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3

박성호당대의 사유체계를 인정하지 않은 채...



(8) Sejin Pak - 박성호 2 hrs · Seoul, South Korea · 당대의 사유체계를 인정하지 않은 채...

Sejin Pak
3 June 2016 ·



박성호
2 hrs · Seoul, South Korea ·
당대의 사유체계를 인정하지 않은 채 현재의 관점에서 역사를 평가하게 되면 이런 식의 판단으로 귀결되기 쉽다.
한번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다. 동학농민운동이 농민반란이라는 관점에서 '대중의 항거' 내지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형태로 재평가를 받게 된 계기는 군사독재정권의 민족사관 강화와 맥을 같이 한다. '민족'이라는 항구불변한 가치체계를 정립하여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고, 정권의 불합리함에 대한 비판을 굴절시키고자 했던 일환으로 시도되었던 것이 이러한 작업이다. 한민족은 반만년의 단일민족이라느니, 고구려는 만주를 호령했던 대제국이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교과서를 장식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890년대의 상황에서 민중을 주체로 한 무장봉기에 긍정적인 시선을 던졌을 법한 당대의 지식인-관료-군인 계층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아도 좋다. 190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위로는 황상폐하(고종)를 보필하고 아래로는 신민을 거느리며"라는 레토릭이 신문 전면에 넘쳐흐르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당시 생각하던 문명개화라는 것은 기존의 왕정제를 폐하고 공화정으로 거듭나며, 모든 신분제도를 철폐하여 만민이 '국민'이라는 이름 아래 동일한 대우와 기회를 확보하게끔 해야 한다는 관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당대의 문명개화론은 제후국에서 제국으로 '독립'하는 일이었고, 따라서 왕을 황제라는 절대존엄으로 승급시키고 조선(대한)의 국체 자체를 '중화'와 동등한 것으로 끌어올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신분제 역시 인간 이하의 차별대우를 가하는 것을 견제하고자 했을 뿐, 오히려 사농공상이라는 직분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관점은 갑오개혁 이후 '강화'된다. 남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여자를 사람답게 대하고 교육 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배경은 "여자도 남자와 동일하게 사회생활을 하게끔 만들기 위해"가 아니라, "현모양처로서 남편을 보필하고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는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는 관점이었음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요는 이렇다. 동학농민운동이 '아래로부터의 개혁'이고, 따라서 '민족'이라는 개념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이라면 이러한 대중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따랐어야 한다는 식의 접근법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 안중근이 동학군 토벌에 참가한 이력이 있다는 것은 그의 '한계'가 아니라 그의 출신 성분이나 성향 등을 고려했을 때 '당연한' 일에 해당한다. 그 시절에 동학농민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지식인-관료-군인 계층이 있다면, 동학란의 좌절 이후 전부 죽임을 당했거나 해외로 도피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하기도 했다. 동학과 연을 맺었던 이들 중 상당수는 일본 등지로 도피하게 되는데, 이들이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더불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고, 이들의 손에 의해 조직된 것이 바로 '일진회'다. 일본은 한반도 진출을 위해 이들 소장파 개혁 지식인들에게 동학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주겠다는 입장을 취했고, 그 결과 '일진회'는 러일전쟁 무렵부터 일본과의 동조 하에 대한제국정부 (주로 황실) 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우게 된다. 어디까지나 의미없는 가설이지만, 만일 안중근이 동학에 '가담'하는 쪽에 섰다면, 그는 동학란의 좌절 이후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러일전쟁 무렵에 일본군의 군속 내지는 통역관 등으로 한국으로 건너와 일진회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라는 게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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