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과 거대 여당의 진영논리
by이건주May 24. 2020
윤미향과 거대 여당의 진영논리
최근 윤미향 전 정의연 이사장 논란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논의 수준이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사건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제시한 문제제기가 타당성이 있는지, 정의연의 회계상 문제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합리적으로 검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정의연에 대한 온갖 가짜 뉴스를 쏟아내면서 소녀상 철거 등 민족적 과제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나, 윤미향 이사장의 30년 활동을 내세우면서 웬만한 문제는 눈감아 주는 것이 예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모두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촛불혁명 이후에는 한국 사회에서도 서양적 의미에서 극우세력인 반일 민족주의자들이 등장했다. 과거 극우세력이 친일 청산, 위안부 문제 등 민족주의적 과제에는 반대하면서 오로지 반공만 외쳤다면, 새로운 극우세력들은 냉전 반공주의에는 반대하면서도 오로지 반일만 외치고 있다.
문제는 새로운 극우세력들이 과거의 극우인 친일 반공세력을 비판하면서 반일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극우가 아니라 오히려 진보의 외양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 대부분이 '죽창가'로 논란이 되었던 조국 전 민정수석을 비롯한 문재인정부와 민주당의 열혈 지지자들이다. 심지어 진보정당 지지자들 가운데에도 반일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보진영 내의 반일 민족주의세력들은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총선은 한일전이라고 외치면서 토착왜구 박멸을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국내의 정치적 반대자들마저 박멸해야 될 왜구로 몰아 붙이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평화적 교류와 연대는 아예 설자리가 없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도 과거 독일의 나치나 미국의 KKK단 그리고 최근 유럽의 외국인/이주민 혐오처럼 수많은 민족적/인종적 혐오와 차별이 대량으로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윤미향 이사장을 무조건 옹호하면서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과 언론 그리고 수사를 시작한 검찰을 모두 싸잡아서 '토착왜구'라고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도 반일 민족주의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심지어 기자회견을 한 이용수 할머니를 배후니 돈이니 하면서 비난하기도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조차 토착왜구로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조국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왜 진보 진영에게만 가혹한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냐고 항변한다. 하지만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이면서 진보 소리를 듣는다면 이처럼 우스운 일도 없을 것이다. 과도한 합리성과 도덕성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라면 진보진영 안에서 진보의 가치를 훼손하지 말고 자기들이 원하는 진영을 찾아가야 한다.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으로 민족주의만을 외치는 사람들을 세상에서는 진보가 아니라 극우라고 부른다.
진보진영 내에서 반일 민족주의를 주도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어느 역사학자는 일전에 대구 바이러스 문제를 반일과 연결시킨 SNS 발언이 대구 혐오로 문제가 되자 "모든 혐오는 죄인가?"라고 당당히 항변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는 일본 혐오는 역사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하는 진보적인 혐오라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일본/중국 혐오든 대구/광주 혐오든 외국인/이주민 혐오든 모든 혐오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것이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의무"이자 진보진영의 도덕적 의무라고 믿는다.
20세기 초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주의를 주장했던 중국의 손문도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세계주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우리들이 앞으로 세계주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민족주의를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면서 “세계주의를 주장할 수 있는 현실적 토대”로서 민족주의를 강조했던 것이다.
손문의 민족주의는 국수주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21세기에 콰메 앤터니 애피아가 말하는 "지역적 헌신을 요구하는 세계시민주의"에 가깝다. 그는 "우리는 모든 외국인들을 저버리는 민족주의자를 편들 필요도 없고, 자신의 친구나 동료 시민을 냉담하고 공평무사하게 대우하는 극단적인 세계시민주의를 편들 필요도 없다."라고 하면서 다원주의적 태도를 강조한다.
민주당 윤미향 당선자가 기자회견에서 의혹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결국 국회의원이 되었다. 민주당이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대신에 윤미향 당선자 손을 잡아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두 차례나 직접 기자회견을 열면서 비판했던 자기 당의 비례후보 자질 문제를 회계 문제로 축소시켜 조국 사태 이후 대대적인 문책 인사를 했던 검찰에 넘겼으니 말이다.
민주당이 거대 여당이 되자마자 한 일이 반일이라는 진영논리에 사로잡혀서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앞으로도 친일과 반일을 둘러싼 정치적 진영전쟁 속에서 피해자 당사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배제된 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적대적 한일전이 계속될 것으로 보여서 더욱 안타깝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영전쟁의 뿌리는 아주 깊다. 독립운동가와 손을 잡은 친일 세력들이 반공을 내세워 공산주의 세력들과 대립하던 해방 정국에서부터 이후 군부독재 시절 독재진영과 민주진영 간에 필사적인 전투가 벌어져 왔다. 지난 오월 광주나 87년 유월 그리고 촛불까지 진영전쟁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촛불 이후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와 지자체장선거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진보진영이 모두 압도적인 대승을 거둠으로써 진영전쟁은 사실상 종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국민들이 진보진영에게 막대한 권력을 부여한 것은 단지 진보를 내세우는 진영이기 때문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정치세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진영전쟁 프레임에 갇혀서 비합리적인 진영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 보수정부가 남북통일과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모두 빨갱이로 몰아 뿌리뽑으려 했듯이 지금은 진보정부가 한미일 삼각동맹을 강화하려는 사람들을 모두 토착왜구로 몰아 사멸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영전쟁의 가장 큰 문제는 양 진영 모두 진영논리에 발목이 잡혀서 시대착오적인 낡은 세력으로 전락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진영전쟁 속에서 각 진영은 비판에는 능하지만 비판 수용에는 무능했다. 적들을 섬멸하기 위해 비판하다 보면 자신들의 무오류성을 무의식적으로 승인하게 된다. 적들이 제기하는 비판은 오히려 자기 진영이 정당하다는 증거로 간주된다. 적들의 비판이 강할수록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필사적인 정당성이 확보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인 내부 비판과 성찰이 설 자리가 전혀 없다. 적들과 유사한 비판을 제시하는 내부자는 이적 행위를 하는 배신자나 변절자로 간주되어 응징된다. 비판을 수용하기는커녕 정당한 비판자가 가혹하게 비판 당하는 구조가 형성된다. 그래서 독재의 후예인 보수진영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의 후예인 진보진영조차도 그토록 부정했던 독재의 모습을 닮아 간다. 진영논리는 독재논리이다.
이제 거대 여당은 합리적이고 평화적인 민주주의시대를 열어 나가기 위해 토착왜구 척결이라는 진영논리에서 시급히 벗어나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윤미향 의원과 정의연이 주도하는 적대적 한일전이 아니라, 전적으로 피해자들이 원하는 인권과 연대의 방향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설령 정치적으로 보수진영에게 유리한 일이 되더라도 말이다.
당사자인 정의연과 윤미향 의원도 정치적 진영논리 뒤에 숨지 말고 이용수 할머니가 제기한 다양한 문제들을 투명하게 해소하고 책임질 부분이 있다면 책임지는 진정성을 보이기 바란다. 그리고 앞으로는 할머니의 바람대로 수요집회를 비롯한 소모적인 반일 민족 투쟁을 끝내고,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올바른 역사교육과 한일 젊은이들 간의 발전적인 교류로 활동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시민사회도 위안부 문제를 할머니의 뜻대로 "인권과 평화, 화해와 용서, 연대와 화합"의 방향으로 해결하기 위해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한다. 정치적 진영논리를 넘어서 피해자의 인간적인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인권과 연대를 향한 민주진보의 길이라고 믿는다.
2020년 5월 25일 2차 기자회견
[기자회견문 전문]
저는 위안부였습니다.
그냥 위안부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대만 주둔 가미가제 특공대의 강제 동원 위안부 피해자였습니다.
해방 이후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했던 제 삶의 상처를 대중에게 공개했던 것이 1992년 6월 25일입니다. 차마 용기를 내기가 어려워 제 자신이 아니라 친구의 이야기인 것처럼 당시 정대협에 거짓으로 피해를 접수했었습니다.
이후 1992년 6월 29일 수요집회를 시작으로 당시의 참상과 피해, 그리고 인권유린을 고발하고, 우리 인류에게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른 피해 할머니들과 함께 문제 해결과 인권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서로 간 존재도 몰랐던 우리 피해 할머니들은 각자 겪은 참상과 인권유린을 이야기하며 부둥켜안고 눈물로 아픔을 함께 했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이 30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투쟁을 통해 손가락질과 거짓 속에 부끄러웠던 이용수에서 오롯한 내 자신 이용수를 찾았습니다. 먼저 가신 피해자 언니들과 함께 이 문제를 저 이용수가 꼭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양국 정부의 무성의와 이리저리 얽힌 국제 관계 속에서 그 결실은 아직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번 기자회견과 입장문을 통해 지금까지 해 온 방식으로는 문제의 해결은 여전히 요원하다는 말씀을 감히 국민 여러분께 말씀드리며, 앞으로 개선해야 할 것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제 기자회견 이후 전개되고 있는 상황은 제가 기대하거나 예상했었던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30년 동지로 믿었던 이들의 행태라고는 감히 믿을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저는 당혹감과 배신감, 분노 등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 가지는 꼭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번 기자회견을 준비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일본의 사죄와 배상 및 진상의 공개, 그리고 그동안 일궈온 투쟁의 성과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고백한 후, 참 힘든 세월을 지내왔습니다만 그럼에도 저는 이 길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부단히 다잡아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들께 부탁 아닌 부탁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현재 드러난 문제들은 우리 대한민국이 그동안 이뤄온 시민의식에 기반하여 교정되고 수정되어 갈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길에 ‘시민 주도 방식’, ‘30년 투쟁의 성과 계승’, ‘과정의 투명성 확보’ 3가지 원칙이 지켜지는 전제하에 향후 제가 생각하는 활동 방향을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이 조속히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밝히지 못했던 많은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안을 한일 양국 정부와 시민사회가 책임성을 갖고 조속히 같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두 번째, 지난번 입장문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한 구체적 교류 방안 및 양국 국민들 간 공동행동 등 계획을 만들고 추진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한일 양국을 비롯한 세계 청소년들이 전쟁으로 평화와 인권이 유린됐던 역사를 바탕으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을 함께 고민하고 체험할 수 있는 평화 인권 교육관 건립을 추진해 나갔으면 합니다.
네 번째,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전문적인 교육과 연구를 진행하고 실질적인 대안과 행동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구를 새롭게 구성하여 조속히 피해 구제 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번째, 앞서 말씀드린 것들이 소수 명망가나 외부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정대협과 정의연이 이뤄온 성과를 바탕으로 우리 국민의 힘으로 새로운 역량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섯 번째, 이번 사태를 기점으로 개방성과 투명성에 기반한 운영 체계를 갖추기 위한 논의가 이뤄지길 바랍니다. 사업의 선정부터 운영 규정, 시민의 참여 방안, 과정의 공유와 결과의 검증까지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깊은 논의가 이뤄지길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그동안 이 운동이 시민들의 지지와 성원으로 성장해 온 만큼 시민의 목소리를 모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비롯한 활동가, 그리고 국민 여러분 모두가 현재 상황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당혹스러우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투쟁 과정의 문제들이 공론화되길 기대했던 것인데,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나면서 그 과정이 복잡해질 듯합니다. 제겐 운동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던 여러분들이 계십니다. 먼저 한 발을 내디뎌 새로운 길을 열어오신 분들께서 밝은 지혜로 시민과 함께 문제를 풀어낼 수 있도록 도움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저는 올해 93세입니다. 제게 남은 시간은 별로 없습니다. 어떤 이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력하게 당해야 했던 우리들의 아픔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그리고 미래 우리의 후손들이 가해자이거나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 모두가 걱정하고 있는 코로나19바이러스에 대응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이미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그 길을 닦아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느 길에도 오르막과 내리막은 함께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 걸음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한 모두의 한 걸음을 이제 국민들이 함께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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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주
서울대 국어교육과 졸업. 서울시립대 국문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시와 정치 그리고 교육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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