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4

알라딘: 지구화 시대의 정의 -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 프리즘 총서 5 낸시 프레이저

알라딘: 지구화 시대의 정의

지구화 시대의 정의 -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 프리즘 총서 5  
낸시 프레이저 (지은이),김원식 (옮긴이)그린비2010-11-30
원제 : Scales of Justice: Reimagining Political Space in a Globalizing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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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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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0원 (10%, 1,800원 할인)
288쪽
책소개‘

그린비 프리즘 총서’ 다섯 번째 책. 정치철학자이자 여성주의 이론가로 유명한 낸시 프레이저의 저서 중 국내에 처음으로 출간되는 책이며, 저자가 그동안 정의론을 숙고한 성과를 집약하고 있다. 저자는 기존의 정의론들이 ‘영토국가’와 ‘경제적 재분배 문제’라는 틀에 갇혀 있었음을 비판하고, 지구화 시대에는 정의에 관한 새로운 틀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20세기의 주요 사상가들과 사회운동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해, 지구화 시대에 걸맞은 정의의 내용·당사자·방법을 규정한다. 그리고 정의 문제의 ‘다원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데 있어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비판적·제도적 이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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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옮긴이 서문 5
2판 저자 서문 8

감사의 말 …5

1장 정의의 스케일, 균형과 지도: 논의를 시작하며 13

2장 지구화하는 세계에서의 정의에 대한 새로운 틀의 설정 29
삼차원적 정의론: 정치적인 것의 특수성에 관하여 36
정치적 부정의의 두 수준: 일상적인 정치적 대표불능에서 잘못 설정된 틀로 40
틀의 설정에 관한 정치: 국가-영토성에서 사회적 영향력으로 46
탈베스트팔렌적 틀의 설정 50
메타?정치적 정의 53
독백적 이론과 민주적 대화 55

3장 평등주의의 두 가지 독단 59
‘내용’에서 ‘당사자’로 그리고 ‘방법’으로 61
두번째 독단을 넘어서: 표준 사회과학에서 비판적-민주적 ‘방법’으로 72
‘당사자’ 문제에 관한 논쟁의 민주화: 제도적 문제들과 개념적 문제들 81

4장 비정상적 정의 89
지구화하는 세계에서 나타나는 비정상성의 마디들 95
비정상적 시대의 정의론을 수립하기 위한 전략들 103
정의의 ‘내용’: 세 차원에서의 동등한 참여 105
정의의 ‘당사자’: 잘못 설정된 틀과 종속 111
정의의 ‘방법’: 메타-민주주의의 제도화 120
새로운 정상성?: 성찰성, 논쟁, 헤게모니에 대하여 127

5장 공론장의 초국적화: 탈베스트팔렌적 세계에서 공론의 정당성과 유효성에 대하여 135
고전적인 공론장 이론과 그에 대한 급진적 비판: 베스트팔렌적 틀의 주제화 139
탈국민국가적 상황: 베스트팔렌적 틀에 대한 문제제기 150
공론장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사유하기 162

6장 여성주의의 상상력에 대한 지도 그리기: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다시 대표로 173
여성주의의 제2의 물결에 대한 역사적 고찰 175
사회민주주의의 젠더화: 경제주의 비판 177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문화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불행한 결합 180
인정의 지형: 탈공산주의, 탈식민주의 그리고 제3의 길 183
미국의 젠더정치, 9·11 이후 185
복음주의: 자아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기술 188
여성주의에 대한 새로운 틀의 설정: 대표와 관련된 초국적 정치 192

7장 훈육에서 유연화로?: 지구화의 그림자 속에서 푸코 다시 읽기 197
포드주의적 훈육에 관한 이해 199
훈육에서 유연화로? 208
지구화된 통치성 211

8장 지구화 시대의 인류에 대한 위협들: 21세기에 대한 아렌트적 성찰들 219

9장 틀의 설정에 관한 정치: 케이트 내시·비키 벨과 낸시 프레이저의 대담 235

옮긴이 후기 261
참고문헌 264
찾아보기 283

접기
책속에서
정의의 스케일이 가지는 두 가지 영상 모두와 관련하여 현재 기존의 이해방식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 제기되고 있다. 균형이라는 영상의 경우는 정의의 ‘내용’에 대한 상충하는 견해들이 나타남으로써 도전받게 된다. 정의의 내용은 재분배인가, 인정인가, 아니면 대표인가? 지도라는 영상의 경우는 ‘당사자’에 대한 틀을 설정하는 데서 충돌이 ... 더보기
정의를 동등한 참여로 보는 관점은 이러한 접근에 쉽게 적응할 수 있다. 이 원칙은 민주적 정의가 가지는 성찰적 성격을 보여 주는 이중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먼저 동등한 참여의 원칙은 우리가 그에 의거하여 사회적 상태를 평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정의 원칙을 밝혀 준다는 점에서 결과와 관련된 개념(?outcome notion)이다. 사회적 상태는 관련된 모든 사회적 행위자가 동등한 자격으로 사회적 삶에 참여하도록 허용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정당한 것이 된다. 다른 한편, 동등한 참여는 그에 의거하여 우리가 규범들의 민주적 정당성을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절차적 기준을 밝혀 준다는 점에서 과정과 관련된 개념(?process notion)이기도 하다. 규범들은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하고 공개적인 토론의 과정 속에서 관련된 모든 당사자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경우에만 정당하다. _ 2장 「지구화하는 세계에서의 정의에 대한 새로운 틀의 설정」 중에서(57~58쪽)  접기
내 생애에서 지금처럼 암울한 시기를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1960년대나 1970년대와는 당연히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현재 나는 낙관주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들이 이러한 집단행동의 문제들을 극복하는 순간들에 의해서, 즉 그들이 규칙을 새로 쓰고 게임을 변화시켜 나갈 때 역사가 단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과거에도 일어났고 미래에도 분명히 일어날 것입니다. 물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완전한 정의는 아닐 것이고 과거와 약간은 다르지만 불완전한 질서일 것입니다.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정의롭지 못한 배제에 의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하나의 성취였습니다. 역사적인 지혜 덕택에 이런 사실을 깨닫고 있는 우리는 게임의 규칙을 변경시킴으로써 그러한 부정의들을 다시 한 번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_ 9장 「틀의 설정에 관한 정치: 케이트 내시·비키 벨과 낸시 프레이저의 대담」 중에서(258~259쪽)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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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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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0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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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낸시 프레이저 (Nancy Fraser)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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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치철학자, 비판이론가, 페미니즘 사상가. 뉴스쿨의 정치학과와 철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지만, 비판이론가들뿐만 아니라 여러 지적 전통에 속한 학자들과 논쟁하며 자신만의 사회이론을 발전시켜나갔다. 1990년대에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적 영역 개념을 젠더와 계급 불평등의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2000년대에는 분배적 정의와 인정적 정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놓고 악셀 호네트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최근 들어서는 주류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진보적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전진하는 페미니즘》, 《지구화 시대의 정의》 등의 저서와 《99% 페미니즘 선언》, 《분배냐, 인정이냐?》 등의 공저서가 있다. 접기
최근작 :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99% 페미니즘 선언>,<거대한 후퇴> … 총 87종 (모두보기)
김원식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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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하버마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배제, 무시, 물화』 『하버마스 읽기』가 있으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 『포스트모던의 테제들』 『현대 정치철학의 테제들』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 등을 공저했다. 역서로 『이성의 힘』 『지구화 시대의 정의』 『분배냐, 인정이냐?』(공역) 등이 있다.
최근작 : <한반도의 분단, 평화, 통일 그리고 민족>,<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하버마스 읽기> … 총 16종 (모두보기)
프레시안'우물 안 개구리'가 외치는 정의는 '부정의'다! l 2011-03-07
존 롤스의 <정의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악셀 호네트의 <정의의 타자> 등 국내 출판업계에서도 '정의'를 다루는 수많은 서적들이 풍성하게 번역되어 나왔다. 그러나 무수한 논의와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정의 불감증에 걸려 있다.정의를 갈구하거나 부정의에 분노하기보다 정의의 문제에 무감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

출판사 소개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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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기술철학 개요>,<불안의 시대 이교도와 기독교인>,<파라-독사의 사유>등 총 610종
대표분야 : 철학 일반 2위 (브랜드 지수 144,932점), 여성학/젠더 11위 (브랜드 지수 26,271점), 고전 22위 (브랜드 지수 143,082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지구화 시대의 정의란 무엇인가?
―비정상성의 시대, 정의론의 틀을 새롭게 설정하는 정치철학!!

우리는 지금 ‘비정상적 정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의가 ‘무엇’인지, 정의의 주체(당사자)는 ‘누구’인지, 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에 관한 의견 일치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핵심적 부정의는 무엇인가? 경제적 불평등인가, 소수자에 대한 무시인가, 민주주의 제도의 퇴화인가? 부정의를 해소하고자 할 때 고려해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영토국가의 국민인가, 세계시민적 개인인가?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인가? 통치자들의 조직인가, 자본에 반대하는 초국적 대중운동인가? 기존의 정의론들은 이런 질문에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기는커녕, 서로 다른 전제들 속에서 무의미한 논쟁만을 벌이고 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 질문들에 답하는 데 필요한 ‘원칙’을 재설정하는 일이다.
그린비출판사에서는 미국의 사회·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의『지구화 시대의 정의: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Scales of Justice: Reimagining Political Space in a Globalizing World)을 ‘프리즘총서’의 5번째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에서 프레이저는 ‘영토국가’와 ‘경제적 재분배’라는 한계에 갇혀 있었던 기존 정의론들이 현실의 변화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나아가 그녀는 지구화하는 우리의 세계에 부합하는 정의의 내용˙당사자˙방법을 규정하고, 정의에 관해 상충하는 견해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성찰적˙민주적 정의론을 정초한다.
낸시 프레이저는 뉴욕에 위치한 ‘뉴스쿨 사회과학 대학원’(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의 교수이다. 미국에서 진보적인 학문이 허락되는 얼마 안 되는 공간 중 하나인 이곳에서 그녀는 여성주의 이론과 현대 정치철학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tler) 등 오늘날을 대표하는 사상가들과의 활발한 논쟁을 통해 비판이론과 정의론을 선두에서 이끌고 있다. 『지구화 시대의 정의』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프레이저의 저작으로, 그동안 그녀가 쌓아 온 이론적 성찰을 집약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녀는 과거의 자신뿐 아니라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위르겐 하버마스(J?rgen Habermas),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같은 여러 선배 사상가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정의론을 구축하고 있으며, 여성주의 운동과 세계사회포럼 등의 실천적 저항운동에 주목함으로써 자신의 이전 이론이 지니고 있었던 약점을 성찰하고 지속적으로 보완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현재 한국은 어느 나라 못지않게, 아니 그 어느 나라보다 더 비정상적 시대를 겪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차별, 대의제의 위기 등 사회 거의 모든 차원에서 부정의가 전면화되어 있으며, 이 차원들 간의 복합적 상호관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이론적 틀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반영하기라도 하는 듯, 얼마 전에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전체 베스트셀러 수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체계적이고 명료한 언어로 기존 정의론들을 비판하고 차별화된 관점으로 정의 문제에 접근하는 『지구화 시대의 정의』는, 우리 시대/사회 특유의 부정의들을 이해하고 해소하려는 노력에 강력한 이론적˙실천적 토대를 제공해 줄 것이다.

‘지구화 시대’에 걸맞은 다차원적 정의론 수립 전략!
‘비정상성의 시대’, 정의의 문법이 불안정해지고 있다
베스트팔렌적?케인스주의적 틀은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근대 영토국가가 정의의 문제를 생각하기에 적합한 단위이고 그러한 국가의 시민들이 적절한 주체들이라는 생각은 이제 공리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정치적 요구와 관련된 기존 구조는 불안정해졌으며, 그 결과 우리가 사회정의에 관해서 논쟁하는 방식도 변화하게 되었다(2장, 32쪽).

이 책 전반부(1~4장)에서 낸시 프레이저는 오늘날 정의론이 처한 위기를 진단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 틀을 제시한다. 그녀는 우리가 ‘비정상적 정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의의 내용˙당사자˙실현방법 등 모든 면에서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 정의론은 여전히 ‘케인스주의적?베스트팔렌적 틀’(Keynesian-Westphalian Frame)을 고수하고 있다. 이 틀은 오랫동안 사회정의론의 암묵적 전제 역할을 했으며, 정의의 범위와 문제를 영토국가와 경제적 재분배에 한정시켰다. 하지만 ‘지구화 시대’에는 국경과 영역을 초월한 부정의들로 인해 베스트팔케인주의적?베스트팔렌적 틀이 파열되고 있다. 초국적 기업의 전 지구적 약탈, 강대국의 패권적 일방주의, 급증하는 이주와 이주자에 대한 차별, 지구온난화, 에이즈의 확산, 국제 테러리즘 등 현실에서 혹은 잠재적으로 우리 삶을 파괴하는 해악들 중 ‘영토국가’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또한 ‘경제적’ 부정의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성적˙민족적˙인종적 차별도 우리 시대의 핵심적 부정의이며, 나아가 정의 문제가 이처럼 다양한 공간과 영역을 포괄하게 됨에 따라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도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기존 정의론들은 변화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영토국가와 경제적 재분배를 넘어서는 이론도 산출하지 못하고 있다.
프레이저는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현재 정의론이 처한 위기를 진단한다. 그녀에 따르면 지구화 시대의 ‘비정상적 정의’ 상황이 완전히 임의적인 것은 아니며, 정의론은 중심적인 세 가지 마디(node)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 그 마디들이란 바로 정의의 내용˙당사자˙방법이다. 오늘날 우리는 정의의 ‘내용’에 관한 공유된 이해를 갖고 있지 않다. 어느 사람이 분배부정의를 확인하는 문제에서 다른 사람은 문화적 차별을 감지하며, 또 다른 사람은 정치적 지배를 발견한다. 또한 우리는 정의의 ‘당사자’에 관해서도 공유된 관점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어느 사람이 국민국가적 당사자를 통해 정의 문제의 틀을 설정하는 데 반해, 다른 사람은 초국적 혹은 지구적 당사자를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에서도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어느 사람이 국가의 법이나 국가 간 조약이 갖는 권위에 호소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국제연합이나 (앞으로 고안되어야 할) 세계시민적 민주주의에 주목한다. 이처럼 정의의 주요한 세 차원이 확실성을 결여한 결과, 사람들은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지구화 시대의 정의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구화 시대에는 정의의 틀 자체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비정상적 시대’는 기존의 정의 원칙들을 파괴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은폐되었던 부정의들을 폭로하고 그것들까지 해소하는 새로운 정의론을 구축하도록 자극받기 때문이다. 케인스주의적?베스트팔렌적 틀 안에서 정의론은 주로 경제적 재분배만을 정의의 ‘내용’으로, 근대 국민국가의 시민만을 정의의 ‘당사자’로 간주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정의에 관한 논쟁들이 아무리 치열했어도, 이 전제들은 문제시되지 않은 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반해 프레이저는 현실의 변화와 선배 사상가들의 통찰 그리고 진보적 사회운동들을 면밀히 관찰함으로써 기존 정의론들의 암묵적 전제를 비판하고 오늘날 현실에 부합하는 독창적인 정의론을 구축한다.
그녀는 위에서 언급한 ‘비정상성의 세 마디’ 모두를 고려하는 새로운 정의론을 정식화한다. 정의의 ‘내용’ 측면에서 그녀는 정의 요구의 다원성을 인정하고, 이 내용들을 동등한 참여라는 규범적 원칙 아래 포괄할 것을 주장한다. 그녀에게 정의는 ‘동등한 참여’(participatory parity)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당사자로서 참여할 권리가 있는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배제되는 경우 ‘부정의’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때 ‘배제’는 경제적 불평등, 소수자에 대한 문화적 무시, 정치적인 대표 불능이라는 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프레이저에 따를 때 정의론은 이 세 차원 ‘모두’가 독자적인 정의의 내용이며 그것들 각각이 부정의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 모든 요구자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다.
‘당사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어떤 단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정의의 당사자로 봐야 하는가? 그 단위가 국가인지, 전 세계인지, 특수한 협치구조(유럽 연합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과 같은)인지에 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의견 일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프레이저는 당사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찰적(reflexive)이면서도 확정적(determinative)인 이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이론은 특정한 ‘하나의’ 틀(예컨대 국가)이 정의의 당사자를 결정하는 데 언제나 합당하다는 가정을 거부하며, 당사자를 설정하는 ‘복수의’ 틀들(예컨대 국가와 초국적 시민사회)이 병존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성찰적이다. 나아가 이 이론은 당사자를 결정하는 원칙까지 제시한다는 점에서 확정적이다. 그 원칙은 종속된 모든 사람들의 원칙으로서, 이 원칙에 따르면 “특정한 협치구조에 종속된 모든 사람은 그 구조와 관련된 정의 문제와 관련하여 주체로서의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4장, 117쪽). 그리고 이때의 ‘협치구조’(governance structure)는 국가뿐 아니라 중요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결정하는 기구들―세계무역기구나 국제통화기금과 같은―도 포함한다. 프레이저는 이처럼 유연성을 견지한 이론만이 비정상적 시대에 당사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들을 해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과 관련해 대화적(dialogical)이면서도 제도적(institutional)인 이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흔히들 우리 시대를 민주주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무엇을 정의 문제로 규정하고, 그것을 누구에게 적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대부분 권력자들 및 엘리트들에게 위임되어 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주로 기득권자의 관점과 이익을 보호하는 데 복무한다. 이런 상황을 비판하면서 프레이저는 정의 문제를 다루는 방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대화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화 그 자체가 해결책은 아니다. 그녀는 이런 대화를 통해 결정된 사안이 ‘구속력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있는 방안까지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론은 ‘제도적’이어야 하며, 제도적 과정은 대화적 과정과 역동적인 상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처럼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규범적이고, 성찰적이면서도 확정적이며, 대화적이면서도 제도적인 이론이 그녀가 제시하는 새로운 정의론이다. 이 정의론은 매우 강력한 개념적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정의의 내용˙당사자˙방법과 관련한 상충하는 견해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다양한 실천과 사상을 흡수해 더욱 풍부해진 정치철학
낸시 프레이저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정의론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실천들과 사상들에서 받은 영향을 비판적으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후반부(5~8장)에서 그녀는 자신이 구축한 정의론에 기초해 그녀에게 영감을 주었던 실천과 사상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여성주의와 세계사회포럼: 정의의 새로운 차원을 일깨워준 실천들
그녀 사유의 특징 중 하나는 추상적인 사고실험을 통해서만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그녀는 현실에서 생겨나는 부정의의 새로운 양상들과 이에 맞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저항들을 주요한 이론적 자원으로 삼으며, 이런 태도가 그녀의 정의론을 한층 더 현실적이고 비판적으로 만들어 준다. 예를 들어 여성주의를 통해 이론적 실천을 시작한 그녀에게 여성주의가 맞이한 위기와 이를 타개하기 위한 여성주의자들의 노력은 기존 정의론들의 비현실성을 비판하고 보다 정합적인 이론을 구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녀가 정의의 내용뿐 아니라 당사자와 방법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바로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여성주의 운동이 겪은 부침이었다. 여성주의 운동의 패배를 목격하면서, 이 패배를 이론화하고 극복할 수 있는 정의론을 구축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다.
또한 이 책에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대안지구화’를 주창하는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 활동가들의 움직임이 그녀에게 미친 영향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국경을 초월해 부정의를 저지르는 세력들에 지구적 빈곤층이 대항할 수 있는 국제적 공론장을 만들고자 한 이 활동가들에게서 그녀는 초국적 연대성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를 통해 영토국가라는 암묵적 전제를 넘어설 수 있었다. 이렇듯 독백적 전제들에 근거해 관념적인 정의론을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역동적인 움직임들을 포착해 자신의 이론체계 속에 포함시키려 노력했기 때문에, 그녀의 정의론은 살아 움직이는, 오늘날 현실에 적합한 이론이 될 수 있었다.

하버마스,푸코,아렌트: 새로운 정의론을 사유하기 위한 교두보
다른 한편으로, 지구화하는 세계의 정의론을 구축하면서 프레이저는 다양한 선배 사상가들의 통찰을 비판적으로 계승한다. 5장 ‘공론장의 초국적화’에서 그녀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과 그것에 가해진 비판들 모두가 ‘영토국가’라는 베스트팔렌적 틀을 당연시했던 것을 문제 삼는다. 나아가 그녀는 단순히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성을 지니고 있는 ‘공론장’ 개념을 초국적 정의를 실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구성하고자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7장 ‘훈육에서 유연화로?’와 8장 ‘지구화 시대의 인류에 대한 위협들’에서 그녀는 미셸 푸코의 ‘통치성’ 개념과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 분석을 검토하면서, 그것들이 지구화 시대에는 부적합한 이론들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부정의들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분석틀을 제공했음을 강조한다.
이렇게 프레이저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이론들을 반성 없이 수용하거나 오늘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손쉽게 내버리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역사화한다. ‘공론장’, ‘통치성’, ‘전체주의’는 모두 ‘케인스주의적?베스트팔렌적 틀’ 속에서 의미를 지녔던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반대로 이 개념들은 ‘정의’와 관련해 우리가 어떤 문제들을 고려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기 때문에 여전히 숙고할 가치가 있으며, 우리의 과제는 그것들이 현재 어떤 양태 속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부정의를 넘어서기 위하여
현재 정의론이 처한 위기에 관한 프레이저의 진단과 해결책은 현실적인 동시에 이상적이다. 그녀는 지구화가 정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으며 부정의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함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정의의 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형성된 그녀의 정의론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부정의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현재 한국 사회 역시 비정상적 정의 상황에 처해 있다. 기존의 부정의와 지구화가 유발하는 부정의가 결합되어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은 이미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포섭되어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여성˙동성애자˙장애인˙이주노동자 등 소수자에 대한 무시와 차별도 종식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정당들은 시민의 의지를 제대로 대표하고 있지 못하며, 시민사회 차원의 운동들도 정책 결정 과정에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우리 사회에서 핵심적인 정의의 내용을 무엇인가? 국내뿐 아니라 해외 강대국들의 정책이 우리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현실에서 정의의 당사자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반대로 우리 사회를 기반으로 한 초국적 기업이 저발전 사회의 노동자˙자원을 약탈하는 상황에서 그 사회의 시민들을 어떤 방식으로 정의의 당사자로 구성할 것인가? 진보정당의 의회진출, 대규모 촛불시위 등 놀라울 정도의 민주주의 발전을 이룩했지만, 그 발전이 사실상 구속력 있는 조치까지 이어지는 경험을 하지 못한 우리는 앞으로 어떤 방법을 통해 정의를 실현해 나갈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으며, 만족스러운 해답을 내리는 것은 당분간은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구화 시대의 정의』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부정의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방안에 대한 실마리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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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명저라 한 장 한장 읽기가 아까운 책.

다만, 번역에서 내용(what), 당사자(who), 방법(how)와 같은 것은 병기를 해주었다면 이해에 좋았을 듯!  구매
bdpppa 2021-06-27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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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지구화 시대의 정의 새창으로 보기 구매
우리에게 젠더학과 페미니즘 이론가로 잘 알려져 있는 낸시 프레이저는 실제로는 후기구조주의에 입각해 사회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며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인정받는 학자들중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다만, 근래 국내에서는 페미니즘 연구가 큰 화두가 되면서 관련 학자들이 여러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는데요. 그중 국내 출판계에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인용되고 있는 사람이 바로 프레이저입니다. 더불어 그녀는 악셀 호네트의 연구와 함께 사회정의 및 정의론에도 관심을 갖고 어쩌면 여성주의 운동 또한 이런 정의론에 입각해 해석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서는 프레이저의 연구가 약간 난해하다는 평가도 하고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적절한 사회학적 지식 배경이 갖춰져 있지 않는다면 상당히 읽기 지루한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토마 피케티에 의해 새롭게 점화된 정의론에 대한 최신 경향과 이론을 인지하고 있지 않고 있다면 꽤 어려운 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8년 원제 “Scales of Justice : Reimagining Political Space in a Glolbalizing World” 로 처음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대담을 포함한 마지막 장을 포함해 총 9장의 다소 구분된 주제로 되었는 글의 전체적인 구조는 특히, 요즘들어 자주 요청되는 정의론에 대해 그녀는 새롭게 인식과 배경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지구화 시대’에 헌법에 의한 사회 정의 및 국가적 정의론의 주된 배경이 되었던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거한 국민국가주의가 사실상 한계를 맞이하고 있다는 인식으로 주된 논거를 확대하는데요. 이것은 글로벌 기업들이 국가라는 개념에 연연하지 않고 생산기지를 값싼 노동력을 따라 수시로 이전함에 따라 더이상 자본주의의 이전 제약이 없어지는 현실을 기반으로 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점은 약간 논란이 될 수도 있겠는데요. 해당 사회에 정착한 기업의 생산 공장에 일하는 노동자들이 과연 속지주의에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그 기업의 국적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정치적 구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점은 저자인 낸시 프레이저가 강조하는 오늘날 비정상적 사회에서 정의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불평등한 분배, 무시, 대표 불능의 문제”에 따른 정의의 대상은 과연 누구인가에 명확한 답변을 요구하게 됩니다.

따라서, 과거 베스트팔렌적 국민국가주의는 오늘날 영토국가의 규제력과 세금 부과 능력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진 다국적 기업의 본질과 이 세계화 시대의 진실된 면모를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한 한계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로서도 이런 낸시 프레이저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었는데요. 특히 이러한 글로벌 기업의 경영자들과 수많은 부유층들이 “시민들이 법 앞에서 형식적으로 평등한 것으로도 충분하다 보았다”는 이들의 본심이 ‘과연 사회에 정의가 필요한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고 보였습니다. 그래서 앞의 합리적 대응에 필요한 정의를 저자는 ‘삼차원적인 정의’라 표명하고 이에 “경제적 분배 차원 및 문화적 인정 차원과 더불어 정치적 대표 차원’을 포함하는 것을 뜻한다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삼차원적인 정의와 관련해서는 제일 마지막인 정치적 대표 차원이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겠는데요. 2장에서 논증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치적으로 아예 배제된 사람들’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저자는 비판하고 이 점은 뒤에 4장에서 이어지는 대로 ‘비정상적 사회에 종속된 사람들의 정의’는 그 대표성과 정의의 대상이 누구인가가 중요하며, 이것을 사회과학자들이나 사회철학자들에게 그 범주와 인정을 맡기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고 프레이저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비정상적 사회에 놓여 있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인정과 운명을 소위 전문가들인 사회과학자들에게 일임해 버리는 것은 스스로 정의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물론, 광범위한 정의를 주장하는 일종의 평등주의 또한 두 가지의 독단이 있다면서 프레이저는 3장에서 언급하는데요. 정의와 평등에 관한 의견 불일치에 따른 논쟁도 없이 국민만을 ‘당사자’로 규정하는 암묵적 가정과 표준 사회과학의 정의의 ‘당사자’를 규정할 수 있다는 무언의, 입증되지 않은 가정이 그렇습니다. 전자는 일종의 베스트팔렌적 국가의 한계로 후자는 사회과학의 증거와 이론적 가정에 따른 이들이 ‘당사자’를 결정하는데 시민들의 맹신을 비판하고 있는 보였는데요. 사실 뒤이어 5장에서도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과 더불어 이런 시민들의 의사소통 권력이 국가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구조적 힘들이 무엇이냐”에 일부 해답이 바로 이 사회과학에 대한 시민들의 맹신이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과학 주류에서 통용되는 내용들은 기득권자들의 관점을 잘 반영하고 그들의 약점을 방어하기 마련인데, 이런 사화에서 과학주의적 가정을 채태하는 것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요구를 은폐할 위험이 있다”고 보는 저자의 예견과 일맹상통한 부분이라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또 달리 말하면, 시대의 지식인들이 현재의 기득권과 결탁해 일찍이 신자유주의의 교조인 하이에크가 주장한 ‘정의 따위가 필요한가’에 매우 근접한 결과라 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입니다. 반대로 평등주의의 요청과 필요성과 관해서도 모두가 강제로 ‘결과주의적 평등’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 부정적인 사회적 결과를 낳게 될 것이므로 우리가 주목해야되는 평등은 ‘출발선상에서의 평등’이라 개인적으로는 그리 생각합니다.

곧이어, 다음에서 논의되는 ‘비정상적 사회의 부정의’에 대해서 저자는 이런 부정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요구들을 공정하게 검토할 수 있는 상대적인 안정틀이 필요하고 둘째로, 부정의를 시정할 제도화된 기관과 수단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사람들의 휴머니즘적 원칙들이 결함을 가진다고 보았을 때, 우리 모두가 종속된 모든 사람들의 원칙 all-subjected principle에 따라 포섭시킬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모두가 인식하는 공통된 원칙을 가질 것을 일종의 정의를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건이 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규범화된 원칙은 이래서 매우 시급하며, 어쩌면 그런 연유로 사회과학자들의 각종 이론 제시는 현실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였는데요. 다만,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의 파편화와 시민들의 파생적 종속 문제에 대해 끊임없는 여론의 돌출과 이를 이론화 시키는 사회과학자들의 역할론은 분명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필요성에 대해 별반 언급은 안하고 있습니다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소위 전문가들의 조언 보다는 직접적인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와 의견 일치 및 광범위한 규범화를 더 인정하는 듯 보였습니다. 저의 결과론적인 입장은 매번 엘리트 정치와 전문가적 조언이 우리의 삶에 정확한 해결책이 되지는 않으며, 민주주의 자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다양성의 측면에서 민주 정치 자체를 우리의 손으로 영위해 가는 중요한 가치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첨언으로 얹고 싶습니다.

끝으로, 6장과 7장 그리고 8장은 보는 독자에 따라서는 주제의 중요성을 구분하는 장으로 여겨질 수 있을텐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들 3장을 일종의 보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6장의 여성주의적 상상력은 말 그대로 시급한 정의와 5장에서 논의되는 좀 더 효과적인 공론장의 역할에 대한 첨언이 될 수 있으며, 7장의 푸코, 8장의 한나 아렌트의 지구화시시대의 인류의 위협에 관한 부분 또한 그러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한나 아렌트에 대해 따로 추려볼 수 있는 부분은 그녀가 일찍이 지구화 시대의 시민 권리의 축소에 대해 우려했던 것으로 보아 그녀가 경고하는 다방면적인 증거 제시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악을 몸소 체험하고 그것을 일일이 분석했던 사상가로서 다른 어떤 사회학자나 철학자에 비해 그녀의 철학적 담론은 충분히 시민들에게 깊은 설득력을 보이고 있다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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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20-02-09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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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프레이저의『지구화 시대의 정의』독서 메모 새창으로 보기
-낸시 프레이저, 『지구화 시대의 정의: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김원식 옮김, 김재훈 편집, 그린비, 2010.

1. 문체의 미덕: 낸시 프레이저의 이 책은 그야말로 비판적 현대사회이론의 교과서라고 부를 만한 책이지 않나 싶다. 특히 어떤 면에서 그러하느냐면 서술이 놀라우리만치 명확간결명료하며 건축적이다.
  명확간결명료하다는 것은 저자가 특정한 주제를 묘사하는 데 사태를 과장하기 위한 문학적 장식을 달지 않고, 모국어 이용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장난 애드립을 치지 않으며, 특정한 이론의 추종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를 쓰지 않고, 교과서 류의 전공서적에 주로 쓰이는 중립적이고 일반적인 어휘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일반화를 하면서도 본래 이론적 배경이 되는 사상들의 힘을 거의 축소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해당 사상들의 호환가능성을 윈도우급으로 격상시킨다는 데에서 그 힘을 적어도 현행적인 차원에서는 증진시킨다. 그러니까 거칠게 소화해보자면 원래 잠재된 힘이 100인데 쓸 수 있는 것은 10밖에 안 되었다면, 여기서는 잠재된 힘을 80으로 축소하는 대신 적어도 70은 사용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 잠재되어 있는 힘이 100인지는 10밖에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20이라는 가상적 잠재력에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사용할 수 있는 힘 60의 증가에 기뻐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렇다고 책이 절대로 딱딱하거나 하지 않은 것은 놀라울 정도로 건축적인 구성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문제가 3개 있고 각 문제당 실제 사례당 3개가 배정되어 있다. 그리고 대안도 따라서 3개이며 이런 문제분석과 대안제시를 위해 참조되는 이론적 전통은 2종류로 나뉘어 3가지 방향에 조명된다 등등...뭔 소리나 싶을 수 있겠는데 책이 정말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따로 노트나 여백에 논의의 구조를 힘겹게 적을 필요가 없다. 거기에다가 이런 건축적인 구조를 가진 내용들은 마지막에 가서는 한 문단 정도에 따로 요약되며 길어야 2~3문장으로 축약될 수 있는 하나의 이론적/실천적 요청으로 정리된다. 사유의 소재를 공급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이를 즉각 활용하거나 독자의 맥락에 접합가능한 형태로 가공해서 내어놓는 것이 아주 기가 막히다.
  이런 명확간결명료성과 건축성이 결합되어 독서는 교과서류 전공서적의 지겨움과는 달리 매우 술술 읽힌다. 오히려 역으로 교과서가 지루한 건 충분히 교과서답지 못했기 때문이구나 하는 반성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독자는 책장을 넘겨가며 복잡해 보이는 경제주의, 문화주의, 정치주의, 하버마스, 푸코, 아렌트 등의 비판적 현대사회이론의 사조와 이름들의 관계를 파악하고 이들이 현재의 역사적 조건과 현실의 투쟁들과 맞물려 어떤 이론적/실천적 과제를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한 좋은 정리 중의 하나를 파악하게 된다. 물론 이건 낸시의 관점일 뿐만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본 메모에서는 낸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일단 생략하기로 한다. 모든 교과서들이 흠이 있지만 적어도 그것들은 좋은 출발의 계기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그렇게 불린다). 하지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바로 밑 수준 정도의 명료함을 가진 문체는 가지고 반박에 임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좀 들기도 한다. 아니면 이렇게 서술이 명료해질 수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기술하던가. 구슬이 서말이에도 꿰어야 보배라는 옛말이 있다. 우리는 이 '꿰는 행위'를 부차적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내 주장일 뿐이지만 호환성은 진리의 우회불가능한 계기 중 하나이다.


2. 사회과학이라는 쟁점: 3장에 등장하는 '사회과학'에 대한 언급들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낸시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모순을 사회현실을 가장 핵심적인 불평등 원인으로 강조하는 이들이 그 무시무시한 전망과는 달리 모종의 순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한 사실들이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묵시적인 사회이론적 가정들과 역사적 해석들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각은 자신들이 요청하고 있는 '사실'이 논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한다. 이러한 상황의 결과는 사회과학자들이 이미 그런 어려운 질문들을 해결해 둔 것으로 추정되는 무대 뒤의 '다른 어떤 곳'을 상정하는 것이다."(70쪽)

  낸시는 이렇게 되면 '무엇이 정의(내용)고 누구의 정의(당사자)인지'에 대해서 결국 (아마도 주류) 사회과학자들이 결정권을 쥐게 된다면서 정의의 내용과 당사자를 결정하는 과정이 지식을 가진 소수가 참여하는 '과학적' 방식이 아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정치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가끔 사회과학이 너무 부정적인 의미로 쓰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사회과학의 '폐기'를 말하기보다는 사회과학의 '활용'정도로 말하는 것 같긴 한데 낸시 자신이 사회과학,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전문적 지식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할지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앞서 말한 정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사회과학에의 종속 문제를 해결키 위하여 '관련된 모든 당사자 원칙'이 '종속된 모든 사람들의 원칙'으로 전화되어야 함을 말하는데 결국 "협치(governance) 구조에 대한 포괄적 이해"(118쪽)라는 것도 사회과학자들의 역할이 클 수 밖에 없지 않겠나?
  만약 낸시가 이 쟁점을 충분히 다루길 원했다면 '지식의 민주화'라는 별도의 쟁점을 다뤄야만 하지 않았을까. 엘리트들에 의해 형성된 지식의 분배에 측면에 있어서나, 지식 자체를 사회적으로 형성하는 생산의 측면에 있어서나 말이다.


3. 규범과 현실 사이에 다리놓기를 고민하기로서의 '공론장'에 대한 비판적 개조: 어쩌면 낸시가 위에서 말한 지식의 민주화, 다른 말로 하자면 일반 공중(public)의 '말'이 모이고 현실을 주조한다는 의미에서의 '정의에의 민주적 참여' 측면을 다루기 위해 하버마스의 공론장 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5장에서 시도하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낸시는 공론장에 사람들이 충분히 진입했느냐는 의미에서의 '정당성'과 그렇게 형성된 공론장이 과연 자신의 기획에 따라 현실을 바꿀 힘으로 전환될 수 있느냐는 의미에서의 '유효성' 차원 둘로 나눠 질문을 던진다. 지구화 시대에 이 둘은 모두 위기에 처했는데 정당성은 국민 이외의 사람들이 공중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효성은 초국적 사태들에 과거나 현재의 국가 기구만큼의 힘을 가지고 개입할 제도적 장치들이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개인적으로는 하버마스의 논의를 그 자체로서나 그 잠재력에 있어서나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는 생각들이 많이 들었던 절이었다.


4. 자신의 과거에 대한 현실적 평가: 여성주의, 특히 제2물결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하고 있는 6장은 핵심 논점 자체도 좋겠지만 뭔가 낸시의 자전적 회고를 듣는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들기도 한다. "재분배에서 인정으로"라는 왕년의 논문 부제에 연상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그는 이런 이행이 긍정적이었다기보다는 결국 탈베스트팔렌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역사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인정'이라는 기획이 마땅히 지향해야 했을 평등주의적 성격을 스스로 박탈했다고 자평한다. 한국 사회의 90년대 이후 소수 지식인들과 출판시장의 조금 특이한 상품으로만 유통되었던 문화주의적 정치를 여기에 비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의 경우 더 슬픈 것은 이런 운동들이 현실 자체에 그때나 그 전이나 큰 영향력은 없었기에 실패해봤자 더 낙담할 껀덕지도 없다는 것이 아닐까...라는 섣부른 짐작을 잠깐 해봤다.
  6장 6번째 절 "복음주의: 자아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기술"은 내가 이 장이 낸시의 자전적 회고 성격을 가지기도 했다고 어림짐작하게 만든 주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그녀는 부시가 당선된 대선과 오바마가 당선된 경선을 예로 들며 여성주의 이론가들이 세심한 이론적 차이에 집착하는 도중에 결국 현실정치와의 접점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뼈아프게 지적한다("미국의 여성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본질주의에 관해서 논쟁하는 동안에 자유시장과 기독교 근본주의 사이의 사악한 동맹이 조국을 장악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185쪽)). 복음주의에 대한 숱한 비판들이 그러는 것과 달리 낸시는 여기서 하층여성들의 ('계급배반적'이라는 수사를 패러디하면) '젠더배반적' 자기의식을 내재적으로 이해하려 하는데 나는 여기서 그녀가 그녀 자신 역시 '미국의 여성주의자'로서 자신의 책임을 찾으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느낌을 계속 받게 되는 것이 이 책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 절 자체가 생뚱맞다. 배경과 주장을 한데 뭉쳐서 한 절로 몰아놓는 다른 장들과 달리 이 장의 이 절과 바로 앞 절은 앞으로 하려는 주장의 배경으로서의 정치적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별도로 자리가 배치되어 있다. 과민한 독해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기서 낸시의 자신의 정신적 유산 중의 가장 큰 부분 중의 하나를 다룬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5. 선배 사상가들에 대한 평가: 도 역시 매우 깔끔하다. 각 사상가를 거부하지도 무작정 계승하지도 않고, 그런 비판적 계승을 각 사상가가 제시한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모두를 취하는 방식으로 전개하는데(자세한 건 직접 읽어보시길) 놀랍게도 푸코와 아렌트 둘 모두에게 이렇게 동일한 논리적 구조의 틀을 적용하여 그렇게 한다. 말 그대로 똑같다. 이런 것을 보고 있자면 결국 이론의 역할이 이런 것이 아닐까라는 반성의 기회를 얻기도 한다. 말로 혁명을 일으키거나 대체하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 담담히 기계적으로 성실하게 문제를 분석하고 지평을 열어주기. 그리고 이것의 성격의 제한성을 분명히 말하고, 그럼으로써 목적성과 유효성을 분명하게 하기.


   문체의 문제, 이론의 역할(분석이냐 규범이냐), 이론과 현실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저런 산만한 고민을 하던 차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적지 않을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좋은 예감을 얻었다. 이 예감을 잘 간직해 놓기 위해서 완결되지 않은 형태고 누구에게 충분히 읽힐만한 형태의 글은 아니지만 감상을 짤막하게 정리해 공개적 공간에 올려놓아 본다. 좋은 책을 추천해주신 구멍 님께 감사드린다.
- 접기
게슴츠레 2011-02-20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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