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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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큰언니 등영초
등영초는 중국의 총리였던 주은래의 부인이다.
이들 부부의 사상을 연구하는 중국의 기관에서 『등영초』를 발행했다.
국내 번역된 지는 몇 년 되었는데 이제야 읽고 쓴다.
그녀는 중국 공산당의 여성 지도자로 남편 사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의장을 지냈다.
등영초는 중국에서 ‘대륙의 큰언니’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1904년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아이를 버리라는 남편의 지시를 거부하고 딸을 키운 사람은 그녀의 엄마였다.
등영초의 아버지는 직장에서 무단이탈로 고발당해 유배지에서 타계했는데 그녀에겐 세 살 때 집을 나가 일곱 살 때 시신으로 돌아온 생물학적 아버지로 남은 듯 하다.
베이징 평민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던 엄마는 딸에게 사회주의를 가르쳤다.
이 학교는 중국사회당을 세운 천이룽이 건립한 학교였다.
어린 등영초는 교장인 그에게 직접 교육을 받았는데 정신적 아버지로 여겨진다.
그는 봉건군주제와 원세개의 전제통치거부운동을 벌이다 1913년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학교는 폐쇄되었지만 결정적 시기에 만난 그를 등영초는 평생 잊지 않았다.
그녀의 엄마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장례를 치렀는데 그때 등영초는 열 살이었다.
훗날 그녀는 짧은 생을 마친 천이룽을 중국혁명사에 등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을 위해 충성을 바쳤고, 사람에게 진실했고, 생활은 소박하고 검소했다.
우담바라처럼 잠깐 나타나 짧은 생애를 마쳤지만 진정한 혁명의 선구자요, 열사셨다.
업적이 많지 않지만 중국혁명사에서 그분을 기림으로 후손들이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녀 인생의 확고한 이정표는 엄마와 천이룽이었다.
가야 할 길을 가리킨 두 사람은 그녀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직장을 잃은 엄마는 딸에게 베틀로 수건 짜는 법을 가르치고 자신은 가정교사로 벌이를 했다. 여자에게 경제적 자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딸에게 주입시켰지만 생활은 여의치 않았다.
등영초는 소학교를 졸업했으나 가난한 살림에 진학할 돈이 없었다.
그녀의 엄마는 집에서 딸의 공부를 가르쳐 학비가 무료인 여자사범학교에 진학하게 했다.
그때 등영초의 나이는 12세였는데 입학요건이 안되자 두 살을 올렸다.
가난과 불평등에 대한 사회주의 교육이 뼛속까지 새겨진 그녀는 무섭게 공부했다.
공부는 최우수였고 무엇보다 단체를 조직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한 건 1919년, 15세 때였다.
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서 열강들이 중국내 독일의 특권을 일본에게 승계했다.
이에 반대하는 5.4운동이 일어났는데 등영초는 학생 애국 운동의 리더로 부상했다.
그때 일본유학중이던 주은래가 돌아와 학생연합회의 중추역할을 하면서 두 사람은 운명적인 조우를 한다. 이 단체에서 공연한 연극 <안중근 전>에서 등영초는 안중근 역을 맡는데 연출은 주은래였다. 그녀가 15세, 주은래는 21세였다.
주은래는 이 똑똑한 소녀에게 매료된 듯하다.
다시 유학길에 오른 주은래는 그녀와 서신왕래를 했는데 연서라기보다 서구의 신사상에 대한 지식 안내서였다.
주은래는 일본 메이지, 호세이 대학에서 유학하고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지식인으로 외모도 미남형이었다.
아름다운 여자들이 접근했지만 그가 아내로 택한 사람은 ‘여자는 왜 화려하게 꾸며야 하는가!’ 외치는 소박하고 검소한 등영초였다.
후일 누군가 아내 등영초의 매력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그야 말로 열정적이고 이지적이다. 두 가지 성품이 이처럼 철저하게 결합된다는 것은 기적이다.” 두 사람은 5·4운동, 국공합작, 항일전쟁, 국공내전, 문화대혁명,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 동지로 그리고 반려자로 함께 투쟁했다.
두 사람의 결혼 서약 8호는 ‘서로 사랑하기, 서로 존중하기, 서로 돕기, 서로 격려하기, 서로 의논하기, 서로 용서하기, 서로 신뢰하기, 서로 이해하기’였는데 주은래는 여자문제로 아내의 속을 썩인 일이 없었다.
영양실조와 결핵을 앓았던 등영초는 초산 실패 후 결국 아이를 갖지 못했다.
대신 순국한 혁명동지의 자식들을 7명이나 입양해서 키웠다.
부부가 모택동이 주도한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 때 등소평을 보호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홍위군과 4인방’이 많은 동지들을 살해했지만 무사히 살아남은 등소평은 오늘날 중국의 경제개발의 기틀을 마련했다. 주은래는 1976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유서는 ‘유골은 화장해서 하늘에 뿌리고 전 재산은 당에 헌납하고, 등영초를 아내가 아닌 동지로 장례식에 참석하게 해줄 것’이었다.
1992년 88세에 세상을 떠난 등영초의 유서다.
“유해는 의학해부용으로 쓰고 난 뒤 화장해서 뿌리고, 영결행사나 추모식도 하지 말라.
수의는 30년간 입던 낡은 옷으로 대처하고 살던 집은 전 인민의 소유로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라. 기념관 사업도 하지 말고 친인척에게 특혜를 주지 말라.“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 에드가 스노우는 등영초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난 중국의 여성 중 가장 예리한 정치적 두뇌를 소유한 사람이었다.’
주은래는 평생 동안 이런 등영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리고 이 부부는 중국의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윤리 도덕적으로 청렴했다.
중국의 역대 지도자들은 많은 여성편력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마오쩌둥은 네 번 결혼을 했음에도 다른 여성들과 계속 염문을 퍼트렸다.
부인 장칭이 영화배우 출신의 상당한 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오가 병으로 드러눕자 장칭이 먼저 한 일은 그와 염문을 퍼트린 여자들의 제거였다.
장칭은 권력을 잡기위해 홍위군을 앞세워 수많은 사람을 살해했다.
등소평의 아들을 옥상에서 떨어트려 하반신 불구로 만들기도 했는데 이 살벌한 문화대혁명 때
등영초는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오가 죽고 권력투쟁에 실패한 장칭은 수감생활 중 목을 매어 자살했다.
권력에는 보이지 않는 칼이 있어 나를 위할 때 칼의 방향이 자신에게 오고 타인을 위할 때 칼집 속에 숨는 것 같다.
등영초는 마지막까지 인민을 위해 일하다 모든 것을 내어놓고 빈손으로 떠났다.
그녀는 천 년을 내려오며 여성을 괴롭혔던 전족을 폐지시켰고 여성해방에 앞장섰다.
『등영초』 이 책에는 처음 수록된 귀한 기록물이 많다.
가족과 동지들, 등영초의 개인 사진, 친필 글씨, 언론 기고문, 지인 및 남편에게 보낸 서신, 그녀의 비서 자오웨이의 구술 자료 등 처음 공개되는 자료들이 풍성하다.
자신에게 엄격했고 국민에게 한없이 너그러웠던 혁명가이자 지도자의 아내, 등영초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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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등영초 : 대륙의 큰언니 - 대륙의 큰언니
저우언라이.덩잉차오 연구센터,저우언라이 사상.생애 연구회 (지은이),
전자책 미리 읽기
전자책정가
15,000원
책소개
중국공산화혁명 성공에 기여한 혁명가 덩잉차오. 혁명가, 정치가, 여성해방운동가에서 저우언라이의 아내이자 동지로서의 모습까지 덩잉차오의 다양한 활동상과 가족, 동지의 모습이 담겨 있는 책이다.
덩잉차오의 친필 글씨, 신문과 잡지 기고문, 지인 및 저우언라이에게 보낸 서신, 덩잉차오 비서 자오웨이 등의 구술 자료, 덩잉차오 개인 사진 등 저우언라이.덩잉차오 기념관 자료를 바탕으로 덩잉차오 생애를 엮었다. 이 책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여러 사진과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마지막 순간까지 꼿꼿하고 굳건하게 조국을 위해 살다간 작은 거인, 덩잉차오를 새롭게 만날 수 있다.
목차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까지 (1904-1949)
• 생활이 어려워 도처를 떠돌았던 유년 시절 _11
• 베이핑 평민의무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다 _17
• 즈리여자사범학교에서 학업을 잇다 _21
• 15세의 강연대장 _29
• 각오사(覺悟社)의 사원 _35
• 소학교 교사로 지원하다 _43
• 다런여학교에 부임하다 _49
• 여권운동의 선봉이 되다 _55
• 여성사(女星社) 창립에 참여하다 _61
• 《부녀일보(婦女日報)》를 창간하다 _67
• 보습학교를 세우다 _73
• 국민회의 운동에 투신하다 _79
• 사회주의 청년단에 참여하다 _85
• 톈진 지역위원회 부녀부 부장을 맡다 _91
• 저우언라이와 결혼하다 _99
• 차오산(潮汕)에서 전투하다 _107
• 광둥 여성운동을 지도하다 _113
• 중국공산당 중앙 부녀위원회 서기를 맡다 _119
• 위험한 여정 _125
• 중국공산당 6차 대회에 열석하다 _129
• 중앙소비에트지구로 달려가다 _133
• 장정(長征)을 경험하다 _139
• 베이핑 시산에서 요양하다 _145
• 여성계를 단합해 공동 항전에 나서다 _151
• 전시(戰時)아동보육회 건립을 추진하다 _157
• 어린이 극단에 관심을 쏟다 _163
• 루산부녀담화회에 참석하다 _169
• 유일한 중국공산당 여성 참정원 _177
• 홍콩과 광저우로 원정을 가다 _183
• 남방국 여성 사업을 주관하다 _189
• 옌안 ‘여대’에 가다 _195
• 모스크바행 _199
• 훙옌촌에서 _205
• 옌안 정풍(整風)에 참여하다 _215
• 중국공산당 7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다 _221
• 옛 정협의 유일한 여성 대표 _227
• ‘3·8’절 대회를 기획하다 _235
• 세계 여성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투쟁 _239
• 메이위안신촌에서 _249
• 전국토지사업회의에 참석하다 _259
• 시거우촌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다 _265
• 해방구 여성공작회의에 참석하다 _271
• 중국여성 제1차 대표대회에 참석하다 _277
• 새로운 정협에 참여하다 _281
중화인민공화국 시절 (1949-1992)
• 여성운동의 새로운 물결을 이끌다 _289
• 바쁜 나날 속에 밀려오는 그리움 _297
•〈혼인법〉초안을 주관하다 _307
• 도시에서 여성운동을 추진하다 _313
• 중국부녀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 참가하다 _321
• 국제무대에 데뷔하다 _327
• 각국의 진보 여성과 깊은 우정을 쌓다 _333
• 국제여성민주연맹 이사회에 참석하다 _339
• 저우언라이의 아내로 내조에 힘쓰다 _347
• 상공업계 여성들을 이끌며 조국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다 _359
• 중국공산당 제8기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다 _365
• 외교관 부인의 일을 중시하다 _373
• 베트남 여성연합회 제3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다 _381
• 보옌을 조사하러 떠나다 _387
• 둥베이로 가다 _397
• 만성질환과 싸우다 _403
• 저우언라이와 어려운 세월을 함께 보내다 _411
• 남편의 마지막 부탁을 완수하다 _423
• 멀리서 온 정이 점점 깊어지다 _433
• 미얀마 방문 _441
• 스리랑카 방문 _449
• 이란 방문 _455
• 캄보디아 방문 _461
• 일본 방문 _469
• 북한 방문 _479
• 태국 방문 _485
• 프랑스, 유럽의회 방문 _491
• 전국부녀연합회 명예주석에 당선되다 _499
• 당풍(黨風) 건설을 촉진하다 _505
• 여성운동사 편찬 작업에 관심을 갖다 _513
• 양안 교류를 추진하다 _519
• 당 중앙의 정년제를 지지하다 _529
• 기밀유지 기율을 엄격히 준수하는 공산당원 _535
• ‘친정’으로 돌아오다 _541
• 제6기 전국 정협 주석에 임명되다 _547
• 산둥 방문 _555
• 고향의 정 _561
• 특구를 시찰하다 _569
• 전 중국의 어린이에게 관심을 쏟다 _579
• 구술〈시화팅 해당화를 생각하며〉 _585
• 마지막 당부 _601 • 국민의 회상 _609
• 후기 _616
• 역자후기 _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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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저우언라이.덩잉차오 연구센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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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사상.생애 연구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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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희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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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통역번역대학원에서 번역학 석사(한중 전공)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번역 집단 실크로드에서 중국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나는 내가 잘됐으면 좋겠다》, 《이중톈 중국사 8, 9》, 《수학의 아름다움》, 《원년 봄의 제사》, 《왕과 서정시》, 《블랙테크》, 《대륙의 큰언니 등영초》 등이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중국의 영원한 총리 주은래와 등영초 부부는 결혼 할 때 서약한 8호(서로 사랑하기, 서로 존중하기, 서로 돕기, 서로 격려하기, 서로 의논하기, 서로 용서하기, 서로 신뢰하기, 서로 이해하기.)의 약속을 평생 동안 지키며 애정어린 부부로, 진정한 혁명동지로 함께 했으며,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다.
덩잉차오는 중국공산화혁명 성공에 기여한 여성 혁명가다. 덩잉차오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1919년 5·4운동 당시 신극(新劇) <안중근 전>에서 덩잉차오는 안중근 역을, 저우언라이는 연출을 맡은 것이다. 덩잉차오는 15세, 저우언라이는 21세였다. 후에 이 인연으로 둘은 부부가 된다.
덩잉차오는 일곱 살에 아버지를 잃고 중국사회당이 설립한 소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같은 학교의 교사였다. 어려서부터 받은 사회주의 교육은 중국의 전통적 여성관에 대한 비판의식을 키워주었다. 청소년기에 이미 정치사회조직에 가담한다. 거의 1천 년간 중국 여성에게 가해진 전족에 대한 저항의식은 그를 전족 폐지 운동으로 이끈다. 뒤이어 평생의 반려자 저우언라이와 함께 5·4운동, 국공합작, 항일전쟁, 국공내전, 문화대혁명,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 중국 공산당이 주도했던 변혁의 중심에 서서 투쟁한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혁명과 사회주의 사업에 열정을 불태웠던 그는 질병이 찾아올 때에도 하루를 더 투쟁하기 위해 하루를 더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병마와 싸웠다. 이러한 열정은 인민을 위한 특히 억압받는 여성을 위한 사랑에 기초했다. 덩잉차오는 무엇보다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였다. 여성해방의 기치 아래 수많은 여성을 혁명의 대열에 동참시켰고 이는 큰 힘을 발휘해 혁명의 성공에 기여했다. 덩잉차오는 이를 발판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이 설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한편, 여성 스스로 자각심을 갖도록 부단히 애썼다. 전족은 폐지되었고 구 봉건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의 사회진출을 열어놓았다.
덩잉차오는 한중수교에도 영향을 끼쳤다. 덩샤오핑의 집권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중수교의 첫걸음이 가능했던 원인에 대해 냉전의 종식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마오쩌둥에 의해 수립된 인민의 나라는 역설적이게도 마오에 의한 문화대혁명으로 위기에 봉착한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의 사상과 숭배를 제외한 모든 지식과 문화를 철저히 거부하고 숙청했다. 이로 인해 국가를 이끌어 갈 수많은 지식인과 인재가 죽거나 고초를 겪고 유배를 갔다. 이 어두웠던 문화대혁명기에 마오 이후의 새 시대를 열어갈 덩샤오핑을 보호하고 개혁개방의 토대를 세운 인물이 바로 덩잉차오와 저우언라이다.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의 실각 때마다 그를 보호했고 덩잉차오는 저우언라이 사후에도 덩샤오핑의 재기를 도왔다. 억측일지 모르지만 덩잉차오와 저우언라이가 한중수교의 밑거름을 놓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사족을 붙이자면 덩잉차오는 한중수교의 물꼬를 연 바로 이 덩샤오핑과 성씨도 태어난 해도 같다. 마침내 덩샤오핑이 건재하던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가 이루어졌다. 덩잉차오는 한중수교를 눈앞에 둔 1992년 7월 11일, 눈을 감았다.
권력욕에 불타는 마오가 수많은 혁명동지를 숙청하는 상황에서도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권력과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청렴결백하게 나라와 인민을 위해 봉사한 이들을 인민은 물론 함께 일하는 당원뿐만 아니라 마오도 인정했던 것이다. 간난의 시기였던 문화혁명기에 살아남은 덩잉차오와 저우언라이로 말미암아 오늘과 같이 세계와 교류하는 새로운 중국이 부상할 수 있었다.
공산당과 덩잉차오 및 저우언라이에 대한 찬양일색 편집, 북한 김일성과 캄보디아 양민 학살 가해자 폴 포트 순방 내용 등이 거북스러울 수 있다. 이 책이 중국 공산당 관영출판사에서 나온 것임을 감안해야겠다.
이 책은 화전(畵傳)이다. 혁명가, 정치가, 여성해방운동가에서 저우언라이의 아내이자 동지로서의 모습까지 덩잉차오의 다양한 활동상과 가족, 동지의 모습이 담겨 있다. 덩잉차오의 친필 글씨, 신문과 잡지 기고문, 지인 및 저우언라이에게 보낸 서신, 덩잉차오 비서 자오웨이 등의 구술 자료, 덩잉차오 개인 사진 등 저우언라이·덩잉차오 기념관 자료를 바탕으로 덩잉차오 생애를 엮었다. 독자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여러 사진과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마지막 순간까지 꼿꼿하고 굳건하게 조국을 위해 살다간 작은 거인, 덩잉차오를 새롭게 만날 것이다.
사드 배치로 친미, 친중 논란이 일던 요즘 문학과지성사 서남 동양학술 총서 간행사가 새삼 다시 떠오른다.
“중국과의 유구한 관계 속에서 모화파(慕華派)는 넘쳐나도 중국을 아는 이는 적었고, 일본과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친일파가 양산되어도 일본을 아는 이 또한 적다. 친러파 또는 친소파, 지금도 들끓는 친미파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역의 진리도 성립한다. 항중파·항일파·반소파·반미파 역시 반대하는 대상에 대한 옳은 인식 위에 서 있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이 중국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접기
덩잉차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3년 8월) |
덩잉차오 鄧穎超 | |
---|---|
중국공산당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의장 | |
임기 | 1972년 4월 23일 ~ 1983년 6월 19일 |
전임 | 리더취안 |
주석 | 둥비우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주더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쑹칭링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화궈펑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예젠잉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덩샤오핑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후야오방 중공 국가원수 권한대행 |
총리 | 저우언라이 중공 총리 덩샤오핑 중공 총리 권한대행 저우언라이 중공 총리 장춘차오 중공 총리 권한대행 화궈펑 중공 총리 자오쯔양 중공 총리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04년 2월 4일 |
출생지 | 청나라 광시 성 난닝 |
사망일 | 1992년 7월 11일(88세) |
사망지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
국적 | 중화인민공화국 |
학력 | 중국 허베이 성 톈진 여자사범대학교 교육학과 학사 |
경력 | 중국공산당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의장 중국공산당 명예고문위원 |
정당 | 중국공산당 |
배우자 | 저우언라이 |
자녀 | 無 |
덩잉차오(鄧穎超, 1904년 2월 4일 ~ 1992년 7월 11일)는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로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중국공산당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의장이었다.
생애[편집]
광시성 난닝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덩팅충(鄧庭忠)은 그녀가 어렸을 때 죽었고 홀어머니 밑에서 한약을 제조하는 일을 배웠다. 그 후 베이징 사범학교와 톈진 여자사범대학교 교육학과를 나온 후 잠시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1919년 5.4운동이 일어나자 그녀는 톈진에서 학생애국운동의 지도자로 일했고 저우언라이를 만났다. 1920년 저우와 함께 '각오사'(覺悟社)를 조직하고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925년 8월 8일 광저우에서 저우언라이와 결혼하였다.
당시 공산당은 국민당과 협력관계에 있었기에 그녀는 1926년 국민당의 중앙위원회에 참가하였으나 1927년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상하이에서 지하공산당 활동을 하였다. 1932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으로 들어갔고 1934년부터 공산군의 역사적인 장정의 길에 올랐다.
저우와 덩 부부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혁명열사의 고아들을 자식삼아 키웠다. 그중에는 나중에 국무원 총리가 되는 리펑도 있다.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이 결성되자 국민당 지역이던 우한과 충칭에서 여성단체를 조직하고 전쟁고아를 돌보는 일을 하였고 여성운동을 지도하였다. 1938년에는 국민참정회에도 참여하였으나, 1941년 장제스(蔣介石)가 점차 공산당을 압박하고 사실상 국공합작이 결렬될 위기에 처하자 둥비우 등과 함께 국민참정회에 불참했다.
중일 전쟁 기간의 대부분을 충칭에서 머물러 있었고 1945년 중국공산당의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중앙부녀위원회 부서기를 맡았다. 1949년 이후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상무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계속 중국 공산당의 요직에 머물러있었으며, 1983년에는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의장으로 선출, 1988년 4월 23일까지 의장직에 있었다. 덩은 평생 중국 여성의 해방과 특히 전족의 폐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1992년 베이징에서 향년 8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학력[편집]
- 베이징 사범학교 전문학사
- 허베이 성 톈진 여자사범대학교 교육학과 학사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덩팅충(鄧庭忠)
- 남편: 저우언라이(周恩來)
같이 보기[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
- 톈진 저우언라이 덩잉차오 기념관(天津周恩來鄧穎超紀念館)
전임 덩샤오핑 |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의장 1983년 6월 19일 - 1988년 4월 23일 | 후임 리셴녠 |
Deng Yingchao
Deng Yingchao | |
---|---|
4th Chairman of the Chinese People's Political Consultative Conference | |
In office 18 June 1983 – 8 April 1988 | |
Preceded by | Deng Xiaoping |
Succeeded by | Li Xiannian |
Second Secretary of the Central Commission for Discipline Inspection | |
In office 22 December 1978 – 11 September 1982 | |
Preceded by | Post established |
Succeeded by | Huang Kecheng |
Personal details | |
Born | 4 February 1904 Nanning, Guangxi, Qing Empire |
Died | 11 July 1992 (aged 88) Beijing, People's Republic of China |
Nationality | Chinese |
Political party | Chinese Communist Party |
Spouse | |
Relations | Sun Weishi (adopted daughter) |
Deng Yingchao (simplified Chinese: 邓颖超; traditional Chinese: 鄧穎超; pinyin: Dèng Yǐngchāo; 4 February 1904 – 11 July 1992) was the Chairwoman of the Chinese People's Political Consultative Conference from 1983 to 1988, a member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and the wife of the first Chinese Premier, Zhou Enlai.
Early life[edit]
With ancestry in Guangshan County (光山縣), Henan, she was born Deng Wenshu (鄧文淑) in Nanning, Guangxi. Growing up in a poverty-stricken family, her father died when she was at a young age and her single mother taught and practiced medicine. Deng studied at Beiyang Women's Normal School.[1] Deng participated as a team leader in the May Fourth Movement, where she met Zhou Enlai in 1919. They married on 8 August 1925 in Guangzhou. Deng joined the Communist Youth League of China (CYL) in 1924 and became a member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CCP) in 1925.[2] After the White Terror massacres in 1927, Deng worked underground in Shanghai for five years.
Chinese Civil War[edit]
Deng was one of the few women to survive the Long March.[3] However, during the Long March she developed pulmonary tuberculosis.[4]
After the victory of the Anti-Japanese War, Deng Yingchao, as the only female representative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attended the first Political Consultative Conference in Chongqing . In 1946, she was elected as a council member of the International Democratic Women's Federation. In March 1947, she has served as a member of the Rear Working Committee of the CCP Central Committee and acting secretary of the Women's Committee of the CCP Central Committee. In June 1949, she was elected as a member of the Preparatory Committee of the National Committee of the Chinese People's Political Consultative Conference and became a member of the drafting group of the " Common Program ". Later, entrusted by Mao Zedong and Zhou Enlai, she personally went to Shanghai and invited Soong Ching Ling to Beijing to participate in the preparation of the Central People's Govern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People's Republic of China[edit]
When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was founded, Deng Yingchao was elected to the National Women's first to the third vice chairman, honorary chairman of the Fourth; Chinese People's Conseil national children's vice chairman. Since the Eighth National Congress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Deng Yingchao has been a member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but has never held a government position. It was not until the death of her husband Zhou Enlai in 1976 that she returned to the political arena of the Communist Party. In December of that year, at the third meeting of the Standing Committee of the Fourth National People's Congress, she was added as the vice chairman of the Standing Committee of the National People's Congress.
In March 1978, after being re-elected as the vice chairman of the Standing Committee of the Fifth National People's Congress, Deng Yingchao served as the second secretary of the newly restored CCP Central Commission for Disciplinary Inspection at the Third Plenary Session of the Eleventh Central Committee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that year. Co-opted as a member of the Political Bureau of the Central Committee.
Soon thereafter, Deng Yingchao used her early contacts and contacts with the Kuomintang, as well as her network and reputation in the United Front work, to fully take charge of the work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in Taiwan, and concurrently served as the leader of the newly established " Leading Group of the Central Committee for Taiwan Work ". In 1982, she served as Honorary Chairwoman of the Chinese People's Association for Friendship with Foreign Countries. From June 1983 to March 1988, she served as Chairwoman of the National Committee of the Chinese People's Political Consultative Conference.
In September 1985, Deng Yingchao voluntarily applied for resignation as a member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and in April 1988, after the expiration of the term of the chairman of the National Committee of the Chinese People's Political Consultative Conference, she resigned and recuperated.[5]
In 1987, she served as Honorary Chairwoman of China Population Welfare Foundation. On the same year, when party hard-liners ousted the party's General Secretary, Hu Yaobang, in a campaign against "bourgeois liberalism," it published a 25-year-old speech by Deng. In June 1989, during the Tiananmen Square protests, she supported the leadership's decision to violently suppress the protests.[6]
In October 1990, she resigned as honorary president of the Chinese Nursing Association, due to poor health. In 1991 she served as Honorary Chairwoman of China Society for People's Friendships Studies.
Personal life[edit]
Deng and Zhou had no children of their own. However, they adopted several orphans of "revolutionary martyrs", including Li Peng, who later became the Premier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She promoted the abolition of foot binding imposed on women.
Death and legacy[edit]
After retiring, Deng Yingchao's body gradually weakened; especially in 1990, she was admitted to the hospital five times because of colds and pneumonia; in August 1991, she began to suffer from renal failure and became unconscious for several times.[7]
At 6:55 am on July 11, 1992, Deng Yingchao died in Beijing Hospital at the age of 88. After cremation, her ashes were scattered in the same place where Zhou Enlai's ashes had been scattered. The official Party evaluation of her is "a great proletarian revolutionary, politician, famous social activist, staunch Marxist, outstanding leader of the party and the country, pioneer of the Chinese women's movement, and highly respected chairman of the Sixth CPPCC"[8]。
There is a memorial hall dedicated to her and her husband in Tianjin (天津周恩來鄧穎超紀念館).
References[edit]
- ^ Lv Bicheng: Newspaper Woman, Educator and Buddhist Archived 2015-05-23 at the Wayback Machine, Frank Zhao, 13 January 2014, Women of China, retrieved 11 April 2014
- ^ Mengjia, Yuan. "Reliving the Life Stories of Deng Yingchao and Premier Zhou". Women of China. All-China Women's Federation. Retrieved 4 August 2020.[dead link]
- ^ Long, Simon (12 July 1992). "Obituary: Deng Yingchao". The Independent. Retrieved 4 August 2020.
- ^ Snow, Edgar (1968). Red Star over China. New York: Grove Press. pp. 500–501. ISBN 978-0-8021-5093-6.
- ^ "邓颖超" [Deng Yingchao]. 新华网.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8-03-21.
- ^ "Deng Yingchao, a Party Leader And Widow of Zhou, Dies at 88". The New York Times. 12 July 1992. Retrieved August 6, 2020.
- ^ 赵炜. "邓颖超临终前说的最后俩字竟是"李鹏"".
- ^ "邓颖超同志光辉战斗的一生". 人民网.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0-04-28. Retrieved 2020-08-03.
External links[edit]
- Deng Yingchao: a painting and a b/w photo
- Exterior of the Memorial Hall