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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20년, 끝나지 않은 삶의 혁명
[22기 1강] | 백승종, 역사학자
2014.04.09 | 백승종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던 날, ‘앎을 곧장 살아내고 배움은 바로 실천하는’ 동학과 함께 22기 평화나눔 아카데미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생활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예언과 마을에 주목하는 역사학자 백승종 교수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이 되기를 꿈꾸었던 동학혁명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요. 그 간절한 염원을 느끼며 내 안에 모셔진 하늘을 마주했던 시간, 그날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뵙게 되니 너무나 반갑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120년 전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이 죽었고 그들을 보내고 10년쯤 지난 후에는 해월 최시형 선생도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오는 길 비가 내리고 기분이 음울해지니 그들 생각이 나더군요.
지금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제 눈에는 여러분이 바로 150년 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최제우로 보이고, 최시형, 전봉준, 김개남 그리고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수만 명의 동학농민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흐름은 한 중심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가장자리에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동학 또한 그러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맹인 최시형이, 일개 양반의 서자에 불과한 최제우가 바로 그들이 아니었던가요. 그들과 함께 동학의 길을 갔던 사람들 역시 우리들 자신, 평범한 시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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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그 장엄한 실패의 혁명
“1894년 1월,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 당시의 고부군에서 전봉준이 백성 1000명과 함께 관아로 쳐들어갑니다. 당시 군수는 조병갑이었는데 붙잡혀 혼이 난 뒤 도망쳤고, 농민들은 탐관오리를 쫓아내라는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말한 뒤 해산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전봉준을 비롯한 일당들을 잘 조사하고 알아서 조치하라며 장흥에 있던 이용태라는 관리를 보냅니다. 고부군으로 온 이용태는 1000명의 동학농민들을 색출해서 못살게 굽니다.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죠.
결국 3월에 다시 모인 농민들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붙들어 세우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겠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외치며 본격적으로 기병합니다. 그리고 서울로 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일대를 한 바퀴 돕니다. 사람을 모으고 후방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였죠. 몸집을 불린 후 음력 4월, 한 달 만에 전라도를 석권하고 전주성으로 들어갑니다. 전주 자체가 동학의 해방구가 된 겁니다.
수십만 군대가 들고 일어나서 서울로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겁이 난 고종은 청나라에 사인을 보냅니다. 고종이 한 결정적인 실수입니다. 고종이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자 1884년 5월, 갑신정변 때 체결되었던 톈진 조약에 의해서 일본 군대도 같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지도부는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외국군대가 활동할 빌미를 줘서는 안되겠다 싶어 협상을 하죠.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돌아가겠다. 외국군대도 돌아가라고 하라.’ 갑오농민혁명을 일으킨 지도부는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돌아가겠습니까? 목적이 있으니 돌아가지 않았고, 청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6월 21일 결국 일본군이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자, 서울에 있는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이제 전주에서 너희들이 올라오지 않으면 이 나라는 망한다. 서울에 올라와 판을 정리해줘라.” 그래서 전봉준이 결심하죠. “지금은 농사철이라 올라갈 수가 없으니 농사를 마치고 9월에 올라가겠다.” 음력 9월 10일, 농사가 마무리 되자 서울을 향해 출발합니다.
남쪽에서 전봉준을 따르는 사람이 약 10만 명, 최선생을 따라 온 사람이 약 10만 명, 합쳐서 20만 명이 공주 논산에 모입니다. 그 외 다른 여러 지역, 황해도, 경상도, 충청도에서도 동학농민들이 움직이는데 그 숫자가 10만 명, 총 30만 명이 일어납니다. 12월, 드디어 공주 우금치에서 최후 결전이 벌어집니다. 관군을 ‘거느린’ 일본군과 우리의 농민군대가 싸웁니다. 전쟁은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숫자가 무의미하죠. 공주 쪽에 20만 명이 있었는데 당시 투입된 일본군은 600명이었습니다. 그 600명이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2만에서 5만 명에 해당되는 동학농민을 죽였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그때 이미 확실하게 적을 파악한 겁니다.
한반도를 집어삼키려면 다시 싸워야 할 대상은 고종도, 관군도 아닌 농민이라는 것을요. 12월 2일, 동학혁명군의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이 전라도 순창의 피노리라는 곳에서 잡힙니다. 그리고 1895년 3월 29일,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이 한날한시에 사형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이 사건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피 묻은 씨알은 남아, 끝나지 않는 노래
“그러나 정말 끝났다고 생각하십니까?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이후, 살아남은 동학농민들이 의병이 됩니다. 1894년에 수만 명이 죽었는데도 다시 일어나 1908년까지 의병으로 싸운 것이죠. 그러다 1909년 일본 정예부대의 남한대토벌 작전을 통해 사실상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의병이 사라지게 됩니다. 일부 살아남은 사람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넘어가죠. 일단은 그렇게 판이 정리됩니다.
1919년에는 3.1운동이 일어납니다. 3월 한 달 사이 200만 명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죠. 그 중심에 동학이 있었습니다. 불교, 기독교가 함께 했지만 실질적으로 주력이 되었던 것은 동학입니다. 기독교마저도 동학의 자금을 받았고, 민족지도자 33인의 최고 대표는 동학의 3대 교조인 손병희 선생이었습니다. 이후 일제 시대에 많은 한국 사람들을 사로잡은 종교인 증산교와 원불교 모두 동학에서 갈라져 나온 흐름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동학의 무리를 흡수한 것이죠. 이렇게 동학은 1894년에 끝나지 않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동학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까? 동학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동학이 끝나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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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라는 이름 아래 깨져버린 공동체
“18, 19세기 조선은 물질적 성취를 이뤄가고 있었습니다. 생산량이 늘자 세금도 늘어났죠. 그러나 증세조치는 부자에게는 세금을 깎아주고 가난한 사람이 책임지는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국가가 의지해서 세금을 걷을 정도로 탄탄한 마을조직을 이루고 있던 소농들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실제로 1862년서부터 1894년부터는 해마다 전국의 몇 군데에서는 민란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마을에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집단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운동이 시작된 것은 잘못된 개방정책의 결과였습니다. 잘못된 개방정책의 핵심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가져오지 않아도 되는 것을 사들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내놓지 말아야 할 것을 내놓는 것입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맺은 후 일본은 영국제 공산품을 싼 가격에 한국시장에 풀어놓았습니다. 엄마, 누나가 부족한 살림을 메꾸는 방법이었던 가내수공업이 무너졌죠.
일본이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농산물 가격이 싸야 합니다. 농산물 가격이 떨어져야 농촌 사람들이 도시로 가고, 도시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싼 농산물을 먹일 수 있어야만 저임금 체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가까운 한국의 평야지대, 전라도에서 값싼 쌀을 사갑니다. 실컷 농사 지어놓으면 지주들이 쌀을 일본사람에게 다 팔아버리는 겁니다. 소작농은 먹을 것이 있을까요? 없죠. 그 전에는 먹을 것이 많았습니다.
전라도에는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온냉장고는 없었죠. 고속도로도 철도도 없었기에 대부분의 농산물이 서울로 가지 못하고 그 지역에 남아있었습니다. 이진사가 아무리 쌀이 많아도 하루 5번 이상 밥을 잡수시진 못하죠. 썩힐 수 없으니 남에게 빌려줄 수밖에 없고, 나는 그걸 먹으면 그만입니다. 갚을 수 없으면 도망가면 됩니다. 이진사도 신경 안 씁니다. 갚을 능력이 없다는 걸 알지만, 썩힐 수 없어 주는 거니까요. 빚 많은 사람이 옆 군으로 도망가도 잡아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옆 동네 김진사에게 빚진 놈이 나한테 도망 오니까 농사 짓는 데는 지장이 없는 거죠. 그게 한국 소농사회의 건전함이었고, 한편으로는 사회적 합의였습니다.
연리가 4~50%가 되도 그 이자를 실제로 감당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자율이 높았다고 착취를 한 것이 아닙니다. 한 명만 갚으면 4명이 안 가져다줘도 된다 해서 50%가 된 거죠. 그리고 사람들이 착해서 도망갔다가도 살만하면 갚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회는 대단히 평화로운 나눔의 사회였습니다. 어쨌거나 쌀을 나눠주니 이진사에게는 권위가 생기고 혹독하게 굴면 김서방이 남몰래 가서 불을 놓아버리면 그만인 거죠. 익살이 있는 사회였던 겁니다. 산업이 발달하지 않았지만 먹고 살 수 있었고, 가난해도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나라 문을 열고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타격이 오기 시작한 겁니다.”
동학이 꿈꾸었던,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이 되는 세상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또 다른 한 축은 예언입니다. 정감록이죠. 성리학 사회였던 조선에서 지도부는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성리학적 사회의 좋은 점은 지식을 독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군자가 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한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이런 생각에 따라 평민들 가운데서도 배움이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나옵니다. 이렇게 형성된 평민지식인들은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문제에 발언권을 행사하면서 세상을 뜯어고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신분제가 있기에 개입할 수 없었죠.
이 사람들은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정치를 할 수 없으니 종교의 이름을 빌려서 사회운동이자 정치운동이자 경제운동인 총체적 의미에서의 문화운동을 구사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사람들을 움직이기 위해 예언을 활용했습니다. 어떤 증상이 있으면 망조다, 새 세상이 와야 한다, 그러려면 특별한 인간, 진인(眞人)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 18세기에 등장한 예언문화운동은 수많은 역모사건을 연출하며 구심점을 형성해 갑니다.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잡혀서 죽고 귀향을 가도 시간이 갈수록 뿌리는 깊어지고 가지는 무성해졌죠. 그런 경로를 거쳐 1861년이 되자 하나의 큰 꽃이 폈습니다. 최제우가 나타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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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가 1861년 갑자기 하늘의 계시를 받아 새로운 종교를 연 것이 아니라 18세기부터 계속 축적된 평민 지식인들의 염원과 역량이 농민의 바람과 만나서 동학이라고 하는 위대한 사상이 나온 것입니다. 그 위대한 사상은 한 마디로 집약이 됩니다. 인내천(人乃天)을 많이 알고 계시겠지만 그로는 다 설명할 수 없고, 이천식천(以天食天)입니다. 2대 교조 까막눈 최시형 선생이 이야기한 그 말에 뜻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 꼼지락거리는 모든 동식물은 위도 아래도 없이 가장 신령하다. 서로가 서로를 먹여 살린다. 단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이천식천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다’입니다.
최선생이 보기에 모두는 하늘입니다. 남자도 하늘, 여자도 하늘, 어른도 아이도, 주인도 하인도 하늘. 그러나 사람만이 하늘이 아닙니다. 여기에 특별함이 있습니다. 짐승도 하늘입니다. 개도 하늘, 고양이도 하늘. 식물도 하늘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다 하늘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 중심이 없습니다. 생명중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지고(地高)의 존재들이고, 가장 높은 존재들이 가장 높은 존재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것이죠.
그 당시에 전봉준과 그를 따르는 많은 동학농민군들은 서울에 가서 권력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지 않았을 겁니다. 세상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죠. 그러면 왜 그랬을까요? 최제우는 새로운 세상을 후천개벽의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세상이 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불합리한 세상이 선천이고, 우리가 살 행복한 세상이 후천인데 그 세상을 열어야 한다, 후천개벽이죠. 그를 위해서는 상생의 사회가 되어야 했고 서로가 죽이는 것이 아닌 서로가 살리는 사회가 되어야 했습니다.
동학에서는 해원상생(解寃相生)이라는 말을 합니다. 원망을 풀고 서로가 서로를 살리자. 그러는데 값진 희생이 없을 수 없는 것이죠. 전봉준을 비롯한 그들은 필승의 신념이 있었을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 세상의 문을 열기 위한 희생의 제단에 몸 바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삶은, 자체로서 완결된 삶이기도 하지만 다른 삶을 위한 먹이가 되는 것, 이천식천이기도 하니까요. 그들이 희생함으로써 다음 세상에 빛을 줄 수 있는 것이죠. 최시형은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나가 최시형인 세상이었죠. 그들은 벽에 부딪혔다고 느꼈을 때도 일어났고, 그렇게 일어선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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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은 침도 함부로 뱉지 않고 한겨울에 뜨거운 세숫물도 식혀서 버렸다고 합니다. 그 뜨거운 물에 죽을 미물이 있을까 봐. 자신의 생명이 그렇게 위태로움에도 모든 생명,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다 똑같이 귀히 여겼습니다. 최시형 선생은 늘 도망다니면서도 밥을 먹더라도 공짜로 먹는 법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나면 같이 일을 하고 새끼를 꼬고, 하루를 자고 그 집을 떠나가더라도 한겨울이 아니면 나무를 심고 떠나갔어요. 나무를 다시 볼 시간이 있겠어요?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동학은 ‘믿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동학은 ‘하는 것’입니다.
동학의 혁명성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가시적인 것을 이야기합니다. 폐정개혁안에 나오는 천민의 대우를 개선한다던가 문벌을 타파한다던가 맨 마지막 조항의 경자유전, 토지를 농사짓는 백성들에게 나눠주자고 했던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동학농민운동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의미에서의 혁명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동학의 혁명성은 보다 본질적인 데 있습니다. 최시형 선생에게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말씀을 계속 하시는데, 어느 노 부부가 최선생을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이 나이가 됐는데 죽어야 될 모양이다.” “왜 그러소”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빌어먹을 며느리여서 집으로 보낼 수도 없고 우리가 살 수도 없고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 했답니다. 그러니 최선생이 “그것참 좋은 공부의 밑천입니다. 며느님을 하늘님이라고 생각하고 한 달 동안 모셔보십시오.” 그 두 부부가 돌아가서 최선생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한 달 동안 화가 치밀어 올라도, 딴 소리 하고 싶어도 며느리가 하는 이야기를 하늘이 하는 이야기라 생각하며 받들었답니다. 두 달 뒤에 찾아온 노부부가 “선생님 감사합니다. 우리 며느리가 달라졌어요” 감사를 표하자 최선생이 하는 말씀이 “달라진 것이 어디 며느리뿐이겠소. 우리가 다 달라졌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동학이 가진 혁명성의 본질은 인간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몇 번이고 강조합니다만, 이런 이야기가 평소에도 늘 고상하게 살아온 학자나 정치가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겹고 남루하고 비참할 수도 있는 평민들의 일상으로부터 내재적 혁명을 꿈꾸고, 그것이 나 한 사람에서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도 함께 동화되어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세상을 꿈꾸었다는 것이 동학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러한 내적 혁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동학은 아직 끝나지 않은 혁명입니다.”
정리_ 신소현(나눔문화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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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1 March 2016 · Shared with Public
1919년에는 3.1운동이 일어납니다.
3월 한 달 사이 200만 명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죠.
그 중심에 동학이 있었습니다. 불교, 기독교가 함께 했지만
실질적으로 주력이 되었던 것은 동학입니다. 기독교마저도 동학의 자금을 받았고,
민족지도자 33인의 최고 대표는 동학의 3대 교조인 손병희 선생이었습니다.
이후 일제 시대에 많은 한국 사람들을 사로잡은 종교인
증산교와 원불교 모두 동학에서 갈라져 나온 흐름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동학의 무리를 흡수한 것이죠.
이렇게 동학은 1894년에 끝나지 않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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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기 10강]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외국인의 눈으로 본 한반도 통일의 길
Comments
박주억
동학의 근본인 인내천은
인간도 하늘과 같은 존재이니
귀히 여기라는 것인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요,
좋은말씀 새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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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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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jin Park
한일합방을 하기도 전에 조선이 망할것을 손병희가 예측하고 독립운동을 사전에 준비를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3.1운동이 그냥 갑자기 시작된게 아니고 실은 동학에서 10년이상의 준비기간이 있었다는 이야기니 손병희 선생의 혜안이 엄청나긴 하죠.. 고종승하하면서 이때가 3.1운동을 하기로 하는데 손병희랑 친한 불교의 한용운을 불러 불교의 참여를 요청하고 한용운이 이왕할거 개신교도 부르자고 해서 개신교도 참여하게 된거죠. 근데 천주교는 너무 친일성이 강해서 안불렀죠...
· Reply · 4 y · Edited
백승종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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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기송
교수님 강의를 페북에서나마 접할 수 있어서 위안이 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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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감사합니다!
· Reply · 4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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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동학을 따르던 군중은 대개가 농민.
사농공상이라는 이조 500년 신분사회에서 위의 신분들을 떠받드는, 선비들을 먹여살려야 했기에 그들의 저항과 불만을 용납못하고 양반들은 소모사를 설치하여 다시 동학도를 잡아들이고!
어찌보면 끝없는 계급투쟁의 연속인듯도 같구요.
저 국회의 화이트 무리들(친일, 농민의 아들, 딸도 있겠지만)이 자본의 교주인 대기업과 결탁하여 농민계층(도시빈민, 노동자 등) 사회적약자의 원의를 모르고 끝없는 불평등을 빚어내고!
농자천하지대본이 누구를 위하고 섬기는 말인지!
· Reply · 4 y · Edited
백승종
맞는 말씀입니다. 불평등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 심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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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oon Kang
동학도들의 수난사를 잠깐 봤는데 정말 눈물이 안날 수 없는 슬프디 슬픈 ...
· Reply · 4 y
백승종
그게 다 우리들의 이야기지요.
· Reply · 4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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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ng Soo Cho
동학은 믿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다. 실천은 곧 혁명이다.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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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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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규
육당 최남선이 기획하였다는 말은 없네요. 선언서도 썼고. 육당전서 말미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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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육당은 글을 잘 쓰기 때문에 초안을 잡은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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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규
육당전서를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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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그것은 거짓말이예요. 3.1운동의 실질적인 기획은 최린이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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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규
장준하는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와 같이 아낄 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1]'라며 그를 친일파라고 비판하는 것을 비난 하였다. '그를 경애하는 스승이며 민족 사상 고취를 위해 노력했다'고 하고, '선생은 약관 18세에 이미 궤란을 기도에서 구하려는 큰 뜻을 품고 우선 민족의 명영을 영원히 부지하려는 원대한 의도 밑에 문화의 황무지를 개척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이래 종시일관하여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민족의 재흥을 위하여 발분망식하였다. 선생이 우리 역사학에 전심하여 마침내 사학의 태두로 일세의 숭앙을 받기까지에 이른 근본 연유도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며 그가 한국 역사학 연구에 끼친 공로를 높이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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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규
최린 선생과 최남선 선생의 인물 프로파일을 비교해 보시면 누가 주도적 역할을 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더구나 육당은 자기 스스로 삼일운동을 주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할 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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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그럼 그대로 믿으시면 됩니다. 저는 생각을 달리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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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태
손병휘가 전체를 이끌었으니, 그 사위인 최린이 대리해서 다른 주도자인 것이 분명! 최육당이 그랬다는 것은 여러모로 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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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
끝나지 않은 삶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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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우리와 함께 계속되어야겠지요.
· Reply · 4 y
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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