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립대학설립운동
최근 수정 시각: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와 같은 일이 모두 필요하도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한 일이 되고 가장 먼저 해결할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면 아니 된다. ...(중략)... 민중의 보편적인 지식은 보통 교육으로 가능하지만, 심오한 지식과 학문은 고등 교육이 아니면 불가하며, 사회 최고의 비판을 구하며 유능한 인물을 양성하려면 ...(중략)... 오늘날 조선인이 세계 문화 민족의 일원으로 남과 어깨를 견주고 우리의 생존을 유지하며 운화의 창조와 향상을 기도하려면, 대학의 설립이 아니고는 다른 방도가 없도다.
ㅡ조선 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의 발기 취지서(1923년)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의 시초는 이미 무단 통치기에 종교계를 중심으로 민립 대학 허가 요구가 꾸준히 나온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1920년 월남 이상재를 임시 석장으로 뽑아 구성된 조선 교육회는 교육에 대한 조사와 연구, 잡지 발행과 도서관 경영 등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의 인프라를 구성함에 목표를 두었지만 당장 조선총독부에 인가를 받지 못했다. 8월쯤에 조선 총독부에서 대학 설립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으며 1년 뒤인 1921년대에 정치성을 배제한다는 조건으로 총독부에 인가를 받아 조선 교육 협회로 개칭했고 본격적인 실력 양성 운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대학 설립 운동은 국채보상운동과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경술국치 후 운동가들은 국채 보상 운동으로 모인 자금을 사용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경술국치로 인해 국채는 무의미하게 되었고 그냥 두자니 모금한 자금의 액수가 너무 많았다. 그러다가 국채 보상 운동에도 참가했던 양기탁 등이 이 자금을 활용해서 조선인의 대학을 세우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1922년에 일제가 제 2차 조선 교육령이 공포하여 조선인의 대학 교육 가능성이 조금 열린 것[1]에 대한 자극으로 조선 교육 협회가 주도하여 그해 6월에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이상재가 중심이 되어 조선 교육회를 모체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가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속에서 조직되었다.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 중앙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3일간에 걸친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상술한 발기 취지서를 내면서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자본금 1,000만원을 3년만에 모아 법과, 경제과, 문과, 이과, 공과, 의과 등 순서대로 개설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조선 교육회부터 갖춘 치밀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국내외 대규모의 모금 운동을 벌였는데 흔히 한민족 1천만,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가 그것이다. 하지만 관동대지진, 홍수, 가뭄 등의 재앙으로 모금이 어려워졌고 일제의 잦은 방해로 인해 계획한만큼 모금이 들어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비슷한 시기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1924년에 설립하면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실패로 끝나 버렸다.
- 경성제국대학에 조선인의 실력 양성에 도움이 되는 정치, 경제, 이공학부는 설치하지 않고 식민 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법학, 의학부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토의 제국대학도 도쿄제대, 교토제대를 제외하면 경제학부를 독립시킨 곳은 한 곳도 없었으며 정치학부는 지금도 일본에서 독립된 곳이 거의 없고, 전부 법학부에 속해 있다.[5] 오히려 식민지 거주 일본인들은 취직이 잘 되는 이과, 공과, 농과 계통의 학부 개설을 희망했으며 조선총독부가 법문학부, 의학부만을 개설하자 조선인들의 환심을 얻으려 한다며 불만을 품기도 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는 1938년 예과 신입생부터 모집을 시작하여 1941년에 학부 개강하였다.
- 조선의 고등교육기관 설립만을 막았다는 견해도 있으나, 대학령 자체가 1919년 4월 1일 시행되었기 때문에 이전까지 일본 본토에서조차 공립/사립대학의 설립은 불가능했다[6]. 이후에 개정된 대학령에 의거하더라도 재단 기본재산 예치금 최소 50만 엔 등 재정 조건을 비롯한 구제대학인가를 신청하기 위한 요건이 워낙 까다로웠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미국 기독교재단의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및 인촌 김성수의 보성전문학교 등이 구제대학 승격 구상을 갖고 있었으나 1945년 8월 종전시까지 단 한 곳도 사립 구제대학으로 승격하지 못했다.[7] 참고로 법문학부와 의학부의 단 2개 학부로만 구성된 경성제국대학이 혼자서 그렇지 않아도 만년 적자로 일본 본토 세금을 받아와야했던 조선총독부의 학무국(現 교육부) 전체 예산의 1/3~1/2 가량을 소비했을 정도다. 그만큼 당시 기준으로 구제대학이라는 것이 고급 엘리트 교육기관이었으며 설치와 유지를 위해 엄청난 비용이 들었던 것이다.
물산장려운동과 마찬가지로 이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사회주의자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이들의 논리는 '미취학 아동의 교육이 급선무'라는 것인데 당시 고등 교육까지 받을 형편이 되는 사람은 소수의 잘 사는 집안 학생으로, 그중 많은 수가 식민지 체제에 순응하거나 협조했다. 말하자면 민립이든 관립이든 대학 설립이 식민지 체제 동조자를 양성할 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정 교육으로 실력 양성 운동을 하려면 야학이나 강습소 혹은 간이 학교를 세워 대다수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대중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전조선 청년당 대회에서는 아예 1923년에 민립 대학 설립 운동 타도를 결의하기도 했다. 결국 사회주의자들의 이러한 비협조적 태도에 민심이 먹혀들어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문화통치 당시 사회주의 계열 단체는 극렬파가 아니고선 대부분 용인되었고, 이들의 민립대학 반대 의사가 당시 일제의 민립대학 설립 방해 겹쳐서 사회주의자들이 일제와 야합했다는 설이 1960년대만 해도 반공 의식 덕에 팽배했다. 물론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이 민족주의자와 대립되었을 뿐, 일제와 협조한 건 결코 아니었다. 문화통치 시기가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겹쳐서 다소 자유로운 사회분위기가 형성되긴 했으나 사회주의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일본 본토에서도 모두 처벌 대상이었다.
문화통치 당시 사회주의 계열 단체는 극렬파가 아니고선 대부분 용인되었고, 이들의 민립대학 반대 의사가 당시 일제의 민립대학 설립 방해 겹쳐서 사회주의자들이 일제와 야합했다는 설이 1960년대만 해도 반공 의식 덕에 팽배했다. 물론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이 민족주의자와 대립되었을 뿐, 일제와 협조한 건 결코 아니었다. 문화통치 시기가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겹쳐서 다소 자유로운 사회분위기가 형성되긴 했으나 사회주의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일본 본토에서도 모두 처벌 대상이었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의 불길은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숨죽인 채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인의 자주적인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구해야 한다는 견해가 계속되었고 해방 후에는 이러한 불길이 더 강하게 타올랐다.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한양대학교, 단국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가 이러한 운동에 영향을 받고 운동의 연장선에서 해방 이후에 설립되거나 확대 개편되었다. 이는 비록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본 운동이 실패했지만 지식인의 관념 속에서 계속 그러한 운동의 불길이 이어지면서 해방 후에 여러 민족이 주도하는 대학이 설립되거나 확대 개편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셈이다.
조선대학교 등 몇몇 사립학교에서 자신들을 '해방 이후 최초의 민립대학'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최초의 민립대학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린다. '민립'이란 표현이 국가나 공공기관이 아닌 민간인 주도의 설립을 말하는 것이라면 사립학교 전체에 해당하고 특정 기업체이나 교육 재단, 종교재단 등의 단체가 아닌 일반 시민들의 힘으로서의 설립의 경우 좀 더 범위가 좁혀질 수 있겠으나 이 역시 범위가 다소 모호하기 때문이다.
조선대학교 등 몇몇 사립학교에서 자신들을 '해방 이후 최초의 민립대학'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최초의 민립대학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린다. '민립'이란 표현이 국가나 공공기관이 아닌 민간인 주도의 설립을 말하는 것이라면 사립학교 전체에 해당하고 특정 기업체이나 교육 재단, 종교재단 등의 단체가 아닌 일반 시민들의 힘으로서의 설립의 경우 좀 더 범위가 좁혀질 수 있겠으나 이 역시 범위가 다소 모호하기 때문이다.
[1] 일본의 학제는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 고등학교 3년을 마친 후에 대학(정확히는 제국대학)에 입학 가능했는데 조선의 학제는 보통학교 5년, 고등보통학교 4년이라서 어차피 대학이 없기도 했지만 고보 졸업 후에는 대학은커녕 전문 학교도 갈 수 없었다.(사실 전문 학교도 조선에는 없었다.) 따라서 대학에 가려면 일본에서 중학교부터 다시 다녀야 했는데 사상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어려운 일이라서 친일 고관 대작들 말고는 상당히 힘들었다. 이것이 보통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 5년으로 바뀌어서 적어도 학제만으로는 소학교 = 보통학교, 중학교 = 고등보통학교가 되어 고보 졸업 후 최소한 전문 학교라도 갈 수 있었다.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이 전문 학교 인가를 받은 것도 이 무렵이다. 이전에는 전문 학교도 아니었다.) 물론 조선에는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조선의 학제만으로는 대학에 갈 수 없었다. 대학에 가려면 일본에서 고등학교에 들어가던가 아니면 대학 예과에 진학하던가. 경성제국대학에 예과가 있었던 이유가 이것이다. 참고로 이 주석에서 말하는 고등학교는 구제고등학교다. 항목 참조.[2] 이전에는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강했다.[3] 정준영 등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민립대학설립운동 이전부터 독자적으로 조선에서의 대학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1922년 조선교육령의 전면 개정 반포 이전인 1921년 봄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에 세워질 제국대학 예과 입시자격을 주기 위한 4년제 고보 졸업생 대상 보습과를 개교했고, 또 <조선총독부 재외연구원 규정>을 제정하여 대학예과/학부 교수요원 양성을 시행했으며 1923년 예과 개교 및 1925년 학부 개교를 목표로 1922년부터 예과 부지를 확보하고 건설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한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4] 자세한 내용은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에서 간행된 「식민지식과 근대권력 - 경성제국대학 연구」(2011) 참조.[5] 1930년대 들어서 도호쿠제대의 경우, 법문학부에서 경제학사를 수여할 수 있도록 학칙을 변경하였다. 비슷한 시기 경성제대 역시 비록 경제학사 학위를 수여하지는 않았으나 법학과 내에 경제학 중심 이수 과정을 두었다.[6]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양대 사립대학인 소케이(와세다대학과 게이오기주쿠대학)도 대학령 시행 전까지는 자체적으로 '대학'이란 명칭을 쓸 수는 있어도 그게 공식 대학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대학령 반포 이후에야 신청을 거쳐 1920년 2월부터 문부대신의 인가를 받고 구제대학으로 승격되기 시작했다. 소케이가 이날 동시에 최초로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소케이가 일본의 양대 최상위 명문 사학으로 지금까지도 자리매김하고 있는 건 일본 최초의 사립대학이라는 역사성과 상징성에서 시작되었다.[7] 그래서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최고학부로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이 유일한 구제대학이었다.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연세대학교로,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학교로 승격된 것도 해방 이후였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