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2

알라딘: 혁명노트



알라딘: 혁명노트




혁명노트
김규항 (지은이)알마2020-02-10
































9.1100자평(12)리뷰(4)

256쪽
120*188mm
256g
편집장의 선택
"김규항 11년 만의 신작"

독특한 구성을 가장 먼저 짚어야겠다. 어떤 형식은 그 자체로 품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엔 목차가 없다. 각 페이지의 상단엔 1번부터 119번까지 숫자가 매겨져있고 그 아래에 조각 글들이 있다. 각 숫자는 두 번씩 나온다. 첫 번째 숫자에 달린 글들은 한 줄기로 이어진다. 두 번째 숫자엔 그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해설, 배경 설명, 각주가 달려있다. 이러한 구성은 가독성을 뛰어나게 높인다.

자본과 계급에 대한 글은 어렵다. 어려운 게 정상이다. 일상적 사고체계를 벗어난 사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사유엔 자신에 대한 부정까지도 포함된다. 스스로와 싸워가며 읽는 글은 힘들다. 이는 더 많은 인민(지배계급의 분명한 일원이 아닌 이상 우리는 모두 인민이다. -239쪽)이 이 주제에 접근하는 데에 분명한 장벽이 된다. 이 책의 구성은 그 장벽을 낮추고자 노력한 결과인 듯하다. 내용상의 어려움은 필연적이겠지만, 내용까지 닿는 길을 매끈하게 닦아놓았다.

책은 마르크스가 일구어놓은 사상에 큰 틀을 기대어 현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구조를 직시하게 한다. 문장은 벼린 칼같이 날카롭고 정확하게 핵심을 찌른다. 동시에 이해를 위해 필요한 현시대의 상황과 한국의 상황 등의 디테일을 채워 넣었다. 계급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 글은 자본의 노동에 대한 착취,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은폐되는 계급의 문제, 물신화를 짚는다. 설득과 직시의 긴 여정 끝에 책은 결국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혁명을 말한다. 혁명, 결국 이 목적을 위해 이 책은 가장 적합한 형식을 찾은 것이다. 혁명의 관건은 "연결"이고 촘촘한 연결을 위해서는 각성한 인민이 다수가 되어야 하며 친절한 교본은 현실 직시를 위한 좋은 길일 테니까.
- 인문 MD 김경영 (2020.02.21)


책소개
김규항은 글의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드문 사회문화 비평가다. 그동안 이른바 빨간 책에 저자로 여러 번 이름을 올려왔지만 《혁명노트》가 《예수전》 이후 11년 만에 선보이는 그의 두 번째 저작이다.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로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교육·인물·시사 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구조를 분석하며 혁명노트를 써 내려간다.

《혁명노트》는 개인적 층위에서 영성의 혁명을 넘어, 개인들의 총합을 떠받치는 근본적인 사회 시스템을 관통한다. 김규항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언제 끝날지 모를 ‘전망 없는 세계’는 자본주의가 보이는 일시적 병증이 아니라 그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국지적이거나 시의적인 관점을 넘어 자본주의의 본질과 구조를 직시하고, 자본주의 극복에 관한 나름의 견해를 마련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말한다.


목차


1
2
3
4
5
6
7
8
9
10

e


책속에서



P. 13 우리는 자본주의사회를 살아내는 일이 꽤 고단하지만 적어도 이전 사회보다는 낫다고 확신한다. 꼭 그렇진 않다. 13세기 영국을 기준으로, 농노는 주 31시간 노동했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농노는 하루 노동시간이 5시간쯤이고, 그 절반은 제 생산수단을 기반으로 자율 적으로 노동하며, 주택이 무상 제공되고, 평생 고용이 보장된 정규직으로서 주택과 고용을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접기

P. 38 착취는 자본주의에서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일이다. ‘착취 없는 세상을 바란다’는 말은 실은 ‘자본주의 폐지를 바란다’는 뜻이다.
P. 44 자본가가 이윤 추구와 축적 활동을 무한 반복하는 이유는 그가 한 인간이기 이전에 ‘인격화한 자본’이라는 데 있다. 자본가의 영혼은 자본의 영혼이다.
P. 45 인류 역사상 가장 부자라는 제프 베조스Jeff Bezos의 2019년 현재 자산은 170조원이다. 1년 임금 1억원인 사람이 제 임금을 한 푼도 안 쓰고 170만년 모아야 하는 돈이다. 베조스가 그 돈을 다 쓸 수 있는가, 혹은 그 돈이 진짜 필요한가는 자본가로서 그의 활동과 무관하다.
P. 79 임금 노예는 ‘자본 대 임금노동’이라는 자본주의 사회관계에서 좌변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다. 안정된 임금노동을 할 수 없어 자신과 가족을 자가 착취하는 사장이 된 영세 자영업자도 임금 노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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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규항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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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비평가이자 교육운동가. 1998년 이래 뚜렷한 계급적 관점과 시스템의 본질에 대한 천착, 간결한 문체와 통찰력 있는 문장의 글을 써왔다. 근래에는 저술에 집중하면서 현대미술과 협업도 시도한다. 2003년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를 창간, 발행인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B급좌파》 《예수전》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등이 있다.
페이스북 /gyuhang 홈페이지 gyuhang.net


최근작 : <혁명노트>,<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김규항의 좌판> … 총 25종 (모두보기)
SNS : https://www.facebook.com/gyuhang.kim


출판사 제공 책소개


“회의해야 할 건 혁명이 아니라,
고정관념 말고는 혁명에 대한
아무런 견해도 갖고 있지 않은
우리일 것이다.”

간결한 문체와 통찰력 있는 문장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김규항,
그가 《예수전》 이후 11년 만에 써내려간 혁명노트

혁명노트는 다음 질문으로 시작한다.
‘자본주의는 과연 계급사회인가?’

사회 시스템을 관통하는 혁명의 설계도

김규항은 글의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드문 사회문화 비평가다. 그동안 이른바 빨간 책에 저자로 여러 번 이름을 올려왔지만 《혁명노트》가 《예수전》 이후 11년 만에 선보이는 그의 두 번째 저작이다.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로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교육·인물·시사 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구조를 분석하며 혁명노트를 써 내려간다.

 《혁명노트》는 개인적 층위에서 영성의 혁명을 넘어, 개인들의 총합을 떠받치는 근본적인 사회 시스템을 관통한다. 

김규항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언제 끝날지 모를 ‘전망 없는 세계’는 자본주의가 보이는 일시적 병증이 아니라 그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국지적이거나 시의적인 관점을 넘어 자본주의의 본질과 구조를 직시하고, 자본주의 극복에 관한 나름의 견해를 마련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말한다.
《혁명노트》는 우리가 무시하거나 부정해왔던 엄연한 진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류 역사는 계급의 역사다. 인류는 계급이 만들어질 조건이 되는 한, 마치 본능의 발현인 듯 어김없이, 계급사회를 이루며 살아왔다. 계급을 철폐한 사회라 주장된 20세기 현실사회주의 사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이어 우리가 까맣게 잊고 사는 최초의 질문들, 근본적 질문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예컨대 다들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를 맞아 …’라 말할 때,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질문하라고 말한다. 집이나 부동산이 사적 소유물이어야 하는가? 거대 독점자본(재벌, 대기업)은 공유되는 게 모두에게 좋지 않은가? 자본주의하에서 기후 위기를 막을 수 있는가?… 《혁명노트》를 읽는 동안 독자는 잃어버린 질문들이 재개되고 새로운 질문들이 꼬리를 무는 걸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변화는 ‘질문의 재개’로 시작한다.”

혁명은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자 이행이다

《혁명노트》는 마르크스의 통찰들, 특히 모두가 폄하해온 ‘물신성’ 개념을 가지고 오늘 자본주의사회의 구조를 꿰뚫는다. 오늘 드러난 자본주의의 말기적 징후들이 태생부터 내재된 본질임을 훤히 비춰 보여준다. 자유주의가 극을 향해 치달을수록 ‘물신성’ 또한 자유주의에 기생하며 몸집을 불릴 수밖에 없고, 그래서 개인의 윤리의식만으로는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 이른바 ‘급진적 좌파’까지도 물신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까닭에, 독자 스스로는 안으로부터의 혁명만이 자기해방과 자유의 도정으로 들어설 수 있는 유일한 실천이라는, 불편하지만 선명한 진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혁명노트》는 마냥 불편하기만 한 책은 아니다. 그것은 문장들 속에 여전히 희망의 빛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이제 《혁명노트》는 어떻게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을 극복할 것인가를 탐구하면서 모두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살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향한다. 혁명은 새로운 사회의 건설construction이자 이행transition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는 사적 소유와 공유를 기반으로 하며, 지금의 모든 가치가 뒤집힌 세상이다. 거기엔 누구도 남을 위해 일해야 하는 ‘계급’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노트》는 “인민은 자신을 해방하는 역사의 주인이자 노예의 삶으로 밀어 넣는 역사의 주인”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자유롭지 않다면 굶거나 매 맞지 않고도 혁명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인민을 응원한다. 고대 그리스어 ‘메타노이아Metanoia’에 빗대, 예수가 하느님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것을 언명했듯 새로운 사회를 위해 합당한 투쟁과 연대를 하라고 일깨운다.

《혁명노트》, 통찰의 순간들

《혁명노트》는 오늘 자본주의사회가 풀지 못해 얽히고설킨 채 안고 살아가는 몇 가지 난제들을 넘어서며 통찰의 순간을 보여준다. ‘북유럽은 어떻게 북유럽이 되었는가’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설명하면서 혁명이 시대착오라는 견해에 대해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한 아집이라 규정하는 대목이 그렇다. “블루컬러 노동과 절대빈곤이 노동자계급을 대변하는 시대의 혁명과 오늘 혁명은 달라야 한다. 그러나 혁명의 기색이 없는 사회엔 개혁도 없다는 점은 자본주의하에선 언제나 같다”는 것이다. 

최근 좌파 포퓰리즘 역시 반복하고 있는 기존의 혁명론을 비판하는 대목도 그렇다. 인민을 선동과 동원, 집단화의 대상으로 보는 건 착오이며 인민의 자기해방이 핵심이라는 것.
포스트모더니즘과 한국 지식인 사회, 그리고 일부 지식인의 유희로서 ‘21세기 공산주의’에 대한 지적도 돋보인다. 20세기 중반에 시작된 고도 자본주의와 본격화한 물신세계의 충격 앞에 해체되고 포섭되는 서구 좌파 지식인들을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하면서, “지적 파산은 아직 회복된 적 없고 결국 최근 ‘86 문제’에서 보듯 ‘윤리‘나 ‘세대’ 차원의 논의에 머문다”고 적시한다. 이밖에도 문화산업이 예술을 대체한 상황에서 한류에 대한 분별이 긴요하다는 것, 대기업 정규직 노동과 비정규 문제에서 노동귀족은 윤리 타락이 아닌 ‘노동자의 또 다른 계급 속성’일 뿐이라는 것, 노동자계급의 고전적 형상에 집착할 때 프레카리아트를 ‘진정한 노동자계급’이라 하지만 그것은 ‘좌파 좌선 운동’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라는 것, 기본 소득이 물신성 강화에 힘을 실어주는 우파의 아이디어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끝나지 않는 잔향, 혁명의 소리

《혁명노트》는 10개의 장으로 구분된 119개의 짤막한 글들로 이루어진 책이다. 119개의 간결한 글들은 다시 해설 혹은 출처를 밝힌 글들을 거느린다. 나란히 배치된 주서사와 보조서사(해설 또는 주 형식)를 함께 읽는 것이 좋지만, 119개의 조각들을 순서 없이 읽어도 나름의 논지를 파악할 수 있는 열린 구조를 가진다.
인류의 처음부터 미래, 지구의 끝에서 끝을 아우르며 통합적이며 거대하게 전개되는 동시에 그 벼려진 펜끝은 거시적인 그림을 구성하는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을 하나하나 들추어 그 장면들 속에서 우리가 잊고 있던 최초의 질문을 들춰낸다. 독자는 그 질문들을 통해 아무 문제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던 자신의 삶 곳곳에서 균열을 보게 된다. 얼버무리고 넘어갔거나 혼동해 용인했던 지점을 손금처럼 들여다본다. 책에서 혁명은 이미 도래한 ‘새로운 사회’의 조각들로 선취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누군가 ‘새로운 사회가 정말 가능한가’ 물을 때, ‘투쟁하는 자유인’은 먼저 물을 수 있게 된다. ‘내 안에 새로운 사회가 있는가?’ 그렇게 너와 나를 넘어선 혁명의 소리는 이미 도래한 새로운 사회를 알린다. “텍스트의 내용과 형체가 차차 사라지면서 결국 그 공간의 고유한 공진주파수만 남게 된다. 본디 공간의 역할은 소리를 울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공간의 소리를 듣게 된다. 소리와 공간의 위계가 없어지고 공연자와 관객의 경계도 없어진다. 이윽고 소리는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모두의 것이 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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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게 읽겠습니다. 기다리던 책이 도착했다. 책장을 딱 한장 넘기는데, 요즘 영화 기생충을 재상영하는 가운데,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계급에 대해 공감을 넘어 현재함을 인정하는 제스처일테니까! 빨리 읽어야겠다.
dream 2020-02-14 공감 (2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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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상은 점점 가빠지고 나빠지는가. 혁명노트ㅡ멀리 보고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 뼘이라도 앞으로 나아간다.
scatter 2020-04-0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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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 한 장, 공들여 천천히 읽는다. 혁명은 지금, 여기를 돌아보는 일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선인장 2020-04-16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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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조금씩, 천천히 읽고 있다. 문장과 문장 사이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일상에서 어떤 말을 하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치열하게 생각한다. 이 책이 꿈꾸는 ‘새로운 사회’는 내 안에서 시작되어 우리가 만들어 갈 세상이라 믿기 때문이다.
6020ju 2020-04-1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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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든 읽었으면 좋겠다.
한인영 2020-04-2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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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혁명‘은 ‘안단테‘로! - 김규항의 [혁명노트]


다시, '혁명'은 '안단테'로!
- [혁명노트], 김규항, <알마>, 2020.



"연민은 자선을 낳고 분노는 싸움을 낳으며 다시 그 둘은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는 자선도 싸움도 별 소용이 없다는 깨우침을 통해 '과학적 사회주의'가 된다. 말하자면 사회주의란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는 '정서가 생략된 과학'의 문제이기도 했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인간의 존엄과 지성에 대한 모욕이며, 오늘 인류가 미래를 희망하는 일이란 바로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의 문제다... 대체 우리가 새로운 사회주의를 처음 시작할 자격을 갖지 않아야 할 어떤 이유라도 있는가. 과거의 실패가 짐스럽다면 사회주의가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임을 잊지 말고 느리게 '안단테'로 가면 된다. '안단테'라면. 우리가 혁명을 회피할 이유는 정말 적어진다. 안 그런가."
- 김규항, [B급 좌파], <혁명은 안단테로>

사회문화비평가이자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은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씨네21]에 기고한 칼럼들을 모아 [B급 좌파]로 엮은 바 있다.

'386' 세대로 불렸던 지식인 엘리트들이 80년대에 군부독재에 저항하면서 '체제 변혁'을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열성적으로 수입하고 소개하다가 동구권 공산주의 진영의 몰락을 맞아 '사회주의' 자체의 문제로 규정하고 일제히 청산한 행태는 그의 주된 비판의 대상이다. 아마도 그 엘리트들은 스스로를 'A급 좌파'라 생각했겠지만, 김규항이 보기에는 "앙상한 사회주의자들"에 불과했다.
이론으로만 향유했을 뿐, 다수 노동인민대중의 '정서'를 재료로 하지 못했던 'A급'보다는 다수대중의 'B급'이 훨씬 혁명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역사는 무수히 많다.
"정서가 생략된 과학"으로서 "연민과 분노가 사라진 이론과 사상"은 결국 다수 인민에게 무섭고 살벌한 얼굴로 다가가곤 했는데, 이러한 'A급'들과 '스탈린주의'는 쌍둥이였다.


"변화는 '질문의 재개'로 시작한다. 예컨대 다들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를 맞아...'라 말할 때,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인간이 그것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질문이다. 다들 '인간의 노동이 필요 없어지는 세상를 맞아...'라고 말할 때 '모든 인간은 노동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줄어야 할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노동시간이 아닌가?' 질문이다... 또한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의 재개'다. '물신세계'에서 인간은 모든 '첫 질문'을 잊는다... '첫 질문의 재개'를 통해 개인은 시스템 속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 김규항, [혁명노트], <113>, 2020.

거의 이십 년 정도 지나 'B급 좌파' 김규항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다시 연구한 후 돌아왔다. 그 동안은 아마도 '사회주의자'에서 '자유주의자'로 전향하여 대중들에게 훈계질하던 '386'에서 어느덧 '486', '586'으로 이론적으로는 '진화'를 표방하나, 인간적으로 '퇴화'한 지식인 엘리트들과 지속적으로 투쟁해 왔을 것이다. 이제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가 질곡에 빠진 2000년대 후반부터 아마도 1914년의 위기 상황에서 레닌이 '헤겔 철학'을 그 근본부터 연구하고 '철학노트'를 작성했듯이, 김규항은 마르크스 [자본론]을 더 철저히 파고들어 2020년에 [혁명노트]를 작성한 듯 하다.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에 의한 '안단테적 혁명'은 이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이행되는 과정이다.

"'혁명'은 현재 사회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로만 이해되어왔다. 그렇게 건설된 건 고작 새로운 정부이거나 새로운 지배 시스템이다. 혁명은 건설이자 '이행'이다. 투쟁하는 자유인은 미래에 속한 사람이며 또한 새로운 사회의 담지자다. 투쟁하는 자유인의 삶과 생활양식에 선취된 새로운 사회의 조각들이 현재 사회에 균열을 만들며 새로운 사회로 이행해간다. 누군가 새로운 사회가 정말 가능한가 물을 때, 투쟁하는 자유인은 먼저 묻는다. '내 안에 새로운 사회가 있는가?'"
- 김규항, [혁명노트], <119>

비인간적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세상'은 단 번에 오지 않는다. '투쟁하는 자유인'은 더 이상의 '노예'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스파르타쿠스처럼 주체적인 '자기해방'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며, 현재 시스템에서 볼 수 없는 '미래의 것'을 조금씩 선취하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적 일상을 만들어간다.
'내 안의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혁명'이 없다면, 지배계급은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으며, 그 어떤 '개혁'도 없다.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계급타협' 또한 '혁명'의 이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혁명노트]는 '혁명' 외에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이라는 기본모순은 물론, '인간들간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이라는 물적 관계로 표현'되는 '물신성'을 강조한다. 김규항에게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에서 가장 주목할 개념이 바로 '물신성(Fetishism)'이다.

"'물신성'은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을 막론하고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본주의적 환상'이다. '물신성'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원자인 상품에 실재한다. '상품 생산 사회'로서 자본주의가 지속하는 한 '물신성'은 지속하며, '물산성'이 지속하는 한 자본주의도 지속한다."
- 김규항, [혁명노트], <61>

마르크스 [자본론]은 '상품'이라는 '개별성'의 '자기운동'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라는 '보편성'을 보여주는 헤겔식의 변증법적 서술방식에 따라 '자본주의'를 분석하는데, 인간의 '노동(력)' 조차도 '상품'이다. 그리하여 실제 '노동의 (사용)가치'는 은폐되고 '노동력의 교환가치'만이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이로 인해 사회적 '인적 관계' 일체가 '물적 관계'로 대체되는데, 이것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말한 '물신성'의 단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계급'을 이미 '인격화된 자본'이라 정의한 바 있으나, 현대 자본주의는 마르크스 시대에는 볼 수 없는 현상, 즉 지배계급이 '자본가'가 아니라 '자본' 자체이며, 계급을 망라하여 시스템 내 모든 사람이 '물신성'에 사로잡혀 있다. 'A급 좌파' 조국의 '물신성'을 우리는 최근에 본 바 있다.


결국, '혁명'은 시스템의 전복이나 새로운 정부로의 대체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첫 질문을 재개'하는 '철학'의 복원과 함께 '물신성'을 극복하고 '노예'를 벗어나고자 하는 '투쟁하는 개인'들의 끊임없는 '자기해방'을 통해 선취되는 것이다.
체제가 인간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이행 과정'에서 각성한 인간들에 의해 체제가 극복되는 것이다.

'혁명'은 '안단테'로, 투쟁하고 각성하는 개인들의 '연대'다.

***

1. [혁명노트], 김규항, <알마>, 2020.
2. [B급 좌파], 김규항, <야간비행>,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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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rice1007 2020-04-04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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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신주의로 본 자본론




“지식인들은 온통 거대담론에 경도되다가 오류나 한계가 발견되면 다시 온통 미시담론에 경도된다. 그 전환 사이에 합당 한 비판과 성찰을 찾아보긴 어렵다. ‘거대담론의 시대’와 ‘미시담론의 시대’가 있을 뿐이다. 거대담론 시대에 미시담론에 주목하면 ‘반동적 자유주의자’로 치부하고, 미시담론 시대에 거대담론에 주목하면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라 치부하는 식이다.”라는 김규항의 문장을 빌어 김규항과 나를 비유하자면, 나는 ‘반동적 자유주의자’에 가깝고, 김규향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에 가깝다.

내가 김규항의 새책을 읽고 있던 중, 김규항의 글은 ‘기승전-계급’ 이거나 ‘기승전-혁명’이라 질린다는 후배 시인의 글을 읽었다. 나는 그의 견결함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는 그 견결함이 질리나보다. (물론 후배 시인이 이 글을 읽으면, 나의 초점없음을 재비판하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책은 저자를 떠나면 독자의 것인 것을.

이번 김규항의 《혁명노트》를 읽으면서, 나는 예전의 그가 쓴 《예수전》이 떠올랐다. 두 저작의 거리가 11년이다. 그러나 두 저작의 정신은 일맥상통한다.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며, 삶의 정신과 태도를 바꾸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혁명’은 예수의 ‘회개(메타노이아)’와 공명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세상을 살면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세상을 넘어서기 위한 이론적, 실천적 투쟁을 전개했듯이, 예수는 로마의 식민지 이스라엘에 나사렛이라는 촌동네에 살면서도 식민지인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사람으로 어떻게 살지 종교적, 실천적 투쟁을 벌였다.

예수로부터 2000년, 마르크스로부터 150여년이 지난 오늘날, 4차산업 혁명을 말하고, 혁신을 말하고, 개혁을 말하고, 민주를 말하는 우리 사회는 살만한가? 고도로 자본주의화되어 모든 것이 상품이 되고, 모두가 자본의 노예가 되고, 상품을 숭상하는 물신주의가 모든 이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이 사회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김규항은 11년 동안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세상을 분석하고, 자신의 생각을 단상의 형태로 절차탁마했던 것이다.

이 노트처럼 얇고, 고작 한 두 단락으로 이루어진 글 119개의 모음이 묵직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대한 해석을,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김규항의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 용기있는 글에 일단 경의를 표한다. 특히 마르크스의 ‘물신주의’라는 개념으로 사회주의 역사, 포스트 이론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제시한 것에서는 무릎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파편화되고 불투명해진 세상을 볼 수 있는 깨끗한 안경 하나를 장만한 기분이다.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읽어서 다 감지하지 못한 부분은, 우려내듯 읽으며 다시 찾아볼 심산이다. 어쨌든 이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그것이 저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니까.

모든 인간은 개성이나 인격적 면모와 상관없이 다른 모든 상품과 함께 ‘가격’으로 표현된다. 물론 품위나 위엄도 가격 순이다. 높은 가격을 가진 인간은 진심으로 존중받고 낮은 가격을 가진 인간은 진심으로 무시된다. ‘빈곤한 활동가’의 특별한 식견을 가진 이야기보다 ‘개념 있는 부자’의 그저 상식적인 이야기가 더 깊은 사회적 의미를 부여받는 일은 이상할 게 없다. ‘노동자는 왜 자본주의사회를 받아들이는가?’라는 질문은 의미를 잃는다. 물신성이 자본주의가 지속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원시인이 자연현상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도무지 해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원래 그런 것’이라 치부하는 습성이 있다. 물신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현대인에게 자본주의에서 삶은 해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 앞에 선 원시인과 다를 바 없다.(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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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뚱 2020-04-01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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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1) 대한민국처럼 빨갱이 공포증이 심한 나라에서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사람들은 공산주의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치를 떨며 종북주의자들을 심판하려 하지만 마르크스라는 이름 앞에서는 물음표를 떠올린다. 어디선가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누구지? 적어도 한국에서 오독의 대상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공산주의다.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무능하고 잔인한 독재자의 지배 아래 노동과 생산, 개인의 자유가 통제된 사회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꿈꾼 건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 모든 개인이 제 개성을 자유롭게 발전시키는 사회였다(p.18)'. 혁명을 하려면 공산주의라는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




(2) 공산주의의 영어 단어 communism은 '공동체', '공유', '공공'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비롯했다. 번역하면 '공동체 주의' 정도가 적당했겠지만 대한민국의 근현대 학문이 다 그렇듯 어느 일본 사람의 번역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공산주의'가 됐다. 공동생산. 끔찍한 기숙사식 공장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3)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는 사실을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이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살펴보자.




(4) '이윤은 유통 과정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원가 1만원짜리 상품을 시장에서 1.5만 원에 팔았을 때 생산자는 '5천 원의 이윤이 났다'라고 말한다(p.32)'. 바꿔 말하면 이 말은 소비자가 5천 원을 손해 봤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법은 지금부터다. 우리는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이기 때문에 이득과 손해가 무한정 반복되며 사회 전체의 이득은 0으로 수렴한다. 이런 사회는 지속이 불가하다.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생산과 소비 활동이 늘 일대일로 균형을 이루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회의 총 이득은 0이 됐다가도 곧바로 다시 늘어난다는 가정은 가능하다. 예컨대 노트북을 한대 샀다고 하자. 구매 가격은 생산원가의 1.5배인 150만 원. 프리랜서인 나는 이제 노트북을 구매한 회사의 일을 하청 받는다. 비용은 실제 노동 가치의 1.5배인 150만 원. 하지만 이 비용이 지급되기 전까지 사회의 총 이득은 0이 아니다. 비용이 입금되는 순간 0이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새로운 일을 맡게 돼 나는 영상 편집용 노트북을 한대 추가 구매한다. 이처럼 총 이득은 0으로 수렴했다가도 곧바로 늘어난다. 이 가정이 맞다면 부는 굉장히 역동적으로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부는 늘 특정 집단에 집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상으로 미루어보아 이윤은 유통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5) '이윤이 유통과정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생산과정'에서 나온다는 뜻이다(p.34)'. 생산자는 두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원료, 기계 설비, 토지, 사무실 같은 것들이고 또 하나는 노동력이다. 전자는 그 가치가 정해져 있어 스스로 늘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감소한다. 간혹 지대나 건물(사무실)의 가치가 상승해 이득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통상적 영업 행위는 아니다. 실제로 그런 가치 상승만으로 경영을 지속하는 회사는 없다. 그렇다면 경영 지속을 위한 잉여가치는 노동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마르크스가 밝혀낸 비밀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이 노동자가 노동으로 만들어낸 가치보다 작다'는 데 있다(p.35).'




(6) 8시간 노동 중 4시간은 우리 자신을 위한 '필요노동'이고 나머지 4시간은 자본가의 잉여 가치를 만들어내는 '잉여노동'이다. 이것이 착취처럼 보인다면 심각한 착각에 빠진 것이다. 이것은 착취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착취 그 자체다.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착취가 절대적으로 '합법'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발적인 계약을 통해 피착취자가 된다. 올해 연봉계약서에 동의를한 건 누구였지?




<김규항의 혁명노트>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오해와 해독, 그리고 재해석을 광범위하게 다루지만 생각의 편린들을 위에서처럼 짧은 호흡으로 쏟아낸다. 기승전결을 갖춘 긴 글을 원한 사람들은 실망할 수 있다.




김규항은 늘 혁명을 꿈꾸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혁명을 실천해 온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달려 나가는 속도를 보면 그 꿈이 먼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정말 자본주의가 문제일까? 나는 '계층'이라는 단어를 꺼냄으로써 쏟아질 오해가 두렵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 사회에 실존하는 현실이므로 솔직하게 말해보려 한다. 하루하루가 치명적인 빈곤계층에게 내 말은 배부른 돼지의 역겨운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속한 계층에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돌릴 핑계인 경우가 많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어서 자아를 찾지 못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대개 실현해야 할 자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데 있다.




숨 막히는 경쟁 사회의 안개를 걷고 나면 우리는 자아를 찾을 수 있을까? 찾아온 여유를 오롯이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엔 오랜 연습과 습관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가치가 없는 일을 하면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선 지금보다 훨씬 덜 쓰고 덜 입고 덜 마시고 덜 가져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지금보다 훨씬 더 쓰고 더 입고 더 마시고 더 가지고 싶어 한다. 문제는 이거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욕망이 만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의 욕망이 자본주의를 만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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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깨짱 2020-05-31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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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의 혁명노트




반가운 책이다. 아주 오랜만에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쉬지 않고 읽었다. 요즘은 지적인 무장을 하지 않고 계급투쟁에까지 나서는 시절이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을 바라보며, 주로 포스트모던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장사 치러버렸기 때문일 터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언어학적 원리를 세상만사에 난사하며, 아리까리한 주장에 아사무사한 주장을 덧대고 포개놓으며, 지식시장을 과점한 포스트모던 지식인들은 대의와 보편을 쪼개서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나 인종이나 지역처럼 서로서로의 유대는 느슨하지만 그리하여 눈앞에서는 삼삼한 정체성 투쟁들로 흩어놓았다. 오늘날 대의를 입에 담으면 틀딱이나 촌뜨기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한마디 하자면, 마르크스는 보편적 자유를 정치투쟁의 장에서 다루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오늘날에도 자유의 핵심적인 문제는 정치의 외부, 즉 지구시장에서 소시민의 가정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매트릭스를 구성하는 사회관계의 “비정치적인” 그물망 속에, 다시 말해, 하다못해 투표로라도 정해지지 않았고 자본주위가 유지되는 한 앞으로도 그럴 가망이 없는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민주적이지 못했던 과거로부터 지금껏 무비판적으로 유지되어온 관계들 말이다. 소유, 증여와 상속, 사회 전반에 산재하는 암묵적인 예속과 지배, 인민이 정치로부터 배제된 인민 없는 민주주의 등등. 포스트모던 지식인들과 민주당 같은 한국의 자유주의 개혁우파들의 “현재의 민주주의를 보완하고 심화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전망이 환상이거나 속임수인 까닭이 여기에 있고, 자본주의 소유관계와 생산관계에 개개인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비현실적인" 주체로 거듭나지 않는 한, 그러한 주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관계를 구성(혁명)하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김규항은 간결하고 선명하게 드러냈다. 코로나가 들이닥쳤다. 지구적 역병이 시장의 지구적 밀착에서 비롯되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병원 마이싱 주사 한 방 맞을 권리의 유무에 약자들의 생사가 엇갈리는 유럽과 미국의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각국의 정치체제들이 소위 주권자들의 생존보다 자본주의의 생존을 우선시한다는 현실에서, 그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상표일 뿐이라는 진실이 새삼 명백하게 드러났다. 코로나 때문에 자본은 하체가 경련하고 심장이 쫄깃거릴 터이다. 김규항의 <혁명노트>에서 얻어야 할 교훈의 하나는 “자본은 흡혈귀”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새겨들으라는 충고인 듯하다. 자본은 희생자의 피가 없으면 쓰러진다. 코로나 재난에 즈음하여 <혁명노트>에 내 멋대로 부제를 하나 붙여본다면, 그것은 “경제적 거리 두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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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atter 2020-04-10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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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치경제의 변동


I. 정치경제(학)의 변동1. 정치경제의 변동 : 국제 정세의 향후 국면에서 핵심은 Corona가 아니라 Oil이다.1.1. Russia의 진의Saudi-Russia 갈등이라는 외피로만 알려진 증산 사태의 본질은 세계 패권 질서의 전복을 노리는 Russia의 회심을 담은 대미 경제 정밀 타격이라 할 수 있다.1,500여 미국 Shale 업체들의 줄도산을 직접적 목표로 한 의도적 증산Saudi는 처음엔 Russsia의 새로운 전략에 당황하며 갈등을 일으켰지만, 곧 스스로도 입장을 수정해 갈등을 과장연기하며, 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고... + 더보기
rhizome 2020-03-20 공감 (4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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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


슬라보예 지젝(슬로베니아)과 프랑크 루다(독일), 아곤 함자(알바니아), 3인 공저의 <마르크스 읽기>(2018)가 지난해말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문학세계사)로 번역돼 나왔다. 진작에 구해둔 책인데(영어판은 그보다 앞서 구했다) 이제야 진득하게 손에 들게 되었다.

마르크스건 지젝이건, 혹은 지젝의 마르크스건 강의 일정에 쫓길 때는 읽을 여유가 없었다. 푸슈킨의 소비극 제목을 빌리면 이런책을 읽는 게 나로선 ‘코로나 속의 향연‘에 해당한다(푸슈킨의 작품 제목은 ‘페스트 속의 향연‘이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김규항의 <혁명노트>(알마)도 같이 읽어볼 만한 책. 재인용하자면 ˝김규항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언제 끝날지 모를 ‘전망 없는 세계’는 자본주의가 보이는 일시적 병증이 아니라 그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국지적이거나 시의적인 관점을 넘어 자본주의의 본질과 구조를 직시하고, 자본주의 극복에 관한 나름의 견해를 마련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말한다.˝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에서 지젝이 하고 있는 작업도 그와 동일한 성격의 작업이다. 다른 책들도 끼여 있지만 나는 이 두 책을 번갈아가면서 읽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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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20-03-07 공감 (3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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