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1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 책읽기 & 서평
H2O 2017. 4. 1. 22:57
http://blog.daum.net/hy2oxy/8693604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2년 넘게 침묵하던 이정희 통합진보당 전 대표가 속마음을 꺼내보였습니다.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미처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네요.
다른 책과는 달리 책장을 넘기는 게 쉽지 않습니다. 문단마다 아프고 쓰라린 기억이, 깊이 고민해보고 살펴야 할 내용들이 가득합니다.
(과거를 복기하며 그 이야기들을 꺼내고 문장으로 옮기면서 이 대표는 또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ㅠ)
국내외 정치인들 중에 '언행일치'의 수준이 가장 높은 정치인, 언행을 넘어 '심장과 입' 사이에 필터가 존재하지 않는 정치인...
'정치'가 무엇인지, '진보'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근본을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기에,
이정희 전 대표는 현존 정치인 중에 제가 가장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정치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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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돌아보는 일 없이 미래를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진보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조금이나마 나아진 때에 새삼스럽게 지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그동안 어려움 속에 진보정치를 일으키려 애쓴 분들에게 다시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런데도 굳이 이 글에서 과거와 미래를 함께 말하는 것은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나는 과거로부터 출발하여 미래로 가는 이어진 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나의 고백과 미래를향한 제안 역시 서로 잇닿아 있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 없이 미래를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더구나 중요한 시기에 진보정치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 미래를 말하면서 현재를 만들어낸 자신의 한계와 실책을 말하지 않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다.
과거만을 놓고 보더라도 통합진보당을 분열과 강제해산으로까지 끌고 간 수구집권세력의 공작정치의 실상을 역사에 기록해두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조차도 내부로부터 일어난 갈등과 분열을 막지 못한 나의 책임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길게 보면 역사는 정방향으로 흐르지만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크고 작은 굴곡을 겪는 것은 사람 개개인의 실책과 한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이다. 이 글에서 회고하는 과거는 모두의 이야기이거나 객관적인 서술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다. 그 시간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해법도 내 경험과 생각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21쪽)
: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2017. 들녁
1600만 광장촛불이 한국사회를 혁명적으로 진전시키는 동안, 진보정치는 현재 '존재감 제로'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이나 각각의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SNS나 광장에서의 깃발로 과시하려 하지만, 대다수 주권자들의 눈에는 '또다른 기성 정치세력'으로 비칠 수도 있는 상황이구요.
저는 그런 현재의 모습이 과거에서 비롯된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 과정은 진보정치세력이 한국정치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다가 분열된 2008년 민노당 분당을 시작으로 바닥까지 내려가던 진보정치세력을 규합시켰던 2012년 통합진보당 분당, 그리고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을 거치면서 '진보정치의 한 시대가 갔다'는 진단까지 나오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진보정치세력의 이해하기 힘든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평가의 부재'입니다. 주체적인 관점에서 내부에 대한 '평가'는 거의 없고 상대방의 책임과 잘못만 나열되는 '남탓'이 지배적입니다. '평가'와 '혁신'과 '성찰'을 말하지만, 그 내용은 없습니다.
중요한 시기에 진보정치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미래를 말하면서 현재를 만들어낸 과거의 자신의 한계와 실책을 말하지 않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다라는 비판은 상식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정치가 다시 시작하는 출발점은 언제나 '과거에 대한 진솔한 반성과 평가, 그리고 그를 통한 교훈'일 겁니다. 이건 만고불변의 진리라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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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아서 찍었다"고 하면 속 편하다>
"2012년 대선에서 51.6%의 국민들은 위장술에 속은 것이 아니라 박근혜를 선택했다.
이제 박근혜 찍은 것을 후회한다는 말들이 쏟 아진다. 속았다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의 수준이 누가 속이려 한다고 그대로 속을 정도인가? 6월항쟁도 정권교체도 바로 이 국민들이 해냈는데, 이번에는 "속았다”는 것인가? 박근혜는 대선에서 1,577만 표를 득표했다. 아무리 위장에 능숙 해도 몇 사람은 속일지언정 천오백 만 명을 어떻게 속일 수 있나.
국민들은 속아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박근혜가 더 나은 대통령이 될 만하다고 판단하고 그를 선택 한 것이다."(66쪽)
""속아서 찍었다"고 하면 속 편하다.
“내가 어쩌다 속았나” 한탄하고 나서 “앞으로는 속지 말자고 다짐하면 그만이다. 결론은 정신 똑똑히 차리고 속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쉽다.
하지만 그렇게 끝낼 일이 아니다. 민주 정부 10년을 만들었던 국민들이 2012년에는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숙고해야 한다. 천오백 만 국민들이 박근혜 지지가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한 이유가 있지 않나. 이것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방법도 나온다.
정신 똑똑히 차리자는 말로 끝내버리고 나면, 언제고 후회할 날이 또 올 뿐이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와 국민대통합을 말했다. 그러나 국민들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박근혜라고 믿어 표를 준 것은 아닐 터이다. 박근혜 복지정책 실현을 기대해 뽑아준 것도 아니다.
무엇이 박근혜에게 표를 주게 했을까. 국민들이 박근혜를 선택하게 된 이유 한 마디로 종북몰이의 결과다. 이명박 정권을 비롯한 수구세력이 종북몰이에 권력과 돈과 인력을 쏟아 부어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이다.
종북몰이가 박근혜와 최순실을 만들었다."(67쪽)
"분단 이후 70년 동안 국민들의 의식 속에 뿌리 깊게 스며든 북에 대한 적대감과 안보 불안감이 종편과 국정원(그리고 이명박 정부와 새누리당)에 의해 확대 증폭되자 많은 사람들의 대통령 후보 판단 기준은 자신도 모르게 '적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킬 사람'으로 설정되었다.
색안경은 대통령 선별 도구가 되었다. 그러면 결론은 박근혜일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 후보가 아무리 특전사 군복을 입고 나와도 바뀔 수 없는 결론이다.
2007년 대통령 후보 가운데 부자 되게 해줄 사람은 아무리 따져도 이명박이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69쪽)
"종북몰이는 박근혜를 선택하도록 국민들의 판단 기준을 바꿨을 뿐 아니라 박근혜 정권을 탄탄하게 유지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대통령 지지율은 정부가 북에 대해 강경 한 조치를 취할 때 올랐고, 통합진보당에 대해 적대적인 공격을 감행할 때 더욱 올랐다. 2013년 8월 국정원이 내란음모조작사건을 터트리자 대통령 지지율은 67%로 취임 이후 최고조에 달했다. 그해 11월, 통합진보당 해산청구를 감행하자 대통령 지지율은 4주 만에 반등했다. 해산청구에 대해 지지여론 이 60%를 넘었고 2014년 12월 강제해산 결정 지지도 압도적이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나기 전까지 종북몰이는 박근혜 정권을 만들어낸 묘책이었고 지지율 상승의 비결이었다."(70쪽)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것일까.
분단과 대결 상태에서 나온 북에 대한 적대의식, 내부의 적에 대한 불안과 증오가 국민들 의식 속에 오래 굳어져왔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정권교체도 이루었으나, 분단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의 머릿속에서조차 철조망을 걷어내지 못했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덧나고, 분단의 대결상태가 계속되면서 의심과 긴장도 늦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빨갱이 사냥의 공포 체험이 대물림되고 현재형으로 재생되기 때문이다."(71쪽)
: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2017. 들녁
이번 혁명적인 촛불처럼 한국의 주권자들은 비겁하거나 멍청하지 않습니다. 다만 분단체제와 신자유주의가 빌어붙이는 '공포'에 2012년 대선과 박근혜 4년 동안 갇혔던 것입니다.
2012년 야권의 정권교체 실패는 이명박-새누리당 정권과 종편, 국정원의 종북몰이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입니다.
야권 내에서는 2012년 총선 패배와 이에 따른 통합진보당 내분사태를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한 채, 저들의 통합진보당에 대한 종북몰이에 편승하면서 종북몰이를 자처한 측면이 컸습니다.
이정희 전 대표가 길게 설명하는 종북몰이의 배경은 한 마디로 '분단 트라우마'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분단체제를 외면해서는 작게는 국내 정치적 흐름과 세월호 참사에 대한 원인 파악도 힘들며, 크게는 미국의 싸드배치와 기득권세력의 종북몰이, 자본-노동 관계, 한미일군사동맹, 뿌리깊은 각종 관피아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지금도 박근혜, 최순실, 김기춘은 구속시키지만, 싸드배치와 적폐청산이 요원한 상황입니다.
저들은 여전히 '안보공세'와 '종북몰이'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릅니다.
"분단체제를 우회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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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정당이 유권자들의 지지를 모으려면 유권자들의 생활과 밀접한 구체적인 민생정책을 내놓고 그를 통해 유권자가 얻게 될 경제적 이익을 명확히 알려야 한다고들 한다. 정치평론가들이 자주 내놓는 충고다. 지금까지 진보정치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문구로 표현했다.
더 걷을 세금과 더 커질 복지권의 크기, 더 늘어날 돈의 액수를 말했다. 그런데 분명 진보정치는 17년 전 민주노동당 창당 때부터 이를 말해왔건만, 다른 야당들도 이 말을 하기 시작하자 국민들은 진보정치로부터 다른 야당들로 눈을 돌렸다. 왜 그럴까.
힘 있는 정당, 집권 가능성 있는 당이 하면 더 잘하리라는 합리적 추론의 결과다.”
“정책의 내용과 그 이익의 수치 말고, 진보정치가 이 정책을 통해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국민들에게 제대로 말해본 적 있나? 진보정치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관심 두는 것은 무엇인지 말 건네본 적 있나? 진보정치는 무엇을 위해 새로운 정책을 만들고 추진하려 하는지 이야기했던가?”(13쪽)
“진보정치가 소중히 여겨온 것들은 사실 돈의 액수 이상의 것이었다. 권력과 자본 앞에 숨죽이며 시키는 대로만 해야 했던 노동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고 노동조합을 만들며 인간답게 살아보는 행복을 느끼는 모습이 진보정치에는 가장 소중했다.
때로 경제적 이익을 포기해가며 인간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기도 하고 자신보다 다른 이에게 더 큰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면서 자긍심을 느끼는 존재가 사람이기에, 진보정치의 주된 관심은 임금 인상액이 얼마인지보다 평생 천대받고 살아온 노동자들이 사람대접 받는다고 느낄 수 있는지에 가 있었다.
하나의 정책이 유권자에게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익의 크기보다는, 그 정책을 지지한 국민들이 얼마나 큰 보람과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지가 진보정치에게는 더 중요했다. 진보정치인이 장관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는 노동자 농민 서민들이 대한민국의 주권자로서 힘을 갖는 것이 진보정치에 훨씬 중요했다.”
“새로운 정책을 내놓는 것, 이것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균등한 분배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인간으로서 존엄이 보장되고 노동자 농민 서민들이 주권자로서 힘을 발휘하는 세상. 이것이 진보정치가 끝내 이루려는 세상이라고 정확히 말해야 했다.
주권자들인 국민들이 저마다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자신들이스스로의 삶을 바꾸는 힘을 가진 존재라는 긍지를 찾아가는 것, 참으로 긴 여정이지만, 오직 진보정치만이 그 길을 함께 열어갈 수 있다고 믿기에 고단해도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했다.”(14쪽)
: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2017. 들녁
<다시 시작하는 대화>에서 제 머리를 번쩍 뜨게 하는 대목 중 하나입니다.
책의 서문에 나오는 이 대목은, 제가 2011년 민주노동당에 처음 가입한 이후, 민노당과 통합진보당 활동을 하면서 진보정당 및 진보진영에 대해 지속적으로 회의(문제의식)을 가졌던 부분에 대한 일종의 '해답'이었습니다.
그것은, 과연 우리가 바라는 사회(국가)가 "경제적으로 공평한 세상인 것인가", "일하는 사람이 주인되는 세상이 단순한 권력의 문제인가"와 관련한 것들이었거든요.
이 지점은 진보정당과 진보진영이 "당원들과 노동 농민 등 민중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이 책에 담겨 있는 부분 내용 중에 노동조합 조합원이 "우리에게 돈만 내고 몸만 대주게 하더니 이게 무슨 꼴이냐?"라고 외치는 부분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진보정치가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려면 지도부급이나 활동가, 당원(회원) 개인들 뿐 아니라 정당이나 단체 전체 차원에서 초심으로 돌아가 전면적으로 복기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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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통합과 2012년 총선에서 사과해야할 것들..>
"2012년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를 결성하는 것도 현실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자 기성정치에 몸담았던 사람들도 함께하겠다고 나섰다. 진보정치가 누구에게나 문을 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새로이 함께하려는 사람들을 진보정치의 헌신성으로 감싸 안고 도덕성으로 감동시킬 수 있을 만큼 준비와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대표로서 통합을 적극 추진했던 나 자신이, 함께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생각의 공감대를 넓히고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을 찬찬히 살피기보다 덩치를 키워 얻을 성과에 먼저 눈을 돌렸다.
통합하면 2012년 총선에서 모두 만족할 결과를 내리라 기대했고, 그러면 서로 차이가 있어도 통합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민주노동당은 새로운 동료들을 감싸 안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따라붙었다. 내부의 준비가 부족했던 것을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 통합에 대한 노동계와 당내의 반대도 총선 결과로 설득할 수 있다고 여겼다.
공감과 설득은 결과보다 과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89쪽)
"통합진보당이 창당되고 처음 치르는 총선은 새로운 동료들과 진보정치를 함께하기 위해 당의 다수를 이룬 민주노동당 출신 인사들의 헌신성과 도덕성이 돋보여야 하는 때였다.
하지만 정작 나타난 것은 이전에 없던 자리 욕심이었다. 민주노동당 출신과 참여당이나 새진보통합연대 출신 인사들 사이의 경쟁이 더 많았지만 민주노동당의 강력한 지지세가 있고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서는 민주노동당 출신들 사이의 경쟁과 갈등도 심각했다.
자신이 후보가 되어야 이길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결국 민주노동당의 핵심 지역에서 모두 낙선하고 말았다."
"야권연대 과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선 없이 야권단일후보로 직행할 수 있는 후보는 손가락에 꼽았다. 그렇지만 직행티켓을 자신이 받지 못하면 탈당하겠다는 민주노동당 출신 인사도 있었다.
진보정당다운 더 큰 헌신성을 발휘해도 모자랄 때, 민주노동당 출신들마저 자리에 매달리고 서로 갈등했다."
"물론 민주노동당 출신들 중에는 헌신하고 양보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문제는 갈등의 당사자가 된 사람들, 자리 욕심을 낸 사람들의 대부분이 민주노동당을 이끌고 당의 얼굴이 되어온 고위 당직자 또는 공직자 출신이었다는 데 있다.
당이 돈도 힘도 없을 때 당원들의 피땀으로 당직을 유지하고 공직을 누린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가지려 나선 셈이다.
새로 당에 합류한 사람들로서는 이들의 말과 행동으로 민주노동당의 진면목을 판단하는 것이 당연했다."(90쪽)
"통합에 이르기까지는 분명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일해온 사람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하나의 당 안에서 만나기 시작하면서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작은 일들에서 차이가 벌어졌고, 두리뭉실하 게 봉합한 차이는 작아지지 않고 커졌으며, 이것은 곧 갈등으로 변했다. 십 몇 만 원 쓴 것을 공금으로 처리할 것인지를 놓고 중앙당 간부들이 서로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문제는 당의 다수를 차지하고 통합을 앞서 추진한 민주노동당 출신들이 어떻게 대처했는가다.
진보정치가 해온 방식대로 헌신성과 도덕성을 발휘해야 했다. 새로 함께한 사람들을 감싸 안아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민주노동당 안에서 만들어온 원칙을 내세우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헌신성도 도덕성도 포용력도 보여주지 못한 다수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집단으로 비쳤다.
2012년 총선이 가까워오면서 당내에 이런 문제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91쪽)
"빼놓을 수 없는 잘못은, 나 역시 내가 속한 집단보다 작고 약한 집단을 배제했다는 것이다. 2012년 이후 배제의 대상이 되면서, 비로소 이전의 내가 가졌던 작은 자만심들이 보였다.
2012년 총선에서 야권연대를 만들어내면서 다른 더 작은 진보정당들과는 연대를 위한 노력을 크게 기울이지 않았다. 일을 빨리 진행시켜 성과를 내는 것이 먼저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94쪽)
"진보정치의 갈등과 분열의 한가운데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과정에서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깊이 사죄드린다."(95쪽)
: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2017. 들녁
진보의 미래를 위해서는 통합진보당 출신들에게 2011년~12년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민중의꿈, 민중연합당과 정의당의 전신인 통합진보당이 2012년 부정경선 논란을 시발로 내분에 휩싸이게 된 배경과 과정에 대해, 이장희 전 전대표가 대표(지도부)로서 반성/성찰을 표명한 부분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여러 경로를 통해 들은 내용도 들어 있고, 페이스북 등에서 접한 내용도 담겨 있습니다.(저도 2011년 초에 입당한 평당원이었으니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었죠)
2017년 현재 모습은 각 정파의 사이가 '돌아오지 못할 다리'로 나누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고작 5년 전에는 하나의 진보정당 안에서 '총선승리와 원내교섭 단체 확보 그리고 진보적 정권교체'로 뭉쳐 있었습니다.
2011년 한 해 동안 크게는 민주노동당과 참여당 그리고 새진보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 노동계와 시민사회세력 일부가 진보대통합을 추진하여 우여곡절 끝에 그해 11월 통합에 이르렀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각 정파가 통합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욕망에 뛰어든 것이죠.
이정희 전 대표는 민노당 대표로서, 다른 정파의 문제점을 들추는(탓하는) 게 아니라 가장 많은 지분과 당원을 보유했덩 민노당이 잘못한 부분을 스스로 내보인 것입니다.
스스로의 허물을 공개적으로 내보이며 성찰할 때, 상처가 낫고 새살이 돋아나는 것이죠.
그러면서 한때 민노당과 통합진보당에 기대와 지지를 보냈던 수백만 명의 주권자들에게 솔직하게 "죄송하다.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겁니다.
진정 어린 사과와 성찰이 있은 다음에야 (이 전 대표가 직업정치를 재개하든 하지 않든) 이 전 대표도 스스로를 감추고 침잠하지 읺고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삶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또한 민노당과 통합진보당 전체를 대표했돈 신분으로 사과를 함으로써, 민노당과 통합진보당이 공식적(?) 공개적으로 과거에 대해 이해를 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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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해산으로 가장 가슴아팠던 것은...>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가장 가슴아팠던 것은, 해산 이후 더 힘겹게 고통을 견뎌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죄송스러웠다.
나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것을 수긍할 수 없을 만큼 책임자로서 부끄러움이 컸다.
통합진보당은 그저 어떤 구호를 외치는 집단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나섰던 정치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유신 독재의 추억 속에 살며 독재자 박정희의 재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빼앗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들과 맞선 싸움에서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 한 것이 뼈아팠다. 아무리 힘들어도 버텨내고 이겨냈어야 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책임이었다."
"통합진보당이 정권의 정치보복과 종북몰이를 이기지 못한 이유, 결국 국민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진보정치의 헌신성이 흐려지고 도덕성이 훼손당하면서 내부에서부터 일어난 분열이 몰고 온 결과였다.
이 사태를 막지 못한 나의 책임이 너무나 크다."(88쪽)
: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2017. 들녁
저에게는 운동과 진보정치를 시작했던 이유와 출발점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말입니다.
많은 통합진보당 전 당원들이 쉽게 수긍하기는 어렵겠지만, 위와 같은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져야만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박근혜 정권과 수구세력이 정치보복과 종죽몰이로 통합진보당을 불법적으로 탄압하고 해산시킨 1차 책임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피해자임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민중을 위해 민족을 위해 진보정치에 나선 이들은 그 모든 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민중 속에서 강인한 대오로...
혹자는 "골목길 걸어가다 깡패에게 당했는데, 당한 사람을 탓하면 안 된다"라는 비유를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비유를 들고 싶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항일독립군이 일제의 잔인무도한 탄압과 만행을 탓하며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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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하면서 살아남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내가 가장 많이 받은 비난은, 경기동부에 휘둘려 이석기 의원을 감싸다가 당까지 빼앗겼다는 것이었다.
2012년 비례경선 부정논란 이후 이 의원이 사퇴해야 당이 살아난다고 집요하게 요구했던 이른바 진보 언론의 시각이기도 하다."(95쪽)
"그러나 나는 비례경선 부정논란이 어떻게 하여 일어났고 왜 잘못된 것인지 내막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나 스스로 사실을 찾아냈고 진상조사보고서가 거짓으로 가득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과정에 당내 어느 정파나 인물의 간섭이나 압력을 받은 바도 전혀 없었다. 당시 언론과 국민들에게 제대로 설명하거나 이해시킬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고 나 또한 그럴 능력도 갖지 못한 상태였지만, 적어도 내 지위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정부여당 등 정치적 상대방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닌 것을 들어 공격한 적이 없다. 그것이 내가 정치를 하면서 지켜야 할 최소한이라고 생각했다.
하물며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숨긴 채 살길을 찾을 수는 없었다."(96쪽)
"비난이 쏟아질 것을 알면서도 내 선택을 바꾸지 않은 이유는, 거짓말하면서 살아남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무척 가혹했다. 그러나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스스로에게까지 거짓말을 해 살아남았다는 자괴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진보정치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남아 있지 않았을 터이다."
"내란음모사건으로 당이 해산까지 내몰렸는데 당대표가 아무 조치도 하지 않고 해산당하고 말았다는 비판이 있다는 것도 안다.
당대표로서 해산을 피할 수 있었다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하지만 정권의 정치보복과 종북몰이의 본질을 알면서도 조작된 사건 때문에 동료를 내쫓을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함께 고통을 겪으며 헤쳐나가기를 선택하는 것이 덜 고통스러웠다. 참담하게 패배했다. 지킨 것은 양심뿐이었다.
하지만 양심을 버렸다면 패배보다 더 치욕스러웠을 것이다."(96쪽)
"그렇지만 이것은 그 야만적인 시간을 겪고서도 나의 몸과 마음이 아직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에 지나지 않는다.
종북몰이에서 민중들과 당과 동료들을 지키지 못한 책임은 여전히 무겁고, 그에 이르기까지 내가 범한 실책과 과오들은 분명하다.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유일하게 지금 내가 약속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몹시 죄송스러울 뿐이다."(97쪽)
: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2017. 들녁
이 부분은 제가 덧붙일 이야기가 없네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후세들이 이정희 전 대표의 당시 판단과 행보에 대한 진심을 평가해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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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의 과거를 불러낸 이유 - 1>
"진보정치가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바꾸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거운 과거를 굳이 불러낸 이유는 이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다."(97쪽)
"첫째, 진보정치의 존재 가치를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진보정치는 사람이 사람답게 존중받는 세상 노동자 농민 서민들이 진정한 주권자가 되는 세상을 추구하며 국민들과 많은 시간을 거리에서 함께했다.
하지만 국민들과 진보정치의 거리는 아직도 가깝지 않다. 진보정치가 내놓은 괜찮은 정책들은 더 큰 야당들이 한다고 하고 그곳에도 좋은 정치인들이 많은데, 굳이 극소수 진보 정당이 왜 따로 존재해야 하는지도 그다지 선명하지 않다."
"종북몰이의 폭풍 속에서는 말할 기회조차 찾을 수 없었지만 진보정치가 가진 생각과 지향을 정확하게 말하고 확산시키는 노력이 크게 부족했다.
진보정당의 존재 가치가 분명하지 않은 데 부정, 폭력, 종북 비난이 쏟아지니 국민들의 거부감은 매우 커졌고, 정권도 강제해산을 감행할 수 있었다.
종북몰이가 끝난다고 해서 국민들이 진보정치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게 되고 수긍하는 것도 아니고, 진보정치의 존재 가치가 확립되는 것도 아니다.
진보정치 스스로 진보정치의 궁극적 지향에 대해 생각을 정립하고 국민들과 대화하여 국민들이 진보 정치의 존재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98쪽)
: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2017. 들녁
정파를 떠나 스스로 진보진영(진보정치)이라 자부(자임)하는 개인과 조직은 먼저 "국민들과 진보정치의 거리는 아직도 가깝지 않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나온 시간 동안 헌신하고 열정을 불태운 것, 그리고 과거의 공과나 잘잘못을 떠나서 '아픈 현실'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죠.
그런 현실인식은 "종북몰이가 끝난다고 해서 ... 진보정치의 존재 가치가 확립되는 것도 아니다"라는 점과 맥락을 같이 하게 됩니다.(실제 종북몰이가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지만)
종북몰이나 탄압이 진보정치에 대한 공감대 확산을 가로막았다고 핑계댈 수 있지만, 이번 촛불 정국에서 광장에 쏟아져나온 촛불주권자들과 진보진영의 각 개인이나 조직이 얼마나 결합되어 있었는지 돌이켜보면 외부 조건(남탓)만을 탓하게 될 때 미래에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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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의 과거를 불러낸 이유 - 2>
"진보정치가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바꾸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거운 과거를 굳이 불러낸 이유는 이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둘째, 진보정치의 중심에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이 있어야 한다.
진보정치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더 집중해야 한다. 2012년 통합진보당의 추락은 단순히 비례경선 부정논란과 종북몰이에 몇몇 사람들이 잘못 대처해서 빚어진 결과가 아니다."(98쪽)
"이미 오래전부터 진보정당에 대한 노동현장의 지지가 흔들려 온 결과다.
민주노동당에서 통합진보당까지 당을 만들고 국회의원도 만들었지만 정작 노동현장을 진보의 방향으로 바꾸지도 못하고 진보적 노동정책을 펼치지도 못하면서 자리다툼하고 파벌 싸움하는 데 대한 노동자들의 실망감이 비례경선 부정논란을 접하자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진보정치의 중심에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단순한 선언이나 당위가 아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노동자들이 진보정치의 중심에 있어야 진보정치가 현실의 문제를 가장 잘 볼 수 있다.
진보정치가 근본적 입장을 견지하도록 지탱하는 것도 역시 노동자들의 존재다. 진보정치가 진보적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힘도 헌법과 법률을 뛰어넘어서라도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없는 노동자들의 절박한 처지에서 나온다.
비정규직, 청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데서 진보정치의 제 모습이 살아날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 청년 노동 문제는 국민들이 가장 고통받는 문제다.
정치가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상황은 줄곧 악화되고, 국민들은 정치에서 더 멀어져갔다. 진보정치의 책임이 없을 수 없다.
진보정치가 노동문제, 특히 비정규직과 청년 노동문제 해결에 힘을 쏟지도 않고 의미 있는 대안을 내놓지도 못한 것도 진보정치의 존재 가치가 흐릿해진 이유 가운데 하나다.
진보정치가 비정규직과 청년 노동의 현실에 더 가까이 접근하고 이들의 노동3권 보장을 위해 직접 나서야 한다."(99쪽)
: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2017. 들녁
"오래전부터 진보정당에 대한 노동현장의 지지가 흔들려 온 결과"가 2012년 부정경선 논란과 분당사태 그리고 내란음모조작과 진보당 해산으로 이어지는 추락과 탄압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음을 깨닫지 못하면, 다시 진보정치를 시작해도 기존의 한계와 수준을 남어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 면에서 진보정치에 참여하고 있다는 제가 그동안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에게 다가가고 그들의 노동3권을 지켜내기 위해 무얼했는지 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고작 공지된 집회에 참여하고 서명을 하고 SNS에 홍보하는 걸로 만족했음을 반성해봅니다.
올해부터는 저도 비정규직 노동자와 청년 노동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 노동3권을 지켜내는 노력과 싸움에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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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의 과거를 불러낸 이유 - 3 : "자신의 한계에 진보정치를 가두어두지는 말자">
<다시 시작하는 대화>에서 저를 가장 반성하게 만든 내용이 나옵니다.
"진보정치가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바꾸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거운 과거를 굳이 불러낸 이유는 이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셋째, 과거의 갈등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국민들이 진보정치에 실망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내부 갈등이다. 사람 사는 곳에 갈등 없는 곳 없다.
하지만 진보정치 내부 갈등이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과거의 갈등이 현재로 이어지고 진 보의 미래까지도 제약하기 때문이다.
수구세력은 현재의 이익을 지키고 미래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갈등을 덮어버리지 않던가. 그런데 진보정치는 수십 년 지난 과거의 갈등에 얽매여 미래를 포기한다.
1980년대 자신이 학생 때 보고 들은 일부터 최근의 일까지 이어 붙여 상대방을 외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진보정치 안에 아직도 많다.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서 벌어진 두 번의 분당으로 갈등은 더 커졌고,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에도 갈등은 줄어들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 때문에 앞으로 더 믿을 수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고 주권자가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키는 세상을 만들자는 뜻이 같고 방법도 같다면, 그가 누구든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그와 나 사이의 문제가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내가 더 낫게 행동할 방법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지, 과거의 일 때문에 특정한 사람이나 세력을 멀리하거나 배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100쪽)
"갈등을 넘어 함께하는 과정이 순탄할 수만은 없다.
오랜 감정들이 쌓여 상대에 대해 미래를 향한 믿음을 갖기 어렵게 한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해야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면, 갈등에서 자유로운 사람, 상처를 빨리 치유한 사람에게 앞장설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주고 뒤에서 도우면 된다.
'자신의 한계에 진보정치를 가두어두지는 말자.'"(101쪽)
: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2017. 들녁
저 역시 알게 모르게 스스로 1980년대 학생운동 당시의 기억과 2000년대 진보정치와 운동권에 대한 단상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여러 정파와 인물들에 대한 인상, 개별적인 대립과 갈등 등이 뒤섞여 있습니다.
진보정치 전반과 통합진보당에 대한 평가, 진보당 내 여러 정파에 대한 경험과 선입견들이 제 마음 속에 자리잡아 있었고,
그런 것들이 이유가 되어 진보정치의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전망을 불투명하게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제가 아는 것, 제가 경험한 것이 결코 전체가 아니라는 점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입니다.
이 전 대표의 이번 단락을 몇 번이나 읽으면서 제가 진보진영 내에서, 구진보당 세력 내에서, 민중연합당이나 민중의꿈이, 제가 모르는 사람과 공간에서 진보의 미래를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많은 이들을 생각하지 않은(못한) 제 자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저나 저의 세대, 제가 알고 있는 진보세력이 아닌 어딘가에서 다른 누군가가, 제가 아는 이들이 해낼 수 없는 또 다른 미래가 준비되고 전개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다만, 그들이 기존의 활동가들이 아니면 그리고 가급적 새로운 세대였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도 옆에서 뒤에서 힘 닿는 데까지 함께하며 도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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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의 궁극적 지향은 무엇인가>
: 사람답게 살고 싶은 염원이 진보정당을 통해 실현되는 것을 확인할 때 진보정당을 신뢰하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대상을 받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팀/선수가 우승하는 것을 응원하는 정치는 '대리만족'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진보정치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왔나.
내가 민주노동당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구호를 보면서였다. 많은 이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 초기부터 통합진보당까지 가장 많이 쓴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따져보면 이것은 '경제적 부담을 누구에게 지워 누구에게 복지의 권리를 보장할 것인가'라는 정책 차원의 구호이고 세상을 바꿀 '수단'이지, 이 정책을 통해 실현시키려는 세상의 모습을 담고 있지는 않다."(107쪽)
"정당이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지 목표를 담은 문서가 강령이다.
민주노동당 강령은 자주와 평등의 두 날개로 만들어졌 고 2013년 이후 통합진보당은 자주 민주 평등 평화통일을 강령에 담았다.
국민들과 진보정당은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 촛불집회부터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 2013년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촛불에서 함께 만났다. 국민들은 광장에서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대한민국, 평등한 한미 관계를 말했고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했다.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이 강령에 담은 한국사회 현실 인식과 개선 방향이 옳은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국민들은 진보정당을 80년대에 각종 이념을 탐 하던 운동권 바라보듯 늘 낯설어했다. 왜 그랬을까.
진보정당이 한국사회에 필요한 정책 수단도 말하고 그를 통해 이뤄내려는 한국사회 변화의 목표도 말했지만 결국 그 사회 변화를 통해 이뤄내고 싶은 삶의 변화는 말하지 않은 것 아닐까.
그래서 국민들 눈에 진보정당은 여전히 사람의 삶과 행복은 뒤로 돌린 채 오래된 이념의 들 안에서만 세상을 보고 목표만을 추구하며 질주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보인 것은 아닐까."(108쪽)
"진보정당이 내놓은 정책들은 이제 야권 전체가 받아들인다.
수단은 진보정당으로부터도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들도 거부감을 별로 갖지 않는다는 증거다.
하지만 한국사회 변화의 과제를 담은 강령은 국민들 눈으로 보면 운동권 용어로 가득하다. 광장에서 만나 같은 목소리를 낼 수는 있지만, 강령에 담긴 '목표에 동의하기는 망설여진다.
2016년 겨울 천만 국민이 광장에서 주권자 선언을 했다. 국민의 뜻대로 박근혜 탄핵소추를 성사시켰다. 주권자로서 힘을 발휘한 경험을 통해 함께 희열을 느꼈다. 이 나라를 옳게 바꾸기 위 해 한 사람 힘이라도 더 보탠다는 자긍심으로 추위를 견디며 촛불집회를 지켰다.
그렇지만 진보정치는 “진보정치가 추구한 '목포'가 옳은 것이었다"는 확신을 재확인하는 존재로 보일 뿐이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싶어도, 신뢰를 주기는 여전히 어려운 존재다.
더구나 진보정치는 사람은 안중에 없이 '이념'에 사로잡힌 것 같고 '수단'과 '목표'만 내세우는 것 같으니, 매력도 별로 없다."
"국민들이 진보정당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바람과 진보정당의 지향이 일치한다고 느낄 때 아닐까.
사람답게 살고 싶은 염원이 진보정당을 통해 실현되는 것을 확인할 때 진보정당을 신뢰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노동당도 이후의 어느 진보정당도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도 신뢰를 얻지도 못했다."(109쪽)
"진보적 정책을 만들어내거나 강령에 다른 정당과 구별되는 내용을 담는 것으로는 진보정당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데 충분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수단도 목표도 아닌, 그를 넘어선 사람이기 때문이다.
수단을 실행에 옮기거나 목표를 달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존엄을 보장받고 주권자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때 사람은 사람답게 산다고 느낀다.
수단이 실패해도 목표에 이르지 못해도 사람이 좀 더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간 증거다.
진보정치가 수단과 목표를 말하는 데 그치지 말고 삶의 변화를 더 말했어야 하지 않을까. 국민들이 행동에 나서는 마음을 읽어내고, 그 과정에서 국민들 스스로 경험하는 삶의 행복과 희열을 키워내는 것을 진보정치의 궁극적 지향으로 삼았어야 하지 않을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진보정치가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신뢰를 획득할 수 있는 단서는 지난 17년 동안의 활동 속에서 이미 만들어졌기 때문이다."(110쪽)
: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2017. 들녁
문재인 후보의 지지자부터 김선동 후보의 지지자까지 아직 민중에게서 진정으로 지지받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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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나선다>
'일하는 사람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의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답니다..
"사람은 어떻게 현실을 바꾸겠다고 행동에 나서게 되는 것일까.
무슨 이념으로 무장해서, 어떤 강령을 실행하기 위해, 또는 조직이 시켜서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돈 문제가 발단인 것 같아도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이 돈 때문에 나서는 것만은 아니다. 이건 인간적으로 도저히 못 참겠다 싶을 때 나선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나선다."
"'부당해고 철회'나 '밥값 지급' 등을 내걸고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해고로 겪는 생활고나 밥값 부담의 과중함을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해고가 너무 비합리적이라 자존심 상해서 참을 수가 없다거나 밥값도 안 주는 차별로 얼마나 비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는지 구구절절 이어가다 “내 아이한테 는 이런 세상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나섰다”고 말을 맺는다.
돈 문제를 넘어 인간답게 대접받고 싶다는 것, 자존감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현실을 그냥 눈감을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혼자만 겪고 끝나는 문제면 그냥 꾹 참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개인을 넘은 공동체의 문제이니까 더 많은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다음 세대도 겪을 수 있는 문제이니까 부모 세대로서 내가 행동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사람을 광장으로 이끌어낸다.
경제적 이익을 꼭 많이 챙기지 못하더라도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꿔내는 것 자체만으로 사람은 자긍심을 느끼고 사람답게 살아본다고 말한다."(111쪽)
"나이 오십 넘어 생전 처음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분들을 만날 기회가 종종 있었다. 노동조합 만들고 나아진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 물으면, 이어지는 말끝 에 종종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평생 사람대접 못 받고 말 한 마디 못하고 살았는데 노조 만들고는 소장이고 누구한테고 마음껏 말할 수 있으니 좋지." “노동조합 덕분에 사람 사는 것 같이 살아본다”는 말에 마음이 아릿했다."
"누구나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산다. 인정받고 존중받고 대우받고 싶어 한다. 사람은 자존감으로 살아간다.
모든 사람에게 보통선거권, 1인 1표를 부여한 민주주의의 원리는 바로 누구나 어떤 존재든 사람으로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오직 투표일 하루만 적용된 원리일 뿐, 현실은 사람 각각을 존중하고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온갖 이유를 들어 불평등을 합리화하고, 사람들을 극한 경쟁으로 내몬다. 각자를 그의 돈벌이 능력에 따라 더 정확히는 물려받은 권력과 재산에 따라 대우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도화선이 된 정유라의 말, “돈 많은 부모 둔 것도 능력이야. 네 부모를 탓해," 이 말은 누구나 사람답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사람들의 자긍심을 짓밟는다.
그 말이 분노할 만한 것이라면, 이 현실은 결코 용인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112쪽)
"그런데 정작 진보정치는 사람을 행동으로 나서게 하기 위해 자존심과 자긍심, 사람답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말하기보다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의 크기를 말하는 데 치우쳤던 것은 아닐까.
경제적 이익의 크기로만 보면, 재벌로부터 더 많은 돈 을 걷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은 잘했건 잘못했건 집권의 경험이 있고 큰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보수정당이 진보정당보다 더 빨리 해낼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극우정당 조차 이것이 자신들의 집권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면 해낼 것이다.
그러나 보수정당은 이를 자신의 치적으로 삼아 박수를 유도할 터이고, 극우정당은 이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악용할 것이다. 국민들은 구경꾼으로 남거나 통제당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경제적 이익은 얻겠지만 이래서는 사람으로서 자존감도 자긍심도 느끼기 어렵다."(113쪽)
"진보정치가 자신이 끝내 이루려는 지향을 분명하게 재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람답게 살며 삶의 의미와 행복과 자긍심을 찾는 것, 모든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존엄을 존중받고 주권자로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궁극적 지향임을 확인하자.
정책 수단과 그로부터 나올 이익만을 말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사람의 삶과 행복을 말하자. 목표만을 말하지 말고 목표로 향해 가는 과정에서 얻어질 ‘내 삶의 변화'를 말하자.
이익의 크기보다 사람답게 사는 자존감을 먼저 본다면, 진보정당이 어떤 정책을 내놓을지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 경제적 이익의 크기와 수급자의 범위에 맞춰져 있던 정책의 초점도 바뀌어야 한다.
정책 실현 과정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더 자존감을 찾고 자긍심을 느끼게 되는지, 얼마나 더 큰 힘을 갖게 되는지가 진보정당의 첫 번째 관심이어야 한다."(114쪽)
: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2017. 들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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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정치는 사람의 마음에 눈을 돌려야 한다 >
‘사람에 대한 존중’,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는 굳이 진보나 보수라는 이념적 잣대로 구분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헌법상 문구나 정치적 수사로 표현되는 ‘주권자’나 ‘존엄성’을 사회 현장이나 정치적 실천에서 실제로 구현하는 것에서부터 한국정치가 다시, 아니 처음 시작할 수 있을테니까요..
"정치권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직접 공략해야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표를 모을 수 있다는 것이 공식처럼 되어 있다. 민생이 우선이라는 말도 그 표현이다.
그러나 민생문제가 심각한 것은 민중들이 기본적인 생존마저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들이 생존을 위해서는 자존심 따위를 버려야 하는 인간적 모멸감에 휩싸이는 데까지 치닫기 때문이다. ‘이렇게 더 살아서 무엇 하나, 이럴 바에는 떠나고 말지' 하는 좌절과 자포자기로 목숨까지 잃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자긍심에 상처를 입을 때, 사람은 삶의 의욕을 잃는다.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하 는 것은 그가 처한 경제적 상황 그 자체보다 그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지탱하게 하는 자존감이 심각하게 파괴된 데서 비 롯된다."(116쪽)
"이명박 정부 들어 복지누수를 막는다며 부양의무자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자 장애 아이를 둔 아버지가 아이는 기초생활 수급자라도 되어야 한다면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이어졌다.
언론은 이들의 절망해서 세상을 등졌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조금 더 들어가보자. 이 아버지가 자살에 이른 이유는 '절망' 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도 너무 비참하다. 자신이 아이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 비정한 세상에서는 아버지로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아이의 생존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라져야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자기 존재에 대한 처절한 부정이다. 이들이 거부한 것은 바로 인간으로서 자존감조차 빼앗는 복지정책을 내놓은 한국사회다. 이들이 요구한 것은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갖게 하는 복지정책 아닐까.
민생위기는 곧 민중들이 인간적 모멸감을 느끼고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다. 자존감이 크게 흔들려 회복되기 어려운 지경까지 간 인간의 존엄이 유지될 수 없는 위기 상황이다. 민 생위기는 단순히 복지 예산 확충이나 복지 시스템 정비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존엄을 보장하는 복지정책들이 여러 방면에서 시행되어야 민생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117쪽)
"복지정책 측면에서 보면 무상급식정책을 선별복지에서 보편복지로 나아가는 전환점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선별복지와 보편복지 가운데 무엇이 바람직한가보다 중요한 것은 복지 수급자를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는 정책인지다. 이 정책을 지지하는 자신의 선택이 옳은 일이라는 자긍심을 살려주는 정책이어야 한다. 하나의 정책이 각자에게 가져다줄 경제적 이익의 크기도 그 정책에 대한 지지와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경제적 이익을 누리며 회복되는 사람으로서 자존감이다.
진보정치는 이 점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새로운 복지정책을 내놓으면서 돈을 얼마 아낄 수 있는지, 생활에 얼마나 보탬이 되는지 말했을 뿐 각자에게 얼마나 큰 자존감의 회복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인지, 그 정책을 지지하는 것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지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똑같이 복지 확대를 말하는 보수정치와 진보정치의 차이를, 증세를 통한 재원 확보의 책임성 수준에서 찾기도 했다."(119쪽)
"사람의 마음에 눈을 돌려야 한다.
세상에는 돈으로 셀 수 없는 것들이 있고,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다.
돈의 크기보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존엄을 찾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정책을 지지함으로써 내가 사람으로서 옳은 일을 하고 인격이 고양되고 있다는 자긍심을 키울 수 있는 정책이어야 한다."(120쪽)
: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2017. 들녁
http://blog.daum.net/hy2oxy/8693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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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정치를 키워내려면, 진보정당과 그 구성원들이 그 가치를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실행하는 조직과 사람으로 변화해야 한다 >
SNS와 인터넷, 오프라인에서 보여지는 진보정당과 구성원들의 말과 행동 중에 적지 않은 모습은, 주권자들이 진보정치에 대해 멀어지도록 합니다. 진보정치와 보수정치를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도록 만듭니다.
아래 대목은 다시 읽어보아도 여전히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게 됩니다.
"진보정치의 존재 가치는 진보정치의 궁극적 지향으로부터 나온다.
국민들로 하여금 인간으로서 존엄을 획득하는 과정을 직접 이끌게 함으로써 그 성과를 온전히 국민들의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 진보정치다.
보수정치는 결과로서만 국민들에게 접근한다. 국민들은 유명한 보수정치인들의 활동을 요구하고 지원하고 박수치고 그 성과를 누리면 될 뿐이다.
그러나 진보정치는 결과로서만이 아니라 과정에서부터 사람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회복하게 하는 정치다."(120쪽)
"대부분 4,50대 기혼 여성들인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일하던 학교 학생 수가 줄면 옆동네 학교 학생 수가 늘어도 꼼짝 없이 잘려나갔다.
십 년 이십 년 같은 학교에서 일해도 기본급 외에는 받지 못하고 방학이면 한 푼도 못 받았다. 과중한 노동에 병원 가려고 하루 쉬려면 자기 일당보다 비싼 돈을 주고 대체인력을 구해야 했다.
그랬던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진보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자신의 삶을 바꾸기 시작했다.
“세상이 나를 바꿔주지 않으면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말 그대로였다. 진보교육감들을 당선시키고 무기계약직 전환 조례를 통과시켰다. 국회를 통해 처우개선 예산을 확보하고 박근혜 후보까지도 공공기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겠다는 공약을 내놓게 만들었다."
"이들의 목표는 돈 몇 푼 더 받는 데 머물지 않는다.
모든 비정규직을 없애는 것, 아이들에게 비정규직의 삶을 물려주지 않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이들은 아직도 비정규직이지만 조직을 만들고 진보정치에 나서면서 인간으로서 존엄과 자긍심, 주권자로서 힘을 확인했다.
이들이 모이면 활력이 넘친다 이것이 진보정치가 펼쳐할 정치다."
"인간으로서 자기 존재를 회복하는 경험의 가치는 돈으로 바꿔 셈할 수 없다.
돈을 포기하더라도 노동조합을 지키고 신념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그래서다. 독립한 인간으로 서 찾은 자기 존재의 의미, 자존감을 다시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121쪽)
"사람이면 누구나 인간으로서 존엄을 보장받을 수 있게 하고 주권자로서 힘을 발휘하게 하려는 진보정치의 궁극적 지향은 그 과정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루어져간다.
자존감 회복을 위해 중요한 것, 결과보다 과정이다. 자기 목소리를 잃었던 노동자 농민 서민들이 그 과정을 밟아 자존감을 회복하고 힘을 갖게 하려는 것이 진보정치다. 그래서 진보정치가 필요하다."
"진보정치가 '사람으로서 자존감'을 키우게 하는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진보정치가 만나는 사람들을 독립된 인격체로서 인정하고 존중하며 대우하는 태도에서부터 진보정치의 궁극적 지향이 확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정치가 국민들을 대하는 모습에서 소홀했던 점은 없었을까.
노동자 농민 서민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인정하고 존중하며 대우하는 태도를 잃은 적은 없었을까. 대한민국 모든 권력의 원천인 '주권자'로 보기보다 진보정당에 한 표를 행사해줄 유권자로 본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 국민들은 지금까지 어느 정치세력으로부터도 제대로 사람대접 받은 적이 없었다. 선거를 앞두고는 절을 받아도 선거만 끝나면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정치인들은 선거만 끝나면 목이 뻣뻣해지고 오만해졌다.
진보정 치세력이 진정으로 다른 모습을 꾸준히 보여왔다면 이를 알아 보지 못할 국민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진보정치가 스스로를 냉엄하게 돌아보아야 할 때다."(122쪽)
"진보정치가 제 욕심 차리고 부정부패 서슴지 않는 보수정치와 동일시될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국민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 진정으로 충실했던가 부끄러운 대목이 많다.
먼저 알게 된 것을 알리고 함께하자고 독려하는 데 급급했다. 상대가 왜 나와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당장 그를 설득해 바꿔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컸다.
자신을 꺼리는 사람들의 느낌이 왜 생겨났는지, 혹시 자 신의 말이나 행동이 영향을 준 것은 없는지 깊이 헤아리는 일은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사람들의 생각을 두루 들어보고 눈을 마주쳐 대화하는 여유를 갖기보다 일 도와달라고 요청하기에 바빴다.
사람들의 조언을 제대로 얻으려면 자신의 속내를 고민스럽고 힘든 것까지 털어놓아야 하는데, 진보정치세력이 흔들리면 안 되니까, 강한 존재로 보여야 하니까 말문을 닫았다.
"저 사람 참 끈질겨, 대단해.” 말은 들을 수 있어도, “나를 이해해주고 존중하는 사람"으로 신뢰를 얻기에 부족했던 점은 없었을까."(123쪽)
"그래도 지역에서 주민들 옆에서 진보정치를 위해 애써온 사람 각자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대우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잃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진보정치의 중요 직책을 맡아온 사람들은 많은 국민들에게 이해와 존중의 모습을 보이고 대화하는 것에 게을렀다. 경직된 진보정당, 편협한 진보정치인이라는 인상이 굳어진 데에는 국민들이 이들 유명한 진보정 치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존중받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데 바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진보정치의 궁극적 지향에 대해 공감을 키워내려면, 진보정당과 그 구성원들이 그 가치를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실행하는 조직과 사람으로 변화해야 한다.
물론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궁극적 지향에 대한 공감, 존재 가치의 인정, 집단과 사람에 대한 신뢰는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보정치가 국민들 속에 새로운 시대의 동행으로 자리 잡는 가장 빠른 길일 수도 있다."(124쪽)
: 이정희 저 <다시 시작하는 대화> 2017. 들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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