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4

고물장수 위장해 일제 맞선 교사, 그 딸의 '아버지 찾기' - 오마이뉴스

고물장수 위장해 일제 맞선 교사, 그 딸의 '아버지 찾기' - 오마이뉴스


고물장수 위장해 일제 맞선 교사, 그 딸의 '아버지 찾기''국내 사회주의자 최후 집결체' 경성콤그룹의 핵심 이관술... 오는 17일 추념식 열려
21.04.13 14:10l최종 업데이트 21.04.13 14:15l
장호철(q9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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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이관술 1902-1950" 표지에 나온 이관술. 1933년 반제동맹으로 수감되었을 때의 사진이다. 모진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 사회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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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 이관술(李觀述, 1902~1950)을 이름으로나마 처음 만난 건 지난해 봄, 최백순의 <조선공산당 평전>을 읽으면서였다. '알려지지 않은 별, 역사가 된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만만찮은 저작을 읽으면서 나는 당황했고, 이동휘와 박헌영, 김재봉과 권오설 등 그나마 익숙한 이름들 사이로 튀어나오는 낯선 이름들의 이력 앞에서 절망했다.

그것은 임시정부를 포함해, 망명지 중국 땅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면서 나름 잘 안다고 여겼던 한국 현대사의 어떤 부분에 대해 내가 '완전히 무지'하다는 통렬한 깨달음 탓이었다.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을 비롯한 5인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기사는, 그런 상황에서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간신히 더듬어낸 기록이었다(관련 기사: 조선공산당도 '일제 통치 타도·조선 독립'이 목표였다).

경성콤그룹의 이관술... 알고 보니 옛 동료의 외조부였다

<조선공산당 평전> 마지막 장 '당 재건을 위한 분투'의 피날레를 장식한 인물이 이관술이었다. 조선공산당(아래 조공)은 1925년 창당 이후 노동자·농민·청년·학생·여성운동 등 각 부문 운동을 지도하고 신간회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불과 3년 뒤인 1928년 12월,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조선공산당 재조직에 관한 결정서)와 조공의 승인을 취소한다는 결정으로 실질적으로 해체됐다.

이후 해방까지 각 분파 별로 벌인 당 재건 운동은 모두 실패했지만, 가장 괄목할 만한 활동으로 조공의 명맥을 이어간 조직이 1933년 조직된 경성 트로이카(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와 1939년 이를 계승한 경성 코뮤니스트 그룹(경성콤그룹)이었다. 이관술은 경성 트로이카의 일원이었던 이재유(1905~1944, 2006 독립장)가 서대문경찰서에서 탈출한 뒤 잠행 시기를 함께한 동지로 경성 콤그룹을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의 최후 집결체'로 평가받는 경성 콤그룹은 이관술이 이재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가 된 박헌영(1900~1956), 지리산 유격대인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1906~1953), <조선소설사>를 쓴 국문학자 김태준(1905~1949) 등과 함께한 조공 재건 조직이었다.

<조선공산당 평전>에 실린 조그만 사진 속에서, 감옥의 벽면을 등지고 선 이관술은 마치 친근한 이웃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며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서른둘이던 1933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작성한 일제 주요 감시대상 인물 카드 속의 그는 박박 깎은 머리 때문에 선머슴처럼 앳돼 보였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기사를 쓴 뒤, 나는 한동안 이들 혁명가를 잊고 지냈다. 이관술을 다시 호명해 준 이는 밀양에 사는 초임 시절의 제자였다. 제자가 보낸 문자는 "독립운동가 이관술, 그리고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라는 논문의 표지 이미지였는데 그게 '손옥희 선생님 외조부' 얘기라는 거였다. 나는 화들짝 일어나 그 친구에게 바로 전화를 넣었다.

손옥희 선생은 1984년 3월, 같은 국어과 교사로 경주의 한 여학교에 함께 부임해 4년간 같이 근무한 임용 동기였다. 손옥희와 월성 손씨 인척으로 같은 경주 양동마을 출신인 제자와 통화하여 손옥희가 '이관술의 외손녀'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는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과 갈등의 비극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재형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몇 가지 자료로 이관술의 생애를 살펴본 뒤, 손옥희 선생과 통화했고 지난 3월의 마지막 금요일 울산에서 그를 만났다. 내가 1988년에 학교를 옮긴 뒤 처음이니, 그새 무려 33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순을 넘기며 무관해져서일까. 우리는 이웃처럼 편안하게 동행했다.

우리는 그의 차로 이관술의 고향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입암리에 들렀다. 너른 들과 물이 넉넉한 입암리는, 학성 이씨 집성촌으로 울산 일대에 잘 알려진 양반 마을이었다.

이관술 유적비의 수난

이미 남의 소유가 된 생가 부근, 이관술의 사촌 동생 집 앞 공터에 선 '우국지사 학암(鶴巖) 이관술 유적비'가 화사한 벚꽃 사이로 외로웠다. 1992년 문민정부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서훈 방침을 발표하자 고무된 유족들이, 학암을 기리기 위해 1996년 사촌 동생 이수은 소유의 주유소 안쪽에 세웠던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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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땅속에 묻혔다가 이관술의 종질 이일환 씨 집 앞 공터에 세워진 이관술 유적비.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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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돌비는 지역 반공 보수 성향 단체의 반발과 강제 철거 협박, 경찰과 안기부의 압력 등 탓에 이듬해 자진 철거되어 땅속에 파묻혀야 했다. 묻었던 비석을 파내어 지금 자리에 다시 세운 건 지난 2019년이다.

상당한 부농의 맏이로 태어난 이관술은 21세 때 경성 중동고등보통학교에 진학, 1925년에는 동경제대보다 더 들어가기 어렵다는 동경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가 공부했다. 1929년 졸업 뒤 귀국해 바로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지리와 역사 교사로 부임했다. 이관술은 강압적 훈도로 유명한 군국주의 교육 방식에 익숙한 여느 교사들과는 달리 어떤 상황에도 체벌하지 않는, 진보적 교육관을 가져 인기가 높았다.

당시 광주학생운동(1929) 이후, 그의 제자들도 이듬해 1월의 '경성 시내 여학생 연합 시위'에 동참했는데 이를 지켜보던 이관술은 곧 동덕의 독서회를 지도하면서 본격적인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만주사변(1931) 이후 조선반제국주의동맹 경성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1933년 1월 구속돼 첫 징역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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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관술이 남긴 동덕여고보 앨범에 수록된 교무실 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 양복 입은 이가 이관술이다.
ⓒ 손옥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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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하게 남은 앨범에 남은 사진들. 왼쪽부터 이관술, 여동생 이순금, 제자 이효정
ⓒ 손옥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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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탄하게 살아온 이관술, '전설적 혁명가' 이재유를 만나다

1930년대의 국내 독립운동은 지하에서 대중운동을 조직한 사회주의운동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지식인 중심의 조직 대신, 공장과 농촌으로 파고 들어가 노동자와 빈농을 조직해야 한다는 등의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따라, 이들은 노동계급의 당인 공산당 건설을 목표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관술의 동덕여고보 제자들 가운데 그의 이복동생 이순금, 걸출한 노동운동가로 뒷날 김태준과 결혼한 박진홍(1914~?), 이효정(1913~2010, 2006 건국포장), 1932년 그의 딸을 낳은 박선숙 등이 사회주의운동 전면에서 함께 싸웠다. 특히 이순금과 박진홍, 이효정은 경성 트로이카의 지하 혁명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숱한 여학생들이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한 것은 "사회주의가 일본에 맞서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는 이효정 증언(2006)과 이어진 것이었다.

'전설적 혁명가'로 불린 이재유가 1933년 김삼룡, 이현상과 조직한 경성 트로이카는 노동자 파업을 잇달아 조직해내면서 새로운 항일운동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가석방된 이관술이 서대문경찰서에서 탈출하여 잠행하던 이재유를 만난 것은 1934년 9월 중순이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영서지방 산중을 2개월 이상 전전하며 정세를 살폈다. 열네살에 고향을 떠나와 혼자서 자기 삶을 꾸려온 이재유에게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부잣집 도련님 이관술은 인생과 혁명가의 길을 배웠다. 이관술이 해방 때까지 '변장술의 귀재'라 불릴 정도의 도피술로 일경을 농락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의 경험 덕분이었다.

둘은 양주군 공덕리에 정착, 농민으로 변신해 1년 반 동안 은거했다. 산골 농막에서 이재유가 글을 쓰고, 필적이 좋은 이관술이 철필로 등사원지에 새겨서 발행한 기관지 <적기> 제1호(1936.10.20.)는 40여 쪽 20부를 발행했다. <적기>는 3호까지 발행되었으나, 1936년 12월 이재유가 체포되면서 이관술은 강원도 쪽으로 몸을 피했다.

떠돌이 장돌뱅이 행색으로 지방을 전전하던 이관술은 1939년 1월, 석방된 김삼룡을 만나 조직 재건에 합의한다. 뒤이어 출소한 이현상과 수배 중이던 권오직, 박진홍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공산주의자 조직인 동시에 국내의 마지막 저항운동 조직"(안재성, <이관술 1902-1950>) 경성콤그룹을 결성했다.

이관술은 기관지 <코뮤니스트>를 4호까지 발행하고 고물 장수로 변장하여 조직 확대를 위해 전국을 순회했다. 잠행 시기의 이관술의 행적은 거의 전설에 가깝다. 그는 고물 장수 외에도 구두닦이, 깨진 솥을 수선하는 솥땜장이 등으로 위장해 일제 경찰의 눈을 속였다. 순탄하게 살아온 소위 '부르주아'가 놀랍게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이념에 대한 확신과 진정성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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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복역할 때 동생 학술에게 보낸 편지. 끝에 둘째딸 성옥에게 보내는 글도 포함되어 있다. 이관술은 자필로 기관지를 냈다.
ⓒ 손옥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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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연말, 이관술은 출소한 박헌영을 찾아 그를 경성콤그룹의 지도자로 영입했다. 이미 한 조직의 지도자로 성장해 있었던 이관술이 굳이 새로운 지도자를 영입한 것은, 그가 "뛰어난 두뇌와 헌신성으로 일제 하 국내 노동운동의 최고 지도자였음에도 권력욕이나 소영웅심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안재성, 같은 책)는 평가와도 이어지는 대목이다.

수배와 잠행 시기의 전설 이관술

1941년 경성콤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로 이현상과 김삼룡에 이어, 이관술도 1941년 1월 수배 6년 만에 체포됐다. 그는 고문으로 얻은 폐병을 앓으면서 3년 여를 복역하다가 1943년 12월 말 병보석으로 입암리로 돌아왔다. 재수감 명령을 받은 직후인 1944년 3월 31일, 그는 아내와 딸의 방에 찾아와 잠든 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말없이 보따리 하나를 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솥땜장이를 따라 전라도를 전전하던 이관술은 대전에서 넝마주이로 해방을 맞았다. 그를 비롯한 경성콤그룹에서는 조공 재건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박헌영을 지도자로 추대했다. 1945년 9월 19일 '통일 재건 조선공산당'(총비서 박헌영)이 출범할 때 이관술은 중앙검열위원으로 선출됐고, 재정부장 겸 총무부장을 맡았다.

보도를 통해 사회주의자들의 항일 투쟁을 알고 있던 민중들은, 당시 공산당과 지도자에 대해 상당한 지지를 보냈다. 당원은 100만에 육박했고, 우익성향 잡지 <선구>의 최초 정치 여론조사(1945.12.)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이관술이 '가장 양심적이고 역량 있는 정치지도자' 5위에 뽑힐 정도였다.

그러나 봄날은 짧았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논의에서 반탁에 나선 우익의 공격으로 좌익은 궁지에 몰렸고, 공산당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경찰은 조공 간부와 공산당 본부가 있는 근택빌딩 지하실의 인쇄소 조선정판사 직원이 공모해 회사 인쇄시설로 1200만 원이라는 거액의 위조지폐를 찍어 내어 조선공산당 자금으로 사용했다며 당 재정부장 이관술과 해방일보사 사장 권오직을 지명 수배한 것이다.

1946년 5월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을 계기로 미 군정이 좌익분열 및 조선공산당 고립화 정책을 펴면서 좌익 탄압을 가중하던 시기였다. 혐의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던 이관술은 1946년 7월 체포됐고, 경찰이 제기한 증거들의 모순을 이후 4개월에 걸쳐 진행된 재판에서 지적했지만, 재판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형 확정 뒤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이관술은 생애 세 번째이자, 마지막 징역살이에 들어갔다. 1947년 이관술은 옥중에서 울주군 언양의 반곡초등학교를 세우는 데에 540평 농지를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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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반곡초등학교 교사 앞에 1956년에 세운 공적비. 1947년 학교를 세울 때 토지를 기부한 4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관술은 옥중에서 540평을 기부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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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사 위폐범으로 몰려 전쟁 중 처형

1950년 7월 8일, 이관술은 대전 골령골 뒷산 계곡에서 2천여 명 좌익사범과 함께 처형됐다. 향년 48세, 15년간의 항일 투쟁, 9년여의 징역과 10년여의 수배 등으로 점철된 파란 많은 혁명가의 삶은 그렇게 비극으로 끝났다.

막내딸 이경환(1935~ )의 '아버지 찾기'는 부친이 학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난 2005년께부터 시작됐다. 열다섯에 아버지를 여읜 어머니(이경환씨)를 대신해, 딸 손옥희가 나서면서다. 손옥희는 아직도 삭이지 못한 어머니의 한을 위해서 모친 대신 외조부의 행적을 찾아 나선 것이다.

한편 전쟁을 전후해 이관술의 가족들도 결딴이 났다. 그는 본부인 사이에 딸 넷, 박선숙과는 딸 하나를 뒀다. 본부인과 둘째, 셋째 딸은 전쟁 중에 행방불명됐다. 박선숙과 그가 낳은 딸도 전쟁 이후 연락이 끊겼다.

장녀 정환은 1948년 결혼했는데, 면서기였던 남편 박동철은 장인의 좌익활동 때문에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그는 집안을 보호하려고 보도연맹에 가입한 관술의 이복동생 학술과 함께, 울주군 언양읍 운화리 대운산 골짜기와 청량읍 삼정리 반정고개에서 학살되었다.

막내딸 경환과 맏이 정환의 딸 박경희가 원고로 부당한 불법행위를 저지른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은 2013년이다. 2015년 3월 27일, 대법원은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고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 부당하다"며 "국가는 유족에게 1억6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이 승소는 유족들이 할 수 있었던 해원(解冤)의 첫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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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4월 17일 오후 1시부터 울산 입암마을 이관술 유적비 앞에서 이관술 선생 71주기 추념식이 베풀어진다. 이어서 임성욱 교수의 “정판사 ‘위폐’ 사건의 진실” 강연도 열린다.
ⓒ 이관술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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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학암 이관술 기념사업회의 창립은 이런 저간의 상황 변화에 힘입은 것이었다. 창립 세미나에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2019)의 저자 임성욱 한국외대 교수는 이 사건을 미 군정이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고자 '기억의 조작'을 통해 반공주의 체제를 공고화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희생의 시간과 그 한은,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출범하자, 손옥희는 '정판사 위폐 사건'의 진상 조사를 신청했다. 그러나 2010년 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할 때까지 신청 사건은 조사되지 않았다. 2020년, 손옥희는 어머니 이경환 명의로 외조부의 서훈을 신청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 결과' '광복 이후의 행적' 때문에 서훈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고 통지해왔다.

"할아버지는 ,엄마나 내가 그려온 '좋은 사람'이 틀림없었지요. 그러나 사실이 은폐된 왜곡된 권력의 역사 속에 희생되었던 시간, 한 따위는 후손에게 물려 주고 싶지 않습니다.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면서 땅속에 묻혔던 공적비를 캐내어 다시 세우긴 했는데, 그걸 제자리에 되돌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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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경환(1935~ ) 할머니는 2014년부터 치매를 앓으면서 과거의 기억을 상당 부분 잃었다. 사진은 2019년 8월 요양원에서.
ⓒ 손옥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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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의 막내딸 이경환은 지금 양동마을 인근의 요양원에 있다. 2014년부터 앓기 시작한 치매로 그는 기억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부친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할 때, 열다섯살이었던 막내딸은 올해 여든여섯(86세)이 됐다. 손옥희는 엷은 미소를 띠며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엄마는 치매로 기억을 잃은 게 차라리 다행인지도 몰라요.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죽고 헤어지기만 했던 슬픈 가족사는 물론이고 아버지, 공산주의, 빨갱이 같은 고통스러운 기억도 놓아버리는 게 오히려 행복하지 않을까요?"
때로 그들이 지키고자 한 이념에 분단의 귀책을 묻곤 하지만, 그들은 일제에 맞서 타협하지 않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하여 되찾은 해방 공간에서 돌연 동족에게 학살되어 버린 이들에게, 역사란 무엇일까. 나라의 기림은커녕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유족들 세월은 또 무엇인가. 이관술의 삶과 투쟁은, 비어 있는 우리 한국 현대사의 한 갈피를 여전히 아프게 환기하고 있다.

[관련 기사]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http://bit.ly/1vlnw2
"이관술의 위폐범 누명 벗겨주고 싶었다" http://bit.ly/BsLxE


덧붙이는 글 | 이관술의 삶과 투쟁은 대체로 안재성 지음 <이관술 1902~1950>의 기록을 따랐습니다. 안 작가는 <경성 트로이카>를 읽은 손옥희와 만나 이관술의 비어 있는 행적을 채워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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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Tikhonov
tddS2hponsorfed  · 
''리버럴'하다는 문 대통령의 시절인데도, 전설적인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인 이관술에 대한 유족들의 서훈 신청을 보훈처가 기각했다는 것입니다. '해방 이후 행적이 문제'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해방 이후 행적'이 뭐가 '문제'일까요? 그는 조선 공산당 재정 부장을 맡았지만, 그 보직을 맡았던 그 당시에는 조선 공산당은 합법 단체이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것은 '정판사 지폐 위조 사건'인데, 이 사건이 조작됐을 가능성은 압도적입니다. 그 다음에 대전 형무서에 있다가 전쟁의 발발과 함께 대한민국의 군경에 의해 불법 학살을 당한 것입니다. 그의 사위도, 그리고 그의 이복 동생도 그 때 대한민국의 군경에게 학살을 당했습니다. 유일한 '죄'는 '빨갱이와의 친인척 관계'이었죠. 그도, 그와 함께 학살 당한 그의 가족들도 이북 정권과 하등의 연락 관계도 없었습니다. 어떤 '행적'이 '문제'이었을까요? 
해방 이후에 사회주의적 독립 운동이 내포했던 해방적 근대의 가능성들은 북에서도 남에서도 철저히, 폭력적으로 부정 당했습니다. 이관술의 동지들 중에서는 일부는 이북에서 숙청 당하고 (박헌영), 일부는 이남에서 불법 학살 당하거나 (김삼룡), 처형을 당하거나 (김태준), 평생 동안 시찰과 경찰의 고문들을 당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효정). 상당수는 이관술의 제자이었던 박진홍처럼 그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죠. 한국 근현대사는 대체로 다 잔혹했지만, 식민지 시대의 이념적 사회주의자들이 치러야 했던 희생의 정도는 정말이지 독보적이었습니다. 전례 찾기 힘들 정도죠. 이들이 꿈꾸었던 평등 중심의 근대 계획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실현되지 못한 채 이 나라의 '영원한 희망'으로 남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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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의 위폐범 누명 벗겨주고 싶었다"[인터뷰] <이관술 1902-1950> 작가 안재성
06.09.26 11:24l최종 업데이트 06.09.26 18:45l
박현주(nabi8)

지난 22일 경주에서 열린 <이관술 1902-1950> 출판기념행사에서 안재성 작가를 만났다. 그는 보라색 생활한복을 입고 행사장을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작가는 <경성트로이카>를 발표한 지 2년만에 그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경성트로이카의 주요 활동가인 이관술 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평전이다.






ⓒ 박현주
-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괜찮은지?
"얼마 전에 척추 수술을 받았다. 수술받기 전에는 팔이 자주 마비되어 글쓰기도 힘들었다. 지금은 괜찮고, 통증도 참을 만하다."

-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경성트로이카>를 쓰면서 알게 된 이관술의 개인사를 살펴보니 너무 안타까웠다. 주변의 증언을 들어보면 성격이 참 소탈하고 참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위조지폐를 찍어냈다는 것에 의심이 갔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진위 여부를 알아보고 싶었고, 위폐범이란 오명을 쓰고 죽은 이관술의 삶을 재조명해보고 싶었다.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을 알리고 싶기도 했다."

- <이관술 1902-1950>의 출판기념회를 열었고, 이관술 선생의 유족들이 참여했다. 감회가 어떠한가.
"이관술의 막내 따님인 이경환 할머니와 가족들이 나를 볼 때마다 운다. 인터뷰하느라 여러 번 내려왔는데, 그때마다 붙들고 우시고, 전화할 때도 우신다. 나와 통화하면 한 이틀간은 잠을 못 주무신다고 한다. 감격스러운 것도 있는 것 같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아버지 이야기를 써도 되는 건지 걱정스러워하는 것 같다. 그분들 마음에 맺힌 것 다 풀어졌으면 좋겠다. 자주 우시니까 조금은 시원해지지 않았을까 한다. 그분들 마음이 좀 편해진 것 같고, 그런 모습 보면 나도 좋다. 그것이 글을 쓰는 보람인 것 같다."

- 김시자 평전을 쓸 때에는 붕대를 감은 고인의 모습을 보는 환영에 시달렸다고 들었다. 이관술 선생도 실존 인물인데 그런 경우는 없었나?
"<이관술1902-1950>을 쓸 때에는 괜찮았다. 나는 이관술에게 연민의 마음이 많다. 자전거를 타고 넝마주이로 고물장수로 전국을 다니던 것 떠올리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이 안쓰럽다. 해방 후에도 양복을 입고 지낸 시간이 얼마 없었다. 또 다시 넝마주이가 되어 도피생활 했다."

- '정판사 위폐사건'은 조선공산당이 자금난 타개를 위해 위폐를 찍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동안 역사학자들이 이 사건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았나?
"자료조사를 하며 역사학자들의 연구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정판사 위폐 사건'은 재판이 끝난 후 누구도 재조사하지 못했고, 학자들도 연구하지 않았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세월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시 정황을 볼 때 조작된 것이 확실하다.

검찰의 기소내용을 보면, 1945년 10월부터 정판사 직원들이 정판사 빌딩 2층 조선공산당 사무실에서 이관술의 명령을 받고 인쇄기를 돌려 위폐를 찍었다고 발표했는데, 이때 이관술은 정판사 건물에서 근무하지도 않았다. 조선공산당이 정판사 건물에 입주하기 시작한 것은 11월 말부터이고, 완전히 입주한 것이 이듬해 1946년 1월이다. 더구나 해방된 지 한 달 반밖에 안 된 시점인데 공산당이 자금부족을 겪었다니 말이 안 된다."

- 정판사 위폐 사건의 물증이 있지 않은가.
"이 사건의 물증은 33장의 100원권 위조지폐와 징크판, 증언으로는 인쇄기술자들의 말밖에 없다. 재판관들은 정판사에서 압수한 징크판으로 100원권 지폐를 찍어보았는데, 너무 조악하여 화폐의 형태도 나오지 않았고 물증으로 제시된 33장의 위조지폐와 형태도 달랐다. 또 인쇄기술자들이 재판정에서 고문으로 허위 자백했음을 호소하기도 했다."

- 그렇다면 이 사건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
"이 사건은 김창선 등의 정판사 인쇄기술자들이 징크판을 다른 곳에 팔아넘기려다 적발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경찰이 조선공산당을 연루시키면서 확대되고 조작된 것 같다."

- <경성 트로이카>는 소설 형식인데, <이관술 1902-1950>은 소설이 아니고 평전의 형태다. 처음부터 의도한 형식인가.
"정판사 위폐 사건 같은 역사적 문제를 다루어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질까봐 소설의 형식으로 쓰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평가는 별로 들어가지 있지 않으니 평전이라기보다는 전기라고 해야 옳다."






ⓒ 박현주

- 일제하,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자들에 대하여 관심을 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인물들이 가진 헌신성에 대한 감동 때문이다. 그들은 요즘 운동에서 보기 드문 열정과 헌신성을 지니고 있다."

- 분단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이 다량 생산되었다. 아직 부족하고 정리되지 않은 것이 있는가.
"나는 작품을 쓸 때 통일이나 분단문제의 시각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노동과 계급적 관점이다. 그래서 일제치하든 해방 후든 빈부격차와 비민주에 대한 투쟁 이야기를 담고 싶은 거다. 나는 과거에 노동운동을 했었고, 그래서 노동운동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관술과 이재유 역시 노동운동을 했다. 그들은 노동운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한 것이다."

- 지난 5월에는 한전노조 민주화 투쟁 때 분신한 김시자 씨의 평전 <부르지 못한 연가>를 발표했다. 소설보다는 사실의 기록에 관심을 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내 자신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기록자라고 생각한다. 소설가로서의 명예를 바라고 글을 쓰지는 않는다. 노동운동을 할 적에도 늘 선전부장을 맡았었다. 글쓰기도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이재유도 이관술도 조직에서 선전부장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다."(웃음)

-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여순사건에 대한 작품을 구상 중이다. 지리산에 내려가 좌익, 우익유족 모두 인터뷰하고 있다. 좌익 편을 들어 글을 쓸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사실'이고, 그 사실을 기록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덧붙이는 글 | 작가 안재성 약력

1960년 경기도 용인 출생. 강원대학교 재학 중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되어 제적되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구로공단 동일제강, 청계피복노조, 태백탄광지대, 구로노동인권회관 등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1994년부터 포크레인을 운전하고 있으며, 1998년부터 경기도 이천에서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짓고 있다.

장편소설로는 <파업>(1998), <사랑의 조건>(1991), <황금이삭>(2003), 역사소설로 <경성트로이카>(200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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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소슬바람의 평화로운 책읽기5] <이관술 1902-1950>
06.09.26 

박현주(nabi8)

<경성 트로이카>의 작가 안재성이 2년 만에 새로운 책을 펴냈다. 그는 경성 트로이카의 생존자 이효정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1930년대 사회주의운동가 이재유의 삶을 복원해낸 바 있다.

이 책 <이관술 1902-1950>(사회평론, 2006)은 그 후속작이자 형제작라고 할 수 있다. 이재유의 삶과 죽음이 담긴 <경성 트로이카>가 소설의 형식을 빌었다면, <이관술 1902-1950>은 평전의 성격이다. 장르는 달라도 한국 현대사에서 사라진 '왼쪽 사람들' 이야기의 연작인 셈이다.

정치지도자 5인으로 선정되었던 이관술




▲ <이관술 1902-1950> 표지. 1932년 반제동맹으로 수감되었을 때의 사진이다. 모진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 사회평론
이 책은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로 경성 트로이카가 무너진 후에도 끊임없이 조직의 재건을 꾀하며 불굴의 의지를 보였던 활동가 이관술의 일대기를 담았다. 이관술은 고물장수, 솥땜장이, 넝마주이 등으로 위장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흩어진 조직원들을 규합하였다. 그는 외모가 수수했고, 성품은 장난꾸러기처럼 재미있고 소탈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수수한 생김새처럼 비정치적 성향을 지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높았다. 해방 직후 여론조사에서 이관술은 '가장 뛰어난 정치지도자 5인'으로 선정될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우익성향의 단체인 '선구회'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이 뽑은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는 여운형으로서 33%를 차지했고, 2위 이승만 20%, 3위 김구 17%, 4위 박헌영은 15%를 차지했다. 이관술은 13%로 5위를 차지하는데, 지지율로만 보면 김구, 박헌영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신망 높던' 지도자 이관술은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50년 6·25전쟁 직후 처형당한다.

의혹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재판정에 나온 피고인들이 고문을 당해 허위자백을 했다는 내용이 실린 <현대일보> 1946년 8월 24일자. 이 신문은 미군정에 의해 폐간되었다.

ⓒ 사회평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흔히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의 명령으로 남한 경제 교란과 공산당의 재정난 타개를 위하여 정판사에서 위조지폐 1200만원을 찍어낸 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사건에 대하여 강한 의혹을 제기하며 미군정과 친일경찰에 의한 조작 가능성을 말한다. 이 책의 저작 이유도 혼신을 다 바쳐 활동한 이관술의 누명을 조금이나마 벗겨주고자 함이다.

작가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수사 기록, 재판 기록 그리고 언론보도를 꼼꼼히 수집하고 당시 정황을 추적한다. 그 결과, 피의자 증언 외에 유죄가 될 만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결론을 얻는다. 유죄판결의 유일한 단서인 피의자 증언도 신빙성이 적다. 공산당의 명령으로 위폐를 찍었다고 말했던 인쇄기술자들이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하였다고 재판정에서 토로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관들은 피고인들에게 중형을 선고하는데, 이관술에게는 위조지폐 발행의 총책임자로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온 국민의 관심 속에서 진행된 이 사건의 재판은 모든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우익신문들은 공산당의 위조지폐 범죄를 기정사실화하여 기사를 썼고, <현대일보> 등 진보 언론은 사건 자체에 대하여 많은 의문점을 제기했다. 이에 미군정은 피고인들의 고문 주장 등의 공판내용을 가감 없이 보도한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을 폐간해 버린다.

기관지 <해방일보>에 이어 '3대 진보신문'이 사라짐으로써 조선공산당은 대중에게 직접 호소할 언로가 봉쇄되어버린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은 남한 대중에게서 지지를 잃게 되고,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재유와 함께한 일제하 사회주의 독립운동




▲ 1946년 <조선일보> 10월 18일자 기사. 이관술이 일관되게 '모르겠소'라고 답했다는 내용이다.

ⓒ 사회평론

고물장수, 넝마주이, 솥땜장이 등 보잘 것 없는 행색으로 반평생을 살았지만, 이관술은 울산의 부유한 양반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사람이다. 졸업 후에는 동덕여고에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2년 교사신분으로 '반제동맹'을 결성해 활동하다 체포되면서 고난에 찬 운동가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 후로 구속과 고문, 도피, 지하 활동이 평생토록 반복된다. 그는 세 번 체포되었고 10년간 옥살이를 했다. 1934년 경성트로이카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이재유를 만나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재건그룹'을 만든다.

이재유와는 아주 특별한 관계다. 1935년부터 2년간 이재유와 함께 도피생활을 하는데, 경기도 양주군 공덕리(지금의 서울시 창동)에서 숨어들어 농사꾼 '김대성, 김소성 형제'로 위장하여 산다.

나이가 많은 이관술이 형이었고, 이재유가 아우였다. 이름이 '대성'과 '소성'이니 '큰별, 작은별 형제'였던 셈이다. 지명수배자와 탈옥수 신세였던 이들이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에서도 발휘했던 유머와 재치에 웃음이 나온다.

이관술은 이재유와 함께 지내던 이 시기에 힘겨운 농사일을 하며 '엘리트 지식인' 때를 완전히 벗는다. 그리고 이재유에게 위장술을 배워 해방 이후까지 경찰의 체포망을 비웃는 '위장의 달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한때는 구두닦이로 위장해 경찰서 앞에서 구두를 닦으며 오히려 경찰의 동태를 감시하기도 했다. 1936년 이재유가 체포되면서 공덕리 농사꾼 생활은 막을 내린다. 이재유가 고문을 버티며 시간을 벌어준 덕에 이관술은 무사히 강원도로 피신한다.

1939년 서울로 다시 돌아온 그는 흩어진 동지들을 규합하여 '경성 콤그룹'을 결성한다. 연말에 박헌영을 영입하여 그를 조직의 지도자로 세운다. '경성 콤그룹'은 일제하 국내에서 펼쳐진 최후의 조직적 저항운동이었다. 1941년 이관술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고문으로 얻은 폐병이 심해져 병보석으로 3개월간 가석방된다.




▲ 동덕여고 교사시절 교무실에서. 왼쪽 가운데 양복 입은 사람이 이관술이다.

ⓒ 사회평론

그는 3개월간의 가석방 기간 동안 고향 울산에 내려가 있었다. 교사로 부임하면서 고향을 떠난 이래 감옥살이와 오랜 지하활동과 도피생활 끝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귀향한 것이다. 이 짧은 석 달이 생애 마지막으로 고향에서 가족과 오붓하게 지낸 시간이 된다. 병보석 기한이 만료되고 재수감 명령이 내려오자, 그는 사라져 버린다.

이관술의 큰 딸 정환은 훗날 자신의 딸 박경희에게 아버지가 사라지던 날 밤의 기억을 들려주었다.

"큰 딸 정환은 이미 전날 저녁 아버지가 집을 떠나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평소보다 밥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먼 길 떠나는 남편에게 주먹밥을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다. … 이관술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주먹밥 보따리를 든 채 아내와 딸들이 잠든 방에 들렀다. 그는 어둠 속에서 딸들의 머리를 하나씩 쓰다듬어 주었다. … 어린 딸들은 잠들어 있었지만 부인 박가야와 큰 딸 정환은 깨어 있었다.

작은 딸들의 머리를 하나씩 쓰다듬어주던 이관술은 큰 딸의 머리를 유달리 오랫동안 쓰다듬어 주었다. … 이관술이 뒷마당 장독대 주위에 가득한 대나무 숲으로 사라져버린 후에야 박가야는 자리에 누운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저리 나가시면 이제 영영 몬 들어오실기다.' 정환도 비로소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흐느껴 울었다. … 정환은 유난히 대나무 숲이 울던 그날 밤을 평생 잊지 못했다."

이관술이 사라진 탓으로 집안은 풍비박산 난다. 이관술의 가솔과 친척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주재소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이관술은 일년 반 동안 은신해 있다가 1945년 8월 대전에서 넝마주이로 해방을 맞는다.

같은 해 9월, 그와 동지들이 그토록 세우고자 했던 조선공산당이 재건되고 그는 당의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을 맡는다. 그러나 1946년 5월 정판사 사건으로 수배령이 떨어지고 7월에 체포된다.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47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이관술은 일제시대 고문 경찰로 악명 높던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고, 동지의 이름도 대지 않았다.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죽다

이관술은 감격의 해방을 맞았던 대전으로 옮겨져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나자 처형된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좌익사범과 보도연맹 가입자 등 수천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기결, 미결, 잔여 형기에 관계없이 모두 처형된다.

헌병들은 이들의 눈을 가리고 2명씩 등을 맞대게 한 후 손을 묶고 트럭에 2중 3중으로 태웠다. 그리고 대전의 외곽지역인 산내면 골령골로 데려가 총살하기 시작한다. 시체는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묻거나 태웠다. 이같은 학살이 열흘간이나 계속된다. 3천 명에서 최고 8천 명까지 죽었다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최초 희생자는 이관술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울에서 발간하는 북한 신문에 이관술이 제1호로 처형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안락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갖은 고생을 하던 이관술, 일신을 조국과 조선 민중에 바쳤던 이관술이 캄캄한 산 속에서 죽음을 맞을 당시 나이는 48세다. 그 후 역사는 그를 파렴치한 위조 지폐범으로 기록한다.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 동덕여고 교사시절 이관술은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다. 얼굴이 검어 '물장수'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 사회평론
이관술이 남긴 흔적은 많지 않다. 고향의 유품은 일제 경찰이 진즉에 압수하여 파괴하였고, 활동시기엔 위험을 무릅쓰고 <적기> 등의 팸플릿을 만들기도 했으나, 저작자임을 밝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일하게 남긴 글은 해방 후 현대일보에 연재한 짧은 회상록인데 그 제목이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이다. 48년의 생애 중 20년을 혹독한 고문과 감옥살이, 밑바닥 생활을 하며 활동하고 도피했던 그에게 조국의 인상은 '감옥'이었는가 보다. 더구나 해방된 조국마저 그를 감옥에 보내 최후를 맞게 하였다.

일제시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만주에서 무장투쟁하기도 했고,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세우기도 했고, 혹한의 러시아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멀리 바다건너 미국에서 '외교적으로' 독립을 꾀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에 바친 삶은 어느 하나 가시밭길 아닌 것이 없고, 어느 하나 값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활동은 그야말로 호랑이굴 안에서의 투쟁이 아니었나 싶다. 가가호호 감시하던 일제 치하, 숨 쉬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하던 땅에서 방어벽 하나 없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몇 배로 힘들고 위험했을 것이다.

더구나 외국인 선교사나 교회의 힘을 빌릴 수도 없었던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들이 의지할 데라곤 농사꾼이나 노동자로 위장하여 사람들 속에 묻히는 것 밖에 없었다. 체포와 고문과 감옥과 죽음이 시뻘건 호랑이 아가리처럼 벌리고 있던 조국 땅에서 변절하지 않고, 해외로 도피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의기를 지켰다는 것만으로 공을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조국을 단 한 번도 '감옥'으로 느끼지 않고 호의호식했던 친일파가 해방 후 대한민국의 주도권을 쥐고 흔들었다.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이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는 반면, 친일파의 후손들은 재빨리 우익인사가 되어 부와 권력을 잡았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월 고통 받았던 이관술의 가족들은 최근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정판사 위폐 사건'의 재조사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60년의 세월이 지났고 이관술은 이미 처형당했지만 명예만이라도 회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전거를 타고 짐칸의 폐품과 솥단지 밑에 소작쟁의 소식이 담긴 기관지를 남으로는 마산에서 북으로는 함흥까지 페달을 밟으며 날랐던 이관술. 모진 고문을 받은 후에도 사진기 앞에서 엷은 미소 한 가닥 지을 줄 알았던 그에게 역사는 과연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안재성 지음 <이관술 1902-1950> (사회평론 2006)





이관술 1902-1950 -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안재성 지음, 사회평론(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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