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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싸움 지도 .(2004 대한민국) : 2004년 9월 23일 씀
2017.01.22. 15:11
‘이념싸움지도’-(2004, 대한민국)
1. 서구 사회에 ‘한국 새 민주화 바람’ 지지법안 마련을 기대하는 게 시의적절해진 시점인 듯?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 우리가 북한에 대해서 바라보듯, 정치 지도부만을 제외하면 충분히 그들의 ‘아군’이 될 수 있음을 인식시키고, 대한민국 자유주의의 결정적 침해가 없도록 하는 서구 사회의 주의 기울이기를 기대할 때가 된 듯 하다.
북한 민주화 법안 추진의 배경에는 황장엽 선생이 있다. 결국, 개혁 개방된 북한으로 돌아가겠다는 꿈이 담긴 이론의 현실화일 것이다. 그런데, 이젠 더 이상 대한민국은 황장엽 선생의 이론을 도와주는 배경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황장엽선생의 이론이 서구 사회에서 대한민국을 향해서도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필요성이 느껴지는 시점이란 말이 된다.
물론, 서구 사회에 모든 것을 내맡기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움직임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구 사회의 관찰을 요구할만큼, 현저하게 힘의 우열이 나뉜 상황일 것이다. 물론, 적극적으로 미국 대선에서 부시대통령 진영이 승리하도록 뭔가 가시적인 기여를 할 수 있어야 될 것이다.
2. 이념 갈피 못 잡는 한나라당은, ‘진보 우익’운운하는 행동거지에서 논리적으로 떨어져 나온다.
나는 여러 차례 반복해서 권력으로 조각 내준 물질 덩어리들의 명명을 복면복창하는 실증주의를 비판했다. 그리고, 더 비판한 것은 ‘이론으로 무장된’타령일 것이다. 그것은 이론과 무관하다. 이제는 그러한 제스처는 일상적인 차원의 네티즌의 폼재기로 자리하고 있으며, 그 어법이 의도한 지향점은 멈춰지고 있다.
(1) 이념 갈피 못 잡는 한나라당은 ‘진보 우익’운운하는 행동거지에서 논리적으로 떨어져 나온다.
(2) ‘진보 우익’운운하는 행동거지는 문민정부에서의 보수 신문의 <좌익 지식> 적극 지원양상에서 비롯된다.
3. 황장엽 선생의 북한인권법안은 1980년대 초반 배경의 반공서적의 일반어법을 사용하는 것. 그러나, 우파 세력은 황장엽 선생의 학술적이며 이론적--이론적이라 하는 말은 이럴때 쓰는 것이다--인 차원을 확 들어내 버리고, 단순한 전략 전술적인 차원으로 국한 하고 있다.
(3) 우파들의 주요한 표현들을 지켜 보라. 단 하나도 제대로 우파적인 게 없다. 요전에 ‘박사모’의 광화문 집회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북한에서 광장에서 북한 지도자 앞에 두고 미국에 반대 시위할 때 내보이는 글자 폰트가 길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것은 국가보안법 폐지 이후에 그 글자로 뭘 하려는가를 말해준다고 본다.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한다고 하는 집회에서 글자 폰트를 북한 폰트 모방체를 쓰고 한다. 한총련이 만든 합성 사진 가지고 대통령 야유의 즐거움을 느끼는 우파 세력에겐 있을 수 있는 일이겠다.
우파의 본연의 연구 주제들이 단 하나도 제대로 연구되는 게 없다. 오늘자 조선일보 황경식 교수님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에 대한 글 달린 100자 평은, 우리 사회의 진짜 문제점을 말해준다. 자유주의=애국우파, 공동체주의=친북좌파, 이러한 공식으로 사실을 읽기전에 이해를 하고 있다.
(4) 젊은 층을 얻는 <방법> 타령의 무한 반복. 결국은 우파 세력 내에 우파 보다 좌파세력에 지분권을 가진 이들의 자기 자랑에 방향 혼돈. 문제는 <방법>이 아니다. 그 방법 타령은 젊음을 잃은 구세대들의 농담 따먹기 수준에 가까우며, 젊은 층의 여론이 반영된 사례가 없다. 더 정확하게는, 우파 내부의 구세대 권력의 온존을 위해서, 젊은층의 생산적 목소리가 적극적으로 육성된 바가 없다고 봐야 된다.
4. 문제는 인적 네트워크 확립이다!라고 알면서도, 그 네트워크를 종합하는 오야붕적 지위를 서로 독점하려는 데에만 혈안.
(5) 우파 정당의 방향 미 설정. ====> 여론 주도층의 한물 간 지식 체계의 과도한 애정. 강한 권력의 보호 아래에 가능할 지식 형태에 병적인 애착을 가지면서(인적 네트워크 형성보다는 말잘듣는 군중 형성 차원에 그치는), 인적 네트워크의 기대를 찾는다. ====> 지지층 내부의 방향 미 설정. ==========> 우파 정당의 혼돈적 방향 설정의 정당화.
(6) 오야붕적 지위(권력)에 탐닉하기에, 젊은 층 앞에서 근사하게 좌파 이론을 구체적으로 까뒤집는 것보다는, 적당하게 인터넷에서 남의 글 푸거나 3차 자료가지고 얼기설기 쓰는 글로 지속한다.
(7) 끊임없이, 국민의 각성을 기대한다. 그러나, 입만의 과격으로 인해서 역효과가 계속 났다. 또, 문화적 차원에서 편안한 차원으로 하면서도 일종의 우파적 결속을 낳는, 대학가 지향적인 분야의 필요성은 완벽하게 파묻는다. 그러니, 대학가에 사람이 지원이 없다. 가장 구세대의 목소리를 복면 복창 잘 하는 몇몇을 세우고, 청년 우파의 전체인양 치켜세운다.
5. 좌파의 공격성에 경악하면서, 매우 웃기게도 그 공격성의 허위성을 승인하는 경우가 많다.
(8) 임헌영씨의 친일문제제기. 그것에 대해서 대학가를 배경으로 하여 임헌영씨의 이론을 사용한 김윤식교수등의 학술어법이, 북한 유물사관을 적용했다 뿐이지 역사의 ‘o'자도 모른다는 지적이 가능했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공부안하되 권력적인 우파 기성세대가 아는 <바로 그런 역사>를 표면적으로 앞세운다. 임헌영씨가 제기한 역사학의 조악성과 학문적 불성립문제를 제기하면, 반드시 김윤식교수와 그의 제자들 학문의 불성립문제로 나아간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파 언론은 적극 진화해 버린다.
(9) 세계적 수준의 좌파 이론이 연구되라는 대학원 중심 대학론. 그 결과에는 공포스러워 하면서도, 그 집행은 결사적으로 지원한다.
(10) 친북좌파 강정구씨나, 작은 강정구씨인 이해영교수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비판하는 이는 대한민국 중심의 역사론을 쓰는 이의 논지가 아니라, 좌파가 장악한 국정교과서 어법(결국 강만길씨나 송두율씨 이론과 같은)을 쓴다. 박사모 사이트에서 한총련이 만든 합성 사진을 퍼서, 대통령 야유의 즐거움을 누리는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6. 좌파들의 (바르트의 [신화론]을 연상시키는) 심층의 코드에서 진행되는 친북좌파적인 측면. 이것에 파악할 능력이 없으면서 해설을 들을 생각도 없다.
(11) 반북 담론은 황장엽선생을 제외하고서는, 늘 감성적인 차원에서 시작한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시작되는 자유민주주의적 인간관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술) 상무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친북좌파 담론의 진짜 주의할 부분은, 심층의 차원에서 해독되어질 뿐이며 외형으로는 거의 안 보인다. 영화 [황산벌]의 ‘거시기’해독관 수준보다 심한 경우라고 보면 옳다. 긴 해독의 차원이 있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 다 읽혀지기 전에, <이론으로 무장> 하는 어구나 감성적 차원의 흑백 이분법을 말하며 허위의식의 이데올로기론과 무관한(무늬만 반공교재 전통을 이어받은) 주장의 답이 달린다. 가끔 황당한 것은, 조선조 유교를 마르크스의 기독교로 만들고, 조선조 유교를 받드는 차원으로 북한을 만들어, 친북좌파를 선비로 만드는 어법이다. 그렇게 할 때, 마르크스주의자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게 되어 버리며, 우파는 마르크스주의에 샘나서 질투하는 쫀쫀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12) 나는 박대통령을 옹호하는 층에서 해외여행에 꽤 친숙한 편에서는, 대다수가 박대통령 시대를 견딜 수 없다고 본다. 다만, 그 시대를 잊었을 뿐이라고 본다. 각하 패러다임은 사람들에 많은 억압을 주었다. 그렇다고, 각하 패러다임의 해체가 사회의 기본적 진실의 무너짐은 안된다. 좌파들은 우파의 권위주의 면모를 100% 활용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드는 평범한 생각은, 우파 이론 차원에서 가능할 수 있고 가능해야만 할 인권론 차원에서 좌파의 난동질이 금지되도록 하는 토대의 마련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우파가 궁지에 몰리지 않도록 하는 토대 마련보다, 박대통령에 대한 예찬만의 반복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박대통령에 대한 긍정을 하는 차원이, 35도씨 여름에 선풍기 바람만으로 시원하게 생각하던 시절을 당연으로 여기는 것까지를 포함하지를 않는다. 박대통령 시대는 35도씨 여름에 부채질 차원의 향수까지도 담고 있음을 지적하는 이들이 없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의 현실이란 차원인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도 없다.
(13) 여론을 모아주는 형성 매체는 없고, 권력이 행여나 떨어질 때 유리한 포지션 잡기 차원을 지키는 이들이 많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애매한 잣대가 대권을 언제 잡는다는 기대로 상쇄되는 국면은, 우파 진영의 죄악을 보여준다.
결국, 이러이러한 고리를 돌고 돌아서 제자리에 제자리에 제자리의 반복이다. 70년 전의 춘원 이광수도 민족개조론에서 네트워크론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위기에 있지만 아지도 위기보다는 언젠가 벼락같이 찾아올 기득권의 문제만 생각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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