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1

알라딘: [전자책]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알라딘: [전자책]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eBook]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 김규항 아포리즘  pdf
김규항 (지은이),변정수 (엮은이)알마2018-02-01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종이책 페이지수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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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저자

김규항은 일상에서 비롯된 소재와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 현실을 깊이 응시하는 직관력, 그리고 직접적이면서도 명료한 어법이 돋보이는 글을 통해 꾸준히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어 왔다. 그의 아포리즘 중에서 곁에 두고 음미할 만한 문장들을 평론가 변정수가 가려 뽑았다.

문장은 간결하며, 함축미를 특색으로 한다. 묵직함과 여운을 주며, 글이 쓰인 맥락에서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묵상의 매개로 활용 폭이 넓다. 이는 저자의 다분히 의식적인 문장론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는 “어떤 문장론을 갖고 글을 쓰진 않지만,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즉 내가 단어와 단어를 꿰고 이어 붙여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단지 세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끊임없이 이 사회에 저항하며 그의 글에는 불온한 매력이 넘친다. 그의 글이 비타협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가 정직하게 일하면서도 인간적 위엄을 유지하기 힘든 사람들 편에서만 글을 쓰기 때문이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책이 주는 존재감은 상당하다. 저자가 겪은 현실을 통해 사회와 문화 속에 나타나는 현상과 비평을 보다 가까이에서 이해하고, 한층 기품 있는 독서를 통해서 저자의 목소리를 다양한 의미로 수용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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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없는 도서입니다.

책속에서
첫문장
사람은 내적 음성과 대화하고 외적 음성과도 대화할 때 비로소 외롭지 않다.
P. 5 감촉에 익숙해지면 향기를 잊기 쉽다.
P. 29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공부는 '마음껏 놀기'다.
P. 51 진정 종교적인 건 더이상 종교적일 필요가 없다.
P. 69 내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내 정치가 아니다!
P. 99 억압과 싸우는 사람에게 성찰보다 중요한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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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규항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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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비평가이자 교육운동가. 1998년 이래 뚜렷한 계급적 관점과 시스템의 본질에 대한 천착, 간결한 문체와 통찰력 있는 문장의 글을 써왔다. 근래에는 저술에 집중하면서 현대미술과 협업도 시도한다. 2003년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를 창간, 발행인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B급좌파》 《예수전》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등이 있다.
페이스북 /gyuhang 홈페이지 gyuhang.net
최근작 : <혁명노트>,<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김규항의 좌판> … 총 25종 (모두보기)
SNS : https://www.facebook.com/gyuhang.kim


변정수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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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 모르던 20대에 한국어 연구자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기도 했으나, ‘프리랜서를 빙자한 백수’로 불안정한 생계를 버티던 30대엔 잡글을 기고할 지면을 기웃거리는 간간이 출판편집자로도 일했다. 출판 편집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으로 제법 충만하고 떳떳한 삶을 꾸려내던 40대도 어느새 뒤로 하고, '페이스북 잉여'로 소일하는 한편으로 텔레비전 드라마 시청과 수학 문제 풀기에 탐닉하는 50대를 즐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비평집 《출판생태계 살리기》, 《그들만의 상식》, 《만장일치는 무효다》, 《상식으로 상식에 도전하기》, 에세이... 더보기
최근작 : <나의 발견>,<한판 붙자, 맞춤법!>,<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 총 16종 (모두보기)
SNS : http://ddonggae.kr/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시대의 아포리스트 김규항이 말하다

“사람은 내적 음성과 대화하고 외적 음성과도 대화할 때
비로소 외롭지 않다”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는 일상에서 우러나온 소재와 어지러운 현실의 본질을 꿰뚫는 직관, 그리고 비판과 성찰이 공존하는 글로 꾸준히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 온 김규항의 아포리즘을 모아 엮은 책이다. 이 책의 글은 김규항이 공개적인 글쓰기를 시작한 1998년부터 2016년까지 그의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글을 토대로 출판평론가 변정수가 일 년 여의 기간 동안 꼼꼼히 정독하여, 함축미가 돋보이는 아포리즘으로 분류할 수 있는 문장을 세심하게 가려 뽑은 것이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책이 주는 존재감은 상당하다. 간결한 함축미가 돋보이는 김규항의 글을 읽는 독자는 저자가 겪은 현실을 통해 사회와 문화 속에 나타나는 현상과 비평을 보다 가까이에서 이해하고, 한층 기품 있는 독서를 통해서 저자의 목소... 더보기

스포일러 포함 글 작성 유의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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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페이지 다 필사 각.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b급 좌파 김규항의 글은 여전히 잘 벼려진 예리한 날의 멋진 검 같다.  구매
공쟝쟝 2018-05-04 공감 (1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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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꺼내어 다시 읽고 곱씹을 책이다  구매
Blue 2017-08-13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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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에대한 성찰글들이 많을줄 알았는데 정치 종교 교육에 대한 내용이 굵직하게 있네요 ㅎㅎ 서점에서 앞부분만 읽고 산 판단미스.  구매
아루미 2017-08-0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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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을 아껴 먹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합니다. 맛있는 ‘쓴 약‘이 되면 더욱 좋구요 ~ ^^;;  구매
들풀처럼 2017-07-0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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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 전반에 걸쳐 예리한 통찰을 준다. 고독하지 않고 현실을 쉽게 판단하고 선택한다면 그 댓가는 분명 호되게 치르게 되는것을 알기에. 김규항 아포리즘이 더 큰 통찰력으로 나를 고독과 고뇌하게 한다.항상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면서 내면화시키려 한다. 김규항의 글들은 금강석같다.  구매
dream 2017-09-19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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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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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와 건전한 보수의 상관관계? 새창으로 보기 구매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라는 제목의 김규항 아포리즘이란다.

김규항이 짓고 변정수가 엮었단다.



개인적으로 김규항의 글들을 완전 좋아하는지라,

이 책도 그러할 줄로 알았다.

한손에 들어오는 크기도 그렇고,

리본끈으로 만든 책끈도 그렇고,

하드 커버의 장정도 좋았다.



그런데 몇 장을 넘겨 읽다가,

이 글들이 언젠가 어디선가 읽었던 글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고 해야겠지만,

.

.

.

철푸덕~OTL

그렇지 않았다.



김규항의 책을,

아니 그의 글을 몇 편이라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의 글은 응축되고 집약되었으며 단정하다.

그의 '문장론'의 일부만을 봐도 그의 글쓰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간결함, 리듬, 그리고 쉬움 같은 문장에 대한 내 모든 태도들은 오로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이오덕 선생이 말씀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 모름지기 글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글을 씀으로서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

                                                                                                     -  '김규항'의 '나의 문장론'중 일부 -



물론 이런 그의 글쓰기 방식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건 아니라서, 이 책도 좋았다.

아포리즘이라는 격언이나 잠언집의 형태도 맘에 들었다.

그런데 그의 홈페이지나 다른 책들에서 보았던 글에는 연도와 날짜가 있었고,

제목이 있어서,

얘기하고자 하는 논점을 명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반면,

이 책에서는 글을 쓴 연도와 날짜, 제목도 없어서,

격언이나 잠언집이라는 함의는 알겠는데,

어떤 일이 있을 때 어떤 얘기를 하고자 쓰여진 글인지,

전달하는 바가 모호해진다.



그동안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어서 좋았는데,

요번 책은 앞, 뒤 자르고 중간만 뭉뚱그리는 식이다.

어느 사안과 관련됐던 글인지 내 기억을 더듬는데,

내 몹쓸 기억력은 가물거리는 걸로 부족해서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에게 이런 하소연을 하며, 김규항 홈피의 이 글을 보여주었다.



이게 좌파 아닌가 했더니,



우리나라에 좌파는 없다.

좌파가 설 자리가 없다.

좌파는 설 여지가 있어야 생기는 거다.

김규항의 저런 정도 사고는 건전한 보수다.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이런 걸 묻길 기다렸던 듯 이런 얘기도 했다.



건전한 보수가 나라를 더 바로 세울 수 있어야 하는데 걱정이다.

건전한 보수가 망하면 좌파는 죽는다.

심상정의 정의당처럼 건전한 보수를 세우는데 일조해야지

날을 세우는 건 좌파가 지금 할일이 아니다.



열변을 토하는데, 내가 뭐라고 했나?--;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구분도 좋았지만,

내가 가장 좋았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예수전을 쓴 그의 저력에 미루어 종교적으로 해석해도 좋겠고,

나처럼 그냥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완전 좋다.



기도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은 없다.

사람에겐 가진 소중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능력이 없다.

형식이 무엇이든 기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위험하거나 적어도 섣부르다.(7쪽)



어느 단계부터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수정란, 아니 난자 한 개라도 함부로 다루어선 안 될 생명이지만, 진정한 인간은 '부끄러움을 아는 단계'부터다.

사회적 이견을 가진 사람은 존중할 수 있지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존중할 순 없다.(10쪽)



내가 김규항을 '이게 좌파가 아닌가'했던 것은 오랫동안 보아 온 아래 글과 관련해서 이다.



세상은 '청년 시절에나 하는 운동'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일생에 걸쳐 지속되는 신념들로 바뀐다.

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21쪽)



친구가 하는 얘기를 이해 못 하겠는 것은 아니었지만,

또 다른 용어를 만들어 내는 건 결사반대다.



좌파도, 우파도 내겐 너무 어렵기만한 고로,

난 쪽파든 대파로 살아야겠다.



암튼 종교나 파를 가지고 한쪽으로 치우쳐서 읽어도 좋았을테고,

아무 생각없이 그냥 읽어도 좋았다.



이렇게 저렇게 넘기며, 한구절씩 외워두었다가,

격언이나 좌우명처럼 한번씩 써먹어야겠다.



입안에서 궁글리며 묵히고 벼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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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6-22 공감(30) 댓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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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아포리즘을 음미하며 새창으로 보기 구매



이 리뷰는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에 담겨 있는 아포리즘을 음미하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쓰고 나서 여섯 개의 핵심어를 뽑아 번호를 붙여 다시 정리한 것이다.






   

1. 글쓰기



나는 “예술이 어때야 한다”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에 반대한다. 예술은 그런 당위에서 가장 자유로운 어떤 것이다. 그리고 당위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그런 당위에서 집중하는 예술조차 자유롭게 구가되며 존중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142쪽)





소설에 대한 리뷰를 쓸 때 소설에 대한 나의 해석이 틀린 게 아닐까 해서 고민한 적이 있는데 이젠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해석은 그저 나의 생각일 뿐임을, 나의 해석은 정답이나 오답으로 나눠지지 않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소설을 읽는다고 해서 느낀 점이나 깨달은 점이 어찌 모든 사람들이 똑같을 수 있겠는가. 각자 인생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가 다르고 삶의 경험이 다르고 환경이나 처지가 다른데도 모든 이들이 똑같이 느낀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만 명의 사람들이 만 개의 내용으로 “문학은 이런 것이다!” “예술은 이런 것이다!”라고 떠들어대는 풍경이야말로 가장 문학적이며 가장 예술적인 사회의 풍경이 아닐까.(142쪽)





이 리뷰는 만 개의 리뷰 중 하나라고 가볍게 생각하며 쓰리라. 하지만 가볍게 생각하며 쓴다고 해도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보여 주는 일이라고 믿는다. 저자에 따르면 문장에 대한 자신의 태도는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같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154쪽)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나 역시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연구할 때가 있는데 다음의 글을 읽고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글쓰기 책을 읽는다고 해서 글을 잘 쓸 수 있거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글쓰기에 도움을 주는 건 느린 독서, 고독한 사색, 인간의 이면에 대한 관심 같은 것들이다. 그것들을 대체할 방법은 없다.(49쪽)





여기서 ‘느린 독서’라 함은 꼼꼼히 읽는 것을 말할 것 같고, ‘고독한 사색’이라 함은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을 말할 것 같고, ‘인간의 이면에 대한 관심’이라 함은 사람의 겉모습을 통해 보이는 대로만 보지 않는 것을 말할 것 같다. 이것을 내가 다른 말로 표현해 보면 ‘글쓰기에 도움을 주는 것은 정보와 지식의 습득 그리고 사고력과 관찰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 덧붙일 변수가 있다면 ‘어떤 체험을 했느냐?’, ‘체험을 통해 무엇을 느꼈느냐,’ ‘어떤 일의 인과 관계를 분석해 본 적이 있느냐?’ 등이 되지 않을까.





고정된 진리의 말, 정의의 말 같은 건 없다. 의미를 담은 모든 말은 편견이며 우리는 이 순간 어떤 편견이 좀더 공공의 이해에 부합하는가를 유동적으로 고민할 뿐이다. 말은 잡히긴커녕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어려운, 쉬지 않고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과 같다.(129쪽)





나의 글 역시 나의 편견으로 가득차 있겠다. 내가 옳다고 보는 무엇이 객관적으로 볼 때도 늘 옳은 건 아닐 거라는 걸 안다.





당대를 올바로 보기란 정말 어렵다.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134쪽)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도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다름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다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글을 쓰는 사람은 이런 점을 유념하여 자신의 생각이 옳음에 대해 강한 확신은 삼갈 일이다.










2. 독서



우리에게 독서가 필요한 이유를 뭐라고 말하면 정확한 답이 될까?





우리가 바쁘게 살면서도 굳이 남의 글을 읽거나 의견을 듣는 이유는 내 생각을 발전시키기 위해서이지, 내 생각과 같은지 다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117쪽)





내가 독서하는 이유는 첫째, 독서를 통해 지식인이라고 할 만한 저자의 생각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둘째, 독서를 하는 동안 걱정과 스트레스 등 모든 걸 ‘잊기’ 때문이다. 셋째, 독서가 그냥 ‘재밌기’ 때문이다. 이 셋째 이유가 제일 중요하다. 아무리 그럴 듯한 목적이 있더라도 책을 읽는 게 재미가 없다면 그래서 인내를 가져야만 읽을 수 있다면 바쁜 일상을 살며 독서를 하는 게 쉽지 않으리라.










3. 부모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부모로서 자격 미달’임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고등학생이었던 큰딸이 어느 날 친구 집에서 자고 올 테니 허락을 해 달라고 학교에서 내게 전화를 했다. 그 친구는 지방에서 올라와 학교 근처에서 자취방을 얻어 혼자서 생활하며 학교를 다니는 아이였다. 외박을 허락해 달라는 건 처음 있는 일이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서 당황스러워하며 무조건 안 된다고 하였다. 고등학생이 외박이라니, 하면서 펄쩍 뛰었다. 그런데 몇 번이고 폰 문자를 보내며 졸라대서 나중엔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아빠가 허락하면 외박을 허락할게.’라고. 그런데 그 다음에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빠도 ‘엄마가 허락하면 허락할게.’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로에게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의 똑똑한 친구에게 의견을 물으면 된다는 것. 당장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좋은 답을 줬다. 그 친구의 어머니와 통화를 해서 그 어머니가 허락하면 자고 와도 된다고 해 보라는 것이다. 아하,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그 어머니가 허락한다면 왠지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딸에게 문자를 보내 그대로 전하며 그 어머니의 폰 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딸이, 그냥 집에 오겠다고 답장을 했다. 그 이유인 즉 그 친구의 어머니는 딸에게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 주며 하나의 조건을 내세웠는데 그 조건이란 게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자취방에 절대로 친구를 데리고 오지 말 것.’ 아마도 그 어머니는 딸에게 자취방을 얻어 주면서 자취방에 친구가 들락거리며 모여 놀까 봐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여고 시절이란 친구와 함께 있다면 밤을 새워 수다를 떨어도 좋을 그런 시절이 아닌가. 만약 얘기하며 노느라 밤을 새운다든지 잠을 덜 잔다든지 하면 그 다음날 수업에 지장이 있을 게 뻔한 일인데 어떤 부모가 그걸 바라겠는가. 이리하여 나의 똑똑한 친구 덕에 딸의 외박 문제가 깨끗이 종결되었다.





지금도 그때처럼 부모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모를 때가 가끔 있다. 그럴 때마다 그 친구의 의견을 묻곤 한다.





내가 문제 있는 부모임을 알아채는 결정적인 순간은 ‘나 정도면 괜찮은 부모’라는 생각이 들 때다. 자기 확신 없는 문제는 없다.(15쪽)





이 글을 읽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모로서 자격 미달’을 느낄 때가 많으니 최소한 ‘문제 있는 부모’는 면한 것 같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나 역시 ‘나 정도면 괜찮은 부모’라고 자신할 때가 있다는 걸 생각해 냈다.





큰딸이 친구 집에서 자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그때 생각했었다. 이 아이에게도 ‘하고 싶은 그런 것이 있구나.’ 하고. 난 그저 아이가 공부에 집중하고 학교 성적에 연연해하는 아이로만 알았다. 그래서 아이가 갑자기 외박 타령을 왜 하는 건지 당황스러웠고 이럴 땐 부모로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라서 애먹었다.





지금은 아이들에 대해 더 모르겠다. 부모로서 자식은 마냥 어린애로만 보여서 내가 말장난을 치면 둘째딸이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난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수준을 높여 주세요.”라고. 이럴 때 난 섭섭해진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많이 달라져 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달라지는 속도를 내가 못 쫓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학교에서 처벌해야 하는 수위로 문제를 일으킨 몇 명의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아이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라고. 학원에 가지 않은 것도, 술을 마시게 된 것도, 외박을 한 것도 친구를 잘못 사귄 탓이라고 모든 학부모가 말한다면 도대체 그 학생들을 그렇게 만든 나쁜 친구는 누구인가? 그런데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다면 나도 아마 똑같이 그렇게 말할 것 같다. “우리 아이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라고. 나는 우리 아이를 제대로 정확하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아이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모르는 존재가 아니던가. 





아이를 보며 종종 되새겨야 한다.
‘나는 이 사람을 잘 모른다.’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데서 부모의 비극이 시작된다.(42쪽)





티브이 드라마를 통해 욕심 많은 어머니가 자식의 인생을 망쳐 버리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자식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성과 부모가 며느리로 삼고 싶은 여성이 일치하는 않는 데에서 비극이 시작되고, 자식이 바라는 직업과 부모가 바라는 직업이 일치하지 않는 데에서 비극이 시작된다. 자기가 자식을 가장 사랑한다고 믿는 부모가 오히려 자식을 불행 속으로 내몰고 마는 형국을 초래한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을 잘 안다고 믿는 나머지 자식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종종, 아니 어쩌면 거의 언제나 ‘내 자식을 위하여’ 자식을 괴롭히고, ‘내 애인을 위하여’ 애인을 괴롭히며, 급기야 ‘내 국민을 위하여’ 국민을 괴롭힌다.(45쪽)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식을 구속하고 간섭하기보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객관적인 시각부터 가져야 할 것 같다.





자기 자식에겐 좋은 경험만 하게 만들고 싶고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은 건 부모로서 갖는 당연한 욕심일 터이다. 하지만 양지의 세계와 음지의 세계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양자택일이 불가능하다면 부모로서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란 어떤 것일까? 다음의 글로 정답을 헤아려 보고자 한다.





어른들이 할 일은 아이들에게
맑고 깨끗한 것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맑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것이다.(48쪽)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열정이 없는 사람이 좋은 부모가 될 가능성은 없다.(35쪽)





이렇게 말하는 딸이 있다.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라고. 반면에 우리 부모님을 보면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딸이 있다.





딸은 단지 딸, 아들 하는 자식 중의 하나가 아니다. 딸은 한 남자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가장 정교하게 알아낼 수 있는(폭로하는), ‘삶의 시험지’이다. 한 남자가 ‘딸에게서 존경받는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면 그의 삶은 좀더 근사해질 것이다.(150쪽)












4. 걱정



아이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영어 학원에 가게 했는데 같은 반 아이가 영어 학원과 수학 학원을 다닌다는 말을 들은 학부모는 우리 아이도 수학 학원을 추가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며 걱정하기 시작한다. 늘 남과 비교하며 살다 보면 만족이 없고 걱정만 늘어난다. 





사람은 걱정이 일상화하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잊는 속성이 있다. 걱정하는 습관만 남아, 걱정을 걱정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걱정으로 지배하는’ 체제다. 자본주의는 끝없이 걱정하게 만드는 것만으로 끝없이 지배한다.(27쪽)





이런 경험을 누구나 해 봤으리라. 걱정이 하나 있어서 그게 중대한 문제로 여겨지더니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이 생기니까 앞의 걱정은 대수롭지 않은 게 되어 버리는 것. 예를 들면 이런 것. 누군가가 나에 대해 험담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기분이 나빠 그날 밤잠을 설쳤는데 그 다음날 아이가 머리가 아프다며 고통스러워해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동안 앞의 험담 문제는 대수롭지 않은 게 되어 버린다. 큰 걱정이 작은 걱정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걱정이 있을 때 그것보다 더 심각한 걱정을 상상해 보면 효과가 있을까?












5. 전쟁



이봐, 전쟁이 나면 총이니 폭탄이니 핵이니 이런 걸로 인해 몸을 다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저절로 죽게 돼. 왜 그런지 알아? 고혈압 환자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자네 알지? 이런 환자들은 혈압을 효과적으로 조절해 주는 고혈압 약을 매일 먹어야 한단 말이야.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병원 건물이 파괴되고 의약품 보급이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게. 어찌 되겠는가? 고혈압 환자들은 결국 죽겠지? 또 우울증 약을 매일 복용해야 하는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우울증 약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 보게. 특히 불안증이 심한 우울증 환자가 자신이 꼭 먹어야만 하는 약을 구할 수 없어 불안증이 더 심해지고 큰 공포를 느끼게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만큼 끔찍한 일을 하나 더 생각해 볼 수 있다네. 내가 다치지 않아도 말이야, 가족이나 친척이 또는 이웃 사람이 전쟁으로 인해 다쳤거나 죽었다는 소식을 계속 전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얼마나 괴롭겠나? 그래서 난 전쟁이 나면 살아남아서 집이 무너지고 도로가 폭파되고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는 소식을 수시로 들으며 불행하게 살기보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네.





가장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라네. 전쟁 없이 늘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 중에는 평화의 소중함을 모르고 큰 욕심을 부리며 사소한 일로 고민하며 괴로움을 하소연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네.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나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일들이 발생하면 그때 가서 평화롭던 시간들을 그리워한다네. 왜 진작 평화에 대한 감사를 할 줄 모르냔 말이야. 지금 하늘을 보니 맑고 푸르며 햇살은 눈부셔서 전깃줄에 걸쳐 있는 거미줄마저 반짝거리며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난 티브이 뉴스를 통해 다른 나라에서 전쟁으로 인해 다쳐 피 흘리는 부상자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가엾게 여겨지면서 우리가 전쟁을 겪지 않으며 사는 것에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네.





오늘 전쟁을 반대하는 것만이 내일 전쟁을 거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149쪽)












6. 감사



다음의 글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기도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은 없다.
사람에겐 가진 소중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능력이 없다.
형식이 무엇이든 기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위험하거나 적어도 섣부르다.(7쪽)



























....................................................................

* 맺는말



(아포리즘의 뜻 : 깊은 진리를 간결하게 표현한 말이나 글. 격언, 금언, 잠언, 경구 따위를 이른다.) 





이 책은 아포리즘으로 채워져 있다. 아포리즘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 압축성 있는 글이기에 마치 시를 읽듯이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며 읽어야 제맛이 난다. 쓰윽 한 번 훑듯이 읽는다면, 그래서 무엇을 읽었는지 나중에 기억하지 못한다면 실패한 독서가 될 것이다. 실패한 독서가 되지 않고 성공한 독서가 되기 위해 나는 이 책을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읽었다.





소설을 읽을 땐 최소한 몇 장을 넘겨야 밑줄을 긋고 싶은 구절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책은 페이지마다 밑줄을 긋고 싶은 구절로 가득차 있어서 빨리 읽는 게 아까워 느린 독서를 했다. 이 책을 커피로 말하면 벌컥벌컥 마시는 냉커피가 아니라 호호 불며 마시는 뜨거운 커피였다. 이 책을 친구로 말하면 쉽게 사귀고 빠른 시간에 가까워진 새 친구가 아니라 어렵게 사귀고 많은 시간이 흘러서 가까워진 오래된 친구였다.





저자는 “세상이 바뀌길 바란다면 생각의 문부터 열어라.”(121쪽)라고 말하고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건 결국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해체하는 것이다.”(109쪽)라고 말한다. 저자가 걸은 사유의 길을 따라가노라면 이상적인 사회를 향해 열려 있는 문에 이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저자가 낸 책 중에서 정수만 모아 놓은 책이 아닐까 여겨질 만큼 만족스럽기도 했다.





내가 읽은 아포리즘의 책 중에서 몇 년 뒤에 또 읽어도 좋을 책을 꼽는다면 프리드리히 니체의 <초역 니체의 말 2>, 에밀 시오랑의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의 <잠언과 성찰> 등이다. 그리고 한 권 더 추가한다면 바로 이 책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이다. 나처럼 아포리즘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주저 없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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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9-27 공감(24) 댓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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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을 구분해야 한다. 고독은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고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과 차단된 고통이다. 자신과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을까. 고독을 피한다면 늘 사람에 둘러싸여도 외로움을 피할 수 없다. 용맹하게 고독해야 한다. p6.





글을 어렵게 쓰지 않는다. 알아듣기 힘들게 말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맨날 쓰는 평범한 단어를 똑같이 쓰고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본 것 같은 이야기를 다시 한다. 굳이 또 읽거나 들어야 하나 싶은 말을 또 한다. 하지만 남다르다. 전혀 특별할 게 없는 말인데 가슴을 쿵쿵 울린다. 읽다 보면 무척 짜릿하다. 비결이 뭘까?



일상에서 우리가 얻는 배움이나 깨달음도 다 그렇지 않을까? 누구나 다 알 것 같은 그런 말 한 마디가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하게 다가와 마음을 움직인다.



마음을 움직이는 말 한 마디. 때때로 그런 말을 해주는 어른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만 많이 먹은 무늬만 어른 말고 나이와 상관없이 진짜로 뭔가 배우고 싶은 면모가 있는 그런 어른. 아! 이 책의 평범한 글들이 비범하게 마음을 울린 비결이 뭔지 알 것 같다. 그냥, 이 책을 쓴 사람이 ‘진짜 어른’이었던 것이다.





담배를 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끊는 것’이다. 나머지 방법들은 실은 담배를 끊는 방법이 아니라 담배에 대한 미련을 표현하는 방법들이다. p82.





김규항은 나이가 꽤 많다. 1962년생이다. 그런데 그의 글을 읽다보면 주변에서 보는 흔한 62년생 아저씨들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종류의 어른을 만나게 된다. 칼 같이 단호하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옳은 건 옳고 틀린 건 틀리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같은 말이 끼어들 틈이 없다. 화려한 수사법 같은 거 없다. 구차한 변명도 없다.





현명한 사람 중에, 단단하게 살아가는 사람 중에 매사에 남 탓만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가? p120.





뻥으로 센 척 나오는 말들이 아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담금질해온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내뿜는 뜨거운 기운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평생 힘껏 자기 일 열심히 해온 어느 노동자의 단단한 뒷모습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어쩌다보니 나도 말로 뭔가를 가르치며 살아야 하는 노동을 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이상한 헛소리나 지껄이는 추한 아저씨가 되지 않을까?





아저씨는 ‘나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른다. 나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남에 대해서도’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른다. 나의 껍데기에 대해서만, 남의 껍데기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말한다. 아저씨는 더 이상 ‘중년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경계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란 유기적이며 아저씨‘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누구든 조금씩은 아저씨다. p124.





김규항이 왜 여느 아저씨처럼 느껴지지 않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는 아저씨가 아니었으니까. ‘아저씨’란 나이와 상관없이 참 애처로운 존재다. 껍데기나 훑으며 지나가는 삶이라니. 껍데기 말고 알맹이를 만나려면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면 안 된다. 물건 소비하듯 삶을 지나치면 안 된다. 대충 시간을 흘려보내면 안 된다. 인생의 파도 속에서 나를 잃으면 안 된다.



‘나는 상품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좀 더 훌륭하게 살 수 있다. p22.



자기를 성찰한다는 건 자기만 생각하지 않는 것, 남 생각도 하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건 결국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해체하는 것이다. p109.



사람이 양식 있게 산다는 건 양식 있는 어휘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크든 작든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일에 양식 있게 판단하는 것이다. 실은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고 그걸 지키는 사람들은 매우 적다. 유식하다 무식하다는 제도교육 학력과는 상관이 없다. 사회의 한 성원으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볼 줄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무식한 사람이다. p39.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 양식을 갖추고 살아야 한다. 그 생각, 양식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다. 자기가 누리는 깃털 같이 가벼운 안락한 일상의 허상에서 내려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 보려고 한다면. 나 자신만 편하고 부유하게 잘 살면 된다는 편협한 인식을 깰 수 있다면. 결국 김규항이 말하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최소한의 ‘상식’이다.





남보다 호사를 누리는 게 자랑이 아니라 머리를 긁적이게 하는, 대개의 사람이 그 정도의 양식을 갖춘다면, 천국에 다가간 게 아닐까. p67.



남 겪는 걸 겪지 않고 남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이 되긴 어렵다. p48.



오늘 20대는 모두 88만원 세대인가? 그렇진 않다. 그중엔 소수의 88억 세대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존재한다. 대다수의 20대가 88만원 세대가 되어야 하는 이유 또한 소수의 88억 세대가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존재하기 때문(혹은, 존재하게하기 위해서)이다. 인텔리들이 계급이라는 말을 폐기하려는 경향과는 아랑곳없이 계급적 격차는 더욱 더 벌어지고 있다. p87.





아직까지 ‘계급’을 빼놓고 인간세상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보지 못했다. 역사에서 계급 갈등을 뺀다면 역사책에 실린 수많은 글자들은 신화 속 옛날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대체 왜 계급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걸까? 구닥다리 같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다보니 세대 간 갈등이니 세대 전쟁이니 같은 헛발질을 계속 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틀은 현실의 부조리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의 힘을 더 키워주게 된다.



글을 읽다가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된다. 나만의 착각 속에서 안주하지 않으려면 세상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내 옆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도 보지 못하게 된다. 다른 사람 눈물이 아픈 건 모르고 내 눈물 짠 것만 생각하며 살다간 악취 나는 삶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이 책은 김규항의 ‘신작’은 아닌 것 같다. ≪B급 좌파≫에서 읽었던 구절들도 보여 반가웠다. 아마도 글쓴이가 지금까지 써왔던 칼럼들을 엮은이가 잘 발췌해서 내놓은 모양이다. 김규항의 책들을 꾸준히 읽어온 사람이라면 이 책은 그다지 새롭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나처럼 예전 책 한 두 권 읽어봤거나 처음 접해보는 사람은 무척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꾸준히 읽어왔던 사람이더라도 분명히 얻어갈 만한 게 있는 책이다.



칼럼의 구체적 장면들은 지워졌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좀 더 ‘내 관점에서 읽기’가 가능했다. “야! 세상 다 끝난 거 아니야! 너는 충분히 가치 있고 멋있어! 그러니까 힘내”라고 말해주는 책만 힘을 주는 게 아니다. 때때로 어떻게 살아야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는지를 따져보면서 따끔하게 등짝 때려주는 말도 필요하다. 대충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핑계 대지 말고 제대로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힘을 주는 책’이다.





인간의 모습에서 겸손보다 더 품위 있는 건 없다. p13.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우애나 연대 없이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소비나 물질적 축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순간, 바로 그 순간들이다.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경로는 사랑이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확인할 때 우린 어지간히 고단한 삶속에서도 행복하다. p23.



우리가 못 한다 아쉬워하는 많은 것들도 실을 안 해도 그만인 것들. p24.



‘남이 보기에 내가 어떤가’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만드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혼 없는 좀비가 되지 않는 비결은 ‘내가 보기에 나는 어떤가’를 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혼자일 수 있는 시간과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힘. p6.



현재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대안도 없다. 현재에 대한 비판은 대안의 첫 걸음이다. ‘대안 없는 비판’이라는 비판은 실은 어느 누구도 대안의 첫걸음도 떼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살포되는 체제의 주문呪文이다. p78.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을 회복하는 건 벽돌에서 인간이 되는 것, 개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 취향과 내 문화와 내 교육관과 내 인생관과 내 세계관과 내 연애의 기준을 가진 비로소 한 개인이 되는 것이다. p123.







덧붙여서.

이 구절은 무슨 말일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도 결혼을 하고 나중에 딸을 낳아서 키워보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 수 있을까?





딸은 단지 딸, 아들 하는 자식 중의 하나가 아니다. 딸은 한 남자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가장 정교하게 알아낼 수 있는(폭로하는), ‘삶의 시험지’이다. 한 남자가 ‘딸에게서 존경받는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면 그의 삶은 좀 더 근사해질 것이다.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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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탕아 2017-07-04 공감(19) 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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