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김규항 (지은이)돌베개2009-04-13
----
책소개
제도권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 10여 년을 한결같이 우리 안팎의 권력을 향해 날 선 비판을 해 온 ‘B급 좌파’ 김규항. 그가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예수전>을 펴냈다. 이 책은 칼럼집이 아니라 저자가 본격적인 단행본으로 집필한 최초의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은 기독교인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진정한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 모두를 위한 것이다. 이 새로운 혁명은 사회구조적 변화뿐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을 포함한다. 김규항은 예수에게서 그 단초를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편에 서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했던 그 청년 말이다.
이 책의 중심이 되는 문제의식은 ‘과연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예수는 교리의 주인공, 교리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적으로 만들어 낸 예수가 기독교 교리의 뼈대가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책은 권력 집단으로 전락해 버린 한국 교회에서 ‘예수’를 구해내려는 시도이며,
그러나 이 책은 기독교인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진정한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 모두를 위한 것이다. 이 새로운 혁명은 사회구조적 변화뿐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을 포함한다. 김규항은 예수에게서 그 단초를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편에 서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했던 그 청년 말이다.
이 책의 중심이 되는 문제의식은 ‘과연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예수는 교리의 주인공, 교리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적으로 만들어 낸 예수가 기독교 교리의 뼈대가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책은 권력 집단으로 전락해 버린 한국 교회에서 ‘예수’를 구해내려는 시도이며,
나와 세계를 바꾸기 위한 새로운 동력을 찾아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저자의 안내를 따라 예수의 시대를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진단과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
목차
머리말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제 16 장
책속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올바로 살기 위해 고통과 헌신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삶을 즐기라고 더 많이 행복하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실은 인생의 진짜 즐거움과 진짜 행복을 좇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려 준다. 예수의 별명은 ‘먹고 마시길 즐기는 자’였다. -11쪽 - 마늘빵
목차
머리말
제 1 장
제 2 장
제 3 장
제 4 장
제 5 장
제 6 장
제 7 장
제 8 장
제 9 장
제 10 장
제 11 장
제 12 장
제 13 장
제 14 장
제 15 장
제 16 장
책속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올바로 살기 위해 고통과 헌신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삶을 즐기라고 더 많이 행복하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실은 인생의 진짜 즐거움과 진짜 행복을 좇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려 준다. 예수의 별명은 ‘먹고 마시길 즐기는 자’였다. -11쪽 - 마늘빵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무리 천하고 막돼 먹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품위 있게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악다구니를 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 반대로 1년 내내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도 충분히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굳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품위를 잃을 행동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 사람은 품위 있는 사람과 품위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과 유지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다. -59쪽 접기 - 마늘빵
운동이란 기존의 사회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운동이 갖는 숙명적인 모순은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또한 기존의 사회체제와 그 사고방식에 이미 깊이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운동하는 사람들도 운동의 외형적 성장, 즉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 조직이 커지는 것을 운동의 성장과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운동이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려면 그런 외형적 성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두 가지 위험을 수반한다. 하나는 외형적 성장과 운동의 정체성의 훼손이 비례하는 경향이다. 또 하나는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기존의 사회체제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운동의 껍데기는 커졌지만 정작 운동의 알맹이는 어느새 사라져 버린, 비대한 운동 조직이 사회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운동 조직 스스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61-62쪽 접기 - 마늘빵
평화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어떤 무작정하게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가 아니다.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평화는 바로 그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적인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평화를 위한 노력이야말로 때론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사나울 수 있다. “열혈당원 시몬”은 예수와 하느님 나라 운동에 ‘당연히’ 그런 소란스러움과 사나움이 포함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66쪽 접기 - 마늘빵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이지,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받은 양 구는 태도가 아니다. -69쪽 - 마늘빵
----
신간알림 신청
사회문화 비평가이자 교육운동가. 1998년 이래 뚜렷한 계급적 관점과 시스템의 본질에 대한 천착, 간결한 문체와 통찰력 있는 문장의 글을 써왔다.
근래에는 저술에 집중하면서 현대미술과 협업도 시도한다.
2003년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를 창간, 발행인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B급좌파》 《예수전》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등이 있다.
페이스북 /gyuhang 홈페이지 gyuhang.net
최근작 : <혁명노트>,<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김규항의 좌판> … 총 25종 (모두보기)
SNS : https://www.facebook.com/gyuhang.kim
최근작 : <혁명노트>,<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김규항의 좌판> … 총 25종 (모두보기)
SNS : https://www.facebook.com/gyuhang.kim
Editor Blog[종교] 이 '혁명가'를 보라. 김규항의 <예수전> l 2009-04-29
제3세계가 바깥에 서 있는 동안 우리는 잘 차려진 식탁에 앉아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읽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손 안에서 폭발해야 한다. -클라크 피녹창대한 결말이 아니라 작은 시작. 김규항의 <예수전>이 책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를 놓고 인문MD님과 출판사 관계자분과 3자 회담(-_-;)이 있었습니다. 김규항의 저작이니 인문사회 쪽의 독자들이...
[4월 4주] 신의 아들 혹은 기적의 혁명가를 만나다! <예수전> l 2009-04-22
예수전김규항 지음 / 돌베개"신의 아들 혹은 기적의 혁명가를 만나다"타협하지 않는 'B급 좌파' 김규항이 쓴 예수전. 마르코(마가)복음을 풀어가는 김규항의 관점은 명백하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교조적인 율법에 반대하고 기득권에 저항하는 혁명가였고, 낮은 자들과 어울리며 금욕 대신에 즐거움과 평화를 실천하는 행동가였다. 때문에 <예수전>은 교리 학...
----
출판사 제공 책소개
왜 지금 예수인가 ― 김규항, 예수의 삶을 다시 읽다
제도권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 10여 년을 한결같이 우리 안팎의 권력을 향해 날 선 비판을 해 온 ‘B급 좌파’ 김규항. 그가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예수전』을 펴냈다.(이 책은 칼럼집이 아니라 저자가 본격적인 단행본으로 집필한 최초의 책이기도 하다.) 그의 엄격한(?) 시사 칼럼들만 보아온 독자들이라면 조금은 낯설 수 있는 소재다. 요즘 같은 시국에 한가로이 ‘예수’ 타령이라니. 정치사회적 혁명의 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 아득해진 지금, 그도 별수 없이 내면의 수양이나 하기로 변심한 것일까.
그러나 이 책은 기독교인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진정한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모두를 위한 것이다. 이 새로운 혁명은 사회구조적 변화뿐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을 포함한다. 김규항은 예수에게서 그 단초를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편에 서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했던 그 청년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새로운 세상의 꿈’과 함께 찾아왔다. 개항기에 서학은 ‘새로운 세상’을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평등’과 ‘자유’의 이념을 무섭게 전염시켰다. 1970~80년대에는 이러한 흐름이 남미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서남동, 안병무 등의 민중신학론을 통해 지배적인 신학으로 유통된 바 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기독교가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이후 친미, 반공, 배타적 민족주의, 가부장주의 등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보수화했고 신도 수 1천만 명이 넘는 거대 권력으로 변신했다. 실제로 그들은 사회 여론을 형성하고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막대한 자본과 기득권으로 언론의 감시와 비판마저 무력화하는 교회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역’인 셈이다.
이 책은 권력 집단으로 전락해 버린 한국 교회에서 ‘예수’를 구해내려는 시도이며, 나와 세계를 바꾸기 위한 새로운 동력을 찾아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
저자의 안내를 따라 예수의 시대를 읽어 나가다 보면,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진단과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 잔치를 열어 혁명을 하는 사람
이 책의 중심이 되는 문제의식은 ‘과연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예수는 교리의 주인공, 교리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적으로 만들어 낸 예수가 기독교 교리의 뼈대가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수는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이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가난했다. 지배계급과 로마의 압제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예수가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고통받는 인민들과 함께하는 메시아로 예고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활동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왜 죽임을 당했는지 따위는 모조리 생략한 채, 그를 단지 교리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한다. 정말 예수는 단지 교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그 고단한 삶을 살았단 말인가? 이성으로든 신앙으로든, 예수를 ‘갈릴래아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교리 속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예수의 정체성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지표가 된다.”
이 책은 예수를 교리로 덧칠되지 않은 구체적인 인간으로 되살려 낸다. 예수는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아파하고 그들을 고통에 빠뜨린 지배계급과 사회체제에 불같이 분노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권위와 허위와 위선을 깨부수려 했다. 로마와 그에 결탁한 세력이 멋대로 독점한 성전의 권위를 대놓고 무시했다. 성전은 이미 그 신성한 의미를 잃은 지배세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했다. 하느님은 인민의 삶 속에서 인민과 직접 만나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분이라고.
예수는 심지어 로마 세금 징수업자 밑에서 일하며 온 인민의 미움을 샀던 세리를 제자로 삼기까지 했다. 예수는 세리를 로마의 앞잡이가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는 인민으로 보았다. 예수는 그런 행동을 통해 지배세력의 위선을 비판한 것이었다. 예수는 가진 자들이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하는 율법 또한 부정했다. 가난에 신음하는 인민들에게 율법이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강제 조항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거리낌 없이 세리들, 죄인들과 어울려 시끌벅적하고 유쾌한 식사를 했다. 그의 식사는 파격이었다. 하지만 예수의 그런 천박한 식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인민들은 비로소 ‘인권’을 되찾았다. 예수는 경건한 사람들의 양식이었던 단식 또한 거부했다. 예수의 별명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들과 죄인들의 친구”였다. 그는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은 바로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이웃들이라고 믿었고, 그들과 함께 잔치를 여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운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가 꿈꾼 나라 ―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가능한 ‘이웃 사랑’
예수는 세상이 바뀔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지배계급이 예수를 적대시하고 끝내 죽일 수밖에 없었던 본질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바리사이인들을 비난했던 이유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가장 교묘하게 반대했던 세력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인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양심과 양식을 갖춘 시민사회 세력’이다. 학식과 경제력에 사회의식까지 갖춘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는 그들을 꺼려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입으로는 변혁과 진보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변혁과 진보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 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인민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을 혐오하지만 양식과 윤리로 무장한 그들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를 가장 잘 알면서도 그 체제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점철된 보수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끊임없이 지적함으로써 대중들로부터 양식을 가진 지식인으로 통하는 사람들에 의해 견고하게 유지된다.
예수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했다. 저자는 이 말이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라 단정한다. 설령 정당한 방법과 노력으로 얻은 부라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기준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무소유’를 명했다. 영적 자유를 위한 “무소유의 추구는 하느님 나라의 사회구조를 이루는 근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사회의 빈곤이나 기아가 대개 식량이나 재화가 모자라서 생겼다기보다는 고르고 정당하지 못한 분배의 결과라는 것을 안다. 힘을 가진 소수가 지나치게 많이 갖고 많이 먹기 때문에 힘없는 다수가 모자라고 배고픈 것이다. 그래서 무소유의 추구, 자발적 가난의 추구는 하느님 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다. 내가 덜 가지려 할 때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갖게 된다는 것, 그래서 결국 모두 고르게 갖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가난한 사람, 즉 이미 가난하거나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뿐이다.”
기득권과 자본의 힘으로 예수를 팔아 더 큰 권력과 자본을 챙기고 있는 오늘날 보수 개신교 교회의 모습은 그래서 예수의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시민들의 수도를 자기 소유인 양 하느님께 통째로 봉헌하겠다는 한 정치인의 언행은 오늘날 교회가 예수 사상의 본질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예수의 기본 정신은 ‘이웃 사랑’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살아가면서 예수의 정신을 본받겠다고 하는 것은 그러므로 모순이라고 말한다. 예수가 자본주의와 공존할 수 없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가진 자들만을 위한 ‘악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조 안에서 예수가 말한 ‘나눔’의 사상은 구현이 불가능하다.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 사랑과 적대적인 사회체제이며, 그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사회주의 기본 정신이 예수의 이웃 사랑에 닿아 있다는 건 분명하다. 예수의 이웃 사랑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선량한 자본주의가’가 아니라 ‘특별한 사회주의자’인 것이다.”
오병이어와 치유 이적의 진정한 의미
예수가 행한 무수한 이적들은 과연 실재했던 일일까? 예수의 이적이야말로 메시아로서 예수와 기독교의 위대성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그 비과학성이야말로 기독교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는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주장들이 모두 부질없다고 일갈한다.
“그 이적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걸 입증한다고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만일 예수가 물 위를 걸은 게 사실임을 입증하면 모든 사람이 예수를 존경하고 신앙하게 되는가? 우리는 예수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술사’라서 존경하고 신앙하는 게 아니다. 그 이적에 가르침과 깨달음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 이적이 우리의 삶에 변화와 감동을 줄 수 없다면 아무리 놀랍고 신비스러운 이적이라 해도 단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병든 사람을 어루만지는 행위로써 고치는 이른바 치유 이적. 예수는 복음을 설파한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치유 이적을 행하였다. 하지만 당시엔 랍비들을 포함해 예수 말고도 치유 이적을 행하여 명성을 얻은 사람들은 많았다. 예수가 그들과 다른 점은 모든 이적들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데 있다. 그는 단 한 번도 자기가 병을 고쳤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다’고 할 뿐이었다. 치유 이적의 속뜻은 이렇다.
“예수의 치유 이적에서 치유란 물론 병을 고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인민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치유하는 것이다. 치유 이적은 인민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치유하는 것이다. 치유 이적은 인민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파괴하고 왜곡한 위선의 체제를 무너트리는 사건, 즉 인민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하느님이 그들의 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치유 이적은 그 자체로 하느님 나라의 편린이다.”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두 마리 물고기로 5,000명이 넘는 장정들을 배불리 먹였다는 ‘오병이어’ 이적은 예수의 모든 이적 가운데 부활과 더불어 가장 널리 회자된다. 사람들은 이 이적 앞에서도 과학적이냐 아니냐를 놓고 왈가왈부한다. 그것은 이적의 본질은 외면한 채 현상만을 놓고 떠드는 소리들일 뿐이다. ‘오병이어’ 이적은 우리에게 진정한 ‘나눔’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대개 나눔을 나와 내 식구가 배불리 먹고 남는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적선이나 자선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선 먼저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횡행한다. (…) 물론 당장의 적선이나 자선이 금세 굶어 죽을 사람을 살리거나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긴급한 조처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 말하자면 나눔은 세상을 ‘나눔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또 그런 변화를 위한 실천이며 행동이다. 그리고 그런 나눔의 원리로 작동되는 세상이 바로 하느님 나라다. 예수는 그 사실을 ‘오병이어의 이적’이라는 장엄하고 서정적인 광경으로 보여 준다.”
예수는 자신의 이적을 통해 사람들이 이적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믿음과 소통”을 이해하기 되길 바랐다. 하느님은 가진 자들의 편이 아니라 억압받고 무시당하는 바로 자신들의 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그것이 예수의 수많은 이적이 담고 있는 속뜻이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 ―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믿음
부활은 ‘인간’ 예수의 행적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과학적으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예수의 부활이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떠났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의 사상을 전하기 시작한 것이 그 가장 극적인 증거라고 한다.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듯, 내 삶 속에서 예수가 부활하게 함으로써 영원한 목숨을 얻을 수 있다. (…)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 이 순간 그런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권력을 얻은 후에 낮고 약한 사람들 편에 서겠다던 사람이 이 순간 스스로 권력을 잃어 낮고 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옳다는 건 알지만 현실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좀더 경제적 안정을 얻고 나서’라고 되뇌며 제 삶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던 사람이 이 순간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으로 새처럼 훌쩍 날아오른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예수는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어 고통받는 인민들과 평생 함께한 사람이었다. 예수가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잘못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행동하는 삶이었다. 예수는 부활을 통해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구현을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킬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의 부활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가 말하는 ‘믿음’이 신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의지와 행동에 거리낌 없이 참여하는 것”, 즉 “근본적으로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꿈”을 가리키는 말이다.
“꿈을 잃은 사람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듯, 이상주의가 사라진 세상, 모든 사람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 꿈꾸길 중단하고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해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세상엔 아무런 희망이 없다. (…) 예수는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비평에는 능하지만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는 한없이 무력한, 여전히 좌파를 자처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신념과 벅찬 희망이 아니라 지독한 우울과 무력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하느님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당신이 함께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2,000년 전의 예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간절히 말한다. 고단했던 사내 예수의 삶을 한 줄 한 줄 읽어 나가며 이 책의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려 하는 말도 아마 같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꿈”을 꾸자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라는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 좀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시며” 믿음을 갖게 되기를 저자는 꿈꾼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개척자이기도 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예수전을 쓰는 것처럼 그 사람의 참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저자 또한 이 책의 독자들이 각자 「마르코복음」을 다시 읽으며 저마다 ‘나의 예수전’을 써 보기를 권한다. 접기
예수, 잔치를 열어 혁명을 하는 사람
이 책의 중심이 되는 문제의식은 ‘과연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예수는 교리의 주인공, 교리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적으로 만들어 낸 예수가 기독교 교리의 뼈대가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수는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이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가난했다. 지배계급과 로마의 압제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예수가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고통받는 인민들과 함께하는 메시아로 예고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활동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왜 죽임을 당했는지 따위는 모조리 생략한 채, 그를 단지 교리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한다. 정말 예수는 단지 교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그 고단한 삶을 살았단 말인가? 이성으로든 신앙으로든, 예수를 ‘갈릴래아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교리 속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예수의 정체성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지표가 된다.”
이 책은 예수를 교리로 덧칠되지 않은 구체적인 인간으로 되살려 낸다. 예수는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아파하고 그들을 고통에 빠뜨린 지배계급과 사회체제에 불같이 분노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권위와 허위와 위선을 깨부수려 했다. 로마와 그에 결탁한 세력이 멋대로 독점한 성전의 권위를 대놓고 무시했다. 성전은 이미 그 신성한 의미를 잃은 지배세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했다. 하느님은 인민의 삶 속에서 인민과 직접 만나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분이라고.
예수는 심지어 로마 세금 징수업자 밑에서 일하며 온 인민의 미움을 샀던 세리를 제자로 삼기까지 했다. 예수는 세리를 로마의 앞잡이가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는 인민으로 보았다. 예수는 그런 행동을 통해 지배세력의 위선을 비판한 것이었다. 예수는 가진 자들이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하는 율법 또한 부정했다. 가난에 신음하는 인민들에게 율법이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강제 조항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거리낌 없이 세리들, 죄인들과 어울려 시끌벅적하고 유쾌한 식사를 했다. 그의 식사는 파격이었다. 하지만 예수의 그런 천박한 식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인민들은 비로소 ‘인권’을 되찾았다. 예수는 경건한 사람들의 양식이었던 단식 또한 거부했다. 예수의 별명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들과 죄인들의 친구”였다. 그는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은 바로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이웃들이라고 믿었고, 그들과 함께 잔치를 여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운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가 꿈꾼 나라 ―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가능한 ‘이웃 사랑’
예수는 세상이 바뀔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지배계급이 예수를 적대시하고 끝내 죽일 수밖에 없었던 본질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바리사이인들을 비난했던 이유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가장 교묘하게 반대했던 세력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인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양심과 양식을 갖춘 시민사회 세력’이다. 학식과 경제력에 사회의식까지 갖춘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는 그들을 꺼려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입으로는 변혁과 진보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변혁과 진보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 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인민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을 혐오하지만 양식과 윤리로 무장한 그들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를 가장 잘 알면서도 그 체제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점철된 보수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끊임없이 지적함으로써 대중들로부터 양식을 가진 지식인으로 통하는 사람들에 의해 견고하게 유지된다.
예수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했다. 저자는 이 말이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라 단정한다. 설령 정당한 방법과 노력으로 얻은 부라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기준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무소유’를 명했다. 영적 자유를 위한 “무소유의 추구는 하느님 나라의 사회구조를 이루는 근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사회의 빈곤이나 기아가 대개 식량이나 재화가 모자라서 생겼다기보다는 고르고 정당하지 못한 분배의 결과라는 것을 안다. 힘을 가진 소수가 지나치게 많이 갖고 많이 먹기 때문에 힘없는 다수가 모자라고 배고픈 것이다. 그래서 무소유의 추구, 자발적 가난의 추구는 하느님 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다. 내가 덜 가지려 할 때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갖게 된다는 것, 그래서 결국 모두 고르게 갖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가난한 사람, 즉 이미 가난하거나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뿐이다.”
기득권과 자본의 힘으로 예수를 팔아 더 큰 권력과 자본을 챙기고 있는 오늘날 보수 개신교 교회의 모습은 그래서 예수의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시민들의 수도를 자기 소유인 양 하느님께 통째로 봉헌하겠다는 한 정치인의 언행은 오늘날 교회가 예수 사상의 본질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예수의 기본 정신은 ‘이웃 사랑’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살아가면서 예수의 정신을 본받겠다고 하는 것은 그러므로 모순이라고 말한다. 예수가 자본주의와 공존할 수 없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가진 자들만을 위한 ‘악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조 안에서 예수가 말한 ‘나눔’의 사상은 구현이 불가능하다.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 사랑과 적대적인 사회체제이며, 그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사회주의 기본 정신이 예수의 이웃 사랑에 닿아 있다는 건 분명하다. 예수의 이웃 사랑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선량한 자본주의가’가 아니라 ‘특별한 사회주의자’인 것이다.”
오병이어와 치유 이적의 진정한 의미
예수가 행한 무수한 이적들은 과연 실재했던 일일까? 예수의 이적이야말로 메시아로서 예수와 기독교의 위대성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그 비과학성이야말로 기독교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는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주장들이 모두 부질없다고 일갈한다.
“그 이적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걸 입증한다고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만일 예수가 물 위를 걸은 게 사실임을 입증하면 모든 사람이 예수를 존경하고 신앙하게 되는가? 우리는 예수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술사’라서 존경하고 신앙하는 게 아니다. 그 이적에 가르침과 깨달음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 이적이 우리의 삶에 변화와 감동을 줄 수 없다면 아무리 놀랍고 신비스러운 이적이라 해도 단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병든 사람을 어루만지는 행위로써 고치는 이른바 치유 이적. 예수는 복음을 설파한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치유 이적을 행하였다. 하지만 당시엔 랍비들을 포함해 예수 말고도 치유 이적을 행하여 명성을 얻은 사람들은 많았다. 예수가 그들과 다른 점은 모든 이적들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데 있다. 그는 단 한 번도 자기가 병을 고쳤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다’고 할 뿐이었다. 치유 이적의 속뜻은 이렇다.
“예수의 치유 이적에서 치유란 물론 병을 고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인민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치유하는 것이다. 치유 이적은 인민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치유하는 것이다. 치유 이적은 인민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파괴하고 왜곡한 위선의 체제를 무너트리는 사건, 즉 인민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하느님이 그들의 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치유 이적은 그 자체로 하느님 나라의 편린이다.”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두 마리 물고기로 5,000명이 넘는 장정들을 배불리 먹였다는 ‘오병이어’ 이적은 예수의 모든 이적 가운데 부활과 더불어 가장 널리 회자된다. 사람들은 이 이적 앞에서도 과학적이냐 아니냐를 놓고 왈가왈부한다. 그것은 이적의 본질은 외면한 채 현상만을 놓고 떠드는 소리들일 뿐이다. ‘오병이어’ 이적은 우리에게 진정한 ‘나눔’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대개 나눔을 나와 내 식구가 배불리 먹고 남는 걸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적선이나 자선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선 먼저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횡행한다. (…) 물론 당장의 적선이나 자선이 금세 굶어 죽을 사람을 살리거나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긴급한 조처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 말하자면 나눔은 세상을 ‘나눔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또 그런 변화를 위한 실천이며 행동이다. 그리고 그런 나눔의 원리로 작동되는 세상이 바로 하느님 나라다. 예수는 그 사실을 ‘오병이어의 이적’이라는 장엄하고 서정적인 광경으로 보여 준다.”
예수는 자신의 이적을 통해 사람들이 이적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믿음과 소통”을 이해하기 되길 바랐다. 하느님은 가진 자들의 편이 아니라 억압받고 무시당하는 바로 자신들의 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그것이 예수의 수많은 이적이 담고 있는 속뜻이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 ―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믿음
부활은 ‘인간’ 예수의 행적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과학적으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예수의 부활이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떠났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의 사상을 전하기 시작한 것이 그 가장 극적인 증거라고 한다.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듯, 내 삶 속에서 예수가 부활하게 함으로써 영원한 목숨을 얻을 수 있다. (…)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 이 순간 그런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권력을 얻은 후에 낮고 약한 사람들 편에 서겠다던 사람이 이 순간 스스로 권력을 잃어 낮고 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옳다는 건 알지만 현실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좀더 경제적 안정을 얻고 나서’라고 되뇌며 제 삶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던 사람이 이 순간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으로 새처럼 훌쩍 날아오른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예수는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어 고통받는 인민들과 평생 함께한 사람이었다. 예수가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잘못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행동하는 삶이었다. 예수는 부활을 통해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구현을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킬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의 부활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가 말하는 ‘믿음’이 신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의지와 행동에 거리낌 없이 참여하는 것”, 즉 “근본적으로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꿈”을 가리키는 말이다.
“꿈을 잃은 사람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듯, 이상주의가 사라진 세상, 모든 사람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 꿈꾸길 중단하고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해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세상엔 아무런 희망이 없다. (…) 예수는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비평에는 능하지만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는 한없이 무력한, 여전히 좌파를 자처하면서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신념과 벅찬 희망이 아니라 지독한 우울과 무력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하느님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당신이 함께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2,000년 전의 예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간절히 말한다. 고단했던 사내 예수의 삶을 한 줄 한 줄 읽어 나가며 이 책의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려 하는 말도 아마 같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꿈”을 꾸자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라는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 좀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시며” 믿음을 갖게 되기를 저자는 꿈꾼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개척자이기도 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예수전을 쓰는 것처럼 그 사람의 참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저자 또한 이 책의 독자들이 각자 「마르코복음」을 다시 읽으며 저마다 ‘나의 예수전’을 써 보기를 권한다. 접기
---
북플 bookple
img
유난히 바람불고 춥더니, 꽃샘추위마저 예사롭지 않더니
봄이다.
바람이 불어도 시원하고, 우라늄이 포함된 비 맞은 땅도 촉촉한 흙내음은 상큼하다.
쌍차투쟁후 구속되어 실형살고 있는 김혁과 한상균 생각이 났다.
봄바람은 교도소 담장을 넘어가지 못한다.
습기찬 방은아직 싸늘할 것이다.
4월이라고, 이제는 날이 풀렸다고 난방을 안해줄테니 오히려 한겨울 보다 더 추울수도 있지.
이상하게 한여름에도 교도소안은 서늘하다고, 예전에 박훈이 말했었어. 정말 그래.
시간이 고이는 장소라 그래.
묶이고 감시당하는것이 은폐되어 더욱 그래. 인간에게 단절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거든.
갇혀 있는 동지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는데, 잊기 전에 보내주려고. 목록을 써둔다. 잊기전에.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나카지마 아츠시 / 다섯수레
모두다 영웅적이라고 말한 투쟁을 한상균 지부장은 진두지휘했던 사람이다.
김혁부장은 가장 가까이에서 의지가 되었을 동지이고
해외자본이 먹고 튀는 사이 수천명의 조합원들이 길거리에 내몰리게 되었으니
목숨을 걸고라고 싸워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그렇게 했다. 패했다.
그로부터 2년이 되어가는데 회사가 합의안을 지키지 않은 가운데 쌍용자동차 조합원들, 그가족들의 죽음이 중단되지 않고 있다.
모두 열넷이던가 열다섯이던가. 자살한 사람들이다.
시간이 바람처럼 흐른다해도 무엇하나 잊히기를 거부할지도 모를 일이다.
차가운 교도소 감방안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
이능과 사마천, 공자와 자로, 아츠시를 보낸다.
인간붓다 / 법륜 / 정토출판
예수전 / 김규항 / 돌베개
내가 그랬으니까.
가슴에서 찬바람이 불면 봄이와도 새롭지 않더라.
봄이 오는것도 새롭지 않으면 사는것이 지루하고 멍청해 지더라. 아무런 생각없이 잠들고 싶더라.
무엇보다 붓다와 예수는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라오.
내가 어디쯤에서 살고 있는지 붓다를 보고 예수를 보시라고, 김혁동지와 한상균동지에게 주고 싶다.
브라보 내인생 / 손문상 / 산지니
그림은 그리움이란다.
한진중공업에 맞서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동지와 여전히 삼성에 맞서 싸우는 김성환위원장
그리고 아주 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보낸다.
봄볕이 되길 바래.
팥쥐만세 2011-04-09 공감 (0) 댓글 (0)
img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무리 천하고 막돼 먹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품위 있게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악다구니를 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 반대로 1년 내내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도 충분히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굳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품위를 잃을 행동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 더보기
밭고랑 2011-02-02 공감 (1) 댓글 (0)
img
좋은 책, 고마운 책, 감사해하는 책....
밭고랑 2011-01-25 공감 (0) 댓글 (0)
더보기
마니아 읽고 싶어요 (13) 읽고 있어요 (8) 읽었어요 (163)
100자평
등록
카테고리
스포일러 포함 글 작성 유의사항
구매자 (35)
전체 (47)
공감순
예수전이 아닌 안티 예수전이다. 저자는 회개하라. 당신은 예수전을 쓸 자격이 없다 구매
낭만인생 2009-06-02 공감 (14) 댓글 (0)
Thanks to
공감
두번째탐독중..이시점에서가슴아프게다가오는구절이있다..교양도서로강추한다.. 구매
개인주의 2009-05-26 공감 (13) 댓글 (0)
Thanks to
공감
예수님의 정신을 과하게 벅차게 만나서 그 정신을 흡입합니다... 구매
샹그릴라 2009-10-06 공감 (11) 댓글 (0)
Thanks to
공감
시도는 좋았으나 깊이는 조금 부족한 듯 구매
rosaleon 2009-06-12 공감 (10) 댓글 (0)
Thanks to
공감
글쎄............ 구매
thk33 2009-08-01 공감 (9) 댓글 (0)
-----------------------
마이리뷰
img
유난히 바람불고 춥더니, 꽃샘추위마저 예사롭지 않더니
봄이다.
바람이 불어도 시원하고, 우라늄이 포함된 비 맞은 땅도 촉촉한 흙내음은 상큼하다.
쌍차투쟁후 구속되어 실형살고 있는 김혁과 한상균 생각이 났다.
봄바람은 교도소 담장을 넘어가지 못한다.
습기찬 방은아직 싸늘할 것이다.
4월이라고, 이제는 날이 풀렸다고 난방을 안해줄테니 오히려 한겨울 보다 더 추울수도 있지.
이상하게 한여름에도 교도소안은 서늘하다고, 예전에 박훈이 말했었어. 정말 그래.
시간이 고이는 장소라 그래.
묶이고 감시당하는것이 은폐되어 더욱 그래. 인간에게 단절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거든.
갇혀 있는 동지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는데, 잊기 전에 보내주려고. 목록을 써둔다. 잊기전에.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나카지마 아츠시 / 다섯수레
모두다 영웅적이라고 말한 투쟁을 한상균 지부장은 진두지휘했던 사람이다.
김혁부장은 가장 가까이에서 의지가 되었을 동지이고
해외자본이 먹고 튀는 사이 수천명의 조합원들이 길거리에 내몰리게 되었으니
목숨을 걸고라고 싸워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그렇게 했다. 패했다.
그로부터 2년이 되어가는데 회사가 합의안을 지키지 않은 가운데 쌍용자동차 조합원들, 그가족들의 죽음이 중단되지 않고 있다.
모두 열넷이던가 열다섯이던가. 자살한 사람들이다.
시간이 바람처럼 흐른다해도 무엇하나 잊히기를 거부할지도 모를 일이다.
차가운 교도소 감방안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
이능과 사마천, 공자와 자로, 아츠시를 보낸다.
인간붓다 / 법륜 / 정토출판
예수전 / 김규항 / 돌베개
내가 그랬으니까.
가슴에서 찬바람이 불면 봄이와도 새롭지 않더라.
봄이 오는것도 새롭지 않으면 사는것이 지루하고 멍청해 지더라. 아무런 생각없이 잠들고 싶더라.
무엇보다 붓다와 예수는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라오.
내가 어디쯤에서 살고 있는지 붓다를 보고 예수를 보시라고, 김혁동지와 한상균동지에게 주고 싶다.
브라보 내인생 / 손문상 / 산지니
그림은 그리움이란다.
한진중공업에 맞서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동지와 여전히 삼성에 맞서 싸우는 김성환위원장
그리고 아주 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보낸다.
봄볕이 되길 바래.
팥쥐만세 2011-04-09 공감 (0) 댓글 (0)
img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무리 천하고 막돼 먹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품위 있게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악다구니를 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 반대로 1년 내내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도 충분히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굳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품위를 잃을 행동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 더보기
밭고랑 2011-02-02 공감 (1) 댓글 (0)
img
좋은 책, 고마운 책, 감사해하는 책....
밭고랑 2011-01-25 공감 (0) 댓글 (0)
더보기
마니아 읽고 싶어요 (13) 읽고 있어요 (8) 읽었어요 (163)
100자평
등록
카테고리
스포일러 포함 글 작성 유의사항
구매자 (35)
전체 (47)
공감순
예수전이 아닌 안티 예수전이다. 저자는 회개하라. 당신은 예수전을 쓸 자격이 없다 구매
낭만인생 2009-06-02 공감 (14) 댓글 (0)
Thanks to
공감
두번째탐독중..이시점에서가슴아프게다가오는구절이있다..교양도서로강추한다.. 구매
개인주의 2009-05-26 공감 (13) 댓글 (0)
Thanks to
공감
예수님의 정신을 과하게 벅차게 만나서 그 정신을 흡입합니다... 구매
샹그릴라 2009-10-06 공감 (11) 댓글 (0)
Thanks to
공감
시도는 좋았으나 깊이는 조금 부족한 듯 구매
rosaleon 2009-06-12 공감 (10) 댓글 (0)
Thanks to
공감
글쎄............ 구매
thk33 2009-08-01 공감 (9) 댓글 (0)
-----------------------
마이리뷰
구매자 (28)
B급 좌파의 성경 읽기... 허니 가이드, 김규항 새창으로 보기 구매
김규항이 본격적으로 쓴 책으론 처음이란다.
하긴, 전에 나온 책들을 읽으면서, 김규항이 여기저기서 적었던 글들을 짜깁기해서 편 책이어서 좀 실망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에는, 전적으로 만족이다.
성경을 읽은 것이 언젠지 모르나, 김규항처럼 눈을 뜨고 읽었던 기억은 없다.
성경에서 예수가 반말을 하는 한국은 예수가 오해되기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사회(14)라는 말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요즘 예수팔아 먹고 사는 사탄들이 워낙 많아 예수님이 눈물흘리실 판국이지만, 그의 예수전은... 가장 초창기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을 통한 예수의 모습을 읽고 풀이한 책이다.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66)
예수가 살았던 시대는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었다. 제국과 유랑하는 민족의 갈등이 지극히 심하던 시대. 저항운동이 극에 달한 시대였다. 해석하는 이의 맘대로 평화를 푸는 것은 아전인수의 목적이 있으렷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대다수의 인민들이 자신의 삶이나 계급적 처지에 걸맞은 정당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당장 뒤집힐 것. 그래서 지배체제는 언제나 제 가치관을 인민들에게 주입한다. (97) 홍세화 선생 말대로, 계급을 배신하는 의식을 갖도록 의식화시키는 것.
한국 사회의 예수가, 반공 정신만이 전쟁 후의 목숨을 부지하던 시절에 목숨을 부지하는 한 요소로, 예수 믿는 사람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희한한 등식으로 이땅에 벌겋게 불지핀 것도, 예수의 계급에 걸맞지 않는 의식에 기여하게 된 일말의 스토리가 있다.
예수는 억압의 사회체제가 피억압자들의 비굴과 무기력에 힘입어 유지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인민들은, "저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다.", "하느님은 저곳에 거하시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천재 감독 이창동은 말했다. <밀양>에서...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회적 모순이 존재하는 한, 다들 세상이 좋아지고 달라졌다고 해도 어느 한 귀퉁이엔가 인간으로서 위엄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예수를 좇는 사람은 지배체제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256) 지배체제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오해와 곤경에 처하지 않으면서, 이쪽에서도 칭찬받고 저쪽에서도 존경받으면서, 예수를 좇고 있다 말하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 아, 한반도의 예수님이 교회에서 가가대소를 금치 못하실 노릇이다. 나도 가소롭게 사는 인간의 하나일 뿐이고...
불의한 사회 현실 속에서 분노와 용서는 늘 균형을 잃곤 한다.
현실에 분노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대개 용서를 모른다.
그래서 많은 경우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으로 빠져들어간다.
한편 용서를 말하는 사람들은 분노를 모른다.
그들의 분노없는 용서, 진실과 정의를 가리지 않는 무작정 용서는 불의한 현실을 덮고 그 현실에서 영화를 누리는 세력에게 봉사하게 된다.
예수는 분명히 분노하여 진실과 정의를 가리지만,
끝내 용서함으로써 증오와 보복의 고리를 끊어낸다.(189)
예수를 좇음으로써 삶의 지혜를 얻겠다는 내 얄팍한 생각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리라.
봉건 사회에 비하면, 자본주의 사회는 능력과 노력이 사람의 삶을 결정하므로 정당하다고 이야기하기 쉽다. 아니, 한국의 가진자들이 이런 논리를 늘 편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의 자본주의가 그런가... 하는 것이다. 평범한 노동자 한 명이 재벌 총수만큼 벌려면 한푼도 안 쓰고 50만년을 모아야 하는... 이것은 능력과 노력의 차이가 아니라 뜯어 고쳐야 할 <악의 구조>다.(161)... 그가 예수를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세상의 구조가 뜯어 고쳐야 할만큼 고장났을 때, 누군가가 혁명가 역할을 맡아야 하는데,
그 혁명가의 모범을 예수에게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 혁명가의 생각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하여 분노할 줄 알아야 하고,
승리한 후엔 용서함으로써 보복하지 않을 줄 아는 사랑.
예수믿고 천국갑시다.
그들을 단지 타락한 교회라고 말하는 건 잘못이다.
그들은 교회의 탈을 스고 하느님 나라와 대적하는 순수한 사탄들이다.(164) ... 더 덧붙일 말이 없다.
그 교회들은 이미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 혹은 기업이라면,
그것은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부인의 대상일 뿐이다.
예수가 '그래도 성전인데' 하며 침묵하던 사람들 앞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고 외쳤듯,
우리는 '그래도 교회인데'하며 침묵하는 사람들 앞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고 외쳐야 한다.(180)
대개 자유 민주주의로 자본주의를 착각하고, 예수적인 체제로 여기며,
사회주의는 예수와 반대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사랑과 적대적인 사회체제이며,
그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사회주의의 기본 정신이 예수의 이웃 사랑에 닿아 있는 것.
예수의 이웃 사랑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아닌,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며,
진정한 기독교인은 '선량한 자본주의자'가 아닌, <특별한 사회주의자>여야 한다는 것이 김규항이 이 책을 쓴 소론의 결말이다. (204)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멋진 돌이며 얼마나 멋진 건물입니까!"
"당신은 저 웅장한 건물을 보고 있지요?
그러나 돌 위에 돌 하나도 여기에 남아 있지 않고 허물어질 것입니다."(13:1-2)
성전은 하느님의 거처도 만민이 기도하는 집도 아니며 외세와 결탁해 인민을 억압하고 벗겨 먹는 강도들의 소굴일 뿐이며, 많은 인민들이 그 휘황함에 현혹되어 있기에 예수는 더욱 단호할 수밖에 없다.(212) 아, 더 많은 믿는 자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슬프더라도, 슬픔 속에서 극복해야 할 것을 직시할 수 있도록...
하느님이 가진 게 많은 사람, 큰 부와 명예 혹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주목하여 그들을 축복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으로 짜인 세상의 구조와 가치관을 하느님이란 가상의 대상에 <투사>했을 뿐이란 그의 말은 몸서리치게 삶의 정수리를 찌른다.(225)
꽃들을 보면, 대여섯 장의 꽃잎의 특정한 꽃잎에 특정한 점들이 쿡쿡 찍혀있다. (컴터 사정상 그림이 안 들어가는데, 한번 철쭉 이미지를 찾아 보시라.)
그 점들을 <허니 가이드>라고 하는데, 그 점들은 대개 수술의 위쪽(햇볕이 비치는 쪽) 꽃잎에 자리잡고 있다.
곤충들이 보기에, 허니 가이드는 자외선의 영향으로 번쩍번쩍 빛을 내게 되어있다고 한다.
그래서 꽃들이 한창 에너지를 붉은 빛깔에 쓰고 있을 때, 곤충들이 허니 가이드를 따라 날갯짓을 하면서 꿀을 빨아들이는 동작에 따라 그의 날개와 다리들에 수술에서 꽃가루가 묻어 암술머리에 붙게 된다고 한다. 꽃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수술과 암술들은 한결같이 허니 가이드를 따라 휘영청 구부려져 있다.
이런 것이 하느님의 섭리일 것이다.
꽃송이 하나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나가려는 모습을 보이는 그런 것.
자신의 에너지를 최고로 끌어올려 빛깔에 쓰다가, 일단 가루받이가 끝나면 시들한 색깔로 퇴색되어버리고 씨앗의 성장에 에너지를 모두 쓰는 그런 것.
인간이 조금 더 가졌다고 뽐내는 것.
조금 부족하다고 얕잡아보는 것.
건강하게 오래 살자고, 가까운 사람들부터 주워 섬기는 것.
<아군>과 <적군>으로 나눠서 아군의 피해가 없기를 바라고, 적군의 멸망을 바라는 그런 것.
이런 것이 자본주의적인 삶이라면,
자본주의야 말로 반자연적인 것이고, 반생태적인 것이고, 반인간적인 것이고, 반하느님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김규항의 허니 가이드에 따라 그 번득이는 가르침에 따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꽃가루받이도 일어날 노릇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씨앗이 영글어 가기도 할 일이다.
- 접기
글샘 2009-05-06 공감(29) 댓글(2)
Thanks to
공감
예수전 - 김규항 새창으로 보기
얼마 전 다녀온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국내에 <카모메식당>, <안경>이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요시노 이발관>이었다. 영화는 일본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는데, 이상하게도 그 마을의 남자 아이들은 모두가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오랜 전통으로, 그 마을에 사는 남자 아이들이라면 모두 예외 없이 그 전통을 따라야만 했다. 아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바가지 머리' 외에 다른 머리는 선택할 수 없었기에, 누구도 자신들이 왜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 마을에서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마을에 멋진 염색머리를 한 전학생이 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자신에게 강요되는 바가지 머리를 거부하고, 최선을 다해 저항한다. 바가지 머리는 인권에 대한 침해라며. 그제야 아이들은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우리는 왜 꼭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어야만 했던 것이지?
김규항의 <예수전>은 바가지 머리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 번도 제 스스로 의문을 가지거나 되돌아본 적이 없는, 성찰을 잊은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제발 한 번 쯤은 '왜?'라고 묻길 바란다며 다그치는, 그리고 제 스스로 몸소 저항하는 그 평화로운 마을의 전학생 같은 책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오늘날의 성도들은 자기들이 믿기에 편한 예수의 모습을 정하고, 그에 걸맞게 예수의 삶을 재규정해 나간다. 믿기 편하게, 적절히 자신들의 부를 향한 욕망을 합리화시켜주는, 제 입맛대로의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되묻는 불편한 작업은 굳이 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마몬의 신앙은 사람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조금씩 물질적인 욕망을 심어 주기에, 그리하여 행복의 기준을 돈과 물질로 천천히 바꾸어 버리기에 스스로를 해치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부'라는 것은 정당한 방법으로 쌓은 것인가의 여부를 떠나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는 한' 부끄러운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는 예수가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예수가 지배 체제에게 사형 당한 이라는 사실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또한 예수와 관련한 모든 해석들은 이 점을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당시 폭동과 살인을 가한 정치적 테러범이었던 바라빠보다 더 위협적으로 간주되던 인물이었으며, 그것은 곧 예수가 혁명적 인물이었음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는 ‘죽음으로 내 죄를 대속한 그리스도’ 즉 신학과 교리 속에 갇힌 예수만을 선택하고, 그와 다른 견해를 배척하는 것을 마치 타협 없이 예수를 섬기는 순수한 신앙의 결정체인 양 자위하고 있다. 저자는 그런 이들에게 한낱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의 생각을 전할 때도 그의 본디 생각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면서 어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부분에 있어서 자신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지 못하느냐고 물으며,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위임 받은 양 구는 태도는 하느님을 섬기는 태도가 아니라고 강하게 말한다. 예수는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 죄인, 여성, 아이들이 사람 취급 받는 세상을 관념 속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안에 만들고자 하는 이였으며, 자선과, 적선이 아닌 ‘나눔의 체제’로 변화함으로써 이러한 사회를 가능케 하기 위해 몸소 보여준 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예수가 어떤 이들에게는 퍽 새롭고 신선할 지는 모르나, 아마도 이 책을 읽을 이들의 상당수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 다뤄진 예수에 대한 견해는 이미 여러 진보적 신학 혹은 신학자들을 통해 이야기되어 왔으며, 특별히 교회의 장로가 대통령이 되어 마몬 신앙의 대표 선수를 자원하며 보여주고 있는 여러 모습에 대한 반증으로 최근 들어 더욱 대두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 운동과도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여기에 머무르지만은 않는다.
예전에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좋은 책들은 정작 그 책을 읽어야 할 사람들은 읽지 않고, 이제는 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계속 읽게 되는 것 같다고. 사실 이 책의 첫번째 타겟 독자일, 여전히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으면서 자신이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이들의 상당수는 아마도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김규항을 알고, 좋아하며, 이 책을 읽을 이들의 상당 수는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신앙이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기회가 있었던 이일 확률이 높다. 저자 역시, 경험이나 직관을 통해 이 책을 실질적으로 읽게 될 자가 누구인지를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여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사실 그들 중 일부를 향해 쓰여졌고, 더욱 힘주어 쓰여졌다.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그리 하셨듯,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회적 비판이 반드시 그 시대의 가장 악한 세력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 증명해내듯.
저자는 그들 중 상당수가 서 있을 묘한 지점을 간파해낸다.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변혁이 아닌, 변형 정도에 그치는 변화를 말하는 것, 끊임 없이 현실과 타협하는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은 대단한 변화를 일으키는 듯하지만 실은 현실의 모순을 순화하고, 정당한 분노를 누그러뜨려 진짜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알고 있지만 자본주의가 절대 극복될 것이라 믿지 않으며, 자본주의의 극복을 바란다기 보다는, 자신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반대한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확인하는 일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저자는 되지도 않는 논리로 제 탐욕과 이기심을 드러내며 자본주의를 찬미하여 인민들로부터 반감을 사는 사람들보다, 이러한 이들, 즉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지적하고 비판해 많은 인민들에게 양식을 가진 사람들로 여겨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오히려 공고히 지키고 있다며 그들을 향한 일침을 가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말하는 소위 ‘진보’ 혹은 ‘사회적 변화’라는 것 역시 실은 진정한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나의 삶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그 무엇’이 아니었는가, 철저하고 처절하게 돌아볼 일이다. 이제는 거의 전국민적 ‘교양’ 덕목의 수준으로 자리잡은 ‘쿨함’을 지향하느라 진짜 변혁을 위해 한걸음씩 내딛는 누군가의 뜨거운 시도를 촌스럽게 여기며 조소를 보내지는 않았는지. 멀리 갈 것도 없다. 사실 이것은 바로 나 자신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이야기하면서, 또 다른 방식으로 나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가지는 않았는지. 작은 행동, 작은 변화를 통해 실은 잘 살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데만 급급하지는 않았는지, 겨우 바가지 머리에서 벗어나 또 다른 형태의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 책은 끊임 없이 나를 다그치고,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젠 삶으로 그 물음들에 성실히 응답하라면서.
- 접기
웽스북스 2009-05-12 공감(24) 댓글(15)
Thanks to
공감
어바웃 예수 새창으로 보기 구매
2002년, 남양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10여년째 다니던 영등포의 민중교회와 멀어졌다.
그 교회의 전도사였다가 막 안수를 받고 부임한 젊은 여성 목사님은
성실한 척하는 나를 꽤 믿고 따랐는데 이사 후 두세 번 나갔을까,
너무 멀다는 핑계로 걸음을 딱 끊었다.
고맙게도 그는 지금도 메일로 지난주 설교말씀과 주보를 보내주고 있다.
(무슨 바쁜 일이 있었는지 오늘 아침 지난주 주보가 뒤늦게 도착했다.)
4월 마지막 수요일은 용산 참사 100일째 되는 날, 청년부와 함께 그곳을 찾았다고 한다.
경찰의 원천봉쇄로 쫓겨난 유족과 추모객들은 서울역에 모였고
4개 종단 즉 불교, 가톨릭, 기독교, 원불교가 함께 추모 예식을 진행했는데
문정현 신부님이 마이크를 잡으셨단다.
“저는 얼마 전, 용산으로 이사했습니다.
이곳에서 이들과 함께 미사 드리고 이곳을 지킬 거예요.”
이 대목을 읽는데 가슴이 뜨끔했다.
참사 현장 가까이에는 간이조문소가 차려져 있고
봄꽃 화분들이 쭈르륵 놓여 있다는 것이다.
평택 대추리의 주민이었다가 용산의 주민을 자처하는 신부님도 신부님이지만
그 화분들은 언제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함을 그나마 가끔 몇 푼의 조의금이나 성금으로 때우고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좀 덜 이기적이고 양심적인 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은밀히 하는 나.
그런데 그런 나의 허위의식과 자기기만을 여지없이 깨뜨려주는 사람과 글을
만날 때가 있으니.
김규항의 <예수전>.
종종 느끼는 거지만 그의 펜 끝은 탐욕스런 부자나 썩어빠진 이 사회의 지도층보다는,
'배울 만큼 배우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된(거부감이 들 정도는 아닌),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을 겨냥하고 추궁할 때가 많다.
'필요 이상 분열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갖는 운동'이
노선이 다른 동지를 적보다 더 미워하는 풍경이 횡행한다'(151쪽)고 쓴 그의 말이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까.
-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119쪽)
날카로운 그의 시선은 이른바 '의식 있는 (척하는) 양심적인 시민'뿐 아니라
'힘없는 피해자'로 묘사되는 '인민'을 향할 때도 가차없다.
- 인민은 다만 그 포악한 체제의 일방적 희생자로 묘사된다.
'박정희 군사 파시즘에 신음하던 인민들.'
그러나 그 시절 대개의 인민들은 '신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사람이 하는 일인데 완벽할 수야 있나'하며
제 식구들 챙기며 오순도순 살았을 뿐이다.(181쪽)
- 폭력의 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1년 내내 뺨 한 번 맞을 일 없는 사람이
점잖은 얼굴로'저항으로서 폭력도 폭력이다'라고 뇌까리는 건 참으로 몰염치한 짓이며
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폭력보다 더 끔찍한 폭력이 된다.(238쪽)
'인민들의 노동과 수고 덕에 살아가는 주제'에 겉으로는 그들을 존중하는 척 무시하며
자신의 이익과 안전만 도모하는 '인텔리들의 요사스러운 말장난' 대목에 이르면
(인텔리도 아니면서) 얼음덩어리 한 동이가 공중에서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느낌이다.
글로 만나는 그의 냉소와 독설은 때로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지만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 사람들은 더이상 꿈꾸고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이상주의적 태도는 유치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표징으로 여겨지고
(...)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상품성을 관리하고 제 자식을
더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드느라 여념없다.(머리말 중에서)
'마르코복음'을 읽고 묵상하며 쓴 책이란다.
예수가 반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00주년 신약성서>를 텍스트로 삼았다니
신선하면서도 섬세한 발상이라는 생각은 드는데
그가 옮겨 적은 존댓말 성경 구절들이 마음에 착착 감겨오지 않아 아쉬웠다.
무조건 공감하는 건 예수의 관심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는 점.
- 접기
로드무비 2009-05-15 공감(13) 댓글(8)
Thanks to
공감
답답하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
답답하다.
늘쌍 있었던 예수전..
철저히 인간적인 예수..
구원할수없는 예수
인간이기에 너무 인간적인 예수..
그런 예수가 전부라면 누가 예수를 믿을 것인가?
단지 역사의 한 인물일 뿐이다.
인간을 넘어서 신이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자신을 귀의한다.
사람들이 왜 이 책에 주목하는가?
나로서 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의 거짓된 해석으로 점철된.. 철저히 자의적 해석을 추구하는 이 책을 쉽게 용납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을 접하면서 이렇게 성경을 자의적으로 비평하고 마음대로 짜집기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놀랍기 까지하다.
성경의 예수를 따르라는 중요한 교훈은 성경의 저자들의 의도를 무시한 저자만의 고집스런 비평으로 가득차있다. 독설과 야유가 가득한 이책은 참으로 무섭기까지하다.
난 김규항을 모른다.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구하는 예수전의 내용들은 용납하기 힘든 이야기들로만 가득차있다. 즉 자기 추측으로 가득차있다는 것이다.
한예를 들어보자.
페이지21 에서 저자는 예수를 요한의 제자로 보았다. 과연 그러한 내용들이 성경에 있는가?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거짓이다.
"예수는 요한에게서 단지 세례만 받은 게 아니라 순수하고 열정적인 갈릴래아의 다른 많은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요한을 존경하고 따랐으며, 요한을 넘어서는 자신만의 사상을 세우고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의 그룹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수는 요한의 제자였던 것이다"
얼마나 황당한가? 아니 세상에 성경 어디에 예수가 요한의 제자란 말인가?
저자는 처음부터 예수를 경제적, 정치적 착취와 억압에서 해방하는 혁명가로 설명한다.
페이지22
"갈릴래아 사람들은 지배계급과 로마의 이중적 착취에 시살리며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 갔는데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갔다..... 유다 사람들에 의해 심한 차별과 천대를 받았다"
저자가 또한 얼마나 극단적으로 성경을 풀어가는가 보라.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속한 나라에 한정지으려 애쓴다.
페이지36
"그러니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말로 '새로운 세상'이며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우리의 말로 '세상을 변혁하는 운동'이며 기도는 우리의 말로 '신념을 성찰하는 시간'이기도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난 저자에게
당신은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없다
고 말한다. 더이상 무모하게 성경을 해석하지도 자신의 예수의 추종차 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
- 접기
낭만인생 2009-05-13 공감(9) 댓글(5)
Thanks to
공감
예수는 안 그랬대
이 책을 읽는 내내 '어어 이거 그야말로 너무 불온하고 저항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에 의한 문장이 많아서 욕 좀 듣겠는데', 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나는 불온한 B급 좌파입니다'라고 애저녁에 정체성을 까놓고 오랫동안 씨네21에 맥락을 같이 하는 칼럼을 썼던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이런 책을 읽으면야 역시 '자의'적으로 고른 책일테니 별 무리 없겠지만(아니, 오히려 더 쎈 걸 원했다가 실망했을 수도), 저자의 그런 경력을 잘 모른 채 유명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종교학에 대한 관심을 이유로 이 책을 선택했다면 제대로 낭패감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
아니나 다를까, 알라딘의 모님은 이런 40자평을 남겨주셨다.
"예수전이 아닌 안티 예수전이다. 저자는 회개하라. 당신은 예수전을 쓸 자격이 없다"
예로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특정 종교를 주제로 삼아 공론화 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럽고 심지어는 예의에 어긋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알고있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는 그런 터부를 깬 지 오래다. 그저, 어떤 이는 기독교를 옹호하거나 맹종하고 어떤 이는 개독교라고 하면서 미워하는 식의 이중적인 시각만 남아 있는 것 같아서(나만의 착각일런지도 모르겠다, 교회에 안나가는 처지에 실제 기독교인들의 모든 생각을 두루 접한 건 아니므로) 안타깝기도 하다.
종교란 참으로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그 지난한 역사가 말해주듯이 국가 체제나 기득권의 변화에 따라 그 존재이유를 달리하는 숙명을 지녔으니, 금기시 하는 사람들도 이해가 되고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대는 대상이 되는 것도 이해가 된다만, 기본적으로 나는, 특정 종교인이 비종교인에 대해서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모든 종교가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람은 워낙에 물질이나 육체에 집착하는 나약한 종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거다.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인간에 의해 망가지는 것을 숱하게 체험하면서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은 지 오래인 사람들이 기댈 곳은, 그러니까 종교일 '수도' 있다는 거다.
이 책 '예수전'이 다분히 김규항의 평소 소신, 그러니까 변혁에 대한 갈망, 그리고 그 변혁을 이루기 위한 각 개인의 깨우침을 도모하고자 씌여진 냄새가 나서(이게 좀 지나치면 교조적이다 싶은 구절도 있었고) 내심 기대했던 김규항의 변신(?)이나 문학적 울림은 곧 포기해야했지만서도, 아무려면 어떠냐. 수많은 학자들이나 복음을 고쳐쓴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예수'에 대하여 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김규항도 한번 그래보는게 뭐 어떠냐 말이다.
그런데 나는, 결과적으로 이 책이 재미있지가 않았다. 이 책의 대부분이 '예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너희가 알고 있는 예수랑은 다르다고!'라고 설파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를 하고 있지만, 나는 성경을 통독한 적 없으니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는 예수랑 (혹은 대다수 개신교에서 말하는 예수) 김규항이 마르코복음을 분석해서 알아낸 예수랑 얼마나 다른지 잘 알 수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겠고, 그 다름은 아직 내게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다. 저자가 말했듯이 세상에는 실제 예수는 아니지만 예수의 삶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곧 종교가 되지는 않지만 그들을 본받으면 종교가 없이도 충분히 공명하고 내 안의 영을 맑게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 '나만의 예수'가 없는 나는, 예수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보다 예수와 유사한 삶을 사는 이 시대의 (겉으로는 평범할 지도 모르는)사람이 더 궁금하다.
- 접기
치니 2009-07-30 공감(8) 댓글(2)
Thanks to
공감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