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5

[종합] '차이나는클라스' 박태균 교수, '해방정국의 잊혀진 영웅들' 주목

[종합] '차이나는클라스' 박태균 교수, '해방정국의 잊혀진 영웅들' 주목
받기도 했다. 

이어 오늘의 강의 진행자 박태균 교수가 등장했다. 박태균 교수는 1946년 뉴욕타임즈 기사와 '대동신문' 기사를 소개하며 "조선이 소련의 1연방이 될 것을 원한다"는 등의 왜곡된 가짜 뉴스에 대해 말했다. 기사의 내용을 발언하지 않았다고 박헌영은 주장한다. 의도된 왜곡임이 밝혀졌지만 이러한 가짜뉴스는 이미 널리 퍼진 뒤.

찬탁은 친소련이고 공산당이고 매국노라는 이상한 공식이 생겨나게 되고 반탁을 하는 사람들은 반소련이고 반공이며 애국자라는 인식이 생겨나는데, 이곳에 친일파들이 대거 합류한다. 친일파들이 '애국자'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프레임. 정치는 프레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애국자 프레임으로 주도권을 우익 세력이 얻게 되는 거죠"라고 박태균 교수는 말했다.

극심한 좌우 대립으로 분열과 혼돈의 해방정국이었던 당시. "반민족이었던 친일파와 독립운동을 했던 민족파의 대결에서 신탁통치 의제가 나오며 바뀌어요. 찬탁하는 좌파와 반탁하는 우파로. 민족과 반민족의 구도에 이념 갈등 프레임이 씌워지면서 민족적 문제 해결마저 방해하는 거죠, 이러한 프레임이"라고 박태균 교수는 말했다.

"독재 타도, 친일파 척결, 개혁, 민주화 얘기하는데 이거를 자꾸 진보 좌파 프레임 씌우고 성장주의, 개혁 반대 이렇게 주장하면 우파 아냐? 이렇게 프레임 씌우고, 이렇게 되는 거죠"라고 박태균 교수는 말했다. 그러면서 양쪽이 3.1운동 기념식도 따로 진행했다고 박태균 교수는 전했다.

이러한 이야기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반탁 세력은 서울운동장에서 모모스크바 회의 지지세력은 남산공원에서 기념식을 치뤘다. 급기야 두 시위대의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헀다 한다. 나라를 되찾았지만 돌이킬 수 없이 분열한 민족. "서로 대화가 안 되었다"고 박태균 교수는 말했다.

당시엔 테러가 난무했고 언론과 지도자를 통해 사회 이슈가 일방적으로만 전달이 됐었다 하니 더욱 쌍방향 소통이 불가했다. 그렇기에 가짜 뉴스 또한 더욱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한다. 요즘의 가짜 뉴스 세태와는 또 다른 상황이다. 소련은 "신탁통치를 우리는 지지한 적 없어. 이거는 미국 거야"라고 말하며 당황했지만, 이러한 의견은 한국 언론 어느 곳에서도 보도되지 않았다 한다.

이승만, 김구 모두 반탁 운동의 지지자가 되었고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 소 공동회의에 우익 정당이 참여해야 하는데 반탁파 정치인들이 불참을 선언한다. 임시 정부 구성에서 반탁 세력이 제외될 상황에 처하고 결국 미소 공동회의가 결렬된다. 미국은 예상치 못한 딜레마에 빠진다.

그래서 반탁 운동 세력은 제외하자, 는 의견이 미국 측에서 나온다. 이어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배척하기 시작한다. 반탁 파동 이후 방해요인으로 전락한 극우파다. 오마이걸의 비니는 "그런데 원래 이승만의 경우엔 미국의 지원을 받았는데 반탁으로 돌아선 이유가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이에 박태균 교수는 "이승만은 아는 거예요. 미국과 소련의 협의로 통일 정부가 수립되면 나는 정치적 주도권을 잡을 수 없다, 이걸 아는 거죠. 소련이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까. 이승만은 반탁 운동의 가치를 놓아버리면 자기가 정치적 주도권을 못 잡는다고 명확히 인식해서 그런 거죠. 미소 공동위원회를 하는데 미군정은 소련과의 협의를 성공시킬 적임자를 물색합니다. 거기에 핵심으로 들어온 게 바로 김규식이라는 인물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김규식이 역임했었습니다. 그 정도로 유명한 분인데 지금은 잊혀져 가고 있죠"라고 말했다.

이어 오마이걸 비니는 미군정이 지지한 김규식에 대해 '그는 누구인가'라는 깜짝 코너를 준비해 발표했다. 병과 굶주림으로 가난하게 살던 김규식은 언더우드 미국인 선교사에 입양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며 9개 국어를 하는 어학 천재로 거듭난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총독부의 러브콜을 박차고 해외를 누비며 독립운동에 참여한 김규식.

결국 그는 부주석 자리까지 오른다. "그는 우리의 목적을 위해 가장 근접한 리더"라고 미국 측은 김규식에 대해 언급했다. 비니의 조사 자료에 이어 박태균 교수는 미군정이 선택한 통일 정부를 이끌 지도자 김규식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다. 미국이 원하는 리더상에 가장 알맞았던 중도 우파 김규식.

김규식은 1903년 미국 르녹 대학을 졸업했는데 처음부터 독립 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한다. 몽골에서 사업가로 활동하던 그는 러시아, 프랑스에서도 활동했다 한다. 방랑자의 삶을 살던 중 상해로 간 김규식은 독립운동가의 집결지였던 상해에서 여러 한국 청년들을 만난다. 거기서 영어 선생님으로 활동한 김규식.

중국의 유명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다. 어떻게 보면 학자 스타일이라고 박태균 교수는 설명했다. "그러다보니 비교적 정치적 영향력, 이미지가 약한 게 단점이죠. 버치 보고서에 나타난 고민이 그겁니다. 김규식을 어떻게 뒷받침할 수 있을까"라고 박태균 교수는 말한다.

이어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에게 김규식을 뒤에서 지원할 것을 요청한다. 강지영은 "이승만의 경우엔 본인이 정치적으로 나서고 있을 것 같았는데"라고 말했고, 박태균 교수는 "이미 김규식은 김구 주석과도 갈라진 상태였다"고 전했다. 이승만은 정치적 조력자로 절대 나서고 싶지 않았다 한다. 미군정의 전략을 읽고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은 지방 순회를 5월부터 시작한다. 

미국에서 정치의 세계를 본 이승만은 그 '정치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돈, 지역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어 그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다. 버치 보고서를 보면 정말로 미군정에서 새로운 노선을 개척하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고 박태균 교수는 말했다. 과연 김규식의 조력자는 누가 됐을까. 마침내 찾은 이가 있으니, 이 또한 오마이걸의 비니가 발표했다.

비니는 "제가 인물에 대한 힌트를 드릴테니까 이걸 듣고 맞춰보시면 어떨까 해서 준비해왔다"고 말했다. "가장 양심적인 지도자 1위, 가장 혁명적인 지도자 1위, 가장 테러 공격을 많이 당한 정치인, 가장 잘생긴 정치인으로 꼽혀 당시 우리 국민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은 정치인인데요.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라고 비니는 물었다. 강지영은 "이미지 보니 누군지 알 것 같은데"라고 말했고 지숙은 "P?"라고 물었다. 오상진은 "Y?"라고 물었고 강지영은 "J"를 말했다.

이는 바로 여운형이었다.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이자 혁명가로 꼽혔던 여운형. 미군정은 독립운동가이자 중도 좌파 정치인, 건국동맹 창설자인 여운형을 조력자로 선택했다. 일찍 일제 패망을 예견했던 여운형은 44년 건국동맹을 조직해 광복에 대비했떤 몇 안되는 독립 운동가였다. 한결같이 국가의 앞날을 준비해왔던 그. 대중적 인기가 대단했었다 한다. 

연설을 시작하면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렸는데, 특히 대학생과 고등학생들 등 젊은 층에게 인기가 엄청났다고 한다. 일본 초청으로 도쿄 제국호텔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던 여운형은 "우리가 건설하려는 새나라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다. 이는 조선 민족의 절대적 요구일 뿐 아니라 세계 대세가 요구하는 것이다. 일본 인사들은 깊이 반성하라"고 일갈한다. 

존 하지 사령관은 "그는 누구보다 잘생겼어요. 뛰어난 웅변가에 강한 감화력을 가졌죠"라고 말했다. 6대 총독 우가키 카즈시게의 사위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여운형과 결혼했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한다. 박태균 교수는 "제가 봤던 가장 감명적 기록은요. 정보 담당 요원 리처드 로빈슨이 쓴 책이 '미국의 배반'이라고 있는데, 미군정기의 정책이 잘못됐음을 비판하는 책이거든요. 근데 책에 보면 '여운형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써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위한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여운형. 대중 지지를 받는 여운형이 김규식을 뒷받침하는 전략을 쓰려고 했던 미군정. 그런데 여운형은 잡힐 듯 안 잡히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여운형에 미군정은 주목했다. 45년 10월 한국인 정치고문단을 구성하고 미군정은 예외적으로 좌파인 여운형을 고문단에 임명한다. 그러나 여운형은 미군정의 정책으로부터 회피를 해왔다 한다. 그러나 우익과 소통하는 유일한 좌익 지도자였기에, 미군정은 그에게 계속해서 러브콜을 보냈다. 

김규식과도 친분이 있는 여운형은 사회주의 세력 내에서도 영향력이 컸다 한다. 김규식에게 큰 힘이 되겠지만 좌파의 몸집이 더 커질까도 우려했단 미군정. 다른 한편으로는 여운형에게 타격을 줘서 영향력을 조금 빼야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이에 100% 가짜였던 가짜 뉴스를 미군정 측에서 발행한다. 여운형이 '친일 행각'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자료들은 버치 보고서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등도 "여운형은 극렬한 반일주의자"라고 말하며 그가 친일 행각을 했음을 부인했다. 일본 총독들도 그의 기개에 감명받을 정도로 극찬을 했었다 한다. 미군정 조사관이 최종 결론을 내린 바로는 "여운형을 조사한 것 자체가 그에 대한 모독"이었다 한다. 

스튜디오의 출연진들은 여운형에 대해 "사기캐라는 말이 떠오른다"고 말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에 박태균 교수는 그런 인물의 모습이야말로 정치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충돌 없이 일을 추진하려면 소통의 힘이 필요하다고 박태균 교수는 말한다. "총독들의 요구사항엔 철벽을 쳐요. 근데 얘기는 해요. 정치를 하는 사람은요. 적과도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정치인입니다"라고 박태균 교수는 얘기했다. 여운형은 미국뿐 아니라 소련과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어 여운형,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한다. 여운형은 좌와 우의 협력만이 분단을 막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한다. 이것을 꾸리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미국의 버치 중위였다. 버치의 집에서 46년 7월 22일 좌우합작위원회 정식 회담이 열린다. 

이 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비판들이 쏟아졌다 한다. 또한 계속해서 테러 위협을 받았다는 김규식, 여운형. 김규식은 "좌우합작은 독립을 위한 제1단계"라고 말했고 여운형 또한 "나에겐 다른 길이 없다"며 다섯번째 테러를 당하고 나서도 강하게 얘기했다. 오상진은 "시대에 흐름을 탈 때 이익만 좇으면서 그때그때의 이득만 추구하는 철새같은 정치인들과는 다른 분들이다"고 말했고 이에 박태균 교수는 "그렇죠"라며 '워블러'라는 개념에 대해 소개했다.

이어 통일 정부가 수립된다면 나왔어야 할 가장 합리적인 7원칙이 등장한다. 중도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좌익과 우익 진영에서는 서로 "좌익쪽에 유리하다", "우익쪽에 유리하다"는 비난이 끊임없이 나온다. 이승만과 김구를 제외한 우익 세력이 여운형, 김규식의 세력에 들어가기로 하고 미소 공위 재개로 통일 정부 수립에 한걸음 가까워지는 한반도. 

임시 조선 정부 헌장을 미군정이 만들고 이 헌장에는 "통일된 한국의 유일한 정부가 임시 조선 민주 정부가 되어야 한다", "정부의 수반과 부수반은 입법 기관에서 선출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오상진은 "만약에 이대로 갔으면 운명이 달라졌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박태균 교수는 "사실 역사학자 입장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이 '만약에'라는 건데요. 오스트리아 케이스같은 경우가 생각나는데 오스트리아도 4개 강대국이 분할 점령하고 그랬었거든요. 좌우익이 합의해서 결국 연립 정부를 수립합니다. 그런데 미소공위가 재개되나 했는데 한국에서 이게 실패하고 맙니다"라고 설명한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1947년 암살당한 여운형.

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고 문제가 해결되려는 시점에 비극이 일어난다. 미군정 쪽에서도 암살 배후를 조사한다. 버치 보고서에 따르면 경찰이 암살자를 추격 중 이를 막기도 했었다 한다. 보고서를 보면 경찰 개입의 가능성을 눈치챌 수 있다. 

박태균 교수는 "미군정 CIC 조사 요원이었어요. 근데 이분을 모 회의에서 만났는데 이 시기 암살 사건을 조사하셨대요. 배후 인물의 윤곽이 잡혀갈 즈음에 위에서 조사를 중단하라는 명령이 내려온 거예요. 미군정 상부에서 지시를 한 거예요. 그래서 조사를 끝까지 못했단 거예요. 그니까 사실은 조사가 제대로 이뤄진 게 없는 거죠"라고 말했다. 암살자 한지근에 대해 강지영이 물었고, 이에 박태균 교수는 "암살범을 당일날 체포를 또 못했기도 했고 진짜 암살범인지도 몰라요"라고 말했다. 

여운형의 죽음은 많은 의문만 남긴 채 잊혀졌고 결국 12번째 테러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통일 국가로 나아가던 나침반같은 지도자를 잃은 당시. 그의 죽음 앞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통곡했다. 김규식이란 사람을 밀어줄 조력자를 상실한 상황. 또한 통일 정부를 이끌 지도자를 상실한 사건이었다. 하필 그 시점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격화된 시점이었다 한다. 통일 정부 수립의 시나리오는 이렇게 좌절된다.

미소 공위가 완전히 결렬되고 UN으로 한반도 문제는 이관된다. 함께할 다른 후보를 물색할 미군정. 당시 '한국민주당'이 미군정의 여당이었다. 그곳에 있던 장덕수를 국회로 포섭하려던 미군정은 그리고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려 한다. 그러나 장덕수 또한 암살당한다. 

무려 경찰에게 총을 맞아 죽었다는 장덕수. 목격자를 신경 쓰지 않고 유유히 떠났다는 범인인데, 두 암살 사건의 배후자가 같다는 추론도 있을 수 있는 상황인 게 아니냐고 출연진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결국 좌우합작위원회도 공식 해산한다. 1948년 2월 UN소총회에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결의된다. 미군정은 끝까지 김규식을 지지했다. 그러자 김규식은 "북쪽 지도자와 회담하겠다"고 말한다.

최소한 분단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입장이었다. 이에 미군정이 당황한다. 미군이 "당신들의 목숨은 보장해줄 수가 없다"고까지 얘기했지만 이들은 뜻을 굽히지 않는다. 박태균 교수는 가장 감명받았던 구절에 대해 "'이승만은 만약 이 회담이 실패하면 한 지역에서 선거 정책을 지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아니라 첫 번째 기회라고 주장했다. 지금까지의 노력들은 철저히 외세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소개했다. 자신의 이득보다는 철저하게 나라의 입장을 생각한 것. 

목숨을 걸고 진행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간 남북협상. 결국 남한에서 단독 선거가 실시되고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3년 넘게 이어진 전쟁으로 굳어져 버린 분단선. 여전히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 전쟁 중 김규식은 북으로 납치되어 병으로 삼아한다. 독립과 통일을 위해 달려온 영웅의 안타까운 최후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김규식이다. 박태균 교수는 "전 이게 정말 중요하다 생각하는 게 성공한 역사만 기록되진 않습니다. 의병운동과 3.1운동도 그런 거면 기록할 필요가 없어요. 의병운동이 성공했나요? 성공이라는 틀로만 바라보면 안 되는 게 역사입니다"라고 말한다. 

"실패한 역사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독립 의지를 증명해주는 소중한 역사이기 때문이죠"라고 박태균 교수는 얘기했다. 그러면서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 또한 실패한 역사이지만, 한국 사람들이 분단보다 통일을 원했음을 증명할 유일한 역사이기 때문에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JTBC 시사교양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 톱스타뉴스 JTBC 시사교양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JTBC 시사교양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 톱스타뉴스 JTBC 시사교양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

JTBC 시사교양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는 매주 목요일 오후 10시 30분 방송된다.

조현우 기자 Reporter@TopSta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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