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2

이승만의 『 독립정신 』 을 읽자 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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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읽자 
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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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대한민국> 제 강2
이승만의 독립정신 을 읽자『
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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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옥중 저술
동기

1904년 2월 9일 일본과 러시아 간의 전쟁이 터졌다 대한제국을 먹이로 한 전쟁. 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대한은 어느 쪽이든 이긴 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갈 판이었 다. 당시 한성감옥에는 나이 29세의 이승만이 중죄인으로 만 5년이나 갇혀 있었 다 전쟁은 인천 앞바다에서 일본 군함이 러시아 군함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되. 었다. 천지를 진동하는 포성이 서울 시내에까지 들렸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에 이승만은 비분강개의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 대한은 망할 것이다. 이승만만이 아니었다. 옥에 갇힌 뜻있는 선비들도 서로 붙들고 울었다. “남의 나라가 내 나라 해변에서 싸우고 있는데 어찌 혈기 충만한 남아가 보고만 있는가. 하물며 국권과 강토를 보전하고 못함이 전적으로 이 전쟁의 결과에 달려 있지 않은가. 지난 30년간 우리는 무엇을 하였는가. 어찌하여 그 좋은 기회를 다 놓치고 이제 망국의 운명을 구경이나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는가.”
열흘 뒤 2월 19일 이승만은 문득 한 권의 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그리. 길게 쓸 요량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번 쓰기 시작하니 머리에 담긴 생각의 실타 래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감옥 안은 소란스러웠다 몇 명의 사형수가 처. . 형되었으며 나가고 들어오는 죄수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이승만은 미, . 안한 마음에 집필을 중단하였다 집필은 밤에도 계속되었다 불빛이 새나가지 않도. . 록 큰 옹기를 뒤집어 등불을 밝혔다 저술을 마친 것은. 6월 29일이었다. 4개월 남 짓한 짧은 기간에 그 열악한 환경에서 오늘날의 국판 440여 쪽 ) 분량의 저술을 완성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승만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머리에, . 담긴 생각을 긴 실타래로 풀어냈다. 범상한 인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천재적 능력과 뜨거운 열정이었다.
그 열정의 밑바닥에는 망국의 위기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고종 황제는 러시아가 이길 것이라는 무당의 점괘를 믿고 태연자약하였다. 조정의 대관 들은 여전히 미국 일본 러시아 공사관을 들락거리며 명리를 추구함에 바빴다, , . 31 년이 지난 1945년 11월 이승만은 당시의 정세를 지붕에 불이 붙었는데 처마 끝의, 제비가 지지배배 노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위정자들만이 아니었다. . 어리석은 백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세상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전쟁이 터졌는. . 데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였다. 혹은 전쟁이 났나보다 하면서 인천 앞바다로 구 경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망국의 현실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하였다 어쩌. . 다 반만년의 찬란한 역사를 지닌 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되고 말았는가. 한마디로 ‘독립정신 의 결여가 기본 원인이었다’ . “대한 인민의 마음속에 독립이란 두 글자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인민들의 마음속에 독립하려는 마음을 넣어주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제일가는 일이다.” ) 1904년 2∼6월 옥중의 이승만이 미친 듯이 붓을 날린 것은 이 같은 취지에서였다.
최초의 한글 저작
『독립정신 은 순 한글로 쓰였다』 . 전국의 인민이 누구나 쉽게 읽도록 하기 위해 서였다. 이승만은 최고급 신분의 양반이지만, 그의 양반 신분에 대한 불신은 대단 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 “우리나라의 중등이상의 사람으로서 한문을 웬만큼 안다는 사람들은 거의 다 썩고 나쁜 물이 들어서 바랄 것이 없다.” 이 나라를 망친 것은 헛된 도학을 추구하면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저 양반의 무리이다. 오직 기대할 곳은 “나라 안의 무식하고 천하고 어리석고 약한 형제자매 이다” . ‘독립정신 이 그’ 들의 마음에 뿌리박혀 인심이 변하고 풍속이 고쳐져 썩은 데서 새싹이 나듯이 죽 음에서 다시 살아나기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이 읽기 쉽도록 오로지
‘국문 으로 기록한다고 하였다’ .
『독립정신 은 순 한글로 쓰인 개인의 학술서로서는 한국사 최초의 것이다. 1896』 년 유길준이 『서유견문 을 지었는데 국한문 혼용이었다 그것도 유길준 개인의 창』 , . 작이라기보다 일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서양사정 이나 여러 외국의 책을』 군데군데 번역해 옮긴 것이었다. 순 한글로 글을 짓는 새로운 풍조는 1896년 「독 립신문 의 발행부터이다」 . 이승만은 「독립신문 에 많은 글을 기고하였다」 . 1898년에 는 「협성회보 에」 ‘고목가(枯木歌)’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당시 대한제국의 현실을 고목에 비유한 이 시는, 최근에 밝혀진 바인데, 한글로 된 최초의 신체시(新體詩) 였다. 동년 이승만은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을 창간하고 사장과 주필로 활동하」 였다. 이승만은 최초의 근대적 언론인 중의 한 사람이다. 1900년 이승만은 옥중에 서 청일전쟁에 관해 중국에서 나온 『중동전기본말(中東戰記本末)』이란 책을 순한글 로 번역하였다. 『청일전기(淸日戰記)』란 책이다.
이런 지적 훈련이 있었기에 이승만은 『독립정신 을 순 한글로 지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국어학자가 지적하듯이 당시에는 오늘날의 한국어 가 없었다 오늘날의 한국어 는‘ ’ . ‘ ’ 20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다. 19세기 말이면 서양과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문명이 물밀 듯이 들어오는 시기였다. 그것을 모두 구래의 ‘조선어 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하였다’ . 윤치호라는 개명 관료가 있다. 1889년 12월 그는 그때까지 순 한글로 써온 일기를 돌연 영어로 쓰기 시작 하였다. “조선어의 어휘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는 것이” 그 이유였다.
1904년의 이승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정신 의 집필은 새로운 언어의 창작』 과정이기도 하였다. 예컨대 일본서 들어온 ‘국가’(國家, state)라는 말을 어떻게 쓸 것인가 조선시대엔 그런 개념이나 말이 없었다 조선시대에 국. . (國)이라 하면 왕 제[ 후 의 집을 말하였다 가] . (家)라 하면 대부(大夫), 곧 양반의 집을 말하였다 일반 서. 민에겐 ‘가 도 없었다’ . 이런 지적 전통에서 이승만은 『독립정신 의 초두에 국가를』 ‘나라집 이란 말로 번역해 서너 차례 쓰다가 어색하다고 느꼈는지 나라 로 고쳐 쓰’ ‘ ’ 기 시작하였다. ‘사회’(社會, society)란 말이 있다. 서양에서 생겨난 말이다. 중국 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그러한 개념이나 말이 없었다. ‘사회 란 말은 명치’ (明治) 시 대의 일본인이 창작한 번역어이다. 그 말을 이승만은 『독립정신 에서』 ‘샤회 로 쓰’ 고 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해 정의하기를 “대저 사회라 하는 것은 인류가 모여서 한 뭉치가 된 것이니 두세 사람만 모여도 하나의 사회요, 미루어 인류가 모여서 사는 도성 나라 온 세상이 다 하나의 사회이다 인류는 짐승과 달라 여럿이 모여, , . 서 규범과 질서를 정하고 사회를 만든다 고 하였다” (23). ) 그런데 오늘날의 사회학 자들은 ‘사회 라는 외래어를 최초로 사용하고 정의한 사람 중의 하나가 이승만인’ 줄 알지 못한다.
100년의 회고 이승만이 당초 요량한 책 제목은 독립요지 였다 이승만이 쓴 원고는‘ ’ . 1905년 옥 중 동지 박용만에 의해 종이 실로 말려 미국으로 반출되었다. 여러 교민의 후원으 로 책이 출간되는 것은 1910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서였다. 그때 이승만은 지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책의 제목을 독립정신 으로 바꾸었다‘ ’ . 『독립정신 은』 1917년 하와 이에서 중간되었다. 국내에서 처음 출간되는 것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6년이다. 이후 이 책은 오랫동안 잊혔다. 1980년과 1993년에 복간을 보지만 어느 연구자도, 성의껏 그 내용을 천착하지 않았다. 100년 전의 생경한 언어로 쓰인 탓도 있지만, 내용을 이해하고 평가할 지력의 연구자가 없음이 더 큰 이유였다.
2007년 김충남과 김효선이 『독립정신 을 현대어로 번역하여 출간했는데 군데군』 , 데 빠진 곳이 있었다. 『독립정신 이 현대어로 완역되는 것은』 2018년 비봉출판사의 박기봉 사장에 의해서이다. 『독립정신 을 서지적으로 분류하면 정치학의 저작이다』 . 그것도 한국사 최초의 근대적인 학술서이다. 마땅히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들이 수 행할 작업이었다. 그 작업이 대학 밖의 지식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의 역사의 식은 대학이란 제도에서 기득권을 향유하는 교수 집단을 능가하였다. 그것이 21세 기 초 이 나라 대학사회의 슬픈 현실이다.
내가 이승만을 알게 된 것은 2008년경 김충남과 김효선이 번역한 『독립정신 을』 접하면서부터이다. 한평생 연구자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대학원에 들어간 것이 1978년이다. 그 사이 30년간 어느 스승도, 선배도, 동료도 이승만과 그의 『독립정 신 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 사이 학계는』 . 17세기의 유형원에서 출발하여 18세 기의 이익과 박지원, 19세기의 정약용, 김정호, 박규수로 이어진 이른바 ‘실학 의’ 맥락을 탐구하였다 그 사상의 계보는 개항 이후 변혁적 개화파로 이어져 갑신정변. 과 갑오개혁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그리고선 종적을 감추었다 이후는 식민지 피지. . 배의 역사로서 전혀 상이한 맥락의 역사적 과제가 제기된 시대로 치부되었다 나도. 실학에 몰두하여 몇 편의 논문을 썼다. 그러면서 언제나 제기되는 마음의 의문을 피하지 못하였다 이들 사상의 계보가 학파로 성장하여 민중의 마음을 모으고 지식. 인을 훈련하고 정파로까지 성숙하여 그 시대를 변혁하지는 못하였다. 조선왕조는 끝내 위기와 망국의 길을 걸었다 그들의 사상을 처음 발굴하고 소개한 것은. 1930 년대의 지식인들이었다 그 초기에는 일본인 학자의 선도적 역할이 있었다 그럼에. . 도 실학을 두고 후대에 미친 정신적 유산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는가. 그러한 의 문이었다.
반면, 따지고 보면, 이승만은 실학의 계보를 잇는 마지막 사람이었다.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 서재필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실학의 맥락은 그것이 있다. , 면, 이승만을 매개해서 20세기의 대한민국 역사로 계승되었다. 우리의 대학사회는 이 같은 역사적 맥락을 깡그리 무시하였다 지난. 70년간 이 나라의 대학사회가 보 인 정신문화의 동향은 앞으로 그 역사적 요인이 해부되어야 할 병리적 현상이다.
2000년 이후 비로소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이념과 업적에 관한 연구서가 출간되 기 시작하였다 그에 비판적인 몇 권의 잘 알려진 책은 이승만을 권력욕에 충일한. , 시세에 밝은, 친미주의자로서 안일하게도 외교독립노선을 추구한 인물로 평가하였 다. 책의 앞뒤를 살피니 저자들은 이승만의 『독립정신 을 읽지 않았다』 . 그들은 이 승만이 『독립정신 에서 피력한 인간 본성으로서 자유』 , 문명 개화의 논리와 필연· , 자유의 통상 정치 외교· · , 망국에 이른 정치외교사를 전 체계로 이해하고 평가할 지 력의 소지자가 아니었다. 이승만을 높이 평가한 책도 적지 않지만, 『독립정신 의』 전 체계를 심층으로 해부했다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그것이 이승만의. 『독립정신 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이다 그래야. 20세기 한국사를 관통한 진(眞)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2. 인간의 본성
독립과 자유

『독립정신 에서』 ‘독립 과’ ‘자유 는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 독립하는 인간은 자유 롭고 자유로운 인간은 독립적이다. 이승만이 이 백성의 마음에 시급히 ‘독립’ 두 글자를 심고자 했음은 이 백성이 시급히 ‘자유’ 두 글자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였 다. ‘자유 란 무엇인가’ . 쉬운 듯하면서도 그 속성을 따져 물으면 대답하기 힘든 것 이 자유 이다 먼저 평이하게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하자‘ ’ . .
이승만에게서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대저 괴로움을 면하고 편한 것을 취하 며 죽기를 면하고 살기를 도모하는 것은 생명이 있는 모든 종류의 자연스러운 성 정이다.”(17) 인간이라면 누구나 남의 압박과 기근과 질병을 피하고, 제 한 몸 안 전하고 풍요롭기를, 나아가 제 가족 번성하기를 추구한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을 그같이 이해하고 규정함은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어느 시대나 있어 온 생각이다. 중국 명대의 양명학(陽明學)이 그 좋은 예이다. 양명학을 창립한 왕수인은 어머니 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울면서 놓지 않으려는 어린애의 뿌리 깊은 애근(愛根)이나 번 돈을 세는 상인들의 환한 얼굴에서 인간의 아름다운 본성을 보았다. 그는 말하 였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이 모두 성자로다.” 그렇지만 그가 그 아름다움을 찬탄 한 인간의 본성도 주자의 성리학(性理學)이 말하는 인간의 도덕적 본성으로서 인의 (仁義)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도덕적 질서로서 인간사회의 본질은 양명학에 이르러 더욱 풍요롭게 묘사되었을 뿐이다. 이승만이 『독립정신 에서 설파한 인간의 본성으로서 이기심은 그와 다른 것이』 다. 그것은 종교개혁 이후 서유럽의 근대문명이 발견한 것으로서 천부(天賦)의 권 리를 말하였다. “조물주는 모든 사람에게 다 같이 권리를 주셨으므로 생명과 자유 와 안락한 복을 추구하는 것은 다 남이 빼앗을 수 없는 권리이다.”(18) “한 사람이 나 한 나라나 자기가 제 일을 하는 것을 자주라 이르며 따로 서서 남에게 의지하, 지 않은 것을 독립이라 이르는데, 이는 인류로 태어난 자에게 부여된 천품(天稟)으 로서 인간이라면 모두 다 같이 타고난 것이다.”(10) 그렇게 생명과 자유와 안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조물주가 부여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이다 그것.
이 바로 독립과 자유인데 그런 개념은 동양에서는 있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
이승만의 논리를 좀 더 따라가 보자. 이승만은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관점에서 자유와 독립의 속성을 추구하였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것은 다 뜻하신 바가 있어서이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천지를 주재하시는 이 가 내게 맡기시어 세상을 위해 쓰도록 하신 것이다.”(2) “귀한 자나 천한 자나 천 리로 보면 이목구비와 사지백체(四肢百體)는 다 같이 타고나서 더하고 덜한 것이 없으니, 이는 하늘이 다 각기 자기가 제 일을 하고 자기가 제 몸을 보호할 것을 모두에게 부여해 준 것이다. 육신에 딸린 온갖 기기묘묘한 것들은 다 자신이 평생 쓰기에 넉넉한 연장이다.”(10) 이렇게 나의 육신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해 무언 가 유익한 일을 하라고 맡기신 연장과 같은 것이다. 내가 숨 쉬고 살아 있음은 하 나님이 나에게 부여한 소명을 이룩하기 위함이다 그럴진대 내가 어찌 게을러서 일. 하지 않으며, 남의 압박을 받거나 빌어먹으며 살며,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아 먹으며, 입에다 거짓말을 올려 남을 속이며 살겠는가. 한 마디로 이승만에게서 자 유와 독립이란 나는 조물주에 의해 귀중하게 지으심을 받았다는 존재 감각을 말하 였다.
오늘날 문명국의 사람들이 안락하게 사는 것은 이 같은 하나님의 소명에 충실하 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말하였다. . “지식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사람마다 제 자주 권 리를 위해 목숨을 겨루며, 심지어 어린아이까지도 다 제 몸 다스리기를 힘써 남에 게 의지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각자 자기 노릇을 다하여 하늘이 부여해주신 육신의 기계를 하나도 버리는 일이 없으며, 교화를 통해 인심을 화합시키며, 자기 몸을 써서 남을 위하여 쓸 것을 만들어 가령 천만 명이 사는 나라라면 천만 명이, 다 제정신과 제몸으로 세상을 위하여 일하는데, 이것이 참사람 사는 천지이니, 조 물주가 낳아주신 본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10)
기독교로의 개종 이승만은 1875년 왕실의 먼 계보를 잇는 전주 이씨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터 사서육경을 읽고 시문을 익혀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었다. 인생의 방향을 잃은 이승만은 친구의 권유로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영어를 배워 정부에 쓰임새 가 되고자 해서였다.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은 영어만이 아니라 서양의 자유민주 정 치철학을 배웠다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도 이승만에게 자유민주를 가르친 선생이. 었다. 1896년 이승만은 제중원(濟衆院)을 세운 캐나다 의사 올리버 애비슨으로부터 상투를 잘라 받았다 이승만은 그의 조국을 서양과 같은 자유민주의 나라로 혁명하. 려는 굳은 의지를 표했으며 애비슨은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일인지를 경고, 해 주었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전술한 대로 근대적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 는 한편, 1898년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에서 청년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의 세력이 꾸민 고종 황제 폐위 음모에 간접 연루되 어 경무청에 수감되었다 이승만은 조급하게도 탈옥을 시도했으며 그 과정에서 옥. , 리를 상해하는 더욱 큰 죄를 저질렀다. 1899년 2월의 일이었다. 옥리에게 권총을 쏜 동지는 곧바로 처형되었으며, 이승만의 목숨도 경각의 위험에 처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에 시달렸으며 목과 팔다리엔 무거운 형틀이 씌워졌다 이승만이 처형되, . 었다는 소식에 그의 부친이 시신을 찾으러 온 적이 몇 차례였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주변을 맴돈 어느 날, 그는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 를 올렸다.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원해 주십시오.” 순간 그는 기독교인들이 이야기하는 일종의 영적 체험을 하였다. “캄캄한 감옥 안이 밝은 빛으로 가득 차면 서 내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평안이 깃들면서 나는 완전히 변한 사람이 되었다.” 이 회고는 이후 이승만이 미국에 건너가 여러 교회를 다니며 신앙을 간증하는 과 정에서 신학적으로 다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순간 전통 유가에서 태어나고 독. 실한 불교도인 어머니 품에서 자란 이승만은 기독교인으로 변신하였다.
그의 이어진 회고는 다음과 같다. “그때까지 내가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대 해 갖고 있던 증오감과 불신감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우리에게 그들 스스로 대단히 값지게 여기는 것을 주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술한 대 로 1896년 이승만은 그의 나라를 자유민주의 나라로 혁명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 럼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기독교를 앞세운 서양세력에 대한 의구심이 깊게 자리 잡 고 있었다. 그의 상투를 잘라준 애비슨이 나중에 그의 회고록에서 이승만의 당시 심중을 그렇게 묘사하였다. 1893년 하와이 왕국을 멸하고 식민지로 편입한 것은 기독교세력을 앞세운 미국이었다. 이승만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의구심 이 1899년 어느 봄날 이승만의 마음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바로 그 순간 이승만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이 되었다. 진정한 자유인은 진정한 애국자임과 동시에 진정 한 세계인이기도 하다 세계인이 되어야 자유의 참뜻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
이승만의 개종은 인간 이승만을 이해하고 평가함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이다. 그 는 자신의 전통 문화와 종교를 버리고 비열하게도 서양인이 되고자 했던가. 그는 서양 우월주의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서양에서 발생한 근대문명을 소화하고 제. . 나름의 형태로 섭취함에 있어서 개종과 같은 일종의 정신적 변혁은 피해갈 수 없 는 문제이다. 기독교로의 개종만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그에게 강요된 환경에 따라 그의 방식대로 그 관문을 돌파하였다. 『독립정신 의』 말미에서 이승만은 그의 개종의 변을 토로하고 있다. 이 글에서도 제 장에 이르러7 그 점을 소개하면서 이 어렵고도 복잡한 문제를 재론할 예정이다.


3. 문명 개화의 논리·
독립과 자유는 곧 통상이다

『독립정신 의 제』 1∼6장은 전체 51개 장에서 도입부에 해당한다 이 나라는 망망. 대해에서 큰 풍랑을 만나 돛대도 부러지고 삿대도 없어진 침몰 직전의 배와 같다. 그 기본 원인은 관원이든 백성이든 독립의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적한 연후에 그럼 독립이란 무엇인가 그에 대해 살피자면서 제 장으로 넘어간다 그런, , 7 . 데 제 장의 제목은7 “각국과 서로 통하는 문제 이다” . 곧 타국과의 통상에 관한 내 용이다. 흔히들 문호를 닫고 자급자족하는 것을 독립으로 알지만 이승만의 설명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같은 서술의 전개 일종의 논리적 비약을 이해하는 것이. , 『독 립정신 을 올바로 읽음에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요컨대 독립하고 자유함은 통상하』 . 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 이승만학당의 김학은 교수가 지은. 『이승만의 정치 경제사· 상 1899∼1945』 )에서 지적된 바이기도 한데, 이는 근자에 한국의 사회과학계가 거둔 가장 값진 연구성과라고 할 수 있다.
통상이 독립과 자유의 요체가 되는 이승만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4백 년 전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다. 이전까지 세계는 서로 통하지 못했고 모 두 미개하였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지구가 둥근 줄 알고 왕래하고 교섭하여 물화 를 상통하고, 나의 옛것과 남의 새것을 비교하여 쓰고, 나의 흔한 것과 남의 귀한 것을 바꾸어 쓰니, 교화와 풍기가 날로 열리고, 학문과 기술이 한없이 진보되어, 오늘날 세계에서 제일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들은 다 통상하고 교제하는 것의 이익 을 얻어 저렇게 된 것이다.”(7) 다시 말해 통상으로 인한 물화의 소통은 옛것과 새 것의 비교요 흔한 것과 귀한 것의 교환이며 이로써 도덕과 지식과 기술이 진보하, , 는 경로였다.
통상의 이 같은 효과는 통상의 범위가 넓을수록 커진다. “이웃의 범위가 넓을수 록 내가 쓸 수 있는 물건은 더욱 정교해지고 풍족해지며, 내가 만든 물건도 귀해 지고 널리 쓰이게 될 것이고 사람들의 견문과 지식도 더욱 넓어질 것이다 이것이, . 온 천하만국과 서로 이웃이 되어 문호를 열고 풍속을 고치며 물화를 교환하는 이 유이다.”(후록) 그리하여 “지금 세상은 천하만국이 지혜를 모아 제일 편리하고 제 일 정미(精美)한 법을 택하여 다 같이 시행하며, 날마다 진보하여 전에 좋던 것을 내일에는 더 기이하게 만들어 점점 새것이 생길수록 더욱 진보해 간다. 그러므로 나에게 없던 것을 남한테 배우고, 그 배운 것을 더 개량하여, 서로 지혜와 재주를
가지고 다투어 나아가고 있다.”(24)
오늘날 세계의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들이 옛적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기술과 도구를 만들어낸 것은 죄다 이 같은 통상의 효과 때문이다. 이승만은 『독립정신』 에서 서양에서 개발된 꿈결과 같은 기술과 도구를 소개하고 있다. 천 리 밖의 사 람과 무선으로 대화를 하다니. 인간이 하늘을 날다니. 비행선이 발명되는 것은 1900년이다. 이승만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감옥 속에서 선교사들이 반입해 주는 신문과 잡지를 통해서였다 그러면서 동서양 간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원인이 무. 엇인지 곰곰이 생각하였다 바로. 15세기 이후 서양이 개척한 지구를 무대로 한 통 상이 그 답이었다.
앞의 인용문 가운데 “배우고 개량하여 지혜와 재주로 다투어 나아간다 는 구절” 이 있다. 바로 ‘경쟁 이다’ . 그에 대해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쟁이라 하 는 것은 서로 다툰다는 뜻이니 남과 비교하여 한 걸음이라도 앞서가려고 하는 먼, , 저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여도 이 마음이 없으면 잘 되지 못하고, 장사 를 하여도 이 마음이 없으면 될 수 없으며, 세상의 천만 가지 일들이 다 이 마음 이 아니면 지금 세상에서는 설 수 없다.”(후록) 경쟁은 남을 짓밟거나 해코지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앞서고자 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부여한 나의 좋음과 아름다. 움을 실어 펴는 것이 경쟁이니, 곧 경쟁은 내가 힘써 노력하여 나의 인생을 완성 해가는 과정이다. 이승만은 우리 민족도 이 경쟁하는 마음으로 단결하고 공부하면 능히 문명국과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문명 개화는 필연이다· 이승만은 통상을 통한 문명 개화는 필연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 “밀려오는 조 수 나” “떠 오르는 햇빛 과 같아서 막을 수 없다” . 어리석게도 막으려 애쓰다가는 “나라가 없어지고 인종도 소멸할 것이다.”(후록) 그래서 독립하고 자유하기 위해서 는 통상을 경쟁을 그리고 학문을 해야 하니 오늘날의 세계에서 독립하고 자유함, , , 은 문호를 닫고 자급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은 필연의 정세에 적응하여 살아 남는 길밖에 없다. 다시 말해 독립과 자유는 곧 통상이요, 경쟁이요, 학문이니, 총 체로 말하여 문명 개화라 요약할 수 있다· .
이승만의 이 같은 생각은 그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통상과 문 명 개화는 왜 필연인가· .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였을 뿐 아니라 인간을 위해 자연을 무척이나 풍성하게 창조하였다. “천지를 창조하신 조물주께서 오만 가지 물건을 다 만드신 이유는 전적으로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쓰게 하려고 하나도 버릴 것이 없게 하신 것이다.”(9) 문호를 닫고 통상을 거부하는 것은 “조물 주가 사람에게 쓰이도록 한없이 쌓아 두신 것을 썩혀 버려서 저희도 쓰지 아니하 고 남도 쓰지 못하게 하는 포진천물(暴殄天物)과 같다.” 어찌 용납할 수 있는가. “어느 나라는 사람이 많고 토지와 재화가 부족하여 굶주리고, 어느 나라는 사람이 적어서 토지와 재화가 버려져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조물주의 뜻이겠는가, .” “서로 섞어 놓아서 같이 쓰도록 함으로써 서로 도움이 된다면 피차에 이로울 것이니, 이
야말로 공번(公反)된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5)(9)
지구는 한없이 풍성하고 다양하다. 어느 곳에서는 쌀이, 다른 곳에서는 밀이 난
다. 어느 곳에서는 석탄이, 다른 곳에서는 철이 난다. 환경에 따라 개발된 지식도 가지각색이다. 하나님이 지구를 그렇게 만든 것은 인간들이 유무상통하여 함께 잘 살라는 뜻이다. 그러니 통상과 문명 개화는 하나님의 뜻으로서 필연이다· . 이를 알 지 못하고 나라의 문호를 닫아걸고 내 풍속과 내 처지가 제일이라 하고 백성을 노 예로 묶어두고 풍성한 자연도 썩힌다면 그 어찌 조물주가 인간과 자연을 창조하신, 공번된 뜻이겠는가. 그리하여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까지 하였다. “차라리 압제를 해서라도 문호를 열어젖혀 바깥세상의 형편을 깨닫게 해야 될 것이다.”(9) 그리하여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찾아와 통상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를 해롭게 하 거나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이 역시 하나님의 창. 조물인 이 세계를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이익을 구하는 자유로운 행위이나 권리이 다. 통상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일로서 막을 수도 없고 막을 이유도 없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배척하고 심하게는 변란을 일으켜 살해까지 하는 것은 외국 의 압제를 불러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는 위태로운 일이다. “남과 통상하는 올바른 도리를 배우려 하지 않고 남의 세력만 두려워하고 도리어 남이 없었으면 나 혼자, , 잘 살 줄로만 생각하여 남을 몰아내려고만 하는데, 이래서는 남에게도 해가 되고 내게도 위태하니, 남들이 어찌 만국의 공번된 이익을 포기하고 스스로 물러가겠는 가. 결국 좋은 말로 권면하다가 안 되면 위협을 해서라도 억누를 것이니, 이것이 곧 독립 권리가 손해를 보는 근본이다.”(7) 여러 외국에 문호를 활짝 열어 그들을 공정하게 대우하고, 그들과 통상을 하고 그들의 문명을 배우고, , 그런 가운데 자주 독립의 자세를 견지한다면 어찌 그 나라가 망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조선은 그, . 렇게 밝은 길을 걷지 못하였다. 조선은 이미 “따로 서 볼 날이 있을지 말지 헤아 려 단정하기가 어려운”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22) 인간과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 의 뜻으로서 문명 개화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
사상의 세계적 맥락
감옥 속의 이승만이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것은 형이 무기수 확정된 1899 년 7월경이다 서서히 마음의 평안을 회복한 이승만은 이후. 5년간 서양의 역사 철, 학 종교에 관해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하였다 이승만은 정계 유력자와 미국인 선교, . 사의 도움을 받아 한성감옥 안에 도서실을 차렸다. 수집된 도서는 총 500여 책이 었다. 영문이 200여 책, 한문이 300여 책이었다. 기독교 교리에 관한 것이 가장 많고 그다음이 서양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이승만의 정치사상은 이 같은 옥중 독, . 서를 통해 그 골격이 형성되었다. 그 나머지 1904년경이면 그 지식의 수준이, 동 료 죄수 유성준 유길준의 동생 서울 안동교회 창립 의 표현에 의하면 당대 제일의( , ) ,
 
5) 공번(公反)이란 말은 공평하고 정의롭다는 뜻이다 원래 이두. (吏讀)로서 지금은 없어진 말 이다.
스승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독립정신 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토마스 홉스 존 로크 애덤 스미스 등 서유럽』 , , 계몽주의 거장들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승만이 그들의 저작을 직접 읽지는 않았다. 옥중 도서실에 그런 책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승만이 독파한 당대의 저명 한 역사서와 철학서에는 이들 계몽주의자의 사상이 풍부하게 용해되어 있었다. 서 유럽 계몽주의는 1776년 미국의 독립으로 열매를 맺었으며, 특히 미국 동부의 감 리교를 통해 미국정신의 중추를 형성하였다 이승만은 그를 후원한 미국 동부 출신. 의 선교사를 통해 알게 모르게 서유럽 특히 스코틀랜드의 계몽주의와 그를 계승한, 미국정신을 오롯하게 섭취하였다.
『독립정신 에서 이승만은 국가가 성립하는 논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대 개 사람은 여럿이 모여 살게 마련이다 필경 다툼이 생기는데 아무런 규율이 없이. , 맡겨두면 큰 고기는 중 고기를 삼키고 중 고기는 작은 고기를 삼켜서, 서로 잡아 먹고 먹히기에 하루도 편히 살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에 나라를 설립하여 정치와 법률을 마련하고 다스릴 자를 정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했는데 이것, 이 나라를 설립한 본뜻이다.” 이 대목은 국가 이전의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으로 비유한 토마스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
1942년 이래 이승만과 정치고문으로 인연을 맺은 미국 시라큐스대학의 로버트 올리버 교수에 의하면 이승만은 평소 자신이 제퍼슨류의 자유주의자임을 자랑하였, 다. 미국의 건국 아버지 중의 한 사람인 제퍼슨은 존 로크의 정치철학을 깊이 사 숙하였다 제퍼슨이 초안한 미국의 독립선언서는 구구절절 로크의 사상에 충실하였. 다 한성감옥의 이승만에게 가장 큰 영향력으로 전해진 것 역시 로크의 계몽주의였.
다. 그가 로크의 『통치론 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 『독립정신』 곳곳에는 인용 부호 도 없이 『통치론 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대목을 여러 차례 발견할 수 있다.』 로크는 말하였다. “사람들에게 세계를 공유물로 주신 하느님은 또한 그들에게 삶 에 최대한 이득이 되고 편의에 봉사하도록 세계를 이용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인간이 썩히거나 파괴해 버리도록 만들지는 않았다.” “어 떤 사람이 토지를 개간하고 수확하고 저장하고 상하기 전에 사용하는 것은 무엇이 든지 그에게 고유한 권리이다. (중략) 그러나 그가 울타리를 친 부분의 땅이 썩거 나 그가 심은 나무에 열린 과일이 채취되지 않고 시들어버린다면, 그가 울타리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의 땅은 여전히 황무지로 간주되어야 하며 다른 누군가, 의 소유물로 될 수 있다.” )(존 로크의 『통치론』)
이와 유사하게 이승만은 말하였다. “공법은 어느 나라든지 주인이 없는 빈 땅은
그 나라에 속한다고 규정하지만, 만일 그 나라가 제 것으로만 할 뿐 그대로 버려 둔다면 그 나라 땅으로 인정하지 않고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서 개척하여 쓸 수 있 게 만드는 자가 참 주인이 된다고 규정하였다.”(9) 얼마나 흡사한가. 앞서 소개한 이승만의 통상과 문명 개화의 논리는 세계사의 맥락에서 로크의 정치철학에 연원을· 둔 것이었다.
물론 이승만이 로크의 사상을 전 체계로 섭취하지는 않았다. 위와 같은 로크의 소유론을 ‘근로적 소유 라 한다’ .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을 어느 유력자가 울타리만 치고 방치할 경우 그 소유권의 정당성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취지이다 그렇지만 인. 구가 늘고 토지가 부족해지고 국가가 성립하고 금은이 화폐로 유통되는 단계에서 소유권은 그 이용 여부와 관계없이 법률로 보호된다. 이를 ‘법률적 소유 라 한다’ . 통상이 발달하여 그 이익을 금은으로 축적하면 아무리 큰 재산이라 해도 가난한 사람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옳은 말이다. 삼성그룹을 창 설한 이병철 같은 대자본가가 아무리 많은 재산을 축적한들 쌀이나 과일이나 옷과, 같은 직접적인 생활자료가 아닐진대, 그것이 나의 행복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
가.
나는 통상과 화폐를 통해 대규모 소유를 정당화한 로크 정치철학의 이 대목에서 근대문명의 문을 활짝 연 서양 계몽주의의 위대한 성취에 감탄한다. 이승만이 『독 립정신 에서 피력한 통상론이 여기까지 도달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나아』 . 갈 수밖에 없는 첫걸음을 『독립정신 에서 내딛었다』 .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1923년 에 지은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란 논문에서 이승만은 문명을 진보시키는 원 동력으로서 자본가의 대소유를 옹호하였다. 출발을 올바른 방향으로 했기 때문에 그러한 위대한 사상의 고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앞서 소개한 “이웃의 범위가 넓을수록 내가 쓸 수 있는 물건은 더욱 정교 해지고 풍족해지며, 내가 만든 물건도 귀해지고 널리 쓰이게 될 것이고, 사람들의 견문과 지식도 더욱 넓어진다 는 이승만의 말은 어떠한가” .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을 연상하기에 족한 대목이다』 . 시장이 전제될 때 사람들은 자기 가 비교우위를 갖는 부문에 전업함으로써 더 많은 생산을, 더 좋은 제품을, 더 큰 소득을 올릴 수 있음을 설파한 것이 스미스의 『국부론 이다』 . 시장이 넓을수록 그 러한 분업의 효과는 더욱 커진다 스미스의 경제학에서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 기적 존재이다. 그는 남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생산에 종사하지만, 그것이 비교우위의 시장생산인 한, 그의 행위는 ‘보이지 않은 손 에 이끌려 모든’ 사람의 복리 증진에 이바지한다 이 같은 스미스의 경제학과 위에서 인용한 이승만. 의 생각은 다르지 않다.


 4. 세계의 현실

야만 반개화 개화, , 지구는 5대양 6대주로 이루어져 있고 거기엔 5색 인종이 살고 있다. 이들의 문 명 수준은 각기 달라 크게 말해 야만, 반(半)개화, 개화의 3등급으로 구분된다. 인 구와 물산이 가장 풍부한 아세아주에는 우리 대한 청국 일본 등의 몽골리안이 사, , 는데 한때 그 문명이 세계 최고였으나 애석하게도 중간에 내려오면서 옛것만 숭상, 하고 개량에 힘쓰지 않아 반개화의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지혜가 반쯤 열려 예의 와 염치를 알고, 임금과 신하가 있고, 궁궐과 도성을 짓고, 법률로 다스려 약자를 보호하고, 배와 수레와 쟁기 등 다양한 연장을 개발했으나, 수천 년 동안 더 이상 진보하기에 힘쓰지 않아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산천초목을 믿고 온갖 요사한 것과 헛된 것을 숭상하여 지금은 거의 버릴 지경이 되고 말았다.
다음 구라파주와 북아메리카주는 얼굴색이 휜 코카시안이 사는 곳인데 아세아주, 의 문명을 넘겨받고 지구를 무대로 한 통상에 나서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하 고 개화한 대륙이다. 특히 북아메리카주의 합중국은 우리 대한에 많이 와 있는 미 국인의 나라인데,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지만 교화와 문명이 날마다 진보하여 장차 비교할 나라가 없을 것이다. 이들 대륙에는 사람들의 지혜가 늘어 화륜선, 철도, 수레 석유 전기 전화 무선 온갖 기계 등 천만 가지가 날로 새로워져 앞으로 백, , , , , 년 동안에도 무슨 신기한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반면 아메리컨 인디언( ), 이디오피언, 멜라네시안이 사는 남아메리카주, 아프리카 주, 오세아니아주는 특별히 고찰할 사적이 없는 가운데 수렵과 채취로 생활하면서 서로 노략질하기를 일삼고 문자도 나라도 없는 야만 상태에 놓여 있다. 이들은 남 의 것은 보기도 싫다면서 저들끼리 따로 어둡게 사는 것은 편리하게 여기니, 점차 인구가 줄어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 중의 깨인 사람은 백인과 상종하면서 학문과 기계를 익혀 개화를 이루는데 이는 다 같이 하나님의 지으심을, 입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독립정신 에서 피력한 당대 세계의 현실에 대한 이해는 이상과 같다.』 한마디로 말해 19세기 후반에 유행한 ‘사회진화론 이라 할 수 있다’ . 세계의 각 지 역과 인종은 개화, 반개화, 야만의 서열을 이루는 가운데 개화는 번성하고 야만은 도태하여 세계는 점점 진화하고 동화해 간다는 생각이다. 이승만은 하나님이 창조 하신 이 세상이 사해동포(四海同胞)로서 결국 그의 섭리에 따라 하나가 될 것으로 믿었다. “진실로 만국이 서로 통하여 한 집 같이 섞여 살며 형제같이 사랑하여 정 의(情誼)가 친밀하면 풍속이 스스로 같아지고 인물, 언어, 문자까지도 다 한결같이 될 것이다. 그렇게 지난 백 년 동안에 세상이 변해 온 것을 보면 오는 백 년에도
또 어떻게 변할지 짐작할 수 있다.”(14)
오늘날의 시점에서 이승만의 세계관을 평가하면 지나치게 단선적이고 낙관적이
다. 그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세계는 이승만이 예상했던 이상으로 여러 문명권 으로 나뉜 가운데 대립하고 갈등하고 있다.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익숙하게도 19세 기의 사회진화론을 ‘서구중심주의’ 또는 ‘제국주의 미화론 으로 비판하고 있다’ . 한 국의 연구자들이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인 이유도 그와 같을 터이다 그렇지만 허심. 탄회하게 오늘날의 세계 현실을 돌아보면 이승만의 예견대로 각 지역이 서로 통하 고 친밀한 가운데 풍속, 언어, 인종이 점점 혼잡하여 하나로 되어 가는 추세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서유럽의 도시엔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넘어온 인종이 넘쳐나고 있다 세계 각 지역에서 미국으로 집중하는 이민의 대열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민. . 과 더불어 자본과 기술도 미국으로 집중하는 추세이다 인류의 근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과 인도가 세계화의 추세에 포섭되어 소득과 생활 수준의 개선을 보고 있다.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민족이 있지만, 세계화의 물결은 이승만의 비 유대로 “종이가 물에 젖듯이”(9)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세계 각지를 침투하고 있 다 나는 세계가 여러 문명권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생각도 옳지만 점점 하나로 동. , 화해 갈 것이라는 이승만의 생각도 옳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 생각을 종과 횡 의 축으로 하여 세계의 역사와 현실을 전체로 조망할 필요가 있다.
세 유형의 정치제도 이승만은 세계 각 지역의 정치제도를 교화의 정도에 따라 전제정치, 헌법정치, 민주정치의 세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전제정치는 우리 대한, 청국, 아라사 러시아( ) 가 그에 속한다. 태고 시절에 인심이 양순하여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이 인의로 나라를 다스리니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졌다. 후대에 이르러 인심이 사나워 지고 풍속이 일그러져 요순의 왕도(王道)정치가 사라지고 군주의 패도(覇道)정치가 성립하니 곧 전제정치이다. 군주가 어리석고 간신이 득세하면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고 내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태로워진다 전제정치가 패망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백. 성의 마음을 압제하여 시비곡직을 말하지 못하게 하니 백성이 기진맥진하고 생각 이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이에 타국이 들어와 나라를 빼앗아도 백성이 알지 못하거. 나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뒷짐을 지니, 이런 상태에선 타국이 위의 있는 몇 사 람만 제압해도 나라가 저절로 망하게 된다. 지금 우리 대한이나 중국이 그런 지경 에 놓였는데, 우리는 중국보다 훨씬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더욱 위태롭다고 할 것 이다.(15)
다음, 헌법정치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영국과 덕국 독일 을 비롯한 유( ) 럽의 여러 군주국 그리고 동양의 일본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나라에선 군주가 만, . 사를 다스리지만 그 권리에 한계가 있어서 백성을 대표하는 의회가 법률을 정하고 재상이 군주의 권리를 대행한다 나라의 재정은 군주의 개인 재물이 아니거니와 치. 안, 국방, 교육, 도로, 수도 등 백성의 생명과 재산과 안락을 도모함을 위한 것이
다. 백성이 무궁한 덕화를 입어 나라가 번성하고 황실은 더욱 평안하여 반석 위에 놓인다 헌법정치를 이같이 소개한 다음 이승만은 이로 보건대 우리나라도 더 이상.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는 편벽된 이유로 임금의 권리를 줄이지 않으려고 고 집을 부릴 형편이 못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당시의 고종 황제와 수구파의 행태를 비판한, 외부에 알려지면 반역으로 몰려 처형될지 모를, 매우 위험한 발언이었 다.(15)
다음, 민주정치는 임금을 대통령이라 부르며 전국 백성이 선거로 뽑아 추대하는 데 임기에 제한을 두는 제도이다 이에 그 정치는 백성에 의한 백성으로 된 백성. , , 을 위한 것으로서(by the people, of the people, for the people) 세 유형의 정 치제도 가운데 가장 선미(善美)한 것이다. 미국, 프랑스, 기타 구라파주의 몇 나라 가 여기에 속한다 이승만은 민주정치를 가리켜 중국 상고시대의 요순의 정치가 부. 활한 것이니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이승만이 특히 찬탄해 마지않은 것은 미국의 민주정치에 대해서이다 이승만은 제. 16∼19장의 4개 장이나 베풀어 미국의 민주정 치를 자세하게 소개하는데, 제16장은 미국의 백성들이 누리고 있는 제반 권리를, 제17장은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한 역사를 제, 18장은 미국의 독립 선언문을 제, 19장은 노예제 해방을 위한 미국의 남북전쟁에 관한 것이다.
그 가운데 이승만의 마음을 가장 크게 두드린 것은 미국의 독립선언문이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는데 그 가운데는 생, , 명과 자유와 행복 추구의 권리가 있다.” 이렇게 시작하는 동 선언문에 대한 감격을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구구절절이 더없이 적실하여 장부의 혈기를 격 동시키는 중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모든 사람은 다 동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이니, 이 한 구절로 말미암아 모든 조목의 근본이 생겼다. 사람마다 나도 남과 같은 권 리가 있음을 깨닫고 그 권리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 결과 이렇듯이 보배로운
기초를 세우게 된 것이다.”(18)
해마다 7월 4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서울에 와 있는 미국인들은 이날을 제일 큰 명절로 알아 독립전쟁 때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면서 경축의 예식을 행하였다 이. 승만은 그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 대한 국민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 을진대 감동의 눈물을 금치 못한다고 하였다. 단순한 감동이 아니었다. 슬픔의 눈 물이기도 하였다. 전제정치 하에서 어육이 되어 있는 이 백성의 고단한 처지와 너 무나 큰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5. 대한의 현실
폐쇄경제의 운명

조선왕조는 대외무역이 국내총생산의 1∼2%에 불과한 폐쇄경제였다. 나라의 크 기와 상관 없이 모든 폐쇄경제는 발전의 어느 단계에서 정체와 위기에 봉착한다. 경제가 성장하면 인구가 증가한다. 그런데 증가한 인구를 부양할 자연자원에는 한 계가 있다 개방경제는 그것을 외부에서 수입하여 위기를 면한다 폐쇄경제에서 사. . 람들은 환경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생산의 기반을 무너뜨려 소득과 생활, 수준의 하락을 가져온다. 여러 지표로 보아 조선왕조의 경제는 18세기 중엽이면 이 같은 한계에 부딪혔다. 도처에서 산지가 헐벗기 시작했으며, 그에 따라 가뭄과 홍수의 피해가 점점 심해졌다. 가장 큰 산업인 쌀농사에서 단위 토지당 생산성이 하락하였다. 때맞추어 일본과의 무역도 위축되었다. 비단을 비롯한 각종 사치품을 수입한 중국과의 무역은 국내 산업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생산과 무역이 감퇴하. 자 국내시장도 위축되었다 드디어. 1840년경이면 경제의 안정을 뒷받침해 온 각종 제도가 허물어졌다. 정부 재정은 적자였으며, 이에 백성을 상대로 한 조세 수탈이 강화되었다 백성은 민란으로 그에 저항했으며 그 와중에 농촌사회의 질서가 허물. , 어졌다 조선왕조의 지배세력은 끝내 이 같은 위기를 헤쳐나지 못하였다. .7)
『흥부전 이란 소설이 있다』 . 이러한 위기의 한 가운데에 놓인 19세기 인간들의 삶의 양태를 잘 묘사한 소설이다. 2000년 나는 그 소설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인간사회를 부지하는 사랑 신뢰, , 협동의 미덕은 거기에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배 반하고 불신하고 갈등하는 벌거벗은 욕망의 백태였다. 나는 어느 글에서 『흥부전』 의 세계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으로 묘사하였다” .8) 지난 2013년 최정운 교수 가 그의 책 『한국인의 탄생 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9) 그가 읽은 것은 『혈의 누 를 비롯한』 1900년대의 신소설이다. 거기에 나타난 인간들의 각축상을 가리켜 최정운은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인 ‘홉스적 자연상태 라고 하였다’ . 연후에 어느 국 가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문명 이전의 야만으로 회귀하고 말았는가라는 중대한 물 음을 제기하였다. 나는 위와 같은 폐쇄경제의 운명이 그 한 가지 답변이라고 생각 한다. 다른 한 가지 보다 중요한 답변이 있으니, 이미 백 년 전에 이승만이 『독립 정신 에서 지적한 전제정치의 해독 바로 그것이다.』
전제정치의 해독 이승만은 한성감옥 안에서 많은 죽음을 보았다. 혁명 동지가 무딘 칼날을 세 차 례나 받고 목이 떨어져 나가는 장면도 보았다. 잡범들을 팔과 다리를 하나씩 꺾은 다음 새끼로 목을 매어 마당을 몇 바퀴 질질 끌고 다녀 죽이는 장면도 보았다 감. 옥 안에 콜레라가 돈 적이 있었다. 이승만은 제 몸 돌보지 않고 환자들을 간병하
 
7) 이영훈, 『한국경제사』Ⅰ, 일조각, 2016, 제 장7 .
8) 이영훈, 『한국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역사적 특질』, 한국개발연구원, 2000 9) 최정운, 『한국인의 탄생』, 미지북스, 2013.

였다. 그래도 무려 40여 명이 죽어 나갔다. 후일 1947년 그는 공산주의의 병폐를 가리켜 콜레라와 같다고 비유한 적이 있다. 이때의 참상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그 모든 죽음에서 이승만은 임박한 대한제국의 죽음을 연상하였다. 이승만이 보기에 대한은 “숨 막히고 기운이 끊어져 죽어가는”(23) 환자와 같았다 생명의 기운이 거. 의 소진하여 산 지 죽은 지가 몽롱한 인생이요 사회요 국가였다, , . 관리들은 학정과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고종 황제는 크고 작은 관직을 사고팔았 다. 관리가 되고자 함은 백성을 갈취하여 자손 몇 대가 먹고살 재산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이 나라 사람들은 먹고사는 길이 둘밖에 없었다. 하나는 농 사를 짓거나 남의 짐을 져 겨우 먹고 사는 길이다. 상놈이나 종놈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벼슬을 하여 농사를 짓거나 남의 짐을 지는 사람들을 뜯어먹고 사는 길이 다. 이른바 양반 나리의 길이다. 1894년경 조선을 여행한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은 양반을 가리켜 “면허받은 흡혈귀 라 하였다” . ) 그리하여 이 나라에는 큰 고기는 중 고기를 먹고, 중 고기는 소 고기를 먹고, 소 고기는 송사리를 먹는 먹이사슬이 발달하였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여 언제 누구에게 먹혀 죽을지 모르는, 그리하여 “제집과 토지와 재산이 있으나 제 것인지 믿을 수 없고, 심지어 제 처자와 가속도 제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제 목숨이 과연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16) 가사(假死) 상태가 대한의 현실이었다. 그렇게 삶에 희망이 없으니 돈푼이나 있는 집의 자식들은 주색잡기와 허랑방탕으로 인생을 낭비했으며, 없는 집 자식들은 남 을 속이거나 빼앗아 제 배 불리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마음의 결박 여덟 가지 이렇게 되고 만 궁극의 원인은 천년 이상에 걸친 전제정치였다. 전제정치는 “한 두 사람이 백만 명 위에 걸터앉아 그들을 노예로 부리는 꼴 이다” .(19) 전제정치는 백성의 마음을 결박하여 깊은 병에 들게 한다. 이승만은 그 마음의 결박 여덟 가 지를 하나씩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양반과 상놈의 등분이다. 아무 재상의 아들이 고 손자면 비록 숙맥이라도 부귀영화가 다 그의 것이다. 둘째는 제뜻대로 생각을 하지 못한다. 무슨 일이든 윗사람의 지시대로 움직일 뿐이고, 선악과 시비를 토론 하지 않는다 셋째는 벼슬하는 사람에 복종하기를 노예와 같이한다 백성이 아무리. .
재주가 있어도 무식한 관원의 뜻에 따를 뿐 감히 아는 체를 하지 못한다, .
넷째 의리가 무엇인지 알지를 못한다. 놀기와 살기만 중히 여겨 박쥐처럼 세력 에 붙어 의지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사사로운 생각이 가득하다. 이승만은 이 대목 에서 앞서 소개한 대로 사회 란 무엇인지를 정의한다 연후에 남을 해롭게 하고라‘ ’ . 도 저를 이롭게 하는 것을 사(私)라고 하고, 남을 이롭게 함으로써 제게도 이익이 돌아오게 하는 것을 공(公)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같은 의미의 공사(公私) 구분은 한국사에서 이승만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여섯째는 구습에 찌들어 있다. 옛것만 고수하고 새것을 한사코 배척하여 끝내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한다. 돈짝 만 한 하늘을 보고 제일 넓다고 하니 어찌 쇠퇴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일곱째는 거짓말하는 악습이다. 이승만은 우리 대한과 청국을 이처럼 결딴낸 가 장 큰 원인을 거짓말하는 악습에서 찾고 있다. 그 악습을 열거하면 실로 한량이 없다. “위에서는 아래를 속이고, 자식은 아비를 속이는데, 남을 잘 속이면 총명하 다 하고 잘 속이지 못하면 반편이라 한다.” 거짓말로 집안을 다스리고 거짓말로 친 구와 교제하고 거짓말로 나라를 다스리고 거짓말로 다른 나라와 교섭하니, “세계는 대한과 청국을 거짓말 천지라 하여 공사나 영사를 파송하면 모두 이마를 찡그리며 부임해 오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실로 부끄럽고 분한 일이로다, .”(24) 이 같은 이승 만의 한탄을 읽노라면 문득 21세기 초 이 나라의 현실도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 을 하게 된다. 지금도 이 사회는 여전히 거짓말 천지가 아닌가. 여덟째는 인간이 조물주의 창조하심을 입어 만물을 다스릴 권리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앞서 설명한.
문명 개화의 논리를 알지 못한다는 취지이다· . 대한의 현실 가운데 이승만을 특히 통분하게 만든 것은 노예제의 존속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노예의 풍속을 가진 나라는 대한과 청국밖에 없다. 슬프다, 대한 의 형제들이여 어찌하여 옛 법에 익숙하여 내 나라 내 동포를 소나 말 같이 대접, 하며 짐승처럼 사고파는가 미국 사람들은 저들과 생김새가 다른 흑인 노예를 해방. 하기 위해 동포끼리 전쟁까지 벌이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이 나라는 동포를 노예로. 부림을 당연하게 여겨 노예법을 여태껏 폐지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라고 이승만”
은 절규하였다.(19)


6. 망국의 정치외교사

최초의 근대적 역사서
『독립정신 은 크게 제』 1∼25장의 전반부와 제26∼51장의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 부에서 이승만은 독립과 자유의 정신, 문명 개화의 논리와 필연을 설명하고· , 그에 입각하여 세계와 대한의 현실을 비평한다. 일종의 이론적 서술인 셈이다. 연후에 이승만은 우리 대한의 형편을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해선 “지난 역사를 상고할 필요 가 있다 고 하면서 제” 26장을 열고 있다. 이후 제51장까지는 1876년 개항 이후 조 선왕조의 정치외교사에 관한 서술이다. 그러니까 『독립정신 의 근 절반은 개항기』 정치외교 분야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지난 백년 간 이 나라 대학사회는 이승만의 『독립정신 을 알지』 못하거나 무시해 왔다. 『독립정신 의 후반부인 정치외교사 서술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보통 근대 역사학의 출발을
1908년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 에 기고한 미완의 원고』 「독사신론(讀史新論)』으로 잡고 있다 단군의 정통을 잇는 부여족이 만주대륙을 무대로 펼친 역사를 민족사의. 원형을 간주한 신채호의 역사학이 과연 근대적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역사학자들은 그보다 4년 앞서 이승만이 감옥에서 지은 『독립정신 이 그 이념이나』 방법에서 근대 역사학의 효시를 이루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한국사학사(韓國史學史)의 여러 연구서 가운데 이승만의 『독립정신 에 대해 한마디 언급하고 있는 단』 한 책을 찾을 수 없는 형편이다.
자세히 읽으면 누구나 공감하듯이 개항기 정치외교사에 관한 이승만의 저술은 어디서 이런 자료를 구했는가가 신기할 정도로 실증적이다 감옥 안인만큼 구할 수. 있는 자료와 정보에 한계가 있었다. 군데군데 그러한 한계가 보인다. 그렇지만 오 늘날 그 방면의 일급 연구자도 처음 접하는 자료와 정보가 동원되기도 한다. 이승 만의 역사 서술은 철저하게 자료에 기초한 고증이다. 그 점에서 오직 상상력 하나 로 민족의 고대사를 엮어낸 신채호의 「독사신론 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 더구나 앞 선 제1∼25장에서 역사를 조망하는 관점으로서 자유와 독립의 이념을 그토록 정밀 하게 소개했음에야. 비유컨대 이승만은 『독립정신 의 역사 서술을 통해 중세와 근』 대의 계곡을 건너 독자의 높은 고지를 점령하였다. 그 고지 위에서 뒤를 돌아보니 백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이 나라의 역사학은 그 계곡을 건너지 못하거나 엉뚱한 골짜기로 들어가 우왕좌왕하고 있다.
청 아라사 일본, ,
1876∼1905년 개항기에 조선왕조의 정치외교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는 청 중( 국), 아라사 러시아( ), 일본 세 나라이다 이외에 미국이 있는데 미국에 관한 이승만. , 의 생각은 조금 전에 소개한 그대로이다. 개항기의 역사 서술은 이 세 나라에 대 한 이해나 평가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조선의 종주국 청은 어떠한 나라인가 한마. . 디로 완고하여 어리석고 유약한 나라였다. 자기만 나라이고 나머지 세계는 오랑캐 라는 낡은 생각에 사로잡혀 남의 것들은 돌아보지도 않으려 하나 막상 외국세력이, 소란을 피우면 문득 굴복하는 유약한 나라이다. 그 결과 아라사가 잠식해 들어와 흑룡강 일대를 차지하니 그 세력이 조선의 국경에까지 도달하였다 장차 아라사가, . 조선을 내놓으라면 호령하면 청은 물러설 수밖에 없으니 조선과 일본 등 우리 동 방의 위급함은 오로지 청의 어둡고 어리석음 때문이다.(27, 30)
아라사에 대한 이승만의 평가가 호의적이지 않음은 청과 마찬가지로 전제정치이 기 때문이다. 아라사의 전제정치가 위태로운 것은 백성을 억압하여 내란을 자초할 뿐 아니라 끊임없이 얼지 않은 항구를 찾아 팽창을 도모하여 이웃 나라를 복속시 키려 하기 때문이다 영국을 비롯한 세계의 문명국가는 아라사가 흑해 밖을 나오지. 못하도록 봉쇄했는데, 이는 아라사의 전제정치가 결코 공번되지 못하여 세계의 통 상과 선교에 이롭지 않기 때문이다 이후 아라사는 눈길을 동쪽으로 돌려 시베리아.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해삼위 블라디보스톡 를 거점으로 동양 천지를( ) 호령하기 위해서이다. 그 위급하고 절박함이 “서양에서 막은 불이 동양으로 옮아 붙은 꼴 이다” .(29, 30)
이러한 이승만의 아라사 이해를 편견이라 할 것인가. 역사는 반복되기도 하여 20세기 2차 대전 후 미국은 소련을 봉쇄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공산주의의 국제적. 확산을 막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은 그러한 세계정세의 일환으로 태어났다. 오늘 날의 러시아는 세계를 이끄는 선진문명이 아니다. 자유세계에 속한 시민이라면 누 구나 그 점을 인정할 것이다. 그 점을 부정할 수 없을진대 개항기 아라사에 대한 이승만의 평가 역시 정당하였다. 우리 민족이 고종 황제가 집요하게 이끈 대로 아 라사의 보호 하에 들어갔다면 지금쯤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 .
반면 이승만에게 일본은 어떠한 나라인가 교화가 부족하여 풍습이 사나우나 남, . 에게 지기 싫어하는 기개는 본받을 만한 나라이다. 서양과 통상을 연 후 사신과 선비를 파송하여 서양의 부강하고 문명한 이치를 깨달아 나라를 유지하려면 서양 의 제도를 본받아야 할 줄을 알았다. 이에 서양에서 돌아온 총명한 선비들이 정부 에 들어가 권력을 잡고 민심도 격동시켜 봉건제도를 혁파하고 황실의 실권을 회복 하여 개명한 제도를 도입하였다. 황제가 총명하여 개화당에 힘을 실어주어 헌법을 제정하고 상하원을 설치하고 백성에게 나랏일을 의논할 권리를 허락하였다 이같이. 한 지 40년에 일본이란 나라 이름 이외에 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승만은 우리 의 형편에서 저들의 변화한 모습을 보니 부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그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28) 이 같은 이승만의 일본 이해는 오늘날 시비곡직을 불문하고 일본을 욕하고 증오하는 한국인들의 종족주의 정서와 상당한 거리가 있 다. 전술한 대로 자유인은 세계인으로서 그 마음이 세계를 향해 활짝 열려 있다. 이웃에 대한 증오와 편견은 자유와 독립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마음 의 병이다 이승만은 진작에 그로부터 해방된 신종의 한국인이었다. .
“조선은 자주국이다” 그 일본이 가만히 살피니 청은 아라사를 방어할 능력이 없고, 조선은 청에 속하 나 아라사에 속하나 원통할 것 없다는 형편이다. 조선이 아라사에 먹히면 일본은 스스로 외로워져 나라를 부지할 수 없다. 이에 밤낮으로 백성을 교육하고 군사를 기르는 한편 청과 조선과 연합하여 아라사를 방어코자 했으나 청이 어리석고 일본, 을 업신여겨 결국 청과의 전쟁을 면치 못하였다.(30,47)
오늘날 이 나라의 역사학은 개항기 국제정세에 관한 이승만의 이 같은 이해를 수용하지 못한다. 각급 역사 교과서나 교양서에서 일반적으로 기술되어 있듯이 일 본은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맺을 1876년 당시부터 침략의 의도를 가진 불순한 나라 였다. 그러한 통념이 깨지는 것은 2000년대에 들어와 국제법 전공자들이 1876년 의 강화도조약을 재해석하면서부터이다.11) 그에 의하면 종래 조선이 불평등조약의 체결에 따라 일본에 빼앗겼다고 여겨온 몇 가지 권리는 실은 17세기 이래 조선왕 조가 부산 왜관(倭館)에 거주한 일본인에게 허락해 온 것들이었다. 조선왕조는 1876년의 조약을 일본의 요구에 따라 구래의 교린관계를 회복하는 수준으로 간주 하였다. 조선왕조가 근대적 국제질서로서 이른바 만국공법(萬國公法)에 관한 이해 를 다지는 것은 이후 열국과의 교섭을 통해서였다.
그러한 새로운 관점에서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고 규정한 강화도조약의 제 조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1 . 이에 대해 기존의 역사학 은 일본이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조선을 침략할 의도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나중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사실을 전제한 지나치게 결과론적 해석이다 설. 령 일본의 의도가 그러했다 치더라도 막상 물어야 할 것은 조선의 주체적 입장이 었다. 기존의 역사학에서 조선은 피동적으로 청과 일본의 각축장으로 변했을 뿐,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조선의 모습은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달랐다 이승만은 강화도조약에 대해. “조선이 독립 권리를 회 복한 최초의 일 로서” “우리 백성이 독립을 중하게 여겼다면 마땅히 이날을 전국이 기리는 경축일로 삼아야 했다 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조선은 독립이 무엇인지 알” . 지 못하였다. “오히려 대국을 배반함이 도리가 아니라면서 장차 그에 따라 화근이 생길 것이라고 걱정하였다.”(32) 이승만이 보기에 “조선은 자주국이다 고 규정한” 강화도조약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적 질서를 재편하고 그 위에 조선 및 청과 연합하여 아라사를 막아내려는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일본이 조선에 그러한 이해관계를 거는 한 그것은 조선의 입장에선 독립을 이룰 절호의 기회였다 그렇지. 만 독립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조선은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동일한 관점에서 이승만은 1887년 조선왕조가 미국에 공사를 파견하여 주재케 한 것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이 조선의 공사를 동등한 예로 써 대접하니, “각국은 이날을 조선이 독립을 반포한 날로 간주하였다.” 이 사건을 소개하면서 이승만은 “우리나라의 신민이 된 자는 이 역사를 영원히 기념하지 않 을 수 없다 면서 감읍하였다” .(36) 그렇지만 조선은 이 역사를 지켜내지 못하였다. 청의 압박을 받아 주미공사는 철수했으며 이후 대리공사체제를 겨우 유지하였다, . 당시 조선의 조정은 청이 파견한 원세개가 일개 영사의 지위임에도 불구하고 조 선 국왕과 항례(抗禮)를 하면서 내외정을 깊숙이 통제하였다. 이를 지켜본 열국의 외교관들이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조선은 당당한 자주국 이라고 충고했으나”
 
11) 이근관, 「조일수호조규(1876)의 재평가」 『, 서울국제법연구』11-1, 2004.
조선의 관리들은 오히려 얼굴색을 붉히며 “우리더러 어찌하여 신의도 없이 상국에 실례를 하라고 하느냐 라고 하였다” . 청도 “조선은 예부터 우리의 속국이며, 조선 스스로 예절을 지켜 우리를 그렇게 대접하니 각국의 공사들은 상관할 바가 아니 라 고 주장하였다” .(34) 그렇게 청의 완만(頑慢)함과 조선의 잔약(孱弱)함이 어우러 져 동방의 위기는 더욱 깊어져 갔다. 이를 통분히 여긴 일본은 어린아이조차 청과 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알고 온 국민이 밤낮으로 그 준비에 몰두하였다.
우리는 몇 번이고 좋은 기회를 놓쳤다 이승만은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공사의 서울 주재, 임오군란, 갑신정변, 미국과의 통상조약, 러시아와의 통상조약, 영국의 거문도 점령, 러시아의 철수, 청의 발호, 일본의 전쟁 준비, 일청전쟁, 삼국간섭, 을미사변, 갑오개혁, 아관파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일본과 아라사의 조선을 둘러싼 담판 청의 의화단 사건, , 아라사의 만 주점령, 일아전쟁의 발발 등 개항기에 걸쳐 숨 가쁘게 펼쳐진 정치외교사의 중요 사건을 하나씩 훑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로부터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이념의 척. 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한다. 독립과 자유의 이념에 입각한 이승만의 역사학 은 오늘날의 주류 역사학이 교실에서 우리의 젊은 세대에게 가르쳐온 역사와 천양 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더구나 그 실증성에서 더없이 탁월하여, 예컨대 아관파천 후 일본과 아라사 간에 있었던 북위 39도를 경계로 한 한반도 분할 협상을 소개하 는 대목에 이르러선, 그에 대해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나로선 상당한 충격을 받 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을 역사의 진 실이라고 알아 왔던가.
독립과 자유의 척도는 추상(秋霜)과 같았다. 이승만은 개화파의 선각자들이 일으 킨 갑신정변에 대해 “그 뜻이 아무리 광명하고 정대하더라도 남의 나라에 기대 개 혁을 하고자 한 것은 큰 잘못 이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35) 그는 일본에 우호적 이지만, 일본의 공사가 일으킨 남의 나라 국모를 살해한 을미사변은 차마 입에 담 을 수 없는 “만고의 대변(大變)”으로서 이를 통해 일본이 그동안 애써온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갔으며, 고종의 아관파천을 불러 결국 일아전쟁의 불씨가 되었다고 통렬하게 비판하였다.(42)
이렇게 불측의 사건이 있긴 했지만, 망국의 위기는 오로지 독립과 자유의 정신 을 알지 못한 조선의 군주와 그를 둘러싼 근위 세력이 자초한 것이었다. 좋은 기 회는 몇 차례나 있었다 앞서 소개한 강화도조약이나 주미공사 파견이 그러하였다. . 일청전쟁 이후 종주국 청이 물러가자 고종은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아가 이른 바 홍범(洪範) 14조를 맹세하였다. “이로써 자유와 독립의 기초를 굳게 세우고 특, 히 민사와 형사의 법률을 밝혀 백성의 재산과 재산을 보전하겠나이다 라고 열성조” 에 다짐하였다 진실로 그와 같이 행해졌을진대. 10년 안에 “국력이 흥왕하고 백성 이 부요해져 나라가 반석 위에 섰을 터이나” “집권한 이들이 장원(長遠)한 지식으 로 백성의 식견을 열어 힘 모으기를 도모하지 않은 통에” 결국 오늘의 비운을 맞
았다고 이승만은 슬퍼하였다.(42)
마지막 기회는 이승만도 참여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였다 고종 황제가 신민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종의 의회라 할 중추원(中樞院)을 설립했으나 하룻밤 새 약속을 뒤집어 독립협회를 탄압하고 해산하였다. 당시 독립협회의 의장 윤치호는 그의 일 기에다 “이런 자가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시정배도 대한의 황제보다는, 나을 것이다 라고 개탄해 마지않았다” . 이승만도 “이때 각국의 공론이 말하기를 대 한의 독립 권리는 이제 없어졌다. 그럼에도 대한의 정부는 세상 공론을 들을 생각 은 않고 계집이 남편에 매달리듯 아라사에 깊이 의지하니 갑오 이전의 청이 또 하
나 생겨난 꼴이다 고 한탄하였다” .(43)
그렇게 우리는 지난 30년간 여러 번의 좋은 기회를 놓쳤다 이제 일아전쟁이 터. 져 그 포성이 서울 시내에까지 진동하고 진고개의 일본인 마을은 승전 소식에 더 없이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다. 동양의 조그만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큰 아라사를 격파하니 장하기도 하지만, 조선 때문에 두 차례나 전쟁을 치른 일본이 필경 예전 과 같지는 않을 터 대한의 처지는 침몰 직전의 난파선과 같다 어떻게 할 것인가, . . 따로 서볼 날이 있을지 의심스럽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대한의 인민이 자유의 정. 신을 알아 이천만 동포가 다 죽고 한 사람만 살아남아도 좋다는 독립의 기개를 기 르는 가운데 차츰 세계의 공론이 우리에게 우호적으로 돌아서기를 힘쓰고 기다리 는 수밖에 없다 이승만은 그러한 한 가닥 희망의 진단을 내리면서 마지막 제. 51장 을 닫고 있다.


7. 교화 단 한 가지 처방:

백성의 압제 그럼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단 한 가지 처방. [單藥方]이 있으니 곧 교화‘ ’ 이다. 제15장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민주정치를 중국 상고의 요순정치가 현세에 부 활한 진미한 제도로 평가한 다음 그렇다고 이 제도를 지금의 동양에서 시행하기는, 위험하다고 경계하였다. 그 이유를 설명한 곳이 “정치제도는 백성의 수준에 달려 있다 는 제목의 제” 23장이다. 거기서 이승만은 ‘백성의 압제 라는 개념을 동원하고’ 있다. “대저 굽어 자란 가지는 졸지에 펴지 못하고 앉아 자란 아이는 하루에 멀리, 가지 못하니 백성의 수준도 이와 같다 오랜 세월 전제정치의 압제 하에서 그것을, . 당연히 여기는데 만일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접하라 하면 윗사람도 이를 변괴로, 알지만 아랫사람이 도리어 더 큰 변괴로 알 것이다, .” 그리하여 “위에서 고명한 관 원이 있어 기어코 그것을 실시하려다가는 마침내 대역부도의 누명을 쓰고 백성의 손에 도리어 큰 화를 당할 것이다.” “압제에는 두 가지 있으니 백성의 정치 권리를 제약하려는 윗사람의 압제가 그 한 가지요, 다른 한 가지는 악한 풍속에서 생겨나 는 백성의 압제인데 실상은 이것이 더 무서운 법이다, .”(23)
‘백성의 압제 를 이야기하면서 이승만은 만민공동회의 경험을 떠올렸을 것이다’ . 고종 황제의 말 한마디에 전국에서 몰려온 황국협회 소속의 보부상들이 몽둥이를 들고 만민공동회를 습격하였다 여러 사람이 맞아 죽었다 민도와 민심을 고려하지. . 않고 단발령이란 과격한 개혁을 내린 갑오개혁의 주체들이 아관파천 후 비참하게 죽은 모습도 떠올렸을 것이다 총리대신 김홍집은 재판도 없이 고종이 파견한 순검. 들에 의해 처형되었으며 청계천에 버려진 그의 벗겨진 시신은 사흘 동안이나 무지, 한 군중에 의해 짓이겨졌다.
이승만의 견문이나 경험만이 아니었다 만. 5년간 감옥 안에서 성취한 방대한 독 서와 깊은 사색이 그 같은 지혜와 통찰에 이르게 하였다. 근대 서양의 역사는 인 간의 평등과 자유를 쟁취하는, 법과 제도 중심의 ‘계몽주의(Enlightment)’의 과정 만이 아니었다 보통의 인간들이 중세적 환상 광신 욕망 폭력에서 해방되어 성숙. , , , 한 개인으로 자립하는 이른바 ‘복음주의(Evangelism)’ 내지 ‘경건주의(Pietism)’의 과정이 병행하였다. ) 전자가 오성의 영역이라면 후자는 감성의 영역이었다. 영국 에서 노예무역을 금지하고(1807) 끝내 노예제를 폐지하는(1833) 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복음주의 의 힘이었다’ .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776년의 독립선언문이 천 부의 권리로서 인간의 평등을 선포했지만 흑인 노예는 그 대상이 아니었다 흑인도. 백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으신 인류라는 인식은 1830년대의 복음주의적 각성 을 통해서였다. 계몽주의와 복음주의는 수레의 두 바퀴를 이루며 함께 나아갔다. 몇 차례의 정치적 개혁과 종교적 각성은 자립과 자조, 근로의 미덕, 금욕주의, 가 정의 미덕, 마음의 평화를 통한 행복으로 단련된 고상한 정신의 개인을 창출하였
다.
민중이 여전히 중세적 폭력과 야만에 젖은 상태에선 민주주의는 오히려 위험하 다. 이승만은 프랑스혁명에 대해 “분노한 민심이 폭발하여 전날의 귀족들을 죄의 유무를 묻지 않고 부녀와 어린아이까지 낱낱이 살해하여 덕망 있는 군자로서 해를 입은 자도 적지 않으니, 만고에 이렇게 참혹한 역사가 없었다 고” (20) 차갑게 평가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중세와 근대 사이엔 의외로 깊은 건너 기 힘든 계곡이 있었다. 이승만이 주목한 ‘백성의 압제 는 당대 조선의 현실과 서’ 양 근대문명에 대한 깊은 통찰이 어우러진 산물이다. 그것은 21세기 초 오늘날에 도 여전히 유효한 화두이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과연 백성의 압제 로부터 자유‘ ’ 로운가.
개종의 변 제52장을 닫은 뒤에도 이승만의 상념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붓을 들어 『독립정신』 전체를 다 읽을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위해 그것을 요약한 6조 25항의 ‘후록 을 작성하였다’ . 그것을 여기서 소개하지는 않겠다. ‘후록 에서 이승만은 본문’ 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보충하고 몇 가지 개념을 보다 선명하게 다듬었다. 쓰기를 마친 후 이승만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날마다 힘써 자기의 몸부터 변화시키는데 요긴한 말 이라고 자부하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다소 생뚱맞은 이야기를 펼친” .
다. “이상은 나무로 비유하면 다만 가지와 잎사귀만 들어서 말한 것이요, 실상 그 근본을 구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근본은 무엇인가. “나무는 뿌리를 북돋워 줘야 하듯이 백성들의 마음에 있는 악한 뿌리를 뽑아내고 선량한 천성을 회복하는 일”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독립정신 을 종결하면서 이승만은 악한 풍속에 젖은』 백성의 마음 그로 인한 백성의 압제 를 다시 거론하고 있다, ‘ ’ . 나이 20세까지 이승만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동양의 고전과 교양을 두루 익혔 다. 아무리 탈색을 해도 그는 뼛속까지 조선왕조가 배출한 선비였다. 사서육경을 읽은 사람이라면 『독립정신』 곳곳에 동양의 사생관과 의리관이 깊이 배여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마음은 다스리지 못하고 다만 재주만 닦는다면 이는 범에게 날개가 돋아나는 것 같아서 세상을 해롭게 하는 기량만 늘 터이다.” 풍속이 악한데 독립과 자유의 정신만 알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세상은 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세상의 법률로써 바로잡지 못하고 다만 교화로써 바로 잡을 뿐이다. 이승만은 다시 한번 교화의 긴요성을 강조한다.
무엇으로 교화를 이룰 것인가 우리 동방에도 유교라는 진선진미한 인도. (人道)가 있었다. 그로 인해 인륜을 밝히고 풍기를 열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이루었 다. 그렇지만 인도는 시대에 따라 변하였다. 왕도(王道)가 사라지고 패도(覇道)가 지배한 지 벌써 수천 년이다. 무엇보다 인도는 눈앞에 보이는 것만 말하고 사후의 세상이 어떤지 말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육신을 버리면서까지 더 큰 것 을 구할 줄 모른다. 동양은 사후 세계가 없는 물질주의의 세속사회이다. 인간들의 마음이 하나로 통하지 못하고 서로 이익을 다투면서 갈등하니 결국 국가마저 위태 로워졌다.
반면 서양을 돌아보니 더욱 광대하고 장원한 천도(天道)가 있다. 하나님이 인간 을 지었는데, 인간에게는 죽지도 썩지도 않은 영혼이 있다고 한다. 서양 사람들은 이 천도를 믿어 한갓 백 년에 불과한 이승의 영화보다 사후에 내려질 영원한 심판 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그 서양의 천도가 지금의 상등 문명국을 만들었다. 그 나라와 백성이 다 같이 높은 도덕적 지위에 이르게 된 근본 이유는 거기에 있다. 지금 우리가 쓰러진 데서 다시 일어나려 하는데 이 천도로써 근본을 삼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신학문에 힘을 써도 효력을 얻지 못하고 자유 권리를 알아도 그 한계를 알지 못하니 결코 저들과 동등한 지위에 도달할 수가 없다, .
꼭 집어서 말하진 않았지만, 이승만에게서 유교의 동양은 메마른 물질주의의 세 속사회였다 이승만은 그의 동포가 독립과 자유의 이념을 깨우치길 넘어 보다 장원. 한 정신주의의 도덕사회에 도달하기를 희구하였다. 나는 왜 개종을 하였는가. 『독 립정신 의 말미에서 이승만은 답하였다』 . 우리 동양에선 사후 세계가 없다. 그래서 큰 의리와 정의가 없다 결국 국가도 없다 우리가 썩은 데서 다시 싹이 자라길 바. . 랄진대 이 같은 정신문화의 한계를 돌파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보다 장원한 사후 세계를 열어준 서양의 기독교에 내 고달픈 몸과 마음을 의지코자 하는 것이 다. 내 인생은 하나님이 맡기신 소명을 다하는 순례의 길이다. 이승만이 『독립정 신 의 맨 마지막을』 “이후 천국에 가서 다 같이 만납세다 라고 장식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신심에서였다.
『독립정신 은 결코 쉽게 읽히는 교양서가 아니다』 . 누가 그렇게 천박하게 말하는 가 누가 그를 손쉽게 서양중심주의 라고 비난하는가 누가 그를 얄팍하게 기독교. ‘ ’ . ‘ 입국론 이라고 매도하는가 이승만은 서양의 기독교 문명과 대비된 동양의 유교 문’ . 명을 아파하였다 그 밑바닥에는 세계는 한 방향으로 동화하고 진보하는가 아니면. , 좀처럼 건너기 힘든 깊은 강으로 갈라진 여러 문명권으로 대립하고 각축하는가에 대한 깊은 고뇌와 나름의 모색이 깔려 있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승만의 『독립 정신 은 지적 훈련을 결여한 자들이 아무렇게나 읽고 함부로 재단할 값싼 교양서』 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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