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김학순 -되풀이하기조차 싫은 기억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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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등록일 2016-12-16조회수 9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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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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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중국 지린에서 출생해 100일 즈음 평양으로 옴
1939년 평양 기생학교에 다님
1941년 평양 기생학교 졸업
1941년 기생학교의 ‘수양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김학순 등과 중국 베이징으로 감. 베이징에서 김학순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 가 베이징 부근 ‘철벽진’ 등지에서 군‘위안부’ 생활을 함. 3개월 정도 후에 조선인 남자의 도움으로 군위안소 탈출
1942년 탈출을 도와준 남자 사이에서 임신,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정착
1943년 9월 첫딸 출산
1945년 1월 아들 출산
1946년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인천으로 귀국. 장충단수용소에서 생활 중 딸을 콜레라로 잃음
1952년 남편 사망
1991년 8월 14일 국내 거주자 중 최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증언
1991년 12월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
1992년 12월 일본 도쿄 <전후 보상에 관한 국제 공청회>에 참석하여 증언. 이후 사망하기 전까지 꾸준히 증언활동을 함
1993년 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첫 증언집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회 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 증언 실림
1997년 이토 다카시의 『종군위안부 -종군위안부출신할머니27인의 증언』(눈빛)에 증언 실림
1997년 12월 16일 사망
이동 경로
중국 지린성 지린 출생 → 평양 기생학교 → 중국 베이징 → 베이징 근처 ‘철벽진’ 등지에서 군위안소 생활 → 군위안소 탈출 → 탈출 후 상하이 프랑스조계에 정착 → 해방 후 인천으로 귀국
해제
김학순의 증언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소 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군위안부들』(한울, 1993)에 실린 것으로 이상화가 면담, 채록하였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이 국내 생존자로서는 처음 공개 증언한 이후 다수의 피해자들이 이어 등장하여 당시 상황이 점차 밝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92년 초 일본정부는 군‘위안부’제를 운영한 책임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피해사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일본의 가해사실을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는 한국 내 사회적 요구가 있었다. 한국정신대연구회(1990년 7월 조직, 현재 한국정신대연구소)가 중심이 되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1990년 11월 조직, 이하 정대협으로 약칭)의 지원 속에 1992년부터 집중적인 피해자 증언 채록작업이 이루어졌다. 격렬한 한일간의 공방 속에서 피해자 상황을 객관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첫 증언집이었다.
여러 번의 증언 청취는 물론 문헌자료가 제대로 발굴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당시 접할 수 있는 자료들을 가능한 한 모아 참고하였다. 수차례에 걸친 피해자 면담을 통하여 정확성과 객관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수록된 증언 하나하나는 증언집 발간작업에 참여한 이들의 검토 등 집단적인 작업의 결과물로서 탄생하였다. 여성 피해자의 눈으로 본다는 입장이 투영되어 있고, 피해자 구술을 통해 당대의 다양한 삶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구술녹취 방법론이 크게 발전한 시기가 아니어서 피해자의 말투는 사라졌지만 대신 가독성을 얻었다. 이 증언집은 일본, 중국, 영국, 독일 등지에서 번역되었다.
김학순은 첫 국내 공개 증언자이다. 그는 동회에서 알선해 주는 취로사업에 나갔다가 우연히 원폭피해자인 한 할머니를 만나 일본에게 당한 억울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학순도 자신의 처지가 하도 원통해서 ‘어디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던 참’이라 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김학순이 공개 증언을 하기 이전에 군'위안부' 피해자로서 오키나와의 배봉기, 타이의 노수복 등의 소식이 우리나라 신문지상에 이미 알려졌으나 사회운동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국내엔 스스로를 드러낸 피해자가 없었지만 1988년부터 여성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제기하고 1990년부터는 한국정신대연구회와 정대협이 조직되어 지속적으로 문제를 다룰 채비를 하였다. 한국에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자주 다루기 시작하였으나, 일본정부는 정부차원의 관여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분개한 김학순이 국내 최초로 공개 증언에 나선 것이다.
1991년 8월 한국은 어느 정도 민주화가 진전되고 여성의 성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군‘위안부’ 관련조직도 만들어져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발아하던 시기였다. 이 때 피해 당사자인 김학순의 공개 증언은 일본군‘위안부’문제 논의 확산에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피해자 김학순의 등장 이후 다른 피해자들이 연이어 증언하기 시작하였고, 국내는 물론 네덜란드나 타이완 등 해외의 피해자들도 가세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위안부’문제가 동아시아와 태평양의 일본군 점령지에 광범위하게 실시되었음이 드러났다. 다른 나라에서도 피해자를 지원하는 조직체들이 결성되면서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운동은 국제적 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김학순은 1924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길림성) 지린(吉林, 길림)에서 출생하였다. 백일도 되기 전에 부친이 사망하여 모친과 평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재혼했는데 김학순은 의붓아버지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15세에 평양 기생학교에 들어가 17세에 졸업하였다. 그러나 당시 전시 통제에 따라 기생업이 억제되어 영업을 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에 기생학교의 양부(수양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김학순과 김학순의 양언니를 데리고 중국 베이징(北京, 북경)으로 건너갔다.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양부 등 일행은 일본군에게 잡혀 김학순과 양언니는 군부대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김학순이 있었던 군위안소는 두 곳이다.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 베이징 부근 ‘철벽진’과 호오루현(獲鹿県, 획녹현)1)이라는 것만 언급되었을 뿐, 군위안소 장소가 철벽진과 호오루현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호오루현의 철벽진과 확인되지 않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아무튼 김학순이 배치되었던 베이징 근방은 중국 공산당계열의 항일게릴라 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 중부나 남부와 달리 이 지역의 일본군은 소규모로 산재해 항일게릴라부대와 대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학순이 있었던 허베이성 군위안소가 상부기관과 공식적인 연계가 있었던 군위안소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지 않으나, 같은 허베이성 푸닝(撫寧, 무녕)에서는 소규모이면서 하부부대에 의해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위안소가 있었다.2)
김학순이 있었던 군위안소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군이 직접 관리하였다는 점이다. 군위안소 바로 옆에 부대가 있고 보초가 있어 군‘위안부’가 어디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일본군이 직접 군‘위안부’를 감시 통제하고 식사도 군에서 직접 조달하였다. 그리고 군‘위안부’ 관리와 교육 등은 관할 부대가 먼저 군‘위안부’가 된 ‘시즈에’와 같은 여성을 내세워 하였다. ‘시즈에’는 김학순에게 일본식 이름 ‘아이코’를 붙이고 소독방식 등 성병예방을 위한 일종의 교육을 하였다. 일반 군전용위안소라면 군위안소 업자가 할 일을 김학순이 있었던 위안소에서는 일본군이 직접 혹은 먼저 군‘위안부’가 된 여성을 통해 통제관리한 것이었다.
김학순은 이곳에서 두 달 정도 있다가 같이 있던 군부대가 옮기게 되자 그 부대를 따라 트럭을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되어졌고 이동된 곳에서도 군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다. 꾸준히 탈출의 기회를 엿보아 왔지만 그곳 상황을 몰라 실행하지 못하였다. 새로운 곳으로 옮긴지 한달 지났을 때, 군인들이 ‘토벌’에 나가 없는 틈을 타 보초의 눈을 피해 군위안소로 들어온 조선인 남자 조씨가 있었다. ‘은전장사’라고 한 그의 도움으로 김학순은 위안소를 탈출할 수 있었다.
일본의 우익 세력들은 김학순이 기생학교 출신임을 내세워 증언의 신뢰성을 부정하지만, 군‘위안부’제와 ‘기생제도’는 구분되어지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김학순은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중국 현지에서 일본군에게 강제 연행되었고 위안소에서 강압에 의해 성노예 생활을 했다. 이는 강요된 위안소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험한 탈출을 감행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1942년 군위안소 탈출에 성공한 이후 김학순은 탈출을 도와준 남자 사이에 아이를 갖게 되어 상하이(上海,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 정착하여 살았다. 해방을 맞이하여 1946년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상하이에서 인천으로 귀환하였다. 장충단수용소에서 생활 중 딸을 콜레라로 잃고, 전쟁 중에는 남편을, 이어 하나 남은 아들마저 죽자, 괴로움에 못 이겨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하였다. 그러다 종교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을 유지해 갔다.
김학순은 1991년이 되어서야 폭로하게 된 이유로, 우리 사회가 자신과 같은 피해자를 천하고 부끄럽게 여겼고, 또 중국에서 일본군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보아서 해방 후에도 자신이 당한 것을 폭로하면 생명에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말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동안 ‘분하고 답답해도 숨어서 눈물만 흘렸’을 뿐이었다고 하였다.3)
김학순의 이야기를 통해 보면, 군‘위안부’ 피해자와 같이 성적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은, 객관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피해자 시선에서 이 문제를 보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피해자 주체로 보면 피해자가 일정 정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학순은 최초의 국내 증언자로서 국내외에서 많은 증언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91년 12월 군‘위안부’ 피해자로서 일본정부를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하였다. 그의 첫 증언의 용기와 이후 활동들에 대해 그 공을 인정받아 1992년 3월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제정한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하였다.4) 김학순은 일본정부가 세계의 비난여론과 법적 배상을 피해가기 위해 만든 ‘국민기금’(이후 정식 명칭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방식의 해결을 비판하고 오직 진심이 담긴 일본정부의 사죄를 요구하였다.5) 이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던 김학순은 1997년 사망하였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강정숙)
1939년 평양 기생학교에 다님
1941년 평양 기생학교 졸업
1941년 기생학교의 ‘수양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김학순 등과 중국 베이징으로 감. 베이징에서 김학순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 가 베이징 부근 ‘철벽진’ 등지에서 군‘위안부’ 생활을 함. 3개월 정도 후에 조선인 남자의 도움으로 군위안소 탈출
1942년 탈출을 도와준 남자 사이에서 임신,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정착
1943년 9월 첫딸 출산
1945년 1월 아들 출산
1946년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인천으로 귀국. 장충단수용소에서 생활 중 딸을 콜레라로 잃음
1952년 남편 사망
1991년 8월 14일 국내 거주자 중 최초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증언
1991년 12월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
1992년 12월 일본 도쿄 <전후 보상에 관한 국제 공청회>에 참석하여 증언. 이후 사망하기 전까지 꾸준히 증언활동을 함
1993년 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첫 증언집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회 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 증언 실림
1997년 이토 다카시의 『종군위안부 -종군위안부출신할머니27인의 증언』(눈빛)에 증언 실림
1997년 12월 16일 사망
이동 경로
중국 지린성 지린 출생 → 평양 기생학교 → 중국 베이징 → 베이징 근처 ‘철벽진’ 등지에서 군위안소 생활 → 군위안소 탈출 → 탈출 후 상하이 프랑스조계에 정착 → 해방 후 인천으로 귀국
해제
김학순의 증언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소 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군위안부들』(한울, 1993)에 실린 것으로 이상화가 면담, 채록하였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이 국내 생존자로서는 처음 공개 증언한 이후 다수의 피해자들이 이어 등장하여 당시 상황이 점차 밝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92년 초 일본정부는 군‘위안부’제를 운영한 책임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피해사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일본의 가해사실을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는 한국 내 사회적 요구가 있었다. 한국정신대연구회(1990년 7월 조직, 현재 한국정신대연구소)가 중심이 되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1990년 11월 조직, 이하 정대협으로 약칭)의 지원 속에 1992년부터 집중적인 피해자 증언 채록작업이 이루어졌다. 격렬한 한일간의 공방 속에서 피해자 상황을 객관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첫 증언집이었다.
여러 번의 증언 청취는 물론 문헌자료가 제대로 발굴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당시 접할 수 있는 자료들을 가능한 한 모아 참고하였다. 수차례에 걸친 피해자 면담을 통하여 정확성과 객관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수록된 증언 하나하나는 증언집 발간작업에 참여한 이들의 검토 등 집단적인 작업의 결과물로서 탄생하였다. 여성 피해자의 눈으로 본다는 입장이 투영되어 있고, 피해자 구술을 통해 당대의 다양한 삶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구술녹취 방법론이 크게 발전한 시기가 아니어서 피해자의 말투는 사라졌지만 대신 가독성을 얻었다. 이 증언집은 일본, 중국, 영국, 독일 등지에서 번역되었다.
김학순은 첫 국내 공개 증언자이다. 그는 동회에서 알선해 주는 취로사업에 나갔다가 우연히 원폭피해자인 한 할머니를 만나 일본에게 당한 억울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학순도 자신의 처지가 하도 원통해서 ‘어디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던 참’이라 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김학순이 공개 증언을 하기 이전에 군'위안부' 피해자로서 오키나와의 배봉기, 타이의 노수복 등의 소식이 우리나라 신문지상에 이미 알려졌으나 사회운동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국내엔 스스로를 드러낸 피해자가 없었지만 1988년부터 여성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제기하고 1990년부터는 한국정신대연구회와 정대협이 조직되어 지속적으로 문제를 다룰 채비를 하였다. 한국에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자주 다루기 시작하였으나, 일본정부는 정부차원의 관여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분개한 김학순이 국내 최초로 공개 증언에 나선 것이다.
1991년 8월 한국은 어느 정도 민주화가 진전되고 여성의 성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군‘위안부’ 관련조직도 만들어져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발아하던 시기였다. 이 때 피해 당사자인 김학순의 공개 증언은 일본군‘위안부’문제 논의 확산에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피해자 김학순의 등장 이후 다른 피해자들이 연이어 증언하기 시작하였고, 국내는 물론 네덜란드나 타이완 등 해외의 피해자들도 가세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위안부’문제가 동아시아와 태평양의 일본군 점령지에 광범위하게 실시되었음이 드러났다. 다른 나라에서도 피해자를 지원하는 조직체들이 결성되면서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운동은 국제적 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김학순은 1924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길림성) 지린(吉林, 길림)에서 출생하였다. 백일도 되기 전에 부친이 사망하여 모친과 평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재혼했는데 김학순은 의붓아버지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15세에 평양 기생학교에 들어가 17세에 졸업하였다. 그러나 당시 전시 통제에 따라 기생업이 억제되어 영업을 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에 기생학교의 양부(수양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김학순과 김학순의 양언니를 데리고 중국 베이징(北京, 북경)으로 건너갔다.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양부 등 일행은 일본군에게 잡혀 김학순과 양언니는 군부대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김학순이 있었던 군위안소는 두 곳이다.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 베이징 부근 ‘철벽진’과 호오루현(獲鹿県, 획녹현)1)이라는 것만 언급되었을 뿐, 군위안소 장소가 철벽진과 호오루현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호오루현의 철벽진과 확인되지 않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아무튼 김학순이 배치되었던 베이징 근방은 중국 공산당계열의 항일게릴라 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 중부나 남부와 달리 이 지역의 일본군은 소규모로 산재해 항일게릴라부대와 대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학순이 있었던 허베이성 군위안소가 상부기관과 공식적인 연계가 있었던 군위안소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지 않으나, 같은 허베이성 푸닝(撫寧, 무녕)에서는 소규모이면서 하부부대에 의해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위안소가 있었다.2)
김학순이 있었던 군위안소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군이 직접 관리하였다는 점이다. 군위안소 바로 옆에 부대가 있고 보초가 있어 군‘위안부’가 어디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일본군이 직접 군‘위안부’를 감시 통제하고 식사도 군에서 직접 조달하였다. 그리고 군‘위안부’ 관리와 교육 등은 관할 부대가 먼저 군‘위안부’가 된 ‘시즈에’와 같은 여성을 내세워 하였다. ‘시즈에’는 김학순에게 일본식 이름 ‘아이코’를 붙이고 소독방식 등 성병예방을 위한 일종의 교육을 하였다. 일반 군전용위안소라면 군위안소 업자가 할 일을 김학순이 있었던 위안소에서는 일본군이 직접 혹은 먼저 군‘위안부’가 된 여성을 통해 통제관리한 것이었다.
김학순은 이곳에서 두 달 정도 있다가 같이 있던 군부대가 옮기게 되자 그 부대를 따라 트럭을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되어졌고 이동된 곳에서도 군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다. 꾸준히 탈출의 기회를 엿보아 왔지만 그곳 상황을 몰라 실행하지 못하였다. 새로운 곳으로 옮긴지 한달 지났을 때, 군인들이 ‘토벌’에 나가 없는 틈을 타 보초의 눈을 피해 군위안소로 들어온 조선인 남자 조씨가 있었다. ‘은전장사’라고 한 그의 도움으로 김학순은 위안소를 탈출할 수 있었다.
일본의 우익 세력들은 김학순이 기생학교 출신임을 내세워 증언의 신뢰성을 부정하지만, 군‘위안부’제와 ‘기생제도’는 구분되어지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김학순은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중국 현지에서 일본군에게 강제 연행되었고 위안소에서 강압에 의해 성노예 생활을 했다. 이는 강요된 위안소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험한 탈출을 감행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1942년 군위안소 탈출에 성공한 이후 김학순은 탈출을 도와준 남자 사이에 아이를 갖게 되어 상하이(上海,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 정착하여 살았다. 해방을 맞이하여 1946년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상하이에서 인천으로 귀환하였다. 장충단수용소에서 생활 중 딸을 콜레라로 잃고, 전쟁 중에는 남편을, 이어 하나 남은 아들마저 죽자, 괴로움에 못 이겨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하였다. 그러다 종교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을 유지해 갔다.
김학순은 1991년이 되어서야 폭로하게 된 이유로, 우리 사회가 자신과 같은 피해자를 천하고 부끄럽게 여겼고, 또 중국에서 일본군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보아서 해방 후에도 자신이 당한 것을 폭로하면 생명에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말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동안 ‘분하고 답답해도 숨어서 눈물만 흘렸’을 뿐이었다고 하였다.3)
김학순의 이야기를 통해 보면, 군‘위안부’ 피해자와 같이 성적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은, 객관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피해자 시선에서 이 문제를 보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피해자 주체로 보면 피해자가 일정 정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학순은 최초의 국내 증언자로서 국내외에서 많은 증언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91년 12월 군‘위안부’ 피해자로서 일본정부를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하였다. 그의 첫 증언의 용기와 이후 활동들에 대해 그 공을 인정받아 1992년 3월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제정한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하였다.4) 김학순은 일본정부가 세계의 비난여론과 법적 배상을 피해가기 위해 만든 ‘국민기금’(이후 정식 명칭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방식의 해결을 비판하고 오직 진심이 담긴 일본정부의 사죄를 요구하였다.5) 이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던 김학순은 1997년 사망하였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강정숙)
증언
되풀이하기조차 싫은 기억들
길림에서 태어나
내가 태어난 곳은 만주 길림성이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어머니는 열다섯 살에 아버지와 결혼하여 평양에서 살다가 일본 사람 등살에 중국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나를 중국에서 1924년에 낳고, 그 후 백일도 안 되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한다. 왜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아는 사람도 없는 타향에서 여자 혼자서 생활하기가 두려워 어머니는 두 살 먹은 나를 데리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셨다고 했다.
평양에 돌아와서도 어린 나를 데리고 친정집에 가서 거의 구걸하다시피 하면서 근근이 먹고 살았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의지할 데가 없어서인지 열심히 교회를 다니셨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를 쫓아 열심히 교회에 다니던 생각이 난다. 교회에 가면 찬송가 부르는 것이 신나고 교회 목사님이 예뻐해 주는 것도 좋아 열심히 다녔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고집이 세고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어머니께 야단을 많이 맞았다. 내가 말을 잘 안 들으면 어머니는 나한테 ‘애비 잡아먹은 년’이니 ‘니 애비가 사람 귀찮게 굴고 사람 속 썩이더니 니가 그 피 받았냐?’ 하면서 신세 한탄을 하곤 했다.
평양에 있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4년 정도 다녔는데 학비는 무료였다. 열한 살까지 학교를 다닌 것 같다. 학교에 가면 공부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동무들과도 놀고 해서 좋았다. 나는 달리기를 잘해서 ‘이어달리기’ 선수도 했다.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래도 그때 기억이 제일 좋게 남아 있다.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놀고 싶으면 놀고 했으니.
어머니는 남의 집 고용살이도 하고, 아침에 도시락 싸들고 나가서 남의 집 밭도 매주고 빨래도 해주고 했다. 그러다가 내가 학교를 다닐 쯤에는 양말 짜는 기계를 빌려다가 집에서 양말 짜는 일을 했다. 나는 학교에 갔다 오면 어머니가 하는 일을 돕곤 했다.
내가 열네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재혼을 하셨다. 새아버지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데리고 왔다. 오빠는 스무 살쯤 되었고 언니는 열여섯 살이었는데 그 언니는 함께 산 지 얼마 안 되어 시집을 갔다. 새아버지하고는 같이 있고 싶지 않았지만 그 오빠하고는 잘 놀았다.
기생집 수양딸로 보내져
어머니와 나 둘이서만 살다가 아버지라는 사람하고 함께 사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란 소리도 안 나오고 그 앞에 잘 나가지도 않았다. 어머니에게도 정이 떨어져 반항을 하곤 하니깐 어머니하고도 사이가 갈라졌다.
어머니는 나를 기생을 기르는 집에 수양딸로 보냈다. 그때 내 나이가 열다섯 살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그 집에 가서 노래를 불러보고 합격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수양아버지에게서 40원을 받고 몇 년 계약으로 나를 그 집에서 살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도 집에 있는 것이 거북살스럽고 싫어서 그편이 오히려 속 시원하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수양딸로 간 집은 평양부 경제리 133번지였다. 그 집에는 나보다 먼저 온 양딸이 한 명 더 있었다. 나는 그 집에서 금화라고 불렸다. 그 언니하고 나는 평양 기생권번에 같이 다녔다. 그 권번은 2층집이었는데 대문에 큰 간판도 있고 생도도 300명이나 있었다. 나는 2년 정도 권번에 다니면서 춤, 판소리, 시조 등을 열심히 배웠다.
권번에서 졸업증을 받게 되면 정식 기생이 되어 영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열아홉 살이 되어야 관에서 기생 허가를 내주었다. 졸업하던 해 내 나이가 열일곱 살이라 졸업을 하고도 영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양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허가를 받아보려고 애를 많이 썼다. 내가 나이보다 몸이 성숙하여 양아버지는 나이를 늘려 이야기했지만 관에서는 실제 나이가 열일곱 살이라 안 된다고 했다.
국내에서 우리를 데리고 영업을 할 수 없었던 양아버지는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집에서 함께 수업을 받았던 언니와 나는 양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가 1941년, 내가 열일곱 살 나던 해였다. 양아버지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어머니에게 연락을 하여 중국으로 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떠나는 날 어머니는 노란 스웨터를 사가지고 평양역까지 나와서 배웅해 주었다.
일본군에 빼앗긴 처녀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에서 안동다리를 건너 산해관으로 갈 때 양아버지가 일본 헌병에게 검문을 당했다. 양아버지는 헌병 초소에 들어가 몇 시간 만에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며칠을 갔다. 가면서 기차에서 자기도 하고 여관에서 자기도 했다. 북경에 가면 장사가 잘된다고 하여 양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북경까지 갔다.
북경에 도착하여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일본 군인이 양아버지를 불렀다. 여러 명 있는 중에서 계급장에 별 두 개를 단 장교가 양아버지에게 “당신들 조선 사람들이지?” 하고 물었다. 양아버지가 우리는 중국에 돈 벌러 온 조선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그 장교는 돈 벌려면 너희 나라에서 벌지 왜 중국에 왔냐고 하면서 “스파이지? 이쪽으로 와라” 하면서 양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언니와 나는 따로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골목 하나를 지나가니 뚜껑 없는 트럭이 한 대 서 있었다. 거기에는 군인들이 대략 40~50명 정도 타고 있었다. 우리에게 그 트럭에 타라고 해서 안타겠다고 하니깐 양쪽에서 번쩍 들어 올려 태웠다. 조금 있다가 양아버지를 데리고 간 장교가 돌아온 후 트럭이 곧 떠났다. 그 장교는 운전석 옆에 탔다. 우리는 하도 놀라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트럭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울었다. 가다보니 뒤에 모양이 같은 트럭이 한 대 더 따라오고 있었다.
오후에 잡혀 트럭을 타고 하룻밤을 지나갔다. 가다가 총소리가 나면 다 내려서 트럭 아래 들어가 엎드려 있었다. 차 안에서 주먹밥을 한번 주었다. 군인들이 건빵을 건네주기도 했지만 웅크리고 앉아 우느라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음날 컴컴할 때쯤 트럭에 탄 사람들이 모두 내렸다. 군인 몇 명이 우리를 어떤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 사람들이 도망치고 비어 있는 집이었다.
컴컴하고 정신도 없어 그날은 대체 거기가 어딘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언니하고 나는 방에 들어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있더니 낮에 양아버지를 끌고 갔던 장교가 방에 들어와 나를 포장친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언니하고 떨어지는 것만도 무서워서 안 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힘에 끌려 옆방에 가니 그 장교는 나를 끌어안으며 옷을 벗기려 했다. 안 벗으려고 하다가 옷이 다 찢겨져버렸다. 결국 그 장교에게 내 처녀를 뺏겼다. 그날 밤 나는 그 장교에게 두 번이나 당했다.
다음날 날이 밝기 전에 그 장교는 방에서 나갔다. 나는 찢겨진 옷으로 얼기설기 몸을 가리고 앉아 울었다. 그 장교는 나가면서 이제 그런 옷은 여기서 입지도 못한다고 했다. 장교가 나간 후 나는 옆방에 언니가 있을까 해서 포장을 들추어 보았다. 누런 군복을 입은 군인이 누워 있고 그 언니도 찢긴 옷으로 몸을 가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나는 놀래서 다시 포장을 내렸다. 날이 밝고 군인이 간 뒤 언니가 포장을 밀치며 내게 왔다. 둘은 한심하고 기막혀서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 언니도 많이 반항을 하다가 여기저기 맞았다고 헀다. 나는 나대로 장교와 싸우느라 옆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지긋지긋한 위안부 생활
조금 있으니 바깥에서 여자들 목소리가 들렸다. 조선말 소리였다. 여자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여기엔 어떻게 왔니?” 하고 물었다. 언니가 이러저러해서 오게 됐다고 말을 하니 “왔으니 이젠 할 수 없지. 여기서 도망치기는 글렀어. 팔자니 하고 그냥 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날 포장쳐진 두 방에 군인들이 나무로 침대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우리는 방 하나씩을 배정받고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우리가 있었던 집은 문이 두 개나 있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집이었다. 그 집 옆에는 부대가 있었다. 나중에 군인들이 이야기해 준 것으로는 그곳이 철벽진이라고 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중국인 마을인데 일본 군대 때문인지 중국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 집에는 여자들만 다섯 명이 있었다. 스물두 살 먹은 시즈에가 나이가 제일 많았고 미야코와 사다코는 열아홉 살이라고 했다. 시즈에는 나와 언니에게 일본 이름을 지어줬다. 나는 아이코, 언니는 에미코라고 했다. 쌀과 부식은 옆에 있는 부대에서 군인들이 가져다주었다. 밥은 여자들끼리 당번을 정해 서로 돌아가면서 했다. 그러나 내가 제일 나이가 어려 빨래와 밥을 가장 많이 했다. 가끔 군인들에게 밥을 갖다 달라고 하면 자기들 먹으려고 한 밥과 국을 갖다 주기도 했다. 군인들이 건빵 같은 것은 몰래 갖다 주기도 했다. 의복은 군인들이 입다가 버린 광목 내의 같은 것을 입었다. 그리고 간혹 중국 사람들이 집에 두고 간 옷을 군인들이 갖다 주어 입기도 했다.
시즈에는 일본말을 아주 잘했다. 시즈에는 주로 장교들만 상대했다. 미야코와 사다코는 자기들이 먼저 와 있었다고 자기들이 상대하기 싫은 거친 군인들은 우리에게 보내곤 하였다. 다같은 처지에 있으면서 텃세하는 게 보기 싫어 나는 그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시즈에는 서울에서 왔다고 했는데 미야코와 사다코와는 잘 어울리지 않아서 어디서 왔는지, 왜 오게 됐는지 모른다.
그 집에는 방이 모두 다섯 개 있었다. 방에는 모포가 씌워진 침대가 있고 방문 옆에는 세수대야를 놓아두었다. 시즈에는 우리한테 소독물이 든 병을 주었다. 그것을 세수대야에 풀면 분홍빛깔이 나는데 군인들을 받고 나면 씻으라고 했다.
우리를 직접 관리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부대가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 나가려 하면 보초가 물어봤다. 그러나 아는 데가 없기 때문에 어디 갈 수도 없었다. 군인들이 오면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방에 들어갔다. 한 달 정도 있다 보니 노상 오는 군인들이 오고 새로운 사람들은 없었다. 우리는 이 사람들만 전속으로 받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군인들은 토벌을 많이 나갔다. 일주일에 삼사일은 밤에 토벌을 나가 새벽녘에 돌아오곤 했다. 토벌을 하고 돌아올 때는 군인들이 노래하면서 행진을 하고 왔다. 그러면 우리도 일어나 있어야 했다. 보통은 군인들이 오후에 왔지만 토벌하고 온 날은 아침부터 군인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하루에 일곱 여덟 명의 군인들을 받아야 했다.
오후에 군인들이 오면 한 명이 삼십 분 정도 머물다가 갔다. 저녁 때 군인들이 올 때는 술을 먹고 와서 “노래를 해라, 춤을 춰라” 하면서 사람을 아주 성가시게 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 나는 뒤뜰에 숨곤 했다. 그러다 군인이 나를 찾아내면 더 거칠게 굴었다.
군인들은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방에 들어갔기 때문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 고정적이었다. 들어와서 삼십 분 정도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는 군인이 있는가 하면 얌전하게 있다가 가는 군인도 있었다. 어떤 군인은 들어와 내 머리를 자기 사타구니에 처박고 성기를 빨라고 했다. 또 일이 끝나면 세숫대야 물에 자기 성기를 닦아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때는 비위가 틀려 반항이라도 하면 늘어지게 맞았다.
군인들은 자기들이 삿쿠(콘돔)를 가지고 왔다. 우리에게 배당되어진 삿쿠는 없었다. 일주일에 한번 후방에서 군의가 졸병을 데리고 와서 검사를 했다. 바쁘면 건너뛰는 주도 있었다. 군의가 온다고 하면 열심히 소독약으로 닦았다. 군의가 와서 진료해 보고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누런빛이 나는 606호 주사를 놓았다. 그것을 맞고 트림을 하면 코로 냄새가 올라와 아주 역겨왔다.
월경을 할 때쯤이 되면 군의에게 솜을 달라고 해서 모아 두었다가 썼다. 생리 때도 군인을 받았다. 받고 싶지 않아도 군인들이 들어오면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솜을 말아서 피가 밖으로 새나오지 않게 깊이 넣고 군인을 받았다. 그렇게 하다보면 나중에 솜이 나오지 않아 고생할 때도 있었다. 모아 둔 솜이 없으면 헝겊을 잘라 조그맣게 말아서 넣기도 했다.
군인들이 오지 않은 오전시간에는 우리들은 빨래도 하고, 가운데 방에 모여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워낙 성격이 고분고분하지도 못하고, 그저 어떻게 하면 도망칠까 하는 궁리만 하고 있어서 에미코 언니 말고는 다른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우리에게 오는 군인들은 부대에서 허락을 받고 오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군인들이 돈을 내는지 어쩐지 전혀 몰랐는데, 얼마 지나 시즈에로 부터 사병들은 1원 50전, 장교들이 긴 밤 자는 데는 8원을 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누구한테 군인들이 돈을 내냐고 하니깐 우리가 그 돈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위안부 생활을 그만둘 때까지 군인들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었다. 시즈에가 뭘 알고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부대의 군인이 우리들에게 와서 무조건 빨리 보따리를 싸라고 했다. 옷을 싸고 있는데 빨리 나와서 차를 타라고 재촉해서 정신없이 그곳을 떠났다. 그곳에 머문 지 두 달이 지났을 때였다. 트럭 두 대에는 이미 군인들이 다 타고 있었다. 장교는 긴 칼을 차고 말을 타고 있었다. 우리는 하루해가 지기 전에 새로운 곳에 도착했다. 처음 있었던 곳에서 많이 떨어지지는 않았는데 더 시골 같은 곳이었다. 총소리가 먼저 있었던 곳보다 더 많이 났다.
이번의 위안소는 먼저 집보다는 작았다. 방은 포장으로 칸막이를 한 것이 아니라 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별로 생활이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는 군인의 수가 좀 줄어든 것 같았다. 군인들이 토벌 나가는 횟수가 더 많아졌는데 아침에 우리에게 올 때는 술병을 들고 오는 군인도 많았다. 먼저 있었던 곳에서보다 사는 것이 더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와서도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지만 궁리했다. 에미코 언니랑 도망갈 방도를 여러 가지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곳 길을 전혀 몰라 나가도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나갈 때는 꼭 같이 나가자고 언니하고 약속을 했다. 시즈에는 나이도 나보다 많고 여러 가지 보살펴 주는 것이 있었지만 그래도 제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에미코 언니였기 때문이다.
은전장수와의 탈출
새로운 곳으로 옮긴 지 한 달 조금 지났을 때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조선인 남자가 내 방에 들어왔다. 원래 군인 이외는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곳에 조선인 여자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부대 군인들이 모두 토벌 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보초 눈을 피해 들어왔다고 했다. 그 사람은 자기는 조선에서 온 은전장사라고 했다. 나는 반가운 마음 반 불안한 마음 반해서 “조선인이걸랑 나갈 때 나를 좀 데리고 나가달라”고 했다. 조선인이건 일본인이건 남자는 다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 사람도 나에게서 자기의 욕구를 채웠다. 그리고서는 그냥 가려 하길래 그냥 붙들고 늘어졌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그냥 갈 수 있냐고, 만약 그냥 나가면 소리를 지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옆방에는 안 들리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만약 옆방에서 에미코 언니가 듣고 자기도 가겠다고 하면 군인들에게 발각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나에게 어떻게 끌려왔느냐, 나이는 몇 살이냐고 물어봤다. 자기는 한군데 있지 않고 온 중국을 돌아다니는 사람이니 따라다니려면 아주 힘들고 위험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다가 죽어도 좋고 못 따라가면 내버려도 좋으니 여기서만 같이 나가 달라고 애원을 했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내가 그 사람과 위안소를 빠져나온 것은 새벽 두세 시쯤인 듯하다. 챙길 것도 없었지만 아무것도 안 가지고 그저 빈 몸으로 따라나섰다. 하도 정신이 없어 어떻게 부대 있는 골목을 빠져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군인들이 모두 토벌하러 나갔다 해도 보초는 있었을 텐데 눈에 안 띈 게 천운인 듯싶다.
북경에서 끌려간 지 넉 달 만에 그곳을 도망 나온 것이다. 이미 여름이 지나고 계절은 가을로 들어설 때였다. 그 사람은 걸어가다가 중국 사람이 버리고 간 빈 집에 들어가서 옷가지를 챙겨 나에게 입으라고 했다. 그 사람은 지리도 잘 알고 비어 있는 집도 잘 찾아냈다. 그 사람은 중국말을 아주 잘해서 중국사람 행세도 곧잘 했다. 나는 중국말도 못하고 행여 잡힐까 봐 무섭기도 해서 그 사람 뒤만 따라다녔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를 마누라라고 소개하였다. 그 사람은 평양에서 광성고보를 나왔고 고향이 평안남도 대동군 남형제산면이었다. 고향에 아들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일본말도 잘하고 글씨도 잘 썼다. 평양으로 돌아가자고 하니깐 자기는 평양에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 사람은 중국 천지를 다 아는 것 같았다. 소주, 북경, 남경 등 온 데를 다 돌아다녔다. 그 사람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잘 몰랐다. 어림잡아 중국 사람의 부탁을 받아 아편을 중간에서 전달해 주는 일을 하는 것 같았다.
1942년 내 나이 열여덟 살 겨울에 아이가 들어섰다. 그 사람은 아이를 낳으려면 한군데 정착해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살 장소를 상해에 정했다. 상해에 내려 황포강 다리를 건너 불란서 조계로 가서 살았다. 거기에는 53개국 영사관이 있었다. 일본조계나 영국조계는 상대방한테 습격을 당해 불안하다고 해서 불란서 조계로 간 것이다.
내가 열아홉 살 먹은 해 음력 9월 20일에 첫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그리고 45년 내가 스물한 살 먹은 해 정월달에 아들을 낳았다. 상해에서 두 아이를 모두 낳은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송정양행이라는 전당포를 경영하였다. 돈은 중국 사람이 대고 장사는 우리 두 사람이 했다. 돈을 빌려 주기도 했다. 이득금은 돈을 댄 중국 사람과 나누어 가졌다. 장사는 그럭저럭 잘되었다.
반겨주는 이 없는 고국으로
해방이 되자 유일평이라는 거류민 단장이 조선에 돌아가야 하는 사람은 배를 타라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1946년 6월에 배를 타고 한국으로 나왔다. 2층으로 된 큰 배에 광복군도 같이 타고 나왔다. 그때 뱃삯으로 어른은 1,000원씩을 받고 아이는 500원씩을 받았다. 그래서 3,000원을 주고 우리 네 식구는 그 배를 탔다.
배가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호열자가 생겼다고 해서 바로 내리지 못하고 배 안에서 26일간을 기다리다가 내렸다. 그리고는 서울 장충단 수용소에서 3개월간 지냈다. 그곳에서 큰아이는 코렐라에 전염되어 죽었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자 남편은 방을 얻어야겠다면서 아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어떻게 아는 사라 집의 방 하나를 빌려 우리는 10월에 수용소를 나가게 되었다.
박복한 팔자로 일관되는 평생
나는 채소장사를 하고 남편도 공사장에 나가 먹고 살 돈을 벌었다. 6․25 후에는 남편이 대서소일을 하면서 통장 일도 보았다. 그리고 부대에 부식을 납품하는 일도 하였다. 하루는 부식을 납품하기 위하여 검사받으러 갔다가 그 집이 무너져 내려 남편이 깔렸다는 소식을 누가 전해줬다. 쫓아가 보니 그 집 지붕이 며칠 동안 내린 비에 무너져 있었다. 여러 명이 깔렸는데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도 있고 피범벅이 되어 숨을 겨우 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남편은 적십자병원에 옮겨졌다. 그러다 50일 만에 죽었다.
말이 남편이지 살면서 받은 고통이 참으로 컸다. 내가 위안부 생활을 한 것을 알기 때문에 술 먹고 기분 나쁘면 사람 가슴에 칼을 내리꽂는 소리를 했다. 돌아와서는 남편이 옆에 오는 것도 싫고 내 신세가 자꾸 한심한 생각이 들어 하라는 대로 안 해서 더 싫은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아들이 있는 데서 더러운 년이니 군인들한테 갈보 짓했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을 땐 내 더러운 팔자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남편을 화장하고 아들과 둘이 살았다. 너무 마음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라 죽은 후에도 크게 서럽지 않았다. 나는 공장에서 메리야스를 가져다가 강원도 등지를 다니면서 가게에 물건을 놓아 주는 일을 했다. 내가 강원도를 가면 며칠씩 집을 비우기 때문에 속초에서 가난한 집 아이 하나를 데려다 같이 있었다. 아들이 국민학교 4학년 때 바다를 보여주고 싶어서 여름방학 때 물건 놓아주러 속초에 가면서 데리고 갔었다. 그때 해수욕하러 갔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부모 복 없었던 년은 남편 복도 자식 복도 없는가 싶어 살맛을 다 잃었다.
죽으려고 여러 번을 마음먹고 약을 먹어도 죽지 못했다. 1961년에 무작정 전라도로 내려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담배와 술로 20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너무 방황하고 한심스럽게 세상을 살아가는 내 모습에 죽을 때 죽더라도 이렇게 억울하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서울로 올라왔다. 전라도에서 어떤 사람이 소개해 준 집에 식모로 들어갔다. 7년을 그 집에서 일을 해주다가 심장이 하도 뛰고 힘이 들어 87년에 그 집을 나왔다. 그때 근근이 모아 두었던 돈으로 지금 내가 사는 방을 얻었다.
동회에서 알선해 주는 취로사업에 나갔다가 우연히 원폭피해자인 한 할머니를 만났다. 나도 일본에게 억울한 일이 많고 내 인생이 하도 원통해서 어디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던 참이라 내가 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국내에서 처음 나온 위안부 증언자라고 여기저기 많이 불려 다녔다. 다시 그 기억들을 되새김질하는 것이 무척 힘이 들다.
왜 나는 남과 같이 떳떳하게 세상을 못 살아왔는지, 다른 노인네들을 보면 ‘저들은 나와 같지 않겠지’ 하고 비교하게 된다. 내 순결을 빼앗고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은 심정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내 원통한 심정을 풀 수 있겠는가. 이젠 더 이상 내 기억을 파헤치고 싶지도 않다.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나 죽어버리면 그만일 나 같은 여자의 비참한 일생에 무슨 관심이 있으랴는 생각이 든다.
되풀이하기조차 싫은 기억들
길림에서 태어나
내가 태어난 곳은 만주 길림성이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어머니는 열다섯 살에 아버지와 결혼하여 평양에서 살다가 일본 사람 등살에 중국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나를 중국에서 1924년에 낳고, 그 후 백일도 안 되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한다. 왜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아는 사람도 없는 타향에서 여자 혼자서 생활하기가 두려워 어머니는 두 살 먹은 나를 데리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셨다고 했다.
평양에 돌아와서도 어린 나를 데리고 친정집에 가서 거의 구걸하다시피 하면서 근근이 먹고 살았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의지할 데가 없어서인지 열심히 교회를 다니셨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를 쫓아 열심히 교회에 다니던 생각이 난다. 교회에 가면 찬송가 부르는 것이 신나고 교회 목사님이 예뻐해 주는 것도 좋아 열심히 다녔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고집이 세고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어머니께 야단을 많이 맞았다. 내가 말을 잘 안 들으면 어머니는 나한테 ‘애비 잡아먹은 년’이니 ‘니 애비가 사람 귀찮게 굴고 사람 속 썩이더니 니가 그 피 받았냐?’ 하면서 신세 한탄을 하곤 했다.
평양에 있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4년 정도 다녔는데 학비는 무료였다. 열한 살까지 학교를 다닌 것 같다. 학교에 가면 공부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동무들과도 놀고 해서 좋았다. 나는 달리기를 잘해서 ‘이어달리기’ 선수도 했다.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래도 그때 기억이 제일 좋게 남아 있다.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놀고 싶으면 놀고 했으니.
어머니는 남의 집 고용살이도 하고, 아침에 도시락 싸들고 나가서 남의 집 밭도 매주고 빨래도 해주고 했다. 그러다가 내가 학교를 다닐 쯤에는 양말 짜는 기계를 빌려다가 집에서 양말 짜는 일을 했다. 나는 학교에 갔다 오면 어머니가 하는 일을 돕곤 했다.
내가 열네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재혼을 하셨다. 새아버지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데리고 왔다. 오빠는 스무 살쯤 되었고 언니는 열여섯 살이었는데 그 언니는 함께 산 지 얼마 안 되어 시집을 갔다. 새아버지하고는 같이 있고 싶지 않았지만 그 오빠하고는 잘 놀았다.
기생집 수양딸로 보내져
어머니와 나 둘이서만 살다가 아버지라는 사람하고 함께 사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란 소리도 안 나오고 그 앞에 잘 나가지도 않았다. 어머니에게도 정이 떨어져 반항을 하곤 하니깐 어머니하고도 사이가 갈라졌다.
어머니는 나를 기생을 기르는 집에 수양딸로 보냈다. 그때 내 나이가 열다섯 살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그 집에 가서 노래를 불러보고 합격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수양아버지에게서 40원을 받고 몇 년 계약으로 나를 그 집에서 살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도 집에 있는 것이 거북살스럽고 싫어서 그편이 오히려 속 시원하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수양딸로 간 집은 평양부 경제리 133번지였다. 그 집에는 나보다 먼저 온 양딸이 한 명 더 있었다. 나는 그 집에서 금화라고 불렸다. 그 언니하고 나는 평양 기생권번에 같이 다녔다. 그 권번은 2층집이었는데 대문에 큰 간판도 있고 생도도 300명이나 있었다. 나는 2년 정도 권번에 다니면서 춤, 판소리, 시조 등을 열심히 배웠다.
권번에서 졸업증을 받게 되면 정식 기생이 되어 영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열아홉 살이 되어야 관에서 기생 허가를 내주었다. 졸업하던 해 내 나이가 열일곱 살이라 졸업을 하고도 영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양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면서 허가를 받아보려고 애를 많이 썼다. 내가 나이보다 몸이 성숙하여 양아버지는 나이를 늘려 이야기했지만 관에서는 실제 나이가 열일곱 살이라 안 된다고 했다.
국내에서 우리를 데리고 영업을 할 수 없었던 양아버지는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집에서 함께 수업을 받았던 언니와 나는 양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가 1941년, 내가 열일곱 살 나던 해였다. 양아버지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어머니에게 연락을 하여 중국으로 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떠나는 날 어머니는 노란 스웨터를 사가지고 평양역까지 나와서 배웅해 주었다.
일본군에 빼앗긴 처녀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에서 안동다리를 건너 산해관으로 갈 때 양아버지가 일본 헌병에게 검문을 당했다. 양아버지는 헌병 초소에 들어가 몇 시간 만에 나왔다. 그리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며칠을 갔다. 가면서 기차에서 자기도 하고 여관에서 자기도 했다. 북경에 가면 장사가 잘된다고 하여 양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북경까지 갔다.
북경에 도착하여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일본 군인이 양아버지를 불렀다. 여러 명 있는 중에서 계급장에 별 두 개를 단 장교가 양아버지에게 “당신들 조선 사람들이지?” 하고 물었다. 양아버지가 우리는 중국에 돈 벌러 온 조선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그 장교는 돈 벌려면 너희 나라에서 벌지 왜 중국에 왔냐고 하면서 “스파이지? 이쪽으로 와라” 하면서 양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언니와 나는 따로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골목 하나를 지나가니 뚜껑 없는 트럭이 한 대 서 있었다. 거기에는 군인들이 대략 40~50명 정도 타고 있었다. 우리에게 그 트럭에 타라고 해서 안타겠다고 하니깐 양쪽에서 번쩍 들어 올려 태웠다. 조금 있다가 양아버지를 데리고 간 장교가 돌아온 후 트럭이 곧 떠났다. 그 장교는 운전석 옆에 탔다. 우리는 하도 놀라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트럭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울었다. 가다보니 뒤에 모양이 같은 트럭이 한 대 더 따라오고 있었다.
오후에 잡혀 트럭을 타고 하룻밤을 지나갔다. 가다가 총소리가 나면 다 내려서 트럭 아래 들어가 엎드려 있었다. 차 안에서 주먹밥을 한번 주었다. 군인들이 건빵을 건네주기도 했지만 웅크리고 앉아 우느라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음날 컴컴할 때쯤 트럭에 탄 사람들이 모두 내렸다. 군인 몇 명이 우리를 어떤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 사람들이 도망치고 비어 있는 집이었다.
컴컴하고 정신도 없어 그날은 대체 거기가 어딘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언니하고 나는 방에 들어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있더니 낮에 양아버지를 끌고 갔던 장교가 방에 들어와 나를 포장친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언니하고 떨어지는 것만도 무서워서 안 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힘에 끌려 옆방에 가니 그 장교는 나를 끌어안으며 옷을 벗기려 했다. 안 벗으려고 하다가 옷이 다 찢겨져버렸다. 결국 그 장교에게 내 처녀를 뺏겼다. 그날 밤 나는 그 장교에게 두 번이나 당했다.
다음날 날이 밝기 전에 그 장교는 방에서 나갔다. 나는 찢겨진 옷으로 얼기설기 몸을 가리고 앉아 울었다. 그 장교는 나가면서 이제 그런 옷은 여기서 입지도 못한다고 했다. 장교가 나간 후 나는 옆방에 언니가 있을까 해서 포장을 들추어 보았다. 누런 군복을 입은 군인이 누워 있고 그 언니도 찢긴 옷으로 몸을 가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나는 놀래서 다시 포장을 내렸다. 날이 밝고 군인이 간 뒤 언니가 포장을 밀치며 내게 왔다. 둘은 한심하고 기막혀서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 언니도 많이 반항을 하다가 여기저기 맞았다고 헀다. 나는 나대로 장교와 싸우느라 옆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지긋지긋한 위안부 생활
조금 있으니 바깥에서 여자들 목소리가 들렸다. 조선말 소리였다. 여자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여기엔 어떻게 왔니?” 하고 물었다. 언니가 이러저러해서 오게 됐다고 말을 하니 “왔으니 이젠 할 수 없지. 여기서 도망치기는 글렀어. 팔자니 하고 그냥 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날 포장쳐진 두 방에 군인들이 나무로 침대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우리는 방 하나씩을 배정받고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우리가 있었던 집은 문이 두 개나 있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집이었다. 그 집 옆에는 부대가 있었다. 나중에 군인들이 이야기해 준 것으로는 그곳이 철벽진이라고 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중국인 마을인데 일본 군대 때문인지 중국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 집에는 여자들만 다섯 명이 있었다. 스물두 살 먹은 시즈에가 나이가 제일 많았고 미야코와 사다코는 열아홉 살이라고 했다. 시즈에는 나와 언니에게 일본 이름을 지어줬다. 나는 아이코, 언니는 에미코라고 했다. 쌀과 부식은 옆에 있는 부대에서 군인들이 가져다주었다. 밥은 여자들끼리 당번을 정해 서로 돌아가면서 했다. 그러나 내가 제일 나이가 어려 빨래와 밥을 가장 많이 했다. 가끔 군인들에게 밥을 갖다 달라고 하면 자기들 먹으려고 한 밥과 국을 갖다 주기도 했다. 군인들이 건빵 같은 것은 몰래 갖다 주기도 했다. 의복은 군인들이 입다가 버린 광목 내의 같은 것을 입었다. 그리고 간혹 중국 사람들이 집에 두고 간 옷을 군인들이 갖다 주어 입기도 했다.
시즈에는 일본말을 아주 잘했다. 시즈에는 주로 장교들만 상대했다. 미야코와 사다코는 자기들이 먼저 와 있었다고 자기들이 상대하기 싫은 거친 군인들은 우리에게 보내곤 하였다. 다같은 처지에 있으면서 텃세하는 게 보기 싫어 나는 그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시즈에는 서울에서 왔다고 했는데 미야코와 사다코와는 잘 어울리지 않아서 어디서 왔는지, 왜 오게 됐는지 모른다.
그 집에는 방이 모두 다섯 개 있었다. 방에는 모포가 씌워진 침대가 있고 방문 옆에는 세수대야를 놓아두었다. 시즈에는 우리한테 소독물이 든 병을 주었다. 그것을 세수대야에 풀면 분홍빛깔이 나는데 군인들을 받고 나면 씻으라고 했다.
우리를 직접 관리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부대가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 나가려 하면 보초가 물어봤다. 그러나 아는 데가 없기 때문에 어디 갈 수도 없었다. 군인들이 오면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방에 들어갔다. 한 달 정도 있다 보니 노상 오는 군인들이 오고 새로운 사람들은 없었다. 우리는 이 사람들만 전속으로 받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군인들은 토벌을 많이 나갔다. 일주일에 삼사일은 밤에 토벌을 나가 새벽녘에 돌아오곤 했다. 토벌을 하고 돌아올 때는 군인들이 노래하면서 행진을 하고 왔다. 그러면 우리도 일어나 있어야 했다. 보통은 군인들이 오후에 왔지만 토벌하고 온 날은 아침부터 군인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하루에 일곱 여덟 명의 군인들을 받아야 했다.
오후에 군인들이 오면 한 명이 삼십 분 정도 머물다가 갔다. 저녁 때 군인들이 올 때는 술을 먹고 와서 “노래를 해라, 춤을 춰라” 하면서 사람을 아주 성가시게 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 나는 뒤뜰에 숨곤 했다. 그러다 군인이 나를 찾아내면 더 거칠게 굴었다.
군인들은 자기가 들어가고 싶은 방에 들어갔기 때문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 고정적이었다. 들어와서 삼십 분 정도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는 군인이 있는가 하면 얌전하게 있다가 가는 군인도 있었다. 어떤 군인은 들어와 내 머리를 자기 사타구니에 처박고 성기를 빨라고 했다. 또 일이 끝나면 세숫대야 물에 자기 성기를 닦아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때는 비위가 틀려 반항이라도 하면 늘어지게 맞았다.
군인들은 자기들이 삿쿠(콘돔)를 가지고 왔다. 우리에게 배당되어진 삿쿠는 없었다. 일주일에 한번 후방에서 군의가 졸병을 데리고 와서 검사를 했다. 바쁘면 건너뛰는 주도 있었다. 군의가 온다고 하면 열심히 소독약으로 닦았다. 군의가 와서 진료해 보고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누런빛이 나는 606호 주사를 놓았다. 그것을 맞고 트림을 하면 코로 냄새가 올라와 아주 역겨왔다.
월경을 할 때쯤이 되면 군의에게 솜을 달라고 해서 모아 두었다가 썼다. 생리 때도 군인을 받았다. 받고 싶지 않아도 군인들이 들어오면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솜을 말아서 피가 밖으로 새나오지 않게 깊이 넣고 군인을 받았다. 그렇게 하다보면 나중에 솜이 나오지 않아 고생할 때도 있었다. 모아 둔 솜이 없으면 헝겊을 잘라 조그맣게 말아서 넣기도 했다.
군인들이 오지 않은 오전시간에는 우리들은 빨래도 하고, 가운데 방에 모여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워낙 성격이 고분고분하지도 못하고, 그저 어떻게 하면 도망칠까 하는 궁리만 하고 있어서 에미코 언니 말고는 다른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우리에게 오는 군인들은 부대에서 허락을 받고 오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군인들이 돈을 내는지 어쩐지 전혀 몰랐는데, 얼마 지나 시즈에로 부터 사병들은 1원 50전, 장교들이 긴 밤 자는 데는 8원을 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누구한테 군인들이 돈을 내냐고 하니깐 우리가 그 돈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위안부 생활을 그만둘 때까지 군인들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었다. 시즈에가 뭘 알고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부대의 군인이 우리들에게 와서 무조건 빨리 보따리를 싸라고 했다. 옷을 싸고 있는데 빨리 나와서 차를 타라고 재촉해서 정신없이 그곳을 떠났다. 그곳에 머문 지 두 달이 지났을 때였다. 트럭 두 대에는 이미 군인들이 다 타고 있었다. 장교는 긴 칼을 차고 말을 타고 있었다. 우리는 하루해가 지기 전에 새로운 곳에 도착했다. 처음 있었던 곳에서 많이 떨어지지는 않았는데 더 시골 같은 곳이었다. 총소리가 먼저 있었던 곳보다 더 많이 났다.
이번의 위안소는 먼저 집보다는 작았다. 방은 포장으로 칸막이를 한 것이 아니라 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별로 생활이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는 군인의 수가 좀 줄어든 것 같았다. 군인들이 토벌 나가는 횟수가 더 많아졌는데 아침에 우리에게 올 때는 술병을 들고 오는 군인도 많았다. 먼저 있었던 곳에서보다 사는 것이 더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와서도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지만 궁리했다. 에미코 언니랑 도망갈 방도를 여러 가지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곳 길을 전혀 몰라 나가도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나갈 때는 꼭 같이 나가자고 언니하고 약속을 했다. 시즈에는 나이도 나보다 많고 여러 가지 보살펴 주는 것이 있었지만 그래도 제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에미코 언니였기 때문이다.
은전장수와의 탈출
새로운 곳으로 옮긴 지 한 달 조금 지났을 때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조선인 남자가 내 방에 들어왔다. 원래 군인 이외는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곳에 조선인 여자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부대 군인들이 모두 토벌 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보초 눈을 피해 들어왔다고 했다. 그 사람은 자기는 조선에서 온 은전장사라고 했다. 나는 반가운 마음 반 불안한 마음 반해서 “조선인이걸랑 나갈 때 나를 좀 데리고 나가달라”고 했다. 조선인이건 일본인이건 남자는 다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 사람도 나에게서 자기의 욕구를 채웠다. 그리고서는 그냥 가려 하길래 그냥 붙들고 늘어졌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그냥 갈 수 있냐고, 만약 그냥 나가면 소리를 지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옆방에는 안 들리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만약 옆방에서 에미코 언니가 듣고 자기도 가겠다고 하면 군인들에게 발각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나에게 어떻게 끌려왔느냐, 나이는 몇 살이냐고 물어봤다. 자기는 한군데 있지 않고 온 중국을 돌아다니는 사람이니 따라다니려면 아주 힘들고 위험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다가 죽어도 좋고 못 따라가면 내버려도 좋으니 여기서만 같이 나가 달라고 애원을 했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내가 그 사람과 위안소를 빠져나온 것은 새벽 두세 시쯤인 듯하다. 챙길 것도 없었지만 아무것도 안 가지고 그저 빈 몸으로 따라나섰다. 하도 정신이 없어 어떻게 부대 있는 골목을 빠져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군인들이 모두 토벌하러 나갔다 해도 보초는 있었을 텐데 눈에 안 띈 게 천운인 듯싶다.
북경에서 끌려간 지 넉 달 만에 그곳을 도망 나온 것이다. 이미 여름이 지나고 계절은 가을로 들어설 때였다. 그 사람은 걸어가다가 중국 사람이 버리고 간 빈 집에 들어가서 옷가지를 챙겨 나에게 입으라고 했다. 그 사람은 지리도 잘 알고 비어 있는 집도 잘 찾아냈다. 그 사람은 중국말을 아주 잘해서 중국사람 행세도 곧잘 했다. 나는 중국말도 못하고 행여 잡힐까 봐 무섭기도 해서 그 사람 뒤만 따라다녔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를 마누라라고 소개하였다. 그 사람은 평양에서 광성고보를 나왔고 고향이 평안남도 대동군 남형제산면이었다. 고향에 아들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일본말도 잘하고 글씨도 잘 썼다. 평양으로 돌아가자고 하니깐 자기는 평양에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 사람은 중국 천지를 다 아는 것 같았다. 소주, 북경, 남경 등 온 데를 다 돌아다녔다. 그 사람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잘 몰랐다. 어림잡아 중국 사람의 부탁을 받아 아편을 중간에서 전달해 주는 일을 하는 것 같았다.
1942년 내 나이 열여덟 살 겨울에 아이가 들어섰다. 그 사람은 아이를 낳으려면 한군데 정착해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살 장소를 상해에 정했다. 상해에 내려 황포강 다리를 건너 불란서 조계로 가서 살았다. 거기에는 53개국 영사관이 있었다. 일본조계나 영국조계는 상대방한테 습격을 당해 불안하다고 해서 불란서 조계로 간 것이다.
내가 열아홉 살 먹은 해 음력 9월 20일에 첫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그리고 45년 내가 스물한 살 먹은 해 정월달에 아들을 낳았다. 상해에서 두 아이를 모두 낳은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송정양행이라는 전당포를 경영하였다. 돈은 중국 사람이 대고 장사는 우리 두 사람이 했다. 돈을 빌려 주기도 했다. 이득금은 돈을 댄 중국 사람과 나누어 가졌다. 장사는 그럭저럭 잘되었다.
반겨주는 이 없는 고국으로
해방이 되자 유일평이라는 거류민 단장이 조선에 돌아가야 하는 사람은 배를 타라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1946년 6월에 배를 타고 한국으로 나왔다. 2층으로 된 큰 배에 광복군도 같이 타고 나왔다. 그때 뱃삯으로 어른은 1,000원씩을 받고 아이는 500원씩을 받았다. 그래서 3,000원을 주고 우리 네 식구는 그 배를 탔다.
배가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호열자가 생겼다고 해서 바로 내리지 못하고 배 안에서 26일간을 기다리다가 내렸다. 그리고는 서울 장충단 수용소에서 3개월간 지냈다. 그곳에서 큰아이는 코렐라에 전염되어 죽었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자 남편은 방을 얻어야겠다면서 아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어떻게 아는 사라 집의 방 하나를 빌려 우리는 10월에 수용소를 나가게 되었다.
박복한 팔자로 일관되는 평생
나는 채소장사를 하고 남편도 공사장에 나가 먹고 살 돈을 벌었다. 6․25 후에는 남편이 대서소일을 하면서 통장 일도 보았다. 그리고 부대에 부식을 납품하는 일도 하였다. 하루는 부식을 납품하기 위하여 검사받으러 갔다가 그 집이 무너져 내려 남편이 깔렸다는 소식을 누가 전해줬다. 쫓아가 보니 그 집 지붕이 며칠 동안 내린 비에 무너져 있었다. 여러 명이 깔렸는데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도 있고 피범벅이 되어 숨을 겨우 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남편은 적십자병원에 옮겨졌다. 그러다 50일 만에 죽었다.
말이 남편이지 살면서 받은 고통이 참으로 컸다. 내가 위안부 생활을 한 것을 알기 때문에 술 먹고 기분 나쁘면 사람 가슴에 칼을 내리꽂는 소리를 했다. 돌아와서는 남편이 옆에 오는 것도 싫고 내 신세가 자꾸 한심한 생각이 들어 하라는 대로 안 해서 더 싫은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아들이 있는 데서 더러운 년이니 군인들한테 갈보 짓했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을 땐 내 더러운 팔자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남편을 화장하고 아들과 둘이 살았다. 너무 마음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라 죽은 후에도 크게 서럽지 않았다. 나는 공장에서 메리야스를 가져다가 강원도 등지를 다니면서 가게에 물건을 놓아 주는 일을 했다. 내가 강원도를 가면 며칠씩 집을 비우기 때문에 속초에서 가난한 집 아이 하나를 데려다 같이 있었다. 아들이 국민학교 4학년 때 바다를 보여주고 싶어서 여름방학 때 물건 놓아주러 속초에 가면서 데리고 갔었다. 그때 해수욕하러 갔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부모 복 없었던 년은 남편 복도 자식 복도 없는가 싶어 살맛을 다 잃었다.
죽으려고 여러 번을 마음먹고 약을 먹어도 죽지 못했다. 1961년에 무작정 전라도로 내려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담배와 술로 20년을 보냈다. 그러다가 너무 방황하고 한심스럽게 세상을 살아가는 내 모습에 죽을 때 죽더라도 이렇게 억울하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서울로 올라왔다. 전라도에서 어떤 사람이 소개해 준 집에 식모로 들어갔다. 7년을 그 집에서 일을 해주다가 심장이 하도 뛰고 힘이 들어 87년에 그 집을 나왔다. 그때 근근이 모아 두었던 돈으로 지금 내가 사는 방을 얻었다.
동회에서 알선해 주는 취로사업에 나갔다가 우연히 원폭피해자인 한 할머니를 만났다. 나도 일본에게 억울한 일이 많고 내 인생이 하도 원통해서 어디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던 참이라 내가 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국내에서 처음 나온 위안부 증언자라고 여기저기 많이 불려 다녔다. 다시 그 기억들을 되새김질하는 것이 무척 힘이 들다.
왜 나는 남과 같이 떳떳하게 세상을 못 살아왔는지, 다른 노인네들을 보면 ‘저들은 나와 같지 않겠지’ 하고 비교하게 된다. 내 순결을 빼앗고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은 심정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내 원통한 심정을 풀 수 있겠는가. 이젠 더 이상 내 기억을 파헤치고 싶지도 않다.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나 죽어버리면 그만일 나 같은 여자의 비참한 일생에 무슨 관심이 있으랴는 생각이 든다.
1) 이토 다카시(伊藤孝司) 한국어판 책에는 ‘확녹현(獲鹿県)’이라고 하였다(이토 다카시, 『종군위안부 - 종군위안부출신할머니27인의 증언』, 눈빛, 1997, 71쪽). 이 지역은 호오루현(獲鹿県, 획녹현)으로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에 속한다.
2) 허베이성에 주둔하였던 일본군 독립보병제32대대 主計軍曹(회계일을 맡은 일본군 중사)의 회고담. 秦郁彦, 『慰安婦と戰場の性』, 新潮社, 1999, 81쪽에서 재인용
3) 뉴스타파, 「목격자들-“나의 소원은...” 故 김학순 할머니의 마지막 증언」 https://www.youtube.com/watch?v=rgBj0dEJy50&t=8s (검색일 2016.12.10.) 여기에는 첫 증언을 비롯하여 사망 직전까지 국민기금 등에 대한 김학순의 주장을 육성으로 볼 수 있다.
4) 『경향신문』, 1992.2.27, 「박영숙의원·김학순씨 ‘올해의 여성’상」
5) 앞의 뉴스타파 영상 및 『한겨레신문』, 1996.8.15, 「민간기금 거부하는 김학순 할머니 “원하는 건 일본 공식사죄뿐”」
2) 허베이성에 주둔하였던 일본군 독립보병제32대대 主計軍曹(회계일을 맡은 일본군 중사)의 회고담. 秦郁彦, 『慰安婦と戰場の性』, 新潮社, 1999, 81쪽에서 재인용
3) 뉴스타파, 「목격자들-“나의 소원은...” 故 김학순 할머니의 마지막 증언」 https://www.youtube.com/watch?v=rgBj0dEJy50&t=8s (검색일 2016.12.10.) 여기에는 첫 증언을 비롯하여 사망 직전까지 국민기금 등에 대한 김학순의 주장을 육성으로 볼 수 있다.
4) 『경향신문』, 1992.2.27, 「박영숙의원·김학순씨 ‘올해의 여성’상」
5) 앞의 뉴스타파 영상 및 『한겨레신문』, 1996.8.15, 「민간기금 거부하는 김학순 할머니 “원하는 건 일본 공식사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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