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원기 22 April ·
조 이제 박사 1999년 경향신문 회고록 “나의 젊은 시절” (12) 두드려 열린 해외연수유학
기회가 왔다. 좌절된 미국유학의 길이 공무원 해외 기술훈련 과정에 지원해 선발된 것이다. 1년동안 다락방에서 비지땀을 쏟았다. 상무성연수과정을 밟고 조지워싱턴대 석사학위를 받았다.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얻은 결실이었다.
59년 한국정부는 미국정부와의 협조 하에 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자금에 의한 공무원 해외기술훈련 사업을 실시하고 있었다. 각부처에서 추천된 후보자들과 함께 시험에 응시했다. 경쟁이 심했지만 부흥부 해외파견담당과로부터 제일 우수한 성적으로 선발됐다는 통지를 받았다.
너무 기뻤다. 1년간의 짧은 연수 기간이었지만 좌절된 미국유학의 길이 다시 활짝 열린 것이다. 경제와 통계부문그룹에 속한 나에게는 미국 워싱턴 DC의 상무부에서 기술연수를 받으면서 근처 대학에서 연수와 관련된 강의를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었다. 학비면제는 물론 매달 360달러라는 아주 후한 생활비까지 받을 수 있었다. - 드디어 출국 당시 미국공무원 여행기준에 따라 나에게는 일등석 비행기표가 주어졌다. 김포공항을 이륙, JAL일등석에 오르자 승무원들은 샴페인 등 각종 사치스런 음료를 권했다. 돈을 내고 마시는 줄 알고 모두 사양했다. 호놀룰루에 도착해서야 모든 것이 무료임을 알았으니 촌사람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었다. 도쿄 호놀룰루 경유 2박3일, 장 장 30여시간의 비행을 끝내고 워싱턴 내셔널 에어포트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라이스박사 내외가 직접 마중나와 따뜻하게 맞았다.
라이스박사는 1년이란 시간을 귀하게 쓸 수 있도록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또 학계 관계의 중요한 사람들도 소개해주었다. 우선 조지워싱턴대 대학원장인 브라운교수와 점심자리를 주선해 내가 1 야간수업으로 MA과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협조를 구했다. 브라운원장은 청강생으로 강의를 듣다가 성적이 좋으면 졸업직전에 학점을 인정해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1년에 12과목을 야간수업으로 마쳐야 하는 힘든 과정이었다. 그러나 1 년에 연수와 석사학위를 동시에 마칠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이기도 했다. 상무부에는 매주 월~금요일, 오전 9시~오후 4시30분까지 출석해 국민소득분석과 인구통계에 관한 강의와 실습을 받았다. 상무부는 낮시간의 연수에 지장이 없도록 연수생의 야간대학 청강과목을 2과목 이내로 제한했다. 그런데 풀 타임과정으로, 그것도 대학원 과정을 3과목이나 선택해 등록금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자 상무부에서는 난색을 표했다. 연수담당자는 상무부의 등록금부담이 늘어날 뿐 아니라 미국대학에서 전혀 공부한 적이 없는 외국인에겐 어렵다고 했다. 그렇지만 라이스박사의 도움으로 내 뜻대로 주경야독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됐다. 예상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버스 탈 때나 식사 중에도 항상 학업과 관련된 책이나 노트를 읽었다. 상부부가 마련한 여러 차례의 여행기회가 있었으나 포기하고 공부에 전념했다. 그때 나와 함께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박 성상씨。그 해 여름 냉방장치가 없는 다락방에서 비지땀을 쏟으며 책과 씨름 한 추억은 두 사람이 만날 때마다 화제가 되곤 했다. 당초 계획대로 미 상무부 연수과정과 조지워싱턴대 석. 사과정을 좋은 성적으로 수료했다.
조지 워싱턴대학에서는 박사과정을 밟을 수 있게 장학금을 마련해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나는 한국 공무원으로서 약정된 의무를 마치기 위해 귀국의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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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이제 박사 1999년 경향신문 회고록 “나의 젊은 시절” (13) “시카고대학에 노는 방학 없다”
귀국해 장면 박정희정부서 일한 뒤, 시카고대로 다시 유학, 엄청난 양의 필독서, 리포트에 새벽 2~3시까지 공부 강행군。1년이 못돼 생활비 책값까지 받는 최고수준 장학생이 됐다
60년 8월, 미 상무성 연수 및 조지 워싱턴대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장면 정권이 들어선 지 몇달 안된 때였다. 나는 국세조사위원회 간사로서 출국 전 담당했던 라이스사절단 지원업무를 계속했다. 업무의 일부로 서울대 상대 변 형윤교수 등 여러 전문가들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통계용어사전을 편찬했으며 서울 농대 박 홍래교수와 미국교과서를 공역, 최초로 현대통계학을 국내에 소개했다. 61년 5·16 이후에는 제1차 5개년 경제계획 작성에 참여했다. 박정희대통령이 최고위원회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백악관에서 할 영문연 설문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 일을 하면서도 내가 갈 길은 다른 쪽에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미국유학을 다시 추진해야 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귀국한 뒤 거의 1주일에 한번 꼴로 편지를 주고받던 라이스 박사에게 의논했더니 마치 내 마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벌써부터 적합한 학교를 물색중이라는 답변이 있었다. 라이스 박사는 시카고대학과 프린스턴대학을 추천해주었다. 나는 사회과학분야에서 최고로 꼽히는 시카고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62년 봄학기에 시카고대학에 입학했다. 사회학과장 하우저 교수는 자신의 소승인 라이스 박사로부터 8장에 달하는 긴 추천서를 받았다면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했다. 당시 시카고대학에 한국 유학생이 8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수리통계학을 전공하던 박 희복씨가 있었다. 서울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박씨는 나에게 '시카고대학의 교과과정이 너무 어려워 한국사람으로 사회과학계통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며 잔뜩 겁을 주었다. 이렇게 처음 만난 두사람으로부터 경고성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나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학업을 시작했다.
첫 학기는 조지 워싱턴대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척 힘들었다. 새벽 2~3시까 지 잠을 자지 않고 노력한 결과 다행히 만족할 만한 성적을 받게 됐다. 학기가 끝나고 지도교수인 보그 교수에게 첫 학기가 너무 힘들어서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1주일간 워싱턴DC에서 쉬고 오겠다고 말했다. 보그 교수는 정색을 하며 ‘시카고대학이 파티 스쿨(Party School)인 줄 아느냐’고 말했다. 즉시 교수연구실에 정리돼 있는 책들을 가리키면서 시카고 대학생의 여름방학은 노는 시간이 아니라 낮에는 연구, 밤에는 예비시험을 위해 독서하는 기간이라는 것이었다. 아마 내가 할 일이 없는 모양이라며 그 자리에서 일거리를 정해주었다. 그 순간 번개처럼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어린 시절 혼자 객지에 나와 공부하다가 집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산보 겸 동네를 둘러볼 작정으로 운동화를 신고 나서려는데 아버님의 추상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와서 집안 일은 돕지 않고 나가 놀 생각만 한다는 꾸중이었다. 쉬지 않고 노력해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아버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긴 기회였다.
시카고대학에서의 학업은 한마디로 시간에 쫓기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어마 어마한 양의 필독서는 물론 추가로 선택도서를 읽고 나면 곧바로 리포트를 작성해야 했으므로 늘 식사를 간단히 끝내고 도서관에서 밤 11시까지 공부했다. 기숙사에 돌아와서도 새벽 2시 정도까지는 공부해야 따라갈 수 있었다. 최선을 다 한 결과 한 과목씩 만족할 만한 성적이 이어졌고, 이에 따라 장학금도 입학때의 학비면제에서 1년이 채 못되어 생활비 책값 여비까지 포함한 최고수준으로 등급이 높아졌다. 점차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캠퍼스에 정이 들기 시작했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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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원기
23 April ·


조 이제 박사 1999년 경향신문 회고록 “나의 젊은 시절” (14) 졸업과 동시에 조교수로
시카고대학의 지옥같은 박사학위 시험과정, 최종 시험때는 학과교수들이 모두 나와 교수자격을 나와 아 검증했다. 미국인구증가 요인분석에 대한 연구논문이었는데 후에 유엔서도 각광받았다.
시카고대학은 락케펠러가 설립한 사립대학으로 자연과학분야에서 20세기 원자시대를 연 최초의 핵분열 실험을 성공시켰고, 사회과학분야에서는 사회학과를 처음으로 창설했다. 사회학을 비롯, 경제학과와 인류학과가 미국에서 최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대학은 시험을 가장 많이 요 구하는 대학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박사학위 과정에서 제일 어려운 장벽은 ‘예비시험’으로 4일간 지속되는 필기시험. 만일 이 시험에 낙방하면 재 응시할 기회는 한번밖에 없다. 내가 입학한 첫해에는 열 명이 응시, 두 명만 합격됐다.
그 다음 장벽은 전공분야에 관한 종합시험으로 역시 필기시험이다. 두 번의 시험을 통과해야 학위논문계획을 발표하고 평가받는 구두시험을 칠 수 있다. 창의력을 강조하는 시카고대학은 학위논문계획안에 대한 교수들의 심사가 매우 까다로워 자칫하면 몇년씩 걸릴 수도 있다
다음 단계로 논문이 완성되면 구두로 논문시험을 치른다.
유학 2년째, 기숙사에서 아파트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음식으로는 그 때 미국에서 가장 싼 소꼬리 염통 소혀 닭고기 등을 사서 곰탕으로 끓여 먹었다. 장학금이 후했지만 생활비를 아껴 저축했다. 그 무렵 아버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큰 홍수가 나서 집안식구들이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매우 절박한 내용이었다. 모아 놓은 돈을 곧바로 송금했다.
학업은 잘 진척됐다. 중요한 시험을 무난히 통과하고 학생 신분이지만 연구실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책상도 배정받았다. 당시 대학원생으로는 최상의 혜택의 받은 셈이었다. 나름대로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250달러를 주고 중고차를 구입했다. 중고차 덕분에 얼마간은 편리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으나 겨울이 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시카고의 겨울은 눈과 강추위로 유명하다. 겨울엔 길이 얼어 스노체인을 감아야 했지만 체인을 살 형편이 못되는 나는 궁여지책으로 트렁크에 다 일부러 무거운 벽돌을 싣고 다니면서 차의 미끄러짐을 방지했다. 또 잦은 고장으로 내 손과 옷은 기름투성이였다.
당시 한국 교육계의 가장 유능한 지도자인 정 범모교수가 학생 신분으로 시카고대학에 와 있었다. 학기말 시험을 앞두고 정신이 없을 때 정교 수가 찾아와 ‘조 선생 용기 있오?’라고 물었다. 시험 전날 영화를 두 편쯤 보면 오히려 머리가 맑아진다며 영화 보러 가자는 얘기였다. 이날 이후로 나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는 정교수와 반드시 영화를 보러 갔고 결과도 좋게 나왔다.
시카고에 간지 3년반만에 나는 M.A와 박사학위과정을 마쳤다. 내 M. A논문은 학회지에 게재됐고, 박사학위논문도 새로운 방법론을 개발했다고 해서 각광을 받았다. 미국 인구 증가의 사회경제적 요인분석에 관한 연구였는데, 후에 유엔이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내가 개발한 방법을 적용할 것을 건의했다. 박사학위 논문시험때는 심사교수뿐 아니라 대부분의 학과교수들이 모두 참석, 논문주제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학 전반에 걸쳐 질의·응답이 있으리란 소식을 들었다. 이유는 졸업 즉시 조교수로 채용하자는 안이 나왔기에 교수자질 검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최종 시험을 통과했고 조교수 자리도 얻었다. 늘 배가 고팠던 시· 골 빈촌소년의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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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이제 박사 1999년 경향신문 회고록 “나의 젊은 시절” (15) 베푼 덕 잊고 기억한 받은 덕
은사들께 배운 교훈이 삶의 지표가 됐다. 그분들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또 군과 미국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 그 고마움도 말로 다할수 없다. 정직함을 덕목으로 물려주신 아버지, 이젠 남을 위해 받은 덕을 베풀고 싶다.
66년초 귀국, 몇 년 만에 고향 함안에 내려갔다. 고향마을에서는 면장, 학교장을 비롯해 일가친척 등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열어 나의 금의환향을 축하했다. 아버님은 축하객들에게 ‘아들이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이제 짚신을 짜기 위해 짚단을 물에 적신 것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좋은 신을 만들어야 하는 큰 일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버님 말씀대로 실제로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계속해서 연구 업적을 쌓아갔다. 67년 미시간대학 재직중 포드재단과 말레이시아 정부간 합의에 따라 말레이시아 수상실 소속 인구·경제통계 담당 고문으로 파견됐다. 포드재단에서는 최고급 주택지에 위치한 넓은 관저, 기사가 딸린 공용차, 개인전용 승용차에다 문지기까지 배정해 주었다. 봉급과 판공비도 넉넉하게 준 덕택으로 고국의 가족을 도울 수 있었다. 그때 부모님을 콸라룸푸르로 모셔 한달간 함께 지낸 기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어느날 관저에서 집안일을 거드는 현지인 여자가 한자로 쓰인 남양상보(南洋商報·싱가포르 신문)를 읽고 있기에 정말 다 이해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것이었다. 한자문화권에 살면서 박사학위까지 한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어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81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총장으로 대표단을 인솔하고 중국을 공식방문했을 때 중국어를 배워 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 국적을 갖고, 최초로 중국을 방문, 한·중관계의 제1보를 내딛은 뜻 깊은 여행이기도 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남에게 베푼 덕은 잊어버리고 남으로부터 받은 덕만 기억하라’는 사기(史 記)의 가르침처럼, 나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원예중학교시절 조 광제 선생님으로부터 기독교정신을 배웠고, 동학을 담당하신 현 규택 선생님 으로부터는 오인(五人), 즉 ‘사람이라고 사람이냐, 사람은 사람 노릇해야 사람이다’라는 유교적 교훈을 배웠다. 중학생으로 참전한 6·25전쟁때 제일선에서 생사의 고비를 함께 했던 미 제2 박격포대부대장 브릭스 대령과 쿠퍼 대령도 잊을 수 없다. 외국어대학의 레이너 교수와 유학생활을 지도해준 라이스 박사의 은혜도 갚을 길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직함이란 덕목을 물려주신 부친의 은덕을 잊을 수 없다. 12년전 돌아가신 아버님(趙三首)을 그리는 추모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맺으려 한다. 이 시는 부친이 돌아가신 직후 시인 구 상선생이 지어 주신 것이다.
초야에 한 평생을 묻혀 사셨으되,
곧은 마음씨와 뛰어난 그 슬기로
언제나 마을 사람의 길잡이가 되셨네
부지런과 알뜰을 천성으로 지니시고
위 아래 일가 이웃 극진히 보살피시니
북망에 드시고 나매 그 그리움 더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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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원기 23 April · Shared with Public 오늘 아침까지 1999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었던 조 이제 박사님의 '나의 젊은 시절'이라는 시리즈를 소개해 드렸는데, 지금부터는 우리나라와 중국간의 외교 정상화에 관한 조 이제 박사님의 후원에 관한 글을 소개합니다. 영문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한 것이 말끔하지 않은 점 양해를 구합니다. 조 이제 박사님은 한중 수교이외에, 하와이의 East West Center (EWC)의 총장으로 계시면서, 돈이 없어 미국유학가기 어려웠던 후진들을 EWC에서 많이 키운 공이 있습니다. *** 중국 우주 과학자 송건 박사와 인구학자 조이제 한중 수교 현대사의 비화 1. 현재의 중국과 한국 중국은 한국의 제일 가는 무역대상국가이며 지리적으로 가깝고 한자문화권의 문화적 인식도 같이 하며 경제적 기본요인의 부존도를 기초로 보다 큰 경제발전의 잠재력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중국에 대한 경제적 상업적 관심은 근년에 와서 급격히 확대 되었으며 점점 크게 늘어나고 있다. 중국은 한국의 가장 큰 무역국가로서 양국간의 무역량이 미국과 일본을 합한 무역량을 초과 하고 있다. 한국이 중국과의 교역에서 충분한 혜택을 누리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최근 중국의 경제가 침체되고 있지만 한국은 자체의 경제적 활성을 견지하면서 아울러 한반도를 위시한 동북아지역의 평화를 도모하는 맥락에서 중국과 가능한한 최선의 정치 및 경제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북아에 있어서 한국의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을까? 여러가지 설명이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역사적 사실은 무엇보다 한중 수교의 원심점이 어디에서 시작하였는가를 의식하고 이를 상기하는 것이다. ******* 중국 우주 과학자 송건 박사와 인구학자 조이제 한중 수교 현대사의 비화2. 한 세대 전의 중국과 한국: 한국 전쟁 (1950-53) 이후 적대국가 한국전쟁 때 맥아더 장군의 성공적인 인천 상륙작전 후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군하여 압록강에 접근하였을 무렵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은 인민해방 지원군을 대거 파병하여 인해전술로 연합군을 포위 격퇴 하여 연합군은 서울 이남으로 후퇴하게되었다. 본인은 한국전쟁 초기에 연합군이 북한에 깊숙히 진군할 때 ,또한 한강이남으로 비참하게 후퇴했을 때 직접 참전하였음으로 이를 실제로 체험했다. 1950년 본인은 부산 동래에 소재하고 있었던 부산 원예학교(교장 김흥수)학생이었다. 1950년 9월 학교는 군에 접수되었고 미 육군 제 2 박격포 대대 (대대장 메리데스 브릭스 중령)는 한국군의 일부와 합해 재편성되었다. 본인은 원예학교에서의 성적과 품행이 감안되어 <지도 읽는 역할)을 맡도록 선정, 차출되어 대대본부에 부속되었다. 부대는 북한에 깊숙히 진군하여 압록강에서 16km 떨어진 운산에 도달아였다. 운산은 북한군의 최후의 총사령부였고 그 후 북한 지도부는 중국으로 후퇴하였다. 우리는 운산에서 미국의 감사절을 지냈고 얼마 안있어 적과 맹렬한 격전을 한 후 어느 추운 새벽 중공군에 압도, 포위되어서 부대의 일부는 후퇴할 수 있었지만 사망, 부상, 포로 등 희생이 대단히 컸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중공군 지도자를 만나게된 Irony한 계기가 있었다. 중국 국가소수민족 위원회 부위원장 文正一씨를 만나게 된 것으로 이는 실로 희안한 일이 있었다. 문씨는 중공 8로군 하의 조선족 부대의 사령관으로 5만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연합군을 격퇴했던 조선족 지도자였으며 문씨와 본인은 문씨가 별세할 때까지 서로 좋은 친분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1984년에는 문씨를 하와이에 초청하여 하와이대학 한국학 연구소에서 강연을 하게 하였고, 한때 본인의 집에서 일주일 묵은 적도 있었다. 문씨의 사위 汪丁丁을 East West Center의 조수로 도미유학을 알선하였고 그는 하와이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아 현재 저명한 학자로서 중국의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전쟁은 1953년 휴전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고 현재의 군사비무장 지대로 남북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태로 1992년 한중 관계가 정상화 될 때까지 중국과 한국은도 적대 관계였다. 따라서 1980년대 까지는 한중간에 아무런 실질적 교류가 없었다. 1981년 3월 본인은 한국여권을 소지하고 미국연방정부의 교육기관인 동서문화쎈타의 장으로 쎈타의 연구원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이끌고 2주간 중국방문을 하게 되었다. 북경에서 시작하여 상해, 항주, 광주의 여행 일정을 마치고 광주에서 열차로 홍콩에 가려하는데 광주의 열차 역에서 본인을 출국시킬 수 없다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중국 변방군 출국관리 병사가 한국여권을 본 적도 없고 홍콩으로 출국시킬 수 있는 국가 list에 남조선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서 출국을 시키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전송나온 광동성 고급관리가 본인의 중국방문은 북경의 중앙정부가 예외적으로 승인한 것이며 광동성 정부가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고 하면서 함께 출국을 허락하도록 요청을 했다. 그러나 출입국 관리관 측은 본인을 출국시킬 수 있으나 잘못하면 열차 내에서 홍콩-광주 사이를 왔다갔다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당시 그들은 한국 여권을 소지하면 Hong Kong Visa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 30분의 논란이 끝나고 본인은 드디어 홍콩행 열차에 대표단과 함께 탑승하여 홍콩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중국과 홍콩 일정을 마치고 하와이에 돌아 온 그 이틑날 사무실이었던 동서문화센타 총재실에 도착하자 일본 총영사관의 에노모토 스게다 로 총영사에게로부터 전화가 왔다. 본인이 한국시민으로 중국을 방문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본인이 한국시민으로 중국에 다녀온 것이 사실인데 어떻게 그것을 알았느냐고 반문했더니 동경 외무성 본부에서 확인해달라는 지시가 있어서 전화한 것이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런일 있은 후 얼마 안있어 당시 한국 국회 외교분과 위원장이던 유치송 의원이 하와이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을 공항에서 영접하자 마자 본인이 한국 시민으로서는 제일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정식으로 보고 받았다고 전해 주었다. Comments 한병식 조 이제 박사님의 파란만장한 입신출세 성공수기를 잘 보았습니다. 대단한 수재시고, 참 열심히 사신 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안치쌍의 외삼촌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인가요? 치쌍이 모친이 이 분의 친 여동생? 현재 연세는 얼마나 되시나요? · Reply · 10 w Duckhwan Kim 안치쌍이란 분은 누구신지요? · Reply · 10 w 배원기 Duckhwan Kim 우리 고교 동기중 한 명 · Reply · 9 w 배원기 이 친구가 영어를 무척 잘했고, 본인도 하와이 대학에 유학가고 싶어했는데, 조 박사님께서 조카를 추천하는 것은 네포티즘(nepotism)에 해당한다고 해서, 조카는 추천하지 않고, 다른 친구가 추천받아 유학다녀와서 장관까지 했지요. · Reply · 9 w 배원기 Duckhwan Kim 미국에서 조카를 대학원 학생으로 받아들이면, 무척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요즘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하게 되었다고 느낌. 잘 알고 지내는 모 은행 회장의 조카들은, 삼촌에 은행 회장으로 있는 관계로, 오히려 승진 등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 조카는 대학졸업후 은행에 입행해서 열심히 하고 있는데, 늦게 회장으로 들어온 삼촌때문에 억웅함을 당하고 있어서... · Reply · 9 w Duckhwan Kim 배원기 그럼 다른 대학이라도 가셨으면 좋았을텐데요... · Reply · 9 w Duckhwan Kim 장관하신분이 누구신지요? · Reply · 9 w 배원기 김동수 · Reply · 9 w 배원기 Duckhwan Kim 글쎄말이예요. 그런데, 그 당시에 미국 본토대학은 하와이 대학에 비해 한국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혜택이 적어서, 많은 학생들이 하와이로 유학갔었어요. · Reply · 9 w Duckhwan Kim 아, 네..... 공정거래위원장 하신분이시군요. 김상조 만큼 G랄 맞게한 공정거래위원장은 없을 겁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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