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군 사건 - 나무위키
신천군 사건
최근 수정 시각: 2018-10-29 00:48:42
분류
6.25 전쟁/전쟁범죄
1950년 사건
학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특정 사건사고 문서는 유머성 서술과 비하적인 표현이 제한되며, 사실관계를 작성할 때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시해야 합니다.
1. 개요
3. 남한 측의 인식
4. 진위 여부
5. 기타
===============
1. 개요[편집]
신천군 사건 혹은 신천대학살이라고 불린다. 이 사건은 1950년 10월 17일~12월 7일까지 6.25 전쟁 중 일어난 사건으로 황해도 신천군에서 수만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던 사건을 말한다. 학살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주동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데, 북한에서는 신천대학살이라고 부르며 미군의 홀로코스트 전쟁범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증거가 없고, 대체로 좌우익 갈등 과정에서 학살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휴전 1년 전인 1952년, 국제 사법단체로 공산주의 계열의 NGO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1]에서 북한의 요청으로 북한 지역을 돌며 ‘한반도에서의 미군범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 그 시작이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까지, 황해도 신천군에서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중위 계급의 신천 점령군 지휘관과 예하 미군 1개 중대 그리고 한국군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무려 약 3만 5천여 명,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2. 북한 측 주장[편집]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미군과 한국군이 북진하면서 미군들이 38선을 넘어와 황해도 신천군을 점령하면서 '해리슨 중위' 라는 점령군 사령관의 지시로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5,383명의 무고한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황해도 신천군에 '신천박물관'을 지어 반미 교육으로 이용하고 있다.
북한측 선전화를 찍은 사진이 있는데,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지만 정말 무서운 그림이니 주의.#
3. 남한 측의 인식[편집]
남한에서는 일반적으로 해당 사건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채 그런 거 없다거나 사실은 북한이 다 죽여놓고 우리에게 뒤집어 씌운 거임 정도로 언급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신천 의거일이라고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간략하게 공산당의 가족 처단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고, 위의 링크된 분 글에 의하면 사람 죽이는 걸 그렇게 자랑할 정도로 모골이 송연한 수준의 업적 자랑도 있었으니... 1990년대 초반 나온 <6.25와 민간항쟁>이라는 반공서적에 버젓이 나온 이야기이다. 오래된 국사 교과서에서는 신천 방공 의거로 간략하게 언급된 정도다. 검색 엔진에 신천 반공 의거나 구월산 유격대 같은 것을 넣어 보면, 적지 않은 미화 사례가 검색된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는 "신천 반공 의거" 라 하여 공산당에 대항해 싸운 유격대를 기리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이쪽 부분을 설명한 작품이 황석영의 <손님>이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마을 사람들간의 학살로 다루고 있으며, 약간 무리하게 화해와 갈등 해소를 강조하는데, 막상 미국 교포 일부에게는 미군의 학살을 은폐했다는 이유로 까인다고 한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2년 4월 21일 방송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북한 측 기록 영상 화면을 최초로 소개하였고 당시 관련자 인터뷰를 일일히 했다. 황석영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였다는 점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곳에 나온 남한에 살고 있는 당시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당시의 일을 자랑스럽게이야기하고 있다, 지하철에서 시비 거는 노인 행색으로 시비거는 게 자랑스럽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관련 논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21세기에도 1950년대식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느낌이 난다. 물론 지금 와서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엄청난 잘못이며 범죄인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그러는 측면도 없지는 않겠지만.[2]
4. 진위 여부[편집]
북한은 학살 주체를 미군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미군이라고 하기에는 앞뒤가 안 맞는다. 당시 미군은 북진하면서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었기 때문에 황해도 신천군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또한 북한이 주장하는 신천 점령군 사령관 '해리슨' 이라는 이름의 중대장은 당시 미군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명단 그 어디에도 없다. 이름만으로 따지면 미8군 부사령관 윌리엄 켈리 해리슨이 있지만 그는 신천이나 그 근방까지도 아무련 연관이 없는 인물이다[3].
더군다나 북한이 주장하는 수많은 잔학행위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점령군이 피점령인을 재미와 공포로 살해하기에는 너무나 이념적 적개심이 가득한 내용이 많다. 이를테면 강간이나 칼로 살해한다는 등은 난징대학살이나 다른 미군 범죄에서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머리에 노동당원증을 못박았다든가, 코를 꿰서 돌아다닌다든가 하는 일은 하기도 힘들고 피학살자들에 대한 증오심이 극도로 크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군&유엔군 주도 주장' 을 확증할 만한 증거는 현재까지는 전혀 없지만 학살 자체는 존재했음이 인정되며 이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설은 신천군 주민들 사이에 '좌우 대립' 격화로 우익 세력들이 학살을 주동하여 3~4만명의 좌익계열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학살 사례를 보자면 치안관리라는 명목으로 좌익 혹은 무고한 주민 학살에 나선 일이 대부분이다. 이런 걸 볼 때 마을 단위에서 일어난 우익의 학살극이 미국에 의한 학살 의혹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우군이 진격한 후 즉시 대한민국이 북한을 접수하였더라면 이렇게 처참한 피의 복수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치안대 등 민간에 방임한 탓으로 무수한 무명의 부역자 가족이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쉽게 말해 국군과 미군이 북진에만 혈안이 돼서 점령지 관리를 내팽개친 탓에 이런 헬게이트가 열렸다는 평가.
아무. 추모행사는 열리고 있지만 학살의 희생자가 아닌 '반공 의거' 때 사망한 반공주의자들을 추모하는 성격에 가깝다. 오히려 유엔군 측 자료에는 많이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겨레 21 2002년 4월 17일 405호 기사)
한국의 민정 경찰[4]이나 우익민병대, 게릴라부대 내지는 청년단에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민간인을 불법으로 처형 내지는 부상자들을 고의로 방치시켰던 건 의외로 많이 소개되었다. 1950년 황해도에서는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주민들을 학살하고 부상당한 민간인들에게 미군이 지급한 식량과 의약품도 갈취하는 반공 유격대의 만행에 격분한 영국군 정보 장교가 반공 유격대장 머리에 총을 겨누고 후에 미군 사령부에 항의한 기록도 존재한다.
이를 좀 더 구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당시 민간인 유격대나 자경단은 좌우익 할 것 없이 양 진영 모두 있었고, 좌익이 점령하면 좌익 자경단이 우익을 살해하고, 우익이 점령하면 우익 자경단이 좌익을 살해하는 등, 막장일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북청년단도 비슷하게 탄생한 부류이며, 소련과 김일성 정권 때문에 갖은 박해를 다 받다가 하루아침에 전 재산 다 날리고 좌익 민병대에 공격 받은 우익 세력의 분노와 보복극이 빚어낸 참사인 것이다. 남한의 좌익들도 미군정 이후 갖은 탄압을 받았기에 6.25 전쟁 초기에는 좌익들의 우익 학살도 많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좌우파나 사상, 국가의 숭고한 명예 그딴 거 모르는 순진한 주민들이 단순히 평소의 친분 혹은 친인척/학연 등으로 같이 묶여서 절단나는 상황이 수도 없이 많았다. 심지어 아들이나 아버지가 사병이나 장교로서 한국군으로 열심히 싸우는데도 가족이나 친척이 이렇게 학살당해 나중에 그걸 알고 절망감에 탈영[5]하거나 군을 그만두고 지금까지도 한국군에 대한 증오를 쏟는 생존자[6]도 있다. 당시 증언자들 중에는 "그때 중학교 동창 5명이 끌려갔는데, 나 빼고 나머지 애들은 지금도 행방불명됐다. 이런데 참을 수 있느냐"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넘었지만, 당시 학살과 보복 학살 때문에 동네 주민들이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져서 아직도 화해하지 않고 있는 마을이 남한에도 여럿 있다.
5. 기타[편집]
massacre in korea (한국에서의 학살)
입체파의 대표화가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대학살>도 위의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자세한 것은 파블로 피카소 항목 참조.
신천 학살에 대해 연구한 김귀옥의 논문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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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천군 사건 혹은 신천대학살이라고 불린다. 이 사건은 1950년 10월 17일~12월 7일까지 6.25 전쟁 중 일어난 사건으로 황해도 신천군에서 수만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던 사건을 말한다. 학살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주동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데, 북한에서는 신천대학살이라고 부르며 미군의 홀로코스트 전쟁범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증거가 없고, 대체로 좌우익 갈등 과정에서 학살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휴전 1년 전인 1952년, 국제 사법단체로 공산주의 계열의 NGO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1]에서 북한의 요청으로 북한 지역을 돌며 ‘한반도에서의 미군범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 그 시작이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까지, 황해도 신천군에서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중위 계급의 신천 점령군 지휘관과 예하 미군 1개 중대 그리고 한국군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무려 약 3만 5천여 명,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2. 북한 측 주장[편집]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미군과 한국군이 북진하면서 미군들이 38선을 넘어와 황해도 신천군을 점령하면서 '해리슨 중위' 라는 점령군 사령관의 지시로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5,383명의 무고한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황해도 신천군에 '신천박물관'을 지어 반미 교육으로 이용하고 있다.
북한측 선전화를 찍은 사진이 있는데,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지만 정말 무서운 그림이니 주의.#
3. 남한 측의 인식[편집]
남한에서는 일반적으로 해당 사건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채 그런 거 없다거나 사실은 북한이 다 죽여놓고 우리에게 뒤집어 씌운 거임 정도로 언급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신천 의거일이라고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간략하게 공산당의 가족 처단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고, 위의 링크된 분 글에 의하면 사람 죽이는 걸 그렇게 자랑할 정도로 모골이 송연한 수준의 업적 자랑도 있었으니... 1990년대 초반 나온 <6.25와 민간항쟁>이라는 반공서적에 버젓이 나온 이야기이다. 오래된 국사 교과서에서는 신천 방공 의거로 간략하게 언급된 정도다. 검색 엔진에 신천 반공 의거나 구월산 유격대 같은 것을 넣어 보면, 적지 않은 미화 사례가 검색된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는 "신천 반공 의거" 라 하여 공산당에 대항해 싸운 유격대를 기리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이쪽 부분을 설명한 작품이 황석영의 <손님>이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마을 사람들간의 학살로 다루고 있으며, 약간 무리하게 화해와 갈등 해소를 강조하는데, 막상 미국 교포 일부에게는 미군의 학살을 은폐했다는 이유로 까인다고 한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2년 4월 21일 방송에서 다룬 적이 있는데, 북한 측 기록 영상 화면을 최초로 소개하였고 당시 관련자 인터뷰를 일일히 했다. 황석영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였다는 점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곳에 나온 남한에 살고 있는 당시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당시의 일을 자랑스럽게이야기하고 있다, 지하철에서 시비 거는 노인 행색으로 시비거는 게 자랑스럽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관련 논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21세기에도 1950년대식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느낌이 난다. 물론 지금 와서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엄청난 잘못이며 범죄인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그러는 측면도 없지는 않겠지만.[2]
4. 진위 여부[편집]
북한은 학살 주체를 미군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미군이라고 하기에는 앞뒤가 안 맞는다. 당시 미군은 북진하면서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었기 때문에 황해도 신천군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또한 북한이 주장하는 신천 점령군 사령관 '해리슨' 이라는 이름의 중대장은 당시 미군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명단 그 어디에도 없다. 이름만으로 따지면 미8군 부사령관 윌리엄 켈리 해리슨이 있지만 그는 신천이나 그 근방까지도 아무련 연관이 없는 인물이다[3].
더군다나 북한이 주장하는 수많은 잔학행위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점령군이 피점령인을 재미와 공포로 살해하기에는 너무나 이념적 적개심이 가득한 내용이 많다. 이를테면 강간이나 칼로 살해한다는 등은 난징대학살이나 다른 미군 범죄에서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머리에 노동당원증을 못박았다든가, 코를 꿰서 돌아다닌다든가 하는 일은 하기도 힘들고 피학살자들에 대한 증오심이 극도로 크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군&유엔군 주도 주장' 을 확증할 만한 증거는 현재까지는 전혀 없지만 학살 자체는 존재했음이 인정되며 이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설은 신천군 주민들 사이에 '좌우 대립' 격화로 우익 세력들이 학살을 주동하여 3~4만명의 좌익계열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학살 사례를 보자면 치안관리라는 명목으로 좌익 혹은 무고한 주민 학살에 나선 일이 대부분이다. 이런 걸 볼 때 마을 단위에서 일어난 우익의 학살극이 미국에 의한 학살 의혹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우군이 진격한 후 즉시 대한민국이 북한을 접수하였더라면 이렇게 처참한 피의 복수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치안대 등 민간에 방임한 탓으로 무수한 무명의 부역자 가족이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쉽게 말해 국군과 미군이 북진에만 혈안이 돼서 점령지 관리를 내팽개친 탓에 이런 헬게이트가 열렸다는 평가.
아무. 추모행사는 열리고 있지만 학살의 희생자가 아닌 '반공 의거' 때 사망한 반공주의자들을 추모하는 성격에 가깝다. 오히려 유엔군 측 자료에는 많이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겨레 21 2002년 4월 17일 405호 기사)
한국의 민정 경찰[4]이나 우익민병대, 게릴라부대 내지는 청년단에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민간인을 불법으로 처형 내지는 부상자들을 고의로 방치시켰던 건 의외로 많이 소개되었다. 1950년 황해도에서는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주민들을 학살하고 부상당한 민간인들에게 미군이 지급한 식량과 의약품도 갈취하는 반공 유격대의 만행에 격분한 영국군 정보 장교가 반공 유격대장 머리에 총을 겨누고 후에 미군 사령부에 항의한 기록도 존재한다.
이를 좀 더 구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당시 민간인 유격대나 자경단은 좌우익 할 것 없이 양 진영 모두 있었고, 좌익이 점령하면 좌익 자경단이 우익을 살해하고, 우익이 점령하면 우익 자경단이 좌익을 살해하는 등, 막장일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북청년단도 비슷하게 탄생한 부류이며, 소련과 김일성 정권 때문에 갖은 박해를 다 받다가 하루아침에 전 재산 다 날리고 좌익 민병대에 공격 받은 우익 세력의 분노와 보복극이 빚어낸 참사인 것이다. 남한의 좌익들도 미군정 이후 갖은 탄압을 받았기에 6.25 전쟁 초기에는 좌익들의 우익 학살도 많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좌우파나 사상, 국가의 숭고한 명예 그딴 거 모르는 순진한 주민들이 단순히 평소의 친분 혹은 친인척/학연 등으로 같이 묶여서 절단나는 상황이 수도 없이 많았다. 심지어 아들이나 아버지가 사병이나 장교로서 한국군으로 열심히 싸우는데도 가족이나 친척이 이렇게 학살당해 나중에 그걸 알고 절망감에 탈영[5]하거나 군을 그만두고 지금까지도 한국군에 대한 증오를 쏟는 생존자[6]도 있다. 당시 증언자들 중에는 "그때 중학교 동창 5명이 끌려갔는데, 나 빼고 나머지 애들은 지금도 행방불명됐다. 이런데 참을 수 있느냐"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넘었지만, 당시 학살과 보복 학살 때문에 동네 주민들이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져서 아직도 화해하지 않고 있는 마을이 남한에도 여럿 있다.
5. 기타[편집]
massacre in korea (한국에서의 학살)
입체파의 대표화가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대학살>도 위의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자세한 것은 파블로 피카소 항목 참조.
신천 학살에 대해 연구한 김귀옥의 논문에 의하면,
남한에 살고 있는 실향민들 중에 고향 방문을 신청한 사례가 꽤 되고, 심지어 반공 청년단 등에서 활동한 이들도 있지만, 예외적으로 신천군 출신들만큼은 절대로 고향 방문 신청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7] 왜 그런지는 추가 바람.
[1]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
[2] 홍위병이나 나치 친위대 잔당들처럼 시류에 휩쓸려 만행을 저지른 자들의 상당수는 자기가 저지른 짓을 끝까지 반성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줄줄이 잡혀 들어오는 나치 독일 전범들에게 각국 사람들이 "잘못을 반성하느냐??"고 묻자 그들의 대답은 대부분 "그 시절이 자랑스럽다"는 것이었다. 다큐 영화 액트 오브 킬링 역시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3] 한 과학자 출신 탈북인은 이 사건에 대해 상당히 관심을 가진 나머지 자신의 지역으로 이사온 신천군 출신 여성에게 생활품을 뇌물 형식으로 주면서 자세히 말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여성은 "미군은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라고 했다고.
[4] 내무부 소속이 아니라 점령지에서 피점령 주민으로 구성된 자치부대.
[6] 2002년 당시 77살인 김창남(사병) 씨와 74살인 안종식(당시 소위) 씨가 증언하길, "우린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한국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그러는 조국이란 것은 보답으로 내 부모와 친척을 이렇게 빨갱이라며 죽였다. 그래서 시체조차도 집단으로 매장하거나 바다에 버려서 가묘와 추모비로 제사를 지낸다. 정말로 빨갱이라면 우린 이렇게 나서서 큰소리도 못낸다. 그분들은 그게 뭔지도 모르고 순박하게 농사짓고 살던 평범한 사람이었음에도, 그냥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빨갱이라는 증거도 그렇더라라고 할 뿐, 당시 지휘하던 이들도 증거라는 것도 제시하지 못하고 피해다닌다. 이러는데 나라사랑? 대한민국? 이럴 수 있느냐?" 라고 50년동안 참았던 울분을 쏟아부었다. 출처는 지리산 킬링필드.[7] 다만 이산가족 상봉 대상 신청자들 가운데서는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2014년 이산가족 상봉대상자 가운데 최고령자였던 강능환(당시 93세) 옹의 고향이 황해도 신천군 초리면. 1.4 후퇴 때 남하했다고. 이 당시 이산가족 상봉자 선발에서 후보자 선정이 되지 못한 최봉현(당시 80세) 옹도 신천군이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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