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3

권용득 - 일전에 소개했던 송신도 할머니...

(50) 권용득 - 일전에 소개했던 송신도 할머니...






권용득
30 May at 12:51 ·



일전에 소개했던 송신도 할머니 이야기(https://www.facebook.com/yongdeuk77/posts/4396607900365333)에서 송신도 할머니가 이다 중사를 다시 찾은 까닭을 가와다 후미코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귀환할 때의 혼란 상황 속에서도 두 사람은 함께 목숨을 걸고 살아남았다. (송신도 할머니는 이다 중사가 자신을) 왜 내쫓은 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한편 이런 얘기도 있다.
「하재은(송신도 할머니 남편) 씨는 1982년 77세 나이로 죽었다.
“젊었을 때는 좋았는데, 나이가 드니까 매일 싸웠어. 안 해주니까. 결국 그 싸움이지 뭐.”
신도 씨와 재은 씨는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신도 씨는 도쿄 지방재판소 본인 심문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위안부’로 일했던 사람이고, ......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어. 육체관계는 도산한 것 같았어.”
하지만 다른 이야기도 했다.
“우리 아저씨, 내가 ‘위안부’였던 거는 예전에 알았어. 너랑 쿵작거릴 바에야 개랑 하는 게 낫겠다고 했어.”」

송신도 할머니뿐만 아니라 모든 ‘위안부’ 피해자는 전쟁 당시 ‘너도 애국자’라며 가스라이팅 당했다. 해방 후에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숨겨야만 하는 ‘화냥년’으로 가스라이팅 당했다. 1991년 ‘김학순 쇼크’ 이후에는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기 위한 ‘성노예’로 가스라이팅 당했다. 그들은 애초에 그들을 도구로 삼는 사회로부터 해방된 적이 없고, 죽고 나서도 해방될 수 없었다. 일간지 부고 기사마저 그들을 ‘끝내 한을 풀지 못한 피해자’로 박제하기 일쑤였다. 지난 30년 동안 당사자이면서 ‘위안부’ 인권회복운동에 앞장섰던 이용수 할머니는 왜 지금 이 시점에 “이용만 당했다”고 말했을까.
송신도 할머니는 자신을 찾은 가와다 후미코에게 이렇게 말했다.
「쓰나미도 겪었고, 지진은 일어났어도 지금은 행복해. 몸이 안 좋긴 하지만. (지원 모임의) 여러분들이 한사람씩 교대 교대로, 돌봐줘서.」
여기서 말하는 지원 모임은 송신도 할머니의 재판을 돕던 일본 내 시민단체를 말한다. 아마 그들도 자신들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송신도 할머니를 어느 정도 도구화했을 것이다. 다만 송신도 할머니는 그들의 도움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되찾았다. 반면 이용수 할머니는 지금까지의 운동 방식이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런 말. 인간을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대할 때 운동도 비로소 완성된다.




92Park Yuha, 李昇燁 and 9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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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ngbin Yoo 아...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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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d

이진수 도구와 목적이 명확히 나뉘지 않습니다. 피차 어느 정도는 서로에게 도구이자 목적입니다. 운동이란 게 어찌해도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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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그러니까 만 열여섯 살 때 중일전쟁에 동원된 송신도 할머니가 중국 우한에서 처음 한 일은 식당 청소였다. 버려진 한 식당에 있던 시체들을 치우고 식당 곳곳에 핏자국을 닦았다. 그 식당은 얼마 뒤 ‘세계관’이라는 일본군 위안소로 개조됐다. 새 위안소가 생겼다는 소식에 일본군이 몰려들었지만, 영업 허가가 떨어지기 전이라서 몰려든 일본군이 모두 쫓겨나는 해프닝도 있었다.
충남 계룡산 부근 출신이었던 송신도 할머니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업자의 말에 속아서 위안부 생활을 시작했다. 업자는 송신도 할머니의 이동 비용과 송신도 할머니에게 사준 옷가지 등에 높은 이자를 붙여 송신도 할머니의 신변을 구속했다. 업자와 동업 관계에 있던 포주는 송신도 할머니가 저항할 때마다 온갖 폭력을 행사했다. 송신도 할머니는 몇 번이나 도망칠 궁리를 했지만,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는 오히려 일본군을 따라다니는 편이 생존 확률이 높았다.
송신도 할머니는 토벌 작전에 나서는 일본군과 토벌 작전에서 돌아온 일본군을 번갈아 상대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일본군과 광기에 사로잡힌 일본군을 번갈아 상대한 셈이다. 송신도 할머니 증언에 의하면 음독자살한 위안부도 있었고, 일본군과 동반자살한 위안부도 있었다. ‘도시코’라고 불리던 한 조선인 위안부는 이질에 걸려 일본군의 요구를 거부했는데, 그 일본군에게 당한 폭행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송신도 할머니는 잇달아 다섯 명의 아이를 임신하기도 했다. 그중 무사히 태어난 한 명은 위안소 밖에 살고 있던 조선인 여성에게 맡겼고, 다른 한 명도 위안소 밖 현지인에게 맡겼다. 나머지는 사산하거나 중년의 조선인 여성(아마도 같은 위안소에 있던)에게 배운 방법으로 낙태를 했다.(위안부의 참상을 다룬 한 만화에서처럼 일본군이 위안부의 태아를 강제로 떼는 일은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다. 일본군은 위안부를 성적 도구로 이용했고, 성적 도구로서 가치가 없을 때는 여러 가지 잡일을 맡겼다. 송신도 할머니 역시 임신 중일 때는 잡일을 맡았다.)
송신도 할머니는 일본군이 전쟁터를 옮길 때마다 따라다녀야 했다. 이동 중에는 일본군의 탄알을 짊어지기도 했고, 일본군이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나서면 일본군 대신 철모를 쓰고 보초를 서기도 했다. 중국군이 보초를 서고 있던 조선인 위안부 두 명을 납치하는 일도 있었다. 한 동료(아마도 다른 국적의 위안부)는 피로 얼룩진 일본군의 전투복을 빨러 갔다가 납치되기도 했다.
송신도 할머니는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했던 일본군 상사 이름과 자신이 따라다녔던 부대 이름을 고스란히 기억했다. 종전 후에는 중국을 벗어나려던 미네부대 소속의 이다 킨사쿠 중사가 송신도 할머니에게 청혼을 하기도 했다. 이다 중사와 함께 이다 중사의 고향 땅(사이타마현 후카야)을 밟은 송신도 할머니는 곧바로 버림받았다. 이다 중사는 송신도 할머니를 조선인이 많이 모여 사는 오사카 쓰루하시로 데려가서 ‘미군 매춘부’라도 하라며 요즘 사람들이 자신의 반려동물을 몰래 버리듯 유기했다.
송신도 할머니는 모모타니의 한 장화 공장에서 일하면서 기찻삯을 모아 이다 중사 고향집을 다시 찾았다. 이다 중사의 형수와 어머니는 송신도 할머니를 불쌍하게 여겨 주먹밥과 옷가지를 챙겨줬다. 갈 곳이 없던 송신도 할머니는 목적지도 없이 기차를 타고 가다 뛰어내렸다. 목숨은 건졌지만, 그 바람에 또 유산했다. 이다 중사의 아이였다. 이후 송신도 할머니는 오나가와에서 함바집을 하던 조선인 남성과 함께 살았다. 송신도 할머니는 그 남성을 남편이자 은인으로 여겼다.(열여덟 살 연상이던 그 남성에게는 본처가 따로 있었지만, 본처는 다른 조선인 남성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갔다.)
송신도 할머니는 그 어떤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폐신문을 모아 팔면서 생계를 꾸려가기도 했다. 그 와중에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가 송신도 할머니의 집과 재산을 한꺼번에 쓸어갔다. 송신도 할머니에게 남은 건 함께 살던 반려견 ‘마리코’뿐이었다. 송신도 할머니와 마리코는 이웃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제대로 걷지 못했던 송신도 할머니와 마리코를 대피소까지 업고 간 건 이름 모를 일본인 청년이었다고 한다.
약 일주일 뒤 재일 위안부 피해자의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양징자 씨와 신타니 치카고 씨가 수소문 끝에 대피소에서 지내고 있던 송신도 할머니를 찾았다. 그들은 송신도 할머니를 도쿄의 한 호텔로 모셨고, 송신도 할머니는 그 지원모임의 도움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도쿄에서 지냈다. 송신도 할머니는 2017년 11월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송신도 할머니는 1991년 ‘김학순 쇼크’ 이후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법적 배상 소송을 했던 재일 위안부 피해자였다. 10여년 동안 법정 투쟁을 이어갔고, 안해룡 감독은 그 법정 투쟁기를 다큐영화로 만들기도 했다.(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2007년) 송신도 할머니의 상고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기각됐지만, 그 판결을 규탄하는 수요집회에 참석했던 송신도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노래를 불렀다. 송신도 할머니가 노래를 부르던 현장에는 이용수 할머니도 계셨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가와다 후미코의 책(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 안해룡·김해경 옮김, 바다출판사, 2016년)과 증언집을 참고했다. 송신도 할머니는 그나마 가시화된 피해자다. 물론 그 가시화는 정대협(지금은 정의연)과 일본 내 시민단체(앞서 말한 재판 지원모임 등등)의 도움 없이 불가능했다.
사실 아무리 비가시화된 피해자라고 해도 송신도 할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위안부 피해자의 개인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착취의 연속이다. 어린 시절에는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위안부로 동원돼서는 강요된 성노동의 대가까지 업자와 포주에게 착취당했다. 그럼에도 위안부 피해자 상당수는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배경과 위안부로 동원된 배경에는 우리사회의 여성차별과 창녀혐오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를 향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모든 위안부 피해자는 다중적 억압 구조 속에서 강요된 성노동을 해야 했고(성노동을 하지 않을 때는 여러 가지 잡일을 해야 했고), 그 다중적 억압 구조는 시대가 바뀐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나눔의집 운영진과 이사진은 위안부 피해자를 앞세워 막대한 후원금을 모았지만, 정작 그 후원금은 피해자들에게 거의 쓰지 않았다. 후원금을 피해자들에게 쓰는 대신 호텔식 요양병원을 지어 수익사업을 하려고 했다. 정치인과 유명인사는 국가기념일과 선거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위안부 피해자를 찾았다. 대부분의 위안부 피해자는 국가와 민족의 대의명분에 협조해야만 가까스로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국가와 민족의 대의명분과 상관없이 자기만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위안부 피해자는 없었다. 간혹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유언은 한결같다. 부고 기사 속 그들의 마지막 말은 언제나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사과를 받지 못해서 원통하다는 식이다. ‘조선놈이 일본놈보다 더 나쁘다’는 말은 끝내 기사화되지 않는다.
이따금 나는 우리사회가 앞서 말한 업자와 포주보다 더 악랄한 게 아닌가 싶다. 우리사회는 그들을 죽어서까지 착취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혹자의 말을 빌리자면, 단지 반성하지 않는 아베를 무릎 꿇리기 위해서. 그런데 그 아베는 조만간 실각할지도 모른다. 그럼 다음으로 누구를 무릎 꿇려야 할까. 텐노? 텐노가 무릎을 꿇으면 그 다음은? 다시 말해 이용수 할머니가 ‘이용만 당했다’는 말에 책임감을 느껴야 할 대상은 윤미향 씨와 정의연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목적에 맞게 위안부 피해자의 생애를 줄기차게 착취했던 우리 모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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