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버치 보고서](22)해방 직후 최초 헌법 초안
입력 : 2018.08.26
미군정, 제헌헌법의 내용 담아 ‘임시조선정부’ 만들려 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관련 화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관련 화보.
잘 알려져 있듯 미국과 소련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만나 한국문제에 대해 합의했다. 조선인들로 하여금 ‘임시조선민주정부’(임시조선정부)를 조직하도록 하고, 이 조직을 원조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며, 임시조선정부가 미·영·소·중 4개국 정부와 협의해 5년 이하의 신탁통치안을 결정토록 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이 합의안이 제대로 이행될 경우 빠른 시일 내에 군대를 철수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박태균의 버치 보고서](22)해방 직후 최초 헌법 초안
1946년 시작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나 1947년 재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도 문제가 된 것은 어떠한 정당과 사회단체를 임시조선정부에 참가토록 할 것인가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안에 의하면 임시조선정부는 향후 건설될 통일된 한국 정부뿐 아니라 신탁통치안의 내용·기간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만 했다. 미군정이 반탁운동을 통해 3상회의 결정안에 반대하고 임시조선정부에 참여를 거부했던 보수우익을 설득했던 것도, 그리고 정치적으로 볼 때 전적으로 지지하기 힘든 여운형을 참여시키면서까지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했던 것도 3상회의 결의안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노력이었다.
‘단독정부’ 이미 구상한 미군정
소련 만나 ‘임시조선정부’ 합의
헌법과 같은 ‘헌장’ 초안 제시도
미군정은 1945년 가을부터 이미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구상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3상회의 결정안을 실행하려는 본국 정부의 방안은 그 효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기존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주장이었다. 겉으로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지만, 실제로는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버치문서에 있는 자료들은 여운형이 암살되기 이전까지 미군정 측에서도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통한 임시조선정부 수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1947년 6월에 가면 임시조선정부 수립을 위한 조치가 미군과 소련군 사이에 거의 합의에 다다랐다. 임시조선정부에 참여해야 할 정당, 사회단체에 대한 합의도 이뤄냈으며, 중앙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임시조선정부의 구성을 위한 법령을 논의하기 시작했다(미소공위 30회 회합 기록, 서울, 1947년 6월4일 13시30분, 버치문서 박스4). 또 미군정에서는 임시조선정부 수립을 위한 세 가지 초안을 만들었다. 이 초안은 임시조선정부의 ‘헌장(charter)’으로 돼 있는데, 헌법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1초안은 입법기구에 대한 선거 이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이었고, 두 번째 초안은 남한의 입법의원과 북한의 입법기구를 통합하는 방안, 마지막 세 번째 초안은 입법기구에 대한 선거 이전에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행정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임시정부를 만드는 방안이었다(‘임시조선민주정부의 제안된 헌장’, 날자 미상, 버치문서 박스4). 제안된 세 개의 헌장 초안의 서문에는 공히 다음과 같은 목적을 담고 있다. ‘1945년 모스크바 협정의 목적을 달성하고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와의 협의를 통해 한국인들의 염원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리고 독립된 한국 정부를 수립한다는 관점에서, 또한 한국에 대한 오랜 일본 지배의 파괴적인 결과를 가능한 한 빠르게 청산하면서 민주적인 원칙하에서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하여, 미국과 소련은 임시조선정부를 위한 이 헌장을 제정하여 만든다. 이 정부는 한국의 산업, 교통, 농업, 그리고 한국인들의 국가적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이 헌장 초안의 제1장에서는 ‘이 헌장에 의해서 수립되는 임시조선민주정부는 통합된 한국의 유일한 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장에서는 이 헌장이 효력을 발생한 이후에 이 헌장의 내용과 일치되지 않는 모든 기존의 법령과 규정은 무효로 한다고 돼 있다. 3장의 제1항은 임시조선정부가 행정·입법·사법권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하고, 2항에서 국적법·군사 및 해안경비대법·세법·공무원법 등 이 헌장의 내용의 실행에 필요한 모든 법을 임시조선정부에서 제정해야 하며, 현존하는 한국의 법적·행정 시스템을 통합하기 위한 법령도 필요함을 명시하고 있다. 3장 3항은 해외에 외교와 영사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기관을 수립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미군과 소련군이라는 현존하는 권력의 허가하에서 이뤄져야 함을 규정하고 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 측 대표단에 제출된 미국의 임시조선민주정부 헌장 초안. 여운형 암살 나흘 전이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 측 대표단에 제출된 미국의 임시조선민주정부 헌장 초안. 여운형 암살 나흘 전이다.
3장의 4항에서는 사법권의 독립에 대해, 4장에서는 임시조선정부의 권한 제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외교권과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 그리고 한국에서 복무하고 있는 미군 및 소련군, 그 군속에 대한 사법권에 대해서는 기존의 미군과 소련군의 허가를 받도록 제한하고 있다. 미군과 소련군의 허가 없이 이 헌장의 개정 및 공공의 안정에 해가 되는 정책의 실행이 이뤄지지 않도록 4장 4~6항에서 규정하고 있다. 5장은 한국인들의 권리에 대한 내용이다. 모든 한국인들의 평등권, 종교·인종·성별 또는 정치적 신념에 의해 차별받지 않을 권리, 집회·결사 및 출판·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독립된 법원에 의한 재판에 의하지 않고서는 생명권을 보장받을 권리 등이 명시되어 있다. 아울러 미군정 시기의 불법 단체들의 무력행사를 제한하기 위해 법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경찰권을 모두 제거할 것, 하나의 범죄로 두 번 처벌받지 않을 권리와 함께 공권력에 의해서도 고문의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7장에서도 반(半)무력집단의 해체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청년단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5장의 7항에서 공공의 목적을 제외하고는 사적 소유권을 보장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6장 이하에서는 정부가 서울에 위치한다는 것과 행정·입법·사법권의 구성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임시조선정부는 국가의 수반, 부수반, 그리고 12명의 장관과 하부 관료들에 의해 구성된다. 예산국과 시민행정국을 국가수반 직속으로 위치시킴으로써 재정 및 공무원 선출권의 장악을 제일 우선적으로 규정했다. 행정부에는 농무부, 상업부, 통신교통부, 조정기획부, 교육부, 재무부, 외무부, 내무부, 법무부, 노동부, 국방부, 건강복지부 등을 설치토록 했다. 당시 한국 상황을 고려해 미군 및 소련군과의 협의하에 예산업무를 제일 우선으로 다뤄야 할 필요성을 규정하고 있으며, 정부 부처 가운데 농무부를 제일 우선으로 했고, 조정기획부가 포함되어 있는 것도 주목된다. 이는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에 중앙부처 수준에서 ‘기획처’를 만든 것과도 일정한 연관성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대통령 중심제 모양새 갖추고도
국회 임명 동의 통해 권한 제한
이승만, 1952년 직선제로 개헌
이와 관련해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정부의 수반과 부수반은 입법기관에서 선출하고 국가수반에게 장관 임명권을 주었지만, 국회의 동의를 받도록 한 것이다. 이는 제헌헌법의 특징적인 부분 중 하나다. 대통령 중심제이면서도 대통령과 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토록 해 국회가 대통령과 부통령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이승만 정부는 1952년 개헌에서 제일 먼저 정부통령 선출 방식을 직선제로 바꿨고, 1952년과 1954년 개헌을 통해 국회의 각료임명 동의권을 폐지함으로써 입법부의 힘을 무력화시켰다. 7장 행정부 관련 항목에서 군대의 규모를 3만5000명, 해안경비대 75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경찰력은 중앙정부 수준이 아닌 지방정부 차원에서 설치토록 했고, 중앙 예산 50%·지방세 50%로 경찰력이 유지되도록 했다는 것도 이 헌장 초안의 특징으로 보인다. 공공행정이 효율적이고 정치로부터 독립돼 운영될 수 있도록 공훈제도와 함께 공무원의 임기보장을 규정한 것도 주목된다.
임시조선민주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취해져야 할 조치들을 담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된 미군정의 문건. 중앙은행 문제, 예산 문제를 포함해서 남과 북으로 분리되어 있는 시스템을 통합하는 문제들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임시조선민주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취해져야 할 조치들을 담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된 미군정의 문건. 중앙은행 문제, 예산 문제를 포함해서 남과 북으로 분리되어 있는 시스템을 통합하는 문제들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8장의 입법기관과 관련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 가지 다른 방안이 제시됐는데, 명칭을 미국의 ‘congress’나 일본의 ‘diet’가 아닌 국회(national assembly)로 했으며, 이는 한국의 헌법에 그대로 적용돼 지금도 한국에서는 국회의 영어명칭을 national assembly로 하고 있다. 또 국회 성원의 3분의 2에 의해 법률 비토권과 대통령 탄핵권을 가질 수 있도록 규정했다. 9장은 사법권에 대한 규정인데, 35세 이상의 대법원장과 6명의 대법관으로 대법원이 구성되도록 했고, 대법원 아래에 다양한 법원들이 조직되며, 이들이 이 헌장이 유효한 기간 동안 종신직이 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대법관이 문제를 일으켰을 경우 그의 해임권을 정부의 수반이 아니라 국회에 주었으며, 지금의 고등법원에 해당되는 중간법원(intermediate court)의 법관 임명도 정부 수반이 하지만 국회의 동의를 받도록 한 것도 눈에 띈다. 지방법원의 판사는 해당 지방의 책임자 또는 지방위원회에 의해 임명되도록 규정했다. 예컨대 서울 지방법원의 판사는 서울시장 또는 서울시위원회에서 임명하도록 했다.
10장은 지방정부에 관한 사안으로 제주도,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를 제외하고는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평안도, 함양도(함경도의 오기로 보인다: 필자주)를 남북으로 나누고, 서울시가 특별시로 함께 배치됐다. 총 14개 도, 1특별시다. 도위원회와 군위원회, 그리고 면(읍)위원회 위원을 보통선거로 선출해 이들이 도지사와 군수와 면(읍)장을 선출하고, 해당 위원회가 필요에 따라 해당 지역의 경찰청장을 선출하도록 했다. 이 헌장 초안에서는 지금보다도 더 완전한 지방자치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볼 수 있다.
헌장의 제2초안과 제3초안을 보면, 1장에서 남북 입법기관의 통합(제2초안)과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집행위원회의 설치(제3초안)가 규정돼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1초안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단지 세 번째 초안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기 전까지 모든 권한이 집행위원회에 집중되도록 규정했다. 이 세 번째 헌장 초안은 미국이 모스크바 3상회의 이전에 구상하고 있었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에 가장 근접한 내용으로 보인다.
미·소 이견에 초안논의 실패에도
사법권 독립·지방자치제 등 포함
‘민주정부 수립 합리적 방안’ 평가
이 세 가지 초안 중 제1안이 1947년 7월15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소련 측에 제안됐으며, 9월12일 세 개 초안이 함께 다시 소련 측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9월 초부터 미군정 측으로부터 소련군에 전달되는 전문에는 유엔의 감시하에 선거하라는 내용이 포함되기 시작했다. 이는 소련으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방안이었다. 당시 유엔에는 미국의 우방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소련에 우호적인 방안이 마련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임시조선정부 수립을 위해 했던 미군정의 노력이 모두 폄하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미군정이 작성했던 임시 헌장의 초안은 민주적이고 통합적인 한국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다. 헌장에 신탁통치 또는 후견제도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하더라도, 민주적 통합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헌장의 초안에는 제헌헌법의 기초가 되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으며, 입법부에 의한 행정부의 견제, 사법권의 독립, 지방자치제도 등 민주적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내용도 담겼다. 물론 이에 대한 후속 연구도 필요하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몇 개월도 안된 상황에서 열강들이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하겠다고 한 것은 분명 우리 민족에게 큰 충격이었고, 응당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거족적인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약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 헌장의 초안에 나타난 것과 같이 빠른 시간 내에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지고, 통합된 임시정부하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철수가 조기에 이뤄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모든 정치세력들이 협조했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1955년 분할점령과 신탁통치를 끝내고 독립한 오스트리아와 유사한 운명이 되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모스크바 결정이 알려진 후 열흘이 지난 1946년 1월8일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등 4대 정당 대표가 모여 ‘신탁통치안’은 향후에 논의하되 모스크바 결정에 대해서는 지지한다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선언은 바로 무효가 됐고, 이후 진행된 반탁운동과 정치공작, 그리고 수많은 테러 행위들과 여운형의 암살은 한국인들 스스로가 자기들에게 다가온 기회를 차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동족상잔의 비극과 분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불러왔다.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08262052005#csidx9cc20374c10245caee4ee19577cd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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