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애도 어머니도 참혹시 죽어간 1950년 비극 생생 : 사회 : 인터넷한겨레
어린애도 어머니도 참혹시 죽어간 1950년 비극 생생
편집 2003.08.06(수) 22:56
△ 지난 7월 24일 오전 신천박물관 안 운동장. 참관을 위해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해설강사의 말을 듣고 있다. / 신천박물관 근처에 있는 화약창고. 북한은 이곳에서 ‘400명의 어머니’와 ‘102명의 어린이’가 학살당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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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 비극’ 좌우대립설 설득력
평화, 멀지만 가야할 길
<2부>학살과 보복, 그 악순환을 넘어
2. 북한 황해도 신천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순간 뚝 멎었다. “인심 좋던 황해도 신천에서 세계의 어떤 곳에 비할 바 없는 잔혹한 학살이 자행됐다”는 해설강사의 외침이 쩡쩡 울린다.
한국전쟁 정전 50돌을 불과 3일 남긴 지난 7월24일.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에 자리잡은 ‘신천박물관’ 앞은 밀려드는 관람객들로 긴 줄이 형성돼 있었다. 관람객은 중학교 학생들부터, 직장 청년동맹 조직원, 군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을 망라하고 있었다. 몇십분 만에 박물관 정문 안으로 들어선 관람객들은 다시 박물관 운동장에 앉아 강사의 설명을 듣는다.
40대로 보이는 여 해설강사의 설명은 아래위 흑백이 선명히 대비되는 한복만큼이나 명쾌하다. “1950년 10월17일부터 같은해 12월7일까지 인민군의 일시적 후퇴 시기, 신천군에서는 당시 군 인구의 약 4분의 1인 3만5383명이 학살됐다.”
강사의 말대로 ‘신천 대학살’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유고 내전 당시의 민간인 학살 등에 비할 만큼, 그 규모가 크고 학살 내용 또한 잔인하다. ‘신천대학살’의 잔혹성에 한국전쟁 당시 전세계 여론이 떠들썩했으며 피카소는 이를 소재로 1951년 〈조선에서의 학살〉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신천대학살은 어떤 면에서 나치의 학살보다 더 비극적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이 당했는데도, 아직도 학살범이 누구인지 확정짓지 못했다. 전쟁의 당사자였던 남북한과 미국 모두가 서로 다른 시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강사의 말에 학생들 얼굴엔 긴장감이 돈다. 하지만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하다. 이제 학생들이 곧 둘러볼 전시실에는 도저히 인간이 한 일이라고 믿기 어려운 ‘만행의 흔적’이 기다리고 있다.
1관 16호실, 2관 3호실 등 2개 건물 총 19개의 전시실을 갖춘 ‘신천박물관’은 1947년 신천군 인민위원회 건물로 지어졌다. 하지만 이곳은 1950년 10월 인민군이 퇴각한 기간 동안 미군 사령부로 쓰였다. 그리고 그때 이곳을 중심으로 누군가가 잔혹한 학살을 벌였다.
사진과 그림, 그리고 총이나 머리채 등 ‘물증’들로 가득한 전시실은 말을 잊게 만든다. 얼음창고에 1200여명을 가두어 굶어죽게 하고, 여성을 능욕하고 국부에 말뚝을 박는다. 머리에 못을 박고 총창으로 눈을 도려내고, 가슴을 도려낸 뒤 가죽을 벗긴다. 물레가락으로 코를 꿰 끌고 다니고, 임신 9개월 된 임신부의 배를 가른다. 소 두 마리에 양 팔을 묶고 각각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한다. 방공호에 사람을 모아 놓고 폭발물을 던진다. 딸을 업은 어머니를 생매장하고, 다리에서 사람들을 밀어 강물에 떨어뜨린다!
하얀 웃옷에 붉은색 삼각 수건을 두른 학생들이 ‘19개 지옥’을 다 빠져나온 뒤 향하는 곳은 박물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옛 화약창고들. 창고 옆 두 개의 커다란 봉분의 비석엔 각각 ‘400 어머니묘’, ‘102 어린이묘’라고 새겨져 있다. 해설강사는 “학살자들은 아이들은 위 화약창고에, 어머니들은 아래 창고에 각각 가두었다”며 “학살자들은 절규하며 서로 찾는 아이와 어머니들을 모두 불에 태워 죽였다”고 설명한다. 사건의 진실성은 ‘불지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3명의 어린이 중 한명인 주상원(58) 할아버지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신천박물관은 53년 정전 뒤 김일성 전 주석이 학살현장을 박물관으로 만들 것을 제안한 뒤 58년 문을 열었다. 현재까지 누적 관람객 수는 모두 1400만명. 많은 관람객 숫자가 말해주듯 이곳은 북한 주민들이 반미 투쟁을 벌여나갈 수 있게 하는 ‘에너지 제공처’다. 북한에서는 학교마다, 직장마다 1년에 한차례씩 사람들을 조직해서 신천박물관을 찾고 있다.
묘향산 근처인 평안북도 구장군에 사는 로순애(30)씨는 1992년 대학 때 박물관 현장 견학을 아직도 못 잊는다. “박물관을 찾은 뒤 며칠 동안 잠을 못 잤어요. 지금도 공화국에 대한 압살정책이 극에 달해 있지만 신천을 생각하며 조그마한 환상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평안남도 남포갑문에 근무하는 최영옥(22)씨도 지난해 직장내 청년동맹 주최로 신천을 찾았다. 그는 “미국과 결산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라며 현재 미국의 태도를 “도적이 매를 드는 격”이라고 비판한다.
평양 지하철에서 근무하는 김정철(29)씨는 5년 전 군 복무 시절 중대원과 함께 신천박물관을 다녀왔다. “당시 신천군민의 4분의 1이 죽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죠. 이제 사회에 나와 직접 총을 들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것이 공화국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시 침략 조짐이 보이면 언제든지 총을 들겠습니다.”
관람을 마친 학생들을 태운 차량이 신천박물관을 떠났다. ‘잊지 말자 신천의 원한을, 살인귀들을 천백배로 복수하자’는 글귀가 학생들을 배웅한다.
‘신천’은 그 진상이 어둠 속에 묻혀 있기에 더욱 비극적이다. 학살자가 뚜렷하지 않고 이유도 선명하지 않으니 용서와 화해를 시도할 수도 없다. 또다른 비극의 씨앗이 될 원한과 복수심만 유령처럼 떠도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평양 남포 신천/
글·사진 김보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사업국장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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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 비극’ 좌우대립설 설득력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3/08/005000000200308062253088.html
△ 이북 5도민회 소속 신천군민회 등 월남자들은 이런 북한 주장에 대해 ‘과장됐다’고 말한다/ 신천박물관 해설강사가 1950년 10월에 벌어진 ‘신천대학살’의 전체규모를 설명하고 있다.
반공청년단 주도 증언…미군 묵인 가능성
미군에 의한 학살인가, 국내 좌우 대립의 상처인가
북한은 신천 대학살이 ‘해리슨’을 중대장으로 하는 미군 1개 중대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남한 내부에서는 이 주장보다 ‘좌우 이념 대립의 결과’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이런 주장은 특히 작가 황석영(60)씨가 2001년 5월 장편소설 〈손님〉을 발표하면서 크게 힘을 얻었다.
〈손님〉은 신천 대학살의 당사자로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라는 두 ‘외래 손님’에 물든 사람들을 꼽는다. 이들이 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서로 피를 보는’ 악순환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황씨는 1989년 신천을 방문한 경험과 1990년대 중반 미국 뉴욕에서 신천 학살과 관련된 사람을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신천 문제’를 소설화했다고 한다.
신천 대학살을 다룬 문화방송 〈이제는 말할 수 있다-망각의 전쟁편〉(2002년 4월 방영)도 ‘좌우 대립의 결과’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작품을 만든 조준묵 피디는 “당시 미군은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어 신천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며 “‘미군 주도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밝힌다. 그는 이어 “신천지역에 반공청년단이 꾸려지고, 이승만 정부가 북진하면서 이들을 추인했다”며 학살은 이들 반공청년단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실제로 현재 이북5도민회 산하 신천군민회에는 ‘10·13 동지회’가 꾸려져 있다. 1950년 10월13일 신천군내 반공청년들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동지회 회원인 오준식(가명·70)씨는 “신천 사건의 발단은 북한 쪽에서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당시 북한 진영이 후퇴하면서 지주 등을 예비검속으로 검거한 뒤 처형했다”며 “반공청년단 등이 이에 맞서 10월13일 봉기를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그는 “미군이 오면 빨갱이를 살려둘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보복에 나선 것”이라고 학살의 경과를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 해도 미군이 연관돼 있다는 점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당시 점령지에서 최고 명령권은 미군이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소극적으로 판단해도 학살이 자행되도록 방치했다면 이는 미군의 잘못이다.
김귀옥 성공회대 연구교수(사회학)는 이보다 한발 더 나간다. 그는 “학살에 반공청년회 등이 참여했다 해도 이들은 하수인에 불과하다”며 “상부에 있는 사람들은 미국 정보원 노릇을 하면서 미국과 연계해 그 이해에 부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김보근 사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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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 해도 미군이 연관돼 있다는 점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당시 점령지에서 최고 명령권은 미군이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소극적으로 판단해도 학살이 자행되도록 방치했다면 이는 미군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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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근 사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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