그때 새 직책 인 육군본부 중앙 재 무 과 장 직을
19:39
맡고 계셨다 그러나 소문은 믿을 것이 못되었다
19:46
수원 n 육군본부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낙심한 우리는 우선 눈에 띄는 빈집에
19:53
들어가 먹을 것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집주인이 급히 피난을 떠나 뜬지
20:01
그 집엔 삶은 보리와 약간의 밀가루가 남아 있었다
20:07
피난길에 배를 꿇고 있던 식구들은 그것으로 요기를 할 수 있었다
20:14
지척에서 틀려 오던 천 투기 소리에 하얗게 질려 가면서도
20:19
어머니가 급히 만드신 수제비 국밥을 정신없이 입안으로 떠 넣었다
20:27
그 후 우리 식구들도 다른 피난민들 처럼 소문 따라 이 도시 저 도시로
20:33
떠들어 다 녔다 그러다 부산에서 우리 행방을 백방으로 수소문
20:39
하시던 아버지 를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기적 같은 행운이었다
20:46
그러나 아버지는 감춰 네가 이스 라는 말과 함께 주소 한 장만을 남긴 채 다시 임지로
20:54
떠나셨다 감초는 부산에서 삼십 리쯤 떨어진 한적한
21:00
마을이었다 그곳은 쑥 뿔을 모시고 있던
21:06
박상 사라는 군인의 부모 집이 있었다 그곳이 우리 온 가족의
21:12
신세를 져야만 할 것이었다 감천 에서 보낸 짧은 기간은
21:18
비록 고달픈 핀 한지 생활이 었지만 4 갱 그래도 소녀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21:26
남아있다 과수원에 고요한 녹음 여성적인 바다가 기막히게 어우러져
21:34
목가적 풍경 을 차 아내 더 그 한적한 마을은 어린 내게
21:40
그대로 나 건이었다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나는 초등학교
21:47
고학년을 다니고 있어야 할 나이였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 학교에 간다는
21:53
것은 꿈도 꾸지 못한채 나는 매일 빨갛게 타는 저녁놀이
22:00
온 마을을 완전히 감싸 안을 때까지 동생들과 망아지처럼 뛰어 놀았다
22:08
하지만 그 즐겁던 시간도 잠시였다 얼마
22:13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이 수복 됐고
22:19
우리는 서둘러 감천 을 떨었다 철 또는 파괴되어 부산과 서울 사이엔
22:26
경우 단선 많이 복구 돼 있었다 기어가듯 완만한 속도의 기차는
22:33
가 다가서고 가 다가서고 4 그렇게 4월 길이었다
22:38
서울까지 이루는 그 여정 내내 차창밖으로 펼쳐지던 풍경을 너무도 초
22:44
참 해 어린 내 마음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22:50
전쟁의 할퀴고 간 파괴의 흔적과 책 부패 어떰 이가
22:56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어렵게 돌아온 서울에서
23:03
우리는 고작 섞다 를 지내고 는 다시 피난 보다 를 쌓여 있다
23:09
중공군의 한국전 에 끼어 든 것이었다 1사 후 터였다
23:16
6.25 남침 때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해 적 치하에서 엄청난 고초를 당한
23:22
경험이 는 서울 시민들의 서둘러 피난길에 나섰다
23:28
우리는 이번에는 아예 수원이나 대전 보다도 더 남쪽인 태그로 같다
23:35
그러나 대구에서도 들려오는 포 성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23:41
우리는 더 멀고 그래서 더 안전할 것 같은 부산으로 가기 위해
23:47
황 왕의 비난 짐을 꾸려 다시 트럭에 실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 부산으로 떠나지
23:54
못했다 그 날 어머니는 아버지도 계시지 않은 그
24:00
낯섦 피난 지에서 돌연 산길을 느끼신 것이다
24:06
어머니는 그날 마침내 그토록 원하시던 아들을 출산해 셨다
24:13
아들을 얻어 평생의 한을 푸시 므로 써 대구는 어머니에게 핀 한지가 아니라
24:19
축복의 장소가 된 것이다 마흔 한 살의 노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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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되는 피난 사리로 영양 실조 까지 겹쳐 난산을 하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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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3 무와 태어난 아기는 모두 건강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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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우리 부모님이 외아들 창 속의 출생이 어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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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급한 1 4 후퇴 로부터 겨우 한 주 딘 1951년 1월 11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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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산 우주를 하는 동안 다행히 전세가 호 존 되서 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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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피난 가지 않아도 됐고 우리 가족은 그대로 태 구 에 눌러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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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지 대구가 내게 특별한 곳이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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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통에 기약없이 중단됐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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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피난민 학생 수에 비해 학교가 턱없이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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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나무기둥 녀 깨에 겨우 지붕만 척 얹어 놓은 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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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서 공부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것이 대구 봉덕 국민학교에 임시 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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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임시 교사는 기와를 구워 보관하던 참고했다 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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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새로 배정돼 들어간 정식 피난 지 학교가 히도 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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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히도 국민학교 했다 그 학교는 공교롭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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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느 날 내가 사랑에 빠지게 될 그 사람의 모교 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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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동 100번지 에 휘도 초등학교 오른쪽엔 그 유명한 약점 골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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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 처럼 길게 뻗어 있었다 본관 남쪽 운동장 앞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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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허름한 양조장 건물 한 동이 서 있었다 내가 수업을 듣던 6학년 교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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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계단을 오르면 보이는 2층 임시 교실이 얻는데 아래층 양조장 으로부터 이따금 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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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기위해 찌는 꽃 읍 암 냄새가 솟아올랐다 넉넉지 못한 끼니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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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 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그 향기로운 냄새는 번번이 우리를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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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남학생들이 슬쩍 해용 양조장에서 건조 시키려고 널어놓은 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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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을 얻어 먹고 학급 전체가 단체로 혼이 나던 일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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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다운 학교는 이후 종로 초등학교 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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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씨 때문에 토박이 산에 아이들로부터 서 울 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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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아내기 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공부에 대한 갈망으로 목말랐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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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된 학업의 열심이었다 1년후 피난 지에서 시행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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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고시를 통해 나는 서울 경기 여 중에 합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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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중 서울이 수복 뜰때까지 연합 중학교 라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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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숙명 직명 같은 다른 학교의 여학생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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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대구에서의 여 학교 생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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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반년도 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임지 가 논산으로 박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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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여중 으로 전화 캐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후 2년간 계속된 떠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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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생활의 시작이었다 군인 가족들이 가정의 임지를 따라 전학을 다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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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1쌍 2개 냈지만 전시 탓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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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버지의 인지는 정말 너무도 자주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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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행 자녀교육을 위해 두 집 살림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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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었다 결국 나는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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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 광 조 전 남녀 중 지내 여 중으로 3번의 전학을 해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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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결과적으로는 대구의 여 남 녀 중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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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본교 경기 여중 까지 합치면 중학 과정 3년 동안 무려 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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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옮겨 다니는 고단한 유랑을 치러 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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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혜 계신 아버지가 전학 수속을 위해 되신 보내신 젊은 군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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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복도 저편에 나타나면 난 아무말없이 다시 학교를 옮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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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다 그 분들은 대개 육군 상사나 중 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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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 친구들을 떠나 다시 낯선 곳으로 가야 하는 이별에 통증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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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됐다 낯선 치 낯선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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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 학교 낯선 친구들 지역적으로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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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를 넘나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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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 나는 이동이 어따 내 성적이 어떤 나는 그 낯선 공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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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사이를 묵묵히 물결처럼 흘러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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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의혹을 내어 조금 해야 한다는 것 그 찾은 도전 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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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참 막막한 것이었다 더구나 학교 마다 학업에 진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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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요 때를 먹고 남몰래 울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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