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역사(위안부) | 제3의길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역사(위안부)
제3의길2018.08.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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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길벗
-당시 경성 택시기사 월급의 거의 10배 수입. 돈 모아 조선에 송금도 하고 외출해서 쇼핑도
-정대협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실질적 도움 주기보다는 특정세력의 정치적도구로 악용돼
-이용수 할머니의 최초 증언과 이후의 증언에 일관성 없고 객관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아
위안부 문제에는 너무 많은 왜곡과 오해가 개입하고 있다.
독도, 간도에 이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일반 국민들은 일본 위안부로 종사한 대부분의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 군인(헌병)이나 총독부에 의해 꽃다운 나이에 강제로 연행 당해서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일본군의 성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무런 댓가도 받지 못하고 비참한 노예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본군(헌병)이나 총독부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위안부가 된 사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조선인이나 일본인 포주(업자)들에 의해 (돈을 많이 벌게 해 준다는 꾀임으로) 유괴, 유인되어 위안부가 된 사람들과 부모들에 의해 팔려가다시피 하여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객관적 자료나 당사자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일본군이나 총독부의 강제 연행의 케이스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반면, 후자의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는 불편한 진실을 우리는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위안부 할머니임을 밝힌 김학순 할머니나 현재 위안부 할머니를 대표하듯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용수 할머니도 (이 분들의 최초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에 의한 강제 연행이 아니라 가족(부모)이나 지인(친구 혹은 친구 어머니)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습니다. 안병직 서울대 교수와 정대협이 20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공동 조사한 결과에도 일본군에 의한 강제 연행에 의한 것으로 볼만한 경우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인 여성 일본군 위안부‘들 대부분이 아무 대가 없이, 인신 구속을 당하며 성노예처럼 살았다는 우리의 종래 인식도 객관적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인 여성 위안부 생활을 기록한 유일한 책, <버마전선의 위안부, 문옥주>나 위안소 관리인으로 일하며 기록했던 <위안부 관리인의 일기>를 보면, 위안부 생활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군이 작성한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 : 한국인 위안부들>에도 일본군 위안부들의 생활상이 잘 나와 있는데 여기에도 우리의 위안부에 대한 인식과 많이 다른 내용들이 나옵니다.
수입도 당시 경성(서울)의 택시 기사의 월급의 거의 10배 수준에, 적지 않은 돈을 모아 본국(조선)에 송금도 하고 외출해 쇼핑도 한 것을 알 수 있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문옥주 할머니의 위안부 경험을 전체 위안부들의 생활이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고, 미군의 심문 보고서 내용도 모든 전선에서 있었던 위안부들의 모습과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가도 받지 못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을 한 위안부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배운, 우리가 알고 있는 전반적인 위안부 생활의 이미지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위안부의 숫자도 오해가 많다고 봅니다. 정대협 등에서는 20만 명, 혹은 그 이상의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을 뒷받침만할 객관적인 자료가 없어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 20만 명 설이 만약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더 비참한 국면을 맞아야 하고 곤혹스러워집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 운영한 1937년부터 태평양전쟁이 끝난 1945년 사이 조선의 인구는 약 2,300만 명, 그 중 위안부 대상이 되는 연령의 조선인 여성이 대략 126만 명 정도로 추산합니다. 조선인 위안부가 20만 명이라고 한다면 그 나이의 조선인 여성 6명 중에 1명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위안부가 되었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딸이나 여동생, 연인들이 이렇게 많이 끌려갔는데 당시 조선인 남자들이 어떠한 저항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우리의 부모, 조부모 세대로부터 자신들이 저항했다는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습니다. 독립운동사에도 이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당시 신문에도 조선인 남성들이 위안부로 끌려가는 딸과 연인을 구하기 위해 저항했다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없습니다.
당시 조선인 남자들은 자신의 딸이, 여동생이, 연인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가 되는데 어떤 저항도 없이 가만히 당하고 보고만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이걸 인정하시겠습니까?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조선인 여성 일본군 위안부를 약 4천~6천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20만 명, 또는 그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 이야기가 믿기지 않으시지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지금부터는 위의 제 이야기들의 근거를 하나하나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제별로 정리하되, 저의 설명은 가급적 자제하고 해당하는 자료들을 링크할테니 클릭하셔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우리는 이 문제를 독점해 온 특정 세력으로부터 너무 일방적 정보만을 제공 받았고, 국수적 역사관에 사로잡힌 학계나 교육계로부터 사실과 다른 잘못된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우리가 위안부에 대해 무얼, 어떻게 잘못 알고 있는지를 개괄적으로 알려줄 수 있는 글을 먼저 링크합니다.
영화 <귀향>의 역사왜곡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7가지 오해
위의 <미디어워치> 기사는 영화 <귀향>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왜곡하여 그려낸 7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7 가지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위안부 문제의 핵심 사항이라 이 기사 하나만 읽어도 위안부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뒤에 많은 자료들을 제가 링크할 것인데 이를 모두 읽는 것이 힘드시다면 이 기사만큼은 꼭 정독해 한 번은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이영훈 교수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핵심 내용만을 담은 글도 소개합니다. 저도 이영훈 교수나 2항에서 소개하는 박유하 교수의 위안부에 대한 시각과 인식에 동의합니다.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2.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박근혜 대통령의 2심 재판장이던 김문석이 박유하 교수의 2심에서 유죄를 선고하기도 했지만,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빼고 위안부 문제를 논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아 따로 소개합니다.
현재, 박유하 교수는 정대협과 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명예훼손 고소를 당해 재판중입니다. 1심에서는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2심에서는 김문석이 유죄 선고를 해 상고중입니다.
아래에 박 교수님이 인터넷에 올려놓은 <제국의 위안부> 파일을 링크해 올립니다. 서점에서 직접 책을 구입해 읽으시면 박 교수님께 도움이 되겠지만, 이 파일을 열어서 일독해 주시는 것도 박 교수님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 문제를 객관적으로 기술해 놓고 있어 읽으시면 위안부 문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정대협 민족권력을 비판한 역작, ‘제국의 위안부’>
박 교수님이 김문석 판사의 유죄 선고 판결에 대해 입장을 밝힌 글도 아래에 링크합니다. 김문석 판사의 지적 수준, 인식 세계, 재판의 기준이 얼마나 저열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국의 위안부> 형사 2심 판결문을 읽는다(1)
<제국의 위안부> 형사 2심 판결문을 읽는다(2)
그리고 제가 박유하 교수님을 옹호하며 썼던 글도 아래에 첨부하니 한번 읽어 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머래디스 머랜과 위안부 할머니, 그리고 박유하/길벗
3. 위안부 문제를 독점한 절대 권력, 정대협
아이러니컬하게도 위안부 문제를 공식적으로 먼저 제기한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90년까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문제의식도 없었으며, 일본측에 사과나 배상을 요구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일본이 먼저 제기해 우리나라도 이 문제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얼마나 인식이 없었는지는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대표적 사회단체인 ‘정대협’의 명칭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와 정신대와는 엄연히 다른데, 우리는 초기에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정신대에 간 여중·고생을 위안부라고 혼동했던 것이죠.
문제는 이 정대협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실질적으로 경제적, 정신적인 도움을 주기보다는 특정 세력에게 장악되어 그들의 정치적 도구로 악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대협을 장악한 세력들이 반일감정을 증폭시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잘못된 정보를 국민들에게 제공하고, 또 이를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도 강제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정대협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 구성원들이 누구인지, 이들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그 정체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을 아래에 링크합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정부의 정책을 좌지우지할 뿐아니라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대협의 실체를 보시기 바랍니다.
정대협, 설립에서 20년까지 행적
정대협을 움직이는 사람들
종북혐의 제기된 정대협
묻지마 반일논란 속 정대협 뒤에 누가 있다
“명예롭게 죽으라” 현대판 열녀문 세우겠다는 위안부 운동 단체 정대협
김정란 교수 논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전개와 문제인식에 대한 연구 : 정대협의 활동을 중심으로
무토 전 주한일본대사, “정대협이 위안부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정대협은 ‘종북’이요 ‘권력’입니다. 왜냐하면 …”
정대협 중심 위안부 문제, 진실은 무엇인가?(1)
정대협 중심 위안부 문제, 진실은 무엇인가?(2)
정대협 중심 위안부 문제, 진실은 무엇인가?(3)
정대협 중심 위안부 문제, 진실은 무엇인가?(4)
4. 위안부 문제를 결정적으로 잘못 인식하게 한 ‘요시다 세이지’
제가 ‘요시다 세이지 사건’을 별도로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는 일본 공산당 출신으로 사실이 아닌 것을 날조하여 자신이 제주도에서 조선인 여성 200여 명을 잡아다 위안부로 보냈다는 반성을 담은 자기 고백록을 책으로 발간하여 떼돈을 벌었던 파렴치한입니다.
요시다는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나의 전쟁범죄-조선인 강제연행>이라는 책을 1977년, 1983년 각각 발간하여 일본 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본격 거론하게 했을 뿐아니라 한국에도 이 책이 소개되어 우리 국민들을 격분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 이 요시다가 쓴 책의 내용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대로 머리에 각인되었으며, 심지어 국제사회에서도 이 책을 토대로 일본군 위안부 관련 보고서를 작성했을 정도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 대표적인 책입니다.
일본 <아사히신문>도 요시다의 책을 근거로 16회에 걸쳐 특집 기획기사를 내보냈다가 나중에 날조라는 것이 밝혀지자 신문사 사장이 사퇴했을 정도로 그 후폭풍이 엄청났습니다.
1989년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나는 조선인을 이렇게 잡아갔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나 날조가 밝혀진 때문인지 현재는 이 책은 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조선인을 이렇게 잡아갔다> 1989년, 청계연구소
아래는 이 사건을 시간순으로 잘 정리한 글입니다.
요시다 세이지 사건을 시간순으로 잘 정리한 글
이 사건을 간단하고 쉽게 볼 수 있도록 sbs가 카드뉴스로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없으신 분은 이것만 봐도 요시다 세이지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습니다.
한·일 모두를 속인 사기극 – 요시다 세이지의 위안부 강제연행 고백 사기
5.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제가 일본의 역사 교과서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대표적인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로 알고 있는 후쇼사의 역사 교과서(중등)를 제가 본 적이 있는데 솔직히 우리 역사(국사) 교과서보다 훨씬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고, 일본 중심적 기술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보다 국제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역사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물론 이 후쇼사 교과서도 일본 중심적 기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과연 우리가 일본을 보고 역사를 왜곡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더군요. 여러분들도 기회가 되면 일본의 역사 교과서를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역사(국사) 교과서야말로 민족주의(국수주의)적 관점이고 우리에게 불리한 역사적 사건은 의도적으로 배제해 극우적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는지, 또 어떤 자료들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려던 차에 마침 미디어워치가 일본의 위키피디아에 실려 있는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를 우리말로 번역해 놓은 것이 있어 읽어보았습니다.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2)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3)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4)
비교적 한일 양국의 자료를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여러 상이한 주장들도 가감 없이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6. 위안부가 된 이유와 과정, 그리고 위안부 생활
이에 대해서는 제가 별도로 부연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아래에 링크하는 글들을 읽어 보고 각자가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버마전선 위안부 문옥주
문옥주 할머니의 위안부 생활
중일전쟁시 조선인들의 위안소 운영과 마약 밀매
한겨레신문, 정대협 산하 ‘전쟁과 여성 인권 센터‘ 조사 – 증언통계자료집 나와 “위안부 취업사기 많아”
[극강]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 12. 위안소의 여인들 1
[극강]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 12. 위안소의 여인들 2
[극강]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 12. 위안소의 여인들 3
안병직 교수의 위안부에 관한 발언
이영훈 교수 -“위안부=성노예 주장은 ‘환상’…선진국 되려면 합리적 사고해야”
7.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은 신빙성이 있을까?
위안부 할머니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는 분이 이용수 할머니입니다. 이용수 할머니의 활약상은 눈부십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자주 국내 행사장에 나타나고, 트럼프가 방문했을 때도 청와대에서 트럼프를 갑자기 껴안아 천하의 트럼프를 얼떨떨하게 만들었지요. 성주의 사드 배치 반대 집회에서 미국을 적나라하게 욕해대던 이용수 할머니가 트럼프를 웃으며 덥석 안는 모습에 제가 도리어 민망해지더군요.
이용수 할머니는 민주당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로도 출마하고, 정대협과 함께 각종 정치적 사안에 개입하지 않는 곳이 없지요. 자신의 위안부 경력을 포함한 일대기가 영화(아이 캔 스피크)로 나오기도 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유명인이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용수 할머니의 위안부 증언에 대해 일부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의 최초 증언과 그 이후의 증언이 일관성이 없고 객관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실 이용수 할머니의 2000년 이후의 증언은 신빙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래에 이용수 할머니의 시기별 증언을 소개할테니 여러분들도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을 믿을 수 있는지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1)
‘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2)
‘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3)
위안부를 자처하는 이용수 할머니 간단 분석
8. 위안부 문제와 관련 우리 학계와 언론의 왜곡 사례
1)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의 ‘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학살’ 주장은 사실인가?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는 일본군이 위안부를 학살하는 영상기록을 발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연합뉴스, 일본군의 조선인 위안부 학살 있었다…영상기록 최초 발굴
영상을 발굴했다는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일본 정부가 일본군의 위안부 학살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전쟁 말기 조선인 위안부가 처했던 상황과 실태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의미를 부여했고, 정진성 서울대 교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 이후 세계 이곳저곳에서 깊이 묻힌 자료들이 발굴되고 있다”며 “이 자료들이 할머니들의 증언과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상을 최초에 발굴했다는 이들의 말과 주장들이 사실일까요? 이들의 발표가 있고 바로 국내 학계에서 반론이 제기되었고, 일본에서도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며 반박했습니다.
아래는 국내 학계(이우연, 박유하)와 일본 신문(야에야마닛포, 유칸후지)들이 반론한 글과 기사입니다.
중국서 위안부 학살설 신빙성 없어, 강성현 교수 발표는 허위
日 야에야마닛포, “‘위안부 학살’ 근거 없다…중국 사료 직접 확인”
〝慰安婦虐殺〟根拠なし 奥氏、中国で史料確認
일, 유칸후지, 한국 반일좌파가 공개한 ‘위안부 학살 영상’ 반박 칼럼 게재
『慰安婦虐殺記録』に大疑義 「新発見ではない」ジャーナリスト・石井孝明氏緊急寄稿
<위안부 학살 영상>이라는 견강부회(牽强附會)
이우연 위원의 ‘위안부 학살’ 영상의 왜곡에 대한 반박(1)
이우연 위원의 ‘위안부 학살’ 영상의 왜곡에 대한 반박(2)
이우연 위원의 ‘위안부 학살’ 영상의 왜곡에 대한 반박(3)
박유하 교수의 반박
여러분들은 이 자료들을 읽어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일본군이 위안부를 학살하는 영상자료를 발굴했다는 강성현과 정진성은 최소한의 학자적 양심도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일본에서 오래 전에 발굴한 자료를 마치 자신들이 최초로 발견한 것처럼 주장하고, 그 자료를 다른 자료들과 짜깁기하여 자신들의 주장에 짜 맞추는 반지성적 행위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이런 자들이야말로 반일감정에 편승하여 ‘위안부 문제’를 이용해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곡학아세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2) 미군의 위안부 포로 심문 보고서를 왜곡한 뉴시스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는 것은 학계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학계보다 더 위안부 문제를 왜곡 보도하는 곳은 언론이지요. 아래에 언론의 왜곡 보도 사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뉴시스 – ‘미군 韓위안부 20명 직접 심문’ 1944년 日전범문서
위 뉴시스의 보도는 미군의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 내용 중에 일부만을 취사 선택하여 왜곡하였습니다.
뉴시스는 “위안소는 군대가 주도한 유례없는 인신매매 현장이었고, ‘위안부 소녀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했으며 빚을 진 부모를 위해 몇백엔의 선급금을 받고 해외의 새로운 생활을 꿈꾸며 배에 몸을 실었다. 이들은 군기지에 마련된 위안소에서 최소 하루 12시간 이상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고 공식적으로 쉬는 날도 없었다.”고 보도했습니다. 과연 뉴시스의 말대로 미군의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에 그런 내용이 있을까요?
아래는 뉴시스의 보도를 반박한 미디어워치 기사입니다. 그리고 미군의 심문 보고서 49호를 우리 말로 번역한 전문도 첨부합니다.
미군 위안부 포로심문 보고서 왜곡한 뉴시스
[전문번역]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 : 한국인 위안부들
반일감정을 부추키기 위한 왜곡 사례들, 언론의 반일 날조 보도
얼마나 우리 언론이 불성실한지, 그리고 왜곡이 심한지 확인하셨는지요?
위안부 문제 뿐아니라 일제시대의 사건들이나 일본과 관계된 일들에 대해 우리나라 학계와 언론들은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기보다는 감정적 주장으로 국민들을 오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예술문화계에도 만연합니다. 특히 영화계가 심각합니다.
9. 우리나라 영화들에 나타나는 역사 왜곡
1) 영화 ‘동주’
영화 ‘동주’의 반일날조 역사왜곡 … 후쿠오카 감옥에서 1800명이 살해됐다?
이승엽 교수의 페이스북, 1800명 살해설은 날조
대일본제국 사법성 자료
2) 영화 ‘군함도’
먼저 제가 쓴 ‘군함도’ 비판 글도 아래에 첨부합니다.
또 하나의 역사 왜곡 영화, ‘군함도’ by 길벗
미디어워치가 자세하게 영화 ‘군함도’가 왜곡한 부분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군함도논란①] “군함도에는 조선인 전용 유곽이 있었다”
[군함도논란②] “사람 있으면 석탄 더 나오는데 죽였겠냐”
[군함도논란③] 사진 조작의 진실…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다”
일제시대 ‘징용’에 대한 연구 자료들을 볼 수 있는 글과 동영상을 링크합니다.
“일제 징용노동 문제 과장됐다” 한국인 연구자 논문, 일본 최고 권위 연구기관 게재
낙성대연구소-전시기 일본의 조선인 노무동원과 탄광의 노동환경
낙성대연구소-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 炭·鑛夫의 임금과 민족간 격차
‘군함도’ 역사왜곡, 위안부 영화 ‘귀향’과 복사판? 넘실대는 ‘반일민족주의’
일제시대 말, 한 일본인 탄광직원의 증언을 전한 산케이신문
“우민화에 기여하는 동상 포퓰리즘은 이제 그만”
日 산케이, “징용노동자 관련 한국의 MBC 방송사가 사실왜곡”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 7. 노예 기억의 정치
3) 영화 <대장 김창수>
김구가 일본 민간인을 살해한 사건(‘치하포 사건)을 미화한 영화 ’대장 김창수‘를 비판한 제 글입니다.
살인강도인가, 의인인가? <대장 김창수>에 묻는다
10. 기타 자료들
제1회 위안부기림일을 맞아 정대협과 할머니들에게 진실을 요구한다
산케이, 위안부 문제 왜곡 배후 북한
문재인 3.1절 기념사… 역사전문가들, “북한 날조 자료 인용했나”
김구의 유령’이 이 나라 상공을 배회하고 있다
이상의 제 이야기에 충격을 받으셨습니까? 제가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처음에는 모두 제 이야기가 사실일 수 없다고 흥분하며 인정하지 않더군요. 나중에 저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는 충격, 좌절, 분노, 실망, 배신감, 증오, 불신이 담긴 복잡한 표정을 보였습니다.
불편한 진실은 말 그대로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우리를 괴롭게 만듭니다. 하지만 불편하고 괴롭더라도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불편한 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면 그 고통은 일시적이지만 그것을 회피하면 영원히 우리 삶이 뒤틀려질 수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제 글에 대한 반론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단, 반론을 제기하실 경우, 그 근거를 확실히 밝혀주시고, 자신의 논리에 맞는 정황들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다른 자료들이 있으면 함께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2018.08.28.)
강성현, 군함도, 대안언론, 대장 김창수, 무토 대사, 문옥주, 미군의 위안부 포로 심문 보고서, 미디어워치, 박유하, 버마전선, 서울대 인권센터, 서울시, 영화 귀향, 영화 동주, 왜곡, 요시다 세이지, 위안부, 위안부 학살, 이영훈, 이용수 할머니, 이우연, 정대협, 제3의길, 제국의 위안부, 조선인 강제연행, 종북, 중일전쟁, 현대판 열녀문
¶글쓴이 : 길벗
-당시 경성 택시기사 월급의 거의 10배 수입. 돈 모아 조선에 송금도 하고 외출해서 쇼핑도
-정대협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실질적 도움 주기보다는 특정세력의 정치적도구로 악용돼
-이용수 할머니의 최초 증언과 이후의 증언에 일관성 없고 객관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아
위안부 문제에는 너무 많은 왜곡과 오해가 개입하고 있다.
독도, 간도에 이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일반 국민들은 일본 위안부로 종사한 대부분의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 군인(헌병)이나 총독부에 의해 꽃다운 나이에 강제로 연행 당해서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일본군의 성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무런 댓가도 받지 못하고 비참한 노예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본군(헌병)이나 총독부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위안부가 된 사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조선인이나 일본인 포주(업자)들에 의해 (돈을 많이 벌게 해 준다는 꾀임으로) 유괴, 유인되어 위안부가 된 사람들과 부모들에 의해 팔려가다시피 하여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객관적 자료나 당사자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일본군이나 총독부의 강제 연행의 케이스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반면, 후자의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는 불편한 진실을 우리는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위안부 할머니임을 밝힌 김학순 할머니나 현재 위안부 할머니를 대표하듯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이용수 할머니도 (이 분들의 최초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에 의한 강제 연행이 아니라 가족(부모)이나 지인(친구 혹은 친구 어머니)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습니다. 안병직 서울대 교수와 정대협이 20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공동 조사한 결과에도 일본군에 의한 강제 연행에 의한 것으로 볼만한 경우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인 여성 일본군 위안부‘들 대부분이 아무 대가 없이, 인신 구속을 당하며 성노예처럼 살았다는 우리의 종래 인식도 객관적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인 여성 위안부 생활을 기록한 유일한 책, <버마전선의 위안부, 문옥주>나 위안소 관리인으로 일하며 기록했던 <위안부 관리인의 일기>를 보면, 위안부 생활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군이 작성한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 : 한국인 위안부들>에도 일본군 위안부들의 생활상이 잘 나와 있는데 여기에도 우리의 위안부에 대한 인식과 많이 다른 내용들이 나옵니다.
수입도 당시 경성(서울)의 택시 기사의 월급의 거의 10배 수준에, 적지 않은 돈을 모아 본국(조선)에 송금도 하고 외출해 쇼핑도 한 것을 알 수 있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문옥주 할머니의 위안부 경험을 전체 위안부들의 생활이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고, 미군의 심문 보고서 내용도 모든 전선에서 있었던 위안부들의 모습과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가도 받지 못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을 한 위안부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배운, 우리가 알고 있는 전반적인 위안부 생활의 이미지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위안부의 숫자도 오해가 많다고 봅니다. 정대협 등에서는 20만 명, 혹은 그 이상의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을 뒷받침만할 객관적인 자료가 없어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 20만 명 설이 만약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더 비참한 국면을 맞아야 하고 곤혹스러워집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 운영한 1937년부터 태평양전쟁이 끝난 1945년 사이 조선의 인구는 약 2,300만 명, 그 중 위안부 대상이 되는 연령의 조선인 여성이 대략 126만 명 정도로 추산합니다. 조선인 위안부가 20만 명이라고 한다면 그 나이의 조선인 여성 6명 중에 1명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위안부가 되었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딸이나 여동생, 연인들이 이렇게 많이 끌려갔는데 당시 조선인 남자들이 어떠한 저항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우리의 부모, 조부모 세대로부터 자신들이 저항했다는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습니다. 독립운동사에도 이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당시 신문에도 조선인 남성들이 위안부로 끌려가는 딸과 연인을 구하기 위해 저항했다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없습니다.
당시 조선인 남자들은 자신의 딸이, 여동생이, 연인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가 되는데 어떤 저항도 없이 가만히 당하고 보고만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이걸 인정하시겠습니까?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조선인 여성 일본군 위안부를 약 4천~6천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20만 명, 또는 그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 이야기가 믿기지 않으시지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지금부터는 위의 제 이야기들의 근거를 하나하나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제별로 정리하되, 저의 설명은 가급적 자제하고 해당하는 자료들을 링크할테니 클릭하셔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우리는 이 문제를 독점해 온 특정 세력으로부터 너무 일방적 정보만을 제공 받았고, 국수적 역사관에 사로잡힌 학계나 교육계로부터 사실과 다른 잘못된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우리가 위안부에 대해 무얼, 어떻게 잘못 알고 있는지를 개괄적으로 알려줄 수 있는 글을 먼저 링크합니다.
영화 <귀향>의 역사왜곡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7가지 오해
위의 <미디어워치> 기사는 영화 <귀향>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왜곡하여 그려낸 7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7 가지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위안부 문제의 핵심 사항이라 이 기사 하나만 읽어도 위안부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뒤에 많은 자료들을 제가 링크할 것인데 이를 모두 읽는 것이 힘드시다면 이 기사만큼은 꼭 정독해 한 번은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이영훈 교수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핵심 내용만을 담은 글도 소개합니다. 저도 이영훈 교수나 2항에서 소개하는 박유하 교수의 위안부에 대한 시각과 인식에 동의합니다.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2.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박근혜 대통령의 2심 재판장이던 김문석이 박유하 교수의 2심에서 유죄를 선고하기도 했지만,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빼고 위안부 문제를 논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아 따로 소개합니다.
현재, 박유하 교수는 정대협과 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명예훼손 고소를 당해 재판중입니다. 1심에서는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2심에서는 김문석이 유죄 선고를 해 상고중입니다.
아래에 박 교수님이 인터넷에 올려놓은 <제국의 위안부> 파일을 링크해 올립니다. 서점에서 직접 책을 구입해 읽으시면 박 교수님께 도움이 되겠지만, 이 파일을 열어서 일독해 주시는 것도 박 교수님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 문제를 객관적으로 기술해 놓고 있어 읽으시면 위안부 문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정대협 민족권력을 비판한 역작, ‘제국의 위안부’>
박 교수님이 김문석 판사의 유죄 선고 판결에 대해 입장을 밝힌 글도 아래에 링크합니다. 김문석 판사의 지적 수준, 인식 세계, 재판의 기준이 얼마나 저열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국의 위안부> 형사 2심 판결문을 읽는다(1)
<제국의 위안부> 형사 2심 판결문을 읽는다(2)
그리고 제가 박유하 교수님을 옹호하며 썼던 글도 아래에 첨부하니 한번 읽어 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머래디스 머랜과 위안부 할머니, 그리고 박유하/길벗
3. 위안부 문제를 독점한 절대 권력, 정대협
아이러니컬하게도 위안부 문제를 공식적으로 먼저 제기한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90년까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문제의식도 없었으며, 일본측에 사과나 배상을 요구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일본이 먼저 제기해 우리나라도 이 문제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얼마나 인식이 없었는지는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대표적 사회단체인 ‘정대협’의 명칭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와 정신대와는 엄연히 다른데, 우리는 초기에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정신대에 간 여중·고생을 위안부라고 혼동했던 것이죠.
문제는 이 정대협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실질적으로 경제적, 정신적인 도움을 주기보다는 특정 세력에게 장악되어 그들의 정치적 도구로 악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대협을 장악한 세력들이 반일감정을 증폭시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잘못된 정보를 국민들에게 제공하고, 또 이를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도 강제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정대협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 구성원들이 누구인지, 이들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그 정체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을 아래에 링크합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정부의 정책을 좌지우지할 뿐아니라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대협의 실체를 보시기 바랍니다.
정대협, 설립에서 20년까지 행적
정대협을 움직이는 사람들
종북혐의 제기된 정대협
묻지마 반일논란 속 정대협 뒤에 누가 있다
“명예롭게 죽으라” 현대판 열녀문 세우겠다는 위안부 운동 단체 정대협
김정란 교수 논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전개와 문제인식에 대한 연구 : 정대협의 활동을 중심으로
무토 전 주한일본대사, “정대협이 위안부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정대협은 ‘종북’이요 ‘권력’입니다. 왜냐하면 …”
정대협 중심 위안부 문제, 진실은 무엇인가?(1)
정대협 중심 위안부 문제, 진실은 무엇인가?(2)
정대협 중심 위안부 문제, 진실은 무엇인가?(3)
정대협 중심 위안부 문제, 진실은 무엇인가?(4)
4. 위안부 문제를 결정적으로 잘못 인식하게 한 ‘요시다 세이지’
제가 ‘요시다 세이지 사건’을 별도로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는 일본 공산당 출신으로 사실이 아닌 것을 날조하여 자신이 제주도에서 조선인 여성 200여 명을 잡아다 위안부로 보냈다는 반성을 담은 자기 고백록을 책으로 발간하여 떼돈을 벌었던 파렴치한입니다.
요시다는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나의 전쟁범죄-조선인 강제연행>이라는 책을 1977년, 1983년 각각 발간하여 일본 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본격 거론하게 했을 뿐아니라 한국에도 이 책이 소개되어 우리 국민들을 격분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 이 요시다가 쓴 책의 내용에 의해 형성되었고 그대로 머리에 각인되었으며, 심지어 국제사회에서도 이 책을 토대로 일본군 위안부 관련 보고서를 작성했을 정도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 대표적인 책입니다.
일본 <아사히신문>도 요시다의 책을 근거로 16회에 걸쳐 특집 기획기사를 내보냈다가 나중에 날조라는 것이 밝혀지자 신문사 사장이 사퇴했을 정도로 그 후폭풍이 엄청났습니다.
1989년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나는 조선인을 이렇게 잡아갔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나 날조가 밝혀진 때문인지 현재는 이 책은 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조선인을 이렇게 잡아갔다> 1989년, 청계연구소
아래는 이 사건을 시간순으로 잘 정리한 글입니다.
요시다 세이지 사건을 시간순으로 잘 정리한 글
이 사건을 간단하고 쉽게 볼 수 있도록 sbs가 카드뉴스로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없으신 분은 이것만 봐도 요시다 세이지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습니다.
한·일 모두를 속인 사기극 – 요시다 세이지의 위안부 강제연행 고백 사기
5.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제가 일본의 역사 교과서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대표적인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로 알고 있는 후쇼사의 역사 교과서(중등)를 제가 본 적이 있는데 솔직히 우리 역사(국사) 교과서보다 훨씬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고, 일본 중심적 기술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보다 국제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역사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물론 이 후쇼사 교과서도 일본 중심적 기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과연 우리가 일본을 보고 역사를 왜곡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더군요. 여러분들도 기회가 되면 일본의 역사 교과서를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역사(국사) 교과서야말로 민족주의(국수주의)적 관점이고 우리에게 불리한 역사적 사건은 의도적으로 배제해 극우적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는지, 또 어떤 자료들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려던 차에 마침 미디어워치가 일본의 위키피디아에 실려 있는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를 우리말로 번역해 놓은 것이 있어 읽어보았습니다.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2)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3)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4)
비교적 한일 양국의 자료를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여러 상이한 주장들도 가감 없이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6. 위안부가 된 이유와 과정, 그리고 위안부 생활
이에 대해서는 제가 별도로 부연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아래에 링크하는 글들을 읽어 보고 각자가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버마전선 위안부 문옥주
문옥주 할머니의 위안부 생활
중일전쟁시 조선인들의 위안소 운영과 마약 밀매
한겨레신문, 정대협 산하 ‘전쟁과 여성 인권 센터‘ 조사 – 증언통계자료집 나와 “위안부 취업사기 많아”
[극강]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 12. 위안소의 여인들 1
[극강]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 12. 위안소의 여인들 2
[극강]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 12. 위안소의 여인들 3
안병직 교수의 위안부에 관한 발언
이영훈 교수 -“위안부=성노예 주장은 ‘환상’…선진국 되려면 합리적 사고해야”
7.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은 신빙성이 있을까?
위안부 할머니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는 분이 이용수 할머니입니다. 이용수 할머니의 활약상은 눈부십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자주 국내 행사장에 나타나고, 트럼프가 방문했을 때도 청와대에서 트럼프를 갑자기 껴안아 천하의 트럼프를 얼떨떨하게 만들었지요. 성주의 사드 배치 반대 집회에서 미국을 적나라하게 욕해대던 이용수 할머니가 트럼프를 웃으며 덥석 안는 모습에 제가 도리어 민망해지더군요.
이용수 할머니는 민주당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로도 출마하고, 정대협과 함께 각종 정치적 사안에 개입하지 않는 곳이 없지요. 자신의 위안부 경력을 포함한 일대기가 영화(아이 캔 스피크)로 나오기도 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유명인이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용수 할머니의 위안부 증언에 대해 일부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의 최초 증언과 그 이후의 증언이 일관성이 없고 객관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실 이용수 할머니의 2000년 이후의 증언은 신빙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래에 이용수 할머니의 시기별 증언을 소개할테니 여러분들도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을 믿을 수 있는지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1)
‘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2)
‘종북’ 문재인 위한 ‘거짓말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3)
위안부를 자처하는 이용수 할머니 간단 분석
8. 위안부 문제와 관련 우리 학계와 언론의 왜곡 사례
1)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의 ‘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학살’ 주장은 사실인가?
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는 일본군이 위안부를 학살하는 영상기록을 발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연합뉴스, 일본군의 조선인 위안부 학살 있었다…영상기록 최초 발굴
영상을 발굴했다는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일본 정부가 일본군의 위안부 학살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전쟁 말기 조선인 위안부가 처했던 상황과 실태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의미를 부여했고, 정진성 서울대 교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 이후 세계 이곳저곳에서 깊이 묻힌 자료들이 발굴되고 있다”며 “이 자료들이 할머니들의 증언과 놀랍도록 일치한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상을 최초에 발굴했다는 이들의 말과 주장들이 사실일까요? 이들의 발표가 있고 바로 국내 학계에서 반론이 제기되었고, 일본에서도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며 반박했습니다.
아래는 국내 학계(이우연, 박유하)와 일본 신문(야에야마닛포, 유칸후지)들이 반론한 글과 기사입니다.
중국서 위안부 학살설 신빙성 없어, 강성현 교수 발표는 허위
日 야에야마닛포, “‘위안부 학살’ 근거 없다…중국 사료 직접 확인”
〝慰安婦虐殺〟根拠なし 奥氏、中国で史料確認
일, 유칸후지, 한국 반일좌파가 공개한 ‘위안부 학살 영상’ 반박 칼럼 게재
『慰安婦虐殺記録』に大疑義 「新発見ではない」ジャーナリスト・石井孝明氏緊急寄稿
<위안부 학살 영상>이라는 견강부회(牽强附會)
이우연 위원의 ‘위안부 학살’ 영상의 왜곡에 대한 반박(1)
이우연 위원의 ‘위안부 학살’ 영상의 왜곡에 대한 반박(2)
이우연 위원의 ‘위안부 학살’ 영상의 왜곡에 대한 반박(3)
박유하 교수의 반박
여러분들은 이 자료들을 읽어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일본군이 위안부를 학살하는 영상자료를 발굴했다는 강성현과 정진성은 최소한의 학자적 양심도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일본에서 오래 전에 발굴한 자료를 마치 자신들이 최초로 발견한 것처럼 주장하고, 그 자료를 다른 자료들과 짜깁기하여 자신들의 주장에 짜 맞추는 반지성적 행위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이런 자들이야말로 반일감정에 편승하여 ‘위안부 문제’를 이용해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곡학아세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2) 미군의 위안부 포로 심문 보고서를 왜곡한 뉴시스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는 것은 학계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학계보다 더 위안부 문제를 왜곡 보도하는 곳은 언론이지요. 아래에 언론의 왜곡 보도 사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뉴시스 – ‘미군 韓위안부 20명 직접 심문’ 1944년 日전범문서
위 뉴시스의 보도는 미군의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 내용 중에 일부만을 취사 선택하여 왜곡하였습니다.
뉴시스는 “위안소는 군대가 주도한 유례없는 인신매매 현장이었고, ‘위안부 소녀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했으며 빚을 진 부모를 위해 몇백엔의 선급금을 받고 해외의 새로운 생활을 꿈꾸며 배에 몸을 실었다. 이들은 군기지에 마련된 위안소에서 최소 하루 12시간 이상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고 공식적으로 쉬는 날도 없었다.”고 보도했습니다. 과연 뉴시스의 말대로 미군의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에 그런 내용이 있을까요?
아래는 뉴시스의 보도를 반박한 미디어워치 기사입니다. 그리고 미군의 심문 보고서 49호를 우리 말로 번역한 전문도 첨부합니다.
미군 위안부 포로심문 보고서 왜곡한 뉴시스
[전문번역]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호 : 한국인 위안부들
반일감정을 부추키기 위한 왜곡 사례들, 언론의 반일 날조 보도
얼마나 우리 언론이 불성실한지, 그리고 왜곡이 심한지 확인하셨는지요?
위안부 문제 뿐아니라 일제시대의 사건들이나 일본과 관계된 일들에 대해 우리나라 학계와 언론들은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기보다는 감정적 주장으로 국민들을 오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예술문화계에도 만연합니다. 특히 영화계가 심각합니다.
9. 우리나라 영화들에 나타나는 역사 왜곡
1) 영화 ‘동주’
영화 ‘동주’의 반일날조 역사왜곡 … 후쿠오카 감옥에서 1800명이 살해됐다?
이승엽 교수의 페이스북, 1800명 살해설은 날조
대일본제국 사법성 자료
2) 영화 ‘군함도’
먼저 제가 쓴 ‘군함도’ 비판 글도 아래에 첨부합니다.
또 하나의 역사 왜곡 영화, ‘군함도’ by 길벗
미디어워치가 자세하게 영화 ‘군함도’가 왜곡한 부분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군함도논란①] “군함도에는 조선인 전용 유곽이 있었다”
[군함도논란②] “사람 있으면 석탄 더 나오는데 죽였겠냐”
[군함도논란③] 사진 조작의 진실…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다”
일제시대 ‘징용’에 대한 연구 자료들을 볼 수 있는 글과 동영상을 링크합니다.
“일제 징용노동 문제 과장됐다” 한국인 연구자 논문, 일본 최고 권위 연구기관 게재
낙성대연구소-전시기 일본의 조선인 노무동원과 탄광의 노동환경
낙성대연구소-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 炭·鑛夫의 임금과 민족간 격차
‘군함도’ 역사왜곡, 위안부 영화 ‘귀향’과 복사판? 넘실대는 ‘반일민족주의’
일제시대 말, 한 일본인 탄광직원의 증언을 전한 산케이신문
“우민화에 기여하는 동상 포퓰리즘은 이제 그만”
日 산케이, “징용노동자 관련 한국의 MBC 방송사가 사실왜곡”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 7. 노예 기억의 정치
3) 영화 <대장 김창수>
김구가 일본 민간인을 살해한 사건(‘치하포 사건)을 미화한 영화 ’대장 김창수‘를 비판한 제 글입니다.
살인강도인가, 의인인가? <대장 김창수>에 묻는다
10. 기타 자료들
제1회 위안부기림일을 맞아 정대협과 할머니들에게 진실을 요구한다
산케이, 위안부 문제 왜곡 배후 북한
문재인 3.1절 기념사… 역사전문가들, “북한 날조 자료 인용했나”
김구의 유령’이 이 나라 상공을 배회하고 있다
이상의 제 이야기에 충격을 받으셨습니까? 제가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처음에는 모두 제 이야기가 사실일 수 없다고 흥분하며 인정하지 않더군요. 나중에 저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는 충격, 좌절, 분노, 실망, 배신감, 증오, 불신이 담긴 복잡한 표정을 보였습니다.
불편한 진실은 말 그대로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우리를 괴롭게 만듭니다. 하지만 불편하고 괴롭더라도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불편한 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면 그 고통은 일시적이지만 그것을 회피하면 영원히 우리 삶이 뒤틀려질 수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제 글에 대한 반론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단, 반론을 제기하실 경우, 그 근거를 확실히 밝혀주시고, 자신의 논리에 맞는 정황들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다른 자료들이 있으면 함께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2018.08.28.)
강성현, 군함도, 대안언론, 대장 김창수, 무토 대사, 문옥주, 미군의 위안부 포로 심문 보고서, 미디어워치, 박유하, 버마전선, 서울대 인권센터, 서울시, 영화 귀향, 영화 동주, 왜곡, 요시다 세이지, 위안부, 위안부 학살, 이영훈, 이용수 할머니, 이우연, 정대협, 제3의길, 제국의 위안부, 조선인 강제연행, 종북, 중일전쟁, 현대판 열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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